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대로 싸우자니 다리가 너무 많습니다
한밤중에 벌어진 강시들과의 격전은, 어제 내 볼일을 끝마치고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와보니 이미 깨끗하게 일단락되어 있었다. 다만 강시들이 말끔히 소탕된 것에 반해 어찌 된 영문인지 오조와 파오의 아슬아슬하던 관계가 한층 더 냉랭해져 있었다. 정확히는 오조의 무관심 속에서 파오 혼자서 유치하게 적대심을 불태우는 걸로 보였지만.
하기야 우리가 무참하게 깨졌던 랜드리올전의 유일무이한 생존자가 불보살이 아닌 다음에야 그 원인 제공자에게 어찌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있겠냐마는. 파오 자식이 나잇살이나 처먹고 유치하게 툴툴대는 걸 잠자코 보고 있자니 그 꼬락서니가 아주 가관도 아니었다.
아마 짐작하건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어떤 계기로 하여금 파오가 부하들을 잃었던 예전 순간을 다시금 회상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파오에 대한 감정이 그리 산뜻하진 못했다. 하지만 여자를 심하게 밝혀서 그렇지, 천봉대원수 시절 같은 남자들 사이에선 큰형님처럼 떠받들리며 나름대로 호탕한 성격이기까지 하던 저 녀석이 별것도 아닌 일로 저리 속 좁은 위인처럼 돌변하진 않았을 거다.
십 수 년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친아우처럼 대했던 부하들이,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눈앞에서 죽어나가는 걸 맨 정신으로 지켜보는 기분은 과연 어땠을까. 파오가 랜드리올전에서 살아 돌아와 종단으로 복귀했을 무렵은, 놈의 방탕한 사생활이 가장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기도 했다.
그러니 새끼 여우를 미워하는 그의 감정은 모쪼록 인간이라면 지나치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아마 평생이 지나도 파오가 오조를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그리고 단 하루 만에 나와 손우경의 어색했던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손우경은 어제 밤늦게까지도 일행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었다. 나는 홀연해진 녀석의 행방을 궁금해하다가 온종일 머리도 복잡하고 몸도 몹시 피곤했던지라 앉아서 잠시나마 쪽잠을 자고 있었더랬다(물론 그 기분 나쁜 마을을 벗어나서 그 근처 입구 쪽에다가 야영할 임시 캠프를 잡았었다).
그러다가 깜빡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희미한 새벽녘에 어쩌다가 다시 눈을 떠보니 녀석이 내 옆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악인 건 내가 놈의 어깨에 머리까지 기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화들짝 놀랐지만, 오밤중에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기에 조심조심 손우경과 맞닿아 있던 몸을 떨어트리려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한없이 조여드는 듯했다.
잠이 든 손우경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느덧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 쪽으로 시선이 머물렀다. 내 뺨에 화로가 켜진 줄 알았다. 그 골목 안에서의 죽어서도 무덤 끝까지 가져가야 할 일들이 떠올라 나는 성급하게 눈길을 돌렸다.
기름칠을 제때 안 해서 녹이 슨 기계처럼, 뻣뻣하게 움직이던 목을 녀석의 어깨에서 슬며시 떼어내자 그때 반자동적으로 손우경의 팔이 들려 올라갔다. 녀석이 내 머리를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원상복귀시켜버린다. 그에게서 음성이 들려왔다.
‘너한테서 향냄새 같은 게 나.’
역시 안 자고 있었나.
‘어릴 때 지겹게 맡아봐서 그딴 냄새 싫어했는데.’
그러고선 잠이 들었는지 그 후로는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 나는 티뷸라 궁을 벗어나 서쪽으로 떠난 뒤부터 한 번도 빨지 않은 내 제복의 소매 끝을 가만히 코에 가져다대며 생각했다.
향냄새 같은 소리 하네.
별로 대수롭지 않은 놈의 그 잠꼬대를 신경 쓰기에는 나는 어젯저녁 체력 소모가 너무 심했던지라 현실적인 감각이 잔뜩 무뎌져 있었다. 그래서 손우경에게 머리를 기댄 그 간지러운 자세로 스르륵 꿈나라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침에 다시 눈을 떴을 때, 손우경이 내 옆자리에 없었기에 천만다행이었다.
밤새 사막에서 쪽잠이나 자다가 이른 아침부터 다시 여정을 꾸렸기에 몸 상태가 극악의 난조를 띠고 있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사막의 모랫길을 걷고 또 걸었지만, 도착할 목적지가 아직 너무 멀기만 하다.
몸 상태도 엉망인데 심지어 하필 손우경과 파오 자식이 내 뒤를 따라오면서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나에 대한 담화까지 나누는 게 짜증 나서 죽을 맛이었다(대놓고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내 뒤에서 말하니까 이게 바로 뒷담화인가……). 거의 파오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손우경이 고스란히 귀담아듣고 있는 형국이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 현이는 어렸을 땐 정말이지 천사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애가 크면서 줄을 잘못 서더니만 지금은 저렇게 악마같이 음침한 놈으로 변해버렸어. 나한테 형, 형 하면서 졸졸 쫓아다니는 게 진짜 얼마나 귀여웠다구.”
난 네놈한테 형, 형 하면서 쫓아다닌 기억 없거든?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행여나 파오 너 같은 놈한테 내가 물들까 봐서 얼마나 조바심을 내셨는데.
“그땐 나도 아직까지는 애송이였던 시절이라 군부 신참 조무래기들을 관리하며 기초적인 수행법이나 가르치는 상황이었거든. 현이하고는 원래부터 집안끼리 잘 알고 지냈던 사이지만, 저 녀석이 종단군부에 입단 지원서를 냈을 때가 한 열 살 남짓인가 그랬을 거야.”
당장 뒤돌아서 저 자식의 되바라진 주둥이를 틀어막거나 아님 영원히 입 닥치게 만들 방법을 모색했지만, 어차피 둘 다 불가능하니까 내가 참았다.
“삐쩍 마른 희멀건 꼬마애가 얼굴까지 계집애처럼 생겨가지고 글쎄 남자 새끼들로 득실거리는 군부에 동자승으로 입단을 하겠다는 거야. 뭐, 반쯤은 군대용 농담이긴 하지만, 종단군부에 마련된 공공 샤워장 시설 안에는 ‘황금 보기를 돌 보기처럼 안 할지언정, 반드시 이곳에서 떨어트린 내 비누만큼은 꼭 돌 보기처럼 하라’는 뜻깊은 격언까지 붙어 있을 정도란 말이지. 무릇 치마만 둘러도 환장할 한창때의 사내놈들이니 그 불타는 욕정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아무도 모르거든.”
“…….”
“여하튼 지금도 사람 목숨을 무슨 소모품처럼 여기는 어느 대단하신 분 덕분에, 간단한 몇몇 테스트만 통과하면 개나 소나 아무나 다 군부 병사로 받아주던 게 당시 우리 쪽 분위기였거든? 그 테스트도 별거 없었어. 사지육신 멀쩡하고 기초적인 체력 정도만 받쳐주면 어느 누구나 입단 가능한 수준이었단 말이야. 그리고 동자승들 중엔 현이보다 더 어린 애들도 많았는데, 그런 애들까지 전부 통과했던 그 초간단한 테스트를 열다섯 번이나 떨어진 거 있지. 자그마치 열다섯 번이나!”
지난번부터 열다섯 번이 아니라 열네 번이라고 꼭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도긴개긴이라는 단어를 거듭 상기하며, 이 상황에선 그냥 잠자코 닥치고 있는 게 조금이라도 날 위한 길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열네 번이나 열다섯 번이나 어차피 오십보백보인 것을.
그러나 남의 험담을 적당히 멈출 줄 모르는 저 파오 때문에 도무지 살심만큼은 억제가 안 된다. 속으로 불경까지 염송하며 어떻게든 마음의 평안을 되찾으려 했으나, 지금만은 부처님 말씀도 이 고달픈 중생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됐다.
“……그렇게까지 최악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손우경의 무뚝뚝한 말투는 어젯밤 내게 젖꼭지 운운하며 야한 대사를 읊던 그 목소리와는 완연히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사실 여태까진 다섯 개의 검 수용소에서 관음존자에게 폭발하듯 달려들었던 그 모습 때문에 다혈질, 혹은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기분파라는 인상이 내 머릿속에 깨진 유리 조각처럼 푹 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 유리 조각을 이성이라는 핀셋으로 거둬내고 다시 찬찬히 관찰해보니 생각 외로 신중한 타입에다 어딘지 의뭉스러운 구석마저 존재하는 듯했다.
파오와 내 앞에서 각기 보여주는 가면 자체가 다르기에 과연 어느 것이 녀석의 진짜 모습인지는 알 수 없으나, 머리가 굉장히 비상한 편에다가 적어도 연기를 아주 잘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손우경은 나와의 지난밤 일들은 아예 기억에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굴고 있었다. 평소처럼 말 한 마디 섞지 않은 채 날 오로지 무시하는 걸로 일관했다.
그럼에도 지금 파오의 입에서 서슴없이 내 이야기가 나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손우경이 대화의 방향성을 나에 관한 것으로 아주 교묘하게 조정해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노련한 낚시꾼의 찌를 신나게 덥석 문 것은, 갓 잡아 올린 망둥이처럼 철없이 팔딱거리는 저 생선대가리 같은 놈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래놓고도 자신은 내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조용히 그 말들을 다 듣고 있었다.
파오 놈이야 일부러 생각 없는 척 굴면서 자신의 진짜 본성을 감추려고 드는 타입인지라 원래부터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숱한 오해를 사는 편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같이 지내다 보면 그런 부분들은 사실 전부 과장된 것이라는 게 웬만큼은 다 느껴졌었다.
헌데 손우경은 그보다도 더한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서 도무지 그 속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가끔 순간적으로 섬뜩한 구석이 있다고나 할까.
내가 잠깐 딴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파오 놈이 떠는 입방정이 이제 우주까지 쏘아 올려질 기세였다.
“……그러다 결국엔 쓰러졌는데 현이가 긴급하게 실려 간 의무실 앞은 걱정돼서 찾아온 사내새끼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어. 그 굳게 닫힌 문 앞에 화단에서 뜯어낸 꽃에, 자필로 쓴 연애편지에, 군용품으로 일인당 하루에 하나씩 배급되는 전투 식량들까지 아주 가관도 아니었지. 게다가 종단군부 내에서 자신의 전투 식량을 남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어쨌거나 그때 의무실에 실려 온 청순가련한 미소년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아, 더 이상 못 참겠다. 지 멋대로 각색한 수준이 완전 삼류 소설급이었다. 심지어 당시에 내 앞으로 온 전투 식량 같은 건 단 한 톨도 없었는데? 무슨 힘든 노동이라도 했는지 그 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던 파오 네놈 하나를 제외하고는. 근데 그때 뭔가 포만감 어린 재수 없는 표정이었는데…….
나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나직하게 경고했다.
“대체 어디까지 지껄이실 겁니까.”
파오가 뻔뻔한 낯짝으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난 우리 우경이한테 해줄 얘기가 많은데? 네 과거 이야기의 백미하고 절정 부분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단 말이야!”
옆에 있던 손우경이 픽 웃음을 터트리며 백미하고 절정? 하고 저 혼자 중얼거렸다. 잠시 후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 백미하고 절정 부분은 나중에 꼭 다시 듣기로 하고.”
“백미와 절정 부분이 싫으면 흑미와 사정 부분도 있으니 기대해도 좋아.”
파오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대답했다. 손우경은 그 느끼한 윙크를 본체만체하며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잠시 쉬고 가자는 제안을 했다.
“일단 여기에서 잠깐 쉬었다 가는 게 좋겠어.”
부족한 잠과 축적된 피로, 그리고 찌는 듯한 더위와 파오라는 소음공해 사중고에 지쳐 있을 즈음이라,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내주니 나로서는 고마울 노릇이었다. 물론 조금만 몸이 안 좋아도 금세 창백해져버리는 내 안색을 보고 놈이 배려하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곳 사막에서는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저 태양을 피해 몸을 숨기거나 혹은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잠자는 사막의 오조 님을 등에 업은 채 충성스럽게 대기하고 있던 뭉글이의(아마 이름이 ‘유’였던 것 같은데, 놈은 그렇게 세련된 느낌으로 부르기가 참으로 저어되는 외모였다. 덕팔이나 춘식이 같은 거면 참 좋을 텐데) 그 짧고 튼튼한 뒷다리에 잠시 등을 기대고 앉았다.
비록 뭉글이가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리가 여섯 개나 있고 심지어 닳는 것도 아니니 굳이 날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파오는 다른 일행들이 쉬는 틈을 타서 주변에 오아시스 같은 게 있는지 좀 둘러보고 오겠다며 나와 손우경, 그리고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잠만 처자는 오조, 이렇게 셋만 남겨두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점점 멀어져가는 파오의 넓은 등짝을 바라보며 나는 내 과거지사의 백미와 절정, 더불어 흑미와 사정 부분까지 전부 얘기해도 좋으니 제발 나랑 얘만(+오조와 그의 이동 침대……) 두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손우경은 파오가 아예 점처럼 작아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더니 이윽고 내 앞까지 걸어와선 날 쓱 내려다봤다. 나는 마침 작열하는 태양빛이 눈부셔서 차마 얼굴을 못 들고 있었다. 그러자 놈이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다. 작게 들리는 그 웃음소리로도-얼굴을 안 봐서 확신할 순 없지만-대충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난 네가 조금이라도 허둥지둥할 줄 알았는데.”
손우경은 그래서 무척 거슬린다는 음성이었다.
“그 뚱한 표정에 너무 변화가 없으니까 별로 재미가 없네.”
하, 당연히 내가 고작 그런 것 따위에 쉽게 동요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난생처음으로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로 만든 계란부침에 매운맛을 집어넣는 아주 미세한 실수를 하긴 했지만, 누가 볼세라 이미 내 배 속에서 증거 인멸까지 끝낸 상태였다. 그 매운맛이 삼분의 일이나 샬레 안에 콸콸 쏟아져서 지금도 위장에서 펄펄 불이 나고 있지만, 난 손우경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손우경의 뒤틀린 목소리가 날 겨냥했다.
“아님, 그동안 너무 인기인이라서 그 정도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는 거야?”
이제 태양빛이 작열하든 말든 고개를 위로 번쩍 치켜들고 녀석을 고요하게 올려다봤다. 역광 때문에 눈이 부셨다.
“넌 날 놀리는 게 재미있나 봐.”
내 말에 손우경이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 확실히, 그런 편이지.”
손우경은 무릎을 굽히며 나와 눈높이를 맞춰왔다. 거북한 시선이 부대꼈다.
살짝 휘는 입매가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내심 궁금하게 만들었다. 놈은 자신의 입을 내 귓가 근처로 가져다대며 사분거렸다.
‘현아, 네 젖꼭지 빨게 해줘. 응?’
흠칫 놀라서 어깨를 굳히자 그는 내 얼굴을 확인하며 기분 나쁠 정도로 생글거렸다.
“거봐.”
역시나 어제부터 날 계속 놀려먹고 있는 거였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자한테 키스 같은 걸 할 리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 파오를 부추겨 내 과거 얘기를 들먹이게 만든 것도 실은 내 예민한 신경을 건드려서 이러한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무심코 언짢게 찡그려지는 내 콧잔등을 손우경은 자기 손가락 끝으로 꾹 눌러보며 꽤나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얼굴에 머물러 있는 놈의 손을 즉각적으로 쳐내버리자 녀석은 허공으로 팽개쳐진 자기 손을 힐끔 보더니 갑자기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인위적으로 지어 보였다. 못내 가증스러울 따름이었다.
“경고하는데 그 손으로 함부로 날 만질 생각 하지 마. 더 이상 네가 하는 장난에 호락호락 넘어가주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놈은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장난?”
“그래, 장난.”
손우경은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시 손가락 끝을 내 이마에 가져다댔다. 길게 자란 앞머리를 슬쩍 걷어내며 손우경이 싸늘하게 웃어 보인다.
“내가 요 며칠 유심히 지켜본 바로는, 너는 절대 승산 없는 일에 먼저 나서는 편이 아니야.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로 몸을 사린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이상한 곳에서는 쓸데없는 책임감이 넘치더라고. 이를테면, 이 괴상한 조합은 우리 중에서 전력상 가장 도움이 안 되는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그건 네가 아돌프에게서 직접 명령을 전달받은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
“바로 네 그러한 책임감 자체가 벌써 표정에서부터 아무런 의지도 없어 보이는 널 그나마 억지로 움직이게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이겠지.”
속내를 전부 간파당한 느낌이었지만, 나는 가급적 무표정하게 대응했다.
“사실 네가 강시 이마에 붙어 있는 관음존자의 부적을 보게 되면 날 분명히 뒤쫓아 올 거라고 어느 정돈 예상했었어. 그대로 뒀으면 넌 아마 지붕 위에서 계속 불구경이나 했을 테니까.”
“!”
그럼 지붕을 반으로 쪼개서 나를 땅으로 내려오게끔 만든 게 전부 다 계산된 짓이었다고…….
“게다가 그 빨간 눈의 서양 얼간이가 네 몸에다가 이딴 구속복 같은 걸 입혀놨으니 넌 절대 그 자식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왠지 융통성 없어 보이는 그 조막만 한 머리통 속에선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멤버를 그대로 유지하며 끝까지 이 임무를 완수할까. 오로지 그 생각뿐이겠지.”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욱 불쾌했다.
거기까지 확인 사살을 끝낸 손우경은 이마를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상당히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단언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무슨 ‘장난’을 쳐도 넌 아무 반항도 못할 것 같은데?”
턱 끝을 받치던 손가락이 이번엔 내 입술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아니면 설마라도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괴롭히지 마.”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나와 손우경의 사이로 귀가 달린 동물 머리뼈 지팡이가 불쑥 겨누어졌다. 오조가 방금 잠에서 깬 졸린 목소리로 손우경을 향해 엄포를 놓았다. 물론 눈곱만큼도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삼장이 싫어하고 있잖아.”
가장 곤란했던 타이밍에 때맞춰 그 맥을 끊어준 건 무척이나 고맙지만, 그 대상이 하필이면 새끼 여우라서 기분이 살짝 미묘해졌다.
이윽고 손우경은 눈을 부릅뜬(그러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는) 오조에게 웃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냐, 틀렸어. 괴롭히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삼장 쪽이라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오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른 되물었다.
“삼장이? 삼장이 널 왜 괴롭혀?”
“난 좀 친해져볼까 하는데 자꾸 냉정하게 굴잖아.”
오조가 눈알을 또르르 굴리다가 그 말에 자신도 수긍하는 기색을 비쳤다.
“음. 하긴 삼장은 성격이 정말 나쁜 거 같긴 해. 그 뭐랄까…… 많이 이기적이라고 해야 되나.”
“거봐. 얘가 날 괴롭히고 있는 게 맞다니까.”
……진짜 작작 해라, 니들.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에도 엉덩이가 시릴 정도로 찬 방에 들어갔는데 나한테는 방석을 하나도 안 주고 자기 혼자서만 세 개나 깔고 앉았었어. 거기서 자다가 진짜 동사할 것 같았는데 내 수호천사가 여기에서 얼어 죽으면 안 된다고 깨워줘서 간신히 일어났거든. 또 자기는 오늘 아침에 혼자 계란부침을 네 개씩이나 먹었으면서 나한텐 매일같이 만두를 하나밖에 안 주려고 들어. 또 그리고…….”
얘야, 솔직히 방석 얘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긴 한데 그 계란부침은 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거든?
“그래, 그래. 듣고 보니 삼장이 다 잘못했네.”
오조는 자기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엄한 목소리를 내며 내게 경고를 주었다.
뭐 이번에도 딱히 위협은 되지 않았다.
“삼장, 너 우경이를 괴롭히면 안 돼.”
“맞아, 너 나 괴롭히면 못써.”
“…….”
저 집에 좀 제발 보내주세요, 관음존자님.
별다른 수확도 없이 빈손으로 털레털레 돌아온 파오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내 열렬하게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을 느꼈는지 파오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내게로 다가와 ‘아, 아깐 내가 정말 미안했어, 현아’ 하고서 뜬금없이 사과를 건넸다. 음, 이게 아닌데.
한낮의 태양빛이 머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슬슬 점심 먹을 때가 다 되어서, 주머니에 들어 있던 축소 가방에서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를 꺼내어 감자나 삶기로 했다.
오조 놈은 끼니마다 하나씩만 준다고 자꾸 뭐라 하는데 물론 내 기분에 따라 다른 음식이 추가되기도 하지만,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는 원래가 무슨 식재료든지 딱 하나만 먹어도 한 끼 식사로서의 영양소가 충분히 공급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허나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반짝이는 오조와는 달리 손우경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더는 숨기려 들지 않았다. 이제 샬레만 봐도 완전히 물린다는 얼굴이었다. 애가 고기 종류나 좋아할 것같이 육식계처럼 사납게 생기긴 했으나 정 먹기 싫으면 모래라도 퍼 먹든가 할 것이지 감히 반찬 투정이다.
마지막으로 파오는 어제부터 완벽하게 삐딱선을 타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정확한 그 주어는 없었지만, 도저히 같이 먹고 싶지 않다며 굳이 번거롭게 자기 몫까지 준비하지 말라고 했다. 귀찮았지만 그래도 예의상 한 번은 더 권해봤다.
“대충 한 끼 때우면 되지 뭘 또 까다롭게 구십니까.”
“……밥맛이 없거든.”
고의로 오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역시 심성이 크게 글러먹은 놈이었다.
나는 샬레에서 갓 삶긴 따끈한 감자 한 덩어리를 침을 질질 흘려가며 하염없이 바라보는 오조에게 건네주곤 슬쩍 파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 앞에 가서 최대한 게걸스럽게 먹어라.”
“게걸스럽게?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음, 그냥 너 평소 먹던 대로 그렇게 막 먹으면 돼. 나도 가급적이면 너 먹는 모습은 잘 안 보거든.”
“응, 알았어.”
오조가 파오 앞으로 쪼르르 걸어가서 그 조그만 입으로 자기 몫의 감자를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 파오는 차마 뭐라고 말은 못하면서도 새끼 여우가 눈앞에서 알짱거리자 또 머리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꿈틀거리는 안면 근육은 이미 위험수위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었지만, 오조의 곁에서 뭉글이가 이빨을 드러낸 채 딱 버티고 있는지라 아마 섣부른 행동은 못할 거다.
가끔씩 오조의 자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될 정도로 참 예쁘게 생겨서 나도 모르게 넋 놓고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아까 파오가 손우경에게 지껄인 그 말들처럼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외모가 계집애처럼 곱상한 편이었지만, 저렇게 예쁜 남자애는 나도 난생처음 봤으니까.
그러니 만약 오조가 성별만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쩌면 저 둘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첫날에도 그림리퍼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오조가 여자인 줄 알고 잠시 혹했었던 파오가 아닌가.
“……그딴 순진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역겨우니까.”
그러나 결국 파오가 일을 치고 말았다.
놈도 아침 내도록 사막을 횡단했으니 지금쯤이면 절대로 배가 고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냥 괜한 고집 부리지 말라고 오조를 시켜서 살짝 약이나 올려볼 심산이었는데, 내가 아무래도 녀석의 인내심을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아직 어린애인데 저렇게까지 잔인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않나.
상부의 명령에 의해 당신 손으로도 이미 수많은 인명을 해쳤듯이, 저 녀석도 똑같은 입장이었을 뿐이다.
오조가 감자를 다 먹은 빈손을 로브에 쓱쓱 문질러 닦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조금 기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파오는 내가 많이 싫은가 봐.”
따지고 보면 내가 방금 파오를 자극한 원인 제공자인 만큼 조금 미안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그래서 놈의 밤톨 같은 까까머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어주며, 아, 얘 머리 왜 이렇게 따갑냐. ……쓰다듬어주려다가 그냥 손을 떼곤 목청을 큼큼 가다듬고 말했다. 그러게 왜 불난 집에 가서 부채질을 하니. 오조 이 어리석은 중생아.
“너도 같이 싫어하면 되지.”
“그런가?”
오조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민하다가 이내 파오와 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난 근데 삼장처럼 성격이 나쁘질 않아서 누굴 싫어하는 일은 잘 못하겠어.”
그 순간, 내 근처에서 샬레에 든 감자와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손우경이 느닷없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와, 저게 진짜.
* * *
우리는 지금 눈앞에 닥쳐 있는 저 빌어먹을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높게 쌓인 모래 언덕 위에서 네 명이 쭉 일렬로 선 채로.
놈들은 모두 똬리를 튼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저런 게 길을 가다 단 한 마리만 눈에 띄어도 심장이 아예 남아나질 않을 것 같은데, 현재 눈에 얼추 보이는 것만 대강 짐작해봐도 약 수백 마리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차마 제대로 된 숫자를 헤아려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이곳 쿠르게오르 사막이 오랜 세월 동안 막대한 방사능 수치에 노출되어 있었다지만, 이건 자연의 법칙을 어긋나도 너무 크게 벗어나 있었다.
광택이 흐르는 딱딱한 등껍질은 층을 달리하며 갈라져 있다. 그나마 동그랗게 움츠린 놈들은 비위가 덜 상했으나, 몸을 움츠리다 만 녀석들은 배 밑에서 꾸물거리는 그 무수한 다리들로 인해 징그럽고 소름이 끼쳐왔다.
주로 낙엽이나 돌 아래와 같은 습한 곳에 서식하는 쥐며느릿과의 갑각벌레였다. 흔히 공벌레, 혹은 콩벌레로 불리며 사람이 손으로 만지거나 자기 신변의 위험을 느끼면 몸을 공처럼 말아 방어 태세를 갖추는, 그 작은 벌레들 말이다.
바로 그런 놈들이, 거의 이층짜리 집채만 한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이 사막 한복판에서 폐타이어처럼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아주 빼곡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윽고 동그랗고 팽팽하던 몸통이 촘촘하게 주름진 등짝으로 오그라들었다. 한 벌레가 깨어난 것이다. 놈의 더듬이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아갈 방향을 가늠했다. 낮잠 타임은 끝났는지 연달아 다른 놈들마저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이 정말 안 좋았다. 간혹 가다 눈에 띄는 작은 몸집의 벌레들조차 상당한 불쾌감을 조성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저것들은 자그마치 사람의 몇 백 배에 달하는 크기였다.
심지어 다리까지 많이 달려 있는지라 형언할 수 없는 불쾌감이 절정에 달했다. 점심나절에 먹었던 포슬포슬한 식감의 감자가 위장 안에서 부드러운 샐러드처럼 곤죽이 되어 갈려 나올 기세였다.
정말 어디든 좋으니 저 망할 것들이 아예 안 보이는 장소로 대피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파오가 영혼까지 하얗게 표백된 듯 핼쑥해진 얼굴로 말했다.
“난…… 벌레가 정말 싫어.”
지금 너만 싫은 거 아니거든요.
“특히 지네나 저런 애들처럼 딱딱한 등껍질에 다리가 많이 달린 애들.”
파오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더니 몸을 부르르 떨며 그 커다란 덩치에 안 어울리게 잔뜩 앙증맞은 척을 했다.
“우, 우리 여길 꼭 지나가야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거 맞지?”
“그러니까 다들 한 시간도 넘게 아무 짓도 안 하고서 여기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던 거 아닙니까.”
놈이 배시시 웃는 낯으로 몸을 빙글 틀며 말했다.
“그럼 난 벌레 공포증이 무척 심한 관계로 이쯤에서 잠깐 사라졌다가, 너네가 저 혐오스러운 것들을 전부 다 처리할 때쯤에 맞춰 다시 돌아올게. 난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테니 부디 내 걱정은 말고.”
반대쪽으로 잽싸게 도망치려던 파오를 붙잡으려다 녀석 목덜미 부분의 옷을 확 잡아당겼다. 내가 결코 멱살을 잡으려던 건 아니었다. 급한 마음에 그만. 그렇다고 쟤 목을 조를 순 없지 않은가.
“너 이거 안 놔?”
파오가 대뜸 성질머리를 부렸으나 진짜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야, 이 비겁한 인간아!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너 혼자서만 튀면 어쩌겠다는 거야!”
“이게 아주, 오냐오냐해줬더니 이제 말까지 놓고서 맞먹으려고 드네!”
“닥쳐! 니가 그러고도 왕년에 군부에서 천봉대원수까지 지냈던 인간이냐?”
“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지!”
파오가 맹세컨대 절대 안 도망칠 테니 일단 자기 멱살부터 놓아달라며 간절히 애원했다. 그래도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연장자한테 멱살까지 쥔 건 나도 좀 너무하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졌던 게 화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나 유난히 벌레를 무서워하던 파오는, 결국 정반대편으로 까마득한 별이 되어 금세 사라져버렸다.
이 개자식…….
마하의 속도로 튄 파오의 빈자리를 씁쓰레한 눈동자로 내려다보는데 오조가 자신의 충직한 소환수인 뭉글이하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걱정 마, 유. 나도 저런 불량식품을 너한테 먹으라고 하진 않을게.”
강시의 썩은 시체도 훌렁훌렁 잘 잡아먹던 그 뭉글이마저도 저런 비위 상하는 음식만큼은 취급하지 않는 듯했다. 오조는 나와 손우경을 쳐다보며 자못 난처해진 얼굴로 말했다.
“음, 유가 심하게 겁먹은 걸 보니 아무래도 여길 쉽게 지나가긴 좀 어려울 것 같아.”
“그래서?”
“오늘은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어서, 지금부터 급하게 시작하려면 그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기는 하는데…….”
오조가 망설이며 무슨 말을 꺼내려 들었지만, 뭔가 걸리는 점이 있는지 계속 머뭇거렸다.
“으. 정말 미안하지만 너네가 저 아래로 내려가서 잠시라도 주의를 끌어줄 순 없을까?”
손우경이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알아듣게 설명해봐.”
오조가 뺨을 긁적거렸다.
“그게 말이야. 쟤네들을 일일이 상대하자니 개체수가 너무 많은데다, 외관상 실제로 느껴지는 혐오감 때문에 너희도 가까이 가서 싸우고 싶진 않을 거 아냐. 그래서 아예 다른 소환수들을 여러 마리 불러내서 싸우게 만들까도 싶었는데, 걔네들은 주인의 꺼림칙한 마음에 꽤 지대한 영향을 받거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좀 더 상위 개체의 존재를 초환해서 처리를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러려면 나한테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해.”
손우경이 그런 오조의 이야기에서 빈틈을 찾아냈다.
“그럴 바엔 네가 초환한다는 그 대상이 이곳에 강림할 때까지 여기서 다 같이 기다리면 되는 거잖아. 구태여 우리가 저 밑으로 내려가면서까지 어떤 위험을 감당해야 될 필요가 대체 뭐가 있어?”
저 손우경마저도 사막의 돌연변이 우량아 벌레들과는 결단코 싸우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오조가 끄응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른 부연 설명을 늘어놓는다.
“소환과 초환은 그 개념이 조금 달라. 소환은 내가 주인으로서의 큰 권위를 가지고 나보다 하위의 존재들에게 자유롭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이지만, 초환은 나보다 상위의 존재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간청해야만 비로소 내 초대에 응해주시거든. 마찬가지로 부탁하는 입장에서는 현재 나한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생명체를, 단지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라지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없어. 뭔가 그럴듯한 계기가 있어야 해. 가령 동료들이 위험에 빠졌다거나 혹은 일종의 복수와 같은…….”
“초환하려면 시간이 대략 얼마나 소요되는데?”
“……그걸 나도 장담할 수가 없어. 어떨 때에는 하루 종일 요청해도 아예 무응답인 경우도 있었으니까.”
손우경은 딱 잘라 말했다.
“미안하지만 너조차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근데 그 초환술 외에는 또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 아까 낮에 파오 사형에게서 대충 얘길 전해 들었는데, 너, 어제 마을에서도 그렇고 예전에도…….”
손우경이 답지 않게 그 뒷말을 아끼려 들었다. 역시 내 짐작대로 어제 마을에서 뭔가 일이 있었구나.
오조는 손우경의 말에 갑자기 난폭한 울음소리를 내는 뭉글이를 계속 불안한 기색으로 곁눈질하다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작은 입술을 오무작거렸다.
“나도 이틀 연속으로 그걸 사용하기에는……, 어제는 진짜 너무 급한 나머지…… 사실 난 파오를 도와주려고 그랬던 건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지도 잘 모르겠구.”
나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데 도와주려고 했는데 파오가 화를 냈다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난 딱히 자세하게 물어보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그걸 물어본다고 한들, 이미 일방적으로 골이 깊어진 그 감정의 매듭이 한순간에 풀어질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사실 그보단 귀찮아서 그렇다.
새끼 여우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눈초리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정말 눈에 띌 정도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오조가 말하는 투로 봐선, 오직 자신만이 이 상황을 전부 해결할 수 있다고 아주 굳건하게 믿고 있는 듯했다. 어제는 파오를 도와주려 했다고 하질 않나.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 여기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오조의 책임감이 가장 투철하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전직 대원수였다는 놈이 나 몰라라 제일 먼저 달아나는 판국에.
룸버린에서 오조 개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컸다고는 얼핏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연신 고민하던 오조가 마침내 결심을 내린 듯했다.
“아, 알았어. 그럼 초환술은 포기하고 골렘이라도 소환해볼게. 여긴 땅의 원소가 풍부한 사막 지역이니까 땅으로부터 형상을 빌리는 데에도 재료적으로 큰 도움이 될 거야. 물론 골렘 역시 불러내는 것에 일정 시간이 소요되고, 한 번에 딱 한 마리밖에 소환할 수 없지만, 일단 내 명령 자체에는 절대적으로 반응하거든.”
“…….”
“대신 조건은 아까와 거의 같아. 내가 소환진을 그리는 동안에 너희가 내 주변에서 놈들의 주의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려놔야만 해. 소환진은 주변 사물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너무 강해서 그걸 치기 전에 꼭 결계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지금은 내가 그것까지 준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해. 게다가 소환은 무척 신중한 작업이라 중간에 예기치 못한 방해를 받게 되면 아주 많이…… 곤란해지거든.”
나는 그 어떤 것도 수락한 기억 따위가 없는데도 어느새 손우경과 모든 의견 조율이 끝난 새끼 여우가 모래 바닥 위로 소환 마법진을 그리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우경은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삐딱하게 꽂은 채 내게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내가 다시 설명 안 해줘도 방금 그림리퍼가 뭐라고 하는지 다 들었지?”
“다 들었지만 그건 너하고 둘이서 했던 말들이지 결코 내 의사를 물어본 기억이 없는 걸로 아는데.”
“오늘 저녁도 이 사막 지대를 벗어나긴 힘들 것 같은데, 쟤네들하고 같이 사이좋게 야영할 작정이신가 봐?”
손우경은 사막 위를 데구루루 굴러다니고 있는 거대한 벌레들을 흘깃거리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저런 걸 상대하는 건 나도 좀 싫긴 해.”
순간 이놈도 설마 파오 녀석처럼 나를 남겨두고 사막의 별이 되어 사라지는 게 아닌지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손우경이 심드렁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난 다리가 세 개 이상인 건 무조건 싫어해. 그래서 사실 네발 달린 동물들도 별로야.”
“동물을 싫어하는 건 네 개인의 취향이니까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치고 이해하겠는데, 어째서 그 조건이 다리가 세 개부터인 거지?”
“음, 잘 생각해보니까 다리가 딱 두 개만 달린 것들도 선천적으로 그리 안 좋아해.”
그야말로 동문서답이었다. 놈과 더 이상의 쓸데없는 말을 섞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내가 등을 돌리자 손우경은 내 뒤에 대고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사를 읊조렸다.
“……왜냐하면 남자는 다리가 세 개니까.”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표정이 확 구겨졌다. 방금 귀로 엄청난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아니, 들어서도, 그걸 이해하려고 해서도 안 될 말인 듯했다.
그때였다. 손우경이 별안간 내 손목을 꽉 움켜쥐더니 거침없이 모래 언덕 아래로 뛰어올랐다.
나에겐 언제나 자세하게 생각할 시간들이 부족했다. 모든 것들은 항상 급작스럽기만 했다. 관음존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순간도, 서쪽으로 불쑥 떠나야 했던 날들도, 그리고 바로 지금 이순간도.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기예인 경공을 체득한 놈과는 달리 나는 이런 건 아예 할 줄조차 몰랐다. 녀석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면서 손목과 연결된 날 쳐다보며 오만한 모양새로 입술을 휘며 웃었다.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녀석의 모습이 마치 새처럼 자유로워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생글거리던 손우경은 느닷없이 날 지탱하던 자신의 악력을 풀며 말했다.
“자, 그럼 네 실력 좀 보여줘.”
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하늘 위로 둥둥 떠올랐던 발이 거의 내던져지듯 착지한 곳은 바로 콩벌레의 딱딱한 등판 위였다. 우스운 꼴을 면하고자 가까스로 두 발로 착지했지만, 이내 온몸의 솜털이 빳빳하게 곤두설 만큼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쫙 끼쳐왔다.
내 발과 벌레의 등껍질 사이에는 비록 신발 밑창이라는 얇은 막이 존재했으나 체감상으론 이미 맨발로 발을 디딘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멀리서 보는 것과 실제로 내 발 아래에서 이 거대한 벌레가 움직이는 것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벌레의 등 주름이 너무 현실적으로 생생했는지라 속에서 헛구역질이 났다.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손우경은 날 벌레 등판에다 멋대로 던져놓고는, 정작 자신은 기를 한껏 끌어 모아 공중 부양 상태를 유지하며 그 위에서 전혀 내려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놈이 즉각 대꾸했다.
“말했잖아. 난 다리가 세 개 이상 달린 건 싫어한다고.”
내 절박한 상황은 조금도 아랑곳없이 손우경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속 편한 소리나 해댔다.
“그리고 잠시 벌레들의 주의를 끄는 데 굳이 두 사람씩이나 희생할 필요는 없잖아.”
남이야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든 말든 손우경은 그저 벌레들 위를 떠다니며 혼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물론 그 얄미운 입으로는 간간이 내게 훈수를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그렇게 계속 장승처럼 서 있기만 하면 오조의 소환진 작업을 돕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될 텐데?”
“시끄러워!”
가까이서 보면 이 반들반들하게 층이 난 등판이 태양빛을 반사해서 사실상 반투명하게 속을 비추고 있었다. 그 반투명한 등판 아래로는 벌레의 회색 살점이 적나라하게 보였는데, 안에서 촘촘한 주름들이 연신 꿈틀거리는 것이 진짜 몸서리치게 징그러웠다.
하지만 손우경이 위에서 저렇게 채근하지 않아도 오조의 소환진 작업이 차츰 진행됨에 따라 다시 촌각을 다툴 만한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까 새끼 여우가 미리 경고했던 대로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어떤 강한 힘에 이끌리듯, 벌레들의 움직임 역시 오조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일거에 집중되는 중이었다. 녀석들이 무리를 지어가며 그 촘촘하게 돋아난 수천수만의 다리들을 연달아 움직이는 장면은 정말 기절할 정도로 아찔했다.
그렇지만 내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실력을 제대로 보여달라는 저 손우경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도, 지금 이 벌레의 몸통 위에서 간신히 몸의 균형이나 잡고 있는 내가 무슨 재간으로 이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떼거지로 이동하는 것을 막겠는가. 애초에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이제껏 관음존자의 충성스러운 하수인으로서 살아가지는 않았을 거다.
허나 이 속도로 가다간 얼마 안 지나 금세 오조가 있는 곳까지 벌레들이 도달할 것이다. 손우경 저 자식이 어떤 속셈으로 이런 뻘짓거리를 벌이는 건진 몰라도, 그저 단순하게 날 골탕 먹일 작정이라면 굳이 새끼 여우까지 위험에 빠트릴 필요는 없었다.
원망에 찬 눈길로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손우경을 노려봤다. 하지만 녀석은 가부좌 자세의 다리에 받친 손으로 어느새 턱까지 괴고 앉아 현재 벌어지는 상황들을 유유자적하게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놈이 내가 서 있는 벌레의 근처로 몸을 이동시켰다.
“너 정말 이대로 아무 짓도 안 해볼 생각인가 봐. 오조는 지금 소환진 안에서 상황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던데 말야.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참 매정하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벌써 했겠지! 너야말로 그렇게 떠 있지만 말고 당장 뭐라도 좀 해봐!”
손우경은 마치 날 약 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 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러더니 이내 김빠진 얼굴로 드디어 내가 서 있던 벌레 위로 가뿐하게 몸을 안착시켰다. 나와는 몇 걸음 남짓 떨어진 거리에 착지한 손우경에게 순간 격렬한 분노가 치솟았으나 지금은 그렇게 한가한 기분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제 벌레들과 오조와의 사정거리가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손우경도 말했다시피 새끼 여우가 소환 작업에 매진해 있느라 완전히 무방비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강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녀석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내게 한 번 더 말문을 열었다.
“일부러 안 하는 거야, 아님 정말 못하는 거야?”
이 시급한 상황에서도 느긋하게 저딴 헛소리나 하고 있는 놈에게 정말 분통이 터져왔다. 역정을 내고 싶었지만, 이를 꽉 악물고서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애써 삭이고 있는 나에게 손우경은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름대로 확신이 필요했는데.”
“…….”
“역시 그 자식이 나한테 널 보낸 이유는 그거 하나뿐이었나 보다.”
시종일관 자꾸 뜻 모를 소리나 해대는 판에 내 인내심의 한계치가 거의 임계점에 육박하려던 찰나였다.
뒤에서부터 느닷없이 거대한 공이 되어 굴러오는 다른 벌레의 몸통이 그만 내가 올라서 있던 벌레를 정통으로 치고 박았다. 순간 몸이 휘청하며 중심을 잃더니 어이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표면이 매끌매끌한 반원형으로 생긴 이 벌레의 특징상, 넘어진다는 것은 즉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말과도 그 뜻이 일맥상통했다.
이제 다 끝났구나, 생각한 순간.
손우경이 정말 놀라울 정도의 반사 신경으로 얼른 내 팔을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벌레 등에서 낙하하여 생을 마감한 첫 번째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사막이니 모래 위로 몸이 떨어진다고 쳐도 아마 뒤에서부터 줄줄이 따라오고 있는 다른 벌레들에게 납작하게 깔려죽었을 터였다. 아니, 저 소름 끼치는 다리들이 내 몸에 직접 닿는 순간, 필경 정신에서부터 사망 선고가 내려질 것이다.
그래도 지금 내 상황이 잘 공감이 안 간다면 집에 굴러다니는 바퀴벌레 한 마리를 손수 포획해서 한번 배 부위를 뒤집어 까봐라. 그리고 그게 수 천만 배로 확대돼서 눈앞에 바짝 보인다고 생각해봐라. 아마 게거품을 물고 기절할걸.
그러나 나의 위기는 비단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손우경의 팔 힘 하나에 의지한 채로 벌레 측면에 붙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놈이 위쪽으로 나를 전혀 끌어 올려줄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팔뚝을 덥석 쥐고 있던 그 손에서 고의적으로 힘이 느슨해지고 있는 것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어떻게든 녀석을 설득하려고 했다.
“자, 잠깐만. 너 지, 지금 그 손을 놓을 작정은 아니겠지?”
“글쎄. 아까 먹은 게 없어서 그런가, 손에서 힘이 막 풀리려고 하는데.”
저리도 안면 가득 웃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라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았다. 심지어 관음존자 이후로 저렇게 순수할 정도로 사악해 보이는 미소는 내 평생에 두 번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았다. 허나 예고했던 대로 손우경의 손에 걸린 내 팔뚝이 점점 미끄러지더니 어느새 손목에까지 도달했다.
밑을 살짝 내려다봤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모래 위에 떨어져서 벌레들의 다리에 농락당할 바엔 차라리 여기서 죽는 편이 나았다.
“제발!”
나는 자존심까지 버리고서 애걸했다.
“……부탁이야. 제발, 그 손 놓지 마.”
손우경이 흐음 하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면 넌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진짜 보기보다 더럽게 치사한 놈이었다. 이 순간에 조건을 내걸려 들다니. 하지만 지금의 내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교섭은 나중에 하고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일단 나부터 끌어올려줘! 그리고 이 거지 같은 상황이나 어떻게 좀 해결해보라구!”
악에 받쳐서 고함을 지르느라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나중에서야 크게 후회했다. 놈의 눈동자로 반짝이는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뭐든지 들어줄 거야?”
“그래, 뭐든지!”
이윽고 내 몸이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너무나 간단하게 끌려 올라갔다. 손우경은 내가 마치 어린아이라도 되는 양, 가뿐하게 한 손으로 날 잡아당겼고 그런 내 몸이 도달한 곳은 바로 녀석의 품속이었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이었다.
손우경이 내 얼굴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더니, 방심하던 찰나 도장을 찍듯 내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경악한 얼굴로 녀석을 확 밀쳤지만 당연히 꿈쩍도 안 했다.
“이건 방금 나하고 약속한 그 선불 대금이야.”
“무, 무슨…….”
“세상에 맨입이 어딨어. 그럼 일이 다 끝난 다음 남은 후불을 받도록 하지.”
내가 불안에 달달 떠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 대체, 나한테…… 뭘 할 작정이야?”
그러자 놈이 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고 가슴을 붙잡더니, 슬그머니 자신의 엄지로 옷에 가려진 유두 부위를 살살 문지르며 속삭여왔다.
‘내가 네 여길 빨아주기로 했잖아.’
이 변태 자식 같으니. 두 뺨이 화끈화끈 달아올랐지만 손우경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가지 진한 여운을 덧붙였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니, 그럼 뭘 또 더할 생각인데. 그 마지막 말의 진위에 대해 고민해볼 짬도 없이 갑자기 녀석이 날 안아 들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내 목에 팔 두르고 잘 안겨 있어.”
아무리 내가 네 목에 팔을 두르겠냐 싶었으나, 몸이 공중에 붕 뜨자마자 거의 반자동적으로 녀석에게 꼭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손우경은 내 그런 반응이 진심으로 만족스러워 보이는 듯했다.
놈은 내 등을 한쪽 손으로 떠받치고는 나머지 팔을 바깥으로 쭉 뻗고서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 지상의 상황을 중계하자면, 마침 가장 선두에서 돌진하던 벌레 한 마리가 오조의 소환진 근처로 거의 근접하게 다가서려는 참이었다.
손우경의 손바닥 안에서부터 에너지가 휘몰아치는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그런 에너지 흐름에 상당히 둔감했을 터이나 지금은 놈과 몸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기에 지금 그의 몸 안에서 기가 운용되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전달받은 까닭이었다.
그리고 선두의 벌레가 이제 막 오조의 소환진으로 침범하기 직전이었다.
소환진과 벌레들 사이에 공간의 균열이 생겨났다. 옆에서 보면 균열 자체는 종이 한 장도 채 되지 않을 얇은 두께였다. 그러나 앞에서 봤을 때에는 그 균열 안에서부터 오색 빛깔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광폭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잠시 후, 벌레들이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 소용돌이 안으로 앞 다퉈 쓸려 들어갔다. 아니, 그들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리라.
결국 사막 한복판에 득실거리던 그 벌레 놈들은 최후의 한 마리까지 전부 그 블랙홀 안으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기가 차서 그 장면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데 옆에 있던 손우경이 굳이 친절한 설명을 보탠다.
“어딘진 몰라도 아마 지금쯤 지구 반대편에서는 꽤 난리가 났을 거야. 아예 없애버린 건 아니고, 전부 빨아들였다가 다른 장소에다 슬쩍 옮겨놨을 뿐이니까.”
손우경은 벌레라면 아주 넌더리가 난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익살스럽게 찡그렸다.
“사실 단번에 몰살시키는 것도 별로 어렵진 않지만, 쟤네들은 왠지 짓이겨진 잔해가 더 역겨울 것 같았거든.”
하지만 진짜 역겨운 건 오히려 네 쪽이라며 쏘아붙이고 싶었다. 본인이 이렇게나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걸 가지고서 손우경은 방금 전 의도적으로 내 역량을 시험하려 들었었다. 그것도 최후의 긴박한 순간이 되기 직전까지, 일부러 그 타이밍을 재면서 말이다.
벌레 위에서 혼자 안간힘을 쓰느라 평소 잘 쓰지 않는 근육들이 이제 와서 경련하며 전신을 후들후들 떨리게 만들었다. 녀석에게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전쟁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식의 대규모 전투 상황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나였다. 기껏해야 부적을 쓰거나 주술 정도의 잔재주나 부릴 줄 알던 나였기에, 방금 전 이 상황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손우경은 말없이 창백해져 있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날 안고서 바닥으로 조용히 내려갔다. 손우경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생사의 위기가 느껴질 만큼 위험천만했던 일을, 어느 누군가께서 손가락 하나로 손쉽게 처리해버리는 상황을 목도해버리니 그저 내 스스로의 무능함에 치가 떨려왔을 뿐이었다.
그때 여태 어느 곳에 숨어 있었는지, 이제야 뻔뻔하게 얼굴을 비치는 파오 놈이 등장했다. 저 후안무치한 면상을 보니 불에 기름을 들이붓듯 복장이 한바탕 뒤집어질 것 같았다.
“여! 아우님, 너의 눈부신 활약은 요 근처 특등석에서 잘 구경했어.”
“이 기회에 전직 천봉대원수의 진짜 실력도 한번 구경해보고 싶었는데, 살짝 아쉽게 됐네.”
“하하, 딱히 별거 없어. 내 벼락출세의 비결은 뭐니뭐니해도 썩은 윗대가리들한테 줄을 잘 서는 거지.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이거든.”
서로 웃는 낯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실은 상대방을 경계하는 눈초리가 상당했다. 하긴 한 배를 탔다고 해서 아직 같은 편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입장이었다. 게다가 파오가 아까 그런 상황이 되자마자 저렇게 실실거리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발을 뺀 것도 사실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중요한 기술’을 보게 된 자는, 그 대상이 만일 적이라면 가급적이면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 것이 이 비정한 세계의 원칙이었으니까.
나 또한 열에 아홉은 그 원칙을 준수했는데, 예를 들어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 세상에 언제나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그 힘을 상쇄할 수 있는 천적이자 또 다른 반대급부가 있을 것이기에, 내 능력을 타인에게 공개한다는 것 자체가 마치 양날의 검처럼 그게 자신의 약점으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손우경은 내가 본 것만으로도 벌써 두 번씩이나 자신의 기술을 스스럼없이 공개했다. 그것도 내가 속한 세계에서 최강이라고 불리는 관음존자와 같은 기술인 기문파공氣門破空을 말이다.
그간 관음존자에게 별다른 적수가 없었던 까닭은, 녀석이 비정상적일 만큼 센 것도 사실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기문파공’의 마지막 계승자였기 때문이었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주무르는 기예인 만큼, 아직까지는 그걸 격파할 수 있는 그 어떤 허점조차 발견되지 않은 최강의 기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술을 알려준 장본인이자 아돌프의 스승이셨던 석가여래님은 벌써 오래전에 포타라카에서 완전히 행방불명되신 상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음존자가 기문파공에 대한 정보를 혼자 독식하기 위해 그분을 시해했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물론 평소 관음존자의 행실상,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추측만은 아니었다. 허나 오랫동안 놈의 밑에서 일해온 나로서는 그 또한 악의적인 헛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야 아돌프가 틈틈이 석가여래님의 행방에 대해 몰래 추적하고 있는 것을 곁에서 여러 번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지금도 종단 내부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도모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사람들 마음 저변에 짙게 깔려 있는 그 살해 의혹 탓이기도 했다. 석가여래님은 부처의 환생으로 불릴 만큼 누구에게서나 깊이 존경받는 분이었고, 신이라는 존재에게 의지하려는 태도를 버리고서 개인의 성찰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이 불교의 대중화를 가져온 분이셨다.
그러니 현재의 세대교체가 사람들에게는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기문파공의 계승자는 한 세대당 단 한 명씩만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는 어떻게 저 손우경이 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지가 무릇 궁금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기문파공과 일견 흡사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어떤 눈속임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다만 관음존자가 손우경을 죽이지 못하고서 장장 오년 동안 다섯 개의 검 수용소에 가둬놓은 걸로 봐선, 그럴 가능성도 거의 희박했다.
이제까지 그 관음존자가 자신에게 반하려는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뒀던 경우는 절대로 없었다.
하여 저 손우경이 여직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기적’을 성립시킨 것은, 적어도 그에게서 관음존자와 같은 기술인 기문파공을 체득한 게 아니고서야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좌우지간 손우경과 파오 저 둘은 평소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면서 겉으로만 친한 척했을 따름이지 그게 전부 서로에 대한 일종의 탐색전이었던 모양이다. 손우경은 파오와 침묵 어린 신경전을 벌이면서 여전히 내 허리를 붙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에 더 억센 힘이 가해졌다. 파오가 그의 시선을 내게로 옮기고 나서 벌어진 일이었다. 근데 지가 뭔데 그윽한 시선으로 날 되게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냐.
여하튼 이제 땅으로 무사히 내려왔으니 손우경이 그만 나 좀 놔줬으면 좋겠다. 녀석은 아까 전부터 사람을 무슨 자신이 반드시 보호해줘야 할 연약한 물건인 양 취급하고 있었다. 하필 파오 놈의 면전에서 이런 꼴불견이나 보이고 있는 것이 못내 수치스러웠다.
잠자코 있던 파오가 먼저 백기를 들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그거라면 괜한 걱정이야. 나한테는 친동생 같은 녀석이라구.”
“…….”
“뭐, 그 친동생 같은 녀석이 어느 정체도 모르는 남자한테서 노려지고 있는 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가 꽤 안타깝지만 말야.”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고 싶었으나 듣고 있는 내내 기분이 싸했다. 대체 이 찝찝한 느낌은 뭐지. 파오는 분위기가 잔뜩 날카로워진 손우경을 의식하며 자기 두 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 펼치고 순순히 항복을 선언했다.
“사막에 들어와서부터 결심한 거지만 난 너하고는 절대로 싸울 생각 없다.”
손우경이 뭐라 대꾸하려고 살짝 입을 연 사이, 등 뒤에서 쿵! 쿵! 하면서 땅이 강하게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함에 못 이겨 고개를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
그 길이가 저 하늘의 구름에까지 맞닿아 있었다. 그것은 사막모래와 같은 색을 띤 옅은 갈색의 골렘이었다. 골렘은 둔탁한 걸음걸이를 선보이며 우리에게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심지어 발 하나만 움직여도 아까의 그 벌레들 따위는 단숨에 몇 마리씩 밟아 죽일 수 있을 만큼, 정말 무지막지한 크기였다.
그리고 옆에서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새끼 여우가 뭔가 몹시도 억울한 표정으로 우리를 황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 여기 있던 벌레들은 다 어디로 갔어? 계약 조건상 이대로 얘한테 아무것도 안 시키고 다시 돌려보낼 수는 없는데…….”
손우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런 대답도 안 하자 오조의 동물 머리뼈 지팡이에서 순간 파란색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나는 오조가 저렇게 열 받아 보이는 표정은 처음 봤다. 게다가 무서운 얼굴을 한 골렘마저도 어쩐지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조가 골렘 다리에 한쪽 손을 얹고는 우리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로 말을 건네자, 골렘의 목에서 그르르르 소리가 나더니 입에서 돌과 모래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그래, 너도 이대론 못 가겠다고?”
오조는 파란 불꽃이 계속 뿜어 나오는 지팡이를 치켜들더니 정확히 우리를 가리키며 골렘에게 명령했다.
“정 안 되겠으면 그럼 쟤네라도 공격하든가.”
그런데 오조의 지팡이 끝이 왠지 파오 쪽으로 심하게 치우쳐 있던 걸, 나는 골렘이 우리가 서 있던 땅바닥으로 돌주먹을 쾅! 내리치기 전에 아주 잠깐 본 것 같았다…….
* * *
저녁 내내 골렘에게 마구 쫓겨 다니느라 사막 위를 전력 질주했더니 온몸의 진이 다 빠져 있었다. 손우경이 설렁설렁 도망치는데도 불구하고 골렘이 걔는 신경조차 안 쓰고 나와 파오의 뒤만 집요하게 쫓았다.
너 지금 만만한 상대 골라가면서 골렘 주제에 사람 차별하냐?
분명 이 일의 원인 제공자는 손우경이었고, 오조의 마음속 괘씸죄는 파오였던 듯싶은데 왜 애꿎은 나까지 연대 책임을 지며 모든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지 정말로 이해 불능이었다.
머리에 묻은 모래알갱이를 탈탈 털어내던 파오가 뭉글이 위에서 검은색 안대를 끼고서 푹 숙면 중인 오조를 바라보며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이래서 어린애들은 딱 질색이야.”
“나 어린애 아냐.”
누워서 미동조차 없기에 당연히 자는 줄로만 알았다. 안대 때문에 얼굴이 절반이나 가려 있어서 자세한 표정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무뚝뚝하게 들려오는 걸 보니 새끼 여우가 아직도 화가 났다는 게 느껴졌다.
“당신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어린애 아니라고.”
“네 나이 따윈 관심 없으니까 자던 잠이나 마저 자지그래.”
파오가 차갑게 틱틱거렸지만, 나는 둘 사이에 오가던 대화를 엿듣던 중 오조가 대체 몇 살인지가 살짝 궁금해졌다. 얼굴만 봤을 때에는 아직 미성년자일 가능성도 컸지만, 그러기엔 과거부터 들려오던 그의 유명세가 상당했다.
내가 올해로 스물다섯 살이고, 외관상으로도, 실제 나이로도 우리들 중 최고 연장자인 파오는 분명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나보다 일곱 살이 더 많았었다. 그럼 이제 서른두 살인가.
그런 나의 궁금증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손우경이 뭉글이의 위에 걸터앉더니 누워 있던 오조의 안대를 벗겨내고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나는 꽤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 대체 몇 살이야?”
오조는 앉아 있기도 심히 귀찮은지 다시 누우려고 몸을 뒤로 벋대며 대답했다.
“왜.”
“대체 몇 살인데 그렇게 철없이 자기 몸 생각도 안 하고 자꾸 겁도 없는 짓을 하나 싶어서.”
“……아…….”
“너 문차일드라서 마나의 제한 같은 건 거의 안 받는다고 했었지? 근데 마나의 제한을 받건 안 받건 그딴 무식한 짓을 계속 하면 몸이 안 남아나. 네 마법 스승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룸버린에 사는 멍청이들은 그런 기초적인 것도 안 가르쳐주던가?”
“……네가 신경 쓸 거 없잖아.”
손우경은 잠시 말이 없다가 그래, 알았다 하고서 다시 안대를 돌려주었다. 오조가 안대를 받아 들고선 침울한 기색으로 변하자 자리를 비켜주려던 손우경이 새끼 여우의 코를 돼지코로 들어 올리며 키득거렸다.
“꿀꿀 해봐. 잘 어울리겠다.”
“꿀꿀?”
손우경이 배를 쥐며 크게 웃는다. 쟤는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알고 보면 다분히 유치한 구석이 있었다. 손우경이 웃음을 삼키며 재차 같은 질문을 던졌다.
“야, 그래서 너 몇 살인데?”
오조가 손우경의 손가락을 자기 코에서 냉큼 떼어내곤 자신의 손바닥을 펴서 그 손가락들을 일일이 세었다. 그러다가 좀 모자랐는지 손우경의 나머지 손까지 빌려와 마저 개수를 세려 들었다. 허나 손가락 열 개에서부터 이미 머리에 큰 과부하가 온 모양이었다.
“열 개보단 더 많았는데 안 센 지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룸버린의 그림리퍼는 그 악명에 비해선 사실 너무 귀여운 놈이었다. 손우경도 그런 새끼 여우가 귀여웠는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가, 순간 흠칫하는 얼굴로 손을 떼며 말했다.
“아, 따가워. 머리가 무슨 고슴도치야.”
놈이 흐 하고 웃으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너도 그렇게 나쁘진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너까지 돌봐주는 건 무리라서.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 하지 마.”
“…….”
새끼 여우는 토라진 얼굴로 안대를 쓰고서 다시 뭉글이 위로 드러누웠다. 나는 이윽고 내 쪽으로 다가오는 손우경을 바라보며 여태까지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맴돌던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넌 몇 살인데?”
그러자 손우경이 멍하게 날 내려다봤다. 왜 그런지 본인 스스로도 충격을 받은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게. 나 몇 살이지.”
“…….”
손우경이 찬찬히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가만 있어봐. 수용소에 오년 동안 갇혀 있었고, 그전에 마지막으로 내 나이를 셌을 때가…….”
녀석이 눈을 깜빡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마 스물네 살 때쯤 마지막으로 셌던 거 같은데.”
설마 그렇다면. 지금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옆에서 듣기만 하던 파오도 그런 내 생각과 일치했는지 얼른 쐐기를 박아 넣었다.
“너 근데 시간이 정지한 방에 갇혀 있었다면서. 그럼 아직도 스물네 살이겠네?”
“그게 그렇게 되나. 난 현재 내 나이가 꽤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파오는 직접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흥, 저 건방진 놈이 역시나 새파랗게 어렸구나 하는 표정으로 몹시도 의기양양해 보였다. 지가 나이 좀 많이 처먹은 게 벼슬이자 감투라도 되는 것처럼 유세였다.
하기야 거의 어디에서든지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끼리 모여 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역시 족보 정리인 법이었다. 그러니 나도 이제 더 이상은 아무것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재빨리 바닥을 털고 일어나 놈을 향해 당당하게 나의 권리를 주장했다.
“너 앞으로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면 되겠네.”
그러나 손우경은 정말이지 기도 안 찬다는 얼굴로 비웃음까지 머금으며 그 즉시 대답했다.
“……네 어딜 봐서.”
내 위아래를 연달아 훑어보는 그 눈빛에는 가차라곤 없었다.
* * *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눈은 피로감에 물들어 침침한데 이상하게 통 잠이 오질 않았다. 매일 밤 모래투성이인 맨 바닥에서 노숙자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밤하늘에 뜬 별들이 무척 영롱하고 아름다웠지만, 등이 배기는 딱딱한 바닥이 불편했으며 무엇보다 파오 자식이 정말 미친 듯이 코를 골았다.
코골이를 심하게 하면 아주 드문 경우긴 하나 수면무호흡증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데, 그냥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저걸 콱 처리해버리고서 대충 코골다 죽었노라고 둘러댈까.
그저 비좁지만 아늑했던 내 방의 침대가 간절하게 떠올랐다.
삼장법사가 되긴 전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부처님께 성심껏 예불을 드렸었다. 예불 이후로는 장서각에 처박혀서 온종일 고리타분한 경전들만 읽어 내렸다. 그렇게 고생 끝에 삼장법사가 된 이후로는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관음존자의 지저분한 뒤치다꺼리나 하고 살았지만, 지금은 차라리 그런 내 지루했던 일상들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관음존자에게 이번 일을 하달받았을 때부터, 절대 호락호락한 일은 아닐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었다. 그러나 내 작은 그릇으로 감당하기엔 솔직히 너무 벅찬 일들의 연속이었다.
네가 대체 뭘 했냐고 묻겠지만 나 말고 다른 세 명과의 육안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실력의 격차가 나를 한없이 힘들게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멤버들 사이에 껴 있자니 스스로가 굉장히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각자의 개성이 강한 저들의 성격 탓에 의견을 취합하는 과정마저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특히나 손우경은 그동안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넘어설 수 없었던, 재능이란 큰 벽에 가로막혔던 과거의 그 좌절감 속으로 다시 한 번 빠져들게 했다.
재능이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렇기에 현재의 나에게 만족하며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제 분수를 지켜가며 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하게 구는지, 내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더 욕심이 났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타인을 미워하며 질투하게 했다.
관음존자는 나의 그런 나약한 심성이 아직도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지만, 세상에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는 남자에게서 그런 위선적인 이야기를 들어봤자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뒤척이던 몸을 일으켜 오조가 어젯저녁 모닥불 대용으로 켜둔 살라만더 정령의 타오르는 몸통을 들여다봤다. 그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새삼 신기해서 넋을 놓은 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새로운 잡념이 찾아왔다. 저리도 뜨겁고 강렬하게 타오르다가 언젠가는 다시 꺼져버릴 불꽃. 그런데 내 인생에서 단 한번이라도 저렇게 불타올랐던 기억이 있었던가.
항상 다 꺼져버린 재처럼 희끄무레하게 번져 있던 내 삶이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오는 새벽이었다.
“안 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고개를 틀어서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손우경 또한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이런 시간까지 안 자고서 뭘 하는 거람. 파오의 코고는 소리와 더불어 오조마저 어제 많이 피곤했는지 고롱대는 숨소리를 내며 간간이 이상한 잠꼬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너야말로 왜 안 자?”
손우경이 내 말은 싹 무시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에게 말을 씹혔던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는데 녀석이 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놈이 다가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빼며 나름대로 경계 태세를 갖췄다.
오조나 파오가 다 같이 있는 낮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야심한 시각에 손우경과 단둘이 있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었다. 손우경은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는 내 모습에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내가 아무러면 이 상황에서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래?”
“어.”
“보기보단 학습 능력이 좋네.”
손우경이 조금도 반박하지 않고서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불편하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그건 아무래도 나 혼자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말보다는 늘 행동이 앞서는 녀석인지라 나에게 또 이상한 수작을 걸려고 들었다. 놈이 내 귀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는 게 내키지 않아서 손등으로 툭 쳐내봤지만, 그럴수록 현 상황의 분위기는 더 거북해지기만 했다. 거북하다 못해 차라리 거북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등껍질 안에라도 숨을 수 있게.
손우경의 손길이 내 얼굴까지 완전히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질문을 던졌다.
“너 관음존자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내 질문이 너무 직접적이었나 하고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 말에 녀석이 얼굴을 관통하는 듯한 깊숙한 시선으로 나를 빤히 들여다봤다. 적당히 거름망에 걸러서 좀 더 우회적으로 물었어야 했는데, 가끔씩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목에서 바로 빠져나올 때가 있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표정 때문에 혹시나 대형 지뢰를 밟은 건가 해서 조용히 눈치를 살폈으나 다행히 녀석은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냥 아는 사이.”
“……기문파공은 누구한테서 배운 건데.”
“글쎄. 누구한테서 배웠을까.”
“너랑 말장난 하자는 거 아냐. 관음존자처럼 수행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마저도 기문파공을 전수받고 온전하게 익히는 데는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들었어.”
손우경이 반듯하게 자라난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지금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얼굴로 입가를 찢었다.
“천부적인 자질? 누가, 아돌프가?”
“…….”
“하, 웃기지 마. 내가 타고난 거라면 걔는 그야말로 노력형이지. 내가 수행할 때에도 같이 수행하고, 내가 놀 때에도 걔는 수행하고, 내가 잘 때에도 걔는 죽어라 수행만 했었어. 게다가 도반 시절에는 내 발끝에도 못 미치던 놈이었다고.”
“너랑 관음존자가 도반…… 관계였다고?”
손우경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좋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나는 좀 치사하지만 놈의 자존심을 건드려보기로 했다.
“네 발끝에도 못 미쳤다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널 수용소에 가둔 건데?”
돌연히 험악해지는 눈빛에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손우경은 삐딱한 표정으로 내 질문에 차갑게 대꾸했다.
“그런데 가끔은 그 노력형이 천재를 이길 때도 있나 보지.”
본인더러 천재라고 칭한 것은 차치하고서 이제 더 이상은 뭘 물어보지 않는 게 좋을 성싶었다. 파오에게는 랜드리올 자체가 금단의 땅이듯이 손우경에게는 바로 관음존자의 이름이 금기어인 듯했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공기에 숨이 턱 막혔지만, 동시에 말문까지도 꽉 막혀버렸다. 원체가 남들에게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닌지라 화제를 돌릴 만한 소재가 뇌리에 쉽사리 떠오르질 않았다. 타인하고 친해지는 데는 남 욕하는 게 최고라던데 이 참에 아돌프 얘기나 하면서 관계나 돈독하게 다져볼까.
대화가 끊긴 지가 한참이건만 녀석이 내 옆자리에서 당장 일어나줄 기미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살라만더 정령이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타닥타닥 졸고 있는 장면이나 곁눈질하며 시간을 죽이는데, 손우경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빚은 언제 갚을 거야.”
“빚?”
“어제 널 도와주는 대가로 후불을 받기로 한 거 같은데 혹시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그냥 니 기억이 잘못된 거라고 박박 우겨볼까 했지만, 그런 억지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어쩌자고 이놈한테 그런 약속을 했을까. 손우경의 날카롭게 휜 시선에 내 얼굴에 따끔거리게 꽂혀오는 것이 지나치게 의식됐다.
이 남자가 처음부터 내도록 불편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첫 만남부터 마구 날뛰는 야생마처럼 전혀 길들일 수 없는 분위기였고, 그 점은 상당히 고지식한 성격의 나와는 조금도 맞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 간의 성격 차이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손우경의 눈빛에는 명명백백하게 성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이제까지 그걸 애써 모른 척하려 했지만, 더는 피할 여력이 없었다.
어느새 손우경은 자연스레 몸을 겹쳐왔다. 놈의 손이 내 사타구니 사이로 슬쩍 들어왔다. 녀석은 당황해서 몸이 돌처럼 굳어진 나를 내려다보며 내 바지 앞섶을 손바닥으로 문질러댔다. 같은 남자의 그것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등에서는 식은땀이 절로 났다.
손우경이 속삭이며 제안했다.
‘니 꺼 직접 만지게 해줘.’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쩍 갈라져 내렸다.
“뭐, 뭐하는 짓이야!”
“쉿, 사람들 다 깨울 작정이 아니라면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편이 가급적 너를 위해서라도 좋아.”
손우경은 생긋 웃으며 내 성기를 옷 위에서부터 살짝 거머쥐며 협박하듯 읊조렸다. 그렇지만 놈의 말에 순순히 따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더는 상대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막 일으키려던 차였다.
별안간 손우경이 이번엔 내 고환을 한 손에 쥐고 눌러서 알을 터트려버릴 것처럼 힘을 주었다. 사타구니에 극심한 통증이 쏠리자 일어서려던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 전체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하필 내가 무너져 내린 곳은 손우경의 몸 위였고, 녀석은 그 기회를 틈타 내 허리를 양손으로 껴안으며 네가 그래봤자 어차피 소용없다는 식으로 유들거렸다.
“네 입으로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발뺌하면 나도 꽤나 곤란하지.”
이왕에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이런 유의 강압적인 요구까지 들어주겠다고 약조한 기억은 없었다. 내가 격렬하게 발버둥 치며 외쳤다.
“이거 놔!”
손우경은 내가 반항하는 것을 그리 오래 내버려두지 않았다. 녀석은 그 엄청난 팔 힘을 동원하여 날 꽉 휘어잡은 뒤, 바닥에서 등을 돌려 단숨에 자세 역전을 가져왔다. 놈에게 깔린 채 나는 억지로 입까지 틀어막혔다. 위쪽으로 눈을 부릅뜨며 가로막힌 입을 통해 아무리 항변하려 해봐도 이미 손우경의 떡 벌어진 두 어깨 사이에서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녀석이 내 상의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쓱쓱 걷혀 올라가는 셔츠가 목 언저리의 쇄골까지 도달했다. 손우경은 결국 맨살을 전부 내보인 내 가슴을 내려다보며 혀로 윗입술을 적셨다.
“색깔 괜찮은데.”
놈의 시선이 내 한쪽 유두에 머물러 있었다. 이윽고 손우경이 망설임 없이 내 가슴으로 고개를 숙여왔다. 심장이 뛰는 왼쪽 가슴에 살짝 키스를 남기고서는 녀석이 축축하고 말랑거리는 혀끝으로 내 유륜을 핥아 올렸다. 혀를 통해 가슴의 작은 돌기가 자극되자 나는 다시 한 번 있는 힘껏 저항했다.
“싫어! 이제 그만하라구!”
하지만 손우경은 마치 사탕이라도 핥듯이 내 유두를 계속해서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상하고 생경한 감각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내 목구멍에서는 마치 주전자에 물이 끓어 넘치듯이 아슬아슬한 떨림마저 느껴졌다. 적어도 입에서 소리를 내는 것만은 반드시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젖꼭지는 타액에 젖은 채 차가운 밤공기에 노출되어 이미 양쪽 다 빳빳하게 서 있었다. 이윽고 손우경이 그것을 지그시 깨문 순간, 고이 참아왔던 내 인내심이 순식간에 무장 해제되고 말았다.
“-아흣!”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 민망한 소리에 녀석이 내 가슴으로 내내 숙였던 고개를 넌지시 들었다. 손우경은 정말 터무니없다는 듯이 날 쳐다봤다.
“너 진짜 반응이…….”
놈이 민감해진 내 돌기를 손끝으로 부러 꾹 찍어 누르자 이번에도 입에서 먼저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손우경은 딱 그쯤에서부터 완전히 핀트가 나간 표정을 지었었다.
녀석은 열심히 핥아대던 가슴 부위에서 더는 미련을 거두고서 이내 내 몸을 정반대로 확 뒤집어버렸다.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끔 양쪽 손목을 등 뒤로 비틀어 잡고는 남은 손으로 내 바지를 벗겨냈다. 둔부가 너무나 쉽게 바깥 공기와 조우했고, 나는 바짝 엎드린 상태에서 어떻게든 손우경을 피해 달아나려고 죽을 만큼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때 내 눈에서 좌우로 갈라진 내 다리 틈으로 손우경이 자신의 바지춤에 손을 대는 것이 거꾸로 된 장면으로 포착됐다.
이게 꿈이라면 나는 어서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바랐다.
손우경의 바지 안에서 이윽고 터질 듯한 흉기가 그 난폭한 위용을 드러냈다. 아직 엉덩이에 반 이상 가려 정확한 크기를 유추할 수 없음에도 다리 사이로 언뜻 보이는 것만으로도 몸 안에 모든 피가 바짝 말라붙는 느낌이었다. 손우경이 후들거리는 내 다리에 조소하며 입을 열었다.
“자꾸 성가시게 굴지 말고 그 산만해진 다리 좀 얌전하게 오므려봐. 직접 넣었다간 다들 잠에서 깰 테니까 오늘은 조금 문지르기만 할게.”
부처님, 세존님, 석가모니님, 고타마 싯다르타시여. 부디 이 불충하고 덕이 없는 불자의 하나뿐인 소원을 꼭 좀 들어주시옵소서. 지금 당장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일으키는 기적을 선보이시어 제발 저 미친 변태의 머리통에 명중시킨 다음, 영원히 불지옥으로 떨어트려주시옵소서! 만약 제 이러한 소원을 들어주시기만 한다면 저는 앞으로 다달이 입금되는 월급의 반, 아니, 그건 인간적으로 너무 많고 세금을 제한 약 삼분의 일을 기필코 부처님께 불심을 다해 공양하도록 하겠나이다!
부처님께 간절히 빌어봤지만, 현실은 내 편이 아니었다. 손우경은 내 다리를 강제로 바짝 오므리게 한 뒤 자신의 거대한 무기를 빈틈없이 끼워 넣는 중이었다. 게다가 놈과의 은밀한 부위가 맨살끼리 닿은 순간, 내 전신으로 섬뜩한 기분이 퍼져나갔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마치 개처럼 엎드려 있던 내 얼굴 앞으로 손우경의 성기가 길게 자라나고 있었다. 살라만더의 모닥불 빛을 희미하게 반사하는 녀석의 페니스는 뱀처럼 길었으며 또 검붉은 광택마저 흘렀다. 녀석은 구리색의 그을린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중심부의 색은 더 짙었다. 성인 남자의 발기한 페니스가 뭐 그리 보기 좋을 수 있겠냐마는, 뿌리에서부터 굵은 핏줄이 돋아나며 점점 두껍게 팽창하는 모습이 너무 징그럽고 소름 끼쳤다.
이거 대체 어디까지 늘어나는 거야…….
분명 수용소 안에서도 촉수같이 쭉쭉 늘어나던 장면을 목격하긴 했으나 그때와 지금은 아예 상황 자체가 달랐다. 그때 녀석의 두툼한 귀두 끝이 내 입술을 쿡쿡 찔러왔다. 손우경이 자기 것을 손으로 단단히 쥐고서 귀두에서 미끌거리며 말갛게 흘러나오는 액체를 입에 일부러 묻혀댄다. 콧속으로 진하고 비릿한 냄새가 역하게 흘러들어왔다.
“시작하기 전에 이것 좀 빨아줘.”
내가 참다못해 외쳤다.
“이 괴, 괴물아!”
“네가 직접 안 할 거면 입에 억지로 쑤셔 넣어줄까?”
“나, 난 부처를 모시는 깨끗한 승려의 몸이야! 그러니까 불자 된 도리로서 남자 성기 같은 거 절대로 빨아줄 수 없다고!”
“그런 말이 경전에 적혀 있기라도 하든.”
내 입 주위를 마구 찔러대는 그것에 완전 질색하며 등 쪽에 붙잡혀 있는 손목을 뿌리쳐보려고 갖은 몸부림을 쳤다. 헌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였다.
부처님께서 드디어 내 삿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머릿속으로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그래, 긴고주緊箍呪!
내가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지? 관음존자가 나에게 손우경의 유일한 제어 방식이라고 가르쳐주었던 그 주문이 이제야 생각났다. 놈의 전두엽에는 금고아라고 불리는 칩이 박혀 있어서, 관음존자의 특수한 음절이 담긴 진언에만 반응하여 그 주문을 욀 때마다 뇌를 조여들게 만든다는 바로 그것 말이다!
더는 생각할 것도 없이 입으로 긴고주원작에서의 긴고주는 옴 마니 반메훔이 아닙니다. 옴 마니 반메 훔은 원래 관세음보살의 대표진언 중 하나인데 신서유기에서도 자칭 관세음보살의 현현으로 불리는 관음존자가 자신의 진언으로 여기저기에 애용합니다를 외웠다.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염불 외듯 입에서 수없이 내뱉어지는 동일한 진언 소리에 손우경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삼키며 나에게서 뚝 떨어져 나갔다.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는 손우경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절대로 긴고주를 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내 주문을 멈추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방금 잠에서 깬 듯한 파오의 쉰 목소리였다.
“……너네 아까부터 대체 뭐하냐.”
차마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질 않았다. 아니, 그럴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서 옆을 힐끔 돌아보니, 거기엔.
무슨 불구경이라도 났는지 팔짱을 끼고서 우릴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있는 파오와, 뭉글이의 등에 배를 깔고 누운 채 턱까지 괴고서 천진난만한 눈동자로 이 상황을 구경 중인 오조가 있었다.
그런 다음 하반신이 홀딱 벗겨져버린 내 맨 다리로 시선을 주었더니,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막기 위해 하늘로 고개를 번쩍 치켜들어도 도저히 내 눈가를 억제할 수 없는 깊은 슬픔만이 존재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운 건 아니었다. 아니다, 아니라고…….
긴고주가 끊어지자 다시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되돌아온 손우경은 아무래도 수치심 따윈 약에 쓰려 해도 없을 위인이었다.
놈은 일이 이렇게 되어서 차라리 잘됐다는 식으로 홀가분하게 중얼거렸다.
“저런, 다 들켰네.”
쉬어가는 페이지 2 <오조>
★ 오조의 그리모어
때때로 오조 녀석은 뭉글이의 등에 배를 기댄 채 한참 동안 뭔가를 끼적거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의 새끼 여우는 누가 자기 옆으로 다가오는 걸 극도로 경계하면서 뭔가를 조심스럽게 숨기려는 눈치였기에, 보통은 그런 상황이 오게 되면 다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모른 척해주면서 은근슬쩍 지켜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손우경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공작새 꼬리로 만든 펜이 오조의 분주한 손동작에 따라 그 화려한 깃털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글을 적는 것에만 내내 정신이 팔려 있던 오조는, 갑자기 자기 앞으로 길게 드리운 불길한 그림자에 화들짝 놀라며 뭉글이 등짝에 얹혀 있던 것을 재빨리 자기 로브 속으로 감추었다.
“다 봤어. 그 책 대체 뭐야?”
오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우경이 방해가 됐다는 듯이 올려다봤지만, 저놈은 고작 그런 걸로 아랑곳할 분이 아니셨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자꾸 숨기려고 들어?”
손우경이 집요하게 굴자 결국 오조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로브의 넓은 소매 안에 꽁꽁 감춰뒀던 책 한 권을 넌지시 꺼내어 들었다.
“사실 이건 내 그리모어Grimoire야.”
“그리모어?”
손우경이 허락도 없이 오조의 손에서 그리모어라는 책을 얼른 낚아챘다.
당황한 새끼 여우가 팔을 뻗으며 다시 되찾으려 했으나 이미 신장에서부터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손우경이 총총 뛰어오르는 오조를 피해 머리 위로 책을 번쩍 들어 올리며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촉구했다. 오조는 그리 내키지 않는 어조로 부루퉁하니 입을 열었다.
“……그리모어는 마법사에게 있어선 자기 분신과도 같은 책이야. 스스로가 여태껏 이룩해낸 마법 체계와 업적, 그리고 개인적인 주문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빠짐없이 기록해두는 공간이거든. 나중에 내가 남긴 이 위대한 마도서를 보면서 후대의 어린아이들이 차근차근 마법사의 꿈을 키워나갈 거라구.”
손우경이 오조가 내뱉은 ‘위대한 마도서’ 어딘가쯤에서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려다가 간신히 참아낸 것을 나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녀석은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오조의 그리모어를 설렁설렁 넘겨보다가 어느 한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말했다.
“음, 도마뱀 꼬치가 너무 맛있어서 여덟 개나 먹었다가 그만 배탈이 났었다고?”
그 말에 오조가 굉장히 충격을 받은 눈동자로 목소리까지 달달 떨어가며 얘기했다.
“그, 그걸 어, 어떻게 알아본 거야?”
“……그러게. 근데 이 그리모어라는 게 원래 그림일기 쓰는 걸 말하는 건가 봐.”
오조가 발끈하며 반박했다.
“이, 일기장 같은 게 아니야! 그리모어에 적힌 모든 내용들은 다 복잡한 암호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다가 그나마도 오로지 나만 알아볼 수 있게 비의적인 의미로 적어뒀는데……. 그걸 하, 한 번에 읽어내다니…….”
오조가 거의 울기 직전인 눈동자로 손우경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손우경이 살짝 난감해진 낯빛으로 오조에게 다시 그리모어를 돌려주며 말했다.
“아니…… 내가 눈썰미가 좋아서 그렇겠지…….”
새끼 여우가 그리모어를 돌려받고는 그제야 손우경을 감탄하는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아, 알고 보니 천재였구나, 너.”
며칠 후.
오조가 대낮부터 쿨쿨 퍼 자는 사이, 또 꽤나 심심해진 손우경이 새끼 여우의 그림일기, 아니, 그리모어를 몰래 훔쳐보다가 느닷없이 나와 파오를 불러 모았다.
“다들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오조가 그리모어에다가 이런 걸 적어놨는데 진짜 귀여워.”
딱히 남의 물건을 훔쳐볼 생각은 없었지만 손우경이 하도 호들갑을 떨길래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옮겼다.
삼장 ○
우경 △
파오 XX
파오는 저가 여태 오조에게 했던 건 아예 생각도 못하고 사뭇 불쾌해진 음성으로 불평했다.
“와, 난 엑스가 두 개나 붙어 있어.”
“보아하니 현이는 되게 좋아하네. 끼니때마다 밥 해줘서 그런가.”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오조의 비밀스러운 물건을 함부로 들여다보는 건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내 이름 옆에 동그라미가 붙어 있다고 뒤늦게 착한 척을 하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너네 남의 일기장 멋대로 훔쳐보는 거 아니지.”
내가 손우경의 손에 들린 그리모어를 확 빼앗아 들자 정말 기적과도 같은,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딱 이런 타이밍에 잠에서 깨어나버린 오조 녀석이 날 향해 바들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럴 수가……. 삼장이 내 그, 그리모어를 훔쳐보다니…….”
오해야 이건. 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새끼 여우가 몹시 상처받은 얼굴로 내 손에 있던 자기 일기장을 홱 빼앗아 들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아, 근데 저거 일기장이 아니고 위대한 마도서라고 했었던가. 그렇지만 주변 인물에 관한 상대 평가가 적혀 있는 걸 마도서라고 칭하기에는 뭔가 좀…….
다시 며칠 후.
손우경이 또 오조의 그리모어를 훔쳐보고 있었다. 난 정말 보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자꾸 손우경이 우릴 눈빛으로 불러 모아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이리로 와보란 말은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어도 놈의 눈빛이 얼마나 강력한지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삼장 ◑
우경 △
파오 XX
내 이름 옆의 동그라미에는 원래 없었던 검은색 반원이 꼼꼼하게 덧칠되어 있었다. 파오가 손우경 손에 들려 있던 그리모어를 가져가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얘기했다.
“이야, 이거 나름대로 체계적이네. 감점 요소가 동그라미 반개씩인가 봐.”
여전히 X가 두 개씩이나 붙어 있던 파오가 무척이나 심드렁하게 굴며 말했다. 그때였다. 여태껏 쌔근쌔근 잘 자고 있었던 오조가 또다시 눈을 번쩍 떠버렸고, 이번엔 파오의 손에 들린 그리모어를 날카롭게 낚아채더니 혼자서 마구 씩씩거리면서 자리를 떠버렸다.
파오가 멍청하게 선 채로 눈을 두어 번 남짓 깜빡거렸다.
다시 며칠의 며칠 후.
손우경이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배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 오늘도 놈의 돼먹지 못한 손에는 오조의 그리모어가 들려 있었다,
“파오 사형. 잠깐 이리 좀 와봐!”
물론 나를 지목해서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마침 파오와도 딱 약 오십 미터밖에 안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당연히 나를 함께 부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대략 오십 미터나 뛰어가느라 숨이 찼다. 나보다 훨씬 먼저 도착해 있던 파오의 얼굴이 순간 험악하게 구겨지는 것을 보며 나도 얼른 그리모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삼장 ◑
우경 △
파오 XXXXXXXX
손우경은 웃음이 샐까 봐 힘들게 입을 틀어막던 나를 대신해서 파오에게 확인 사살을 시켜주었다.
“이름 옆에 X가 여덟 개로 늘었는데.”
“…….”
“와, 정말 싫었나 보다. 저번에 현이가 훔쳐보던 거 걸렸을 때에는 고작해야 동그라미 반개밖에 안 지우더니 사형은 그거 한번 봤다고 그새 엑스가 네 배로 새끼를 쳤네.”
“……잘 생각해보니까 오늘까지 정작 세 번이나 훔쳐봤던 건 너 아니냐?”
손우경이 어쩐 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
“사람은 그래서 항상 타이밍이 중요한 거지.”
놈이 그 말과 동시에 들고 있던 책을 내 가슴팍으로 홱 집어던졌다. 내가 얼떨결에 그리모어를 받아들자마자 또 거짓말처럼 오조가 두 눈을 화르륵 하고 떴다. 이쯤 되면 저 그리모어에 도난 경보기라도 달아둔 게 아닌가 싶었다. 허나 나는 급격한 분노로 타오르는 새끼 여우의 파란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음, 이번엔 검은색 동그라미로 강등되겠군.
쉬어가는 페이지 2 <오조> 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