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As Above, So Below
티뷸라 궁 황금 사원의 염불 외는 소리가 이른 아침부터 자명종을 대신했다.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 아침 의식이 시작된 것이었다. 하품이 비집고 나올 새도 없이 입가에 웃음이 먼저 스며들었다.
아마 예전이라면 나 역시 동이 트기도 전에 어느 누구보다 제일 먼저 불당에 도착해 있을 터였다. 분주하게 향을 피우고 부처에게 예불을 드리기 위해 몸가짐을 단정하게 다듬었겠으나, 나는 이제 더는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얀색 솜이불이 꽁꽁 감싸 쥔 몸이 노곤하게 굳어져서 추위에 달달 떨렸다. 궁에 기거하는 여타 승려들은 보통 육체 단련을 중점으로 하는 수행에 열을 올렸지만 애당초 나는 그 선택지부터가 달랐다.
서쪽의 룸버린과 로고스 연합군과의 전쟁이 숨 쉬듯 잦은 이런 시기에 구태여 군부에 몸을 담고 공연하게 헛된 죽음을 자초할 이유 따윈 없다.
장서각에 처박혀서 먼지가 풀풀 날리는 수천 권의 경전들과 눈싸움하며 그 지루한 내용을 달달 외우는 대신, 그렇게 나는 내 하나뿐인 목숨을 온건히 보전할 수 있었다. 경장부터 시작해 율장, 논장의 단계까지 약 몇 천 부에 육박하는 삼장을 모두 독파하고 이제 막 삼장법사의 칭호를 단 지 꼭 일년째 되는 해였다.
우매한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의 이념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내 자신이 부처임을 인지하는 아라한의 깨달음이 들어섰다. 그것도 상당히 삐딱한 방향으로.
문건상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대종말 이후로 약 반 세기가 흘렀다. 지금은 대부분 침수됐거나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돼버린 사만 개의 지하 돔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미 새로운 문명을 이룩하기엔 너무나 지쳐버린 상태였다. 인간이 감히 신의 과업에 겁 없이 도전했기에 그에 응당한 벌을 받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에게 더 이상은 신의 존재가 남아 있지 않았다.
슬슬 이부자리에서 기침을 하려다가 목에서 가래 낀 기침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아, 나 감기 걸렸나 봐. 날씨 한번 빌어먹게 춥다.
“관음존자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
하마터면 밥 먹다가 체하는 줄 알았다. 못 들은 척 젓가락을 꾸물꾸물 움직였지만 불행히도 접시 안에 담긴 두부부침이 대부분 내 배 속으로 사그라지고서 이제 거의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입안에 든 밥알을 어금니로 질겅질겅 씹어 녹이며 소리가 난 쪽으로 눈을 마뜩찮게 돌렸다.
“지금 당장, 오시라는데요.”
비구니가 말에 단단히 힘을 주지 않아도 그녀의 부릅뜬 눈동자가 충분히 무언의 압박감을 자아냈다. 관음존자.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자칭 타칭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일컬어지는 그자의 호칭은, 이곳 환영제야단에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내가 현재 가장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물 일 순위였다.
작금의 세상은 신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종교 체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바포메트를 숭상하며 사타니즘에 빠져버린 서쪽의 칙칙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방 세계의 곳곳에서는 바로 우리 환영제야단의 불교적 가르침과 수행법이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그것은 종교와 정치, 군대를 통합하는 신개념의 체제였다.
역사상 결코 어떤 독재자도 해내지 못했던 것을, 모든 것들이 단숨에 허물어진 이후로 누군가가 쉽게 이루어내었다.
관음존자 아돌프.
그는 환영제야단 전체를 이끄는 우두머리이자 흡사 거대한 요새를 방불케 하는 이곳 티뷸라 궁의 주인이기도 했다.
최대한 미간을 구기지 않으려고 안면 근육을 열심히 조절해봤으나 목에서 자꾸 쓴물이 꾹꾹 올라오는 것은 나도 별수 없었다.
남자들의 것과는 상반되는 하얀색 제복을 걸친 비구니의 뒤를 따라서 십일면관자재보살이 음양각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긴 복도를 걸었다. 열한 개의 얼굴에 아로새겨진 스물두 개의 눈동자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비단 내 기분 탓만은 아니고 관음존자의 수정궁으로 향하는 방문객들을 일일이 감시하는 카메라가 그 눈 안에 장착된 탓이었다.
그리고 이 복도의 끝에서는 눈길만 스쳐도 임신하는 게 아니라 더부룩하게 급체할 것 같은 관음존자와의 깜짝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악의 행업을 말미암아서 자신의 업보가 정해진다는 불법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나는 잠시 나의 지난날 과오들을 되새겨보는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방종하게 굴다가 하필 오늘따라 큰맘 먹고 아침 의식을 빼먹었더니 이윽고 부처께서 큰 벌을 내리시는구나.
뭐, 당신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야 저도 어쩔 수 없죠.
들어가겠습니다.
입구로 안내하자마자 부리나케 복도 끝으로 달음질쳐가는 비구니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훑어보다가 번득 제정신을 차렸다. 이 지옥도를 열기 직전, 마음속으로 한 가지 염원을 절박하게 되뇌었다.
세존이시여, 항상 이럴 때만 당신을 찾는 이기적인 놈이지만 부디 저를 저 간악한 아수라의 화신으로부터 지켜주소서. 그 보답은 저녁 예불 시에 제 불심 넘치는 마음으로만 성심껏 공양하겠나이다. 왜냐하면 근래 들어 세간의 인심이 흉흉한지라 제 탁발 사정이 그리 좋지가 않사옵니다.
관음존자의 수정궁은 벽화와 불상들, 갖가지 만다라들의 다채로운 색상들로 이루어진 티뷸라 황금 사원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으로 저 홀로 몹시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마치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섬 같았다.
하기야 지금 투명한 의자에 걸터앉아 나의 방문을 꽤나 시답잖게 흘겨보는 저 남자의 존재감 자체가 이곳과 가장 동떨어진 존재겠지만 말이다.
백색 크리스털로 빼곡하게 둘러싸인 수정궁 내부는 일종의 얼음 성전을 연상케 했다. 얼핏 보기엔 이곳을 찾은 방문자들을 금세 꽁꽁 얼려버릴 듯한 삭막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온종일 풀가동 중인 난방 시스템으로 인해 입김은커녕 그 아늑함에 저절로 하품이 날 정도의 몹시 따뜻한 온도가 전신에 전해졌다.
스스로 체온 조절이 안 되는 파충류들처럼 그는 추운 것을 유난히 싫어했고 그것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아돌프의 약점이기도 했다. 지리적 여건상, 심할 때에는 평균 기온이 마이너스 몇 십 도까지 떨어지는 포타라카보타낙가산, 普陀洛迦山, 불교에서 관음보살이 거처하는 산. 산스크리트로 Potalaka. 실제 지명의 위치와는 전혀 무관하며 환영제야단의 티뷸라 황금 사원이 위치한 장소를 넓게 지칭하는 말인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랬다고 그렇게 얼어 죽겠으면 제발 자기 발로 좀 떠나주면 좋으련만.
그때 레이저 총 같은 두 개의 붉은 시선이 한데 모여 정확히 내 이마를 겨냥했다. 불손한 마음가짐을 화들짝 들키기라도 한 듯 몸이 한껏 경직됨을 느꼈다.
아돌프.
관음존자라는 명칭이 어색하게 부합하는 저 남자는 이름에서도 금방 유추할 수 있듯이 아시아계의 동양인이 아니었다. 나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린 소년 같은 그의 외모에서 시체같이 창백한 피부색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동양적인 면모는 오직 새까만 머리색일 뿐이었다. 혼혈인이 길을 가다 발에 차이는 세상이건만 도무지 출처가 불분명한 저 불길한 적색 눈동자가 언뜻 보기에도 흡사 작은 악마 같았다.
어쨌거나 그는 환영제야단의 시초였던 석가여래의 부재 혹은 행방불명 이후로 순수 혈통의 동양인만이 득세할 수 있는 종단 무언의 법칙을 거스른 자였다. 단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최고의 권력을 양손에 거머쥔 난세의 풍운아이기도 했고.
그가 대체 언제부터 이 동쪽에 뿌리를 내리고서 완전히 정착하게 되었는지 그 시기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다만 외견상 그의 출생지가 분명 흑마법사들이 활개 치는 룸버린과 로고스의 서쪽 세상이라는 것만은 막연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등장했을 때부터 당시 종단 내부에서도 아돌프와 제대로 견줄 만한 자가 드물 정도로 그는 이미 완성된 실력자였다. 게다가 다른 피부색의 인종에게도 무한한 관대함과 포용력을 실천하셨던 석가여래 밑에서 아돌프는 차차 우리 환영제야단 수행 체제의 정수마저 완벽히 터득하게 되었다.
사실 아무리 타고난 천재라 할지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기 수행법의 정점을 찍는 일은 그리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개개인의 역량 차에 따라서 어쩌면 평생이 걸린대도 어느 일정 수준의 경지에조차 도달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아돌프는 동서양의 양쪽 기예를 통합한 뒤 너무나 쉽게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일무이한 인물이 되었으며, 이제 더 이상은 그에 맞설 만한 적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난데없는 불청객의 방문으로 엄격했던 종단 계율이 스스럼없이 무너져 내렸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불현듯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석가여래의 빈자리를 그가 대신한 것은 과연 전부 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럼에도 어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아돌프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다만 너무 강한 것은 부러지기 마련이었다.
그동안 아돌프에게 불만을 갖고 거세게 반발하는 내부적인 반란이 정기적으로도 벌써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아돌프라는 그 단단한 나무를 도끼처럼 찍어 내리려던 반란 주동자들과 공모자들은 도리어 사형대의 칼날에 자신들의 목숨을 허무하게 바침으로써 그에 따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약 삼년 전쯤 일어났던 마지막 반란 이후로 종단 내에서는 많은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대대적인 물갈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도 참으로 미안할 만큼 살아남은 숫자가 극히 적었다.
최종적으로는 종단 수뇌부의 여러 고승들이 나눠 가지던 힘이 오직 아돌프 하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또한 막대한 예산을 바탕으로 이곳 수정궁이 건축되었으며, 이 수정궁 자체가 바로 관음존자의 권력 집대성을 나타내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로서 자리 잡았다.
나는 수정궁에 발을 들인 후 긴장감으로 인해 잔뜩 경직되어 있던 몸을 천천히 이완시키기 위해 호흡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미 굳어진 어깨는 쉽사리 풀리지가 않았다. 다름 아닌 관음존자의 앞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관음존자와의 대면 탓이 아니더라도 수정궁의 방문객들은 누구나 행동이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이 안에서는 방문객의 모든 행동거지가 크리스털을 통해 마치 거울처럼 시시각각 다각도로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급적 오래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상관을 향해 합장을 하며 예를 갖췄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돌프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뒷부분에선 그다지 성의가 안 느껴지는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 인사의 원 뜻은 아미타부처와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하겠다는 의미로서, 아미타는 부처 그 자체를 뜻했다. 그러니 종단의 핏줄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웬 서양인 혼혈아가 자비로움으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구제하여 왕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관음보살의 이름을 잇겠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출가할 노릇이었다. 심지어 지금 저 스스로가 아미타부처와 같은 선상에서 그와 같은 존경을 받겠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했다.
승려 된 몸으로 아미타부처께 불경한 언사를 내뱉는 것이 참으로 마땅치가 않았으나 어쨌거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관음존자는 무표정하게 일관했다.
“내가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하는 건 말야.”
“…….”
“바른 말 할 줄 아는 놈들의 대부분은 이미 아미타부처의 극락정토에 귀의해 있고, 정작 내 주변에 남아 있는 놈들이라곤 좀처럼 얼굴 표정에서부터 거짓을 못 숨기는 겁쟁이들이지.”
“…….”
“하필이면 바른 말 할 줄 아는 놈들 중에선 제법 쓸모 있는 치들도 많았는데, 안 그래?”
차가운 목소리가 후끈한 공기를 꿰뚫고서 귓바퀴에 소름 끼치게 안착했다. 벼락출세로 인해 주변에 숨은 적이 꽤나 많으신 관음존자께서 심기가 뒤틀리는 것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상당히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고 계셨다.
시비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길은 일단 화제 전환밖에 없었다.
“저를 급하게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랬었지.”
아돌프가 투명한 좌석에서 느긋하게 일어났다. 그는 수정 벽들과 원륜 형의 윤원구족輪圓具足 바닥으로 이루어진 널찍한 홀 안을 벗어나기 직전, 나를 흘끗 바라보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한 눈짓을 남겼다. 영원한 시간의 수레바퀴처럼 복잡하게 이루어진 낱낱의 톱니 바닥이 삐걱대며 발아래에서 불안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기분상 그리 썩 내키진 않았지만 나는 나선형 계단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수정궁 3층에 마련된 아돌프의 서재 안은 진공 안의 어두운 세상이었다.
내가 문을 닫은 즉시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이 어두컴컴한 심연의 한 자락을 들여다보듯, 아돌프의 깊은 의식 세계가 만들어낸 광활한 우주 공간이 생겨났다.
일전에 삼장의 칭호를 받고 나서 이번이 꼭 두 번째의 방문이었다.
수세기 전 대문호로 불렸던 보르헤스에게서 영감을 받아 아돌프가 창조해낸 바벨의 도서관.
사용법만 잘 숙지하고 있다면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이야기들까지 전부 찾아볼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법칙이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에 넓게는 평행우주의 세계로부터 문서를 가져오거나 혹은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들까지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었다.
다만 자료의 양이 무한대였기에 단순히 상상만으로는 자료가 비치된 정확한 좌표를 찾기가 어려웠고, 설령 그것이 내가 원하는 자료일지언정 그 언어 체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면 그냥 무용지물에 가깝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암흑의 공간 안에서 둥둥 떠다니던 아돌프가 손가락 끝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일순간에 상하좌우를 향해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서가가 생겨났고 아돌프의 손이 어떤 것을 캐치하는 순간, 다시 빛과 함께 모든 것이 사그라졌다.
“일단 편하게 앉아 있어.”
그의 명령과 동시에 긴장감으로 여직 뻣뻣하게 굳어 있던 다리 뒤로 갑자기 푹신한 의자가 생겨나더니 내 엉덩이를 떠받쳐주었다. 나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 관음존자의 좌석 또한 생겨났고 아돌프는 그곳에 착석한 뒤 자기 손에 들린 책을 휙 던져주며 읽기를 종용했다.
나는 책을 받아 든 채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이게 대체 뭡니까.”
“고대 아틀란티스의 유물, 에메랄드 태블릿의 원본과 그 해석이 담긴 서적이다. 네 낮은 지적 수준에 맞춰주느라 좌표 검색에 꽤나 애먹었지.”
아돌프의 눈물 나는 배려에 나는 몹시 감동하여 눈을 퀭하게 치켜떴다. 썩을 새끼.
“표정 관리하느라 공연히 힘 빼지 말고 내가 너한테 이걸 왜 줬을 것 같은지나 잘 생각해봐.”
나는 눈알을 굴리다가 금방 포기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허구한 날 장서각에 처박혀서 경전하고만 눈씨름을 했던 네가 바로 알 거라곤 나도 생각 안 했다. 그래도 한번 곰곰이 궁리해봐.”
손에 들린 초록색 가죽 표지를 잠시 눈여겨보며 서쪽의 꼬부랑 글씨로 올록볼록 튀어나온 제목에 집중하는 시늉을 했다. 대체 뭐라고 쓴 거지?
비록 까막눈일지언정 그래도 눈치는 있었다.
“에메랄드 태블릿이라면…… 그노시스의 구세주라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의 위대한 유산이자 지금도 서쪽 마법사들과 연금술사들에겐 열렬하게 떠받들어지는 경전과도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이걸 왜 저에게 주신 겁니까?”
“그래도 표면적인 의미로나마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군.”
관음존자가 손끝을 움직이자 내 손에 들렸던 책장이 저절로 휙휙 넘겨졌다.
“다른 건 됐고 지금 펼쳐진 바로 그 부분이 서양 마법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자 세상 모든 이치의 핵심이지.”
제멋대로 펼쳐진 부분에는 당연히 어느 하나 눈에 익은 구석이 없었다.
Et quod est superius est sicut quod est inferius,
ad perpetranda miracula rei unius.
(As Above, So Below)
그때 나의 까막눈을 대신하여 관음존자의 자동 음성 번역기가 재생되었다.
“Et quod est superius est sicut quod est inferius, ad perpetranda miracula rei unius.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과 같고,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과 같다.”
내가 통 알아듣지 못하는 구절을 자연스레 술술 외우는 관음존자에게 처음으로 묘한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평소 행적이 존경과는 거리가 먼 위인이었다.
“위와 같이 아래에서도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마법이라는 모든 기예가 작동하는 원천이다. 이걸 네가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자면, 불법에서도 자연을 대우주로 인간은 소우주라고 일컫듯이 음과 양, 빛과 어둠, 해와 달, 하늘과 땅, 겉과 속, 남과 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물질과 정신처럼 모든 것은 결코 이원성의 법칙에서 절대 벗어나질 못해. 물아일체를 깨닫지 못하고 외부와 내부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면 수행 자체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곧 우주이며 우주가 곧 나임을 깨닫는 것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헤르메스가 직간접적으로 역설한 것이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하지 않으려고 조금 애를 썼다. 종단 코흘리개 동자승도 다 알 법한 얘기를 새삼스레 하다니.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입니까.”
“신관 헤르메스는 에메랄드 태블릿이라고 불리는 그 비취색 석판에 아주 엄청난 비밀을 남겼어. 단순히 문자 그대로 해석되는 언어가 아닌, 굉장히 정교하고 복잡한 암호문으로 얽혀 있는 비전들을 말이야.”
어쩐지 조짐이 영 좋지가 않았다. 뭔가 난데없이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될 듯한 찝찝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관음존자를 향한 방어 태세에 돌입하려 했다. 그러나 화제를 먼저 돌려준 것은 고맙게도 관음존자였다.
“로고스와 룸버린에서 지난번에 자히르나 구역을 통째로 빼앗긴 후로 아마 꽤 마음이 상한 모양이야.”
당연히 그렇겠죠. 주요 본거지들 중 제일 큰 물자 저장고를 불시에 습격당하고 완전히 만신창이가 됐는데 그쪽 입장에선 그 심정이 어련했겠습니까.
오랜 전쟁으로 인해 잠시 서로 전력을 보충하고자 당분간 임시 평화 협정을 맺은 것을, 단 하루아침 만에 싹 개무시하고 자히르나에 진격 명령을 내린 것은 다름 아닌 저 아돌프였다.
물론 이번 자히르나 습격전에 내가 직접 참가한 게 아니라서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는 자세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피눈물을 철철 흘려가며 이 개만도 못한 비열하고 더러운 XXXX들이라고 갖은 쌍욕을 쏟아부으며 처절하게 죽어갔다는 희소식만큼은 나 또한 고스란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전날 평화 협정을 맺고서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차에, 그것도 오밤중에 불쑥 쳐들어온 종단 장병들을 향해 적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악의에 가득 찬 말들이었다.
유독 고전을 면치 못했던 자히르나 격전지에서 간만에 들려온 대승전보였으나, 사실 이기고도 찝찝한 싸움이었다.
“어찌 되었든 연합군 쪽에선 나름대로 이를 악물고 우릴 아주 제대로 엿 먹일 작전을 세운 모양인데, 지금 너에게 건네준 그 에메랄드 태블릿과 커다란 관련이 있지.”
“설마 아까 말씀하신 석판에 숨겨졌다는 그 비전 말입니까?”
“그래. 수천 년간 그 숨겨진 내용을 해석해보겠다며 나선 이들은 셀 수없이 많았어도 전부 엉터리거나 주요 핵심에는 아예 접근조차 못했는데, 암만 멍청한 돌대가리들이라도 여러 개가 한 번에 부딪치면 가끔은 부싯돌이 되나 봐.”
내가 가끔씩 생각하는 건데 차라리 아돌프 이놈을 적들에게 아예 넘겨줘버리면 이 오랜 전쟁도 평화로운 방향으로 잘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상상과 현실의 갭은 자고로 큰 법이었다.
오래전 석가여래가 계셨던 시절만 해도 평화와 자비의 상징이었던 우리 환영제야단의 평가를, 단박에 삼류 깡패 불한당으로 끌어내린 그 장본인께서 지금 내 눈앞에서 사특하게 웃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긴 어찌 보면 저놈이 적이 아니란 게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나는 지금 주제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지만 이대로 대화를 뚝 끊어먹기엔 상대방이 너무 강적이었다.
“그렇다면, 비전의 암호문이 드디어 풀린 겁니까?”
“아니, 실패했어.”
내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던 관음존자는 잇따라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사뭇 불편하게 굴었다. 방금 전 관음존자를 꽁꽁 묶어서 연합군을 향해 던져주는 유쾌한 상상을 했던지라 나를 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지레 움찔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본디 괴물 같은 놈이었지만 그래도 독심술 같은 능력은 없는 걸로 안다. 만약 그랬더라면 나는 지금쯤 이 자리에 아예 없었겠지.
아돌프가 핏기 없는 입술을 열었다.
“사실 지금 너하고 한가하게 노닥거릴 틈도 없는 굉장한 위급 상황인데, 알고 있어?”
“…….”
“실패했다곤 하지만 예후가 좋지 않아.”
누가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아돌프가 왜 구태여 예후라는 단어를 현 상황에 빗대어 사용했는지 급속도로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낌새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다시 선수를 쳤다.
“헤르메스의 숨은 비전에 접근한 것까진 좋은데 내가 알기론 이집트의 마기Magi이자 토트의 화신이었던 신관 헤르메스는 매사 그렇게 허술한 자가 아니었거든. 대종말 이후로 지금은 완전히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라는 곳에는 헤르메스가 고대로부터 전해진 아틀란티스의 지혜들을 아주 비밀스럽게 기록해놓았었지. 현재까지도 전해져오는 에메랄드 태블릿은, 피라미드 안에 있었던 열두 개의 석판들 중에 열 개 부분이고 남은 두 개의 석판은 일반에 공개될 시 그 엄청난 파장을 우려해 공개 자체가 아예 금지되어 있었어. 물론 이곳 바벨의 도서관에서는 그 남은 부분도 얼마든지 열람이 가능하지만.”
아돌프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그와 나 사이에 어두운 공간을 가리키며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 공간의 주인은 애초에 아돌프였기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의 언령이자 로고스logos, 언어에 따라 글자들이 허공 위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현재 적대 세력이지만 한때는 몸을 담았던 바로 서쪽의 로고스에서 그가 부여받았던 능력 중 하나이기도 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붉은 눈의 언령술사는 절대적인 말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과 같으며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과 같도다
이리하여 하나 됨의 기적을 이루었느니라
만물이 하나인 존재의 한 말씀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만물은 이 하나 됨을 적용하므로 생겨나는 것이다
가장 큰 지혜를 가지고 지상으로부터 천상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라
그리하여 위에 있는 것과 아래에 있는 것들의 힘을 하나로 합일시키라
그러면 그대는 온 세상의 영광을 얻을 것이며
어둠이 그대로부터 멀리 사라지리라
“지금 네 눈앞에 보이는 글자들은 바로 에메랄드 태블릿의 어느 일부분이다. 뭐 금지되었던 부분은 아니지만 단지 여기 적힌 내용만이라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것이 가져다줄 가치는 꽤 무궁무진하지. 물론 네가 이것의 진위를 파악할 거라곤 추호도 예상치 않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아, 이놈님 앞에선 유독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원래의 석판은 고대 아틀란티스 언어가 기호들로 새겨져 있었어. 그리고 그 기호들은 그것을 마주하는 이의 마음가짐과 정신 자체에 감응되어 스스로 제 뜻이 드러나게끔 설계되어 있었지. 그러니 애초에 걔네들 목적부터가 결코 순수하지 못한데 석판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해석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고.”
“…….”
“이쯤에서 너도 슬슬 눈치챘겠지만 열람이 가능하다고 해서 내가 그것들을 전부 해석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당연한 말이지만 석판은 나에게도 그 힘을 전혀 개방해주지 않았으니까.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드나드는 쥐새끼들 때문에 이런 수정궁 따위는 짓지 않았겠지.”
그러고 보니 수정궁 건축 시에 아돌프가 공사 관계자들에게 따로 지시했던 사항이 있었다.
이왕이면 피가 잘 닦이는 바닥으로 해주겠나.
굳이 몰래 숨어든 쥐새끼들의 핏자국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이 아름다운 수정궁의 주인 자체가 타인의 혈흔을 끊임없이 탐닉하는 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숨겨진 비전을 그릇된 목적으로 깨우려 할 시, 석판 안에 신비한 힘에 의해 내재되어 있는 어떤 수호자 같은 것이 작동하도록 되어 있어. 뭐 아틀란티스의 병기라고나 할까.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라 뭐라 설명해줄 순 없지만, 단순히 지들끼리 까불다가 자폭하는 수준이 아닐 정도로 아주 상당히 위험한 존재야. 놈들이 삽질하는 귀여운 꼬락서니를 잠자코 지켜봐줬더니 고작해야 이딴 결과물이나 내뱉을 줄이야.”
짜증 섞인 음성을 끝으로 그답지 않게 친절한 설명도 막을 내렸다.
“그러니 삼장 네가 서쪽으로 긴히 좀 다녀와야겠다.”
귀가 물에 젖은 솜처럼 먹먹해졌다. 그러나 귀의 상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농담이시죠.”
그가 음산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내 말이 지금 농담같이 들리나.”
“…….”
“헤르메스의 유산은 그것을 깨우는 이가 선한 마음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합일시켰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만일 사악한 의도로 비전을 대했을 때에는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잠식되어버린다.”
“…….”
“간단하게 말해서 이 세상이 다시 한 번 멸망하기 직전이야. 어때, 설레지?”
이번엔 몸을 피해 숨을 구석도 없는데 말이야. 그가 나직이 덧붙인 말에 불현듯 땅속 깊숙이 무덤처럼 매장되어버린 지하 벙커들이 떠올랐다. 비록 돔의 생존자는 아니었지만 윗세대로부터 대물림되어 전해진 공포의 흔적만은 여전했다.
설령 정말로 다시 한 번 멸망의 시기가 도래한대도 차라리 기꺼운 죽음을 맞이했으면 했지, 아마 그 끔찍한 지옥으로 되돌아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미 오염된 물들로 모두 침수되었다고 전해지지만, 비단 침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미 사만여 개의 달하는 지하로 통하는 돔의 입구는 모두 철저하게 봉쇄된 지 오래였다.
그곳엔 대종말 이전의 인류가 과학적으로 발달시켰다던 눈부신 문명의 보고들이 저장되어 있다고 전해졌으나, 거기를 다시 열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분명 지하 세계의 망령들이 아직도 그곳에 갇혀 자신들의 처지와 같아질 새로운 희생자를 목 빼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는 뺨을 긁으며 멍청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내일 당장 멸망하는 건 아니겠죠?”
“어, 그야 그렇지.”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혓바닥이 간사하게 움직였다.
“관음존자께서 하신 말씀처럼 뭔가 굉장한 위기 상황이라는 것은 충분히 잘 알겠는데, 그러한 중대 사안을 제게 말씀하시는 까닭이 뭡니까. 전 애초에 군부 소속도 아닐뿐더러 이런 긴급 상황에 파견될 만큼의 어떤 큰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 제가 서쪽으로 가서 현 사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아돌프는 내 얘길 들으며 자기 턱을 쓰다듬던 손동작을 멈추더니 피식 입가를 찢었다.
“그래, 나도 왜 고작해야 너 같은 놈하고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가 의문이야.”
“…….”
“하지만 그게 설사 개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도 너는 내가 가라면 군말 없이 가야 되는 처지잖아? 게다가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입장마저도 전혀 아니지.”
관음존자는 서서히 일그러지는 내 얼굴 표정을 고스란히 뜯어보며 계속해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허나 관음존자의 이름에 걸맞은 자비심을 가지고서 내 친히 얘기해주지. 내가 너를 이 일의 적임자라고 생각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팔짱을 끼며 불만감을 표출했다. 평소 같으면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돌발적인 행동이었으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아돌프 저 개자식 때문에 죽는 건 매한가지일 거다.
“일단 거길 너 혼자서 쳐들어가라는 건 아냐. 아무리 네 목숨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나라지만 설마 이번처럼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일에 내가 너 하나 죽는 꼴 보려고 그런 무리수를 둘 리가 없지. 다행히 너 말고도 같이 행동해줄 불쌍한 놈들이 몇 명 더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이건 마치 죽으러 가는 길에 혼자 죽는 걸 억울해하지 말라고 저승 길동무를 소개해주는 꼴이었다.
인사해, 너랑 같이 죽어줄 애들이야. 싸우지 말고 다들 사이좋게 죽으렴.
관음존자는 점점 굳어지는 내 표정은 전혀 아랑곳없이 자기 할 말을 다 했다.
“그런데 그중 한 놈이 통제하기가 꽤 까다로운 녀석이라 술법에 능통한 실력 있는 주술사를 꼭 붙여줘야 하거든. 근데 쓸 만한 놈들이 진작 다 죽어버려서 말야.”
그는 키득키득 웃으며 스산한 목소리로 자기 말을 재차 정정했다.
아니, 다 죽여버려서인가.
종단의 쓸 만한 인재들을 모두 다 아미타부처의 극락정토로 귀의하도록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하나하나 보내주었던 살인귀의 말이니 신빙성이 아주 높았다.
“더군다나 내가 큰마음 먹고 금배지 달아줬으면 너도 슬슬 밥값은 해야 될 거 아냐.”
아돌프가 내 제복 가슴팍에 들러붙은 배지를 가리키며 못내 치사하게 굴었다. 헌데 이상하리만치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길이 자꾸만 겸연쩍었다. 유심히 관찰하는 듯한 눈초리. 예전에는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시선이었다. 관음존자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넌지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런 것도 어찌 보면 능력이지…….
순간 마음이 복잡하게 일렁였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건 둘째치고 이 난관을 극복할 타개책을 찾을 방도가 없었다. 빠져나갈 구멍 대신에 블랙홀처럼 거대한 구멍에서 나를 쭉쭉 빨아들이는 기분이었다.
방금 아돌프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가 않았다. 환영제야단의 수장이자 관음존자인 그가 내리는 명령은 언제나 절대적이었고, 요즘 같은 전란의 시대에 전력상으로도 크게 도움이 안 되는 나 같은 일개 법사 따위가 상부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나 역시 처음부터 종단 내에서도 비인기 종목인 이론 사상을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타고나기를 허약해빠진 내 육신이 종단의 엄격한 체력 테스트를 견뎌내지 못했을 뿐. 보통 삼장을 통달하는 과정은 말년 즈음에 요직에서 물러난 승려들이 더 큰 공덕을 쌓기 위해 선택하는 직업 중 하나였다.
그러니 아무리 겉으로는 세인에게서 존경받는 법사 칭호를 달았지만,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주인의 성품이 바뀐 종단에서는 더는 형이상학적인 부분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실력만이 최우선이었다. 그렇게 거의 모든 수행 분야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어린 내가 길바닥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절박하게 붙잡았던 것은, 다름 아닌 수천 권에 달하는 경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종단 역사상 최연소 삼장법사의 길로 인도해주었다.
그러나 삼장법사는 단지 삼장에 능통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호칭이 아니었다. 석가여래가 위험한 것이라며 엄중하게 금지했던 흑주술을 함께 통달한 자에게만 그 진정한 자격이 주어졌다.
관음존자 아돌프는 빛의 영역과 함께 어둠에 가려진 그림자 부분을 항시 중요하게 강조했다. 어두운 것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반쪽짜리 수행이라며,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하려면 자신 안에 내재된 어둠까지 포용하여 음과 양의 기운을 동시에 조화롭게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석가여래께서 인간의 본성은 본디가 나약한 것이라 누구도 어둠의 유혹에 쉽게 견뎌내지 못할 것이니 애초부터 그곳엔 발조차 들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설법하신 것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의견이었다.
삼장법사의 최종 시험에 통과하기 직전, 나의 마지막 일 년여 간은 그간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왔던 부처의 참된 가르침들을 힘들게 털어내는 고행의 순간들이었다. 관음존자는 그것을 ‘먼지’라고 불렀다. 그는 나에게 검은 씨앗을 심어주었고, 그림자에게 사로잡힌 마음이 점점 비대해져갈수록 내면에 깊게 감춰졌던 내 어두운 본성의 크기도 함께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추한 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직접 마주했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시궁창 같은 인생 속에서 미래에 언젠가는 찾아올지도 모를 희망들을 논하기보단 현실의 진짜 모습을 그 순간에 똑바로 직시하는 법을 배웠다고나 할까.
모든 사물은 그저 그 자체로서 존재할 뿐 나의 시선이나 생각은 실재하지 않았다.
어떤 느낌이나 감정 같은 것들은 그저 내 눈에 덧씌워진 색안경이 보여주는 환영에 불과했다. 십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나와 함께 그 과정들을 함께했던 몇몇 도반들은 도저히 견뎌내지 못한 채로 하나둘씩 나가떨어졌다.
최연소 삼장법사. 실상은 조금도 명예롭지 않은 직책이자 일종의 낙인에 가까웠다. 그리고 지금 내 가슴에 달린 이 배지의 진정한 의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를 틈타 관음존자의 음성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내 귓속에 꿈틀꿈틀 파고들었다.
현아.
…….
네 낯빛이 그리 좋지 못하군.
아돌프에게서 얼마 만에 듣는 내 이름인지 모르겠다. 내 나약한 구석과 약점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관음존자에게서, 아주 가끔씩 달콤한 목소리로 내 이름이 불릴 때면 어쩐지 묘한 감정이 왈칵 치솟았다. 참으로 우습지만 지금은 나보다도 작아진 저 관음존자를 내가 허리 아래서부터 선망의 눈길로 올려다보던 바보 같은 시절이 있었다.
반란에 가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아버지를 어린 내 눈앞에서 잔인하게 찢어발긴 저 남자에게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 구차한 충성을 맹세했었다. 복수심을 품기에는 한낱 겁에 질린 작은 어린아이였다.
열에 아홉이 쓸려나간 종단의 조직도를 상기했을 때, 살아남은 한 명은 그 어떤 불의에도 눈을 질끈 감았다는 의미였다. 비겁하단 소리도 좋고 눈뜬장님이란 말도 좋으니 그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기만을 바랐었다.
내 낯빛이 좋지 않다고 했나. 이 환란 속에서 그나마 목숨 하나 질기게 유지하는 것을 삶의 유일한 낙으로 생각하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이제 와서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라니.
“나도 내가 직접 갔으면 좋겠지만.”
“…….”
“지금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 처지라서.”
아돌프의 표정은 정말로 아쉬운 듯 보였다. 하긴 한때 종단 내에서 활활 타오르던 반란의 불씨가 이제는 거의 다 꺼져들어가던 시기라 근래 들어선 본의 아니게 꽤 심심해진 입장이긴 했다.
관음존자는 살짝 장난스러운 말투로 이야길 덧붙였다.
“게다가 바깥 날씨가 굉장히 추우니까.”
세상 어느 것 하나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이는 관음존자도 유일하게 추위에만은 약해지는 남자였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장난인지 진담인지 모를 그의 말에 진위를 가릴 필요는 없었다. 책임을 전가당한 내 두 어깨에 묵직한 체중이 실려왔다.
“가기 싫어 죽겠다는 네 얼굴을 보니 모쪼록 적당한 동기 부여는 해주는 게 좋겠군.”
“…….”
“네가 해야 할 일은 딱 두 가지야. 앞으로 서쪽에서 벌어지게 될 귀찮은 일들을 전부 처리하고 오는 것과 가능하다면 놈들이 발견해낸 그 에메랄드 태블릿의 판독본을 가져오는 것. 물론 전자는 필수불가결의 요소고 후자는 그냥 네 선택 사항이야. 만일 내가 말한 그것들을 무사히 해결한다면 네가 돌아오는 즉시 전단공덕불傳檀功德佛의 지위로 파격 승진을 보장해주지.”
승진을 담보로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도 모자라 그 와중에 에메랄드 태블릿의 판독본마저 훔쳐오라니. 진짜 기가 차다 못해 숨까지 턱턱 막혀왔다. 거기다 은근슬쩍 요구 사항을 하나 더 끼워 넣어, 판독본을 가져오지 못하면 결론적으로 승진이고 자시고 꿈도 꾸지 말라는 치사한 얘기였다.
관음존자는 허공에서 몇몇 서류들을 쓱 끄집어내어 내 코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앞으로 나와 함께 서쪽으로 떠나게 될 세 명의 불운아들의 인적 사항이 담겨 있는 서류였다. 나는 무성의하게 서류를 술렁술렁 들춰보다가 어느새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개중 두 명은 살짝 예상 밖의 인물들이긴 했으나 어떤 의미로는 환영제야단 내에서도 꽤 유명한 인사였기에 아돌프의 이번 간택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남은 한 명은 저 관음존자 밑에서 꽤 오랫동안 살아남아 나름대로 잔뼈가 굵어진 나로서도 난생처음 보는 정체불명의 사내였다.
손우경이라.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름인데 대체 누구지.
세 명의 인적 사항을 꼼꼼히 훑어보다가 나는 반쯤 포기한 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존경하는 나의 관음이시여, 제가 감히 뭘 좀 여쭙겠습니다.”
“어. 해봐.”
“……왠지 당장 죽어도 별로 관계없을 것 같은 멤버들로 구성된 게 비단 제 착각만은 아닌 듯합니다만.”
관음존자가 날카롭게 웃었다.
“난 예전부터 네가 눈치가 빨라서 참 좋더라고. 그래도 걔네들 다 실력들은 보장되어 있으니까 아마 너보다는 이번 일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마음속으로 살생을 금하라던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는 마음을 간신히 달래야 했다. 말인즉슨, 죽어도 상관없는 멤버에 사실상 나까지도 포함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아까부터 내 눈길을 잡아끄는 이 손우경이라는 남자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섯 개의 검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라면…… 관음존자인 당신께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오행산에 위치한 <다섯 개의 검> 수용소는, 관음존자의 정권 교체 이후로 입때껏 수십 차례나 이어진 반란으로 인해 그때마다 벌어진 무참한 살육대장정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을 수용하는 악명 높은 장소였다. 그러니 여타 전쟁 포로들을 수감하는 일반 뇌옥牢獄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실 아돌프가 막 권력을 거머쥐었던 종단 초창기 시절들만 해도, 아직 환영제야단에는 출중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 차고 넘쳐났었다. 그리고 그런 실력자들 중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은 거의 없었으나 결국엔 사형을 당하거나 혹은 교도소행으로 운명이 갈리게 되었다.
현재 이 수용소의 수감자들 현황은 약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었다.
이가 갈릴 정도의 괘씸죄로 아돌프가 두고두고 오래도록 괴롭히고 싶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직 살려둘 만한 이용 가치가 있었거나, 마지막으로 아주 소수지만 관음존자가 ‘차마 죽일 수가 없었던’ 자들만을 두루 모아서 수용했다(물론 그 세 가지 이유에 모두 적합한 인물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다섯 개의 검 수용소가 악명이 높은 이유는, 천리 밖에서도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잔인한 고문들을 공공연히 행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다섯 개의 지하층으로 이루어진 교도소 건물은 층수가 낮아질수록 죄질이 무겁고 다루기 힘든 죄수들을 감금한다고 전해졌는데, 바로 그 손우경이라는 남자는 감옥의 최하층인 5층에 수감되어 있는 자였다.
달리 말하자면 죄수들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위험한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 자를 제가 어찌 감당해야만 합니까.”
아돌프의 적색 눈동자에 고요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가 숨을 들이쉬며 적당한 말을 고르는 것이 느껴졌다.
“언젠간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일단 살려뒀는데…… 이제야 그 적당한 시기가 되었을 뿐이지.”
나는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관음존자가 그자를 살려둬야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도저히 죽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아돌프의 드높은 자존심을 손상시키지 않는 방법은 여기서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윽고 관음존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름 끼치는 과거지사를 한참 동안이나 멍하게 경청하다가 그만 모골이 송연해져갔다. 두 귀로 들으면서도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내 께름칙한 표정에 대고 아돌프가 별것 아니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 내가 방금 전에 설명해준 몇 가지 사항들만 제대로 기억하고 있으면 네게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물론 나도 장담은 못하지만, 현재로선 그 천둥벌거숭이를 가까스로 감당할 수 있는 적임자는 오로지 네가 유일하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관음존자에게 되물었다.
“분명 아까도 그랬고, 지금 관음께서는 제가 그자에게 가장 걸맞은 적임자라고 하셨는데 이유가 대체…….”
유난히 그 적임자라는 말을 애써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관음존자는 내 간절한 질문을 싹 무시해버렸다.
“당장은 말해줄 수 없는 사안이야.”
관음존자는 잔뜩 미심쩍어진 내 얼굴에 대고 히죽 웃어 보였다.
“뭐, 실제로 만나보면 내 얘기가 무슨 말인지 바로 깨닫게 될 거야.”
오늘따라 아돌프의 목에 걸려 있는 만卍자 문양의 목걸이가 유난히 신경에 거슬려왔다. 목걸이가 거꾸로 뒤집힌 채로 살짝 기울어 있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기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내 눈앞으로 순간 피로 얼룩진 불길한 잔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손끝이 흠칫 하고 떨려왔다.
방금 뭐였지, 그 장면들은…….
고생길의 서막을 알리는 환영의 예감치곤 젠장맞게도 질이 제법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