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고양이 앞에 생선 (7/24)

5. 고양이 앞에 생선

밤새 잠을 단 한숨도 못 잤다. 손우경은 어제 그 일 이후로도 넉살 좋게 잠만 잘 처자던데 정작 피해자인 나는 더럽게 억울할 노릇이었다. 아침에 다들 잠에서 깨어난 다음에도 딱히 나에게 어제 일에 대해 크게 아는 척을 하진 않았지만, 새끼 여우는 더 이상 내 근처로 다가올 생각을 안 했다.

그럼에도 파오 녀석은 날 보자마자 두 볼에 홍조를 띠며 어머나 하고 주접을 떨어대며 가뜩이나 여린 내 가슴을 다시 아프게 들쑤셔놨다. 남에게 상처를 주면 그 상처가 결국 자신에게 배가 되어 돌아온다더니 그 말이 다 참말이었나 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이제껏 파오에게 많은 악담을 퍼부어대며 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랬지…….

뭐 좋아, 그렇담 난 방금 내가 받은 이 상처를 나중에 파오 너에게 다시 수십 배로 되돌려주겠어.

어쨌든 밥이고 뭐고 다 귀찮아져서 그냥 바위에 걸터앉아 삶이란 당최 무엇인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찰 해보았다. 삶은 대체 뭐지. 아, 슬슬 배고파지는데 아침은 삶은 계란이나 해 먹을까.

그렇잖아도 식귀인 오조 녀석이 내 근처에서 우물쭈물하는 눈빛으로 내 밥은? 하고 텔레파시를 쏘아오고 있었다. 이건 내 기분 탓인 게 아니라 놈이 진짜 사이킥 능력자이기 때문에 내 머릿속으로 어서 밥을 내놓으라며 초 단위로 같은 내용의 텔레파시를 보내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상냥하게 웃고는 엄지로 내 등 뒤를 쓱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이거 떼어주면 밥 차려줄게.”

일어나자마자 어차피 어제 다 들켰다고 이젠 대놓고 내 등짝에 매달려서 자고 있는 손우경이 정말 몹시도 처치 곤란이던 차였다. 오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힘차게 대답했다.

“응!”

오조가 지팡이 끝을 사용해 바닥에다가 미친 속도를 내며 커다란 소환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발 손우경 좀 떼어달라니까 지금 뭘 하는 건지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뭐 해?”

“음. 우경이를 죽이려면 베히모스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거대한 수륙양서 괴수의 이름이다. 베히모스는 히브리어로 ‘짐승’을 뜻하는 Behamah의 복수형이며, 이는 한 마리임에도 불구하고 복수의 동물을 한데 모은 것과 같이 너무나 거대한 크기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표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도 잡을 수가 없으며 쓰러뜨릴 수도 없는 동물로, 그 모습에 대해서는 하마, 물소, 코뿔소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정도는 소환해야 될 것 같아서.”

그러자 갑자기 손우경이 내 등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더니 오조에게 큰 불만을 터트렸다.

“야, 고작 밥 하나에 베히모스 같은 거 소환하려 들지 마.”

베히모스고 뭐고 다 좋은데 너 여태 깨어 있었냐……. 오조는 손우경이 나한테서 저절로 떨어진 걸 보고는 소환진 그리기를 즉시 멈추었다. 이왕 시작한 거 계속 그려도 괜찮은데 말이다.

오조에게 밥을 먹여야 하니까 짐 가방에서 주섬주섬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를 꺼냈다. 요즘 들어 단백질이 너무 부족한 식단이니 오늘은 콩고기라도 좀 구워야겠다. 스포이트로 샬레 위에 콩고기용 모르이아 액체를 뿌리고서 아무런 양념 없이 굽기 액체를 적당하게 뿌렸다. 지글지글하게 구워지는 콩고기를 뒤집다가 실수로 그만 손가락을 데었는데, 옆에서 그걸 계속 지켜보고 있던 손우경이 내 손가락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서는 살짝 깨물더니 말했다.

“니가 하는 밥, 진짜 맛없다고.”

“그럼 먹지 말라고.”

나는 내 손가락을 다시 회수하며 놈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손우경은 내가 콩고기를 다 구울 때까지 곁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내가 하는 행동을 일일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젠 좋아서 죽으려고 들더니 어떻게 단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냉정해질 수가 있지.”

또 은근슬쩍 장난치려는 말투였다. 진짜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으면 생긴 게 조각같이 잘빠진 놈인데, 우선 남자를 좋아하는 변태라는 점에서 감점 요소가 크고, 거시기가 쭉쭉 늘어나는 돌연변이라는 점에서 이미 인간으로서 재기 불능이었다.

“할 거 없으면 옆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가서 잠이나 더 자.”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제 가슴 빨아줄 때 들려준 네 목소리가 너무 인상적이라.”

“…….”

손우경이 자기 하반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까지 여기가 통 가라앉질 않아서 잠이 안 와.”

어떻게 저런 소릴 안색 하나 안 변하고 웃으면서 지껄일 수 있지? 이럴 땐 그냥 아무 대꾸도 안 해주는 게 상책이었다. 내가 새끼 여우를 손으로 까닥까닥 부른 뒤 다 익은 콩고기를 건네주자 녀석은 상당히 배가 고팠는지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밥을 먹어치웠다. 파오도 출출했는지 오늘은 오조에게 별말 안 하고서 흡입하듯 콩고기를 먹어댔다.

오직 손우경만이 밥상머리 앞에서 품위 없는 하품이나 쩍쩍 해가며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오조가 자기 몫의 콩고기를 다 먹고는 나와 손우경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더니 두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너네 근데 말야.”

‘너네’라는 그 복수 단어에서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느낀 내가 재빨리 오조의 입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계신지라 뻗어 나간 내 손이 그 나는 놈에 의해 불쑥 가로막혔다. 내 손목을 잡아챈 손우경이 오조를 돌아보며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보라는 식으로 생글거렸다.

그러자 오조가 순진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있으면 이제 아기가 생겨?”

입에 든 콩고기를 다 뿜었는데 그게 하필 파오의 얼굴로 다 튀어버렸다.

그래도 파오라서 조금도 미안하지는 않았다. 불과 몇 초 전에만 뿜었더라면 저보단 양이 훨씬 더 많았을 텐데. 속 좁고 쪼잔한 파오가 고작 이런 사소한 일로 나한테 막 역정을 내려다가, 마침 오조 입에서 새롭게 흘러나온 얘기를 듣더니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나도 그런 거 많이 봐서 아는데, 내가 룸버린에 있을 때 사람 두 명이 창고나 음습한 계단에서 아랫도리를 다 벗고서 이상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걸 자주 봤었거든. 그런데 내가 그걸 보게 되면 나중에 아기가 생기더라고.”

손우경이 입까지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군부 내에서도 어린 동자승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성교육까지 실시했던 파오가 ‘나 저 새끼한테 음양의 이치에 대해서 꼭 설명해주고 싶어’라는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연신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실 파오의 성교육 시간은 군부 내에서도 인기가 아주 많았었다. 그거야 지 실제 경험담을 사실적인 묘사까지 곁들여가며 실감나고 꼴릿하게 전달해주기 때문이었다. 파오의 성교육 강의를 듣고 있던 어린 동자승들이 그 이야기를 차마 끝까지 전해 듣지 못하고서 휴지를 뽑아 들고 다급하게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지만 않았다면, 누구에게나 호평 일색인 교육 과정이었다.

손우경이 웃다가 쉬어버린 목청을 큼큼 가다듬고는 새끼 여우에게 타이르듯 일러주었다.

“아이가 생기게 하려면 그걸 딱 한 번만 해서는 성공하는 경우가 지극히 드물어.”

“그럼 몇 번이나 해야 돼?”

“음. 적어도 백번 정도?”

“그럼 백번씩이나 삼장하고 아랫도리 벗고서 어제처럼 같이 있을 거야?”

“응, 그러니까 옆에서 절대 방해하면 안 돼.”

오조가 고개를 아래위로 붕붕 끄덕이며 얼른 알았다고 대답했다.

부처님, 이 세상엔 제 생각보다 미친놈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침 식사 뒷정리를 끝내고서 다음 장소로 출발하기 전, 우리에게는 약간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부적을 기반으로 이런저런 주술을 사용하는 나완 달리, 손우경과 파오는 호흡을 단련하여 신체의 기를 끌어 모으는 내공 자체가 모든 힘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운기조식運氣調息을 행함이 꽤나 중요시되고 있었다.

운기조식이란, 주로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기운을 운행하는 휴식 명상법을 얘기한다. 수행자들은 반드시 이 휴식 과정을 통해야만 소진된 기를 다시 보충할 수 있으며 내공 자체를 몸에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축적해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몸에서 마나가 펑펑 흘러넘친다는 오조는 오늘도 잠만 퍼 잤고, 파오는 명상 중에 여자 생각이나 하는지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고 있었으며, 오로지 손우경만이 올바른 정자세를 잡고서 제대로 된 운기조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낸 표정으로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손우경을 말끄러미 응시하다가 어느새 놈의 가지런한 눈썹으로 시선이 갔다. 누차 말하지만 나는 손우경의 얼굴 중에서 놈의 눈썹만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적당히 짙으면서도 전혀 지저분하지 않고, 마치 명화가가 솜씨 좋게 그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저 미려한 눈썹은, 녀석의 얼굴 중 이목구비 조화를 완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일등공신이었다.

그때 눈을 꾹 감고 있던 손우경이 입을 열었다.

“나 절세미남인 거 다 아니까 그만 좀 쳐다봐라. 네 뜨거운 시선 때문에 집중이 하나도 안 되잖아.”

“…….”

손우경이 그 와중에도 제 자랑이 섞인 말로 사람 기분을 확 상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두 눈을 감고 있는데도 내가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 축소 가방을 뒤적여 안쪽에다 깊숙하게 넣어두었던 부적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상자의 뚜껑을 열어서 부적에 쓰는 재료들을 살펴보았다.

아까 말했다시피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해서 이 틈에 앞으로 사용하게 될 부적들을 미리 쟁여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행 가방을 최대한 간소하게 꾸리느라고 티뷸라 궁의 내 숙소에다가 향로와 촛대처럼 두고 온 것들이 제법 되었지만, 그래도 괴황지 묶음과 경면주사, 간이용 붓과 벼루 정도는 전부 챙겨 왔었다.

사막이라 물이 무척이나 귀한 관계로 여우의 꼬리털로 만든 붓을 살짝 내 혀끝에 대었다. 그렇게 수분으로 적신 붓을 촉촉한 타입의 경면주사 덩어리의 물컹한 표면 위에 쓱쓱 문질렀다.

경면주사란, 땅속 깊은 곳에서 생성되는 묘한 광택이 나는 붉은색 광물질을 일컬었다. 이것은 정신적인 질환에 긍정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돌이었으며 또한 사람의 기를 맑게 해주는 효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악귀들이나 인격화된 사념체들은 이 경면주사를 몹시 두려워했다.

바닥에 미리 깔아둔 괴황지들 위에 각각의 상황별로 그 용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환살 부적들의 표식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다. 환살 부적의 경우, 자신의 상상력을 채워 넣는 과정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매순간마다 정신을 집중하며 부적 글씨를 새겨 넣는 몸의 과정이 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야 했다.

내가 어느덧 환살 부적을 수십 여 장이나 작성했을 즈음, 손우경이 운기조식의 명상을 마치고서 내가 부적을 만드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내가 방금 막 완성된 따끈따끈한 부적 한 장을 쓱 내밀며 말했다.

“……절세미남씨, 저도 그렇게 쳐다보시면 집중이 안 되니까 이거 받고서 좀 꺼져주세요.”

손우경이 나한테서 부적을 받아 들고는 그 안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 파오가 다가와서 아는 척을 해댔다.

“너 그게 뭐야?”

“어, 현이가 방금 나한테 선물로 줬어.”

파오가 손우경의 손에 들린 부적을 쓱 훔쳐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손우경이 채근하며 캐물었다.

“무슨 용도야? 연애? 재복? 건강?”

파오는 그걸 말해줄까 말까 망설이는 표정으로 뜨뜻미지근하게 굴었지만, 손우경이 그 후로도 계속 헛물을 켜는 바람에 결국엔 전부 사실대로 털어놓고 말았다.

“……이건 말야, 갖고 있기만 해도 재수가 엄청나게 없어지는 부적인데, 심한 경우엔 아무런 원인도 없이 갑자기 급사할 수도 있어. 그래서 이걸 남한테 선물할 경우엔 보통 저주의 용도로 많이 쓰이거든.”

“…….”

“부적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 글씨의 한 획, 한 획에서부터 너에 대한 진심 어린 미움이 느껴진다. 내가 보기엔 이건 정말 보통 정성으로 만들어진 게 아냐!”

기왕지사 말을 꺼낸 거 제대로 놀려먹을 심산인가 보다. 여하튼 파오의 말에 힘입어서 아주 솔직히 고백하건대, 정녕 저것이야말로 요 몇 년간 내가 만들어낸 부적들 중 최고의 역작이었다. 허나 그 최고의 역작은 잠시 후 가슴에 품었던 적운의 꿈 하나 펼쳐보지 못한 채, 그만 손우경의 손안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 * *

화적 떼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얘네들은 자기들끼리 정보 교환도 안 하는지 툭하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안 그래도 힘이 남아돌아 주체를 못하는 손우경과 파오의 손에 쓸쓸하게 죽어나갔다(오조는 하루 세끼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온종일 자느라고 공사다망하니 그저 논외로 치자).

겉모습이라도 적당히 허접하게 나타났으면 그래도 약간 불쌍한 생각이라도 들겠는데, 가뜩이나 험상궂게 생긴 덩치 놈들이 양손에 불법 개조된 무기까지 들고 나와 더욱이 화를 자초했다. 주술과 마법이 범람하는 이런 진보한 시대에 바주카포라니 뭔 구닥다리 물건이야.

파오와 손우경이 함께 화적멸살의 쌍벽을 이루는 동안, 나는 뭉글이 위에서 다리를 꼰 채 걸터앉아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그 장면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나와 뭉글이 주변에다 사각으로 된 투명 결계를 쳐놨기 때문에 이곳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특등 관람석이었다. 비록 포타라카가 사시사철 겨울이긴 해도 사실 이 사각결계는 여름철 모기장 대용으로도 쓸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아이템이었다. 곤히 잠든 오조와 그의 소환수를 지켜주기 위해 정말이지 이렇게나 많은 희생을 아끼지 않는 나였다. 아, 앉아 있는데 자꾸 오조 자식 다리가 걸리적거리네.

여하튼지 손우경이 억센 손아귀의 힘으로 사람 머리통을 펑펑 터트리는 모습은 정말 언제 보아도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데 녀석은 예전에 아돌프와 도반 관계였다더니 확실히 보면 볼수록 그 전투 스타일이 꼭 닮아 있었다.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싫어하는 아돌프 역시 보통 적의 머리 쪽을 한 방에 노리는, 군더더기 없는 전투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오십 명 남짓했던 화적 무리를 단숨에 싹 쓸어버린 손우경과 파오는 이윽고 나와 오조가 있는 결계 쪽으로 다가오며 서로간의 긴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설마 돔 출신의 돌연변이냐? 딱히 편견 같은 건 없지만 만약 그게 진짜라면 그냥 사실대로 전부 말해줬음 좋겠는데. 실은 내가 돌연변이들하고는 겸상을 안 하거든……. 그래도 거듭 맹세컨대 편견 같은 건 정말로 없어.”

아주 편견의 절정을 달리시는 우리의 파오 옹께서 상당히 미심쩍은 얼굴을 한 채 질문하고 계셨다. 뭐 어제 저녁 그 생난리 굿을 파오놈도 고스란히 지켜봤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게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손우경과 그의 하반신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며 내심 궁금한 기색을 표했다.

“돔 출신의 돌연변이?”

손우경은 내 시선을 의식하며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솔직히 말해 나도 그 가능성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대종말 당시 지어진 사만 개의 돔들 중 어느 일부에서는, 몇몇 구획의 전원을 연결하는 발전소 동력기가 실수로 망가져버려 특정 구역으로 고도의 방사능이 대량 유출되었다. 그로 인해 돌연변이 유전자가 속출하게 되었으니, 실은 돔 출신이냐고 묻는 것 자체가 말 저변에 그런 비하적인 의미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나는 손우경의 성기를 떠올려보면 그럴 만한 가능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손우경은 무슨 미친 헛소리냐는 얼굴로 냉랭하게 대꾸했다.

“아아, 난 또 뭔 소린가 했네. 설마 어제 그걸 보고서 지금 돌연변이 타령을 하는 거야?”

“뭐 그렇지. 아무리 요즘같이 뒤숭숭한 시대라도 거시기가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놈은 처음 봤거든.”

“부러우면 차라리 부럽다고 말해.”

“지금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데 무슨 소릴.”

이러다간 거시기 길이가 서로 누가 더 긴지 맞대결이라도 벌일 듯한 초유의 병신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일단 주변에 쳐두었던 결계를 잠시 해제하고서 놈들이 다시 본래의 화제로 돌아가도록 중재했다.

“네가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그게 뭔지 제대로 설명해봐.”

손우경은 손가락으로 자기 뺌을 쓱쓱 긁더니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말을 돌리려고 들었다.

“내가 돌연변이든 아니든 그게 뭐가 중요하지?”

내가 파오와 동시에 같은 말을 외쳤다.

“중요해!”

“중요해! 전생에 대체 무슨 공덕을 쌓았길래 네놈만 그런 축복받은 옵션을 타고 났는지!”

정확히는 ‘중요해’까지만 일치했다. 맙소사. 변태는 변태끼리 통한다더니 별게 다 부럽고 지랄이었다.

더구나 파오 놈의 표정을 샅샅이 훑어보니 녀석은 손우경 거시기가 마구 늘어나는 것이 정말로 부러워 죽겠다는 눈치였다. 만약 자신의 추측대로 방사능을 통해 거시기 길이가 저렇게 마음대로 늘어날 수만 있다면, 설령 자기 사타구니에 뢴트겐 광선이라도 쪼이겠다는 굳은 결심이 들어선 얼굴이었다.

손우경은 잠시 파오 쪽으로 한심하단 눈빛을 보내느라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던 내 팔을 붙잡아 당기더니, 또 성가시게 등으로 찰싹 들러붙었다. 내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네가 아까 전부터 자꾸 내 중심부를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니까 떨려서 말을 못하겠어서.”

“내가 쳐다보는 건 떨려서 안 되고 네놈이 니 그걸 내 엉덩이에 갖다 대고 있는 건 괜찮냐.”

“그럴걸.”

손우경이 날 더 꽉 끌어안은 채로 입을 열었다. 내 귓가로 놈의 저음이 울리는 게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서 진짜 별로였다.

“얘가 부끄러움을 타서 이런 식으로 남한테 자기 얘기 하는 거 싫어할 텐데. 그래도 현이 네가 알고 싶어하니까.”

“……얘라니?”

“한 십년쯤 됐을걸. 아니다. 수용소에 처박혀 있었던 것까지 합산하면 한 십오 년 정도 됐나.”

파오 놈은 수첩이라도 꺼내서 앞으로 손우경이 내뱉는 말들을 한 자 한 자 받아 적을 기세였다. 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보는 열중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엉덩이로 쓱쓱 문질러지는 놈의 그것을 어떻게 하면 예쁘게 도려낼 수 있을지 앙심을 품는 중이었다.

“예전에 내 스승님하고 둘이서 서쪽 지역으로 여행 겸 수행을 가던 길에 물의 신전 요하임이라고 불리는 어떤 장소를 발견했어. 오래전에 무슨 용왕인가를 모셨다는 신전이더라. 뭐 대종말 전에야 별의별 종교들이 다 판을 쳤을 때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어째 그저 그런 유적지치고는 이상하게 외관 관리가 잘되어 있더라고.”

“…….”

“호기심에 무작정 쳐들어가봤는데 알고 보니까 그 요하임이라는 곳에는 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여의봉如意棒이라는 이름의 비기祕器가 숨겨져 있었더라고.”

“그래서?”

“뭘 그래서야? 신전에 잠입하면서 어차피 그 비기를 지키고 있었던 놈들도 다 죽인 마당에 그렇게 그럴듯해 보이는 보물을 거기다가 쓸쓸하게 남겨두고 갈 순 없잖아. 누가 들어와서 슬쩍 가져가기라도 하면 신전에서 얼마나 곤란해지겠어? 그래서 내가 잘 보관해주기로 결정했지.”

“……지금 네 말을 정리하자면. 고대로부터 내려온 신의 물건을, 후대 사람들이 신전 안에다가 신주단지처럼 잘 모셔가며 비밀리에 지키고 있었는데, 거길 네 맘대로 들어가선 그 중요한 보물을 허락도 없이 그냥 훔쳐 왔다는 거네?”

“해석이야 본인 자유니까 네 얘기도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그러게 진작 구경 좀 하겠다는데 내 앞을 막아선 놈들이 잘못한 거지.”

놈에게 해줄 말은 참 많았지만 오늘도 꾹 참았다.

“근데 그 여의봉이랑 네 늘어나는 거시기랑은 대체 무슨 관계인데?”

“음. 그 여의봉이 바로 지금 네가 물어보는 내 거기거든.”

“뭐라고?”

손우경이 나를 자기 품에서 떼어내고는 여전히 놈의 바지 중앙에만 단단하게 시선이 못 박혀 있는 파오를 잠시 쯧쯧거리며 쳐다보더니, 상당히 터무니없는 얘기를 지껄여주셨다.

“그 여의봉이라는 건 사실 영체형靈體型 무기야. 평소엔 손에 잡히지 않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가 내 부름에 따라서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야 길이와 두께가 자유자재로 늘어난다는 거지만, 무엇보다 주인의 의지에 따라서 그 어떤 것으로든지 변신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게 니 거시기하고 어떤 연관이 있는 거냐고!”

“너도 봤잖아? 나하고 수용소 지하실에서 처음 만났던 날, 내가 온몸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고 있었던 거. 수용소에 끌려가기 직전에 얠 마땅히 숨겨둘 구석이 없어서 다급한 마음에 일단 내 거기에다가 잠시 봉인해뒀었거든. 게다가 단순하게 물리적인 힘으로만 측정했을 때, 이 녀석의 위력은 거의 나하고 동급이거나 혹은 그 이상이야. 그러니 아돌프 자식도 이놈을 꽤 탐냈던 모양인데, 차마 내 거기까지 검사하진 않으려고 들더군.”

파오가 미간을 찡그린 채 잔뜩 실망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걸 혹시 타인에게 양도할 생각은 없는 건가.”

“미안하지만 이건 아무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여의봉은 본인의 의지로서 자기 주인을 선택하는데다, 내가 이미 ‘존슨’이라는 사랑스러운 애칭마저 지어줬는걸. 그러니 이 존슨은 절대적으로 내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되어 있어. 게다가 보기엔 이래도 사실 고차원적인 지능을 가진 인격체가 깃들어 있는지라 애가 취향도 까다롭고 얼마나 고상한 성격인데.”

내가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취향이 까다로운데다 성격마저 고상하다는 그 고차원적인 존재를 지금 니 거시기에다 푹 처박아놨단 말이지…….”

한때는 신의 물건으로서 사람들에게 추앙받던 저 여의봉께서, 지금은 고작해야 사내놈의 거시기 안에 봉인되어 있다니 눈물 없이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아주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거기다 그 존슨이라는 서양식 어감의 이름은 뭔가 상당히 께적지근하게 들려왔다. 존슨이라…….

파오는 손우경의 바지 앞섶을 보며 못내 아쉬운 입맛(?!)을 다시더니 아직도 산재한 자신의 의문들을 남김없이 해소하려 들었다.

“인격체가 들어 있다면 상호간의 대화도 가능한 거 아닌가? 네 명령에 따라서 움직인다며.”

“……뭐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럼 해봐.”

모쪼록 파오네 집 불구경만큼이나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내 제안에 손우경이 살짝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자기 거시기랑 대화하면 내가 꼭 미친놈 같잖아.”

그러자 파오가 손우경의 어깨에 손을 척 얹으며 대꾸했다.

“그런 거라면 전혀 걱정하지 마. 넌 이미 훌륭한 미친놈이야.”

전혀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우리 뒤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배꼽시계를 가진 오조가 마침 점심때가 되자 두 팔을 머리 위로 쭈까쭈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정오의 강렬한 태양빛에 지금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녀석이 어떻게 자다 깬 정신머리로도 나에게 밥에 대한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여하간 서비터들에게서 흐트러진 옷매무새 정리, 입가에 흐른 침 자국과 눈곱 제거 외에도 기타 등등의 추접함을 정돈받던 오조가 별안간 우리를 향해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나 있잖아, 방금 꿈에서 내 상위 자아가 말해줬는데, 우경이한테도 나처럼 무지무지 강한 수호신 같은 게 붙어 있대. 내가 요 근래 잠깐씩 깨어 있는 틈을 타서 그 둘이 서로 친해졌나 봐. 근데 그 우경이에게 붙어 있다는 수호신이 내 상위 자아더러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좁고 갑갑하다고 막 불평했대. 대체 그 신당神堂을 어디에 두었기에…….”

“…….”

오늘따라 파오와 재삼재사 같은 곳으로 시선이 쏠리는 게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오조의 수호천사라는 거 진짜 있는 거였나 봐.

* * *

이제 약 하루 정도만 더 고생하면 이 길고 지겨웠던 쿠르게오르 사막을 빠져나가 우리의 제 일차 목적지인 국경 검문소에 도착한다. 일반인 통제 구역인 무간도로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검문소인 사무타 지역을 거쳐야 했는데, 그곳에 위치한 검문소에서 종단으로부터의 보급품을 전달받고 다시 향후 계획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검문소에 도착하면 제대로 된 샤워 시설도 이용하고 며칠 동안은 푹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물에 뜬 기름처럼 둥둥 들떠온다.

다만 무간도를 통해 서쪽으로 넘어가느냐 마느냐는 여전히 우리 사이에서도 갑론을박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수치를 내자면 3대1로 찬성 셋에 반대 하나였는데, 그 한 놈이 누구인지는 말해봤자 내 입만 아팠다.

정찰을 나갔던 오조의 실프 정령이 이 근처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 있다며 보기 드문 희소식을 전해왔다. 허나 혹시 이번에도 강시들이 떼 지어 돌아다니는 이상한 마을일까 싶어 다들 미적지근한 반응을 선보이자 새끼 여우가 정말 여우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매섭게 노려봤다.

오조는 평상시엔 순한 편이지만 가끔 애가 핀트가 나가버리면 곧바로 그림리퍼로 변신할 때가 있었다. 자신의 정령을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얼굴에 어두운 음영까지 드리우며 시니컬하게 히죽거리는 오조를 보니 얼마 전 날 밟아 죽이려던 골렘의 악몽이 떠올랐다. 모두들 같은 것을 떠올렸는지 군말 없이 유령같이 스르륵 움직이는 실프의 안내에 따라 사막의 어느 마을로 향해야만 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저 멀리에서 보이는 한 사막 마을의 입구에서는 ‘진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파오는 머리에 물병을 지고 있는 허리가 몹시 잘록한 사막 마을의 여자를 눈여겨보며 옆에 있던 손우경에게 #@$#@$%$%%[email protected]#$%편집 실수가 아니라 순수한 삼장의 귀에서 심의 삭제된 부분입니다. 번역이 불가능한 부분입니다라고 말했더니, 이윽고 손우경이 #[email protected]#%#%$$편집 실수가 아니라 사실 순수한 척하는 삼장의 귀에서 자체적으로 심의 삭제된 부분입니다. 번역이 불가능한 부분입니다2222라고 대답했다. 저렇게 까무잡잡한 피부는 조갯살이 뭐가 어떻다고?

그 후로도 난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는 말을 둘이서만 낄낄거리다가 결국 파오 놈이 그 물병 아가씨에게 추파를 던지기 위해 먼저 자리를 떴다. 파오가 갈매기처럼 음흉해진 눈썹을 하고 바람같이 사라지니 이 적막한 모래바다 위에서 웬 부표 하나가 나에게로 둥둥 떠밀려 왔다. 내 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손우경을 슬금슬금 피하려고 했으나, 녀석은 예상과는 달리 자신도 잠시 다른 볼일을 보고 오겠다며 손끝으로 내 볼을 툭 치더니 금세 어딘가로 가버렸다.

어디 가면 가는 거지 내 얼굴은 왜 건드리고 가는 거냐.

여전히 뭉글이 등에 업혀서 고롱고롱 자고 있는 오조를 내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별수 없이 뭉글이에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령하고는, 나도 적당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저 마을로 들어가 몇몇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곰곰이 따져보니 전에 관음존자가 내게 주었던 종단 법인 카드를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쯤은 신나게 긁어봐야겠다는 역사적인 사명감이 타올랐다.

그나저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축소 가방에 다른 물건들을 더 쑤셔 박을 자리가 남았는지나 모르겠다. 역시 좀 비싸더라도 대용량 버전으로 샀어야 했는데. 허구한 날 디자인조차 고려하지 않고 최저가 위주로만 고르다 보니 맨날 이런 식이었다.

마을의 분위기는 이 요상한 사막 지대에 위치한 것치고는 아주 활기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돌연변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지만, 일전에 들렀던 그 강시 마을에 비해서는 다들 정상적인 범주에 속했다. 마침 팔이 네 개나 달린 어느 남자가 2층 구조의 주스 가판대를 목에 걸고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가 팔고 있는 것은 시원한 선인장 주스였다.

[선인장향 추출물 자그마치 0.0008%! 달고 시원한 쿠르게오르의 명물, 선인장향 주스]

남자 등판에 매달린 광고 문구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목이 말라왔지만, 지금 내가 가진 재화라고는 그 법인 카드 한 장이 전부였다. 가뜩이나 궁핍했던 재정이 출발 직전 사무국 비구니들에게 통장부터 시작하여 주머니까지 전부 탈탈 털린 상황이었다. 어떻게 주스 한 잔 사 마실 돈이 없냐. 공연히 빈 주머니를 연신 뒤적이다가 먼지가 풀풀 날리는 걸 확인하곤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런데 그 주스팔이 남자가 나를 대뜸 불러 세웠다.

“이보시오, 종단에서 나왔나 보군요?”

“네, 그렇습니다만.”

남자가 자신의 네 개의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합장을 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얼떨결에 나도 한동안 잊고 있었던 환영제야단의 공식 인사를 남자에게 되돌려주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음존자님께서 몇 해 전에 여길 다녀가신 이후로 제복 차림을 한 남자는 처음 봅니다.”

“관음존자님이…… 여길, 다녀가셨다고요?”

“다녀가셨다 뿐입니까. 우리 마을이 이 정도로 살기 좋게 윤택해진 것은 모두 다 그분의 자비로운 가피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지금 이 남자가 말하고 있는 그 자비로운 분이 설마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 건지 크게 의심스러웠다.

“그분이…… 여기에서 뭘 하고 가셨는지 혹시 제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 정도야 당연히 알려드릴 수 있지요! 관음께서는 당신의 신비로운 힘으로 이 마을 근처에 아주 커다란 오아시스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저희 마을은 이 쿠르게오르 사막 안에서도 물이 완전히 말라붙은 지역이기에 한 번씩 먼 곳으로 물을 길러 갈 때마다 꼬박 이주가량 그야말로 목숨을 건 여정을 떠나야 했거든요.”

아무리 공간 이어붙이기가 관음존자의 주특기라지만, 굳이 왜 이런 일에 쓸데없이 힘을 썼지. 이곳 마을 사람들이 마실 물을 구하든 말든, 그런 하찮은 일에는 전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작자가 말이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오아시스를 만들어줬다고요.”

수상한 구석이 너무 많아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부분을 짚어야 할지 잘 가늠이 안 됐다. 나의 멍한 물음에도 남자는 크게 신이라도 났는지 관음존자가 이곳에서 행하고 갔다는 그 위대한 업적에 대해서 잔뜩 떠들어댔다.

“대가는 고사하고 형편이 빈곤했던 저희 마을 사람에게 새로운 일거리까지 제공해주셨는걸요! 바로 이 일대에서 대종말 당시 사막 아래 묻혀버린 갖가지 잔해들을 빠짐없이 수집하는 일들입니다. 석 달에 한 번씩 티뷸라 궁에 계신 환영제야단 관계자분들이 나오셔서 저희가 모아둔 수집품들을 전부 가져가주십니다. 물론 달마다 그에 따른 수고 비용도 항상 잊지 않으시고요. 사실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덕분에 낮에 여자들이 오아시스로 물을 길러 가는 사이 남자들은 모두 사막에 나가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남자에게 선인장 주스를 사 마시러 온 마을의 몇몇 꼬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 꼬마들은 현재 마을 거리를 지나다니는 다른 어른들에 비해서 하나같이 기형 상태가 훨씬 심각해 보였다. 눈이 여섯 개나 달린 양 갈래 머리의 여자아이가 아마도 동생쯤으로 여겨지는 작은 남자아이의 입에다가 선인장 주스에 빨대를 꽂은 채 물려주었다. 남자아이는 손과 발이 위아래가 정반대로 뒤바뀌어 있어서인지 손목에 달린 저 발로는 아무것도 쥘 수없는 듯했다.

“그럼 이곳은 원래부터가 변종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까?”

남자가 두 손으로는 재고의 변동이 생긴 가판대를 정리하며, 남은 두 손으로는 다른 꼬마들에게 선인장 주스를 나눠주며 대꾸했다.

“제 팔이 이 모양이긴 하지만 마을의 상황은 원래부터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잖아도 최근 들어 마을에서 태어나는 아이들마다 저렇게 기형이 심해져서 저희도 어찌할 방도를 모르고 있는 중이지요.”

하,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하마터면 아돌프가 이 마을 사람들에게 선량한 호의를 베풀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칫 커다란 착각을 할 뻔했다.

이 쿠르게오르 사막은 집채만 한 크기를 가진 갑각벌레 수백 마리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활개를 치고 다닐 만큼 방사능 수치가 턱없이 높은 장소였다. 게다가 이 사막 안에는 대종말 때의 잔해이자 아직 원형 그대로 묻혀 있을 플루토늄도 상당할 것이었다.

그러니 수도인 포타라카에 거주하는 민간인들 중에서, 만일 꽤 고액의 비용을 제시한다 해도 이렇게 오염되다 못해 극도로 위험한 장소로 선뜻 일을 하러 오겠다는 이들은 결코 없을 것이다. 처음엔 녀석이 도대체 왜 오아시스까지 만들어주며 이곳 사람들의 호의를 샀나도 싶었다. 허나 결국 관음존자는 겉으로만 선심을 베푸는 척하면서 역시나 그 이면에는 숨겨진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매장된 이 사막 지대를 파헤치는 그 위험천만한 작업을,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순진한 마을 사람들에게 전부 다 떠맡기려는 더러운 수작이었다.

‘물론 달마다 그에 따른 수고 비용도 항상 잊지 않으시고요. 사실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이야, 그것도 헐값에.

하지만 대체 뭘 찾기 위해서지?

생각해보면 손우경 또한 지난번 강시 마을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계속해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내게 다른 볼일이 있다며 녀석이 사라진 방향은 이 마을이 아니라 우리가 여태 쭉 걸어왔던 황량한 사막이었다.

그렇다면 손우경과 관음존자가 둘 다 여기에서 뭘 찾고 있단 말이렷다.

마침 나와의 대화를 모두 끝마친 남자가 이제 슬슬 다른 장소로도 가보겠다며, 자신이 팔던 선인장 주스 한 잔을 쓱 내밀었다. 이거 혹시 강매인가 싶어서 잠시 받아 들기를 망설였지만, 남자는 햇볕에 까맣게 탄 촌스러운 얼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관음존자님의 종단에 계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저희의 은인이지요. 혹시라도 나중에 종단에 복귀하셔서 그분을 뵙는다면 꼭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진심 어린 그의 눈을 차마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진실을 모르는 게 더 약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윽고 주스팔이 남자가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언제나 관음존자님의 가피가 함께하시기를.”

그가 떠나자 어쩐지 목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실제의 갈증이 아니라 목 안에 큰 가시라도 걸린 듯이 깝깝한 느낌이 들었다. 별수 없이 손에 들린 시원한 선인장 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자 내 목구멍으로 관음존자의 가피, 그 비스무리한 게 아주 조금은 느껴지는 듯했다. 나답지 않은 죄책감 따위는 그 가피가 위장을 통과하는 사이, 전부 말끔하게 씻어버리기로 했다.

근데, 이거 되게 맛있네.

이 마을에 몇 안 되는 상점 안에서 나는 드디어 나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물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침낭이었다. 얼굴만 쏙 내놓고 잔다는 게 살짝 볼썽사납긴 하겠으나 모쪼록 현 상황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는 만능 아이템이었다.

우선 가장 일반적인 기능인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 기능과 동시에 사막 지대의 거미, 지네, 전갈 등등의 독충들마저 예방해주는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러나 비단 그것들 때문에 침낭 구입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매일 밤마다 나에게 뻗쳐오는 손우경의 검은 마수로부터 뭔가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어떤 보호막이 절실하던 요즘이었다.

아마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사막과도 안녕이긴 했으나 보아하니 노숙 생활은 앞으로도 쭉 이어질 듯 보였고, 서쪽에서 일을 마치고서 포타라카로 귀환할 때 다시 이 사막 지대를 지나쳐야 하는 건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절대로, 충동 구매가 아니었다. 법인 카드나 신명나게 긁어보겠다는 속셈으로 상점을 방문했지만, 막상 직접 들어와보니 솔직히 그럴 만한 용기가 들지 않았다. 그야 법인 카드 결제 내역이 관음존자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될 것이 뻔할 뻔 자인데, 죽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기는 거라며 예전에 아돌프가 아주 대놓고 얘기했었다.

늙수그레한 상점 주인이 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침낭들 위에 뽀얗게 쌓인 먼지를 손으로 탁탁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보시는 것처럼 재고가 이 애벌레 모양의 침낭들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남자가 보여주는 저 초록색 애벌레 침낭에서 잠을 자다 보면 언젠간 나비로 변태할 것처럼 보이긴 했다. 내 주변에 변태 한 마리가 있어서인지 동음이의어인 그 변태라는 어감이 그리 좋지가 않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품 안에서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거위털 최대한 많이 들어가 있는 걸로 주십시오.”

“이거 오리털인데.”

“그럼 오리털 많은 걸로다가.”

주인 남자가 싱글벙글하며 카드를 긁어주었다. 그야 하도 안 팔려서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저딴 애벌레 재고덩어리를 어느 멀쩡하게 생긴 놈이 제 돈 주고 사 가니까 충분히 기쁠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이내 떨떠름하게 말했다.

“저, 손님, 죄송한데 카드 한도 초과입니다.”

“네? 그, 그럴 리가요. 이거 무제한으로 사용 가능한 법인 카드인데…….”

“금액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카드 한도가…….”

이윽고 주인의 입에서 나온 숫자에 내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피가 막 배어날 정도로.

그래, 역시 우리 고매하신 관음존자님은 끝까지 내 서툰 기대심을 저버리지 않는 훌륭하신 악덕 고용주셨다. 나는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깎아주세요.”

주머니에서 축소 가방을 꺼내 새로 산 침낭을 안으로 꾹꾹 욱여넣고는 얼른 상점가를 빠져나왔다. 주인이 혀를 쯔쯔 차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생생하게 들렸다. 그래도 재고가 많이 쌓인 물건이 아니었다면 정말 어림도 없을 가격으로 필요한 물건을 장만했으니, 승려로서 알뜰하고 검소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한…… 됐다. 그냥 내 얼굴에 가래침 뱉기지. 캭.

통 크게 법인 카드를 주었으나 잊지 않고 일일 한도까지 걸어놓으신, 그 자비롭고도 치사하신 분을 향해 이제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기분 전환 삼아 마을 구경이나 할까 해서 막 돌아다니려던 참이었다.

정말 어쩌다 보니, 파오를 보게 됐다.

파오는 좁은 골목 사이에서 갈색 피부를 가진 마을 여자와 서로 끈적거리며 들러붙어 있었다.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손은 둘째치고 얼마나 주둥이를 빨아대는지 남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근데 뭐랄까. 난 왜 저런 걸 봐도 야한 생각이 안 드는 거지.

파오가 여자의 가랑이 사이로 손을 거칠게 밀어 넣는 걸 창망하게 지켜보다 불현듯 뇌리에서 손우경의 젖은 음성이 재생됐다.

‘니 꺼 직접 만지게 해줘.’

방금 전 상점에서의 일보다 지금이 한층 더 기분 나빴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놈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자 마치 내가 발가벗은 채로 대로를 활보하는 것 같은, 창피하고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전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임에도 머릿속이 온통 그날의 손우경으로 가득해졌다. 누군가 나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석연찮은 느낌에 나는 도망치듯 그 거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어느덧, 내 상상 속에서는 방금 봤던 그 낯선 여자와 파오의 모습이 완전히 나와 손우경으로 뒤바뀐 채 그 뒷부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 * *

손우경은 아직도 일행들 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나와 오조, 그리고 파오까지 대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놈을 아무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파오는 자기도 방금 전에야 잔뜩 개운해진 얼굴로 나타난 주제에, 손우경이 말도 없이 늦는다며 마구 투덜거렸다. 나는 오늘은 왠지 손우경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깜깜해진 그의 행방을 내심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지만, 좀 전부터 왜 자꾸 이런 기분이 드는지 통 이해할 수 없었다.

파오가 여자를 꼬시는 장면쯤이야 예전에 녀석이 천봉대원수로 군림하던 종단 시절에 이미 수도 없이 봐왔었다. 아주 우연찮게 그의 방을 찾아갔다가 놈이 여자와 실제로 정사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당시 파오의 달아오른 성기가 여자의 빨갛게 부푼 아랫구멍을 쉴 새 없이 푹푹 찔러대는 모습을 보고 나서 몇날 며칠 밤잠을 설치며 악몽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너무 더러운 행위라고만 여겨졌다.

남녀의 성교는 무릇 음양의 합일이자 또 종족 번식을 위해 자연에서 부여한 기꺼운 섭리였으나, 아직 어리기만 했던 나의 눈에는 단순히 욕망에 빠진 살덩어리들의 추잡한 결합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파오와 여자의 생식기 주변에는 성인의 증거인 무성한 털들이 자라나 있었는데, 그것들이 성기와 함께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나로 섞여 들어가자 시각적으로 굉장히 불결한 인상을 주었다.

물론 그때야 지금보다도 나이가 많이 어렸던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내 부모님의 영향이 더 컸으리라 생각됐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처님께 몸과 마음을 모두 의탁한 불교 신자였지만, 종단의 간부로서 후사를 남기기 위해 집안끼리 정략적으로 혼인을 한 사이이기도 했다. 그런 것치고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금슬이 무척 좋다는 얘기를 자주 들을 만큼 잉꼬부부였다. 연을 맺은 지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서로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항상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대외적으로도 정갈하고 품위 넘치는 태도로 타의 모범이 되셨던 분들이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야 당연히 우리 부모님도 잠자리를 가지셨겠지만, 그래도 방탕한 욕망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불자로서의 금욕적인 인상이 더 강했었다.

그러니 남녀 관계의 기준이 되는 것은, 모두 부모님과 같은 모습이라고 내 스스로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손우경이 내 삶에 끼어들고 나서부터 내가 여태껏 차곡차곡 쌓아왔던 세계관이 어딘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무너져버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을 한시라도 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나중에는 나조차도 제어가 힘들어질 것 같은,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초조해진 기분으로 아랫입술을 질겅거리고 있는데, 그런 내 눈앞에서 무슨 착시 현상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곳 쿠르게오르 사막에 들어온 다음부턴 강시와 갑각벌레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별별 꼴들은 다 봤다고 자부했으나, 이건 그 경우가 사뭇 달랐다.

몹시 황당무계하게도 이젠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고양이들까지 떼거지로 등장하는 중이었다. 쟤네들은 도대체 뭐하는 족속들이지.

오조가 우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저 수많은 고양이 떼에게 겁을 먹었는지, 평소 애지중지하던 침대마저도 내팽개치고 잽싸게 하늘 위로 튀었다. 사실 새끼 여우는 로브 어깨 부분이 몇몇 날개 달린 작은 정령들에게 들려 올라간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내가 오조 대신에 주인에게 잠시 버려진 뭉글이 위로 대피했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저건 고약할 정도로 너무 바글거렸다.

저 고양이들이 지금 대략적으로 몇 마리나 되는 걸까. 대강 어림잡아도 기백 마리는 족히 넘을 듯했다.

개중 가장 선두에 서서 몸에 조끼 같은 것을 걸친 채, 한쪽 눈에는 안대를 차고 있는 어느 애꾸눈의 고양이가 가장 도드라져 보였다.

파오가 자기 주변에서 야옹거리기 시작하는 고양이들을 꽤나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나와 오조 쪽을 돌아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이것들 대체 뭐야?”

방금 전 내가 했던 생각과 거의 동일했으나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너도 모르는 일은 당연히 나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안다고 해도 너한텐 절대로 안 가르쳐주지.

하늘에 떠 있던 오조가 입을 헤에 벌리고서 자기 손가락으로 고양이들의 숫자를 일일이 헤아리고 있었다.

“삼장, 나 고양이가 전부 몇 마린지 모르겠어어…….”

그야 열 마리에서 멈추고 또 한 마리를 처음부터 다시 세니까 총 몇 마린지 셀 수가 없겠지. 누가 시간 나면 얘한테 숫자 11의 개념이 뭔지 좀 알려주라. 나 말고 아무나.

그때 고양이들 중에서도 몸집이 가장 크고 하얀색 털에서 자르르한 윤기가 흐르는 녀석이 우리 앞에 불쑥 튀어나왔다. 놈은 아까부터 튀어 보이던 그 안대를 찬 고양이였는데, 놀랍게도 입을 열자 인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행자들이시여, 저는 사막고양이들의 대장인 케르케노케스라고 합니다.”

황금색의 영롱한 눈동자를 가진 애꾸눈의 고양이였다. 놈은 마치 사람처럼 예의를 갖추고서 젤리 사이로 고운 털이 자라난 양쪽 손을 합장하듯이 마주하더니 우리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저리도 정중하게 구는 것에 비해 그 목소리가 참으로 귀여웠다.

그 사이에 오조가 슬그머니 바닥으로 내려왔다가 에취 하면서 크게 재채기를 한다. 재채기를 연달아 계속 터뜨리는 걸로 봐선 아마 고양이 털 알레르기라도 있는 듯했다.

파오는 가만히 턱을 쓸다가 갑자기 저 케르뭐시기라는 이름의 대장 고양이에게 돌연 험악해진 눈빛으로 호통을 쳤다.

“이제야 기억났는데 니네, 흉악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사막의 고양이 새끼들 아냐? 내가 좋게 말할 때 당장 여기서 안 꺼질래?”

그 말에 나는 얼른 파오 쪽을 돌아보며 방금 전 내뱉은 이야기의 빠른 해명을 촉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 소문이 뭔데? 네가 아는 일이라면 당연히 나도 알아야 한다. 그래도 내가 아는 일들은 너한테 절대로 안 가르쳐주지.

하지만 파오 저 치사한 놈이 지금 나한테 아무 말도 해주질 않는다.

대장 고양이는 파오의 엄포에 당황했는지 말없이 한쪽 눈을 깜빡이다가 이윽고 뒷발로 자기 귀를 벅벅 긁어댔다.

“소문이 흉악하다뇨. 그,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이제껏 내가 들었던 그 소문들은 다 어떻게 해명할래? 니들이 고 깜찍한 면상으로 사막을 오고 가는 여행자들을 홀린 다음, 배를 딴딴하게 채우고 있단 얘기를 내가 한두 번 들었는지 알아?”

그러자 대장 고양이가 자기 뒤편에 모여 있던 다른 고양이들을 휙 돌아보며 캬악! 하고서 위협하듯이 울어댔다. 귀와 꼬리를 한껏 세우고서 자기들끼리 뱀처럼 쇳소리를 주고받던 대장 고양이가 다시 파오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엄청나게 불쌍한 눈동자로 바라보며 간절히 청원했다.

“사막의 여행자시여, 진정 오해이십니다. 저희는 그저 만나 뵙는 여행자분마다 이 사막에 ‘숨겨진 보물’을 함께 찾아달라고 부탁드렸을 뿐인걸요.”

“보물?”

보물이라는 단어에 순간 귀가 쫑긋해져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손우경과 관음존자가 이 사막에서 찾고 있는 그 어떤 것들이 지금 저 고양이의 입에서 나온 것과 혹시 동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대장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며 냐옹거렸다.

“넹. 보물입니다. 이 사막 어딘가에는 아주 굉장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저희 고양이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장 고양이가 혓바닥으로 말랑말랑하게 보이는 자신의 핑크색 발바닥을 핥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손을 핥고 있는 녀석의 눈매가 마치 웃는 모양으로 갸름하게 접히는 게……. 난 결코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솔직히 인간적으로 너무 귀여웠다.

마침 오조가 땅의 정령에게 부탁해서 어디선가 살랑거리는 강아지풀 하나를 구해 왔다(저걸 사막 어디에서 구한 거지?). 그러고는 고양이들의 눈앞에서 풀을 좌우로 마구 흔들어대며 혼자 꺄르르거리면서 엄청 좋아하고 있었다. 오조가 강아지풀을 흔들 때마다 수백 마리의 고양이 눈이 이리저리로 함께 따라서 움직여댄다.

파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대장 고양이에게 냉큼 손짓을 했다.

“야, 너 이리 좀 와봐.”

대장 고양이가 사뿐사뿐 우아한 발걸음으로 걸어가자 파오가 그 머리에 손을 턱 얹으며 이야기했다.

“……머리통 한 번만 만져보자.”

파오가 대장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놈이 그 손길을 음미하듯 자기 얼굴을 스스로 손바닥에 문질러댄다.

그러다 야무지게 다문 입가 주변을 파오가 손가락으로 살살 긁어주니 그 고급스럽게 생긴 대장 고양이가 아예 눈까지 감고는 목에서 잔뜩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이런 지조 없는 주둥이 같으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새 대장 고양이를 무릎에다 앉히고서 고양이 시중들기에 흠뻑 빠진 분께서 하실 말씀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오조는 몇몇 고양이들의 목덜미를 붙잡고서 뭉글이의 쩍 벌어진 입안으로 한 놈씩 차례대로 밀어 넣는 중이었다. 처음엔 뭉글이의 간식이라도 챙겨주나 싶었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나비들을 몇 마리 가져가야겠어…….”

밥과 잠 외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오조까지도 저리 제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저것들이 확실히 뭔가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나까지도 웬 고양이 한 마리를 쓰다듬고 있는 거람. 제복에 털이 묻을 테니 내려놓고 싶은데 손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파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녀석에겐 뚱뚱한 체격의 고양이 두 마리가 달라붙어 그의 넓은 등을 꾹꾹 눌러가며 안마를 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파오는 대장 고양이와 어떤 모종의 거래가 끝났는지 고양이들을 향해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빨리 가져와! 요 얼굴만 귀여운 것들아!”

암만 봐도 저놈이 여기서 제일 중증인 것 같았다.

음, 뭐라고? 배를 만지는 건 싫어하니까 꼬리 부분이나 부드럽게 어루만져달라고?

내 품에 있던 고양이가 자꾸 성가시게 구는지라 나도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고양이의 탐스러운 꼬리를 매만지며 파오에게 되물었다.

“방금 전에 무슨 얘길 하셨던 겁니까.”

파오도 자기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였다.

“……어, 그러니까, 내가 그 사막의 보물을 찾아주기로 했어.”

다들 뭔가에 홀려도 단단히 홀려 있었다. 잠시 후, 서열이 가장 낮은 듯한 쬐그만 얼룩고양이 한 마리가 입으로 지도 한 장을 부리나케 물고 와선 파오에게 냉콤 건네주었다.

파오는 마치 아돌프의 붓글씨 실력처럼 괴발개발로 그려진 지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나에게 다시 넘기며 말했다.

“지도 안에 표시된 위치가 지금 우리가 있는 딱 이 지점쯤인 것 같은데.”

나 또한 그 지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지도를 고양이가 그렸는지 그림 수준이 엉망진창이었다). 아까 낮에 머물렀던 마을과 기타 등등의 위치들을 모두 종합해봤을 때, 파오의 말대로 우리가 서 있는 지점에서 그리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웬 생선 한 마리가 큼직하게 그려져 있었다. 생선 주변에 번쩍거리는 표식까지 그려져 있으니, 저게 아마도 고양이들이 말하는 보물이 숨겨진 위치인 듯했다.

파오는 대장 고양이가 자신의 무릎 위에서 꼬리와 몸통을 둥글게 말고서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버리자 몹시 곤란해진 얼굴로 내게 자문을 구해왔다.

“넌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냐.”

나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답변했다.

“지도에 표시된 부근이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니 정말 이 근처에 그 보물이라는 게 매장되어 있다면 속는 셈 치고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도 크게 나쁘진 않겠죠.”

“역시 그렇겠지?”

그런데 일이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이 수상쩍다 못해 왠지 우려스러울 지경이었다. 굉장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던 지도가 저렇게 허접하게 그려진 것도 의심스러웠고, 그 숨은 장소마저도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을 만한 곳이었다.

심지어 여자 한정 박애주의자인 파오가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본 적조차 없었다. 분명히 저 고양이들이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파오가 뭐라고 말했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어느새 파오와 나의 손에는 큼직한 삽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오조에겐 모종삽이 주어졌으며 놈은 그걸 가지고서 사막의 모래를 열심히 퍼내고 있었다.

파오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계속 모래를 파내었다.

그렇게 얼마나 삽질을 해댔을까.

벌써 움푹하게 들어가버린 모래구덩이 아래에서부터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끝으로 짭짤하게 풍겨오는 바다 내음.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로 거대한 배 한 척이 닻을 내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배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그물망에는 족히 몇 백 톤 이상은 됨직한 살아 있는 생선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팔딱거리는 생선들이 하늘 위에서 우박처럼 방대한 양으로 쏟아져 내렸다.

미처 피할 만한 겨를도 없이 쉬지 않고 우르르 떨어져 내리는 생선들을 전부 몸으로 받아내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들이 우리가 힘들게 판 구덩이 안으로 전부 꽉 들어차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근데 내가 대체 언제 이렇게나 큰 구덩이를 판 거지.

코를 마구 찌르는 비린내와 온몸이 미끌거리는 생선들 틈에서 한참을 허우적거리다가, 정말 죽을힘을 다해 간신히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그 끔찍했던 생선 지옥에서 이제야 막 탈출했을 즈음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손우경이 팔짱을 낀 채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놈은 나와 파오, 오조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명백히 비웃음이 담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사막고양이들한테 속는 머저리들이 대체 어디에 있나 했더니…….”

손우경은 구태여 친절한 설명까지 보태가며 우리의 크나큰 어리석음을 몸소 깨닫게 해주었다.

“여태 그 소문도 못 들었냐. 사막에서 고양이들을 만나게 되면 절대로 상종하지 말란 얘기. 그 악명이 워낙 자자해서 요즘은 아무도 안 걸려드는 모양이던데, 참 나 기가 차서. 만일 세 마디 이상 대화를 나누게 되면 그때부턴 꼼짝없이 걸려드는데, 쟤네들은 사람의 착각 에너지를 통해 배를 채우는 것들이지. 여긴 오래전에 큰 항구였던 곳이라 배가 끊임없이 선착하던 기억들이 응집되어 있고, 너희가 삽질했던 이 구덩이는 바로 포획해 온 생선들을 풀어놓는 장소였어. 저것들한테 홀려서 구덩이를 크게 파면 팔수록 놈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이득이겠지만, 그만큼 자기 에너지를 빼앗기는 구조라구.”

더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벌써 쪽팔려서 뒈질 노릇이니 제발 그 입 좀 닥쳐줬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다.

고작 고양이 따위에게 속아서 삽질까지 해가며 말 그대로 병신같이 삽질한 기분이었다.

우릴 극도로 한심하게 내려다보던 손우경이 이윽고 구덩이 입구에서 굴러다니던 큼직한 생선 한 마리를 덥석 집어 들었다. 대체 그걸 가지고 뭘 하려나 싶었다. 잠시 후, 우리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현재 상황을 모두 관망 중이던 그 몹쓸 것들을 향해 녀석이 그 생선을 휙 던져주는 것이 아닌가.

손우경은 한쪽 손의 측면을 이마에 대고는 눈부신 태양빛을 차단하더니 이내 생선이 던져진 먼 곳을 바라보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 야옹이들 아주 신났네.”

구덩이에 여전히 몸이 반쯤 처박힌 채로 고개만 틀어서 얼른 고양이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저 이족보행의 잡것들은 팔짝팔짝 뛰면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간만에 낚아 올린 호구들 덕분에 출항했던 어선이 만선인지라 누가 뭐래도 완벽한 축제 분위기였다.

* * *

낮에 어처구니없이 홀딱 뒤집어쓴 생선 더미의 습격에 아직도 내 몸에선 불쾌한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얼굴만 귀여운 잡것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아니었는데 공연히 남 좋은 일만 시켜주고 온 더러운 기분이었다. 이 영악한 고양이 새끼들. 지금쯤 한 놈씩 생선을 입에 물고 냥냥거리며 배터지게 처먹고 있을 생각을 하니 괜스레 위장이 마구 뒤틀렸다.

오조 녀석은 자기가 소환한 물의 정령의 배 속으로 들어가서 치사하게 혼자서만 깨끗한 샤워를 즐긴 다음, 아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물의 정령 운디네는 투명한 배 안에 오조를 넣고는 혹여 애가 감기라도 들까 봐 나중에 탈수까지 탈탈 시켜주는 진기를 선보였다.

그리하여 씻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진 든 오조는 무척이나 뽀송뽀송해 보였다.

파오는 땡중인 자기 주제도 모르고 근처 사막 마을 아가씨들에게 탁발을 받으러 가겠다며 설레발을 쳤다. 놈에게 지금 너한테서 생선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고 알려주려다가 그냥 마을에 내려가서 톡톡히 망신이나 당하라는 마음에, 웃는 낯으로 얼른 꺼지라고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그 꼴로 탁발은커녕 퍽이나 여자 꼬시기에 성공하겠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보니, 놈은 이미 내 짐 가방 속에서 탁발에 사용하는 발우 그릇과 목탁을 몰래 빼돌린 뒤였다. 심지어 그 발우는 내가 지난달에 월급의 절반을 탈탈 털어서 포타라카 깊은 산중에 기거하는 바리때장인에게 비싼 가격을 치르고 특수 제작한 수공예품이었다. 나도 함부로 쓰기가 아까워서 아직 밥풀떼기 하나 안 묻혀봤는데 너 따위가 감히. 당시 아돌프는 그깟 거에 돈지랄을 했다며 심드렁한 눈동자로 혀를 찼었지만 밥을 담는 밥그릇이란 정말로 중요한 거였다.

무릇 인생이란 남들에게서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연속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일행들 중 유일하게 생선 더미와 조우하지 않았던 손우경은, 오늘 반나절 이상 눈에 보이지도 않더니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또다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신출귀몰한 걸로도 모자라서 야행성인 경향까지 있는 듯했다. 사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가끔 새벽에 눈을 뜰 때마다 놈의 행적이 묘연했던 적이 이제껏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좌우지간 나야말로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각이 한참 지났음에도 여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고요한 사막의 밤은 끝없는 모래와 검은 하늘로 이등분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적막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런 사치스러운 운치에 젖어 있느라 안 자고 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어제 노숙용으로 새로 장만한 침낭을 펼쳐 들고서 머뭇거리는 중이었다. 이 고약한 생선 비린내가 풀풀 나는 몸으로는 내 새 침낭에게 죄스러워서 차마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기가 무진장 꺼려졌다.

게다가 아까 손우경이 내 머리 위에 얹힌 작은 생선 한 마리를 흘깃거리며 ‘냄새 나니까 제발 내 옆에 오지 말아줄래?’라면서 상냥하게 비웃었던 걸 떠올리니 어쩐지 울컥하는 심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틈만 나면 나한테 집적거리지 못해서 안달이 난 놈이 되레 적반하장으로 굴다니.

늦어도 내일이면 검문소에 도착할 예정이니 그곳에서 샤워 시설을 빌리면 된다지만, 그때까지 당장 이 코를 찌르는 악취를 스스로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파오 놈이 다시 마을로 간다고 했을 때 그냥 나도 같이 따라 갔어야 했나. 하지만 내가 이미 둘러봤던 그 마을에는 여행자들이 묵을 여관 따위가 전혀 없었기에 어차피 간다 한들 큰 소용은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몸이 많이 찝찝하긴 하지만 내일의 일정상 이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순 없으니 일단 앉아서라도 잠을 좀 청해봐야겠다. 헌데 비린내의 온상지인 내 겉옷을 벗어서 모닥불 근처에다 잠시 불을 쬐게 놓아뒀더니 갑자기 웬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건 또 무슨…….

일어나.

몸을 뒤흔드는 손길에 눈앞에 불이 번뜩 켜졌다.

아마도 깜빡 잠들었었나 본데 불시에 자다 깨서인지 지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그야말로 비몽사몽이었다. 가까스로 허리를 일으켜서 앉았더니 손우경이 눈앞에서 잔뜩 어른거렸다. 놈이 손바닥으로 가볍게 내 뺨을 툭툭 치며 잠기운에 취해 있던 나를 깨우려고 들었다.

불편해진 심기로 볼에 닿아 있는 그 손바닥을 탁 걷어냈지만 녀석은 태연하게 내 손목을 붙잡아 바닥에서 벌떡 일으켜 세웠다.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이 날 어딘가로 무작정 끌고 가는 손우경에게 방금 자다 깬 머리로는 놈의 뒤통수에 대고 뭐라 쏘아댈 말들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긴고주緊箍呪나 외우기로 했다. 뭐든지 다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일단 한 번이라도 시작하고 나면 어느새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관음존자의 진언을 몇 구절 읊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손우경의 머리에 박혀 있는 칩과 상호 작용을 일으켜서 심한 통증이 오는 모양이었다.

녀석이 걷다가 말고 몸을 돌려 내 입을 확 틀어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 좀 있어봐!”

입이 가로막힌 채로 놈을 싸늘하게 쳐다보자 그 회색빛 눈동자가 피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맞춰온다. 녀석의 눈빛 자체가 워낙 강한 편이기도 하지만, 날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항시 내 얼굴이라도 태워먹을 듯한 기묘한 열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낯간지러운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내 쪽이었다.

손우경은 그런 내 반응을 살피며 별말 없이 손가락으로 내 정수리 부분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무식하게 힘만 세서 손으로 뭔가를 부수거나 터트리는 장면을 종종 보다 보니 얘가 이런 식으로 내 머리나 얼굴을 만질 때마다 이대로 얌전히 있지 않으면 꼭 머리통을 부숴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년씩이나 시간이 멈춘 방에 갇혀 있었대도 현재 나이상으로는 엄연히 나보다도 어린 녀석이었다. 그런 자식이 딴에는 갸륵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이렇게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일은 예로부터 엄격하게 전해져오는 장유유서의 법도에도 크게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나는 놈이 잘 알아듣도록 조용하게 타일렀다.

“……날이 새도록 머리통 터질 때까지 긴고주나 듣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 머리에서 손 떼.”

하지만 손우경은 여전히 내 머리에 손을 얹은 채로 그저 멀리 떨어진 곳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녀석이 갑자기 자기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쉿 하고 짤막한 주의를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디디고 섰던 모래 바닥에서 조금씩 불길한 진동이 느껴졌다. 발아래로부터 서서히 전해지는 이 땅속 울림의 진원지는, 바로 손우경이 시선을 고정한 남측 방향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지금 아주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긴장할 작은 틈조차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이곳과 조금 떨어진 대형 사구 쪽에서 아주 커다란 것이 하늘 위로 확 솟구쳐 올랐다. 달이 환하게 뜬 밤하늘. 유령처럼 반투명한 물질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것이 깊은 어둠 속을 향해 질주하며 힘차게 날아올랐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죽은 고래의 사념체였다.

손우경은 밤하늘 아래 사막을 오가며 마치 헤엄치듯 부유하고 있는 고래의 움직임을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저 고래가 자신의 행동 반경 안에 들어와주길 내심 기다리는 눈치였다.

끝도 없이 이어진 사막이 고래의 매끄럽고 유연한 움직임에 따라서 흡사 바닷물처럼 출렁거렸다. 나는 마치 바다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묘한 착각이 들었다. 그보단 고래의 움직임이 굉장히 우아하고도 또 몽환적으로 보여서 좀처럼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잠시 후, 이제 고래가 거의 우리 근처까지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녀석이 내 옆을 얼마나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지 그걸 눈으로 포착할 겨를조차 없었다. 게다가 고래가 스쳐 지나갔던 순간 놀랍게도 내 얼굴 위로 작은 물방울들이 퐁퐁 튀었다. 아마도 뺨에 닿은 차가운 촉각 때문에 그리 여겼던 것일까. 물방울들이 닫은 자리를 손으로 직접 만져보니 그저 모래알갱이들만 잔뜩 묻어났을 따름이었다.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이나 사막 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던 고래가 이번엔 모래 바닥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가려던 차였다. 여태 잠자코 있었던 손우경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속하게 허공으로 뛰어오른 손우경이 자신의 손바닥을 고래의 거대한 몸통과 맞닿게 했다. 그 주변으로 마치 형광 물질처럼 발광하는 푸른빛의 그물이 놈의 손바닥에서 쏜살같이 퍼져 나와 고래를 단숨에 포박해버린다.

그물에 사로잡힌 고래가 괴롭게 울부짖는 소리를 마구 내질렀다. 육중한 덩치가 쉴 새 없이 버둥거리며 하염없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쌍해 보였지만, 손우경은 그다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태평한 얼굴로 내게 일갈했다.

“너도 들어본 적 있지?”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그가 지금 무엇을 묻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나도 일전에 귀동냥으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오래전에는 바닷가였다고 전해지는 이 쿠르게오르 사막은, 급속도로 진행된 해양 사막화 때문에 바다생물의 유해나 조개껍데기 같은 것들이 의외로 쉽사리 발견되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일반 고래의 약 수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고래 뼈가 통째로 발견된 적이 있었다. 고래 뼈는 시중에서 상아처럼 아주 고가품으로 팔리는 물건이었기에. 사람들은 모래를 샅샅이 파헤쳐서 그 고래의 뼈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들었다. 헌데 그 어미의 배 속에서 함께 죽은 새끼 고래의 뼈가 함께 발굴된 것이다.

새끼를 밴 어미 고래가 왜 뼈만 남은 채 죽어서 발견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새끼 고래를 포함하여 어미 고래의 뼈들을 운반하기 쉽게 조각내어 전부 가져가버리자 그 후로부터 이 부근에서는 아주 신기한 일들이 발생했다.

바로 죽은 고래의 환영이 새벽만 되면 오늘처럼 나타나서, 사막 위를 바다처럼 자유로이 유영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렇게 고래를 목격한 사람들마다 입을 모아 칭송하길, 고래가 너무나 크고 무척 아름다워서 미처 넋을 놓고서 한참을 바라보았다고.

손우경이 입을 열었다.

“환상고래야. 사람들의 꿈을 먹으며 살지.”

사념체란 살아 있던 것들이 죽어서 남기는 강한 염이자 미련, 혹은 어떤 인상적이고도 깊은 생각들이 하나의 에너지로 똘똘 뭉치게 된 것을 뜻했다. 그러니 얼핏 영혼과도 비슷하지만 그 성질 자체는 아예 달랐다.

비록 내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 새끼와 함께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그 어미 고래의 절규와 한 맺힌 슬픔이 일종의 사념체가 되어 뼈가 매장된 사막 안에 내도록 갇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다 나중에 그 뼈를 치우게 되자 그동안 땅 안에 갇혀 있었던 사념체가 속박에서 자연스럽게 풀려난 것일 테고. 통상적으로 자신이 기생하던 개체가 사라진 사념체는 원래 주인의 형상을 그대로 모방하게 되는데, 행동이 상당히 단순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소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내가 이 소문을 들은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나타나는 걸로 봐선, 사념체가 고래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며 이 사막을 오고 가는 사람들의 잡다한 생각들을 흡수하면서 점점 더 크기가 불어나는 듯해 보였다.

손우경의 손안에선 지속적으로 푸른 기운들이 퍼져 나갔다. 연신 팔딱팔딱하던 고래의 몸통이 아예 축 늘어진 채 손우경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바닥으로 눕혀졌다. 그나저나 어제부터 온종일 작은 물고기, 큰 물고기를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보게 되다니 아무쪼록 오늘을 생선의 날로 지정하든가 해야겠다.

곧이어 내 귓가로 졸졸거리며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에 맑은 물이 찰랑찰랑 고인 물웅덩이가 생겨나더니 이윽고 황량한 사막이었던 주변 풍경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숲이 울창하게 자란 오아시스로 변해버렸다.

설마, 신기루인가.

아니, 이걸 고작 사막의 신기루라고 치부하기에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 생생한 풍경들이 황홀할 정도로 선명하게 아름다웠다.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서 바라보자 손우경이 최후의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그리고 환상고래가 잠을 잘 때면 이렇게 오아시스로 변장을 해.”

놈은 내내 무표정이던 자신의 입가를 장난스럽게 덧그리더니 느닷없이 전혀 예상 밖의 돌출 행동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너 좀 씻는 게 좋겠어.”

손우경에게 떠밀려 오아시스로 풍덩 빠지기 직전까지도, 나는 지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선뜻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길게 자라 있는 내 앞머리가 물에 젖은 터라 이마에 철썩 달라붙어 눈앞을 가리는 게 참으로 번잡스러웠다. 이마로 머리를 쓸어 넘긴 후 턱 끝에서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오아시스 밖에 서 있는 손우경을 노려봤다. 놈의 번드르르한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더니 녀석이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며 새삼 가증스럽게 굴었다.

“아, 실수로 손이 미끄러졌네.”

멀쩡하게 잘 자고 있는 사람 깨워서 이런 오밤중에 사막 한가운데로 끌고 오더니 이제는 물에 빠트리기까지 해? 머릿속에서 고요하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겨를도 없이 녀석이 나에게서 어떠한 반응을 기대하며 빤히 쳐다보고 있는 저 눈초리가 심히 거슬렸다.

물론 현재 내 몸에서 풍겨오는 이 고약한 생선 비린내를 감안한다면 깨끗하게 씻을 물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환상고래가 변신한 이 오아시스의 풍경은 손우경과 단둘이서만 구경하기가 아쉬울 만큼 지나치게 신비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서 ‘나 빨리 칭찬해줘’ 빔을 대놓고 쏘아대고 있는 손우경을 보니 반발심과 동시에 급속도의 냉정이 찾아왔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녀석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너 설마하니…… 내가 무슨 감동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거냐.”

놈이 정곡을 찔린 듯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평소처럼 시치미를 떼며 입을 열었다.

“누가 뭐래. 너한테서 생선 썩은 내가 풍기는 게 별로니까 그렇지.”

맥이 빠져 시큰둥해진 목소리에 내가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럼 내 근처로 오지 마.”

싸울 때에는 악귀 저리 가라 미쳐서 날뛰는 주제에 이게 어울리지 않게 뭐하는 짓인지. 차라리 맨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반쯤 미친 인간처럼 굴어주는 게 더 속 편하지, 이런 낯간지러운 짓은 딱 질색이었다. 하물며 칭찬을 바랐다면 갑자기 물에 빠트리지나 말든가.

“사념체랑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일이 대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쓸모 있는 능력이라곤 그저 내 취향인 얼굴 하나뿐인 네가 그걸 알려나 모르겠네.”

내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서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랬다가 만약 네가 죽기라도 했다면, 대신 영가천도라도 해줄 테니까 언제든 제발 안심하고 죽으라고.”

손우경이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에 뜬 달의 위치를 가늠하더니 손을 내저으며 재촉했다.

“잔말 말고 어서 씻기나 해. 오아시스의 유효 시간은 하늘에 달이 떠 있을 때까지만이야. 아니면 고래의 꿈 안에 영영 갇혀버린다.”

“…….”

“뭐, 잘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꽤 괜찮겠네. 여기서 너랑 나랑.”

픽 웃는 꼬락서니가 일부러 나 겁주려고 하는 소리 같았다. 솔직히 말해 나도 이왕 물속에 빠진 김에 몸 구석구석까지 개운하게 씻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지금 오아시스 밖에 딱 버티고 서 있는 저 녀석 때문에 걸치고 있는 옷들을 훌러덩 벗어던지기가 왠지 저어되는 입장이었다.

아직 지난번에 약속했던 그 ‘후불’이 남아 있었기에 하반신에 진짜 무기가 달려 있는 저 짐승 같은 자식이 그 핑계를 대고서 또 무슨 파렴치한 짓들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때야 어찌어찌 긴고주를 외우는 둥 위기를 모면했다곤 하나 또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말란 법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한들, 같은 남자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마치 수줍은 새색시처럼 몸을 사리고 있는 이딴 꼬락서니도 그닥 내키지는 않았다. 겉옷이야 아까 자기 전에 불 근처에 잘 벗어뒀으니 물에 젖어 피부에 밀착되어버린 내 셔츠의 단추들을 하나씩 끌러 내리기로 했다. 내 손동작을 하나하나 주시하고 있을 누군가의 눈빛이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크게 티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 벗겨낸 축축한 셔츠를 물 밖으로 던져놓다가 본의 아니게 또다시 손우경하고 시선이 얽혀 들어갔다. 놈은 생각보다 훨씬 평온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날 지켜보고 있었다. 하긴 설마하니 저런 얼굴로 변태같이 실실거리고 있는 것도 쉽게 상상이 안 가긴 했지만.

진짜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지 말마따나 세상에 둘도 없을 절세미남이 맞는데 저렇게나 잘난 외모를 타고난 주제에 왜 하필 남색가란 말인가.

손우경은 설핏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한참 후에야 억눌렀다가 터져 나온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다분히 감정적인 요소가 실려 있었다.

“……너 진짜 안 되겠다.”

내가 뭘? 놈을 어리둥절해서 쳐다봤지만 오히려 화난 표정으로 돌변해서는 전혀 뜻 모를 소리나 내뱉었다.

“하, 나도 내가 지금 뭐하는 등신 짓거린지 모르겠네.”

스스로도 기가 차다는 듯 자조 섞인 목소리였다. 녀석이 자기 발밑으로 던져진 내 셔츠에 잠시 눈길을 줬다가 다시 나를 물끄러미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너,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느낄 수가 없다는 게 진짜 어떤 건 줄이나 아냐.”

설마하니 수용소 때의 이야기라도 꺼내려는 건가.

“다시 바깥으로 나온 다음에야 내가 그 안에서 장장 오년의 세월이나 갇혀 있었단 걸 비로소 깨달았어. 근데 그게 고작 오년뿐이라니. 분명히 내가 느꼈던 세월의 무게는 그 이상이었으니까.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비참한 체념이 들 정도였는데.”

“…….”

“매일같이, 정말 수도 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내 머릿속에서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공기가 왜 이렇게 무겁고 진지하게 흘러가는지 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뭔가 실수를 저질러서 손우경에게 큰 질책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은 그런 묵직해진 분위기였다.

“아돌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끝없이 생각했지. 그렇게 하루에도 수천 수백 번,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언젠가 그 녀석에게 최고의 죽음을 선사하게 될 내 미래의 모습들을 계속해서 되뇌었어. 앞으로 내 모든 걸 전부 다 잃어도 상관없으니 만약 이곳에서 나가게 되는 순간, 여태까지 내가 겪어야 했던 그 인고의 세월과 무수한 고통들을 기필코 그놈에게도 똑같이 되돌려주리라, 내 심장에 대고서 맹세했거든.”

자신의 과거사를 담담하게 읊어주는 목소리가 만월을 등지고 선 그의 실루엣과 뒤섞여서 어딘지 울적하고 처연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그 뒷말이 듣고 싶지가 않아졌다.

“아돌프 자식의 속셈이 뭔지 뻔히 알면서도 너에게 휘둘리고 있는 이 상황을, 별로 나쁘지 않게 여기고 있는 지금의 나한테 굉장히 화가 나.”

“…….”

관음존자가 맨 처음 나에게 명령을 내렸을 때, 뭔가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내가 이번 일의 적임자라고 일컬었었다. 나는 내 주술에 대한 능력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가 내게 너무 큰 건을 맡겼단 생각에 무척 걱정되어 며칠간 밤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엔 속으로 생각하길, 이제껏 자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나를 이 기회를 빌어서 드디어 영영 포기하려는구나, 체념하고 말았다. 그야 내 생명줄을 쥐고 있는 것은 언제나 아돌프 그였으니까.

‘역시 살려둘 줄 알았어.’

손우경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나는 그때 관음존자의 ‘적임자’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선 아무런 눈치조차 못 채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설령 놈의 전두엽에 금고아칩이 박혀 있지 않았더라도 이 일행에 합류를 결정한 것은 아마도 손우경 자신의 의지였으리라 생각한다. 관음존자와의 자세한 과거사는 모르겠지만 그날의 그 험악했던 순간을 아주 잠깐이라도 떠올려보면, 단순히 머리에 칩 하나 박혀 있다고 해서 아돌프의 주구 노릇을 자처해줄 만큼 이 녀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나름대로 확신이 필요했는데.’

‘역시 그 자식이 나한테 널 보낸 이유는 그거 하나뿐이었나 보다.’

내 속내를 캐보려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확신이 필요했다고 말했었다. 그럼 이쪽 속셈을 다 알고 있는데도 휘둘려주겠다는 말인가. 패가 다 드러났는데도 계속 속아주겠다는 거냐고.

문득, 낮에 고양이들 사건 이후로 다시 일행 곁으로 돌아온 손우경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저녁 내도록 불편했었는데, 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졌는지가 궁금해졌다.

녀석이 입을 열었다.

“딱 이 정도 위치였던 거 같은데.”

“…….”

“네가 그런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던 게.”

녀석이 물 안으로 들어올 거란 예상을 전혀 못했었기에 손우경의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뒤늦게야 당혹감이 엄습해왔다. 손우경이 점점 다가올수록 내 몸은 석고상처럼 굳어져갔다. 마치 물 안이 늪처럼 변해 내 두 다리를 쭉쭉 빨아들이는 듯했다.

세상이 고동을 멈춘 듯 조용해진다.

서로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터라 아주 작은 움직임을 비롯해 미세한 숨소리마저 자꾸 의식하게 되었다. 일순간 손우경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떤 불길한 기운이 내 정수리를 꿰뚫고 내려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예감이 썩 좋지가 않았다. 얼른 몸을 돌려서 이 자리를 피하려던 찰나에 손우경이 내 한쪽 팔을 잡아챘다.

놈이 나의 양쪽 팔을 커다란 손아귀로 단단히 고정한 다음 고개를 바짝 기울여왔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등을 뒤쪽으로 빼봤지만 그럴수록 점점 고개를 숙여오는 손우경과 몸이 더욱 밀착될 뿐이었다. 허리가 거의 수면에 닿을 지경이 되자, 이대로 물속에 풍덩 빠지지 않으려면 지금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내 쪽에서 손우경에게 매달려야 할 판이었다.

평소 같으면 꺼지라는 말을 잘도 했을 텐데 이상하게 지금의 내 입에선 아무 말도 안 떨어졌다. 목소리가 아예 고장나버린 것 같았다.

녀석이 헐벗은 내 허리를 한쪽 손으로 받친 뒤, 남은 손으로는 턱을 아프게 틀어쥐었다.

“입 벌려.”

손우경의 등 뒤로 하얀색 달이 질식할 것처럼 거대하게 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어느덧 놈의 회색 눈동자가 잔인한 빛으로 내리떠졌다.

“너한테 후불 받아 갈 거야.”

* * *

입안을 정신없이 헤젓는 그 끈질김이 싫었다. 놈에게만 벌써 몇 번이나 억지로 열린 입술이었다. 게다가 혓바닥으로 전해지는 얼얼한 감각에 내가 자꾸만 익숙해져가는 것이 더 끔찍했다. 녀석이 얘기했던 후불의 의미가 명백히 성적인 의미라는 걸 모르지야 않았었지만, 같은 남자끼리는 이렇게 키스하는 것조차 생각해본 일이 전무했기에 모든 것이 지극히 낯설기만 했다.

손우경의 무식한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최대한 아무 반응 없이 키스를 받자 녀석이 내 허리를 꽉 졸라 안아왔다. 허리를 얼마나 세게 졸라오는지 나도 모르게 그만 이상한 신음 소리 같은 걸 놈의 입속에다 흘려 넣고 말았다.

손우경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내 입안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혀 놀림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간간이 허리로 통증을 부여해 내가 간헐적인 신음 소리를 흘리게끔 만들었다.

게다가 둘 다 허리 아래가 물에 젖어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딱 맞붙은 하반신으로 서로의 성기 윤곽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내 아랫배에 닿아 있는 그 길고 딱딱한 몽둥이 같은 감각에 그만 까무러칠 듯한 공포심을 느껴야 했다. 첫 만남부터 다 발가벗고 있었던 그 모습으로 인해, 때때로 이 녀석은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원초적인 이미지를 연상케 했다.

놈의 손바닥이 아무 주저 없이 바지 뒤쪽으로 쓱 들어와 내 한쪽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이 와중에도 아직 당황할 것이 남아 있는지 굳어졌던 내 머리에서 긴급하게 적색경보음이 켜졌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몸에서 전혀 따라주질 않았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손우경이 물에 젖어 피부에 착 달라붙어버린 내 하의를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가며 조금씩 벗겨내고 있었다.

“그, 그만둬!”

입으로 미약하게 저지해봤자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라곤 손우경을 자극해서 공연히 내 바지를 벗겨내는 손동작이 더 빨라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바지를 벗겨내는 일이 잘되지가 않았는지 손우경이 타액으로 젖어서 잔뜩 붉어진 입술로 명령했다.

“벗어.”

“……싫어.”

“네 입으로 약속했잖아.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며.”

“그땐 상황이 워낙 절박해서 급한 마음에…….”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 절박해.”

녀석이 내 손목을 붙들어 일부러 가져다댄 곳은 다름 아닌 놈의 사타구니였다. 내가 신음에 가까운 야트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뭐가 이렇게.

“너 설마하니…… 거기서 또 여의봉인지 하는 걸 키운…… 거냐?”

손우경은 그게 대체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는 얼굴로 내가 식겁할 만한 얘기를 지껄였다.

“남자로써 당연한 현상이야. 네가 온몸이 굳어가지곤 목에서 귀여운 소리를 내니까. 그리고 그건 내 명령 없인 꿈쩍도 안 한다고 했잖아.”

“……하!”

“이걸로도 너무 작아서 그래? 보기보단 욕심이 많네.”

손바닥에 닿고 있었던 놈의 흉기가 금방이라도 내 생명을 위협할 듯이 비정상적으로 발기된 상태였다. 이 정도 사이즈가 그 빌어먹을 여의봉 때문이 아니라니 절대로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저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그 단단한 생명체에서 얼른 손을 떼려고 들었지만 놈이 좀처럼 허락해주질 않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하얗게 기가 질린 내가 계속해서 반항하려 들자 손우경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억지로 벗겨져서 심한 자세로 당하고 싶지 않으면 나머진 네가 알아서 벗고 바닥에 얌전히 누워.”

내가 세차게 고개를 저어봤지만 녀석은 내 얼굴을 갉아 내릴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놈이 내 턱을 그러쥔 채 조용히 윽박질렀다.

“네 입에서 뱉었던 약속 정돈 지켜. 더 확실하게 말해줄까? 내가 그때 말했던 후불의 정확한 의미는, 네 두 다리를 좌우로 벌린 다음에 좆을 니 엉덩이에다 꽂아 넣고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허리를 흔드는 거니까.”

그 저속한 언사에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난번처럼 부처님이나 찾으면서 이 상황을 모면해볼 허튼 생각은 집어치워. 더군다나 너에게 불자 된 도리를 운운할 자격 따윈 없을 테니까.”

놈의 시선이 잠시 내 왼손으로 쏠렸다. 설마 그것까지도 다 알고 있나 싶었지만 그보단 수치심으로 인해 안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손우경의 말에 토씨 하나 반박할 입장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깨끗해야 할 승려의 신분으로도 내 두 손은 이미 씻어낼 수 없는 죄인의 것이었다. 녀석의 말이 전부 맞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차일피일 미뤄봤자 내 입으로 약속을 내뱉었던 이상, 내게는 반드시 이행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그러니 그냥 미친개한테 한 번 물린 셈 치고 밀린 빚을 깔끔하게 청산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었다. 손우경에게 붙잡혔던 턱을 손으로 탁 걷어내며 내가 입을 열었다.

“……좋아, 알았으니까 빨리 끝내.”

놈을 차갑게 노려봐준 다음 등을 돌려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여기서 더 망설였다간 결심이 다시 무너질 것 같아서 우선 간신히 골반에 걸쳐져 있던 내 바지부터 다리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런데 막상 바지를 벗고 나서 속옷 한 장만 달랑 남게 되자 다시 큰 고민에 사로잡혔다. 내 주저하는 모습을 뒤에서 전부 지켜보고 있던 손우경에게서 재촉의 뜻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하고 있어?”

“……잠깐만,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줘.”

내가 이 속옷을 벗게 되면 이제 더는 상황 자체를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아마도 손우경의 커다란 손이 나를 억세게 짓누르고서 내게 여자 역할을 강요한 다음, 자신의 남성을 내 안으로 깊숙하게 밀어 넣겠지.

그런데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꼭.

두 눈을 감고서 여러 갈래로 흐트러지려는 마음들을 완전히 하얗게 지워버렸다.

이제껏 관음존자의 종이인형으로 살아왔던 나에게 마음 따윈 필요치 않았다.

그래, 저 자식이 나한테 뭔 짓을 하든지 그냥 이렇게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돼. 아픈 걸 참아내는 일은 여태까지 자주 겪어봤잖아. 손우경도 남자니까 생리적 현상에 의해서 몸 안에 저급한 욕구가 쌓여 있을 뿐이고, 놈이 사정하기만 하면 전부 다 끝나는 일이야.

아돌프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던 그날부터 시작해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부모의 이름마저 더럽혀버린 나 같은 비겁자에게 애당초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내 몸 같은 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야.

내 몸도, 마음도, 내 것은 하나도 없는데.

갈등하는 마음이 더 비대해지기 전에 최후의 허물을 벗어 내렸다.

천천히 등을 돌리자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손우경이 집요한 시선으로 내 헐벗은 몸을 진득하게 훑어 내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녀석의 얼굴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착하네. 말도 잘 듣고.”

내 얼굴을 만지려 드는 눈치길래 근처로 다가선 손을 걷어내며 눈을 치켜떴다.

“……됐으니까 어서 시작하기나 해.”

“그 예쁜 얼굴로 성격이 참 좋기도 하지.”

정말 성격이 좋은 게 누구 쪽인지 모르겠다. 애써 허세를 부리며 센 척하고 있었지만 놈과 나신으로 마주한 순간,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리며 허리 아래로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진짜 눈치 하난 더럽게 빨라가지고, 놈은 그렇게 가까스로 서 있던 내 하반신에 다리를 걸어서 바닥에 넘어트렸다.

풀밭에 넘어진 채로 황당하게 놈을 올려다보니 별거 아니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렇게 서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너 진짜…….”

“미안, 네가 겁먹은 표정을 지으니까 잠시 괴롭히고 싶어졌어.”

손우경이 생글거리며 내 위로 자기 몸을 겹쳐왔다. 녀석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던 나를 바닥으로 등이 닿게 눕혀주었다. 그런 다음 물기 어린 내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가지런하게 쓸어 넘겨주는 등 답지 않게 다정하게 굴었다. 꼭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손동작이었다. 게다가 방금 전에 달이 지면 환상고래의 꿈속에 갇힌다고 말했었던 놈치곤 어째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손우경이 달빛을 등져서 얼굴에 음영이 진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날 내려다보는 놈의 은회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기묘하게 빛나는 것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녀석의 손끝이 자꾸 내 얼굴에 닿으려 드는 것이 왠지 두려워졌다.

“넌 피부가 너무 깨끗해서…… 내가 만지고 있으면 꼭 더럽히는 느낌이 들어.”

뺨을 건드리는 녀석의 손 너머로 팔뚝의 힘줄이 힘껏 도드라져 있었다. 갈색으로 그을린 저 상처투성이 육체는 확실히 희멀겋기만 한 내 몸과는 상반된 대비 효과마저 있었다. 놈이 자기 손을 한사코 거부하려 드는 것을 방지코자 한 손으로 내 양쪽 팔목을 머리 위로 가볍게 찍어 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은데.”

몸을 숙여 혓바닥으로 내 얼굴을 핥으며 놈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은 네 피부가 나 때문에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어.’

저 이중인격자. 평소에 오조와 파오의 앞에선 일부러 가벼워 보이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상은 이렇게 둘만 남게 될 때엔 아예 인격부터가 달라져버렸다. 얼굴로 부담스럽게 쏟아지는 놈의 시선을 감당할 도리가 없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꾹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그 바람에 손우경이 자신의 정면으로 노출된 내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며 혀로 그 안쪽을 간질여댔다. 귀를 살살 핥아 올리는 혀의 움직임에 목덜미로 소름이 돋아났다. 녀석의 입이 귀에서 다시 내 입술로 포개지려던 찰나에 나는 이를 악물다시피 으르렁거렸다.

“자꾸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네 급한 볼일이나 빨리 끝내.”

손우경이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고작 하룻밤 상대에 대한 배려치곤 지나치게 과분하긴 하지. 나도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네 구멍들마다 내 음액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구.”

과분한 배려 같은 소리 하네. 그 뒷말은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뭐 어쩌겠어. 나무토막같이 뻣뻣하게 누워 있는 초짜니까 구석구석 도끼질을 많이 해서 쓸 만한 장작으로 만들어놔야 정작 필요할 때 잘 타게 되거든.”

손우경은 쪽 소리를 내가며 내 쇄골을 야하게 빨아댔다. 기다란 손가락이 허리의 민감한 곳들을 살짝살짝 건드릴 때마다 몸이 묘한 느낌으로 달아올랐다. 손가락 끝에 무슨 깃털이라도 달렸나 싶게 얼마나 부드럽고 간지럽게 만져대는지 배 속에서부터 뭔가 황홀하게 끓어오르는 아슬아슬한 느낌이 있었다.

가슴의 작은 돌기 주위를 손우경의 혀가 둥글게 말았다. 귓가로 절척거리는 침소리가 들려왔고 혀끝이 내 연약한 곳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유두를 천천히 공들여가며 애무하는 손우경을 이성적으로는 거부하고 싶었으나 녀석의 손이 내 허리를 아찔하게 스쳐 지나갈 때마다 좀 더 어딘가를 만져줬으면 하는 강한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잡아먹을 것같이 생겨가지곤 뭘 할 듯 말 듯 미적지근하게 구는 것에 괜스레 내 애가 타들어갔다. 놈이 이미 절반 정도 서버린 내 성기를 슬쩍 내려다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짓궂게 웃었다.

“야, 너 진짜 작작 좀……!”

“할 얘기 있으면 지금 실컷 해둬.”

유륜을 송곳니로 지그시 깨물어대던 입술이 배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져가며 덧붙였다.

……앞으론 그럴 여유 없어질 테니까.

붙잡혀버린 양쪽 허벅지가 억센 손아귀의 힘에 의해 풀밭 위에서 있는 대로 벌어졌다. 이 자세가 너무 부끄러워서 뺨 언저리가 불에 댄 듯 타들어갔지만 손우경의 다음 행동에 비하면 사실상 그것은 약과였다. 처음엔 내 고환을 혀끝으로 톡톡 건드리더니 이내 한입에 물고는 쪽쪽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거세게 빨아들였다.

내 고환이 누군가의 입속에 들어가서 혀에서 굴려지고 사탕처럼 핥아지는 걸 생각해본 역사가 없었던지라 그 충격의 파장은 상당히 저돌적으로 다가왔다.

내 뿌리 끝으로 놈의 코가 닿고 있었다. 그 내밀한 부분으로 손우경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게 느껴질 때마다 창피함에 혼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녀석이 고환 껍질을 이로 살짝 깨물더니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내 성기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생식기가 작은 터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손우경은 고환을 중심으로 매우 느릿한 속도로 주변을 핥아주다가 혓바닥으로 천천히 페니스기둥을 타고 올라왔다. 혀가 귀두와 귀두 가장자리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고, 혀끝이 마치 소용돌이를 그리듯이 요도 구멍을 지분거렸다. 몸을 잔뜩 비틀며 바닥의 풀을 손으로 꽉 쥐자 녀석이 요도 끝에 짧게 키스를 하며 날 지그시 올려다봤다.

“지금 당장 어딘가에 넣고 싶어질 정도로 네 애가 바짝 탈 거야.”

아래턱이 덜덜 떨려왔다. 양옆으로 사정없이 벌어진 다리로 내 성기가 보기 흉하게 발딱 발기해 있는 모습을 그저 외면하고만 싶었다.

“이 반응으로 보건대 넌 아마 여자는커녕 남자와는 해본 적도 없을 테니까 그 쾌감이 어떤 건지 잘 모를 거야. 그 좁아터진 구멍에다가 좆을 세워 밀어 넣고서 한참 동안 흔들고 나면 굉장히 기분이 좋거든.”

“너, 너 말고 이런 짓을 누가…….”

차마 말을 못 잇는 내가 무척이나 귀엽다는 듯이 놈은 내 성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쳐가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근데 그거 알아?”

손가락이 회음부를 매만지며 조금씩 밑으로 내려갔다.

“처음부터 뒤쪽으로 길을 잘 들여놓으면 나중엔 박는 것보다 박히는 쪽을 더 선호하게 되지.”

내 기분 탓인지 꼭 선전 포고 같은 말로 들려왔다.

항문을 더듬는 긴 손가락이 장난을 치듯 내 구멍 주위를 꾹꾹 눌러가며 자극을 주었다. 그러더니 녀석의 중지가 결국엔 쿠욱 하고 내 항문을 꿰뚫었다. 방금까지 들뜨는 듯했던 몸의 느낌에 비해서 기분이 너무 이상해졌다.

손가락이 절반가량 들어와서 안을 살짝 휘저어댔는데 녀석이 자신이 들어갈 공간을 가늠하는 듯해 보였다. 졸지에 낯선 것을 받아들인 내 항문 근육이 자꾸만 움찔거리자 손우경의 눈빛 또한 점차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놈이 갑자기 손가락을 빼내더니 내 한쪽 팔을 붙잡아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내 얼굴에 고개를 들이밀고서 말했다.

“넌 뭐 그렇게 생겼냐.”

“…….”

“불알 모양도 예쁘고 좆이 정직하게 발기하는 것도 진짜 미치겠는데.”

“…….”

“어떻게 밑구멍 감도까지 좋아.”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손우경이 나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키스하는 도중에 스스로 지퍼를 내려서 불쑥 꺼내 든 놈의 물건이 내 엉덩이 사이를 쿡쿡 찔러왔다. 손우경은 양손으로 내 엉덩이를 잡아 쥐고 음란하게 주물럭거리다가 항문을 손가락으로 정성껏 문질러주더니 이내 양 옆으로 쫙 벌렸다.

눈으로 직접 보진 않았지만 활짝 벌어진 구멍으로 놈의 귀두가 진입하기 위해 그 주변을 빙빙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항문 부위를 잠깐 스치고 지나가버린 그 경악스러운 사이즈에 나는 순간적으로 두 눈앞이 캄캄해지며 오금이 저려왔다. 저런 게 진짜 어떻게…….

손우경이 귀에다가 속삭였다.

‘네 거기가 축축해질 때까지 핥아줄까 했었는데 내가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네 구멍이 아직은 너무 작아서 입구에 맞게 조금 줄였다가 다시 원래대로 키워줄게.’

흥분에 젖은 놈의 숨소리가 너무 야했다.

‘내장까지 빈틈없이 채워서 너랑 완전하게 연결된 다음에 본격적으로 귀여워해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놈이 엉덩짝을 양손에 각각 부여쥐고서 마치 잡아 뜯을 것처럼 마구 벌려대며 한계까지 쩍 늘어난 내 구멍으로 자신의 여의봉을 스윽 밀어 넣었다. 방금 전 자기 입으로 크기를 조금 줄여준다고 말한 것치곤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너무 아픈 나머지 비명 같은 신음성을 토해내며 내가 황급하게 소리쳤다.

“아, 아파! 아프다구!”

손우경이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달래듯이 뺨을 부드럽게 매만져주며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널 위해서 노력해봤는데 내 원래 사이즈보다 더 작아지진 않나 봐.”

놈이 내 팔을 억지로 자기 목에 두르게 만들고는 나를 다시 눕힌 다음, 자신은 두 손바닥으로 바닥에 몸을 지탱한 채 말했다.

“아프면 꽉 매달려서 다리를 좀 더 벌려봐. 네가 지레 겁을 먹고서 계속 가랑이를 오므리려고 드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사이, 놈과 나의 벌어져 있던 배 부위의 공간으로 내 입구에 살짝 꽂혀 있던 놈의 성기가 더 길게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지, 징그러워, 이 괴물아!”

“방금 이건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냐. 존슨은 내가 흥분하기 시작하면 자기도 순간적으로 길이가 쭉쭉 늘어난다고.”

“그, 그럼 흥분하지 않으면 될 것 아냐!”

손우경이 정색하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무리야.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래?”

한번 입구가 터져버린 구멍으로 마치 뱀이 움직이듯 꾸물꾸물 늘어나며 점점 내장 안으로 들어차지는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손우경에게 이따위로 후불을 지불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서 마치 파충류과 동물에게 범해지는 듯한 더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밑이 찢어지는 고통에도 행여나 놈 앞에서 울음이라도 터트리는 만행을 저지를까 봐서 이를 악물고 힘들게 버텨봤지만 아픈 건 너무 아픈 거였다.

“아, 아앗!”

정말 내장 안이 손우경의 거대한 페니스로 완전히 들어차버렸다. 누군가 긴 막대기를 내 안에 강제로 쑤셔 넣은 것 같아져서 몸을 떨거나 입술을 바르작대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손우경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내 몸을 붙잡고는, 자신의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성기를 조금씩 줄여주더니 이윽고 자기 사타구니와 내 엉덩이가 딱 맞닿을 정도까지 페니스 길이를 재조정했다.

“근데 하다 보면 다시 늘어날 수도 있어.”

녀석이 입도 다물지 못하는 날 안아 들어서 자기 무릎에 앉히고는 얼굴에 다정하게 키스해주었다. 바닥에 누워 있을 때보다 위에서 아래로 꿀꺽 삼켜버린 손우경의 성기가 내 배 속에서 훨씬 더 묵직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놈이 내 허리를 붙잡아서 하반신을 천천히 움직여대다가 조금씩 그 속도를 빨리했는데, 그때마다 내 엉덩이가 놈의 고환을 철퍽철퍽 튕기고서 올라갔다. 짙고 까칠한 손우경의 음모가 아래쪽의 연약한 살결을 따갑게 찔러댔다.

환상고래의 꿈에 갇혀버린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남자인 내가 동성인 손우경과 이런 식으로 몸을 섞고 있다는 현실이 진짜로 꿈인 것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녀석은 노출된 아랫도리 일부를 제외하곤 아직까진 옷을 전부 입고 있었으나 나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벌거벗은 맨몸이었다. 그런 내가 놈의 무릎에 앉아서 손우경의 팔 힘에 의해 몸을 위아래로 마구 들썩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자세를 바꾸고 싶은데 네가 예뻐서 놓지를 못하겠다.”

더 이상 못 참겠다고 말했으면서 내가 가쁜 숨을 토해낼 때마다 틈틈이 입을 맞춰가며 결코 서두르질 않았다. 나를 꼭 껴안은 채로 상반신을 맞대고서 거의 밑을 부벼대기만 하는 수준이었으나 머지않아 내 몸 어딘가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끓어올랐다.

아프기만 하던 엉덩이 부분이 점차 손우경의 좆 모양과 움직임에 익숙해져가는지 나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면서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 무의식적인 행동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문득 손우경이 의구심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 진짜 처음인 거 맞냐.”

놈이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슬며시 조소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스님 생활을 했어.”

손우경이 내 몸을 자기에게서 떼어내며 내장 안에 처박혀 있던 성기를 함께 빼내었다. 홀가분하기보다는 안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는 내 얼굴에 놈이 자기 사타구니를 들이대며 뭔가를 종용해왔다.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손우경의 생식기가 내 얼굴 근처로 다가왔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버릴 틈도 없이 완전 막무가내로 코까지 닿고 말았다.

“싫어…….”

내가 정색했지만 손우경은 듣질 않았다. 잘 대해주는 척해도 결국엔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그 직성이 풀리는 놈이었다.

“내 좆 냄새 깊숙하게 맡아봐.”

콧구멍으로 두꺼운 힘줄이 솟아 있는 그 갈색 기둥의 진한 냄새가 들어왔다. 이런 이상한 냄새는 처음 맡아봤지만 뭔가 색정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향이었다.

“어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이미 잔뜩 붉어져버린 내 얼굴색이 그 답변을 대신했다. 게다가 놈의 불알과 사방으로 무성하게 자라 있는 털이 입술 부근을 건드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더 야릇하던 차였다.

“한번 빨아볼래?”

입에 담았다간 자칫 턱뼈가 어긋날 것 같은 크기였다. 하물며 총 사이즈가 내 얼굴보다도 훨씬 더 길었다. 저게 방금 전까지 어떻게 내 거기에 들어가 있었지. 녀석이 내 멍해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조금 고민하는 눈빛을 하더니 이내 픽 웃으며 얘기했다.

“뭐 오늘은 일단 됐어. 나중에 차차 이것저것 시켜보면 되니까.”

등이 바닥으로 닿아 있었던 몸이 녀석에게 힘 좋게 들려서 아예 거꾸로 뒤집혀버렸다. 손우경이 배를 깔고서 엎어져 있는 내 등으로 자기 몸을 겹쳐왔다. 놈이 나의 엉덩이를 위쪽으로 들어 올려 내 무릎을 굽혀 세우고는 다리 사이를 넓게 벌렸다. 이미 한번 늘어났다가 오므라든 구멍이 다시 강제적인 힘에 의해 단숨에 꿰뚫리는 것이 등줄기를 타고서 머리까지 찌르르 전해졌다. 손우경이 또 삽입한 것이다.

녀석은 이번에는 전혀 봐주지 않고 초장부터 허리를 빠르게 움직여댔다. 큼직한 불알이 철렁거리며 내 회음부를 마구 때려댔다. 불에 달군 듯한 놈의 페니스가 퍽퍽 내장에 부딪쳐올 때마다 입에서 낯 뜨거운 소리가 작렬했다.

“하, 아악, 아읏, 앗!”

손우경이 내 아랫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음흉하게 속삭여왔다.

“흥분해서 또 저절로 늘어나고 있는데 여기 어딘가에서 내 거 움직이는 게 느껴져?”

아닌 게 아니라 내장 안이 짓이겨져서 큰 구멍이라도 뚫릴 것처럼 놈의 여의봉이 한없이 폭주하고 있었다.

“아읏, 아파아!”

“너 아픈 것치고는 지금 허리 엄청 흔들어대는 거 알기나 하냐.”

“아,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내 몸이 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 항문의 감각조차 사라질 만큼 거대한 손우경의 성기를 뒤로 꽂고서 놈의 움직임에 따라 여자처럼 교성을 내지르고 있다니. 이런 아픔을 동반하는 관계 속에서도 나는 아무런 위화감 없이 손우경을 전부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가 내 배 속으로 불씨라도 던져놓은 것같이 전신이 뜨거웠다.

놈이 더 속력을 내며 허리를 놀렸다. 얼마나 거칠게 쳐올리는지 한 번씩 퍽퍽 밀어닥칠 때마다 내 귀두 끝에서 하얀 액이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녀석의 성기가 안쪽의 깊은 곳을 미끄덩하게 스쳐 지나가자 내장 전체가 마치 성감대라도 되듯이 민감해진 반응을 보였다. 뭔가가 이상했다. 손우경의 페니스가 지금 내 안에서 움직이는 게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런 손우경에게서 즉각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너 지금 좋아서 죽을 것 같지?”

“하읏, 그만, 아으윽!”

“내 존슨에는 꽤나 신성한 기운이 깃들어 있어서, 주인의 의지에 따라서 여의봉과 접촉하는 타인에게도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거든. 하아, 그래서 지금 내 좆이 닿는 부분마다 너도 나하고 똑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손우경이 지금 이러한 기분을 느끼고 있단 말인가. 나는 배 속 안이 뭉개지는 감각이 너무 좋아서 정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입에서 침까지 질질 흘려대며 엉덩이를 더 높게 쳐들었다. 손우경이 속도에 박차를 가하며 미친 듯이 박아 넣었다.

“씹, 이 개자식, 이딴 음란한 몸으로, 처음이라니.”

놈은 살짝 힘에 부치는지 말까지 뚝뚝 끊어가면서 나에게 욕설 섞인 언사를 퍼부었다. 꽉 채운 내장 안을 더 세게 비벼주고 뒤에서 더 강하게 움직여줘. 하나뿐인 자존심도 버리고서 손우경에게 그런 말을 꺼내고 싶을 만큼, 나는 현재 정신 상태가 상당히 온전치 못했다.

허리를 꽉 붙잡고서 손우경이 더욱 격렬하게 삽입했다. 허릿심이 너무 좋아서인지 한 번씩 깊게 들어올 때마다 내 몸이 제멋대로 쓸려나가자, 나를 뒤에서 완전히 덮쳐서 껴안은 다음 다시 끈질기게 박아대기 시작했다.

방금 전 여의봉과 관련한 손우경의 말이 진짜 사실이라면 지금 내 분출 직전인 페니스로 짐작하건대 놈도 거의 사정에 육박해 있을 것이었다.

“!”

눈앞이 하얗다 못해 어질어질했다. 투둑 하면서 귀두 끝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하얀 액체가 몸 안에서 전부 빠져나오자마자, 연이어 뒤쪽으로 따뜻한 기운이 용솟음치며 놈이 내 배 속에다가 엄청난 양의 정액을 고스란히 방사해냈다. 손우경의 목에서도 기분 좋은 신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사정 후의 나른함으로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놈도 마찬가지인지 한참이나 나를 껴안고 가만히 있었다. 달빛에 드리워진, 내 몸을 완벽히 뒤덮은 그림자로 인해 새삼스럽게도 손우경의 어깨가 참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이 녀석과 짐승처럼 헐떡거리며 몸을 섞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비정한 현실감과 함께 찾아든다.

그때 손우경이 내 젖을 살짝 꼬집으며 귓가에서 웃음을 삼켰다.

“후불에 이자까지 붙여줄 준 몰랐는데 내 기대 이상이었어.”

졸려서 노곤하게 가물어진 눈이었으나 녀석을 노려보기 위해 고개를 틀었더니 녀석이 얼굴을 숙여 내게 입을 맞춰왔다. 하도 자연스럽게 입을 가져다 대서 얼결에 헤 하고 입을 벌려주고 말았는데 손우경은 키스를 꽤 달콤하게 했다.

아직 엉덩이 안에서 성기를 빼내지 않았던 터라 키스를 이어가던 손우경이 내 몸을 그 상태로 자기와 마주 보게 돌린 다음, 품에 안고서 내 입안을 본격적으로 조사했다.

놈과의 그 겸연쩍은 행위가 정말 오랫동안 이어졌던 것 같다.

길게 이어지던 키스를 마치고 입술을 떼어내자 숨을 잘 쉬지 못해 산소가 한없이 부족해진 머리가 몸을 완전히 축 늘어지게 했다. 놈이 그런 나를 지그시 내려다본다. 하늘에 뜬 달보다 더 신비하게 빛나는 저 은회색 눈동자. 대체 어디와의 혼혈일까. 손우경의 눈을 쳐다보고 있다가 또 녀석의 눈썹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도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손을 뻗어서 놈의 눈썹을 살짝 만져보았다. 내 뜬금없는 행동에 녀석마저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손우경은 자기 눈썹에 닿은 내 손을 붙잡아서 손등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얘기했다.

“착하게 구니까 좀 더 기분 좋게 해줄게.”

나는 생각했다. 이 이상 어떻게 더 기분이 좋아질 수 있지?

거부하려 했으나 억지로 끌려와서 괴상한 자세로 세 번 정도 더 당하고 말았다.

가랑이에 말라붙은 정액들이 놈이 피스톤질을 할 때마다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을 정도로 한층 강도가 높아진 섹스였다. 배 속에 가득 찬 놈의 정액을 빼내기 위해서, 손우경이 나를 물가로 데려가 오아시스 가장자리에 팔을 기댄 채 몸을 숙이게 만들고서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게 했다.

후불 다 받아먹었으면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더럭 짜증을 내봤지만, 손우경은 능청스럽게도 배 속에 여의봉의 신성한 기운을 담은 남자 정액을 품고 있으면 아마 열 달 이내로 네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틀지도 모른다며 구라성 짙은 협박을 했다. 그 바람에 잠자코 놈이 시키는 대로 했다. 솔직히 왠지 그럴 거 같아서 진짜로 무서웠다.

하반신에 힘을 주는 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나오는 정액을 손우경이 뒤에서 지켜보다가 손가락을 항문에 넣고 안을 쓱쓱 긁어냈다. 이런 자세로 엎드려 있는데다 놈과의 정사로 항문이 얼마나 심하게 늘어났는지, 손가락을 네 개나 밀어 넣었는데도 엉덩이가 휑하게 뚫린 여유 공간이 느껴졌다. 녀석은 주먹을 넣어도 지장이 없을 만큼 구멍이 뻥 뚫렸다고 허풍을 쳤지만 적어도 네놈의 무식하게 큰 주먹은 아닐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가뜩이나 체력과는 담을 쌓은 나는 그야말로 방전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안에서 정액을 거의 다 긁어낸 손우경이 내 몸을 제멋대로 씻겨주는 것도 반항하지 못한 채 그냥 멍하게만 있었다.

손우경은 그런 내 표정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울 줄 알았는데 의외네.”

대꾸할 기운도 없고 할 말도 없었다. 나도 의외니까.

“넌 잘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울지도 않으니 가끔 보면 꼭 인형 같아.”

인형이라. 언제나 느끼지만 손우경은 참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물끄러미 놈을 쳐다보는 내 시선을 손우경도 말없이 응시하다가 뭔가 말을 꺼내려 들었다.

“표정이 왜…….”

내 표정이 뭐. 왜 말을 하다가 그만두지. 그리고 네 표정은 갑자기 또 왜 그러는 건데.

이윽고 손우경 역시 무표정하게 굳어진 얼굴로 내게 으름장을 놓듯이 이야기했다.

“그래도 상관없어. 내 인형 하면 되니까.”

“…….”

하늘에서 달빛이 푸르스름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고래의 꿈으로부터 빠져나올 시간이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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