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지금은 천사가 봐주고 있지만 또 언제 심기가 상해 지완을 공격할지 모르니 지호는 그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형님. 그만해요.”
그렇게 말리면 씩씩대면서도 물러설 줄 알았는데 지완은 오히려 눈을 부라리면서 지호를 노려봤다. 배신자를 보는 듯한 그 눈빛에 어리둥절해하는 지호에게 지완이 소리쳤다.
“너!”
「으음…… 시끄럽구나.」
“넌 화도 안 나?”
“예? 화요?”
자신이 왜 화를 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지호 때문에 지완은 더 열이 받은 듯했다.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지자 멀찍이 있던 호진도 슬쩍 다가와서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다.
“화가 안 난다고?”
“…….”
“화가 안 난다고!”
지완은 그리 물어보고서는 도리어 자신이 더 크게 화를 냈다. 그가 분노를 주체 못 해 땅을 쾅쾅 구르자 진동에 몸이 덜덜 떨렸다.
“저 새끼가 너한테 입을 맞췄잖아!”
“…….”
“너를 성추행했다고! 그런데도 화가 안 나!”
아, 그런 의미였나? 그제야 분노의 이유를 이해한 지호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뜨는 기분이었다. 성추행을 당하고도 태연하게 구는 지호를 보며 답답해진 지완이 이번에 제 가슴 위를 쾅쾅 두드리는데 천사가 끼어들었다.
「그것은 성추행이 아니었느니라.」
“네 입장에서나 그렇겠지!”
「아니다.」
천사의 얼굴은 진지했다.
「성추행이라 하면 성교와 관련된 행동이 아닌가.」
“뭐?”
「하지만 나는 저이와 성교할 생각이 없노라. 그것은 저이도 마찬가지이니라.」
지호와 자신 둘 다 그런 목적이 없기에 성추행이 아니라 말하는 천사를 멍청히 바라보던 지완이 다시 발끈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네 행동으로 성적인 수치심을 느끼면 그냥 성추행이라고!”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이니라. 그대, 나와의 입맞춤으로 수치심을 느꼈나?」
“음…… 아니.”
지호는 지완의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천사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입을 맞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콩설이랑 놀아 주던 중 흥분한 콩설이가 제 턱과 입술을 핥아 대는 것과 똑같았다.
천사의 앞에서 개 운운할 수도 없었기에 지호가 말을 삼켜 버리자, 지완은 천사의 편을 드는 지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민망해진 지호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반대로 천사는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하다. 나는 고결한 의미로 행한 일이었기에 떳떳하니라. 그리고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저이는 죽었을 수도 있었다.」
지호를 노려보던 지완은 천사의 말에 깜짝 놀랐다. 죽었을 수도 있었다고? 아까의 일이 플래시백되며 지완의 심장이 아프게 조여 왔다.
“죽, 죽었다고?”
「그래, 그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천사의 말대로 죽을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단 처음 그가 넣어 준 신성력이 몸을 치유해 줬으니 말이다.
다만 천사의 눈으로 봤을 때 신지호의 몸 자체가 너무 연약하고 약해 빠져서 문제였다. 그는 자기가 손가락만 살짝 대도 지호가 개복치처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관점 차이에서 오는 오해를 미처 알지 못한 지완은 지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그가 죽는 것보다야 타인과 입맞춤을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할 말을 잃은 지완을 보며 더욱 당당해진 천사는 갑자기 던전이 우르릉 울리기 시작하자 한숨을 쉬었다.
「이제 가 봐야 할 듯하구나.」
그러고는 지호를 돌아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대가 너무 연약해 걱정이 되는구나.」
그가 신성력의 그릇을 크게 키워 놨다지만 천사의 눈엔 지호가 여전히 벌레처럼 연약해 보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천사에게서 안쓰러움을 이끌어 낸 지호가 머쓱해하자, 그를 살피던 천사가 지호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어…….”
그리고 가호를 내려 주었다. 가호를 내리는 건 쉽지만 그들의 특성상 아무에게나 해 주는 것이 아니었기에 지호는 깜짝 놀랐다.
‘가호를 내려야겠다 생각될 정도로 내 몸 상태가 별로인 건가?’
지호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이 몸으로 무리 없이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보던 지호는 곧 무리 없이 살아왔던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입원만 세 번이고, 죽을 뻔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네. 그럴 만하네.’
자신의 연약함에 감탄하며 최초로 천사에게 가호를 받은 천사가 된 지호가 제 동료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대가 하려는 일에 회의적이었지만…… 오늘 확인한 바로는 무소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노라.」
제법 동료를 아끼지 않느냐? 천사가 속삭였다.
지호가 하려는 일, 그것은 지완이 마왕이 되지 않도록 막아 내는 것이었다.
천사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지호를 바라보다가, 지완을 바라볼 때는 냉기가 흐르는 눈으로 바뀌었다.
「그대는 앞으로도 착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뜬금없는 천사의 말에 지완이 욱하긴 했지만 입을 열어 따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천사는 마지막으로 연호진과 눈인사를 나누고선 위로 둥실 떠올랐다.
「강림한 김에 이곳은 내가 정리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말한 천사의 몸에서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그 넓은 던전을 한꺼번에 뒤덮을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이었다.
지호는 새하얗게 변한 시야에 멍하니 천사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러고는 더듬어 내려가 손을 꽉 붙잡았다. 그 온기가 익숙했기에 지호는 떨쳐 내지 않고 오히려 그의 팔에 몸을 기댔다.
한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빛 속에 있다가 점점 잦아드는 빛에 시야가 돌아왔다. 어느새 그들은 던전이 아닌 바깥에 나와 있었다.
“사람이다!”
“갑자기 나타났어!”
바깥으로 도망쳤던 헌터들의 눈에는 갑자기 던전이 멋대로 클로징되더니 그 자리에 세 사람이 덩그러니 나타난 꼴이었다.
“연호진이랑 도지완이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던전이 갑자기 사라졌어요!”
지호를 쫓아 사라졌던 두 사람이 나타나자, 사라진 던전에 대해 사람들이 그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저희도…… 잘 모릅니다.”
“눈을 떠 보니 던전 바깥이었으니까요.”
그들도 이유를 알지 못하자 사람들은 답답해했지만, 침식 경고가 일어날 만큼 위험했던 던전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무어라 하진 못했다. 무엇보다 실제 그들의 몸은 신성력 샤워로 건강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꼬질꼬질했기에 더 이상 붙잡고 있기에도 미안했다.
“일단…… 쉬셔야 할 것 같군요.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 보시겠습니까?”
“……아니요. 그냥 집에 가서 쉬면 될 것 같습니다.”
병원이라는 말에 기함하며 고개를 젓는 지호를 보고선 지완은 제안을 거절했다. 지완이 거절하니 더 권유할 수도 없었기에 대화를 하던 상대는 쉬시라며 자리를 비켰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을 도와야 할 것 같아서요.”
호진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지완을 경계하던 그였지만 오늘의 일로 그 경계가 많이 풀린듯 했다.
호진이 날을 세우지 않으니 지완도 딱히 날을 세우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인사를 나누고 호진과 헤어진 지호는 이제 다 끝났다 생각했으나 그런 그의 귀에 지완이 속삭였다.
“쟤도 돌려보냈으니 이제 천천히 말을 나눌 차례네.”
“…….”
“전부터 보이는 그 검은 게 무엇인지, 연호진이랑 네가 숨기는 게 무엇인지 전부 말해야 할 거야.”
단단하게 붙잡힌 어깨에 지호가 어색하게 지완을 올려다봤지만, 그의 표정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
어째 아무래도 이번엔 그냥 넘어가기 힘들 듯했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헌터 협회가 내어 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지호는 고민했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지?’
마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믿어 줄까? 그렇게 속으로 끙끙거리고 있으니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내리자.”
지호에게는 그 말이 마치 사형 선고 같았다. 여기까지 태워 준 협회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그는 속으로 말할 것을 정리했다.
‘내가 천사인 거랑 회귀한 걸 제외하고 다 말하자.’
눈치가 빠른 지완이니까 괜히 어설프게 가리고 속였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지호는 지완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추궁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그는 먼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라 했다.
그제야 지호는 자신이 아직도 던전 안에서 입고 있었던 작업복 차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앞섬에 지호가 흘린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왠지 아까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이 흠칫 놀라더니만…….’
이런 꼴이면 당연히 놀라겠지 싶었다. 지호는 지완의 말대로 방에 돌아가 씻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이 피부에 닿자 노곤함이 밀려왔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참고 거실로 나가자 심각한 얼굴로 통화 중인 지완이 보였다.
“네, 맞습니다. ……저를요?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 통화를 마친 지완은 통화를 종료하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지호가 무슨 일인지 몰라 불안해하며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윤 비서가…….”
“윤채우 씨요?”
“그래. 다쳤다는군.”
지완의 말에 지호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채우와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 다쳤다고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쩌다 다친 거래요? 많이 다쳤대요?”
“그게…….”
잠시 머뭇거린 지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호를 깜짝 놀라게 했다.
“습격을 당했다고 하더군.”
“습격?”
“그래. 배 비서 때와 똑같이 말이야.”
그 말에 지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 * *
지완과 지호가 천사의 도움으로 던전을 클리어하기 전,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는 불길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용돌이 모양의 요철이 나 있는 거대한 검은 뿔 한 개가 피로 그려진 마법진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치렁치렁한 주술사 의상을 입은 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방울을 흔들어 댔다.
짤랑, 짤랑. 천천히 흔들던 방울을 미친 듯이 흔들 때쯤 어디선가 불길한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뿔이 핏빛을 내며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오소서. 차원을 넘어 당신의 몸을 찾아가소서.」
외국어인지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소리였지만 뜻은 이상하게도 이해가 되었다.
뿔 주위로 흐르는 핏빛 광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진득하고 검어졌다. 주술사는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더니 뚝 멈추고서는 텅 빈 눈을 하고 천장을 올려다본 채로 입을 열었다.
「열렸다.」
멍하니 주저앉은 채 외계와 교신하는 주술사를 보며 마왕의 추종자들이 중얼거렸다.
“성공했군요.”
“당연히 성공해야지요.”
감탄하는 3사도의 말을 냉소적으로 받은 자는 7사도였다. 그는 역겹다는 듯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