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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82화 (82/88)

82화

지완의 질문은 그 뿐만 아니라 다른 필멸자들도 한 번쯤 가졌던 의문이었기에 대답하는 것은 쉬웠다.

“그분께서는 저희를 존중하니까요.”

“존중이라고?”

욱한 건지 지완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지호는 변명하듯 답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는 지고의 존재입니다. 오른쪽에는 평탄한 길이, 왼쪽에는 가시밭길이 있다고 할 때, 그분을 제외한 누구도 그 앞을 알지 못하겠죠. 실제로 가 보지 않았으니까요.”

“…….”

“그리고 만약 그분께서 인간이 다치길 원하지 않아 모두에게 오른쪽으로 갈 것을 권고한다면 모두가 그 말에 따를 겁니다. 그럼 아무도 다치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것은 부모도 같아요. 부모가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것은 하지 마라, 저기는 가지 마라, 그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지 마라. 하나하나 간섭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말 없는 지완의 시선을 피해 지호는 눈을 내리깔았다.

“부모가 제시해 준 길이 평탄하고 안전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자식은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하지는 못할 거예요. 자신의 의견은 하나도 없이 부모의 조종만 받으며 자란 아이가 조타수인 부모를 잃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갑자기 자립심이 생겨나 원하는 길로 향할 수 있을까요?”

“그건…….”

“삶에는 고난과 역경이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순간 영혼은 성장하죠.”

지완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내뱉으면 지호와 싸우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평소와 다르게 신실한 신도가 할 것 같은 말을 내뱉는 지호가 낯설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지호가 좋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묻고 싶은 말 하나를 겨우 꺼내 놓았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부모의 경우겠지.”

“…….”

“인간과 다르게 신은 영원한 것 아닌가? 그러면 영원히 조타수를 잃을 일도 없을 것 아니야.”

지완의 말에 지호의 얼굴에 큰 슬픔이 어려 그는 한순간 당황했다. 자신이 무얼 잘못 말한 건가 가슴이 덜컹거릴 때 지호가 말했다.

“우리도 그분이 영원할 줄 알았어요.”

“뭐?”

“그분께선 큰 대가를 치르고 사라져 버리셨거든요.”

깜짝 놀라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지는 지완을 바라보며 지호는 애써 괜찮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신의 부재는 그에게 아직도 큰 슬픔을 주었다.

“그럼…… 그 마왕이라는 것을 못 막는 건가?”

마왕의 대적자가 있다면 당연히 그 신이라는 존재일 거라고 지완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던전에서 만난 마왕의 잔재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겪어 봤으니 말이다.

재수 없긴 하지만 그 천사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지완과 지호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인간이 마왕에 대항한다는 생각 따위는 못하는 지완을 보며, 지호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그가 상처받지 않을까?

“사실 마왕은 죽은 지 오래예요.”

“뭐?”

“하지만 그의 잔재에 사념이 남아 있죠. 세진리교, 그러니까…… 마왕의 추종자들은 그 사념을 이용해 마왕을 부활시킬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그 말에 별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지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생각해 보면 그냥 범죄 집단도 아니고 마왕을 추종하는 단체가 의미 없이 자신을 노릴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마왕이 부활할 때 필요한 게 있는 건가?”

“…….”

“제물이라든가.”

잠시 머뭇거리던 지호는 지완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예상을 하고 있는 듯 불안한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그들은 마왕의 사념을 받아들이기 쉬운 몸에 그것을 빙의시켜 마왕을 부활시키려고 해요.”

“……그럼, 그게…….”

목이 멘 듯 목이 꽉 조인 목소리로 말하는 지완을 보며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형님……. 도지완 씨예요.”

예상은 했으나 확답을 들은 순간 지완의 머릿속에선 뒤틀렸던 퍼즐들이 착착 다시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착하게 살길 원한다는 지호, 그리고 ‘아직’ 인간이라고 말하던 천사의 의미심장한 말. 그리고 아이언맨의 모습을 하고 이유 없이 자신을 공격한 연호진까지.

“연호진도 내가 마왕의 사념이 빙의할 몸이란 걸 알고 있는 거고?”

“……네.”

머뭇거리며 작게 말하는 지호의 목소리에 지완은 기분이 이상했다.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연호진은 내가 마왕이 되기 전에 죽이고자 했던 거군.”

“…….”

“혹시 천사나 다른 이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연호진은 더 이상 습격하지 않는다지만 다른 놈들은 몰랐다. 마왕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그와 반대되는 이들에게도 습격을 받게 되는 건가 싶어 착잡해하는데 지완의 말에 화들짝 놀란 지호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연호진 씨는…… 그저 소통이 안 되어서 실수하신 거고요.”

“…….”

“우리는…… 아니, 저는 형님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호는 손을 뻗어 지완의 손을 붙잡았다. 흔들림 없는 두 눈으로 지완을 들여다보며 그에게 말했다.

“전, 형님이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길 바라요.”

그 말에 지완은 답답하게 막혀 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녹아내린 마음은 일렁이며 파도쳐 지완은 그냥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팔을 뻗어 지호를 꽉 끌어안으면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어찌 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물이 있을까? 차오르는 행복에 질식해 갈 무렵 그의 발밑을 불안하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신지호가 내 곁에 있는 게,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면?’

자신을 좋아해서 따라다니고 곁에 있고 싶어 한 게 아니고 그저 그가 마왕이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면?

그는 지호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그가 바라는 대답이 아닌 다른 대답이 지호에게서 나온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불안함에 지호를 더욱 바싹 끌어안자 조심스럽게 지호의 팔이 지완의 등을 끌어안았다.

제 불안을 다독이는 그 몸짓에 지완은 이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 * *

던전에서 나오면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지만, 결론적으로 그 약속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가지고 있는 말버릇처럼 언제 한번 밥 먹자, 언제 한번 만나자, 이런 실속 없는 약속이라서 흐지부지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윤채우 씨가 그렇게 다쳤는데 여행을 가면 안전 불감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요?”

“누가 그러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아니라는데.”

내 말에 도지완이 뚱하게 대답했다. 여행지를 고르자고 말하는 그에게 일정을 미루자고 하니 서운한 듯했다.

방금 말한 이유도 있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가 더 있었다.

“그리고 저희 둘만 여행 간다 그러면 윤채우 씨가 따라오겠다면서 저희를 곤란하게 할지도 모르죠.”

“…….”

“그리고 전 윤채우 씨가 여행에 끼는 건 싫어요. 둘이서만 가고 싶으니까요.”

그 말에 뚱한 얼굴을 하던 도지완의 입매가 씰룩거렸다. 살살 눈치를 보던 나는 그의 기분이 풀려 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돌렸다.

“그렇게 둘만 있고 싶어?”

팔을 뻗은 도지완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살짝 돋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품에 파고들었다.

그런 내 정수리에 뺨을 비비며 도지완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담긴 감정으로 나는 그의 기분이 다 풀렸음을 느꼈다.

“좋아. 둘만 가야지. 저 수상한 놈을 빨리 치워 버리고 말이야.”

그 말에 동의했기에 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늘은 윤채우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처음 받았던 검사 결과에서는 문제가 없었기에, 윤채우는 다음 날 바로 퇴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교통사고와 다름없으니 혹시 모른다며 일주일간 입원해 있으라고 해 지금에서야 퇴원하게 되었다.

가긴 싫지만 억지로 마중 나가야 해서 외출하려는 우리를 보며 콩설이가 화다닥 다가왔다.

“콩설아, 우리 다녀올게?”

그 귀여운 얼굴을 보며 바닥에 누워 잠시 애교를 즐기던 나는 곧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가자 이미 퇴원 수속을 밟았는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윤채우가 보였다. 신경질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도지완이 보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웃는 그에게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미 다 들켰거든요?’

그의 내숭은 들킨 지 오래였다. 다시 확인해도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냥 도지완이 좋아서 쫓아다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 진짜 스토커는 저런 사람이지.’

나는 숭고한 목적으로 비슷한 일을 한 것뿐이었다. 진짜 스토커는 윤채우란 걸 깨달으며 나는 나의 깨달음을 사채업자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도 윤채우를 보면 ‘아! 내가 진정한 스토커를 몰랐구나. 신지호에게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다’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언젠가 두 사람을 꼭 만나게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윤채우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기다렸다.

그가 차에 올라타자 나는 바로 운전을 해 집으로 돌아가며 그에게 말했다.

“집으로 물건 보낸 건 받아 놨어요. 따로 정리하지는 않고 상자째 집에 옮겨 놨는데 괜찮죠?”

“네, 정리는 제가 할게요.”

윤채우는 도지완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그는 단 한 번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저렇게 싸늘하게 굴면 천년의 사랑도 식을 것 같은데, 역시 윤채우는 보통 스토커가 아니었다.

‘음…… 어디선가 많이 보던 구도인데.’

흐릿하게 도지완이 차갑게 굴어도 필사적으로 쫓아다니던 것이 생각이 났지만 곧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나는 스토커가 아니니까 윤채우와는 달랐다.

아무튼 병원과 집이 그리 멀지 않았기에 우리는 금방 집에 도착했다.

윤채우는 아파트의 외관을 훑다가 아파트 로비를 보며 만족한 얼굴을 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아파트 카드 키가 떠올라 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그것을 꺼냈다.

“여기요. 이게 있어야 아파트에 들어올 수있고, 엘리베이터도 탈 수 있어요.”

나는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재발급 비용이 4만 원이나 했으니까.

물건값이 아무리 싸도 택배비 3천 원이 아까운 것처럼, 이것도 괜히 잃어버려 재발급받는 상상을 하면 가슴이 쓰렸다.

윤채우는 내 조언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대충 주머니에 카드 키를 쑤셔 넣었다. 정말 하나하나 밉상이 아닌 게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로 오른쪽을 가리키면서 이 집이라고 설명했다.

“이 왼쪽 집이 형님 집이고, 오른쪽 집이 윤채우 씨가 지낼 집이에요. 도어 록 비밀번호는…….”

비밀번호를 말해 주며 청소는 해 놓았으니 편하게 쉬라고 인사한 후 헤어졌다.

그런데 집 안으로 들어온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누군가가 초인종을 미친 듯이 연타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방금 헤어진 윤채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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