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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84화 (84/88)

84화

‘그런데 어디선가 본 거 같은 기분이란 말이지?’

아무 생각 없이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 시선을 느낀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자신을 보고 있냐는 듯 어리둥절해하던 얼굴이 도지완을 보자 폭죽이 터지듯 환하게 변했다.

“도, 도지완…….”

갑자기 앞에 나타난 유명인 때문에 놀란 모습이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도지완을 삿대질하다가 자신이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화들짝놀라며 황급하게 손가락을 숨겼다.

“저기, 팬이에요!”

환해진 얼굴에선 아까와 같은 병약한 이미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양 볼이 발갛게 물들어 선망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여자를 향해 도지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허억…… 목소리도 멋져…….”

그녀의 눈에선 이젠 꿀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심술이 피어났다.

“좋겠네요. 도지완 씨. 연호진 씨 나타나고 구오빠 되었는데 팬도 아직 있고.”

내 말투가 평소와 달리 뾰족뾰족해진 걸 느낀 도지완은 당황한 눈치였지만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히려 내 심술 맞은 말에 발끈한 건 다른 사람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지완 오빠가 연호진 같은 것보다 훠얼씬! 훠얼 배는 더 멋있거든요?”

지완 오빠? 언제 도지완을 봤다고 오빠 오빠 하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그에게 음흉한 속내를 숨기며 접근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순수한 팬심으로 도지완을 좋아하는 것 같기에 그도 평소와 같은 철벽을 치지 못했다.

나는 그게 또 신경 쓰였다.

“그래 봤자 연호진 씨가 도지완 씨보다 훠얼씬! 훠얼 배는 더 세거든요!”

그게 더 멋있는 거라는 본의 아닌 말을 뱉으면서 아차 싶어 도지완의 눈치를 보았다. 도지완은 내가 이러는 것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아는지 마음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따가 두고 보자고 입 모양으로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그의 고요한 반응에 내가 후회를 할 때 그녀는 어떻게 연호진 같은 거랑 도지완을 비교하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연호진 그거 별거 아니에요! 완전 실속 없…….”

“연수희!”

펄쩍펄쩍 뛰던 그녀는 들려오는 이름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찔끔한 얼굴로 그녀가 바라보는 대상은 우리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오, 오빠…….”

“너 여기서 뭐 해!”

“아야!”

저 멀리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연호진은 순간이동을 하듯 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연호진이 오빠인데 도지완 편을 든 건가? 황당해서 바라보고 있는데 연호진이 조금 이상하게 반응했다.

“누가 여기 오래!

“뭐가! 그냥 근처에 약속이 있어서 온 김에 얼굴이나 보려고…… 아! 왜 이래!”

우리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연호진은 평소와 달리 신경질적으로 굴면서 제 여동생을 다급하게 끌고 가려 했다. 마치 우리에게 여동생을 보이기 싫다는 것처럼.

그러고는 도지완을 만났는데 이대로 갈 수 없다고 말하는 여동생을 결국 끌고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뭐지……. 두 사람이 사라지자 나는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연호진이 그렇게 멋있어?”

착각이었다. 폭풍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눈을 데굴 굴려 도지완을 살펴보니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지완과 미소라니……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또 있을까? 나는 두려움을 느끼며 서둘러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도지완이 좀 더 빨랐다.

나를 덥석 잡아서는 헤드록을 걸듯 얼굴을 붙잡아 양 볼을 짓이겼다.

“으구국……!”

“요 입으로 연호진이 나보다 멋있다고 그랬나?”

도지완은 그렇게 물으며 내 양 볼을 짓이겼다 풀어 줬다를 반복했다. 그의 손짓에 입술이 튀어나왔다가 쏙 들어갔다 해서 말하기 어려웠지만 난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으구우…… 아뉘이…… 구건 내 본쉬미 아니어어……!”

“본심이 아니면 진심은 뭔데?”

“횽니미…… 더 머싯숨미다…….”

그 말을 듣고서야 도지완이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잡혀 얼얼해진 볼에 손을 얹고는 입술을 내민 채 그를 흘겨보았다.

“치…… 평소랑 달리 다가와도 밀어내지 않고……. 마음에 들었나 봐요?”

아마 나는 그게 가장 서운했던 것 같다. 밀려나지 않는 건 나뿐이었는데, 오늘 처음 본 사람을 나처럼 밀어내지 않아서. 말을 뱉어 놓고 나는 스스로 놀랐다.

도지완의 행복을 바라면서 그가 사랑받길 원하지 않는 건가? 내 모순적인 모습에 속으로 당황해할 때 도지완이 픽 웃었다.

“아니.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도지완의 눈이 조금 아련한 빛을 띠었다. 추억에 잠긴 것 같은 얼굴로.

“내가 그런 사람에게 약해. 아무런 이득을 생각하지 않고 선의만 있는 애정을 주는 사람에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도지완이 추억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남동생을 생각하고 있구나.’

그의 과거에서 유일하게 도지완에게 애정을 주었던 사람. 듣기로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둘은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협회장을 만났다. 협회장이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닌 윤채우 습격에 관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협회장 말로는 그때 붙잡은 마왕의 추종자들을 심문했지만, 갑자기 모두 정신을 잃더니 백치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교인이 그렇게 많나? 사람을 소모품처럼 막 쓰네?’

그렇게 허무하게 사람을 쓰고 버릴 정도로 교인이 많다면, 왜 힘을 과시하지 않는지 그것도 궁금했지만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아무튼 별 큰 소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로비에서 연호진과 마주쳤다. 여동생은 돌려보낸 건지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우리와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돌리던 아까와 달리 이제는 다가와 인사를 하는 그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여동생분은 돌아가셨나 봐요.”

그런데 또 연호진의 반응이 이상했다. 뭔가 께끄름한 표정을 하는 것이 우리가 여동생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불편한 듯했다.

민망해진 우리는 대충 인사하고는 그와 헤어졌다. 이상하게 구는 연호진에게 조금 마음이 상했다.

“연호진 씨 왜 저러는 거죠? 참 나. 우리가 여동생한테 뭐 해코지하는 것도 아니고…….”

“뭐…… 그렇게 안 봤는데 말도 못 할 정도로 시스콤인가 보지.”

“시스콤이요?”

처음 듣는 단어에 도지완을 올려다보자 그가 씩 웃었다.

“시스터 콤플렉스. 여동생을 많이 아낀다는거야.”

아하. 줄인 말은 몰라도 영어 단어는 잘 알았다. 그런 뜻이구나, 생각하던 내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럼 저는 브라더 콤플렉스인가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도지완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외동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히죽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저는 형님을 많이 아끼니까요.”

내 말에 도지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놀라는 그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자 도지완도 마주 웃더니 나에게 다시 헤드록을 확 걸었다.

“아악!”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아주 귀여워?”

“놔주세요!”

내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마구 헝클어트리고 나서야 도지완이 나를 놔주었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탄 도지완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대체 세진리교는 뭘 원하는 거야?”

“예? 당연히 마왕의 부활…….”

“아니 그거 말고.”

그는 턱에 손을 얹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마왕을 부활시켜서 뭘 할 거냐는 말이야.”

“음…….”

“거사가 성공한 후의 영달을 위해서 마왕을 돕는다기엔…… 여러 매체에서 다뤘듯이 마왕이 부활하면 항상 세계가 멸망하곤 하잖아. 이미 망해 버린 세계에서 귀한 사람이 된다고 해도 쓸모가 없을 텐데.”

도지완의 의문은 타당했다. 세계가 망하고 나면 그전에 있던 재화나 계급 따위는 쓸모가 없어지니까.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현재 세계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이 세계가 멸망하고 마왕이 새로 개편한 세계에서의 힘과 권력이니까요.”

“새로? 그렇군. 그런 거라면…….”

도지완은 바로 내 말을 이해했기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마왕의 추종자가 새 세계에서의 힘을 원하듯이 마왕도 원하는 것이 있었다.

신이 세워 둔 규칙으로 만들어진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자신이 세운 규칙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세계에서 신으로 군림하는 것이 마왕의 목표였다.

* * *

호진은 어색한 얼굴로 서둘러 가 버리는 지호를 보며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민감하게 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시간이 돌아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지완의 죄가 사라졌음을 안다.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은 지완은 죄가 없었다. 그러나 그전의 세계에서 남았던 상처는 아직도 호진을 괴롭혔다.

죄 없는 지완에게 이러는 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미움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용사가 못 된 거겠지.’

용사라면 정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할 텐데, 지완에게 만큼은 그러지 못했으니까.

과거에 실패한 일을 속죄하고자 새로운 용사인 지호의 일을 돕고자 하는데, 이런 사사로운 마음으로 지완을 대하다가 지호의 일이 틀어질까 겁이 났다.

모든 게 모자란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자 호진은 우울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일이나 하자.’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이런 마이너스적인 감정도 잊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온 호진이 제 책상에 올려져 있는 서류를 바라봤지만, 이번에 떠오르는 것은 화를 내는 여동생의 얼굴이었다.

<아이씨! 지완 오빠랑 만났는데 아무것도 못 했잖아! 내가 지완 오빠가 더 좋다 그래서 삐졌냐? 진짜 치사하다 연호진…….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 빨리 헌터가 되어야지……. 치…….>

서류 위에 나타난 그녀의 환영이 호진에게 종알거리며 화를냈다.

예전부터 유명한 헌터였던 지완을 팬으로서 좋아하는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틈만 나면 호진에게 지완의 사인을 받아 달라, 그의 사진을 찍어 달라 요구했지만 그는 한번도 그녀의 요구 사항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현재에서는 말이다. 예전 과거에서는 호진도 지완에게 호감이 있었다. 연애 감정이라기보다는 도지완이라는 강자에 대한 동경심과 그가 이룩한 일들에 대한 존경 등이 버무려진 호감이었다.

후에 그가 자신이 물리쳐야 할 마왕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에도 적의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섰을 정도였으니까.

거듭 떠오르는 상념에 연호진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일에 몰두해야 했다.

‘마석을 첨가한 각성제인가…….’

마석은 증폭의 성질을 띠고 있어 이것으로 각성 효과를 강화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량만 써도 효과가 확실하기에 비쌌고 더욱 위험했다.

‘이놈들이 이때쯤부터 활동했구나.’

없어진 미래에서는 놈들이 너무 늦게 잡혀서 사회가 많이 혼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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