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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상 최악의 멤버들 (5/24)

3. 사상 최악의 멤버들

으아악!

파오가 고함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슬슬 일어나려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던 차에 옆에서 사정없이 내지른 고함에 놀라 그만 눈이 번쩍 뜨였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동이 틀 무렵이라 시키지도 않은 자명종 역할을 해준 것은 참 고맙지만, 상쾌한 아침 공기를 파오 녀석의 돼지 멱따는 비명과 함께 맞이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놈이 방금 전 아주 무서운 악몽을 꿨다며 숨을 거칠게 헉헉거렸다. 날 자꾸 의식하며 자기가 무슨 꿈을 꿨는지 물어봐달라는 눈초리로 힐끔거리기에 대놓고 무시했더니, 이번엔 우수에 찬 얼굴로 몇 년 못 본 사이에 자신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며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뭡니까.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십시오.”

“야, 너 이거 듣고서…… 놀라지나 마…….”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꿈을 꿨기에, 저렇게 다 큰 성인 남자가 잔뜩 사색이 되어선 가슴을 들썩이며 눈시울까지 촉촉하게 적시는 걸까. 온갖 추태란 추태는 파오 혼자서 다 연출하고 있었다.

“씨발, 까까머리 동자승부터 시작해 군대에 다시 재입대하는 꿈을 꿨어!”

“……지금, 뭐라구요.”

“너 같은 군 면제 대상이나 미필자 애들은 절대 모른단 말야! 이게 남자한테 얼마나 무서운 꿈인지! 게다가 꿈에서 그 빌어먹을 고참 놈들이 내 고사리 같은 손에 달랑 천원신서유기 세계관에선 현금 체계가 원 단위입니다. 제가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고요; 차차 보시면 나중에 이유가 나옵니다을 쥐여주더니 우뢰온 팥 파이를 다섯 상자나 사 오라고 하는 거야! 어쩔 수 없이 내 사비까지 탈탈 털어서 팥 파이를 사 갔더니 글쎄 지네들끼리 낄낄거리면서 내 앞에서 보란 듯이 그 다섯 상자를 전부 까먹었어! 내가 팥 파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지금 내 손에 팥 파이 다섯 박스가 들려 있었다면 저놈의 아가리가 미어터질 때까지 그 좋아한다는 것을 꾸역꾸역 처넣어줬을 텐데. 없으니 참으로 아쉬운 노릇이었다.

“이런 끔찍한 악몽 같은 거 다신 꾸고 싶지 않아!”

절규하는 파오를 곁눈질로 훑어 내리며 속으로 즐겁게 다짐했다. 진심인데 이번 일이 끝나면 꼭 죽여야지♪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손우경과 오조를 돌아보니 정말 이 소란 속에서도 꿋꿋하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나도 설마 길가 아무데서나 노숙하는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벌써 나흘째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나한테 다달이 월급 주는 것도 무척이나 아까워하는 관음존자께서(심지어 출장용품을 빙자해서 날 등쳐먹기까지 했는데도) 웬일인지 출발 직전에 한도 없는 카드 하나를 휙 던져주면서 네 마음대로 막 써도 된다고 할 때부터 진작 알아봤어야 했다.

아무리 십여 년간 지속되는 전쟁으로 수많은 마을이 폐허가 되고 농토는 황무지로 변했다지만, 국경 지대를 빠져나가기 위해 선택한 최단거리 루트는 식료품을 구할 곳도, 사람이 머물 만한 장소도 마땅히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때 팔짱을 끼고서 다 허물어진 벽에 기대어 자고 있던 손우경이 불시에 두 눈을 떴다. 하필 별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던 차에 눈이 딱 마주쳐서 좀 난감했지만 다행히도 저쪽에서 먼저 관심을 거두어주었다.

사실 출발한 지 나흘이나 지났지만 그날 수용소 사건 이후론 손우경과는 아직까지 말 한 마디도 섞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하고나 변죽 좋게 잘 어울리는 파오와는 첫날부터 대거리를 주고받으며 꽤 친하게 지냈고, 오조하고도 두어 마디 정도는 간단하게나마 말을 나눴었다.

그날 아돌프와의 관계가 몹시 험악해 보였던 것 같은데. 내가 기절해버린 사이 어째서 저 시한 폭탄 같은 녀석이 이 일행에 순순히 합류하게 됐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저쪽에서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만은 분명했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날 무슨 관음존자의 간악한 첩자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따지고 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지만). 어쩌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표정이 그리 좋지가 못한데다 짧은 시간이지만 며칠 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녀석이 날 경계하며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람 모가지를 손으로 뚝뚝 따버리는 미친놈하고 나도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지만 앞으로의 길고 긴 여정상 이런 불편한 관계는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교성이라곤 손톱에 낀 때에 사는 박테리아만큼도 없는 내가 무슨 재주로 저런 녀석과 사이좋게 친밀감을 도모해보겠는가. 뭐 당분간은 잠시 내버려두자.

파오는 여전히 재입대하는 악몽에 대해 미친놈처럼 중얼중얼 곱씹는 중이었고, 오조는 우리 중 유일하게 맨바닥이 아닌, 어젯밤 스스로 불러낸―몸이 뭉글뭉글한 질감에 다리가 여섯 개로 이루어진 괴상한 생김새의―소환수 위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일단 쟤는 이번 원정의 길잡이 역할로 따라온 것인데 어째 하루 중에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잠만 자는 것 같다. 노상 멍한 표정인 것으로도 모자라 게으름의 극치인 인간이었다.

녀석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밥부터 우걱우걱 먹고 난 뒤, 우리가 오늘 움직여야 할 방향을 손끝으로 가리켜주고는 다시 저 뭉글뭉글한 몸통에 누워서 온종일 잠만 퍼 잔다. 그러면 저 뭉글뭉글한 놈이 여섯 개의 짧은 다리로 우리를 쫓아서 열심히 기어오는데, 오조 놈이 점심때가 되도록 일어나지 않으면 슬그머니 근처로 다가와 제 주둥이로 주인 몫의 음식들을 덥석 챙겨 들고는 얼른 다른 곳으로 도망가버린다.

오조는 뒤늦게 일어나서 소환수가 입안에 담아둔 음식들을 오물오물 받아먹고는 또 여지없이 잠을 잔다. 삐쩍 마른 게 먹기는 또 더럽게 잘 먹어요.

그뿐이 아니라 오조의 주변에는 아주 조그마한 것들이 적게는 수십에서 수백 개씩 떼를 지어 다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지난번 오조가 ‘서비터’라고 불렀던, 어설프게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인공 정령들이었다.

얘네들은 보통 오조가 양치질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옷을 갈아입거나 자다가 헝클어진 머리를 만져주는 등 녀석을 세심하게 돌보는 일들을 도맡아 했다.

그야말로 선천적으로 굉장한 능력을 타고나는 인간은 그 재능을 저렇게까지 쓸데없이 낭비할 수 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어쨌든 현재로선 눈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에 풀 쪼가리 하나,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질 않으니 우리 승려들의 공식 밥줄인 탁발은 고사하고 끼니 해결 자체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나마 여행용으로 판매되는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 3.0」㈜양양식품에서 3051년에 발매된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 시리즈의 구형 모델. 당신도 지금 엄청난 할인 가격에 3.0 버전을 구입하세요!, 출가자속세의 연을 버리고 수행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 여기서는 종단 소속의 사람들을 일컬음. 출가자는 남녀의 구분에 따라 비구와 비구니로 나뉜다. 반대말은 재가자. 출가자와 재가자는 불교에 귀의한 스님과 그것을 따르는 신도의 차이용을 구비해 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굶어 죽을 뻔했다.

왜 다른 놈들의 식사까지 내가 준비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이상하게 내가 뭔가를 만들기만 하면 다들―심지어는 손우경까지도―귀신같이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살뜰히 챙겨 먹고 가버린다.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 3.0」은 육류를 즐기지 않는 승려들을 위한 보급형으로 제작된 거라 총 여섯 가지 식재료와 네 가지 맛, 그리고 두 가지 조리법밖에 소개하지 않지만, 당분간은 훌륭한 식단을 꾸릴 수 있을 거다. 색색의 알록달록한 모르이아 액체가 들어 있는 시험관을 들여다보며 오늘 아침은 무엇으로 배를 채울지 잠시 고민해봤다.

두부, 감자, 계란, 호밀빵, 야채 만두, 콩고기.

단맛, 짠맛, 매운맛, 담백한 맛.

굽기, 삶기.

아침은 간단하게 계란 부침에 야채 만두 하나로 때워야겠다. 네 개의 식사용 간이 샬레를 바닥에 놓고 스포이트를 계란 액체가 들어 있는 시험관에 넣고 끝부분의 고무 주머니를 눌러 내용물을 쭉 빨아들였다.

각각의 샬레에 액체를 톡톡톡톡 떨어트리자 부글부글 끓다가 이윽고 출렁출렁한 흰자와 노른자가 생겨났다. 다시 굽기 시험관에 스포이트를 넣고 액체를 빨아들여 샬레마다 방울방울 떨어트리니 계란이 서서히 응고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익을 때쯤 돼서 마지막으로 짠맛을 내는 모르이아 액체를 떨어트리자 첫 번째 요리가 금세 완성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계란 부침에는 짠맛 액체를 실수로 세 방울이나 떨어트렸다. 이건 꼭 파오한테 줘야겠다.

다른 샬레들을 꺼내어 야채 만두를 굽고 짠맛과 매운맛을 적당히 섞어주었다. 스무 가지 맛과 서른여섯 가지 식재료, 그리고 자그마치 열 가지가 넘는 조리법이 들어 있는 전문가용 키트를 샀으면 매일같이 환상적인 진수성찬을 맛볼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쉬웠다. 하기야 그걸 내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구입하려면 앞으로 석 달 열흘은 이슬만 먹고 살아야겠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야채 만두를 혼자 오물거리며 먹고 있는데 오조 녀석이 눈을 비비며 내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샬레에 든 다른 만두로 손을 뻗었다. 얘를 지배하는 감각은 식욕과 수면욕, 딱 두 가지인 것 같다.

녀석이 만두를 먹다가 부주의하게 떨어트리자 오조 주변을 맴도는 서비터 몇 놈이 재빨리 달려들어서 표면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더니, 치렁치렁하고 새까만 오조의 로브를 타고 올라가 돌려주었다. 오조가 그걸 받아 들고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얘들아.”

서비터들은 칭찬을 받자마자 신이라도 난 듯 요상한 소리를 지르며 녀석 주변을 마구 뛰어다녔다. 그 꼴을 보고 있다가 그만 정신이 멍해졌다. 여태껏 서양 쪽의 마법 기술은 동양의 주술에 비해 미개하다고 여겼었는데. 아니, 미개고 자시고를 떠나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오조는 남은 만두를 얼른 입에 털어 넣고는 다른 사람의 몫으로 만들어둔 만두에 슬금슬금 눈독을 들였다. 내가 말했다.

“그건 네 거 아냐.”

“나 아직 배고픈데.”

날 쳐다보는 얼굴은 티 없이 맑고 순수해 보여도 남의 만두를 탐하며 힐끔거리는 눈빛은 한 마리 여우같다. 나는 젓가락으로 뜯어낸 계란 부침을 우물거리며 새끼 여우에게 조언했다.

“그럼 계란이나 먹어.”

“관음존자가 떠나기 전에 니가 나한테 엄청 잘해줄 거랬어.”

그래, 나도 그 비슷한 당부를 들은 기억이 있지.

‘다른 두 놈은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그림리퍼 쪽은 당분간 이용 가치가 상당하니 데리고 다니면서 잘 구슬려놔.’

그 유명한 랜드리올의 저승사자인 건 알겠다만 실제 능력을 거의 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만두 하나에도 연연해하는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이용 가치가 상당한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오조는 내가 말이 없자 냉큼 선수를 치고 나왔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기에도 난 아직 관음존자한테 충분히 이용 가치가 있는 몸이거든. 그러니까 관음존자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너는, 속으론 별로 내키지 않아도 겉으로는 절대 티내지 말고 나한테 무지하게 잘해줘야 돼.”

풉, 계란을 먹다가 전부 뿜어냈다. 느릿한 말투나 하는 행동으로 봐선 애가 멍청한 것 같은데 이따금 얘기하는 걸 보면 의외로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구석이 많다. 어쩌면 속으로 생각하는 걸 거름망 없이 그대로 내뱉는 타입인지도 모르겠다. 사레가 들려 한참을 콜록거리다가 파오 몫의 만두를 하나 더 집어서 주자 두 손으로 받아 든 오조 녀석이 제 입속으로 냠냠 욱여넣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쳐다보자 손우경이 물끄러미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또 눈이 마주친다. 놈은 이번만큼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날 빤히 넘겨다봤다.

역시 거북하다, 저 남자는.

성기가 비상식적으로 발기하는 등, 첫인상부터가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비단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 때문에 놈을 대함에 불편한 느낌이 드는 건 아닌 듯하다. 확실히 사람을 좀 탐색하듯이 본다고 해야 하나. 아돌프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거라고 여기고 싶어도, 순간순간 놈이 나를 필요 이상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져 쉽지 않았다.

손우경은 그대로 걸어와 내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대형 샬레에 들어 있던 만두를 집어 먹으며 다시 침묵을 지켰다.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얼굴이 참 빌어먹게 잘생겼다. 한편으론 은회색을 띠는 눈동자와 그것을 품은 긴 눈매가 사나워, 사람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위압감을 주는 인상이기도 했다.

가만히 만두를 먹던 손우경이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연 대상은 내가 아닌 오조였다.

“종일 이렇게 많은 인공 정령들을 부리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난 문차일드라서 마나의 제한 같은 거 거의 안 받아.”

“그래. 제한을 안 받는 정도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흘러넘치는 것 같더라.”

“응, 맞아. 그리고 이 서비터들은 한번 만들어두면 내가 일부러 없앨 때까지 내 옆에서 조금씩 에너지를 받아먹으며 살거든. 나는 어차피 남아도는 거니까 그 정도는 나눠줘도 돼. 게다가 다들 사라지기 싫어서인지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기도 하고.”

사람을 앞에다 앉혀놓고 자기들끼리만 얘기하는 건 무슨 막돼먹은 심보인지 모르겠다. 일전에 손우경이 수용소에서 내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아돌프 새끼가 던져주는 깜짝 선물치고는 너무…….’

‘너무 약해 보이네.’

뭐지. 진짜 약해 보인다고 무시하나. 나 혼자 자격지심의 늪에 풍덩 빠질 뻔한 걸 지나가던 파오가 쓰윽 건져주었다.

“현아, 내 만두는 어디에 있는 거냐.”

손우경의 눈빛이 순간 날 직시하다가 파오에게로 옮겨 갔다. 파오가 멋쩍은 얼굴로 까치집을 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얘기했다.

“……그리고 손우경, 넌 왜 날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사람 설레게.”

손우경이 픽 웃으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파오 사형 머리 꼴이 웃겨서.”

“야, 니 꼴은 멀쩡한 줄 아나 본데. 인마, 난 한 달 정도 안 씻어도 타고난 기품과 매력을 결코 억제할 수 없는 남자라구.”

“난 오년 넘게 안 씻어도 여전히 잘생겼던데.”

“그건 시간이 멈춘 방에 갇혀 있어서 그런 거잖아! 내 한 달하곤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야.”

근데 너 설마 한 달이나 안 씻었던 경험이 있는 거냐. 그리고 제발 그딴 걸로 잘난 척하지 마. 그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쳐 올라왔다가 가느다란 이성에 떠밀려 도로 삼켜졌다.

그 상황에 손우경이 한 술 더 떴다.

“혹시 거울 보면서 숨 막혔던 적 있어? 가끔은 내 얼굴을 보다가 호흡 곤란이 온다니까.”

“흠, 그런 얘기를 니 입으로 직접 하면 남이 보기에 얼마나 모양 빠지는 줄 알아?”

“뭐 없는 말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재밌는 것은 손우경이 나를 본체만체하듯이 파오 역시 오조를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오조는 신경도 안 썼지만). 넷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는 거의 저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 아까처럼 나나 오조가 낀 셋이 됐을 때에는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소외되는 적이 많았다.

밥을 먹고 식곤증이 찾아왔는지, 오조의 눈꺼풀이 다시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나 자야 될 것 같으니까 먼저 얘기 좀 할게.”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저 유치찬란한 자화자찬에 제동을 걸어준 것은 고맙게도 녀석이었다.

“다들 잘 알겠지만, 내가 지난번 자히르나 구역을 환영제야단 손에 넘겨준 뒤부터 기존에 연결되어 있던 통로로는 서쪽 지역으로 들어갈 수 없어. 룸버린과 로고스의 웬만한 마법사들이 모두 긴급 투입돼서 그곳에 공간을 차단하는 방어벽을 치고 있거든.”

자히르나를 지키는 중심 전력이던 오조가 환영제야단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막대한 예물이라도 지참하고 온 신부처럼 해맑게 구는 오조였다.

“그래서 아무리 나라도 그 많은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방어벽을 뚫을 순 없을 것 같아.”

저 ‘아무리 나라도’라는 말이 미묘하게 거슬리는 건 여기서 나밖에 없는 걸까.

“시도해보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불필요한 사상자가 많이 나올 거고…… 또 서로 잘 아는 처지에 내가 죽이는 것도 조금 미안하고.”

“…….”

“그렇다고 빙빙 돌아가자니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오조가 하품을 하며 졸린 눈을 비벼댔다.

“그런 의미로 일단은 정면 돌파가 좋겠어.”

“정면 돌파?”

내가 되물었다.

“환영제야단과 로고스­룸버린 연합 지역을 가르는 중간 지점쯤에는 너희는 주로 무간도라고 부르고 우리는 어비스무간도, 팔열지옥 중 하나. ABYSS, 심연, 깊은 구렁라고 칭하는 구역이 있어. 거길 통해서…….”

오조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파오가 날카롭게 치고 올라왔다.

“미친 소리 집어치워. 거긴 반 세기 동안 모두에게 암묵적으로 통제된 곳이야.”

“반세기나 통제됐으니까 막상 가보면 의외로 별거 아닐 수도 있어. 서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고.”

“……웃기지 마. 저승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겠지.”

파오가 새끼 여우에게 너무 모질게 말해서 듣는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오조는 끄응거리며 자기에게 필요 이상으로 화내는 파오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지금 너무 감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내가 혹시 네 만두를 먹어버려서 화가 났어?”

얘는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님 빠른 거야. 파오가 더 이상 상종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었다.

“난 그것도 꽤 재밌을 것 같은데.”

어색해진 분위기를 틈타 이번엔 손우경이 말을 꺼냈다.

“돔에서 나온 뒤부턴 아무도 거길 들어가본 적이 없잖아. 쟤 말대로 멀리 돌아서 가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방어벽을 뚫고 간다는 것 자체가 니네 구역으로 쳐들어갈 테니까 우리 좀 공격해달라고 대대적으로 선전 포고하는 꼴이니까.”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파오 사형, 너무 흥분하지 말고 잘 생각해보라구. 어차피 무간도 지역은 자히르나 너머에 있을 방어벽 지대까지 같은 코스에 위치해 있어. 일단 도착해서 주변을 좀 살펴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부터 다시 계획을 수정하면 돼. 현재로선 그 외에 별다른 방법도 없어 보이니까.”

“너 머리에 열 있냐. 네가 널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지났지만 네놈은 암만 봐도 그렇게 정의감 넘쳐 보이는 타입이 아닌데, 언제부터 관음존자의 이딴 무모한 계획에 목숨까지 내걸 생각을 다 했냐? 아님 진짜 세계 평화라도 지켜볼 셈이야?”

손우경이 키들거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세계 평화 엿 먹으라고 해.”

오싹한 기운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파오는 손우경의 결정이 그다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더는 토를 달지 않고 자리를 떴다. 오조는 그 사이를 못 참고 푹 잠들어버렸고, 잠시 후 그 뭉글뭉글한 놈이 다가와서 녀석을 입에 물고 딴 데로 가버렸다.

손우경과 둘만 남는 것만은 한사코 피하고 싶었기에 나도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에, 놈의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이름이.”

“…….”

“정확히 뭐야.”

뭐야, 그거 설마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얼떨떨해서 손우경을 돌아보니 정말 나흘 만에 처음으로 날 쳐다보면서 말을 걸고 있었다.

“……현玄. 그냥 삼장이라고 부르든가.”

“법사 칭호를 받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혹시 시비를 걸려고 저러나.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손우경이 한쪽 입가를 슬쩍 찢으며 말했다.

“요즘은 얼굴로 뽑나 보지.”

놈이 너무 작은 소리로 말해서 제대로 알아듣질 못했다.

“뭐?”

“……됐으니까 뒷정리나 해. 참고로 말해두자면 네가 해주는 요리 하나같이 전부 다 맛없어.”

그리 평하며 손우경이 먼저 자리를 떴다. 원래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 출가자용은 승려들을 위한 소박한 채식 위주의 조리법과 영양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거라 입에 안 맞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맛없으면 먹지 말든가.

홀로 남은 나는 바닥에 놓인 식기용 샬레들을 돌아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계란부침이 생각보다 인기가 없네.

* * *

돌로 된 언덕 위에 올라서자 탁 트인 시야로 길게 이어진 사막 지대가 펼쳐졌다.

쿠르게오르 사막.

대종말 후 사막의 일정 구역들은 아주 오랜 기간 엄청난 수치의 방사능에 노출되었던 곳이라 나름대로 청정 구역인 포타라카와는 환경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곳이었다. 그 때문에 이곳에는 갖가지 특이 생물과 생태계의 자연 법칙을 크게 거스르는 것들이 즐비했다.

여태까지는 가는 곳마다 황폐한 불모지이긴 했어도 나름대로 기온이나 날씨도 괜찮았고 발을 딛는 땅 자체가 편편한 평지였다. 그러나 저 태양이 이글이글 들끓는 모래사막의 가시밭길을 지나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본격적인 고생문이 활짝 아가리를 벌리는 이 지랄맞은 순간을 즐거운 마음으로 만끽하고 있는 또라이가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 하야 파오.

“쿠르게오르 사막의 여자들이 그렇게 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저놈은 우리 부모님이 아직은 살아 계셔서 집안끼리 자주 왕래했던 내 어린 시절, 그때부터 여자에 관해서라면 싹수가 노란 인간이었다. 얼마나 문란한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녔는지, 종단 내에서도 높은 직위에 있던 파오의 아버지가 아들놈 하나 잘못 둔 죄로 창피함에 얼굴을 못 들고 다닌다며 우리 아버지가 막 흉을 봤었다.

그뿐인가, 사춘기 시절부터 별 해괴한 성병엔 다 걸려봤기에 자기 입으로도 이젠 성병에는 웬만큼 내성이 생겼다며 이후로도 더럽고 난잡한 성생활에 더욱 정진정명하겠다고 떠들어대기가 일쑤. 만나는 여자들마다 사나흘을 못 넘겼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남자라면 거들떠도 안 보는 종단 내의 도도한 비구니들까지 전부 섭렵한 위인이렷다.

천봉대원수직을 꿰차고 있을 때에도 결국엔 여자 때문에 잘리는 등 인생을 조지더니 여전히 여자라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같다. 쟤 실은 뇌가 머리에 안 달리고 하반신에 장착된 거 아냐……?

오조가 손에 들고 있던 동물 머리뼈 지팡이를 휘둘러 미리 소환해낸 바람의 정령에게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형체 없이 이지러지는 정령 주위에서 거센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주변에 마을이 있나 찾아봐줘.”

귓가로 쌩쌩 바람 소리가 스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못 미덥게 생겨선 길잡이 역할이라더니. 현재로선 확실히 오조 녀석만큼 도움 되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다. 그전에 사람의 걸음으로 닿을 수 있는 마을을 찾지 못하면 오늘도 꼼짝없이 노숙을 해야 한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바람의 정령이 되돌아와 뭐라고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중 그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오조는 정령들과 직접적인 대화가 통하는 눈치였다.

“응, 알았어. 수고했으니까 이제 원래 있던 곳으로 그만 돌아가도록 해.”

오조는 뭉글뭉글한 소환수 등에 올라타면서 우리에게 마을이 있는 정확한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더니 그곳에 도착하면 다시 깨워달라며 철퍼덕 엎어져서 잠들었다. 소환수가 또 느릿느릿하게 사막을 향해 알아서 걸음을 옮겼다.

손우경이 살짝 난감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뒤늦게 자는 애한테 말했다.

“오년 전 기억이긴 해도 이 근처에 사람이 묵을 만한 마을은 없을 텐데.”

“그게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물어봤지만 녀석은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뭐 일단 가보자고. 아, 그전에.”

손우경이 뒤쪽에 쌓여 있던 돌무더기로 한쪽 팔을 뻗었다.

“파破.”

놈의 손바닥에서 공기가 압력에 짓이겨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곧이어 돌무더기 너머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가 즉각 뚝 멈추었다. 돌에 가려 있어 실제 모습 자체는 안 보였지만 바위 틈으로 무참하게 흘러나오는 피의 양을 보니 아무래도 비명횡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파오가 입맛을 쩝 다시며 따분해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너 저거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

“첫날.”

“이야, 내가 졌다. 난 겨우 이틀 전에야 눈치챘었는데. 근데 우선 좀 내버려두지 그랬냐? 적당히 기회를 봐서 족쳐볼까 했었는데 말이야.”

“전부 두 명이었던 것 같은데 중간쯤에 다른 한 놈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 아마 다음 목적지를 어느 누군가에게 전달하러 갔겠지.”

며칠 동안 미행이 붙고 있었다니,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충격을 받을 새도 없이 파오가 복잡한 동작의 수인을 만들어 기의 흐름을 체내로 끌어 모으면서 전투태세를 갖췄다.

“현이 너도 슬슬 준비해두는 게 좋아.”

놈이 생글대며 웃는 낯으로 경고를 했다.

“왜냐하면 사막의 밤은 무진장 위험하거든.”

파오는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높이 뛰어올라선 깎아지른 절벽 아래의 사막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손우경은 비스듬히 옆으로 선 채 유리알같이 차가워 보이는 한쪽 눈동자로 날 응시하다가 이내 흥분감에 도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사람의 피를 본 탓이었다.

“너도 따라와.”

그리 말한 놈은 파오의 뒤를 이어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놈들이 내려간 언덕 아래를 목만 내밀고 빠끔히 살펴보다가 그만 현기증이 날 뻔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반드시 내 우측으로 나 있는 저 안전한 길을 통해서만 이 언덕을 내려가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저런 미친놈들.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나 봐.

그런데 언덕에서 사막까지 연결된 길목의 입구로 향하다가 나는 정말 우연찮게 아까 그 돌무더기 뒤편에 가려 있었던, 어느 구역질나는 상황을 목격했다.

“…….”

음, 그냥 못 본 걸로 치련다.

언덕 위에서 어슬렁대며 느긋하게 내려가자 이미 아래쪽에선 한창 싸움이 진행 중이었다.

사실 서쪽이든 동쪽이든 그 어디를 막론하고 지금은 전부 힘 있는 놈들이 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자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전혀 뜬금없는 맥락이 아니라 바로 그런 분배의 불균형으로 인해, 대륙 어디서나 곳곳에 사악한 화적 떼가 출몰하여 우리같이 지나가던 선량한 여행객들을 습격하는 일들이 매우 비일비재했다. 그나마도 이 부근은 그 어떤 관리 자체도 닿지 않는 무법 지대 구역인지라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지는 듯했다.

어쨌거나 그렇기에 몹시 선량한 심성을 가진 어느 두 분께서는 현재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닥치는 대로 그 나쁜 화적 떼를 열심히 사냥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곳은 모래 반, 시체 반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이윽고 나는 흐음 하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신기하게도 종단에서부터 자기 아랫사람들에게 무술을 직접 전수하거나 굵직한 전장에도 총지휘관으로서 여러 번 참가했던 파오보다, 지금 손우경의 전투 방식이 좀 더 노련해 보이는 것은 과연 어째서일까.

파오의 움직임은 싸움을 정석으로 배운 무술인의 그것이었고, 손우경 쪽은 마치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느낌이 묻어났다.

그야말로 본능적인 움직임이랄까.

이런 식의 각개 전투에는 완전히 젬병인 내 눈에도 손우경이 싸움 자체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졌다는 것만은 훤히 보였다. 종단 내에서 뛰어난 무예가로 위용을 떨쳤던 저 파오와 비교했을 때에도, 오히려 더 나았으면 나았지 전혀 밀리지가 않았다.

쪽수로 상대하려고 들었는지 모래 위에 널브러진 시체의 수가 대충 훑어만 봐도 어마어마하다. 일일이 세어보지 않아도 족히 기백 명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화적 떼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실상은 먹고 사는 일이 너무 곤궁해져서, 그저 자신들의 처자식을 굶기지 않으려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뛰쳐나온, 무기 하나 제대로 쥘 줄 모르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그들에게도 한 가지 잘못이 있다면, 오늘 운이 아주 나빴다는 것 정도겠지.

나는 내 발밑에 떨어져 있던 갈고리로 된 농기구를 발로 걷어차며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얼추 주변 정리가 끝난 파오가 무슨 쾌변이라도 한 듯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이 날 발견하자마자 시끄러운 잔소리를 해댄다.

“거참 치사한 놈일세. 같이 행동하기로 했으면 한날한시 한뜻을 모아 움직여야지.”

내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에는 누가 더 나쁜 놈들인지 모르겠군요.”

“나라를 좀먹고 인륜을 저버리는 이런 화적 떼들은 보는 즉시 깨끗하게 말살해야 해.”

“도적질이 살인보다 더 무서운 죄라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파오가 좀 떨어진 곳에 있던 손우경에게 슬며시 눈길을 주며 내게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현아, 니가 봤을 때 쟤 정체가 뭔 거 같냐.”

“정체가 뭐든 간에 지금은 다 같은 입장이죠. 구태여 분류하자면 일개 죄수 아닙니까.”

“아냐, 틀렸어.”

파오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괴물이야.

나이를 먹더니만 갈수록 언어 구사 능력이 떨어지는 파오를 안쓰럽게 여기며 한껏 비웃어주자, 놈이 자기도 황당하다는 얼굴로 넌지시 털어놨다.

“니가 여길 좀만 더 일찍 내려왔어도 아주 굉장한 장면들을 구경했을 텐데 말야.”

“…….”

“관음존자 이후로 나도 저런 건 처음 봤어.”

파오는 내 머리에 손을 턱 얹더니 먼 곳의 손우경을 향해 가증스럽게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아무래도 내숭 떠는 거 같으니까 조심해라, 너.”

뭔 말이래.

* * *

어느새 도착한 사막의 어느 마을 입구에서, 오조는 여전히 뭉글뭉글한 소환수를 침대 삼아 쿨쿨 퍼 자기만 하는 중이었다. 곤히 잘 자고 있는 애를 공연히 깨우기가 뭐해서 한 3초 정도 심사숙고한 끝에 소환수의 머리를 한 대 쿵 쥐어박았다. 그러자 놈이 늑대와 사자를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시끄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오조가 혼이 빠진 얼굴로 헐레벌떡 일어나서 소환수를 어르고 달래줄 때까지, 놈은 계속 울어댔다.

뭐 어찌 되었건 제 시간에 오조를 깨웠으니 잘된 노릇이었다.

우리보다 이곳에 먼저 도달해 있던 손우경은 마을 입구를 서성이며 그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막 미녀를 운운하던 파오가 다분히 실망한 기색으로 손우경에게 캐물었다.

“역시나 버려진 마을이야?”

“내 기억이 맞는다면, 벌써 육, 칠년도 더 됐을걸, 이 근방에서 사람이 살지 않은 지도.”

“너 혼자서만 알고 있지 말고 뭔 얘긴지 자세히 설명해봐.”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서 얘기하지. 어차피 오늘은 이 텅 빈 마을에서 묵어야 되니까.”

앞서서 들어가는 손우경의 뒤를 따라 모두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몇 년 동안이나 사람의 손길 없이 방치된 마을은 당연하게도 미관상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음산하다 못해 어딘가에서 귀신이라도 툭 튀어나올 듯 무지하게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사실 천도, 명복 빌어주기, 퇴마, 저주 퇴치 등등이 어찌 보면 내 전공 분야이긴 한데, 막상 여기에서 진짜 귀신이라도 나타난다면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고 나도 확실하게 물리치리란 보장이 없었다.

형체가 불분명한 애들은 딱 질색인데다 심지어 의사가 병 걸리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오늘 밤을 이 마을에서 지낼 바엔, 차라리 사막 한가운데에서 모래 이불이나 덮고 자는 편이 더 속 편할 것 같았다. 물론 지나가던 사막전갈들이 꼬리로 수면제 독주사를 놔서 평생 영면하는 불상사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귀곡 산장을 방불케 하는 이런 기분 나쁜 장소에 손우경이 뭐 하러 들어왔는지 의문스러웠지만, 아마도 이곳에서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치였다.

파오가 어떤 낌새를 채고 말했다.

“아깐 어두워서 몰랐는데 마을 벽마다 죄 불에 탄 흔적이 있네.”

마침 나도 그걸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비단 불에 탄 흔적뿐만 아니라 문마다 널빤지를 여러 장 덧대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끔 못질이 되어 있는 모습에 왠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손우경이 주의를 주었다.

“이 마을 전체가 무덤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망자의 혼이 깃들어 있는 마을 문들을 아무거나 함부로 열지 않는 편이 좋아. 자칫 골치 아픈 일들이 벌어진다고.”

“여기가 그런 곳이라면 숨겨진 사연이 뭐든지 간에 일단 나가고 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파오가 일부러 이를 딱딱 부딪치더니 나 완전 무셥다고 하며 엄살을 부렸다.

“여긴 예전에 사만 개의 돔 입구 중 하나였던 곳이야. 그 돔은 사고로 인해서 다른 돔들과의 연결 통로가 끊긴 채로 오랜 세월 동안 독자적으로 고립됐었고, 결국 그 안에서 단 두 명의 남녀만이 생존해 남았지. 반세기 전에 대종말을 피해 돔 속으로 들어갔던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 두 명은 밖으로 나온 뒤에도 계속해서 이 자리에 머무르며 자체적으로 점점 폐쇄적인 환경을 만들었어.”

“그래서?”

“돔에서부터 고립이 시작되어 이미 세상 사람들과의 교류가 끊긴 지 너무 오래였지. 사실 그 두 남녀는 오누이 사이였고, 그들의 부모도 남매이자 근친혼이었어. 같은 핏줄로 이어지는 근친혼은 세대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열성 유전자와 함께 심각한 기형을 야기하는 건 잘 알고 있지? 이 마을은 끔찍한 모습의 기형인들이 살아가는 곳이었어.”

“그렇담 마을의 불은 누가 지른 건데?”

듣고 있다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손우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내가.”

심상치 않게 이어지던 분위기에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그때 파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갑자기 삭막해진 분위기를 일신하려 들었다.

“하하, 우리 우경 사제는 참 무서운 농담도 잘하네.”

하지만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파오의 눈빛만은 한없이 진지했다. 파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네 옛 방화 장소에는 무슨 볼일인데.

겉으로는 손우경과 친한 척 굴며 암만 나사 빠진 인간처럼 행동해도 확실히 파오는 파오였다. 그러나 손우경은 그와 신경전을 벌일 맘이 없다는 듯했다. 녀석은 마을의 다른 곳을 향해 멀거니 시선을 옮기며 슬쩍 지나가는 투로 내뱉었다.

“딱히 볼일 같은 건 없고.”

녀석이 엄지와 중지를 딱 소리 나게 부딪치며 순간적으로 모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슬슬 이맘때쯤 되면 저것들이 무덤에서 기어 나올 거라서.”

어느새 마을 곳곳에서 역겨운 살덩어리를 가진 강시殭屍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강시는 본디 객지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시신 이마에 부적을 붙여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서양 사람들이 좀비라고 부르는 개념과도 많이 흡사한데, 보통은 주술사의 그릇된 목적에 의해서 시신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렇게 죽음으로부터 소생된 강시는 저녁이 되면 사람을 뜯어먹는 식인귀로 변하게 된다.

찹쌀이나 닭 피 등이 강시의 약점이라고 전해지지만 가장 효과적인 퇴치법은 역시 몸을 불로 태우는 것. 그럼 아까 손우경이 마을에 불을 질렀다는 게 바로 그런 의미였나.

쏟아져 나오는 강시들을 피하기 위해 우리 네 명 다 거의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나같이 지붕으로 피신해 있는 서로를 쳐다보는데 난데없이 일정한 음조로 이뤄진 짧은 휘파람 소리가 났다. 그 주체는 손우경이었다.

그러자 모래로 된 땅에서 수십 개의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서 콩콩 뛰어다니는 강시들의 몸통을 덥석 붙잡았다. 손우경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바닥으로 가볍게 착지하더니 눈앞으로 손등이 보이게끔 양팔을 어깨 넓이까지 들어 올려 천천히 좌우로 손을 갈랐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허공을 갈라낸 손우경의 손동작으로부터 공간의 균열 같은 것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갔다. 선이 그어진 듯 균열이 생긴 자리가 위아래로 어긋나기 시작하자 정확히 강시들의 목 부위와 맞물렸고, 한순간에 놈들의 몸통에서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잠시 어긋났던 허공 또한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내 옆 지붕에 올라서 있던 파오가 넌지시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설마 했더니 역시 몇 안 되는 기문파공 전수자였군.”

기문파공이라면.

‘관음존자 이후로 나도 저런 건 처음 봤어.’

그렇다면 손우경 저 녀석도 공간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아돌프와 완전히 똑같은 기술을 쓴단 말인가?

나와 같은 지붕으로 올라와 있던 오조까지도 평상시의 그 멍한 표정이 아닌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으로 현재 밑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빠짐없이 지켜보는 중이었다. 소환수의 등에 올라탄 오조가 뭉글이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천진난만하게 입을 열었다.

“유, 내가 저 사람하고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손우경이 얼추 수십 마리 강시의 머리를 잘라냈지만 놈들은 몸만 남은 채로도 끈덕지게 움직였다. 또 어디에서 자꾸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지 아예 새로운 강시들까지 합류하는 중이었다. 손우경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강시들을 피해 놈들의 머리 위로 훌쩍 도약하며 외쳤다.

“난 잠시 찾아볼 게 있으니까 지금부턴 지붕 위의 놈들하고 놀든가 하라고!”

씩 웃으며 이번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우리 쪽을 향해 기문파공을 연달아 두 발 발사했는데, 그 바람에 딛고 서 있던 지붕 바닥이 반으로 폭삭 쪼개졌다. 저 치사한 놈이 갈 거면 그냥 자기 혼자서나 곱게 갈 것이지 물귀신처럼 괜히 엄한 사람들까지 끌어들였다.

결국 손우경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서 이차 격전이 벌어졌다.

파오는 여자 강시에게 언어적인 희롱을 지껄이며 거의 가지고 노는 수준으로 상대하다가 그새 흥미를 잃었는지 주먹으로 배를 강타해 멀리 날려버렸다.

“미안한데 못생긴 건 참아줄 수 있어도 입 냄새 나는 여자는 진짜 별로거든.”

오조는 자기 스스로 하는 건 별로 없었다. 다만 뭉글이가 입을 엄청 크게 벌리고는 근처로 다가오는 강시들을 꿀꺽꿀꺽 잡아먹을 뿐이었다. 그러다 좀 맛이 없었는지 삼켜댄 강시들을 한 번에 와르르 토해냈는데, 놈들이 배 속에서 녹다가 만 채로 서로 몸이 잔뜩 엉겨 붙어서 튀어나왔다.

어쨌든 가까운 곳에서 보니 아무리 이미 죽은 자의 시체라지만, 강시의 얼굴이나 몸통은 확실히 정상적인 사람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명백히 드러나는 괴기스러운 기형의 흔적들. 한 놈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날 뜯어먹으려고 들기에 뒤로 살짝 물러나면서 몸을 피할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다. 이런 쓸데없는 곳에서 힘을 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저 강시들의 이마에 부착된 부적들의 필체가 아주 낯이 익었다. 글씨를 이렇게까지 못 쓰는 놈은 내 주변에서도 흔치 않은데. 어떤 기시감이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저 필체의 주인이 누군지를 깨달은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져들었다.

이건 틀림없는 관음존자의 부적인데. 뭐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이미 손우경이 사라져간 어둠 속으로 얼른 고개를 틀었다.

아무래도 놈의 뒤를 따라가봐야겠어.

남은 뒷일은 전부 파오와 오조(의 소환수)에게 맡기고 서둘러 손우경을 뒤쫓았다.

분명 이쪽 방향으로 사라졌었는데 금세 어디로 간 거람. 이 마을은 복잡하게 얽힌 미로처럼 비좁은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낮에는 강시들의 무덤이자 밤이 되면 식인귀들의 축제로 변모해버리는 이 기분 나쁜 곳을 혼자서 정처 없이 헤매고 있자니, 마치 내가 쫓기는 사냥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손우경이 이 마을에서 뭘 찾으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이곳이 관음존자와도 상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놈을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었다. 나에겐 손우경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것이 아돌프가 내게 내린 명령 중 하나였으니까. 비슷한 생김새의 모퉁이를 수없이 돌고 돌아 어떻게든 놈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 갖은 안간힘을 썼다.

사실 막상 찾는다고 해도 대체 뭘 하려고 하는지 내게 순순히 알려줄 리가 만무하나, 적어도 이 마을의 강시들과 관음존자의 부적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일전에 아돌프가 내게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죽어서도 자신에게 영원한 충성을 바치는 불멸의 군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땐 꿈도 참 야무지다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런 식으로 내게 허튼소리를 지껄인 위인이 아니었다.

이윽고 나와 몇 걸음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드디어 좌측 골목으로 막 들어서려는 손우경의 뒷모습이 포착되었다. 상대방에게 최대한 기척을 감추기 위해 숨소리마저 죽이고서 조심스럽게 그 골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읍!”

별안간 누군가 뒤에서 내 입을 꽉 틀어막으며 등을 덮쳐왔다. 커다란 손아귀가 내 얼굴을 집어삼킬 것처럼 압박해왔다. 상대방은 나를 포박하더니 통로가 완전히 막혀 있는 골목 안쪽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내 귓가로 속삭여지는 그 나지막한 음성은 마치 금속성의 물질이 긁히듯 날카롭게 들려왔다.

“……왜 내 뒤를 따라다녀.”

그 목소리와 함께 날 옭아매고 있던 입에 자유가 보장됐지만, 여전히 내 몸은 뒤에서 놈에게 단단히 끌어안긴 채였다. 나는 그 묘한 자세에서 가까스로 목을 틀어 녀석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넌 분명히 나보다 훨씬 앞서서 가고 있었는데…….”

손우경이 별거 아니라는 눈초리로 대답했다.

“난 뒤에서든 어디서든 누가 나 노리는 건 다 알아.”

“…….”

“가령.”

“…….”

“우리 누구 씨처럼 전혀 앞뒤 분간도 없이 무작정 내 뒤를 쫓아오는 녀석들은 일부러 유인해서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거든.”

그러고 보니 뒤는 손우경에게 막혀 있었고 앞은 놈의 말처럼 아예 막다른 골목이었다. 진퇴양난으로 아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녀석이 비릿하게 웃으며 찬찬히 내 얼굴을 마치 먹잇감을 사냥하는 사나운 짐승의 눈으로 훑어 내렸다.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역시 이 녀석은 그동안 날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내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서 이 기회를 틈타 날 해치기 위해 이런 외진 곳까지 유인했던 것이다.

하지만 손우경은 장난치듯 허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을 등지고 있던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빙글 돌렸다. 한쪽 팔로 도망치지 못하게 날 바짝 끌어안더니 남은 손을 내 얼굴 쪽으로 서슴없이 가져왔다.

이윽고 놈의 긴 손가락이 내 얼굴선을 따라서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러다 목덜미까지 내려온 그 손이 금방이라도 내 목을 뚝 잘라버리거나, 혹은 숨이 막힐 때까지 사정없이 조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 긴장한 얼굴이 겉으로도 다 티가 났는지 손우경은 잠시 내 반응을 살피다가 이내 키들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결국, 녀석의 손이 내 목을 서늘하게 감싸 쥐었다. 마침내 놈이 내 목을 뚝 부러트려버릴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은빛이 감도는 회색 눈동자 속에 겁에 질린 내 얼굴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속에서 어딘가 오기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그가 나를 마치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상대처럼 만만하다는 듯이 여기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얕잡아 보는 시선들이라면 평소에도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단순한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으나 저 손우경이 첫 대면부터 이상하게 나를 봐주고 있다는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어차피 상대조차 되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뭔가 이대로 지고 싶지 않다는 투지가 솟아올랐다.

목덜미에 여전히 손을 댄 채로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 얼굴 근육에서 마비가 왔다. 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저런 눈으로 보고만 있는 걸까. 서로의 코끝이 맞닿을 듯한 이런 근접한 거리에서 손우경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게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그러던 중, 손우경의 뒤편으로 강시 한 마리가 비척대며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까 보았던 놈들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턱이 썩어든 입가에서 고약한 색의 침이 흐르고 있었기에 나는 다급하게 위험하다는 눈빛 신호를 보냈다.

손우경 역시 이미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내게로 거의 숙였던 고개를 잠시 들어 뒤쪽을 힐끗 돌아봤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손우경이 저놈을 대신 처리해주기를 기다렸으나, 그는 여전히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녀석은 쉿 하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더니 다시 내게로 집중하며 은근한 어조로 속삭여왔다.

‘숨을 참고서 움직이지 않으면 강시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아.’

최면처럼 나른하게 들려오는 말이었다.

그 잘 뻗은 코끝이 내 숨결 근처로 불쑥 다가왔다. 내가 숨을 쉬려 드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놈은 한쪽 입가를 들어 올리며 입 모양만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착하네.’

정말로 호흡하는 것을 잊을 만큼 이런 첨예한 긴장감 속에서 막상 의식적으로 숨을 참으려니 몹시 괴로웠다. 무엇보다 호흡이 사라진 사이에서, 가깝게 밀착되어 있는 손우경과의 이 미묘한 거리가 상당히 신경 쓰였다. 상대방의 작은 움직임은 물론, 눈을 깜빡이는 것까지 전부 들여다보이니 어느새 내 행동에까지 큰 제약이 생기는 듯했다.

강시가 우리 옆을 바로 스쳐 지나갈 때까지 나는 손우경과 딱 붙어선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눈만 소리 없이 뜨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강시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참아냈던 숨이 터졌다. 헌데 뒤늦게 생각해보니 굳이 숨까지 참지 않았어도 저 정도 강시 한 마리쯤은 손우경 혼자서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가.

놀림을 받았다는 기분과 동시에 몸에서 맥이 탁 풀리려던 찰나였다.

정작 맥이 풀릴 만한 일이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손우경이 내 입술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댄 것이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현실감은커녕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잘 가늠할 수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눈을 크게 치뜨며 반사적으로 놈에게 저항하려 했으나, 도리어 두 손목까지 붙잡혀서 벽으로 거세게 밀쳐졌다.

있는 힘껏 거부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서 입술을 질척하게 빨아대는 놈의 입에서 혀가 빠져나와 이번엔 내 입안으로 침투하려 들었다. 결사적으로 입을 꽉 다물고서 녀석을 저지해보려 했지만, 손우경이 붙잡고 있던 내 손목을 아예 부러트릴 기세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순간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 신음을 뱉느라 저절로 벌어진 입술 안쪽을 손우경이 냉큼 차지해버린다.

처음에는 손목이 너무 아파서 입에 집중할 겨를조차 없었다. 하지만 같은 사내의 혀가 지금 내 입안을 제멋대로 휘젓고 있다는 것을 잠시 후 깨닫게 되자 그만 사색이 되어 경악하고 말았다. 심지어 혀가 뽑힐 것처럼 쭉쭉 빨아대고 물어대는 바람에 놈에게 이대로 잡혀 먹힐 것 같은 커다란 공포심마저 들었다.

난폭했다.

그리고 너무 난폭하게 달려드는 탓에 그 기세를 이겨내지 못하고서 벽으로 몰렸던 등이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만약에 장난이라면 도가 지나친 일이었다. 날 옴짝달싹도 못하게끔 힘은 무식하게 센 주제에 입에 맞닿고 있는 부분만은 간간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현 상황을 음미하는 듯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시 제정신이 들었을 땐, 손우경의 무릎 위에 앉은 채 이미 입안을 완벽하게 농락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손우경이 내게서 입을 거두어냈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며 젖어 있을 내 입술을 녀석이 혀로 한 번 더 핥았다. 그러고는 다시 짧게 입을 맞췄다. 놈은 엄지로 자기 입가를 쓱 닦아내며 끝까지 저속한 언변을 지껄였다.

“이왕이면 네 젖꼭지도 부풀어 오를 때까지 빨아주고 싶지만, 지금은 내가 좀 바쁜 관계로 그건 다음 기회에.”

뒤늦게 강한 분노가 치밀었으나 이미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해 목구멍에서 도무지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손우경이 놀리듯이 내 뺨을 살짝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다만 그 시선이 내 가슴 쪽을 향한 걸로 봐선 방금 전에 내뱉은 말이 아주 허튼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방금 전의 순진했던 네 반응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어. 그 대가로 좋은 걸 하나 알려줄게.”

“……너… 나, 나한테 지금 뭘…….”

한심하게 말이나 더듬고 있었지만, 이건 다 저 녀석이 내 가슴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우경은 이 밀접한 거리에서도 부러 내 귓가에 입을 대고서 들릴락 말락 속삭여왔다. 그의 숨소리가 너무 간지러웠다.

‘첫날부터 미행이 둘이나 붙고 있어. 넷이 같이 있었을 때엔 주 표적이 누구인지 몰랐었지. 헌데 내가 마을로 들어와서 중간에 너희에게서 잠시 떨어져 나왔을 때에는 전혀 움직임이 없다가 네가 날 뒤쫓기 시작한 순간부터 움직이더군.’

“그 말은…….”

“감시하는 대상이 너라는 거지.”

그 말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섣불리 판단이 안 섰다. 진위 여부를 따지기에는 제공된 정보의 양이 지극히 적었다. 심지어 손우경이 내게 제대로 된 사실을 고하리란 보장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녀석이 방금 내게 저지른 그 일에 의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네가 너무 불쌍할 정도로 눈치를 못 채니까 한 놈은 내가 대신 처리해줬지만, 남은 녀석은 지금 이 순간도 너하고 나하고 무슨 짓을 하는지 어디에선가 다 지켜보고 있는 중이거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아까 말했잖아. 난 내 뒤에 있는 건 뭐든지 알 수 있다고.”

놈이 내 머리카락을 짓궂게 쓰다듬으며 자기 윗입술을 핥아 올렸다.

“세시 방향, 지붕 위다. 만약 내일도 저 녀석이 우리 뒤를 따라붙고 있다면 넌 얼굴이 미인인 것 외에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인 거겠지.”

거기까지 말한 손우경은 좀 전과는 다르게 차가운 얼굴로 날 내려다보며 먼저 골목 안을 빠져나갔다. 놈이 떠나고 나서 한참 뒤에야 모든 상황 파악이 끝난 내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하, 씨발…….”

* * *

그동안 고이고이 비축해둔 체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며칠씩 힘들게 아껴둬봤자 결국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방전 상태로 들어가기 일쑤다. 좌우지간 평소라면 적당히 하고 그만뒀을 일임에도 나답지 않게 집요한 추격전을 벌였다.

아무리 도망쳐봤자 이미 놈의 그림자에 뫼비우스 모양으로 꼬아놓은 환살幻殺 부적을 심어놓은 뒤였다. 녀석은 이제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일방 통행로 안에 갇힌 채, 그게 제자리걸음인 줄도 모르고 진이 다 빠질 때까지 누군가에게 쫓기는 착각 속에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꿈만 꾸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림자에 심어놨던 부적을 회수하자 탈진 직전인 남자가 현실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내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가슴에 새겨진 아돌프의 卍, 즉 만 자 문양을 보자 남자는 사색이 된 얼굴로 뒷걸음치려다가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가 환각에 빠졌을 당시, 이미 한쪽 다리의 인대를 해체하는 작업이 완료된 까닭이다. 왼손에는 반들반들하게 잘 닦아놓은 금강저까지 들려 있으니 이제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관음존자께서 그러시길, 연합군하고 내통하는 머저리 새끼들이 있을 거라던데.”

도망치기를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남자의 발등을 금강저로 내리찍으며 내가 물었다. 귓가로 날카로운 비명이 경쾌하게 들려왔다.

“……귀찮으니까 배후가 누구인지 대충 불어주면 안 되겠냐. 어차피 넌 여기서 뒈질 거니까 나한테 마지막 보시라도 좀 하고 가든가.”

“크윽……, 너같이 더러운 암살 대원 따위에게 해줄 말은 없다! 그냥 죽여라!”

“그런 험악한 이름 말고 다른 좋은 것도 많아. 법사용 명함도 있다구.”

“개소리 집어치…… 으아아아악!”

내 소중한 금강저에 피가 너무 많이 묻어서 주머니에서 헝겊을 꺼내 닦아주려던 사이, 남자가 한쪽 발목이 뎅겅 잘린 채로도 달아나려고 들었다.

“아, 도망가지 마, 난 체력이 병신이라서 오래달리기 같은 건 적성에 안 맞는단 말야.”

혼비백산 도망치다가 돌아보는 뒷모습이 너무 처절해 보여서 나는 너그럽게도 약간의 유예 시간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럼 천천히 다섯을 센다. 근데 내가 다섯을 세는 동안 도망치지 못하면 넌 틀림없이 죽게 될 거야.”

하나를 세고서 금강저를 마저 닦다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위치를 확인하니 지금껏 기척을 숨기고 미행하던 실력답게, 내 예상보다 상당히 먼 곳까지 달아나 있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

“다섯!”

둘 셋 넷을 건너뛰고 그 말을 외친 순간, 다섯이라는 내 명령에 반응하여 그림자 안에서 암귀暗鬼가 튀어나와 남자를 한입에 삼켜버렸다. 내가 아까 환살 부적을 남자의 그림자에 심었을 때 함께 넣어둔 암귀의 씨가, 저 남자에게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진정 도망칠 수 있을까라는 의심에서 오는 공포심을 먹고서 벌써 저만큼이나 커다랗게 자라난 것이었다.

내 힘을 애써 낭비할 필요도 없이 아주 작은 계기만 만들어주면, 자신에게 파멸을 가져다주는 것은 언제나 본인 스스로인 법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심장마비로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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