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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68화 (68/88)

68화

* * *

그날 이후로도 우리의 생활에 큰 변화는 없었다.

물론 예전보다야 스킨십이 많아져 도지완 쪽에서 나를 끌어안거나 입을 맞추거나 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일은 없었다.

간혹 침대로 불러들여 끌어안고 잠드는 경우는 있었지만 말이다.

도지완이 하는 모든 일이 싫지 않았기에 나는 거부 없이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요새 도지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도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가끔씩 가슴이 따끔거릴 때가 잦아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드 사무실에 출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모두의 핸드폰이 삑삑 울리며 경보음을 냈다.

난데없이 온 재난 경보에 핸드폰을 확인한 우리 셋의 얼굴 표정은 똑같았다.

[헌터 협회] 11.15(목) 13시 신림동 주거 지역에 던전 발생 예정.

일반인들은 안내에 따라 대피하고 D급 이상 서울 내 헌터들은 협회로 모이시길 바랍니다.

나는 시계를 힐끗 곁눈질했다. 지금이 9시 조금 넘었으니까 4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참 촉박하다 생각할 때쯤 다들 입을 열었다.

“주거 지역 던전이라….”

“오랜만에 주거 지역에 뜨는 던전이네요. 집값이 장난 아니게 떨어지겠는데.”

윤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위험한 것이 제집 근처에 없길 바랐고, 그 위험한 것 중 손꼽히는 것이 던전이었으니까.

웬만해선 협회에서 주거 지역에 던전이 뜨지 않게 위치 조정의 이능이 있는 이능력자를 통해 외각으로 던전을 옮겼겠지만, 아무래도 이번엔 실패한 것 같았다.

“D급이면 저도 포함이네요.”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도지완이 인상을 썼다. 그의 힘이라면 나 하나 정도야 빼는 건 문제가 없겠지만 들켰을 때 문제가 커졌다.

물론 나야 도지완을 따라갈 생각이니 그가 힘을 쓸 이유가 없었지만 말이다.

사무실에 있는 셋 중 한 명은 남을 수밖에 없었다. 윤채우는 헌터가 아니었으니까.

그도 따라오고 싶어 했으나 일반인인 이상 던전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따라와 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아쉬운 얼굴로 우리를 배웅하는 게 다였다.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도지완이 1층을 눌렀다. 차는 지하 주차장에 있기에 왜인가 싶었지만 1층에 볼일이 있나 싶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데 1층에 도착한 도지완이 로비를 지나 출입구로 나가 버리자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차는요?”

“택시 타고 가는 게 나아.”

가볍게 대꾸한 도지완과 함께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헌터 협회로 갔다. 헌터 협회 건물이 눈에 보일 때쯤 나는 왜 도지완이 택시를 타고 가는 게 낫다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헌터 협회 근처로 차가 앞뒤로 꽉꽉 막혀 있었던 것이다.

“허이구야, 완전 도떼기시장이네.”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택시 기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도지완은 지폐를 내밀며 차 문을 열었다. 도로 한가운데였으나 주차장처럼 차들이 다 서 있는 바람에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의 뒤를 따라 내린 나는 도지완에게 물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내가 궁금증을 가지고 말하자 도지완이 픽 웃었다.

“저번에도 이랬으니까.”

“아하.”

“긴급 소집은 처음이야?”

“네. D급이니까요.”

내 말에 도지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주거 지역 내에 던전이 생성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원래의 신지호가 소집에 불린 적이 없었으니 나도 처음이었다.

‘D급은 웬만해선 소집을 안 하니까.’

대부분 이런 소집은 B급 이상부터 모아서 빠르게 처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D급이 소집되었다는 것은 이 던전이 규모가 꽤 클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예상했겠지만 이번 던전은 규모가 꽤 클 거야.”

그렇게 말한 도지완은 나에게 소집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협회에 도착하면 중소 길드를 제외한 대형 길드의 길드장을 불러 회의를 해. 길드장들이 공격대의 리더가 될 테니까. 그동안 아래에서는 길드별로, 혹은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등급별로 나눠 공격대를 짤 거야.”

도지완은 조금 머뭇거렸다.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등급별로 나뉜 미소속 공격대는 협회 헌터를 리더로 삼아 공격대를 짜겠지. 하지만…… 공격대로 갖춰지는 것은 C급까지. 아마 D급은 길드 상관없이 한데 묶여서 어시스트 혹은 잔몹 처리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그 말은 도지완과 따로 행동해야 한다는 소리였기에 깜짝 놀랐다. 내가 바라보자 도지완은 내 손을 살며시 잡고선 말했다.

“원한다면…… 협회장에게 요청해서 나랑 붙어 있도록 해 줄게.”

그렇게 말하는 도지완의 눈은 진지했다. 그 말에 조금 혹했으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했다시피, 그가 힘을 써서 내가 그런 특혜를 받게 되면 큰 후폭풍으로 올지도 몰랐다.

‘혹시라도 협회에 남아 있는 세진리교 교인들 중에 누군가가 외부에 알릴 수도 있고.’

헌터 협회를 좌지우지하는 큰손, 이런 걸로 몰아가 많은 이들이 난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랬다가 나중에 난처하게 될 수 있으니 그렇게 안 할래요.”

“……그래.”

도지완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지 입을 달싹거리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붙잡은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초조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마 나에게 제 생각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 참는 것 같았다.

그는 협회 건물 입구 근처로 와서 내 손을 놓았다. 슈퍼 카들로 북적이는 지상 주차장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로비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많았다.

“아! 도문 길드장님!”

협회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도지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아까 그가 설명했던 것처럼 위층 회의실에 가 달라는 직원의 말에 도지완은 나를 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어.”

“네.”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는 내가 기다린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도지완이 가고 나는 로비에 남아 멍하니 서 있었는데 협회 직원이 의자 위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외쳤다.

“대강당으로 가 주세요! 브리핑이 있습니다!”

저들끼리 웅성웅성 떠들던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들 사이에 끼고 싶진 않아서 어느 정도 다들 내려가 한산해졌을 때 움직였다.

2층으로 층이 나뉜 지하에 마련된 대강당이었는데, 모두 앞에서 브리핑을 듣고 싶었는지 2층은 한산했다.

남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옆자리에 누가 앉았다. 자리가 텅텅 비어 있음에도 옆자리에 앉기에 이상해서 쳐다보자 그가 씩 웃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옆에 앉아도 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앉았으면서 나에게 허락을 왜 받나 싶었다. 그는 곧 가슴을 쭉 폈다. 그의 가슴팍에선 금색으로 반짝이는 새 브로치가 반짝이고 있었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브로치로 가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아하, 들켰네요.”

뭐가 들켰다는 건지 몰랐지만 자부심 가득한 얼굴을 보니 뭐냐고 묻기 힘들었다. 난처해질 무렵 다행히 남자의 자랑이 시작되었다.

“금조 길드 이번 기수 길드원이 되었거든요. 원래라면 인턴 기간을 거쳐야 하지만, 길드장님께서 제 능력을 알아봐 주신 덕분에 인턴 자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길드원이 될수 있었죠.”

아, 네. 아하, 그러시군요. 나불나불하는 남자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쳐 주니 그는 광대가 솟아서 벙긋 웃었다.

끝나지 않는 자랑을 하던 남자가 말했다.

“입고 계신 거 아르마니죠? 제가 아르마니를 좋아해서 한눈에 알아보지 않았습니까. 캬, 이번 시즌 한정으로 열 벌만 풀렸다는, 장인이 재단부터 봉제, 전부 수제작으로 만든 거요.”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 열 벌 한정 품목이었단 말이야?

‘그냥 도지완이 준 대로 입은 건데…….’

이 옷이 그런 옷인지 몰라서 당황한 내가 선물받아서 잘 몰랐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캬, 소리를 내었다.

“캬, 그러시군요. 그런데 어디 소속이세요?”

“아…… 저는 소속이 없어요. 길드 가입을 안 했거든요.”

도문 길드에 취업하긴 했으나 길드원으로 한 게 아니고 도지완 개인 소속이었기에 나는 도문 길드원이 아니었다. 내 말에 남자는 깜짝 놀랐다.

“아…… 길드 가입을 안 하셨구나. 저기…… 실례지만 등급이……?”

“D등급입니다.”

내 말을 들은 남자의 얼굴에서 흥미로운 감정이 싹 사라졌다. 그가 “아, 네.” 단답으로 대답한 이후 우리 둘 사이에서는 대화가 사라졌다.

‘뭐, 상관없나…….’

남자의 태도에 상심할 법도 했지만 나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나에게 중요한 건 헌터 등급이 아니었으니까.

그 뒤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다고 말한 그는 브리핑이 시작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 금일 발생할 신림동 던전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대강당 무대 위에 오른 협회 직원이 이야기를 꺼내자 대강당 전체의 불이 꺼졌다. 그러나 곧 무대 위 스크린에 PPT가 떴다.

영화관에 온 듯 모두가 그 스크린에 주목하자 협회 직원의 말이 계속되었다.

“13시에 개방될 신림동 던전은…….”

내용은 별거 없었다. 주거 지역 사이에 나타날 예정이기에 옮기려고 했으나 그 규모가 큰 탓에 완전히 옮기진 못했고 주택 2, 3개 정도 희생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고 말이다.

“D급까지 소집할 정도로 예측된 던전의 규모가 큽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대략 경기도 정도의 크기입니다. 다만 던전의 등급이 높게 측정되지는 않았기에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측정된 등급은 C급입니다.”

“허어…….”

던전의 등급은 제일 강한 몬스터의 등급으로 책정이 된다. 최대 C급이면 S급이 나서지 않아도 A나 B 선에서 해결될 문제였다.

“다만 주거 지역에서 개방될 던전이기에 빠른 클리어와 빠른 클로즈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제집 옆에 던전이 있는걸 싫어하니까요.”

무리해서 헌터를 모은다 싶었더니 역시 내년에 있을 대선 때문인지 현 정부가 민심을 잃어 발목 잡히지 않으려고 협회에게 압박을 넣은 듯했다.

“공격대는, 길드에 소속되신 분은 길드장의 오더를 들으시면 되겠고 무소속이신 분들은 저희 쪽에서 임의로 나누겠습니다.”

그러면서 스크린의 모습이 바뀌었다.

무소속 A조 / B조 / C조 …….

이런 식으로 조의 이름표 아래 길쭉한 네모 칸이 있었다. 곧 그 칸 안에 이름이 빽빽이 적혔다.

“혹시라도 동명이인으로 헷갈릴까 봐 문자로도 어느 조에 속했는지 알려 드립니다.”

직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핸드폰 진동과 알림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다만 나나 몇몇 사람의 핸드폰은 조용했다.

“그리고 D급 분들의 경우엔 협회 직원들과 함께 서포트를 담당해 주었으면 합니다. 소집한 인원이 많은 탓에 직원들로만 서포트 하기엔 손이 부족해서요.”

직원의 말에 곳곳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껏 헌터가 되었는데 잡일이나 담당하냐는 비웃음 같았다.

작은 웃음이었지만 헌터들이 그 웃음을 놓칠 리가 없었고, 몇몇은 모멸감을 느꼈는지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남을 비웃어 봤자 이 대강당엔 S급은커녕 A급도 존재치 않는데 자기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남을 비웃는지,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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