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생이란 때론 비겁하게 살 줄도 알아야 하는 법
하나같이 나쁜 기억들로만 점철됐던 쿠르게오르 사막을 지나 우리는 드디어 무사히 국경 검문소에 다다랐다. 근데 ‘무사히’라는 말은 어폐가 좀 심한 것 같다. 사실 그간의 여정을 자세히 돌이켜보자면 매일 길에서 한뎃잠을 자서 그렇지 진정으로 위험했던 순간들은 거의 없었으니까 말이다.
뭐 고양이와 생선, 그리고 벌레에 대해 안 좋은 추억은 생겼지만, 따지고 보면 가엾게도 우리하고 마주치게 되었던 적들이(?) 위험했으면 했지, 그동안 겪은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라 봤자 바로 오조가 불러낸 그 무지막지한 골렘 녀석뿐이었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검문소 방문은 기대했던 것만큼이나 엄청난 실망을 낳았다. 넷 다 손에 차고 있던 신분 인증석이 그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증 기계에서 전혀 작동을 하지 않은 채 완전히 먹통이었던 것이다. 검문소 직원은 상부로부터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면서 우리를 무슨 사기꾼 취급하며 밖으로 내쫓았다.
오조가 검문소 밖으로 떠밀려 나오더니 눈을 길게 찢었다. 잠시 후 녀석은 상당히 쿨한 얼굴로 검문소 건물 주변을 통째로 에워싸는 방대한 크기의 소환진을 그렸다. 그렇게 오조의 소환진이 완성됨과 동시에 사방으로 순식간에 어두운 빛이 뿜어 나왔다. 그 암흑과 함께 이번엔 건물 아래에서 무시무시하게 생긴 광대한 주둥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검문소를 한입에 집어삼키더니 다시 땅속으로 스윽 사라져버렸다.
새끼 여우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사람은 언제가 됐든 한 번씩은 다 죽는 거지.”
나는 앞으로 오조에게는 더욱 잘해주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렇게 다들 전의를 상실한 채 다시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일반인 통제 구역인 이곳 사무타 지역은 반세기 전 대종말 시기에 처음으로 대규모 균열이 발생했던 지점이었기에 아직도 허공 곳곳에는 일그러진 부분들이 많았다.
무간도.
그것은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 가운데 가장 낮은 층에 위치한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달리 부르는 말이었다. 그곳은 죄를 짓고 지옥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게 되는 장소였는데, 그 괴로움이 아주 잠시도 멈추지 않고 간극 없이 행해지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고 불리었다.
서쪽의 로고스-룸버린 연합 지역에서는 이 무간도를 어비스Abyss라고 불렀는데, 그쪽의 명칭 역시도 그 뜻 자체가 심연, 즉 깊은 구렁텅이를 일컫는 말로 우리와도 거의 비슷한 시각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무간도는 대종말 이후로는 그 어떤 이들도 제대로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는 미지의 공간임에도, 다들 어떻게 알고서 그 지역을 그런 경각심 어린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일까.
이번 결정에 여전히 퉁명스럽게 반응하는 파오를 제외하고는, 손우경이나 오조는 소문은 원래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점 살이 붙어 부풀려진다는 것에다 더 큰 가능성을 두고 있었다.
어쨌든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명백하게 밝혀졌다.
여기 사무타 자체가 통제 구역이다 보니 전혀 관리되지 않은 도로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벌써 만 열흘 가까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험준한 비포장도로를 힘들게 걸어와 겨우 오늘에서야 간신히 도착한 실정이었다. 마침내 무간도 지점에 도착하게 된 우리의 눈앞에서 그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모범 답안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사막의 거대벌레들과 마주친 이후로 두 번째로 받는 충격이었다.
아니, 그런 것들과는 아예 상대가 안 되는 스케일이었다.
우리 네 명 중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다.
상하좌우 그 어디로든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저 균열은, 마치 누가 거대한 칼로 허공을 찢어놔서 하늘에 길게 흉터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균열 안에서는 붉은색이 섞인 어두운 소용돌이가 아주 빠른 속도로 광폭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심지어 내 시야가 닿는 곳마다 존재하는 그 균열의 소용돌이는 마치 이 세상 종말의 끝을 알리기라도 하듯 어마어마한 크기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내가 이날 이때껏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그 어떤 것들조차, 단연코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장면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심연, 지옥, 구렁텅이…… 그런 말로도 부족했다.
이것은 혼돈 그 자체였다.
파오가 균열 안으로 작은 돌멩이 하나를 힘껏 주워 던졌다. 잠시 후, 완전히 분쇄가 된 돌가루들이 파드드득 튀어나온다. 만약 사람이 저길 통과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눈앞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녀석은 우리를 돌아보며 일부러 허리에 양손까지 얹고는 잔뜩 거만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 니들이 그렇게 가고 싶다던 무간도에 도착했는데 그럼 누가 제일 먼저 다진 고기에 지원해볼래?”
내가 눈으로 지원했다. 너요.
무간도의 균열에서 떨어져 나와 심리적으로 안정되는 장소를 찾기까지는 약 반나절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어느새 우리의 전용 모닥불로 전락해버린 불의 정령 살라만더가 내가 자기 몸에다가 나뭇가지에 몸통을 끼운 도마뱀 꼬치를 굽는 것을 사뭇 불쾌한 눈으로 쳐다봤다.
사실 우리 중에 유일한 식욕이 있었던 것은 오직 오조뿐이었으나(저 녀석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상황에서 굳이 끼니를 챙겨 먹으려 들었겠는가) 나는 소환진의 괴수에게 꿀꺽 잡아먹혔던 어느 검문소 직원의 말로를 떠올리며 시치미를 뗀 채 살라만더의 배 속으로 꼬치를 들이밀었다.
오조가 양손에 아직 덜 구워진 도마뱀 꼬치를 쥐고 게걸스럽게 처먹는 동안, 파오와 손우경은 사후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파오가 입을 열었다.
“이래도 무간도를 통해 서쪽으로 가는 걸 고집할 거냐?”
손우경이 고개를 저으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흠, 대체 어느 미친놈이 이런 델 다 오자고 했어?”
나는 또 눈으로 말해주었다. 그건 미친놈인 너하고.
그때 오조가 도마뱀 대가리를 냠냠 뜯어 먹다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우리 그냥 자히르나 방향으로 방어벽 뚫으러 갈까? 나 예전에 그곳 수문장 출신이라서 거기 지리도 되게 잘 아는데.”
그리고 저 입만 산 놈이요.
게다가 진짜 어떤 멍청한 새끼가 이런 곳에 가자는 말에 단 한 번도 반대를 안 했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적어도 나는 아닐 것이다. 어부지리로 이번 일의 임시 주도권을 쥐게 된 파오가 긴급 찬반 투표를 시행했다.
“그럼 이쯤에서 슬슬 결론을 내자. 당초 계획대로 일단 무간도에 남아서 서쪽으로 가는 루트를 좀 더 찾아보고 싶은 사람은 찬성의 의미로 왼손을 들고, 그 의견 자체에 무조건 반대라서 내일부터 아예 다른 루트를 알아보고 싶은 사람은 자기 오른손을 들어줘.”
오조가 자기 양손을 두리번거리다가 허겁지겁 물어봤다.
“자, 잠깐만. 오른쪽 손이 대체 어느 쪽 손이야?”
손우경이 대답해주었다.
“밥 먹는 손.”
“난 양손으로 다 먹는데.”
“그럼 넌 일단 오른손이라고 쳐둘게. 그 도마뱀 뒷다리나 마저 먹어라.”
파오가 최종 선고를 내렸다.
“하나, 둘, 셋 하면 손을 드는 거다?”
내 결심은 이미 확고했다. 때로는 일보의 후퇴가 십보의 전진을 가져다주는 법이니까.
그렇게 파오가 하나를 세기도 전에 만장일치의 결과가 나왔다.
전원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