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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78화 (78/88)

78화

“형님이 다가가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막고 형님이 나가셔야 해요.”

“……그냥 다 같이 나가면 안 돼?”

불안한 얼굴로 지완이 애원했다. 그러나 막지 않으면 저것이 틈새를 비집고 나올 것이고, 나오고 나선 어떻게 굴지 알 수 없었다.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엔 저것이 던전을 현실에 침식시켜 수도권 일대를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연호진 씨 혼자로는 힘들어요. 그리고 저게 나오면 더 위험해질 테니까요.”

“…….”

“그러니까, 형님이 나가서 다른 사람을 불러와 주세요.”

지완은 큰 무력감을 느꼈다. 지호가 걱정이 되지만 정말로 저것이 자신을 노리는 거라면 이곳에 있어 봤자 민폐만 될 뿐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내가…….’

또 이성을 잃고 지호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온몸의 피가 식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지완은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

“돌아올 때까지 꼭 버텨.”

지완은 불안한 얼굴로 지호를 바라보았다. 다짐을 받듯 지호의 대답을 유도하자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들었음에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지만, 지완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분지를 떠났다.

떠나는 지완을 잠깐 바라본 지호는 몸을 돌려 틈새 쪽으로 달려갔다.

“연호진 씨! 나를 지키세요!”

그렇게 말하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땅에 손을 짚었다. 다시금 틈새를 닫으려는 시도에 팔처럼 변한 마기가 지호를 공격하려 했지만, 호진이 그걸 두고 보지 않았다.

신성력을 엮어 틈새를 막던 지호는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제발 끝까지 몸이 버텨 주기를……!’

생명력 대신 몸을 지탱하고 있던 신성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가며 지호의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기도까지 차오르는 피에 지호가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서 피를 토해 냈다.

여유를 부리던 마기는 목숨을 걸고 틈새를 막으려는 지호 때문에 크게 당황한 듯했다. 점점 틈새가 조여들자 더욱더 발광하는 마기의 모습을 보며 가슴을 졸이던 찰나였다.

콰앙!

땅을 뒤흔드는 소리가 났다. 차원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조금 더 빠르게 틈새를 막아 보려 했는데,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렸다.

콰아앙!

그 순간 얼기설기 붙여 놓았던 틈새에 금이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지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쿨럭!”

울컥하며 올라온 핏덩이를 뱉어냄과 동시에 완전히 금이 가며 틈새가 와르르르 무너져 뻥 뚫렸다. 지호가 신성력을 쏟아부은 보람없이 마기가 그 뻥 뚫린 곳으로 솟구쳤다.

지호가 쓰러짐과 동시에 호진의 얼굴에서 희망이 사라졌다. 멍하니 하늘 위로 솟구치는 마기를 보던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끝인가.”

그도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1회차 때보다 이르게 찾아온 죽음을 예감하며 호진이 눈을 감던 순간이었다. 틈새를 억지로 비집고 나오며 그들을 비웃던 마기가 갑자기 허둥지둥히기 시작했다.

빠르게 나오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뭔가 당황한 듯 보였다.

왜인지 모르게 호진은 그것이 도망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가 느낌 감정이 맞는가 하며 마기를 바라보자, 틈새에 낑겨 허둥지둥하던 마기가 굉음을 내며 위로 튀어 올랐다.

콰과광!

어떤 것보다 큰 소리였다. 도망가던 지완도 놀라 뒤를 돌아봤을 정도로 말이다.

공중에서 땅으로 처박히는 마기를 보며 호진은 무언가에 밀려 튀어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맞는지 뻥 뚫린 틈새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있었다.

“……천사?”

호진의 중얼거림 대로 그것은 천사였다. 머리 뒤에는 찬란한 후광을 단 채 날개를 펼쳐 둥실 날아오르는 그것은 천사 외에는 설명할 것이 없었다.

틈새 바깥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천사는 무심한 눈으로 제가 강림한 땅 위를 쓱 훑었다.

저 멀리서 이변을 느끼고 달려오는 지완의 모습도, 얼떨떨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호진도, 자신에게 걷어차여 땅에 처박힌 마왕의 잔재도.

무심한 천사의 눈이 죽어 가는 지호에게 향하더니 손가락을 뻗어 그를 가리켰다. 레이저 빔처럼 손끝에서 뻗어 나온 순도 높은 신성력이 몸에 닿자 지호가 숨을 헐떡였다.

“허어억……!”

정신을 차린 지호가 코와 입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쳐 닦으면서 고개를 들었다가,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제 동료의 모습에 헤, 하고 입을 벌렸다. 그런 지호에게 천사가 말을 걸려는 순간이었다.

천사가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틈에 마왕의 잔재는 뛰쳐나갔다. 마침 지완도 다시 그들에게 달려오고 있으니, 그 몸 안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천사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서 노려보더니, 마왕의 잔재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감히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그러자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마왕의 잔재가 천사의 손아귀에 잡혔다. 지호와 호진을 가지고 놀던 아까의 모습과는 달리 이제는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마왕의 잔재였다.

마왕의 잔재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천사의 반응에 가만히 있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것이 발악하듯 공격을 했지만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

「끝났는가.」

재롱은 다 부렸냐는 말투였다. 곧 천사가 신성력을 주입하자 마왕의 잔재는 몸을 부들부들 떨어 대더니 마기 한 줌 남기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그들이 고전했던 상대를 간단하게 처리해 버리는 천사의 모습에, 지호와 호진이 입을 벌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대, 많이 약해졌구나.」

천사가 지호를 보며 말하자 지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천사였을 땐 다음 대 천사장 후보가 될 정도로 강했었지만, 인간이 되고 나니 뭐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걸 일일이 설명하기도 뭐했기에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런 지호를 보던 천사는 어느새 근처까지 당도한 지완을 바라보았다.

“지호야!”

지호의 말대로 나가려고 했지만 거듭되는 굉음과 함께 천사까지 등장하자, 지완은 결국 돌아왔다.

이제는 멎었지만 지호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본 지완의 얼굴이 굳었다.

“너, 괜찮은…….”

「흥.」

지호에게 다가서는 지완을 보자 못마땅한 얼굴이 된 천사가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그으며 지완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신성력이 벼락처럼 내려쳤다.

“윽!”

“……형님! 야! 뭐 하는 거야!”

신성력의 벼락을 맞고 비틀거리는 지완을 보며 지호가 놀라 펄쩍 뛰었다. 그러나 신성력이었기에 마기를 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몸 상태가 더 좋아졌을 터였다. 물론 벼락이니만큼 충격은 조금 있는 편이겠지만.

「아직 인간이구나.」

천사가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지완은 황당했다. 자기가 인간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황당해서 노려봤지만 천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인간으로 사는 게 좋을 것이다.」

그저 이런 이상한 소리나 해 댈 뿐이었다. ‘천사가 인간을 싫어하나?’ 하고 지완은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호와 호진을 대할 때는 지완에게 했던 것과 달리 상냥했던 것이다. 물론 지완을 대하는 태도와 비교해서 상냥했다는 거지, 천사는 여전히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수고했느니라.」

천사는 다친 호진의 몸을 신성력으로 부드럽게 치유했다. 그 모습을 본 지완이 어이없어했지만, 천사는 그를 무시했다.

기분이 상한 지완도 천사를 무시하며 지호에게 다가갔다.

“몸은 괜찮은 거야? 안 좋은 데 있으면 저거한테 고쳐 달라고 하자.”

자신을 가리키며 ‘저거’라고 부르는 지완의 말에 천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호는 혹시라도 천사가 또 신성력 벼락을 내릴까 봐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지완이 벼락을 맞으면 자신도 맞게 되니 하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걸 알아들은 건지 천사는 벼락을 내리지 않았다. 호진을 완전히 치유한 그는 지호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지호는 혹여나 천사가 이상한 소리를 할까 싶어 신성력을 이용해 속삭임을 보냈다.

- 내가 천사인 건 아무도 모르니까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속삭임으로 해.

그 말에 흥, 코웃음을 친 천사였지만 지호의 요구에는 순순히 따랐다.

- 급하게 구한 몸이라지만 정말 볼품없구나.

대뜸 디스부터 해 버리는 천사의 말에 욱했지만 그의 말대로였다. 신지호의 몸은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 신성력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 자체가 작다. 그러니 이런 작은 잔재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고전할 만하구나.

- ……어쩌라고. 이제 와서 몸을 바꿀 순 없는 일이잖아.

여태까지 버틴 걸 잘했다고 말하긴커녕 못 했다고만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입을 삐죽이는 지호를 보며 천사는 고개를 저었다.

- 몸을 바꿀 순 없지만 그릇을 늘릴 순 있지.

- 그릇을? ……설마?

작은 그릇 위에 힘을 퍼부어 원래 있던 그릇을 강제로 깨고, 새로 조립해 붙여서 늘리는 방법이 있긴 했다. 다른 힘과 달리 치유의 힘이 있는 신성력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 그래 봤자 간장 종지가 앞접시가 되는 정도의 변화겠지만 말이다.

그 정도 변화라도 지금 상태보다는 나아지는 것이니 받을 만했다. 혹해진 지호가 해 달라고 요구하자 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겠다.」

다가온 천사가 제 볼을 붙잡자 지호는 그제야 어라? 싶었다. 생각해 보니 기운을 몸 내부에 주입할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입맞춤하는 거니까…….’

어? 어라? 해도 되는 건가? 천사 시절에야 이런 입맞춤에 의미 따위 없었고, 감정 따위도 없었으니 상관이 없었지만 인간이 된 지금은 달랐다.

하지만 거절을 하기도 전 입과 입이 부딪쳤다. 천사가 입으로 신성력을 불어넣자 명치 부근이 빠듯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지호는 식은땀이 흘렀다. 볼에 느껴지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눈을 도로록 굴려 바라보자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완이 보였다.

‘아…….’

뭔가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완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지호가 천사와 눈이 맞아 입을 맞추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멍하니 둘의 입맞춤을 보고 있던 지완이 슬슬 정신을 차렸는지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너! 뭐 하는 거야!”

지완이 천사를 향해 살의를 담아 주먹을 내질렀지만 천사는 가볍게 피했다. 지완이 씩씩거리며 천사를 따라잡았지만 얄밉게도 그는 지완의 공격을 쇽쇽 피했다.

“으윽…… 배불러.”

빵빵하게 가득 찬 신성력 때문에 배가 부르다는 착각까지 느끼고 있는 지호에게 호진이 다가왔다. 그도 지호와 천사가 왜 입을 맞췄는지 이해 못 하는 눈치였지만, 물어봐도 되는지 아리송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죽어!”

「느려터진 너의 주먹에 죽기에 내가 너무 강하느니라.」

악에 받쳐 소리 지르며 공격하는 도지완에게 태연하게 말하는 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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