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잘 하면 신께서 강림하셨을 때 내가 그분의 바로 옆에 설 수도 있어.’
1사도가 아닌 그가. 강림하기 전까지 지완과 관계를 잘 쌓을 수 있다면 말이다.
9사도의 일이 있기 전, 사제나 교인과 달리 사도들은 무조건 지완의 곁에 다가가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이능력자 중에는 기운에 민감한 자들이 많았고, 혹시라도 높은 등급인 지완이 마기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다만 채우는 다른 사도들과 다르게 마기를 어느 정도 감출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지완의 곁에 설 수 있었다.
다이어리를 읽는 척하며 채우는 지완을 힐끗힐끗 곁눈질했다. 마기를 받아들이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겉모습도 정말 잘생겼다. 정말 완벽한 마왕의 그릇다웠다.
‘……남자와 하는 취미는 없지만, 저 얼굴 정도라면.’
구미가 당겼다. 수하로 옆에 서는 것도 좋지만, 반려로 옆에 서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채우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9사도의 말 때문이었다.
〈그분께서는 여자보다는 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채우는 9사도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제대로 눈이 달려 있었기에 9사도의 얼굴이나 매력은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유혹에 시큰둥해하면서 자꾸 어떤 웨이터에게만 신경을 썼다 하니 혹시나 싶었다.
그런 점도 있어 쉬울 줄 알았는데……. 지완의 곁에는 이상한 혹이 달려 있었다.
‘못생긴 게.’
채우는 속으로 지호를 욕했다. 두 사람의 미추를 따진다면야 채우보다는 지호의 외모가 모자라긴 했으나, 지호 단독으로는 그리 나쁜 얼굴도 아니었다.
하나 기묘하게도 지호를 보면 기분이 나빴다. 아마도 그가 채우가 생각하던 자리를 빼앗았다는 생각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채우는 한숨을 쉬었다.
‘어서 빨리 친해져서 마기를 조금씩 불어넣어야 하는데…….’
당장은 그게 힘들 테니 다른 방법을 써야만 했다.
채우는 짬을 내어 바깥에서 커피를 사 왔다. 지완의 취향은 배 비서의 다이어리에 적혀 있었기에 그가 거부할 위험은 적었다.
“음식이나 음료에 섞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채우는 중얼거리며 지완의 잔에 손끝을 올리고 제 마기를 쥐어짜 한 방울 떨어트렸다. 지금 당장은 이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흘린 마기가 완벽하게 커피 안으로 녹아드는 것을 보며 채우는 빙긋 웃었다. 여전히 그의 지배하에 있는 마기였기에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온 채우는 지완의 책상 위에 슬쩍 커피를 내려놓았다. 지금쯤 집중력이 떨어져 커피가 필요할 타이밍이었다.
“커피 드시면서 하세요.”
배시시 웃으면서 근처 카페의 테이크아웃 잔을 넘기는 채우를 지완이 바라보았다. 그 감정 없는 시선에도 채우는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그가 내민 잔을 받아 드는 지완을 보고 채우가 속으로 짙게 미소 지을 때 빨대에 입술을 대려던 지완이 갑자기 멈칫했다.
“……마실래?”
“어? 그렇지만…… 제가 마셔도 돼요?”
멍하니 보고 있던 지호의 시선을 느낀 지완이 마시려다가 그만둔 것이었다. 마셔도 되냐고 물어보는 것과는 달리 지호는 이미 손을 내밀고 커피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뒤였다.
‘안 돼!’
채우는 지호의 손에 제 것을 쥐여 주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밉상인 상대라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았지만, 마기가 담긴 커피를 애먼 놈에게 줄 수는 없었으니까.
“지호 씨는 이거 드세요!”
채우가 손에 커피를 쥐여 주자, 커피를 받으려 했던 지호도 넘기려 했던 지완도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곧 지완은 픽 웃으며 채우가 준 커피에 입을 대었다. 빨대를 따라 쭉 올라가는 커피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채우에게 지호가 히죽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별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게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미웠지만, 대꾸를 안 할 수도 없어서 억지로 답했다.
정말 하나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지호였다.
* * *
윤채우라는 사람이 새로 들어왔지만 나의 생활은 변한 것이 없었다.
아침엔 도지완과 출근해 일을 하다 돌아와선 콩설이와 놀았다. 우리가 출근할 때마다 콩설이는 도지완의 집을 지키는 것은 아니고, 고용한 펫시터와 내 월셋집에서 놀며 우리의 퇴근을 기다렸다.
“아유, 우리 콩설이. 형 기다렸어용?”
쪽쪽쪽, 코에 입 맞추고 있는데 내 품에서 바둥거리면서 도망친 콩설이는 이내 도지완에게 뛰어갔다.
제 몸에 손도 뻗지 않는 저 남자가 뭐가 좋다고 발 근처에 몸을 비비적거리더니 위풍당당하게 서서는 도지완과 함께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질투하고 있으니 옆에서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콩설이가 큰 형님을 많이 좋아하나 봐요.”
펫시터였다. 그는 나에게 콩설이의 하루 생활을 알려 주고선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회화를 위해서 슬슬 유치원에 보내도 될 것 같아요.”
“유치원이요?”
“네, 근처에 하나 있는데……. 저도 거기서 파견 나온 거라 계속 돌볼 수 있고요. 이때 사회화가 안 되면 같은 강아지들을 공격할 수 있어서요.”
그는 설명을 마치고는 한번 생각해 보시라고 하곤 돌아갔다.
역시 보내는 게 좋을까? 고민을 하면서 도지완의 집으로 들어가던 나는 깜짝 놀랐다. 도지완이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맨발로.
“왜 이렇게 늦게 와?”
초조한 얼굴의 도지완이 내가 열어 둔 현관 틈으로 바깥을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펫시터는 이미 갔고 복도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황당함을 담아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네가 너무 안 와서.”
“참내. 도망이라도 친 것 같이 구네요?”
어이가 없어서 툴툴대며 집 안으로 들어갔지만 도지완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왜 저러나 싶었지만 별일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거실로 나가려고 문을 딱 여는 순간 또 놀랐다.
“아잇, 깜짝이야!”
문 바로 앞에 도지완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오늘 왜 이러나 싶어서 황당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여전히 초조한 낯의 도지완이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예?”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그렇게 바깥에 오래 있었냐고.”
왜 이러나 하는 얼굴로 내가 바라보기만 하자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아 왔다.
“왜 말을 못 해? 어?”
“아, 아파요……!”
크게 아프진 않았으나 당황하여 그렇게 외쳤다. 내 외침에도 눈이 돌아 버린 도지완은 자꾸 무슨 대화를 했냐며 나를 다그치기만 했다. 당황한 와중에 대답을 안 해 주면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콩설이…… 유치원 보낼 때가 된 거 같다고…… 사회화가 지금 안 되면 같은 강아지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해서요…….”
“그게 다야?”
“……그 유치원에 지금 시터 형도 있어서 계속 콩설이 같이 돌볼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을 듣자 도지완은 이를 악물었다. 시터 형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나 황당할 따름이었다. 숫제 원수를 떠올리는 얼굴이었으니까.
“다른 곳으로 해.”
“에엥? 어딜요?”
“그 유치원인가 뭔가 하는 곳 말이야!”
“아니? 왜요?”
“바꾸라면 바꿔!”
그렇게 성질을 내고선 사라졌다. 도지완을 쫄쫄 쫓아다니는 콩설이도 그의 험악한 분위기에 놀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고는 나에게 다가와 안겼다.
이럴 때만 나를 찾는 콩설이의 모습에 조금 서운할 법도 했지만 도지완의 이상한 행동에 나도 놀랐기에 콩설이에게 뭐라 하지도 못했다.
“허……. 왜 저러는 거야?”
나는 콩설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다 밤이 되었다.
* * *
지완의 몸에 있는 마기는 지호에게 들킬까 조심히 활동했다. 지호에게 들킨다면 바로 소멸이었으니까.
그런데 채우가 오면서 조금 이야기가 달라졌다. 채우가 조심스럽게 지완의 몸에 넣은 마기로 몸집을 불리며 제 기운을 숨기는 법을 배운 것이다.
어떻게 하면 지호를 지완에게서 떨어트릴수 있을까 고민하던 마기는 지완에게 의심을 심기로 했다.
의심은 본인도 지치게 하지만 받는 사람도 지치게 한다. 그러니 지호가 지쳐 스스로 떠나게 할 생각으로 지호와 엮이는 모두를 의심하도록 세뇌하는 한편, 채우에게는 친근함을 느끼게 유도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채우와 지호가 같이 있을 때는 그가 지호에게 헛된 마음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불어넣지 않았으니, 지완에게만은 채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되게 만든 것뿐이니까.
자신감이 붙은 마기는 지호가 있어도 행동하기 시작했다. 왜 지호가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지완에게 의심을 불어넣었다.
〈지호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하하, 감사해요.〉
〈그래서 도지완이라는 사람에겐 너무 아까운 것 같아.〉
그의 머릿속에서 펫시터가 은근한 목소리로 지호에게 속삭였다. 그러더니 손을 붙잡고선 야릇하게 쓰다듬었다.
〈나한테 오는 건 어때요?〉
지완이 정신을 차렸을 땐 그는 이미 그는 현관 앞이었다. 멍하니 철문을 바라보다가 열렸을 때 보이는 지호를 보고 다짜고짜 몰아붙였다.
“……그 유치원에 지금 시터 형도 있어서 계속 콩설이 같이 돌볼 수 있을 거라고…….”
계속? 같이? 지완은 펫시터가 개를 미끼로 지호를 유혹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가 확 정신을 차렸다.
둘은 아무런 관계가 아닌데 자기 혼자만 이러는 것이 이상했다.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비밀리에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새로 온 비서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입원해 있는 배 비서에게 맡기긴 어려웠고, 이런 유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모르는 지호에게는 더더욱 맡기기 어려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에 든 지완은 더욱더 괴로워했다.
꿈에서는 지호가 얼굴 모를 상대와 함께 그에게서 도망쳤던 것이다. 그 상대는 펫시터가 되었다가, 연호진이 되기도 했다. 상대의 얼굴이 배 비서의 얼굴로 변했을 때쯤 지완은 참지 못했다.
〈나에게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꿈에서 결국 도망치는 지호를 붙잡았다. 상대는 도망친 건지 보이지 않았다. 지호가 겁먹은 얼굴로 올려다보는데 지완은 그저 웃음이 났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참을 필요 없잖아?〉
싫다고 우는 지호를 보며 지완은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점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댈 때쯤, 뺨에서 큰 충격이 느껴졌다.
“형님! 정신 차리세요!”
그렇게 지완이 충격에 눈을 떴을 때 공포에 젖어 거부하는 지호가 아닌,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지호가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그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지호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