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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87화 (87/88)

87화

이대로라면 기쁨을 감출 수 없을 것 같아 채우는 살며시 뒤로 물러났다. 그가 몸을 숨기고 이 상황을 지켜보자 방해받을 일이 사라진 지호가 더욱 적극적으로 호진을 말리기 시작했다.

“연호진 씨!”

둘의 공세가 주춤하는 틈에 두 사람 사이로 달려든 것이다.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자신이 끼어들면 공격을 멈출 거라는 영악한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신지호!”

“으……!”

지호의 생각대로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중간에 끼어든 지호 때문에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지호는 호진에게 다가갔다. 이 일의 시작은 모두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그와 대화를 함이 옳았다.

“신지호! 미쳤어?”

지호가 호진에게 다가가자 화가 난 지완이 소리를 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다가가 말리고 싶었지만 제가 움직이면 호진이 그걸 위협으로 받아들여 지호를 공격할까 두려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답답함에 소리만 지르는 지완을 무시한 채 지호는 얌전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호진에게 양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연호진 씨.”

“…….”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지호는 알 수가 없었다. 지완이 마왕이 되는 걸 저지하려는 자신의 일에 협조하기로 한 게 아니었나? 이제 와서 뒤통수를 치는 그의 태도에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화를 내야 하는 건 본인들이라고 생각한 지호와 달리 호진은 화낼 명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화를 삭이려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호진은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을 담아 떨리는 창끝으로 지완을 겨눴다.

“저 사람이 또다시…… 하니까.”

“네?”

떨리는 목소리는 너무 작아 지호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청각이 좋은 지완은 들었는지 입에서 황당하다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이 들렸다.

호진의 분노가 지완에게 전염된 건지 지호의 등 뒤에서 뜨거움이 느껴졌다. 갑자기 훌쩍 다가온 지완은 지호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딴 개소리 들을 필요 없어. 그냥 저놈이 원래 저런 새끼였던 것뿐이야.”

“…….”

“남의 뒤통수나 치며 배신하는 쓰레기.”

지완의 무슨 말이 호진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그의 눈빛이 살기를 담고 번뜩였다.

“배신자는 당신이잖아!”

“…….”

“아, 아닌가? 처음부터 같은 편이었던 적이 없으니 배신은 아니지.”

“이 새끼가…….”

“그저 나만, 당신을 믿었던 거지. 운명 따위에 휘둘리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동정하면서.”

조롱이 담겼던 얼굴에 곧 비웃음이 잠깐 비치다 다시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또 내 동생을 어디다 숨겼어! 이 씨발 새끼야!”

* * *

1회 차. 그러니까 이제는 사라진 미래에서 호진은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

스스로도 진부한 설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말고는 적절한 설명이 없었다.

호진의 인생은 불우하다면 불우했다. 조실부모하여 스스로도 책임지기 벅찬데 여동생까지 책임져야만 했다.

그런데 그 여동생이 평범하지 못했다. 신이 그에게만 불행을 쏟아붓기라도 한 듯 여동생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난치병. 돈은 계속 들어가는데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여동생은 그의 인생에서 깨진 물항아리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의 성격이 조금만 이기적이었더라면…… 아픈 여동생은 나 몰라라 하고 혼자서라도 살아갈 길을 모색해 봤겠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남은 가족이 그녀뿐이니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약이 있으면 나아질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호진이 영약을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자신은 못 먹고 못 입어도 버는 족족 남김없이 여동생에게 쏟아붓기만 했다. 그게 그녀의 생명줄이었으니까.

물론 불행만 계속되었다면 진작에 질식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가 숨 쉬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간혹, 가끔 행운이 따랐다.

의무적으로 한번은 볼 수 있는 헌터 등급 검사에서 F급이 뜬 것이었다.

일반인과 거의 다른 점이 없는 허접한 등급이었지만 그것이 그에게 숨통을 틔워 줬다. F급은 쓰레기 같은 등급이었지만, 일반인과 다르게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니까.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잡으며 살 생각은 없었다. 그것보다 돈을 덜 벌지라도 안전한 어시스트 일을 할 생각이었다.

헌터 일보다는 덜 번다고 하지만 그간 그가 했던 노가다와 야간 알바들보다는 훨씬 많이 벌 수 있는 일이었다.

덕분에 숨통이 트였고 빡빡하긴 해도 이 삶에 만족했다. 그에게 욕심이 있다면 여동생이 나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어시스트 일을 하며 10년을 보냈다. 30대가 되었지만 여동생은 여전히 아팠고, 그는 여동생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다.

간혹 같은 나이대의 헌터들을 볼 때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아쉬워하진 않았다. 그들의 삶은 화려했지만 위험했기에, 지켜야 할 존재가 있는 그에게는 알맞은 삶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신 포도처럼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올려다보기에는 너무 높은 곳들이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그때의 도지완은 그의 눈에 신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여동생이 팬심으로 좋아하는 상대였지만 어느새 그도 동경하게 되었다.

하나 신이 인간과 같은 자리에 있을 순 없는 법. 같은 업계에서 일하면서도 호진은 한 번도 지완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 * *

갑자기 여동생의 상태가 나빠졌다. 돈만 계속 부어 준다면 나아지진 않아도 악화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나 보다.

호진은 여동생이 중환자실로 옮겨지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의 준비요?”

의사의 말에 호진이 그의 말을 무심코 따라 하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준비 따위는 할 생각이 없었다.

의사에게 매달려 방도가 없겠냐 물어봤지만 의사는 메마른 말투로 말할 뿐이었다.

“영약이 있으면 달라지겠지만…….”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게 영약이었다. 던전에서 만들어지는 영약은 대부분 돈 많은 자들의 배 속으로 들어가니 말이다.

호진은 제 심장을 떼어 달라면 줄 수 있었지만 영약은 그의 능력 밖의 것이었다. 10여 년간 어시스트 생활을 하며 동생에게 쓰고 남은 돈들을 모아 놨음에도 그것으로 영약을 사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사장님. 도와주세요. 제가 평생에 걸쳐서라도 갚겠습니다.”

10년 동안 몸을 담은 회사의 사장에게 무릎도 꿇어 봤다. 하지만 그도 난색을 표하긴 마찬가지였다.

“호진아, 내가 너를 진짜 많이 아끼는 거 알지?”

“사장님…….”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사장은 괴로운 듯 인상을 썼다가 차갑게 말했다.

“영약이 한두 푼으로 구해지는 게 아니잖아. 구했다 쳐. 그럼 너 평생 그거 갚으면서 살 거야?”

“그래야 된다면…….”

“가족……. 소중하지. 그런데 너도 몇 년만 더 있으면 35세야. 곧 마흔이고. 50대가 되고, 60, 70을 넘어 80세가 되어도 이 일 계속할 거야?”

눈물 흘리는 호진의 어깨를 사장이 가볍게 그러쥐었다.

“호진아. 너는 할만큼 했어. 10년간 널 봐온 내가 보증할수 있어. 그래도 안되는건 안되는거야.”

안타깝지만 여동생을 놔주라는 말에 호진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러나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루한 몸뚱이라도 담보 삼아 영약을 구매할 돈을 빌려 보려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영약? 이보쇼. 그런 게 있으면 내가 먹지. 아니, 팔아 버리지.”

그가 만난 사채업자들은 하나같이 호진의 이야기를 듣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영약을 주고 당신 몸을 사자니…… 너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데?”

“5천만 원에도 벌벌 떨며 광산으로 가는 애들이 발에 차이고 넘쳐. 다 늙어 빠진 네놈 몸을 그 가격에 사라고?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어?”

결국 꺼지라는 소리를 들으며 쫓겨나올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거부당하자 호진은 악에 받쳤다.

왜? 어째서? 세상은 그에게서 앗아 가려고만 하는가?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낸 적도 없었고,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살아왔다.

그저 보람 있게 일할 수 있는 직장. 퇴근해 몸을 누일 수 있는 아늑한 집. 소중한 가족의 건강. 그런 소소하고 자그마한 행복들을 바랐다.

그게 죄라도 된 것인가? 호진은 결국 해서는 안 될 선택까지 하게 되었다.

* * *

재벌가에는 비상약처럼 영약이 한두 개 정도는 구비 되어 있다고 하니, 그걸 훔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호진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경호원으로 취직했다. 유단증 같은 것도 없고 관련학과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헌터 등급이라는 것이 있어 취직하는 것은 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재벌의 집에서 파티가 벌어진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가 다니는 경호 회사와 계약한 집이었기에 호진은 자연스럽게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경비를 서도록.”

그를 이끌고 온 팀장이 마지막으로 말하며 각자가 지킬 위치를 알려 주었다. 호진은 그곳에서 천천히 눈치를 보다가 파티가 무르익어 사람들이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을 때를 노려 2층으로 향했다.

파티는 1층에서만 열리고 있어 그가 2층에 올라온 것을 들키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다들 술에 취한 덕에 2층으로 올 동안 만난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좋아…… 이곳 어딘가에 있을 텐데…….’

호진은 닥치는 대로 문을 열어 방을 확인했다. 서재 같은 방이 보이기에 안쪽으로 냉큼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금고를 발견했다.

당연히 영약은 그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금고를 더듬어 봤지만 단단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능력자 대비용 금고인 것 같은데…….’

호진은 초조해졌다. 너무 오래 이곳에 있으면 누군가가 자신을 의심할 터였다. 재벌가에 잠입할 수 있는 일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여동생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 찾아야 해.’

그렇게 서재 곳곳을 뒤지며 금고 비밀번호에 대한 단서를 찾던 그는 어떤 서랍을 열어 보던 중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당연히 금고 안에 있을 거라 생각한 영약이 서랍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짠가?’

그런데 영약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가짜 같지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병을 쥐어 본 호진은 이것이 진짜임을 깨달았다.

‘드디어 찾았어!’

여동생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한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자신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서재 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말이다.

“쥐새끼가 있었군.”

“헉!”

깜짝 놀란 호진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양손으로 병을 꽉 쥐었다. 이것만은 빼앗길 수 없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떨리는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호진은 더욱 당황했다. 그 상대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지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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