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상이 한 번 망했다-86화 (86/88)

86화

* * *

“오늘 즐거웠어. 다음에 또 봐. 다음에 또 보자, 진순아.”

“멍!”

“조심히 들어가.”

놀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는 저녁이 되었다. 친구와 헤어지고 홀로 골목을 걸어가는데, 오늘따라 골목이 흉흉해 보였다.

그러나 집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이곳밖에 없었기에, 흉흉한 것은 기분 탓이라고 생각한 수희는 골목을 따라 쭉 걸었다.

그러다 낯선 봉고차 곁을 지날 때였다. 드르륵 하며 열린 문으로 팔이 뻗어 나오더니 그녀의 몸과 입을 틀어막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으으읍!”

“가만히 있어!”

어두운 차 내부 안에서 번쩍이는 금속 칼날을 보자 수희의 몸이 굳었다.

“얘가 연호진 여동생이 맞아?”

“맞는 거 같은데? 똑같이 생겼잖아.”

남자들은 가방을 뒤져 수희의 신분증을 찾아보곤 같은 연 씨란 걸 확인했다.

“좋아. 출발해.”

확인을 마친 남자가 말하자 봉고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갑자기 난데없이 납치를 당하자 수희는 두려워져 몸을 벌벌 떨었다.

‘오, 오빠아…….’

청 테이프로 팔다리가 묶이고 입이 막힌 수희의 눈에 안대가 씌워졌다.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전혀 알려 줄 생각이 없다는 소리였다.

겁이 났지만 수희는 침착하게 심호흡했다.

‘오빠가 구해 줄 거야. 그때까지 참으면 돼.’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두려움을 가라앉힌 수희는, 제 납치가 호진에게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상상도 못한 채 그렇게 낯선 이들에 끌려갔다.

* * *

오늘은 쉬는 날이지만 호진은 각성제 판매상의 잔당들을 잡아들여야 해 쉴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야 일을 마치고 돌아온 호진은 비어 있는 집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안 왔나?”

수희가 오늘 친구랑 놀러 간다고는 들었지만, 언제까지 오겠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핸드폰을 들어 ‘어디야?’라고 문자를 보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끝내주는 휴일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집에 있는 것들로 밥을 챙겨 먹고 TV를 보면서 문자를 확인해 봤지만 여전히 답장은 오지 않았다.

노는 데 정신이 팔렸나, 인상을 찌푸린 호진이 시계를 보니 8시쯤이었다.

얘도 성인인데 늦게까지 놀 수 있지, 하고 생각하면서 호진은 수희의 인스타를 확인했다. 어딘가 놀러 갈 때면 여기 갔다면서 인스타에 올리곤 하니까 위치라도 확인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올린 사진을 보고 호진은 숨을 삼켰다.

“……도지완.”

수희의 곁에 가장 두고 싶지 않은 남자의 얼굴이 보이자 호진은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지며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제는 없어진 미래 속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과 흡사한 상황에 호진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맛봤다.

다급하게 수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어 번 전화를 해 보고 받지 않자 오늘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 봤다.

- 여보세요.

“어, 선주니? 혹시 수희랑 아직 같이 있어?”

- 어? 안녕하세요. 수희 아까 5시쯤에 헤어졌는데…… 집에 안 갔어요?

눈앞이 아찔해진 호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통화를 마친 상태였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번 더 수희에게 전화를 해 보던 호진은 결국 꺼지는 전화기에 반쯤 미쳐 버렸다. 도지완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호진은 피가 아래로 다 쏟아져 나가는 기분을 맛보았다.

“또…… 또 당신이……!”

도지완. 그가 또 나쁜 짓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까드득 이를 악문 호진은 품에서 구체를 꺼냈다.

구체가 얇게 펼쳐지며 차르르 그의 몸에 착착 붙자 그곳에 남은 것은 은색의 아이언맨이었다.

“또…… 당신이 수희를 해친다면…… 나는 당신을 용서 못 해.”

연호진이 다리에 신성력과 이능을 두르고 뛰어올랐다. 그가 향한 곳은 지완의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 * *

“어라, 끊겼네.”

지호는 끊긴 지완의 전화기를 들고 머리를 긁적였다. 밥을 먹고 지완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그래 봤자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는 거지만.- 그사이에 전화가 온 것이다.

먼저 이를 닦은 지호가 나오기 전부터 울리고 있어서인지 받으려는 타이밍에 끊겼다.

왜 전화했는지 궁금했지만 지호가 아닌 지완에게 전화한 것이니 자신이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애매했다.

“뭐 해?”

“아…… 연호진 씨한테 전화 왔었는데요.”

“근데?”

“……전화 안 해 봐도 돼요?”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지완을 보고 황당해져 물었지만 지완은 코웃음 쳤다.

“필요하면 다시 걸겠지.”

자기가 걸기 싫다는 소리였다. 지호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진짜 급한 일이면 다시 전화를 하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완에게 핸드폰을 내밀자 그는 소파에 대충 폰을 던졌다.

“으악! 그걸 왜 던져요!”

그러다가 안 좋은 곳에라도 부딪혀 고장 나면 불편한 건 지완이었으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호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이리 와.”

“으…….”

갑자기 야릇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지호의 양 볼이 붉어졌다.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오래간만의 야한 스킨십이라 살짝 부끄러웠을 뿐이었다.

허리께를 더듬는 도지완의 손길에 배 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지호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매달리듯 입을 맞췄다.

맞닿은 입술 틈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어느새 지호는 밀어붙이는 도지완의 몸에 짓눌린 채 소파 위에 눕혀져 있었다.

“콩, 콩설이가 보는데에…….”

부끄러워진 지호가 그렇게 속삭이자 그의 티셔츠 안을 손바닥으로 더듬던 도지완이 픽 웃었다.

“보라지. 부모가 사이좋으면 자식한테도 좋은 거 아닌가?”

“자식이요?”

지호는 콩설이를 그렇게 생각은 안 해 봤기에 얼떨떨해하다가 얼굴을 확 붉혔다. 부모가 사이가 좋다는 건…… 지완과 그가 부부라는 소리 아닌가.

그 말에 가슴이 설레고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혹시 오해했던 걸까?’

지호는 지완이 자신의 몸만 원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헷갈렸다. 자신과의 관계를 부부라고 칭할 정도면 깊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헤실헤실 웃으면서 제 볼을 어루만지는 지완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갑자기 왜 이렇게 귀엽게 굴어?”

애교 부리는 지호의 모습에 기분이 좋은지 지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렸다. 얼굴 곳곳에 가볍게 내리눌러진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짙어지고 집요해졌다.

입술 근처까지 닿아 자연스럽게 지호가 입을 열려는 그 순간, 갑자기 베란다 창문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으악!”

놀라서 신성력으로 배리어를 펼치며 지완의 머리를 꽉 끌어안은 지호가 베란다를 쳐다봤다. 이곳이 47층이라 돌을 던진 거 같진 않고 운석이라도 떨어진 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지호의 눈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신지호 이거 놔…….”

“……연호진 씨?”

“뭐?”

지호의 중얼거림에 지완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지완과 은밀한 짓을 하던 걸 호진에게 들켜 부끄러워진 지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그런데 왜 창문으로 들어와?’

문이 있는데 얼마나 급하기에 창문으로 들어오나 싶어 한마디 하려는데 갑자기 호진이 창을 빼어 들었다.

“이게 미쳤나?”

연인의 시간에 무례하게 난입해 무기를 꺼내 드는 호진을 보며 지완은 열이 받은 거 같았다. 무기는 정리해 방에 두었는데 호진의 태도를 보아 방에 갔다 오게 둘 거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근처에 있는 탁상 등을 손에 쥐었다. 몸체가 묵직한 금속으로 되어 있는 거라 어느 정도 둔기로 쓰기에 괜찮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야?”

지완이 인상을 쓰고 외치는 동시에 호진이 달려들었다. 지호는 그 광경을 보며 후다닥 일어났다.

“연호진 씨! 왜 이래요!”

“미친 새끼가 진짜 단단히 돌았네!”

콰앙! 탁상 등을 거꾸로 든 지완이 호진의 창을 쳐 내더니 탁상 등의 밑면을 밀어 호진의 턱을 가격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헬멧을 쓰고 있었으나 충격은 전해졌는지, 호진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나 달려드는 지완을 보며 바로 정신을 차린 호진은, 창 끝에 새햐얀 신성력을 두르고는 창을 크게 휘둘렀다.

“이런 미친 새……!”

“으아악!”

그러자 반달 같은 기운이 창에서 쏘아져 나왔다. 지완은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으나 가구와 벽들은 아니었다. 가구가 터져 나가고 벽이 뻥 뚫렸다.

지호는 엎드려서 호달달 떨고 있는 콩설이를 안아 들었다.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꼬리를 말고선 짖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안 되겠다. 일단 콩설이를 피난시키고 연호진 씨를 설득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콩설이를 안아 들고 바깥으로 도망쳤다. 지호가 없어지자 지완은 걱정거리가 사라졌는지 아까보다 적극적으로 호진과 박투했다.

“이……이게 무슨 소리예요?”

바깥으로 나오자 굉음을 들은 채우가 현관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대답 없이 콩설이를 안고 채우가 묵고 있는 옆집으로 들어가자 그가 따라왔다.

“아니 여긴 왜…….”

“콩설아. 여기 있어?”

“아니, 개를 왜 여기 놔!”

질색하는 채우를 무시한 채 콩설이를 내려놓자 말을 알아들었는지 윤채우가 마련한 소파 아래로 기어 들어가 숨었다. 콩설이의 안전이 확인되자 지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왜 개를 자기 집에 들이냐며 펄쩍펄쩍 뛰던 채우도 지호의 뒤를 따라 지완의 집으로 향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사이 집 안은 더욱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벽은 걸레처럼 헤집어져 있고 가구는 다 동강이 난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 상황에 깜짝 놀라는 채우였지만 그에게 설명할 시간도 없었기에 지호는 다급하게 외쳤다.

“연호진 씨! 대체 왜 이래요! 그만하세요!”

“어? 연호진? 저…… 저, 사람이 연호진이라고요?”

채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이언맨 같은 갑옷을 입고 있어 지호가 말하기 전까지 누군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채우의 놀라움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연호진이…… 신성력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단박에 그것이 신성력이라는 걸 알 수 있는 힘을 호진이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신성력 사용자가 이 땅에 존재하다니…… 그제야 채우는 계획들이 왜 실패했는지 눈치챘다.

‘저자가 우리의 일들을 방해했구나.’

물론 그건 아니었지만 신성력 사용자가 그들의 일을 방해한 건 맞았다. 연호진 외 다른 신성력 사용자가 있을 거란 생각을 전혀 못 했다.

“저게 연호진이라고요? 이상한 코스프레 남이 아니고?”

“아, 맞다니까요?”

채우가 확답을 위해 지호를 붙잡고 묻자 지호는 성질을 내며 말했다. 채우는 지호의 말에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나만 알고 있다니!’

재수 없는 1사도도 모르는 이 정보를 어떻게 써야 할지 채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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