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상이 한 번 망했다-70화 (70/88)

70화

* * *

시간이 좀 더 흐르자 각각의 팻말 앞에 협회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선 명수를 셌다. 그의 가슴팍에도 이름과 Δ(델타) 표시가 적인 이름표가 있었다.

그는 명수를 세고는 맞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팀도 다 모인 듯하자 누군가가 맨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능이 담겨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마이크가 없어도 뒤까지 제대로 들릴 것 같았다.

“서포트 팀은 전부 모인 것 같아서 간단한 브리핑하겠습니다!”

의례적인 박수가 한차례 작게 울리고 조용해지자, 직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포트 팀은 각 열 다섯개의 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헷갈리지 않게 팀 순서대로 그리스 문자 알파 베타 감마…….”

지금 앞에 나서서 말하는 김새윤은 알파 팀의 팀장이었고, 우리 델타 팀의 팀장 이름은 장원영이었다.

“각 팀의 인원은 서른두 명입니다. 어시스트 팀으로는 많은 인원이지만, 이번 던전은 빠르게 정리할 필요가 있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각 서포트 팀이 어시스트할 공격대는 정해져 있었다. 알파는 A공격대, 베타는 B공격대 등, 알파 팀부터 우리 팀을 포함한 엡실론 팀까지는 협회와 무소속 헌터들이 있는 공격대로 매칭이 되었다.

‘안됐네, 도지완.’

나를 어떻게든 자기 옆에 붙여 놓겠다고 했는데, 협회 쪽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팀을 정해 줘 버렸으니 그의 뜻대로 되기는 힘들 터였다.

이상하게도 이 상황에 곤란해할 그를 생각하니 그냥 웃음이 나왔다.

‘나 너무 사악해진 것 같아.’

남의 곤란에 웃다니…….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웃겼다. 매사 자신만만한 도지완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아 곤란해하는 표정은 쉽게 보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것이 자신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뿌듯함이 차올랐다.

대강의 브리핑이 끝나자 델타 팀의 팀장인 장원영이 앞에 있는 팻말을 뽑아 들었다.

“자, 설명은 다 끝났으니 이제 저희 천막으로 이동합시다!”

따라오라며 손짓하는 그의 모습에 우리는 서둘러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인원이 많은 탓에 천막도 여러 개였는데 장원영은 쭉쭉쭉 앞으로 나가더니 어느 천막 앞에 콱! 팻말을 꽂았다.

“여기가 우리 천막입니다. 앞으로 여기서 생활하시는 거예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의 인도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간이침대와 작은 캐비닛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캐비닛에 이름이 적혀 있으니 그 침대를 쓰시면 됩니다.”

침대를 헷갈릴 일은 없었다. 짝이 되는 침대와 캐비닛은 붙어 있었고, 짝이 되는 것이 아니면 떨어져 있었으니까. 나는 내 이름이 적힌 캐비닛과 붙어 있는 침대 위에 앉았다.

간이라 쿠션도 별로였고 편해 보이진 않았지만 일단 땅바닥보다는 좋아 보였다. 어시스트 일을 하면서 땅바닥에 침낭 깔고 자기도 했기에 간이침대 정도면 선녀나 다름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우리는 D공격대와 함께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D공격대가 해치운 괴물 사체를 베이스캠프까지 옮기는 것.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힘을 써야 하는 일이라 힘들 거예요. 하지만 빠르게 클로즈해야 하는 던전이라 사체를 계속 놔둘 수는 없지요. 그것을 빠르게 바깥으로 내보내야 여러분에게 나눠 줄 수있는 돈이 커집니다!”

“오오!”

“와!”

장원영의 말투가 재미있는 데다 돈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나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고 있을 때 장원영의 말은 계속되었다.

“뭐…… 베이스캠프까지 끌고 오면 밖으로 나르는 건 협회 직원들이 할 겁니다. 음…… 또 뭐 말씀드릴 게 있을까요? 아!”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손뼉을 짝 쳤다. 그러고는 음흉하게 실실 웃으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저희와 함께할 D공격대 공격 대장이 누군지 아시나요?”

“몰라요!”

“보시면 정말 깜짝 놀랄걸요?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연예인이에요?”

“아뇨! 그런데 연예인보다 훨씬 유명한 사람이에요!”

그 말에 다들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알아챈 듯이 입을 쩍 벌렸다. 나도 그가 누구인지 감을 잡았다. 협회 헌터 중 유명한 사람은 손에 꼽혔으니 말이다. 자주 얼굴을 보이는 협회장이 아닌 이상 상대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젖혀 둔 천막 입구 너머로 시선을 두던 장원영의 얼굴이 화색이 되더니 천막 입구로 달려가 외쳤다.

“연호진 씨! 잠시만 여기 와 주세요!”

“헉!”

“진짜 연호진?”

장원영이 말한 이름에 천막 안이 술렁였다. 모두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천막 입구를 바라보자, 그 안으로 연호진이 쑥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허어어어억! 진짜 연호진이야!”

“잘생겼다!”

“사랑해요!”

모두가 그의 실물에 꺅꺅거리며 시선 한 번 받아 보려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관심이 익숙하지 않은 건지 연호진은 약간 수줍은 얼굴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앞으로 함께할 사람들이니 인사 한 번 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연호진입니다. 던전 클리어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아악! 형! 결혼해 줘!”

연호진을 향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있는 D급과 SS급인 연호진의 격차는 정말로 대단했다.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질투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선망하고 따라 하고 싶어 했지.

결혼해 달라고 장난스럽게 외치는 말에도 고지식하게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하는 모습에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사람들은 선망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에 열광하는 법이었다.

인사를 마친 연호진은 나가면서 마지막에 나를 힐끗 곁눈질하고 떠났다.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으면 나도 알지 못했을 정도의 찰나라 다들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나가고 팀장인 장원영이 말했다.

“오늘은 아마 입장하고 정리하는 데만 시간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캐비닛에 여분의 옷이랑 속옷 같은 생필품이 있으니 확인해 주시고요. 그리고 안에 빨래 주머니가 있어요. 주머니에 이름이 적혀 있으니 앞으로 생기는 빨래는 거기에 넣으셔서 입구 밖에 있는 바구니에 넣어 주시면 됩니다. 일단 쉬시고, 주위 한번 둘러보시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천막 앞에 팻말이 있으니까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아무 데나 막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장원영도 바깥으로 나갔다. 그를 따라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나는 나가지 않고 캐비닛을 확인했다. 그가 설명한 대로 옷이나 생필품 등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시계네?’

지샥 브랜드 제품 같은 전자시계였다. 표시되는 시간이 두 개였는데 하나는 바깥의 시간으로, 남은 하나는 던전의 시간으로 맞춰진 시계 같았다. 그걸 차고 캐비닛 안을 전부 확인 한 나는 도지완은 언제쯤 도착하는지 슬슬 궁금해졌다.

바깥으로 나가서 입구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도지완이 언제쯤 들어오나 생각하고 있었다.

던전의 시간으로 30분쯤 지났을 때였나. 익숙한 얼굴이 입구에서 쓱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떨어져 있는 시간이 얼마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를 보자 반가움을 참을 수 없었다. 타다닥 달려가 그의 앞에 서자 도지완은 나를 내려다보며 픽 웃었다. 같이 헤헤 웃고 있던 나는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 입을 열었다.

“형님 저 형님이랑 못 다니게 되었어요.”

“뭐?”

내 말에 도지완이 인상을 팍 썼다. 제 뜻대로 안 되어 기분이 나쁘다는 걸 표현하는 그를 보며 나는 유쾌해져 하하하 웃고 말았다.

“이미 협회에서 공격대랑 어시스트 팀을 매칭해 놨더라고요.”

“뭐? 벌써?”

아직 다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정해졌냐고 황당해하는 도지완이었다. 뭐, 생각해 보면 사실 공격대 입장에서는 누가 어시스트를 하든 상관이 없었다. 어시스트가 미친 사람이라 싸우는데 끼어들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도지완은 여전히 포기하질 못했는지 고민하다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매칭된 데가 어딘데?”

“음……. 그건 왜요?”

“……바꿀 수 있으면 바꿔 보게.”

뚱한 얼굴로 철없이 굴기에 나는 주먹으로 살짝 그의 팔을 쳤다. 정신 차리라는 뜻이었다.

“이미 400명 앞에서 땅땅 못 박아 놨는데 뭘 바꿔요! 그리고 공격대 대장이랑 인사까지 나눠서 바뀌면 다들 황당해할걸요?”

“……인사까지 했다고?”

도지완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가 공격대 중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빠르게 들어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그도 방금 들어왔는데 벌써 인사를 마쳤다고? 의아해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협회 쪽 사람인가?”

다른 길드장들과 다르게 협회 쪽 사람은 먼저 들어와서 베이스캠프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으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도지완은 제 예상이 맞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대답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지만 확답을 바라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설마.”

“…….”

“정말……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의 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로 들렸다. 곧 도지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놈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야?”

“뭐……. 그렇죠…….”

연호진의 눈알을 뽑고 싶다고 한 게 좋아서 나온 말은 아닐 테니 말이다. 내가 머뭇거리며 내놓은 대답을 듣고 도지완은 열이 받은 듯했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숨을 씩씩 내뱉었다.

“절대 안 돼.”

“뭐가요?”

“걔랑 할 바엔 이 던전을 그냥 나가!”

“아니, 어떻게 그래요?”

진정하라고 손바닥을 위아래로 움직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를 팩 하고 노려본 도지완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거 하나 못 막아 줄 것 같아!”

“아니, 당연히 막겠죠!”

“그럼! 왜!”

왜 못 나가냐고 노려보는 도지완에게 나도 열이 받아서 소리를 질렀다.

“그런 일 하면 욕먹잖아요!”

고작 그거 때문에? 도지완은 눈빛으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고작이라니!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내가 맞서 노려보니 도지완은 화를 삭이는지 씨근덕거리다가 나에게 말했다.

“욕하는 놈, 내가 다 고소해 줄게.”

“…….”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괴롭혀 줘? 다니는 회사에서 잘리게 한다거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도지완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는 내가 욕을 먹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아뇨, 저 말고요.”

“뭐?”

“그런 일을 하면 형님이 욕을 먹잖아요.”

“……어?”

난 그게 싫었던 것이다. 사라진 전생에서 그는 제 권력으로 항상 무언가를 했고, 그게 악행에 가까울 경우엔 항상 이런 말을 들었다.

‘도지완이 또 도지완 했네.’

그의 이름이 곧 그가 한 행동으로 불렸던 것이다. 나는 내가 바꾸려는 미래에서 그가 그렇게 불리지 않길 원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