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배 비서에게는 주겠다는 말에는 얼굴이 찌푸려졌다. 지완이 배 비서와 동급이라는 소리로 들려서였다.
“나는 안 줄 거야.”
“예…….”
“배 비서가 제발 달라고 애원해도 안 줄 거야.”
오로지 지호에게만 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준다고 해도 자신은…….
그 말은 굳이 안 하고 삼켜 버린 지완에게 지호가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애원하면 그냥 좀 줘요.”
치사하네, 하고 입을 삐죽이면서 지호는 지완을 살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그냥 착각이었나?
‘……마기도 가만히 있고.’
역시 착각이었나? 하고 지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넘겼다.
* * *
지호가 의심을 착각이라 치부하고 넘기기 며칠 전부터 마기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호의 힘이 두려워 계속 돌덩이처럼 굳어있었지만 초반처럼 두 사람이 접촉하지 않자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크게 움직였다가는 지호에게 들켜 정화당할 테니 마기는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마기는 부정적인 것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것이라 부정적인 기운과 친했다. 가령 살의나 질투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지완은 감정 기복이 적은 사람이었다. 가진 것도 많아 크게 욕심이 없었으며, 유일하게 욕심내는 두 가지가 지호와 도문그룹이었다.
그러나 둘 다 지완의 손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마기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완의 감정이 크게 요동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호진이 등장한 것이다. 처음에 지완은 호진에 대해 아무 생각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협회 회의에서 한 번 부딪친 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기는 제 몸을 조그맣게 떼어 뭉쳐선 그걸 지완의 머리와 가슴에 하나씩 심었다.
처음에는 감정의 증폭이었다. 호진을 향한 견제와 질투, 시기 등을 계속 증폭시켰다. 지완은 자연스럽게 호진을 싫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호진을 향한 지완의 미움이 어느 정도 커졌을 무렵에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처럼 지완에게 속삭였다.
내용의 대부분은 호진과 지호를 엮어 이간질하는 것이었다.
호진이 지호를 뺏어 갈 거라느니, 지호가 더 이상 지완을 궁금해하지 않을 거라느니 그런 것들 말이다.
‘저 눈빛 봤어? 어디서 많이 본 눈빛 같지 않아?’
어느 날은 꿈으로 끌고 가서 헌터 협회의 일을 계속해서 보여 주었다. 지호에게 이상한 집착을 보이는 호진과 그 집착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지호를 보여 주며 지완을 제삼자로 만들어 버렸다.
마치 너의 위치는 여기라는 듯이 말이다. 서로 호감 있는 사람 둘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완벽한 타인으로.
“헉……! 허억…….”
마기가 보여 준 꿈에서 깬 지완은 머리를 흔들었다. 꿈은 원래 깨면 흐릿해지는 게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더욱 불쾌감을 주었다.
그렇게 세뇌하듯 계속 불쾌한 말들과 장면들을 보여 주는 마기 때문에 지완의 마음엔 앙금이 쌓였다.
그러나 자존심에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지완 때문에 지호는 그의 안에서 마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늘은…… 외부 일정이 있어요. BF 금속 쪽과 미팅이요.”
“…….”
“형님?”
지호는 멍하니 있는 지완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었다. 눈앞에서 무언가 움직이자 그제야 지완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런 지완의 이상한 모습에 지호의 얼굴에 걱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어디 몸이 안 좋아요?”
“……아니. 괜찮아.”
“정말요?”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지호가 거듭 물어봤지만 지완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계속 물을 수도 없어 없었다.
“2시에 보기로 했으니 30분 뒤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아직도 여운이 남는지 지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지호의 시선이 그에게서 떨어지질 않았지만 지완은 눈치채지 못했다.
30분 뒤에 두 사람은 길드 건물을 나섰다. 지호와 지완이 탄 차의 뒤로 차량 두 대가 졸졸 따라왔다.
지완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경호원들이었다. 만약 지완이 당할 정도의 습격이 벌어진다면 경호원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괜한 피해가 추가될까 싶어 고용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외부에 연락을 해 지완의 상태를 알리고 도움 줄 사람을 불러와야 한다는 지호의 말에 지완이 새로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말한 대로 그들의 일은 지완을 따라다니며 경호하는 것이 아니고, 지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재빠르게 헌터 협회 등에 알리는 것이었다.
경호 차량 두 대를 꼬리에 달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지완이 지호에게 말했다.
“나 혼자 올라갔다 올 테니까 너는 근처 카페에서 기다려.”
“엥? 왜요?”
“그냥…… 그러고 있어.”
왠지 지호를 데리고 가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고작 그런 것이라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기에 난감해하고 있자, 지완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기 저 카페 안에 있을게요.”
맞은편 건물에 있는 카페를 가리키며 지호가 그곳으로 향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지호를 확인한 지완은 경호원들에게도 따라오지 말고 차에서 대기하라는 말을 남기곤 BF 금속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와 마주쳤다.
‘이것 때문에 신지호를 데리고 오기 싫었던 건가?’
지완과 마찬가지로 그를 보고 몸을 움칫하는 상대는 바로 호진이었다. 호진은 지완을 보고 도르르 눈을 굴렸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모습이라 지완은 속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봐 봐, 저것이 네 것을 빼앗으려고 하잖아.’
때맞춰 속삭이는 마기의 목소리에 지완은 살기를 참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지호를 찾던 호진은 갑자기 터져 나오는 살기에 깜짝 놀랐다.
헌터 산업과 관련된 회사지만 사원들은 전부 일반인이었다. 지완의 살기가 대부분 호진을 향하지만 삐끗하면 애먼 사람이 심장 마비로 죽을 수 있었다.
호진은 제 기운을 펼쳐 자신과 지완의 주위로 펼쳐 가뒀다.
“도문 길드장님, 그만…….”
지완을 막기 위해 그의 팔을 붙잡았던 호진은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에 말하던 것을 멈췄다. 눈이 커지는 호진을 보며 지완은 그의 팔을 거세게 뿌리치고 살기를 거뒀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위협하게 된 것은 미안했지만 호진에게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살기를 거두자 호진도 기운을 거뒀다. 얼굴이 굳은 지완이 그대로 호진을 지나쳐 가려고 할 때였다.
“신지호 씨는 어디 있습니까?”
호진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그의 심기를 다시 거슬렀다. 머릿속에서 그것 보라는 듯이 킬킬킬 웃는 소리가 들려와 지완은 인상을 썼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게요?”
열이 받은 대로 날 서게 대답하고 돌아서는 지완을 호진이 다시 붙잡았다. 약속이고 뭐고 짜증이 나 참을 수가 없었다. 화를 내려는 지완에게 진지한 얼굴의 호진이 말했다.
“지금 당장 신지호 씨한테 가세요.”
“뭐?”
“당신에겐 지금 신지호 씨가 필요합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지완에게 지호가 필요하다는 말은 마음에 들었으나 호진의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자신을 붙잡은 호진의 손을 내치면서 그는 차갑게 말했다.
“그만하시죠. 약속이 있어 이만 가 봐야 합니다.”
다시 한번 그를 설득하려던 호진이었지만, 지완이 더 이상 듣지 않으려는 듯 몸을 돌려 버려 결국 호진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지완이 사라지고 나서도 호진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 안 건가?”
지완을 붙잡았을 때 분명 제 손끝에 느껴진 건 다름 아닌……. 호진은 불안한 얼굴로 말을 삼켰다.
협회의 일로 방문한 거라 일을 마친 지금은 협회로 귀환해야 했지만, 불안함에 그냥 갈 수가 없었다.
호진은 바로 건물 바깥으로 나가 주위를 돌아다녔다. 지완이 혼자 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근처에 있을 지호를 찾아다닌 것이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맞은편 건물 카페에 있는 지호를 발견했다. 가까이 있는데 괜히 멀리서부터 찾느라 조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카페 안으로 들어간 호진은 생각에 잠겨 커피를 쭙쭙거리고 있는 지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느껴지는 인기척에 지완이 왔나 싶어 고개를 든 지호는 눈앞에 보이는 호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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