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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77화 (77/88)

77화

죽지 말라는 지호의 말은 그의 바람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도 지완이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활성화된 마기가 들끓고 있는 지완의 내부로 제 신성력을 쏟아부으면 두 힘이 충돌할 것이 뻔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기를 정화하자니 시간이 없었고, 그냥 놔두자니 틈에 접근한 지완이 그 너머에 있는 마왕의 잔재와 마주칠 것이 두려웠다.

그러니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지호와 도지완의 목숨을 걸고 말이다.

입을 맞추고 단숨에 제가 가진 모든 신성력을 끌어모아 도지완에게 넘기고 나자 지호에게 남은 것은 한 줌이었다.

입술을 뗀 지호가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신성력을 회복할 수 없으니 지호는 곧 죽을 터였다.

‘아…….’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어 지호는 땅에 쓰러진 채 눈으로 지완을 좇았다. 지호가 불어넣은 신성력이 속에서 날뛰고 있는지, 그는 입을 틀어막고 버티다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우욱……!”

뒤섞인 마기와 신성력이 지완의 입에서 쏟아졌다. 한참을 웩웩거리던 그가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땐, 흐리멍덩했던 눈에 다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얼빠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지완은 쓰러져 있는 지호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신지호!”

지완은 단숨에 지호를 안아 들고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가 몸을 흠칫 떨었다. 정말 말 그대로 얼음장처럼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신지호…….”

지완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렸다. 이상하게도 추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몸이 떨려 왔다.

지호의 눈이 힘없이 깜빡일 때마다 지완의 심장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는 뜨지 않을 것 같아서.

“정신 차려 봐, 지호야.”

침착하게 말해 보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지호의 창백한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다가 그의 몸이 점점 싸늘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지완은 지호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숨이 자꾸자꾸 옅어졌다. 심장 소리도 점점 느려지는 것 같았다. 처음 겪는 일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차가워진 지호의 손바닥을 붙잡아 제 볼에 비비면서 허둥지둥하는 지완에게 누군가가 절뚝이며 다가왔다.

“……너!”

상대는 호진이었다. 호진도 많이 다친 듯 보였으나, 그건 지완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가 자신과 지호를 공격했던 아이언맨의 꼴을 하고 있으니 더욱 공격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하나 호진은 그런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는 다가와 지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 무슨…….”

무슨 수작이냐며 날카롭게 말하려는 때였다. 지호를 향해 내민 호진의 손에서 하얀빛이 감도는 것을 본 지완은 입을 다물었다.

그 빛은 지완도 잘 아는 빛이었으니까. 원수 같은 호진일지라도 지호를 살릴 방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의 발치에 엎드려 개처럼 빌 용의가 있었다.

지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지완은 입을 다물고 호진이 치료를 이어 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호진의 신성력 덕분인지 지호의 얼굴에 혈색이 점점 돌아오자 지완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금 몸을 떨었다.

‘……잃을 뻔했다.’

지완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지호를 데리고 나가려고 했으나 오히려 호진에게 잡혀서 끌려갔고, 이내 내장을 헤집는 고통을 느끼고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죽어 가는 지호의 모습이 보인 것이 기억의 전부였으니까.

그는 지호를 잃을 뻔했다는 현실감을 뒤늦게 자각했다. 그러나 아직 지호가 완전히 괜찮아진 것이 아니었기에, 쓰러지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호진의 도움을 받은 지 몇 분째, 감겨 있던 지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 안에 숨어 있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지완은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기분을 맛봤다.

“신지호!”

“형……님……?”

흐릿하게나마 자신을 바라보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지완이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슬슬 정신을 차린 지호는 제 몸을 끌어안은 지완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는 손을 뻗었다. 그러다 지완의 볼에 닿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자 깜짝 놀랐다.

“형님? 울어요?”

왜 우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묻는 지호를 보자 지완은 열이 받았다.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켜 놓고 한다는 소리가 우냐는 거였으니 말이다.

얄미워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조금 전까지 죽을 뻔했던 것을 떠올린 지완은 대신 그의 볼을 꼬집었다.

“신지호, 너 겨우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으윽……!”

“그러니까 내가 아까 같이 도망가자고 할 때 도망갔으면 됐을 거 아니야!”

“으윽…… 아니이…….”

“너! 내 말 잘 듣기로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진짜 혼나 보겠냐면서 벌컥 화를 내는 지완에게 지호가 쩔쩔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

지호에게 신성력을 퍼붓던 호진도 행동을 멈추고 한 방향을 노려보았다.

세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차원의 틈새였다. 두 뼘 조금 넘는 틈새에서 악의가 뭉글뭉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본능이 저것은 위험하다고 알리고 있었다.

“……신지호. 나가자.”

분위기에 눌린 지완이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지호는 그러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지호에게 호진이 물었다.

“저거…… 지금 위험한 겁니까? 아니면 위협만 가하는 겁니까?”

“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커요.”

틈새 저 너머에 있을 마왕의 잔재가 이곳에 있는 지완을 눈치챈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호의 방해로 지완이 틈새 너머에 있는 자신을 꺼내 줄 것 같지 않자, 스스로 넘어올 생각인 듯했다.

‘일단 넘어오기만 하면 자신이 들어갈 그릇, 도지완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사정을 아는 호진은 지호의 말에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한 듯했으나 지완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소외되는 기분에 조금 속이 상했다. 그래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잘은 모르지만 위험한 상황이 맞다면, 지호를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지호야. 제발 나가자.”

애원하듯 말했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지호는 어두운 얼굴로 안 된다고 할 뿐이었다.

“왜!”

답답해진 지완이 한탄했지만 돌아온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 위험한 걸 그냥 두고 나갈 순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셋이서 뭘 할 수 있겠어, 응? 지금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와서 처리하자.”

“아뇨. 사람들을 많이 데려와 봤자 소용없어요. 제가 해야 해요.”

“고작 D급인 네가 왜!”

고집부리는 지호에게 지완이 소리쳤다가 화들짝 놀랐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의 말은 지호를 무시하는 것이라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아니…… 그게…….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은 그게 아니라…….”

당황한 지완이 혹여나 지호가 상심했을까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지호는 딱히 상처받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작 D급인 자신이 저 악의를 내뿜는 존재와 맞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지호가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악의가 흘러나오던 틈새에서 마기가 울컥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마기는 틈새의 가장자리를 부식시키며 야금야금 그 크기를 늘렸다.

그걸 본 지호가 아차 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지완의 몸에서 나온 신성력과 마기가 틈새로 스며든 것 같았다. 원래라면 저렇게 틈새가 쉽게 부서질 리 없었겠지만, 신성력과 섞인 혼돈스러운 마기가 차원의 방벽에 데미지를 준 듯했다.

틈새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악의가 늘어나 세 사람은 몸을 떨었다.

“제가……. 제가 막겠습니다.”

호진이 창을 고쳐 쥐며 앞으로 나섰다. 죽다 살아난 지호와, 마왕의 그릇인 지완을 제외하면 여기서 싸울 수 있는 존재는 그밖에 없었다.

“제가 시간을 벌 테니,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

말을 마친 호진이 틈새로 달려들어 솟구치는 마기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신성력이 담긴 창날이 마기를 갈랐지만, 마기는 그저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뭉쳤다.

호진의 공격이 아예 무효한 것은 아닌 듯했으나, 크게 결정타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놀리듯 몇 번 흩어졌다 뭉치던 마기는 장난은 끝이라는 듯이 확고한 형태를 가지기 시작했다.

길쭉한 검은 기둥이 되더니, 그 끝에서 다섯 개의 짧은 첨단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러곤 이내 첨단이 달려 있는 부분이 평평하게 변하며 익숙한 배치를 이뤘다. 마치 팔에 손이 달린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야아앗!”

그것을 향해 호진이 창을 내질렀지만 창끝이 검은 손에 잡혀 버렸다. 창에는 신성력이 둘려 있어 닿아 있는 부분으로 마기가 줄줄 샜지만, 검은 팔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마기를 잃더라도 공격을 막아 내는 게 더 좋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에 호진이 창을 빼려고 노력했으나, 손은 움직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호진이 애를 먹고 있을 때 틈새 쪽에서 다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생김새를 보니 그것도 손가락이었다.

틈새로 빠져나온 팔의 겨드랑이 쪽에서 튀어나온 손가락이 틈새의 가장자리를 쥐고 힘을 주는 것이 보였다. 두고 보자니 곧 틈새를 벌려 튀어나올 기세라, 결국 연호진은 창을 버리고 맨손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두고 장난을 치고 있어.’

그냥 연기처럼 들어오는 것이 좀 더 편할 텐데도 일부러 모양을 갖추는 것을 보니, 놈은 자신의 발악을 비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상대가 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지호의 상태가 정상이었으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저 마기에 대항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호는 몸에 남은 신성력을 가늠해 보았다. 호진이 저 마기의 공격을 막아 주기만 한다면 틈새를 막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정말로 남은 신성력이 거의 없었기에, 지호의 몸이 버티질 못할 터였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자신을 보며 눈물 흘리던 지완을 생각하자 명치가 짓눌린 듯 답답했지만 별수가 없었다.

“형님.”

“…….”

“저랑 연호진 씨랑 저걸 막을 테니, 형님은 나가세요.”

지호의 말에 지완은 울컥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화를 참아 내는지 입술을 깨물다가 지호에게 물었다.

“너보다 나랑 연호진이 막는 게 낫지 않겠어?”

지호의 능력을 폄하한다기보다는 그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남을 테니 나가라고 하는 그에게 지호가 말했다.

“저건 형님을 노리고 있어요.”

“나를?”

“네. 아까 기억나세요? 연호진 씨가 형님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을 때요.”

마기가 그의 몸을 차지했을 때를 이야기하자, 지완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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