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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63화 (63/88)

63화

* * *

도지완이 이상한 짓을 한 덕분에 식구가 늘었다. 콩설이라는 강아지였다. 품종은 포메라니안으로 아주 똥꼬발랄한 남자아이였다.

보고만 있어도 애정이 샘솟는 존재에 나는 간이고 쓸개고 콩설이에게 바칠 준비가 되었지만, 콩설이는 이상하게도 나보다 도지완을 더 좋아했다.

“콩설아, 움쪽쪽!”

“왕!”

코에 입 맞추며 잘 놀고 있다가도 도지완이 살짝이라도 움직이면 쪼르르 달려가 그의 곁을 졸졸 따라다녔다.

콩설이의 밥부터 화장실까지, 돌보는 건 나인데도 눈빛 하나 주지 않는 도지완에게 매달리는 콩설이를 보니 나는 조금 억울해졌다.

“왜 그래?”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도지완의 곁에서 꼬리를 살랑살랑하는 콩설이를 보고 있으니 도지완이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눈치 빠른 도지완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건지 픽 웃었다.

그러고는 나 보라는 듯이 콩설이에게 손을 뻗었고, 콩설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랑 누워 배를 보이면서 헐떡였다.

자연스럽게 취하는 복종의 포즈에 나는 정말이지 부러워 죽을 것 같았다.

“왜……. 어째서…….”

나는 마치 왕비를 투기하는 후궁처럼 도지완을 질투했다. 저 남자보다 내가 더 너를 사랑하고 아껴 주건만……!

내 표정을 본 도지완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제 무리의 알파라고 생각하나 보지.”

확실히 그 말이 맞는 듯했다. 콩설이는 정말 도지완에게 충성스러웠다. 도지완이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그가 움직일 때마다 졸졸 따라다녔으니말이다.

첫날 도지완을 두려워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완전…… 대우가 후궁도 아니고 무수리네 무수리야.”

에효, 나는 콩설이의 뒤를 졸졸 쫓아 시중을 들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나를 픽 비웃던 도지완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다.

“내일부터 배 비서 일을 대리해 줄 사람이 올 거야.”

“예? 그럼 저는요?”

멍청하게 되물었더니 도지완은 덤덤하게 말했다.

“잘리는 거지.”

콰광! 정수리 위로 벼락이 내려쳤다. 입을 쩍 벌리고 황당해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열이 확 올라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 자식이 나를 잘라?’

갑자기 해고된 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무수히 복수할 거라 했음에도 또다시 나를 해고해 놓고 태연한 그의 태도가 문제였던 걸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에게 도지완이 말했다.

“비서 일만 대타에게 맡기고 따라다니는 건 계속해.”

“넹.”

그의 말에 분노가 싹 가라앉았다. 안색이 단숨에 정상이 되 어버리는 나를 보며 도지완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도 풀렸겠다 새로 오는 사람이 궁금해진 내가 물었지만 도지완의 대답은 어이없었다.

“나도 몰라.”

“예?”

“회장님의 여동생분의 조카 아들이라고 하던데…….”

그러면서 그 사람의 이력서 같은 것을 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이걸 봐도 되나? 조금 당황했지만 보여선 안 될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보여 주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펼쳐보았다.

상대의 이름은 윤채우. 24살로 나보다는 나이가 많고 도지완보다는 적었다. 이 사람도 비서 형처럼 자격증이 엄청 많았다.

나이가 어린데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라이벌의 등장에 위기의식을 느낀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음 날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길드에 출근하고 얼마 있지 않아 누군가가 도지완의 사무실로 올라왔다. 어제 도지완에게 새로 누군가가 온다고 들었기에 두 번 생각해 보지 않아도 그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윤채우라고 합니다.”

이력서에는 사진이 붙어 있지 않았기에 생김새는 이제야 알았는데, 윤채우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미소가 상냥해 보였고 오른쪽 뺨에 난 점도 애교 있어 보였다. 더불어 도지완의 곁에 있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전 신지호라고 해요.”

윤채우는 내 인사에 말없이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도지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낯을 가리는 건지 살짝 난처한 얼굴로 도지완에게 조심스럽게 붙더니 곤란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별거 아닌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거슬렸다. 그러나 나만 그렇게 여기는지 도지완은 평범하게 대꾸했다.

“이쪽은 절 경호해 주는 사람이라 윤채우 씨 업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그런가요?”

냉정한 도지완의 말에 무안했는지 얼굴이 살짝 벌게지는 윤채우의 모습은 깨소금 맛이었다. 즐거움에 입술이 삐죽삐죽 움직이려고 할 때 윤채우가 나를 홱 보기에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들켰는지 윤채우의 눈초리가 조금 날카로워진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의 멘탈은 강했다.

“그리고, 저 너무 어려워하실 필요 없어요. 길드장님과 저는, 친척이나 다름없잖아요.”

방금 선을 그은 것을 봤음에도 윤채우는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말했다. 은근한 애교가 담긴 그 행동에도 도지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친척이라…….”

오히려 눈빛이 더 서늘하게 변했다.

“윤채우 씨와 저는 친척이 아닙니다.”

“……네?”

“남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윤채우 씨와 제 촌수는…….”

딱 사돈의 팔촌. 정말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윤채우와 도지완은 혈연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둘 사이를 잇고 있는 것은 도지완의 고모할머니뿐이었고, 그마저도 고모할머니 남편 쪽 조카의 자식이기에 혈연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딱 잘라 버리는 도지완의 말에 윤채우는 얼굴이 더 벌겋게 변했다.

“저는…… 그냥…… 동경하는 길드장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미움받았을까 두려운지 몸을 파르르 떠는 것이 달래 주고 싶은 맘이 들 정도였지만, 도지완은 여전히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불쾌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아는 사람에게 소개받고 온 자리라고 해도 공과 사를 지켰으면 좋겠군요.”

“네…….”

잔뜩 기죽은 윤채우에게 도지완이 비서 형의 책상을 가리켰다.

“앞으로 저 책상에서 일하시면 됩니다. 서랍 안의 다이어리에 스케줄표랑 숙지할 사항들을 해당 업무를 맡고 있던 전임자가 적어 놓았으니 한번 보시고요.”

“네.”

“오늘은 별일 없으니 업무 분위기만 파악하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윤채우는 얌전히 앉아서 다이어리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우쭐한 얼굴로 도지완의 옆자리에 앉아 깨소금 맛을 느꼈다.

‘어딜 감히 그렇게 쉽게 친해지려고.’

내가 이 선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굴렀는데 이제 막 안면을 튼 사람 주제에 친한 척을 한단 말인가. 그러다 도지완에게 대차게 까인 모습을 보니 아주 꿀맛이었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저 모습이 내 전 모습이라는 거잖아?’

비굴하게 굴었던 과거를 떠올리면 딱히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 * *

‘따분해.’

채우는 배 비서가 써 놓은 다이어리를 읽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예언에 나온 자신의 신과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말에 냉큼 지원했는데…….

‘이상한 게 옆에 달려 있잖아?’

채우의 눈이 도지완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호에게 향했다. 곁에 둔다는 건 알았지만 저렇게 가까이 둘 줄은 몰랐다.

저 자리는 자신의 자리였어야 했는데…… 질투를 가득 담은 채 노려보던 채우였지만, 지호가 자신을 돌아보자 바로 다이어리 위로 시선을 돌렸다.

하, 엄청 쉬울 줄 알고 자원했는데 생각보다 도지완이 많이 까탈스러웠다.

‘이게 다 1사도 때문이야.’

어릴 때부터 그를 괴롭혀 세상을 미워하도록 해야 한다는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일이 어려워진 게 틀림없었다.

애초에 어렸을 적부터 붙어 다니며 친하게 지냈으면 이러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니 아쉬움만 남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지완을 볼 때면 가슴이 떨렸다. 예언의 사람이라고 하기에 얼마나 대단한가 싶었는데 정말로 대단했다.

‘저렇게 깊은 그릇이라니…….’

마기를 받아들이는 것도 재능이었다. 채우의 몸도 마기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큰 편이었으나, 지완과 비교하자면 종지나 다름없었다.

이런 사람이어야 마왕의 몸으로 적합한 거구나, 하고 감탄하는 한편 화가 나기도 했다.

‘분명 9사도는 제 마기를 반 이상 쏟아부었다고 했는데…….’

채우가 몰래 확인해 본 결과 지완의 몸에 있는 마기는 한 줌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마기가 제대로 그의 몸에 있었으면 지완은 채우를 마기 때문이라도 각별하게 여길 터였다.

마기를 가진 사람은 동일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끌렸으니까.

게다가 곱상한 얼굴과 눈치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채우였으니 당연히 이 임무는 그에게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제 외모까지 더하면 부동심의 승려라도 유혹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마기가 저런 식이면…… 거의 효과도 없을 테니 나를 거부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지완의 몸에는 마기 외에도 이능력이라고 하는 다른 힘이 있었다. 그의 등급이 S급이었으니 이능의 힘도 굉장할 터였다. 아무래도 마기가 저 모양인 것은 그 이능이 9사도가 불어넣은 마기를 튕겨 내서인 게 아닌가 싶었다.

‘짜증 나네……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9사도라니…….’

못마땅함에 입술이 삐죽 나와 채우는 고개를 숙여 제 표정을 감췄다. 그런 중요한 일을 9사도에게 명령한 1사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척 열이 받았지만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9사도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그가 이렇게 지완의 곁에 투입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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