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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59화 (59/88)

59화

* * *

지완은 영원한 일등은 없다고 생각했다. 성인 이전에 당했던 일 탓도 있지만, 원래부터 사람의 감정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이 헌터 중의 최고라도 시간이 지나 늙게 되면 당연히 그 자리를 넘겨줘야 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생각과는 달리 갑자기 규격 외의 상대가 나타나 바로 빼앗아 갔다지만 뭐 상관없었다.

그래 봤자 그는 이제 시작하는 루키고, 지완은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길드의 주인이었다.

그가 협회를 선택한 이상 호진은 지완에게 어떤 의미도 주지 못했다. 적어도 호진이 길드를 세웠거나 다른 길드에 들어갔다면 모를까.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지완과는 달리는 선이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경쟁을 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호진을 보면 날을 세우게 되는 것은 지호 때문이었다. 호진을 향한 지호의 이해하기 힘든 호감이 그를 열받게 했다.

‘신지호는 원래 아무한테나 착하게 굴긴 하지.’

배 비서가 지완의 눈치를 보면서 지호에게 철벽을 쳐도 형이라 부르며 따를 정도였으니까.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지호는 지완에게만 선을 긋는 편이었다. 그를 좋아해 따라다니며 감시할 정도면서도 말이다.

‘내가 형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계속 안 된다고만 했지…….’

생각해 보면 그랬다. 옆집 사는 사람도 곧장 형이라고 부르고 그의 비서도 형이라고 부르는 와중에 제일 관심 있을 그에게만은 길드장님이라고 하면서 계속 선을 그었다.

‘괘씸해…….’

지완이 겨우겨우 형이라는 호칭을 얻어 낸 것과 달리 호진은 쉽게 형이라 불릴 생각을 하니 너무 배가 아프고 괘씸했다. 물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지완의 머릿속에서는 호진과 지호가 형 동생 하며 하하 호호 그를 빼고 잘 지내고 있었다.

‘연호진……. 이름부터 열받고 짜증 나.’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다, 하고 생각하던 지완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착한 사람이 되자. 착한 사람이…….’

누군가를 시기하고 치워 버리고 싶어 하는 것은 착한 사람이 떠올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완은 작정하고 누굴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는 나쁜 놈은 아니었지만, 딱히 선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호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니 어쩌겠는가.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 ‘구 오빠’라는 단어가 생각이나 다시 짜증이 났다. 대체 그런 짜증 나는 단어는 누가 생각해 낸 것인지…….

지완은 그렇게 성을 내다가 자신만 궁금하다는 지호의 말이 떠올라 순식간에 기분이 풀렸다.

그렇게 성을 내다가 마음이 풀려 미소 짓기를 여러 번 반복하는 와중 도문그룹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할 말이 있으니 나오라는 소리였다. 회장 혼자 있을지 아니면 저번처럼 친척들이 있을지 몰라 지호는 데려가지 않기로 했다.

약속 장소인 한정식집으로 들어가자 예상외로 회장 혼자 자리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왔습니다.”

“음. 왔니?”

앉아서 지완의 인사를 받은 회장은 손을 뻗어 맞은편을 가리켰다. 지완이 그곳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상이 가득 차고 더 이상 서빙이 되지 않을 무렵 회장이 입을 열었다.

“요새는 어떠니?”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잠시 고뇌하던 지완은 무난하게 대답했다.

“조금 바쁘긴 하지만 평범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냐?”

회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가 잘 지내고 있어서 기뻐하는 것 같진 않아 지완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곧 회장이 용건을 꺼냈다.

“성윤이 알지?”

“성윤……. 회장님의 여동생이신, 고모할머니 말씀하시는 거죠?”

“응. 그래. 맞아. 걔의 조카 아들이 길드 운영에 관심이 있다고 하더구나.”

“예.”

“본인은 헌터가 아니라지만 미래에 헌터 아내를 들이고 운영은 자신이 할 생각인지 뭔지……. 아무튼 이쪽 일을 배워 보고 싶다는구나.”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뻔했다. 이쪽 일을 배우려면 일반 사무원으로 들어가 봤자 소용이 없었고, 딱 타이밍 좋게 그를 보좌할 수 있는 자리가 비어 있었으니 상대가 원하는 자리는 하나였다.

‘확실히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

지호가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지만 이런 것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어서 힘에 부쳐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하도 당한 것이 많아서 중요한 위치에 모르는 사람을 넣는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거절하기도 애매해.’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면 ‘믿기 힘들어 안 되겠습니다’며 거절하겠지만 지완의 고모할머니가 중간에 낀 격이었다.

믿기 힘들다 하면 가족을 못 믿냐며 화낼 회장의 모습이 훤했기에 지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마침 자리가 비어 있긴 한데, 그렇다고 능력 없는 사람을 뽑기엔 중요한 자리라…… 이력서를 한번 보고 싶습니다.”

만약 얼토당토않은 스펙이 적혀 있으면 이걸 이유로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지만 지완의 말에 회장은 웃어 보였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도 얘가 한국대 출신이라서 똘똘하다니까, 괜찮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지완은 스펙도 거를 타선이 없었나 싶어 쓴웃음을 흘렸다. 용건은 그게 다라 대충 밥을 먹고 회장과 헤어진 지완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한데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딜 간 거지?’

배 비서의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할 지호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싶어 앉아 있는데 한참 뒤 지호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품에 무언가를 한가득 안은 채였다.

“앗, 오셨어요?”

“그게 뭐야?”

지완은 눈썹을 까딱이며 지호에게 물었다. 지호는 종종 걸어와 배 비서의 책상 위에 제 품에 안긴 것들을 우수수 쏟았다.

“아…… 간식이요.”

“간식? 사 온 거야?”

“아뇨. 아래층에 들려서 서류 건네드렸는데 거기 누나들이 줬어요.”

……누나. 이제는 형으로도 모자라 누나까지 나타났다. 못마땅함에 눈썹이 휙 올라가는 지완을 봤는지 모르는지, 지호는 포장 하나를 까서 냠 하고 먹었다.

‘누나들’이라…….’

그러고 보면 간식 종류가 참 다양했다. 빵으로 된 것도 있었고 과자로 된 것, 그리고 사탕이나 전병 같은 것도 보였다. 이제는 그를 두고 아래층 사무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는 듯했다.

어째서 자꾸 지호에게 사람이 꼬이는 걸까?

지호는 빈말로도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는 외모였지만, 뜯어 보면 오밀조밀한 것이 귀여운 데다 근심 없는 해맑은 표정 때문에 호감을 사기 쉬웠다.

생김새도 그런데 하는 짓도 낯가림이 없어 누구에게나 쉽게 말을 붙였다. 그러니 지완에게도 그렇게 쉽게 다가온 게 아닌가.

지완은 속이 탔다. 지호의 인간관계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아무도 지호를 몰랐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아무도 모른 채 오로지 지완만 눈에 담고 지완만 생각하는 지호를 떠올리면 배 안쪽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런 음습한 마음은 착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매번 생각만 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호의 세상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그가 삼켜 버린 마음이 요동쳤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쟤는 너를 좋아해서 따라다닐 정도잖아.’

‘아무것도 모를 때 한꺼번에 삼켜서 손에 넣어 버려.’

‘아니면 착한 척 굴다가…… 빼앗기고 싶어?’

속에서 들려오는 말에 지완은 이를 악물었다. 빼앗기고 싶냐니, 누구에게? 예전에는 그 상대가 막연하게 떠올랐다면 요새는 또렷하게 보였다.

연호진. 협회 회의에서 만났을 때부터 지완은 이 사람과는 정말 안맞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관심 가지지 않던 그 얼굴이 지호를 향할 때만큼은 생기가 돌던 것을 생각하니 속에서 살심이 뭉글뭉글 끓어올랐다.

‘빼앗기기 전에 가져야 해.’

내리깐 지완의 눈에 까만빛이 일렁거릴 무렵 그의 입가에 무언가 불쑥 내밀어졌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눈에서 일렁거리던 빛은 사라졌고 그래서 아무도 그 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드세요, 형님. 이거 맛있네요.”

바나나 모양의 빵을 지호가 불쑥 내밀었다. 부드러운 빵의 표면이 입술에 툭 닿자 지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입 안으로 쑥 들어오는 빵을 깨물자 빵 표면이 갈라지며 안에 들어 있던 바나나 크림의 향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지완은 언제 성을 냈냐는 듯이 묵묵히 빵을 씹고 또 씹었다.

“……맛있네.”

“그렇죠?”

제 말이 맞지 않냐며 배시시 웃어 보이는 지호를 보자 답답했던 속이 풀리며 픽 웃음이 나왔다.

남은 빵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는데 궁금해진 그가 물었다.

“너. 연호진이 여기 있어도 과자를 줄 거야?”

“제가요? 왜요?”

왜 연호진에게 과자를 줘야 되냐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지호가 자신을 바라보자 지완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럼 배 비서는?”

“비서 형은…… 주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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