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여우를 피하려다 범을 만난다 (9/24)

6. 여우를 피하려다 범을 만난다

무간도를 끼고 있던 사무타 지역에서 서둘러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현재 몇 가지 난관에 부딪힌 상태였다. 첫 번째는 이제 와서 방향을 틀자니 다시 사막지대로 돌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시 사막지대로 돌아가서 새로운 루트를 모색하기엔 우리가 여태까지 허비한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 자체였다(애초에 무간도를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면 장장 몇 주에 걸쳐 쿠르게오르 사막을 횡단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다).

세 번째는 그렇다고 이제와 더 나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바로 길잡이 역할을 맡은 오조의 몸 상태가 우리가 무간도에 들렀던 때를 기점으로 해서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도 남들이 자나 깨나 잠만 퍼 자는 놈이긴 했는데 요새는 그 좋아하는 밥도 잘 먹지 않고 뭉글이 위에만 내도록 업혀 있었다. 게다가 오조의 서비터들은 열까지 맞춰서 뭉글이 주변을 서성이며 밤낮으로 제 주인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파오의 말에 의하면 그날 무간도의 균열에서는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력을 강하게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허약한 체력과 비실이의 대명사였던 나치곤 지금 왜 이렇게 멀쩡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면 최근엔 잠도 잘 오고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일마저도 드물었다. 내가 대체 언제부터 그랬더라. 그야 이번 일은 꽤 장기간의 여행이 될지도 모르니 서쪽으로 출발하기 전, 관음존자에게 넉넉하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생생한 컨디션은 진짜로 말이 안 되는데.

그때 나와 조금 떨어져 있던 손우경의 모습을 본 순간,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버렸다.

아무래도 환상고래의 꿈 안에서 손우경과 관계했던 다음 날부터 계속해서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강도 높은 섹스를 하고도 어디 하나 아픈 구석조차 없었는데…… 에이 설마, 내 착각이겠지.

손우경은 그날 몸을 섞은 이후로는 생각보다 지저분하게 굴지 않았다. 그 핑계를 대면서 내게 더 질척하게 굴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 평소처럼 파오와 시답잖은 얘기나 주고받으며 나한테는 장난 한 번 치려고 들지 않았다. 놈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에 나도 별 내색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손우경이 파오에게 뭔가 말을 꺼내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때마침 녀석을 바라보고 있던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눈이 잠깐 마주쳤을 뿐인데도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냥 모르는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사실 내가 봐도 어색하게 눈을 피했지만, 손우경은 티를 내지 않고 파오에게 말을 걸었다.

“파오 사형, 우선 남단으로 계속 움직여보는 게 어때? 내 예전 기억이긴 해도 저 아래쪽으로 굉장히 큰 항구 도시가 있었으니까 거기서 서쪽으로 가는 배를 한번 구해보자. 자히르나 방어벽은 오조 녀석의 지금 상태로 봐선 우리 셋만으로는 그 많은 마법사들을 돌파하기에는 어림도 없고.”

“남쪽에 있는 항구 도시라면 그 정신 나간 이교도들이 사는 곳 아냐?”

“그래도 아돌프 자식이 개판 쳐놓은 환영제야단의 불교 교리에 비하면 아마 그쪽 애들이 훨씬 더 양호할걸.”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손우경과 파오는 정상적으로 이어지던 대화를 채 몇 마디 못 넘기고서, 또 내가 잘났고 너는 못났어를 주장하며 누가 봐도 젖비린내 풀풀 나는 말싸움을 시작했다. 성 취향이 음과 양, 정반대로 확 갈리는 것만 빼면 놈들은 둘 다 비슷한 성격에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변태들이었지만, 또 죽이 잘 맞을 땐 손발이 짝짝 맞다가도 간혹 수가 틀리면 호랑이와 사자처럼 으르렁대는 관계이기도 했다.

“야, 웃기지 마! 난 이미 여덟 살 때부터 개안을 한 남자라고!”

“미친 소리. 그 나이면 입문도 안 했을 텐데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개안이야.”

“니가 봤냐? 그때의 난 몸과 마음이 너무 조숙했던 놈이라서 세상의 이치에 관해 무한한 탐구심을 가졌었다구!”

“여자 몸에 대한 엉큼한 탐구심이겠지.”

“그러는 넌 남자 몸에 음험한 탐구심을 가졌겠다?”

“아, 닥쳐!”

지금 쟤네들이 싸우고 있는 이유는, 바로 손우경이 먼저 개안開眼 얘길 꺼내면서 파오의 강한 승부욕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개안, 즉 이마에 위치한 인당혈에는 ‘제3의 눈’이라고 불리는 영안靈眼이 열리는 고유한 자리가 있는데, 만일 이것이 열리게 될 시엔 귀신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영적인 세계와도 직결된다. 이에 따른 긍정적인 효과로는 일반인에 비해 초월적인 시각을 갖게 되어 선견지명을 가질 수가 있었고, 또한 스스로의 잠재 능력을 무한하게 각성시킬 수도 있었다.

불상이나 불화에서 부처님 이마에 찍혀 있는 작은 점을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 또는 모든 사물을 꿰뚫어보는 신통안이라고도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제3의 눈을 가리켰다.

우리 같은 수행자들은 이 제3의 눈을 얻기 위해서 몹시 피나는 수련을 했는데, 개개인에 따라서 개안되는 시기 자체가 아예 달랐으며 설령 개안이 되었다고 한들 그 수준 또한 천차만별이었다(영안을 얻게 되는 가장 초기 증상으로는, 인체에서 나오는 고유한 아우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인데 난 아직 그 단계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봤을 때 아마 쟤네들이 개안했다는 수준은 그저 영적인 존재를 보거나 아니면 기의 흐름을 읽어내는 정도일 것이었다. 딱히 내 배알이 꼬인다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일찌감치 개안이 트였다면 저리도 수준 낮은 놈들이라고는 절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전, 손우경이 관음존자가 개판을 쳐놨다는 종단의 불교 교리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었는데 그건 전적으로 다 맞는 말이었다. 사실 원래 불교에서는 선정, 즉 도를 닦는 수행 중에 신통력을 얻게 되는 일들을 일체 금지하고 있었다.

정신 집중을 통해 진리를 찾는 수행자가 선정에 몹시 깊어지면 주변에서 불가사의하고 신통한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이걸 보통 불교에서는 ‘마장이 낀다’고도 표현했다. 대부분 마장이 낀 인간은 호기심과 유혹을 견뎌내지 못하고 신통력을 선택하는데, 그렇게 되면 깨달음이고 뭐고 간에 나무아미타불에서 전부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환영제야단의 불교 체제는 본래의 목적인 ‘깨달음’을 진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마장을 통한 그 신통력을 얻기 위해 아주 피나는 수행들을 하고 있으니 말 다 했다.

난 근데 인생을 너무 바르고 선량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그 마장이란 게 잘 안 끼더라고. 그러니까 내 신통력이 남들에 비해 후진 건 나의 마음이 불심으로 가득 찬 부처님밖에 모르는 바보…… 아, 됐다. 구차하니까 그만하자.

* * *

서쪽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인 무간도를 포기하고서 엉뚱하게도 남쪽으로 다시 방향을 틀게 된 우리 일행들은, 그간 길잡이 역할을 해주던 오조의 부재(수면 중)로 인해 지금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자는 오조의 몸을 붙잡고서 목을 짤래짤래 흔들어보며 암만 별짓을 다 해봐도 애가 진짜 죽은 것처럼 잠만 퍼 자는지라 지금으로선 제대로 된 방향을 잡는 일조차 너무 막연해졌다.

파오가 정 안 되면 자신의 주먹이라도 써서 애를 깨워보자고 나섰지만 그 말을 들은 뭉글이가 파오가 다가올 때마다 몸통에서 고약한 악취가 나는 뾰족한 가시들을 내세우며 아예 접근 자체를 차단했다. 저 녀석은 아무래도 사람이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듣는 것 같았다.

전 대륙의 삼분의 이에 걸쳐 환영제야단의 불교가 퍼져 있고 그 위세 또한 막강했지만, 무간도를 비롯해 동과 서를 갈라놓는 이 사무타 중간 지대는 최근까지도 치열하게 땅따먹기 중인 양쪽 진영 어느 곳에서도 서로 관리하려 들지 않는 완벽히 버려진 땅이었다.

이곳은 앞서 건너왔던 쿠르게오르 사막에서처럼 기이한 환상이 벌어지거나 자연의 흐름을 역행하는 괴상한 생물들이 살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반대로 생명의 흔적이 거의 없는 삭막한 지역이다 보니 그 끝없는 지루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새끼 여우는 잠만 자고 파오는 여자 결핍증으로 하루하루 말라가며(지 말론 오랫동안 좆에 기름칠을 하지 않았더니 자지에 녹이 슬어서 잘 움직일 수가 없단다. 별……) 손우경은 정말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한테 한 번도 말을 걸거나 아무런 행동조차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상 이상으로 하늘에서 폭우와 우박이 마구 쏟아져 그만 움직여야 할 방향을 잃고 말았다. 그로 인해 손우경과 파오는 과연 어느 쪽이 남쪽일지를 서로 주장하며 갑론을박 시끌벅적한 논쟁을 벌였다(심지어 이번에는 세 살 적부터 천리 밖을 내다보는 천리안이 있었다며 싸워대는데, 아마 조금 있으면 엄마 배 속이나 정자 시절의 얘기까지 나올 듯했다).

두 녀석이 아무 영양가 없는 싸움을 하며 티격태격하는 동안, 뭉글이 위에서 자고 있던 오조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조가 마치 부활하듯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어느 방향을 자기 지팡이로 쓰윽 가리키며 놈들에게 말했다.

“……니네 둘 다 틀렸어. 저기가 바로 남쪽이야.”

순간적이나마 눈이 휘둥그레진 파오와 손우경을 놔두고서 자기 할 말을 마친 오조가 다시 뭉글이 위로 푹 쓰러져 눈을 감았다. 내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놈의 멱살을 붙잡고서 제발 좀 일어나달라고 수차례 애원해봤지만, 오조는 이미 행복한 얼굴로 잠들어 꿈속에서 뭐라도 처먹는지 음냐음냐 쩝쩝 하면서 코까지 드르렁 골아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사무타의 회색 하늘은 우리 머리 위로 우박 세례를 퍼붓다가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잠잠해졌다. 다음 목적지인 남단의 항구 도시 아부-게르다까지는 어쩌면 몇 달 이상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정말 이러다가 그 에메랄드 태블릿의 수호자이자 아틀란티스의 병기라는 놈이 완전히 깨어나서 전 세계가 폭삭 멸망해버리는 건 아닐지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나도 여태껏 잊고 있었고, 일행들 중 그 아무도 신경조차 안 쓰는 눈치였지만 우리가 지금 이 생고생을 해가며 서쪽으로 가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바로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 세계 평화라는 어감이 살짝 낯설긴 하지만, 정말로 그러했다.

근데 왜 하필 이런 놈들이랑 세계 평화를 지켜야 하는지도 어이가 없고, 그것도 작금의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트리고 있는 아돌프가 내린 명령이라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기만 했다.

아, 나도 모르겠다. 이번 일을 무사히 해결할 수만 있다면 참 다행이겠지만, 만일 실패해도 어차피 다 같이 죽는 거니까 별로 억울하진 않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오조가 알려준 방향대로 계속해서 내려가다 보니 이제는 웬 철조망들까지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 철조망들은 높이 자체도 상당했지만 대략 수십만 킬로 이상은 너끈하게 둘러져 있는 터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비상 대책을 강구해보기로 했다. 철조망을 넘는 일은 그리 문제가 될 소지가 없었지만, 그 울타리 너머의 풍경이 척 보기에도 꽤나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런 막대한 반경을 모두 철망으로 둘러놓을 정도면 대체 그 이유가 뭐였는지도 일단 신중하게 고려해봐야 할 사항이었다.

파오가 풍화 작용으로 인해 어느덧 갈색이 다 되어버린 낡은 철조망을 발로 툭툭 차면서 말문을 열었다.

“예전엔 전기가 흐르게끔 설치됐던 거 같은데 동력이 완전히 나간 모양이네. 양식을 보니까 이거 대종말 전에 만들어진 거 아닌가?”

철조망 너머로는 이상한 생김새의 말라비틀어진 나무들과 함께 시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상당히 높게 쌓아올린 콘크리트 벽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콘크리트 벽 뒤로는 유리로 된 ‘거대한 돔’ 같은 것이 보였다. 손우경은 한참이나 그곳을 응시하다가 파오에게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여긴 가급적이면 발을 안 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아.”

파오가 답했다.

“그럼 네 말은 다시 무간도가 있는 사무타 지역을 거쳐서 사막 지대로 돌아가거나, 아님 북쪽에 있을 자히르나 방어벽이라도 뚫어보자는 얘기야? 아무래도 우리 우경 사제는 시간 낭비에 굉장한 일가견이 있는 것 같네.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시간적으로 지체할 여유가 없어. 그냥 여길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자.”

손우경이 철조망 너머로 힐끗 사나운 눈매를 옮기며 파오에게 쏘아붙였다.

“느낌이 안 좋아.”

“야, 느낌 타령을 할 거라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정 그렇게 불안하다면 우선 잠깐만 들어가서 저 안을 살펴봤다가, 진짜로 영 아니다 싶으면 미련두지 말고 바로 빠져나오자. 어때?”

“…….”

이 철조망 주변에는 닳아빠진 삭은 종이들이 심각하게 변색된 채로 붙어 있었는데 안에 인쇄된 글자들이 거의 다 사라져서 대부분은 제대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하긴 글자가 멀쩡했다고 해도 여기 적힌 문자들은 내가 읽어낼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비록 문건상으로만 남은 기록이긴 해도, 대종말 이전에는 영어라고 불리는 서양의 언어를 자국어와 섞어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믿기 어려운 흰소리지만, 그 당시에는 다들 서양의 문물과 언어를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며 그들의 문명을 추종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고. 어쨌든 그때의 영향으로 현재 동양 세계의 언어 체계에는 마치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굳어진 서양의 단어들이 꽤나 많다고 전해진다. 음, 대체 뭐가 있을까.

나는 그나마 제대로 된 모습을 유지하며 가장 정상적으로 붙어 있던 종이 한 장을 철조망에서 떼어냈다. 안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서양의 구식 언어에는 정통한 자가 없었다. 뭔가 짧은 내용이 굵은 글씨로 강조되어서 적혀 있었는데 만일 오조가 깨어 있었다면 참 좋았을 터였다.

손우경이 우리가 들어갈 입구를 만들기 위해 기문파공을 발사하여 철조망을 일부 파괴시켰다. 공기 중으로 쇠 먼지가 풀풀 날렸다.

손수 입구를 만든 장본인이 가장 먼저 들어가고 그 뒤를 이어 파오가 진입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버석거리는 낡은 종이를 등 뒤로 내던지며 역시 놈들을 뒤따랐다.

그런데 오조를 업고 있던 뭉글이가 바깥에서 망설이는 기색으로 통 움직일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서두르라는 눈짓을 던지자 그제야 뭉글이가 자신의 주인을 태운 등을 실룩이며 정말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었다.

마침 내가 버린 종이가 사방으로 이리저리 불어오는 세찬 바람결에 따라 바닥에서 위태로운 몸짓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All the citizens must take refuge from this area!

The zone is strictly isolated by the government!

시민 여러분들 대피하십시오! 이곳은 정부에 의해 격리되고 있는 위험한 지역입니다!

* * *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람.

앙상한 나무숲을 지나서 다섯 개로 겹겹이 둘러싸인 콘크리트 벽을 전부 허물고 나서야 우리는 반원의 거대한 유리로 덮여 있는 돔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돔의 안쪽으로는 오래전에 폐허가 된 어느 도시의 풍경이 보였는데, 땅이 모두 깊은 곳까지 움푹 꺼져 있어서 마치 동그란 워터 볼 안에 들어 있는 작은 미니어처라도 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아 각각 세 명의 조로 나뉘어서 장장 몇 시간에 걸친 기나긴 탐색전을 벌어야 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파오가 먼 곳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니 파오가 바닥에서 지하로 연결된 문 하나를 발견한 참이었다. 문 근처에는 아마도 파오가 부순 듯한 쇠사슬의 잔해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파오가 문을 부수느라 거칠어진 두 손바닥을 비벼 손에 열을 내더니 이내 힘찬 목소리로 얘기했다.

“자, 그럼 들어가볼까?”

무슨 지옥문의 입구라도 되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안쪽을 슬며시 들여다보던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문이 저 돔 안쪽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거야 자그마치 몇 시간씩이나 개고생해서 유일하게 발견한 문이니까 지금은 이거 외엔 다른 방법이 없잖아.”

새로운 모험의 세계에 첫발이라도 들인 양 어딘지 꽤 신나 보이는 파오의 어린애 같은 눈빛을 응시하다 보니 입안에서 한숨이 저절로 푹 내쉬어졌다. 만사가 설렁설렁, 귀찮은 일들엔 항상 나 몰라라 발을 빼던 인간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무간도의 균열에서 소용돌이를 만난 직후로, 그나마 유일한 장점이던 자기 목숨 하나는 끔찍하게 여기는 그 조심성까지 그곳으로 전부 다 빨려 들어갔나 봅니다.”

암만 오조의 제안이라도 무간도 직전까진 융통성 없을 정도로 매사 불평만 해대던 놈께서 언제부턴가 진짜 길잡이 역할인 새끼 여우를 대신해서 자기가 모든 이동 방향을 주도하고 있었다.

요즘 손우경과 계속해서 투닥거렸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나름대로 타당한 의견을 제시하는 손우경의 말을 아예 귓등으로도 안 듣고서 온전히 자신의 주장만 밀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다만 무간도 이후로는 손우경 또한 본인의 판단을 잠시 유보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에 여태까지는 그럭저럭 그 균형이 맞아온 것이었다.

파오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현아, 이건 한 번쯤은 꼭 얘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이젠 너도 예전과 같은 어린애가 아니니까.”

그 말에 잠자코 있던 손우경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네가 날 원망하는 마음은 잘 알겠는데, 난 네 부모님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는 사람이 아니야.”

“…….”

“왜 다들 나한테 멋대로 기대를 걸었는진 모르겠지만 난 그 당시에 자처해서 개죽음을 당할 생각이 없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는 파오의 텅 빈 얼굴이 내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다가왔다. 랜드리올전에서 막 돌아왔을 즈음의 파오는 혼자 있을 때면 항상 저런 얼굴을 하곤 했다. 당장 뭐라고 말을 꺼내야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손끝이 덜덜 떨려오고 눈앞이 자꾸 흐려져만 갔다.

“왜 도망쳤습니까. 정말로 아돌프가…… 무서워서. 그래서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렇게 혼자서만…… 마음 편하게…… 도망쳤습니까?”

내 목소리가 그렇게나 동요하고 있을지는 말을 내뱉는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나는 내 물음에 파오가 자기가 잠시 장난친 거라고 대답하며 평소처럼 허허실실 웃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놈은 전혀 그래주질 않았다.

지금의 내 답변을 대신한 것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어느 누구에게서나 크게 인정받으며 언제나 당당했던 모습의 파오였다. 아니, 꼭 그 당시의 얼굴처럼 보였다.

“현아, 그때는 너만 혼자 놔두고 사라져서 미안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파오를 보고 있자면 마치 비겁자인 내 자신과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이 자리에 더 있었다간 나약해진 마음이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서 나는 지하에서 스산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는 바닥의 문을 향해 몸을 숨기듯이 도망쳐버렸다.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찰나에 파오가 팔을 붙잡았으나 잠시 내 얼굴을 보고는 다시 놓아주었다.

등 뒤에서 손우경이 파오에게 뭐라고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하의 어두운 공기가 귀를 전부 먹먹하게 만들었다.

수없이 많은 계단들을 올라가고 또 내려가고를 반복했다. 미로처럼 엮인 지하 내부를 한참 동안이나 헤매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돔 안으로까지 발을 들이게 되었다.

커다란 반원의 유리 돔 안에 담겨 있던 이 도시는, 외부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안에 직접 들어와서 보니 뭔가 희한한 양식들을 띠고 있었다.

대개가 고층으로 높게 지어진 건물들이 거리 곳곳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질 않나, 특히나 한 손에 횃불을 번쩍 치켜들고 있는 거대한 동상 하나가 웬일인지 머리가 댕강 날아간 채로 서 있는 것이 가장 인상에 깊었다.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모습들에 무슨 관광지에라도 놀러 온 것처럼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그러다가 손우경과 몸이 쿵 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놈 역시 딴 데다가 정신을 팔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 녀석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박아버려서 코가 몹시 얼얼했다. 내 코를 어루만지려던 차에 손우경과 주먹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두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나를 쓱 내려다보는 손우경의 시선에서 왠지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내게 할 얘기가 많은 듯한 표정이었으나 여전히 철저하게 말을 아끼려 드는 놈에게 내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손우경이 나를 안고는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왜냐하면 녀석의 등 뒤에서 어느 무엇인가가, 아주 빠른 속도로 기다란 것을 우리가 있던 지점을 향해 쭉 뻗어왔기 때문이었다. 뒤에서든 어디서든 누가 자길 노리는 건 다 안다더니 정말이지 그 기가 막힌 순발력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녀석의 두 팔에 남부끄러운 자세로 번쩍 들어 안긴 채,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방금 전 우리를 공격하려던 것의 정체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윽고 내 입에서 크게 기함하는 소리가 터져 나올 뻔했다.

저건, 대체 뭐야…….

고층 건물들 사이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것은, 그 크기가 일전에 오조가 불러들인 골렘 급 이상으로 컸다.

저 손우경마저도 그 ‘괴물’을 보며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전신이 연갈색 색상을 띠고 있는 ‘그것’의 그 매끈거리는 피부에는 크기가 일정한 구멍들이 촘촘하게 뚫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 토할 것같이 역겨운 진액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괴물의 몸 곳곳에는 광택이 흐르는 기갑들이 마치 갑주의 역할을 하듯 달려 있었고, 머리통 뒤편과 턱 아래, 그리고 길게 늘어진 손으로는 무수한 촉수 같은 것들이 자라나 있었다. 그런데다 양손에 수십 개가량 매달려 있는 촉수들은 마치 손우경의 여의봉처럼 그 길이가 자유자재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울긋불긋한 핏줄이 들여다보이는 괴물의 끔찍한 머리통에서 누런색을 띤 눈동자가 우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눈동자 하나가 사람의 몸집보다도 컸다. 손우경이 허탈하게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왔다.

“……내가 이래서 들어오지 말자니까.”

내가 참견했다.

“그때처럼 기문파공을 쓰면 되잖아?”

강시들의 목을 단번에 베어내거나 사막의 벌레들을 다른 곳으로 전부 이동시켰던 것처럼 놈에게는 무적의 기문파공이 있으니 사실 저런 기갑 괴물쯤은 무슨 대수겠냐 싶었다. 그러나 손우경은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얼굴로 괴물 쪽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여기서 기문파공을 썼다간, 우리까지 다 죽어.

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되물었다.

“……왜?”

녀석의 은회색 눈동자가 천장의 유리 돔으로 향했다.

“지금 그걸 쓰기에는 이곳 여건이 너무 안 좋아. 장담하는데 위의 유리벽까지 다 무너져 내릴 거야.”

“그, 그럼 어떡해?”

손우경이 그제야 나를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도 몰라.”

지금은 충분히 위급한 상황이었고, 난데없이 등장한 저 괴물로 인해 한없이 불안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별안간 녀석이 날 내려다보며 웃는 순간에, 이상하게도 그러한 감정들이 전부 다 말끔하게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손우경은 자신의 양팔에 어정쩡하게 걸려 있던 내 몸을 살짝 던지듯 들어 올려 다시 자세를 단단하게 고쳐 잡은 후, 자길 꽉 잡으라고 종용했다.

“그냥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가자. 굳이 상대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

나는 밑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일단 손우경을 꽉 잡아 의지하다가 한 가지 의문점을 제기했다.

“……너 근데 방금 우리가 들어왔던 출구가 어디였는지 기억나?”

그 말에 손우경이 날 내려다보며 자기도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눈초리로 슬며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파오 사형은 아까부터 어딜 간 거야.”

목을 빼서 아래쪽의 동향을 살피자 방금 손우경의 지적대로 파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다만 뭉글이가 오조를 등에 업고서 아주 느린 속도로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순간 걱정이 들었다.

지금 하늘에 떠 있는 손우경이야 기갑 괴물과의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얼마든지 피해 다니는 것이 가능했지만, 현재 꿈나라에 머물러 있을 오조는 이대로 자다가 황천길로 순간 이동할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걱정은 그저 기우에 그치지 않았다. 바닥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포착한 그 기갑 괴물이 저의 그 무거운 몸을 쿵쿵거리며 서서히 뭉글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것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찐득한 촉수가 정확히 뭉글이와 오조를 노리려던 그때였다.

“위험해!”

내 다급한 외침과 함께 뭉글이의 주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막이 눈부신 섬광을 내뿜으며 촉수를 거창하게 튕겨냈다. 여태 자는 줄로 알았던 오조가 동물 머리뼈가 달린 지팡이를 치켜들고서 무표정하게 기갑 괴물을 올려다봤다.

하마터면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줄 알았다. 손우경까지도 움찔하는 표정으로 아래쪽의 상황에서 좀처럼 눈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의 턱 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손우경이 오조가 죽기라도 할까 봐 긴장했었단 말인가. 어쩌면 녀석이 나를 안고 있었기에 순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오조는 뭉글이에게서 내려와 괴물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한 나른한 눈빛이었으나, 새끼 여우의 입만은 평소와는 달리 야무지게 다물려 있었다.

게다가 녀석의 몸 주변에는 푸른 빛깔의 막이 둥글게 퍼져 나와 여전히 계속 쉬지 않고 공격을 시도하는 기갑 괴물의 수많은 촉수들을 모조리 맞받아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철통같은 방어벽이었다.

이윽고 오조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저건 날고 있다기보다는 어떤 미지의 힘이 오조를 하늘 위로 지그시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였다.

오조는 괴물의 머리통까지 사선으로 떠올라 바로 그 앞에서 딱 멈춰 섰다. 그러고는 녀석의 작은 입술이 슬쩍 벌어졌는데 지금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내가 이제껏 익히 들어왔던 오조의 그 아기같이 칭얼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오조의 입을 빌려 대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수십 년 전에 계약이 끝났음에도 아직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질 않다니.

온몸의 피가 얼어붙을 것처럼 냉엄한 권위가 느껴지는 오조의 음성에 그만 뒷덜미의 털이 주뼛 설 지경이었다. 오조가 천천히 손바닥을 내밀며 싸늘하게 웃었다.

……넌 자격이 안 되는구나.

새끼 여우의 손바닥 안에서 다른 차원의 공간이 열렸다. 그 자그마한 손안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고작 목 하나에 달려 있는 수십 개의 길고 추악한 대가리들이 빠져나와서 순식간에 기갑 괴물의 몸통을 잔인하게 뜯어먹었다. 괴물의 더러운 내장과 탁한 색깔의 피가 온 사방으로 마구 흩뿌려졌다. 오조의 가느다란 손목이 과부하라도 일으킨 듯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놈이 불러낸, 머리가 수십 개나 달린 소환수의 몸통이 여전히 오조의 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우경이 한쪽 입꼬리를 황당하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거야 어느 쪽이 진짜 괴물인지를 모르겠네.”

도시의 거리가 기갑 괴물의 피와 내장으로 인해 난장판이었다.

그리고 그 난장판을 만들어낸 주체는 오조의 손바닥에 열려 있던 차원의 문이 작아지기 시작하자 아주 무서운 속도로 그 안으로 모두 사그라져 들어갔다. 새끼 여우가 결국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하염없이 낙하하던 차였다. 그 아슬아슬한 순간, 어떤 이가 땅 위에서 솜씨 좋게 받아냈다.

파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오조를 안아 들고는 우릴 올려다보며 외쳤다.

“야! 니네 거기서 분위기 잡으면서 구경만 하지 말고 어서 이리 좀 내려와봐! 저 뒤쪽으로 방금 전에 뜯어 먹힌 놈이랑 비슷한 것들이 완전 무더기로 돌아다니는데 일단 내가 봐둔 장소로 이동하자!”

내가 손우경을 힐끔 살펴보니 어째서인지 놈은 별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 * *

파오가 안내한 이 건물은 아래쪽의 네 모퉁이가 네모반듯한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고 사방은 온통 뚫려 있는 공간이었다. 다만 지반이 바닥으로 쑥 내려가 있어서 몸을 낮게 숨기고서 전후 사정을 둘러보기에는 나름대로 최적의 장소였다.

실은 건물 안으로 대피하려고 했으나 대부분의 입구 자체가 이미 철문으로 단단히 폐쇄된 상황이었다. 이전과 같았으면 손우경이 기문파공으로 어떻게든 출입로를 만들었겠으나 지금은 별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새끼 여우가 파오의 어깨에 거꾸로 매달린 채 기절해 있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자기를 들쳐 멘 게 파오라는 것을 알게 된 오조가 저답지 않게 소란을 피우더니 당장 내려달라며 막 버둥거렸다. 아까의 그 서늘했던 모습들은 잠시 정신줄에 정전이 온 사이에 이미 온데간데없이 날아간 직후였다. 파오는 자기도 네놈을 들고 있던 게 매우 짜증스러웠다는 얼굴로 오조를 바닥에다가 턱 내려놨다.

오조가 파오에게 우물쭈물하더니만 조금 심통이 난 기색으로 입을 떼었다.

“왜 다, 당신이 나를 들고 있지?”

“그야 저 자식들이 널 안 들어줬으니까.”

“아니, 내 말은…… 왜 내가 기절한 채로 당신한테 들려 있냐는 말이었어.”

오조는 정말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뭉글이를 돌아보고, 나도 쳐다보고, 손우경한테까지 고개를 갸웃하면서 지금 이 상황이 뭐가 어찌 된 영문인지 제발 설명해달라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별수 없이 내가 입을 열었다.

“너 방금 전에 있었던 일, 혹시 하나도 기억 안 나?”

“방금 전?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

“그럼 너 몇 주 동안 내리 잠만 잤었던 것도 전혀 생각 안 나?”

“잠은……. 아마 어비스에서부터 꽤 오랫동안 잤던 거 같긴 한데 그거야 늘상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여긴 어디야, 삼장?”

“…….”

이 상황을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생각을 고르던 중이었다. 다시 귓가로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모쪼록 수십 개 이상은 족히 될 듯한 진동이었다.

파오가 긴장감으로 팽배해진 창백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벙긋거렸다.

“내가 아까 한두 놈이 아니랬잖아.”

손우경은 여전히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던 오조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게 몸을 돌린 다음, 결단력 있는 목소리로 새끼 여우에게 말했다.

“너, 랜드리올이랑 얼마 전 사막에서 우리가 맨 처음 들렀던 그 강시 마을에서 사용했던 기술, 지금 다시 쓸 수 있어?”

오조의 얼굴은 일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이제 못해. 그러니까, 당분간은.”

“못하는 이유라도 있어?”

오조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도움을 요청하듯 나를 쳐다봤다. 내가 놈들의 근처로 다가서자 손우경이 팔로 나를 가로막으며 오조를 다그치듯 몰아세웠다.

“소환계의 언어로 지금 그라우마탄급 괴물들이 전후방에 걸쳐서 약 서른네다섯 마리, 내게 감지되지 않는 부분까지 치자면 아마도 그 이상이 깔려 있어.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돼?”

오조가 또 손가락 열 개를 펼쳐들고 입을 벌린 채로 숫자를 가늠하다가 손우경에게 다시 물어봤다.

“그라우마탄급…… 서른네다섯 마리, 어…… 그건 열 개보다 훨씬 더 많은 거지?”

손우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조는 열 손가락을 잔뜩 꼼지락대며 입을 열었다.

“그, 그치만 그 정도라면 우경이 너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내가 지금 그럴 상황이 안 되니까 너한테 부탁하지. 그보다 왜 못하는데?”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해.”

“그럼 다른 거라도 좀 불러봐.”

“지금은 나도 안 돼…….”

오조가 손우경에게서 떨어져 나와 얼른 내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고사리 같은 손이 내 옷자락을 붙들고는 저 손우경 좀 어떻게 처리해달라는 듯이 눈빛을 보냈지만, 나도 새끼 여우의 이런 처사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그리 별것 아닌 일에도 각양각색의 소환수들을 잘만 부리면서 정작 꼭 필요한 순간이 오자 갑자기 몸을 사리려 드는 그 이유를 말이다.

오조가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불어넣고서 고집을 부리는 사이에 그놈들이 결국 이 건물 근처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그 괴물들의 발은 몸에 자잘하게 난 구멍들에서 쏟아지는 더러운 진액들로 흠뻑 젖어 있었다. 녀석들이 한 놈 두 놈, 건물 옆을 지나갈 때마다 우리가 숨어 있던 지하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모두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놈들이 어서 지나가주기만을 기다렸다. 내 뒤에 꼭 매달려 있던 오조가 현기증이 도는 얼굴로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나 이번엔 잠을 꽤 오래 잤는데도 왜 이렇게 몸에 기운이 없지.

그때였다. 건물을 쓱 지나치려던 기갑 괴물 한 놈이 그 자리에서 딱 정지했다.

별안간 우리가 몸을 감추고 있던 공간으로 녀석의 얼굴이 숙여졌다. 건물 틈으로 보이는 그 샛노란 눈동자에 갑자기 전신이 옥죄어오는 공포를 느꼈다. 괴물의 입에 달린 수많은 촉수가 이내 건물 틈 안으로 길게 뻗어 왔다.

손우경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그런 녀석의 손에는 어느새 큼직한 봉 하나가 들려 있었다.

우리 모두가 지하에서 꼼짝없이 갇혀버린 사이, 손우경은 들고 있던 여의봉으로 무작정 눈앞에 있는 괴물의 눈을 푹 찔렀다. 괴물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여의봉은 괴물의 한쪽 눈에 꽂힌 채로 길이가 점점 늘어나 그 뒤통수까지 쑥 꿰뚫고 나갔다.

손우경이 괴물에게 꽂힌 여의봉을 회수하자 눈이 뚫린 엄청난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 기갑 괴물이 주변 건물들을 있는 대로 부숴대며 온갖 난리를 피워댔다. 그런 와중에도 녀석의 몸에 달린 모든 촉수가 손우경을 잡아내기 위해 징그럽게 꿈틀거리며 허공을 이리저리 휘저어댔으나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서인지 모두 번번이 허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난리를 일으킨 덕분에 다른 기갑 괴물들이 모두 이쪽으로 모여들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신호를 주고받은 괴물들끼리 정말 아주 순식간에 이 건물 주변을 온통 에워싸버렸다. 그러자 손우경이 공간을 가르려는 손짓으로 기문파공을 시전하려다가 순간적으로 뚝 멈춰 세웠다. 파오가 의아하게 물었다.

“우경이 자식, 아까부터 왜 자기 필살기를 안 쓰는 거냐?”

“이런 공간에서는 기문파공을 사용할 수 없다고…….”

손우경의 손에 들린 여의봉이 점점 두껍게 늘어나고 있었다. 놈이 그 여의봉을 이미 애꾸가 되어버린 기갑 괴물의 머리 위로 하늘에서부터 아주 힘차게 찍어 내렸다. 잠시 후 여의봉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리꽂혔고 그 괴물의 몸통은 아예 절반으로 쩍 갈라진 후였다.

입에서 솔직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지난번 여의봉이 자기 이상으로 굉장한 힘을 가졌다더니 어떻게 저리도 큰 괴물의 몸통을 반으로 갈라버릴 수 있나 싶었다. 그러나 감탄이 채 식기도 전에 반으로 쪼개졌던 기갑 괴물의 몸통이 다시 끈끈하게 조직과 세포가 연결되며 원상태로 복귀되었다. 저 기갑 괴물이 재생 능력을 가진 것이었다.

손우경이 한 놈을 미처 처리하기도 전에 이번엔 다른 몇 마리의 괴물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수백 개의 촉수들이 끈끈하고 역겨운 색의 점액질을 토해내며 손우경의 몸을 단번에 겨냥해왔다. 손우경이 여의봉을 휘두르며 촉수들을 잘라냈지만 어째 놈들이 재생되는 속도가 더 빠를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의 무능력함이 뼈저리게 절감됐다.

어느덧 모여든 수십 마리의 괴물들을 혼자서 상대하고 있는 손우경도 굉장했지만 몸이 끝없이 재생되는 상대와의 싸움은 너무나 무의미한 소모전에 불과했다. 내 눈에도 녀석이 체력적으로 조금씩 지쳐가는 것이 여실하게 보일 정도였다.

다만 의문인 것은 파오는 왜 직접 나서지 않고 있냐는 것이었다. 놈이 현재 손우경이 행하는 일련의 전투 과정을 마치 하나하나 분석하듯이 눈 안에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몹시도 불쾌했다.

물론 결계를 친 다음 부적으로 상대방의 정신 세계를 미혹시켜 일을 처리하는 암살조인 나와, 또 무슨 까닭인지 현재 소환 자체를 완강히 거부하는 오조는 현재 전력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곳에 들어가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장본인께서 저리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사실 파오가 여행 내내 일부러 등신같이 굴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어차피 손우경이나 오조가 있으니 굳이 귀찮은 일에는 손을 대지 않으려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허나 기문파공을 못 쓴다는 전제하에 손우경과 파오의 전투력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저런 식의 각개전투는 차라리 무술의 달인인 파오 쪽이 더 능할는지도 몰랐다.

나야 군부 출신이 아니니까 파오의 전투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본 일은 없었어도,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도 저 녀석이 얼마나 걸출한 무인이었는지는 확실했으니 말이다. 파오가 천봉대원수였던 시절에는 그를 동경해서 군부에 지원하려던 놈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그 썩어빠진 정신머리가 잠시 쉬고 있는 동안 실력마저 녹슬게 한 것이 아니라면 제발 뭐라도 좀 보여주기를 바랐다.

그러던 차였다.

손우경은 드디어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기갑 괴물들의 누더기 같은 촉수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게다가 하필 여의봉을 들고 있던 손을 촉수에 붙잡힌지라 이번엔 잘라내는 행동을 취할 수도 없었다.

그때 오조가 내내 꽉 쥐고 있던 내 옷자락을 놓았다.

놈이 마치 신들린 듯한 몸짓으로 바닥 위에다가 소환진을 덧그리기 시작했다. 오조가 소환진 작업을 하는 것을 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들여다보기는 처음이었다. 이상한 괴리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복잡한 문양들과 기기묘묘한 마법의 언어들이 소환마법진 안을 차곡차곡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다지도 빠르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을 왜 예전에 사막에서 쥐며느릿과의 거대 벌레들과 조우했을 당시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걸까. 그보다 이거 분명히…….

소환진이 다 완성되기도 전에 갑자기 파오가 내 팔을 붙잡고는 냅다 지하 밖으로 뛰쳐나갔다.

“뭘 넋을 놓고 있어! 너도 저기에 휩쓸려서 같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파오가 미친 듯이 잡아끄는 힘에 이끌려 도망치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다시 뒤를 돌아보자 마침 우리가 숨어 있었던 건물이 그 타이밍에 맞춰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오조야!!!”

내 다급한 외침이 건물 무너지는 소리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파오 자식이 도무지 내 팔을 놓으려 들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있는 힘껏 손을 확 뿌리치고서 건물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얼른 제재가 들어왔다.

“그 새끼 절대 안 죽으니까 걱정 말고 제발 따라오기나 해!”

“이거 놔!”

“그 소환진이 뭔지나 알고 가려는 거냐? 랜드리올에서도 저거랑 똑같은 걸…….”

파오가 말을 꺼내다가 멈추고는 그 시선을 오조가 원래 있던 방향으로 고정했다.

“아…….”

인생은 놀라움의 연속이라고 어느 누가 그랬던가.

무너진 건물 아래로 소환진이 그려졌던 자리에서 빛줄기가 일직선으로 새어나왔다. 빛이 뻗어 나간 자리가 하늘 위까지 급속도로 솟구쳐 오른다. 이윽고 적당한 지점에 닿자 그곳에 난데없이 광대무변한 크기의 큼직한 ‘문’ 하나가 생겨났다. 그 문이 덜컹 열리자 안에서는 현재 지상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모든 기갑 괴물들을 전부 합쳐도 아예 상대가 안 될 법한 큰 ‘여자’가 나타났다.

그래, 여자였다. 머리가 무척이나 길고 섬뜩한 얼굴을 가진 그 여자가 문을 열고는 지상에서 돌아다니는 기갑 괴물들을 바라보며 요사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입술이 피를 발라놓은 듯이 새빨갛고 얼굴이 너무……. 저렇게 생긴 걸 난생처음 봐서 차마 뭐라고 표현을 못하겠다. 차라리 기갑 괴물들의 외모가 더 준수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하반신은 물뱀처럼 긴 비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자가 입을 벌리자 그 안에서 진홍색의 혓바닥이 바닥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 혓바닥이 바닥으로 쭈욱 내려오면서 다시 수십 갈래의 대롱 같은 것으로 무수하게 갈라졌다. 무수한 대롱들은 모두 기갑 괴물들의 머리 위로 푹 꽂혀서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몸 안에 든 모든 진액을 남김없이 흡수했다. 기갑 괴물들은 몸에 달려 있던 갑주들과 얇은 피부 껍데기만 쭈글쭈글 남은 채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파오가 여전히 기가 차다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걸 본 게 자그마치 세 번째다. 랜드리올 말고도 내가 저 사악한 걸 두 번째로 봤을 때에는 바닥에서 혓바닥 하나가 튀어나와서 사막 마을의 강시들을 문 안쪽으로 전부 데려갔으니까.”

파오의 섬찟한 설명과 함께 여자가 바닥으로 늘어났던 혓바닥을 다시 후루룩 거두더니 자신의 이를 활짝 드러내며 아래쪽을 무섭게 쳐다봤다. 송곳니같이 날카로운 이빨들이 잔뜩 돋아난 그녀의 입안 광경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하마터면 기절하는 줄 알았다. 입안 곳곳에 마치 사람의 영혼으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들어차서 제발 이곳에서 꺼내달라며 통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방금 전 우리가 숨어 있었던 그 건물 쪽에서, 갑자기 파란색을 띠는 신비한 기운이 그 문의 여자에게로 쓰윽 빨려 들어갔다. 여자는 꿈에서 볼까 두려운 얼굴로 그 기운을 입안으로 꿀꺽 삼키더니 다시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거대한 문을 쾅 닫아버렸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뒤늦게 새끼 여우의 안위가 걱정되어 이미 무너져 내린 건물을 향해 뛰어가는데, 이미 손우경이 한발 앞서 오조를 부축한 채 데리고 나왔다. 새끼 여우는 안색이 엉망이었다.

그런 오조가 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푹 쓰러져버렸다.

* * *

기갑 괴물들이 싹 전멸해버린 폐허 도시에서 우리는 다시 기절해버린 오조를 눕힐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말했다시피 대부분의 건물 입구들이 단단하게 봉해져 있었지만, 괴물들이 전부 사라져버린 지금 그거 하나 부수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건물 안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 그나마 깨끗한 방을 찾아낸 뒤, 일단 그곳에 오조를 눕혔다.

그러고는 같은 층에다 각자의 임시 숙소를 마련하고는 다시 오조의 방에 모여들었다.

뭉글이가 혼절해버린 주인 옆에서 아주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서비터들도 자기들끼리 우왕좌왕하며 새끼 여우의 얼굴 근처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손우경이 걸리적거리는 서비터들을 침대 밑으로 전부 쓸어내고서 오조의 이마로 손을 가져다댔다.

“…….”

“어때?”

“열은 없는데 이마가 너무 차가워.”

내가 새끼 여우의 손을 만져보니 정말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파오는 침대 근처로는 결코 다가오지 않은 채 멀찌감치 떨어진 창가 난간에 살짝 걸터앉아 그런 우리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손우경이 가만히 새끼 여우의 목 부분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당연히 목을 조르려거나 하는 건 아니었고 뭔가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내 오조가 캑 하고 작은 숨을 토해냈다. 연달아 캑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신을 잃었던 오조가 어느덧 눈을 떠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나와 손우경을 바라보며 순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네…… 날 왜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어?”

“……너 괜찮아?”

“뭐가?”

“또 기절했었잖아. 오늘만 벌써 두 번째라고.”

새끼 여우는 스스로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에 대한 별다른 해명도 없이 배를 살살 문지르며 내게 말했다.

“아, 나 지인짜 배고프다아.”

오조가 얕은꾀를 써서 대화를 돌리려고 들었다. 놈이 그 핏기 없이 해쓱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자꾸 밥 타령을 해대길래 우선 밥부터 먹인 다음 찬찬히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가방에서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를 꺼내서 오조 놈이 제일 좋아하는 야채 만두를 네 개나 삶고 있는데 파오가 냉큼 다가와 참견을 해댔다.

“야, 나도 배고프다구.”

“오조 덕분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도 무사히 살아남으셨으면, 가서 빈말이라도 몸은 좀 어떻냐고 물어보고라도 오십시오.”

파오가 피식 웃으며 샬레 안에서 거의 다 삶긴 만두 하나를 들고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저게 진짜. 남은 만두 세 개를 샬레 하나에 층층이 담아서 오조에게 가져가니 마침 침대에서 새끼 여우의 뺨을 양손으로 쭉쭉 잡아당기며 놀아주고 있던 손우경이 입으로 제일 위에 있던 만두를 덥석 물었다. 그 모습에 오조가 가자미눈을 하고서 양손으로 남은 만두 두 개를 전광석화처럼 낚아챘다.

텅 빈 샬레를 들고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과적으로 만두를 못 먹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뭐 당장 안 먹으면 어떠한가. 어차피 음식 만드는 키트는 다 내 손안에 있는데.

그럼에도 영 입맛이 돌질 않아서 분무기형 샬레 소독기로 식기들을 찍찍 세척해주고 나서 그 뒷정리를 끝낸 다음, 양손에 만두를 쥐고 어느 걸 먼저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 오조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조가 흐뭇한 얼굴로 냠 하고서 만두를 입에 물었는데 자세히 보니 놈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내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고작 만두 두 개 정도는 이미 다 먹어치우고도 남았을 녀석의 평소 식탐을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만두 하나도 채 먹지 못한 상황이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오조는 우리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애써 무리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보지 않고서 이 방 안 어딘가에 있을 파오에게 입을 열었다.

“파오, 서양의 마법사들은 원래 결계를 치지 않고 환기 마법을 씁니까?”

뒤에서 파오가 대꾸했다.

“글쎄, 난 그쪽은 문외한이라서. 우경이한테 물어봐.”

손우경을 쳐다보자 녀석이 담담하게 이야기해주었다.

“현이 네가 관음존자 밑에서 주술을 배웠다면 그 빨간 눈의 서양 애송이가 그중 무엇을 가장 강조했는지도 잘 알 텐데.”

“그래, 맞아.”

나는 다시 새끼 여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녀석을 곧바로 마주 보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로 결계지.”

동양의 주술이든 서양의 마법이든, 혹은 저주나 소환술, 그 이외에 이 세상 모든 에너지들은 모두 단 한 가지 우주 법칙에 의해서 작용되고 있었다.

바로 내가 한 것만큼 다시 되돌려 받는다.

만일 누군가를 저주하거나 해로운 주술을 써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면 그 결과가 언젠가는 다시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 세 배로 되돌아오는데, 그걸 흔히 ‘역풍이 분다’고들 말했다. 구태여 마법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불행을 바라면서 내가 행복해지기를 바랄 수 없듯이, 내가 만약 어떤 이를 싫어하게 되면 꼭 그 상대방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어느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 식으로 내가 저지르거나 생각했던 나쁜 일들의 대가는 어떤 결과로든 예외 없이 나타나게 되어 있었는데 이 인과 결과가 눈에 가장 도드라지게 보이는 분야가 바로 주술-마법 분야였다.

내가 보낸 것이 거울처럼 튕겨서 되돌아오는 역풍을 피하기 위해 주술사나 마법사들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무조건 결계의 힘을 이용했다.

사실 관음존자의 수정궁은 굉장한 정화의 힘을 일으키는 크리스털들로 제작되어서 이미 그 자체가 거대하게 만들어진 일종의 보호 결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아돌프가 하루 종일 수정궁에 처박혀서 웬만해서는 바깥으로 잘 나오지 않는 까닭은 자신이 이제껏 저지른 일들의 역풍이 얼마나 거셀지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여태까지 결계를 치지 않고서 일을 벌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결계라는 것은 이러한 형이상학 체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의 요소였다.

사실 속으로도 계속 의아하긴 했었다. 오조처럼 이계로부터 저렇게 엄청난 것들을 끌어오는 대규모의 환기마법을 벌이려면 당연히 소환술사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몇 겹의 방어막과 결계들이 꼭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새끼 여우는 때때로 아무 결계도 없이 소환수들을 불러냈고, 더군다나 아까 오조가 그려냈던 소환진에는 결계로 생각되는 그 어떤 장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환의 대가를 도대체 무엇으로 지불한 거지.

그리고 방금 내가 결계 얘기를 꺼내자 오조가 만두를 들고서 뭘 훔쳐 먹다 들킨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흠칫 놀랐다. 녀석이 실제로 만두를 훔쳐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놈의 표정은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거듭 말을 꺼냈다.

“그 결계라는 거 말인데…….”

손에 쥐고 있던 만두가 결국엔 침대 시트에 뚝 떨어졌다. 오조가 자신의 고개마저 숙이고서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 말하기 싫어.”

나는 녀석의 손목을 틀어쥐고서 놈의 몸을 꽁꽁 가리고 있는 그 새카만 로브를 벗겨내려고 했다. 만일 결계도 없이 마법이나 소환을 시전했다면 틀림없이 그 반작용이 필히 마법사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오조가 거세게 반항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 이러지 마아!”

손우경이 발버둥치는 오조의 어깨를 꽉 잡아 눌렀고, 내가 마침내 새끼 여우에게서 억지로 로브를 벗겨냈을 때 그만 눈에서 뜨거운 불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이 어린애 몸에 무슨…….

“너 몸이 왜…….”

나도 모르게 오조의 뺨을 세게 후려갈겼다. 불시에 얼굴을 두들겨 맞은 오조가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그 눈시울이 토끼처럼 새빨개졌다. 큼직한 눈망울에 물이 그렁그렁해진 오조가 억울한 듯이 울먹였다.

“……왜 때리는데. 내가 너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니잖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너 뭐하는 거야, 지금? 초환술이든 소환술이든 결계 없이 사용하면 몸에 무리가 가는 걸 몰라서 그래? 설마 여태까지 다 이런 식으로…….”

도무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나와는 반대로 오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걸 얼마 전에야 알았어. 정말이야. 일전에 내 막사로 찾아왔던 아돌프가 알려주던걸.”

새끼 여우가 무거워진 정적 속에서 그저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밤에 관음존자가 날 불쑥 찾아왔었어. 그게 아마 자히르나에서 마지막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이었을 거야. 당시 자히르나에 주둔하고 있던 몇 천이 넘는 병사들이랑 마법사들의 사이를 관음존자가 자기 혼자 뚫고서는 내 막사가 있는 곳까지 유유히 걸어 들어오더라구. 근데 그걸 보면서 정말 아무도 막을 생각을 못했어. 뭔가 함부로 접근해선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어쨌든 그날 밤 관음존자가 나한테 말해주기를…….”

아무래도 환영제야단으로 망명하기 직전의, 숨겨졌던 뒷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했다. 그런데 오조는 자기가 하려던 뒷말을 꿀꺽 집어삼키고는 전혀 다른 말들을 이어갔다.

“처음엔 그 사람이 환영제야단의 관음존자인지도 몰랐는데 그날 그 장면을 실제로 지켜보면서 머리로 생각했어. 아, 이건 내가 절대로 못 이기겠다 하고. 나와의 실력 차이를 떠나서도 보통 적군의 수장인 사람이 호위 하나도 없이 그렇게 몇 천의 군사가 깔려 있는 적진 한가운데에 홀로 뛰어드나 싶었어. 그 자신감이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했거든.”

오조는 진심으로 탄복하는 눈빛이었다. 여태껏 뭘 말하고 있었는지 자신의 처지도 잠시 잊고서 그저 아돌프의 첫인상에 대한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난 문차일드라서 마나의 제한 같은 거 거의 안 받는다고 했잖아. 원래 마력의 원천은 이 세상 그 자체에 무궁무진하게 존재하지만 받아들이는 그릇의 크기가 문제거든. 그리고 나도, 우경이도 남들에 비해선 그 그릇이 되게 크단 말야? 근데 관음존자는 어찌 된 영문인지 그릇이 크고 작은 수준이 아니었어.”

“…….”

“내가 정말로 궁금한 건 아돌프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혼자서도 서쪽의 연합군 같은 건 얼마든지 궤멸시킬 수 있을 텐데, 그걸 왜 가만히 내버려두고서 조금씩 피를 말리려 드는 걸까 하는 거였지.”

계속 듣고만 있었던 내가 오조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그날 밤 관음존자가 널 찾아와서 뭐라고 말했는데.”

오조는 내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 계속해서 엉뚱한 말들을 내뱉었다.

“음, 나는 말야,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렇게 배웠어. 결계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구. 나야 어차피 고아니까 중요한 순간마다 소모품으로 쓰려고 했었나 봐. 교단 입장에서는 나 정도로 무작위한 소환을 해줄 수 있는 그릇이 별로 없었을 테니까.”

나는 더 낮게 깔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아돌프가 너한테 뭐라고 했었는지나 말해.”

“……환영제야단에서 내가 사는 구역으로 자꾸 쳐들어올 때마다 교단에서는 나한테 크고 작은 소환마법진을 준비시켰어. 그러다가 어느 날 룸버린에서 가장 높은 분들이 날 찾아와서 내 수준을 훨씬 웃도는 최상위 계급이랑 억지로 계약을 맺게 됐는데……. 바로 그때가 너희 환영제야단에서 우리를 단단히 벼르고 진격해왔던 그 랜드리올전을 앞둔 시점이었어.”

다들 호흡을 들이켰다. 이미 파오까지도 오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강하게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너네가 아까 봤던 그거. 그게 바로 내가 계약을 맺었다는 최상위 계급이야. 진짜 무섭게 생겼지? 나는 랜드리올에서 처음 초환했었는데 그때부터 내 몸에 무서운 변화가 왔어.”

오조가 이로 자기 손가락 끝을 살짝 물어뜯었다. 놈의 하얀 입술이 혈액이라고 하기엔 너무 탁한 색상의 피로 얼룩졌다. 그렇게 검붉은 피가 방울방울 맺히는 손끝을 침대 위로 가져다대자 그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들이 마치 독한 염산이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침대 시트를 무서운 속도로 녹여내고 있었다.

“나는 랜드리올에서도 그렇고 그동안 대가를 너무 많이 치렀어. 소환수들은 우리 유처럼 착한 녀석들도 있지만 남을 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르는 애들은 다들 하나같이 거친 녀석들이라 아무리 먹이를 많이 줘도 일이 끝나는 즉시 소환술사에게서도 그 대가를 받아가거든.”

바닥까지 녹아버린 침대 구멍 주변으로 오조의 작은 정령들이 다들 안절부절못하며 모여들었다. 오조가 옅게 입가를 찢으며 그 입술을 열었다.

“얘네는 내 서비터들이라 그래. 만에 하나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기네들 형체가 사라지니까 그게 무서운 거겠지.”

“그날 관음존자가, 너에게 뭐라고…… 했었는지…… 제발 말해봐.”

내 청원에 오조가 과거를 회상하듯 깊어진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관음존자는 자기 생명 에너지를 전부 바쳐가며 그런 걸 소환하는 멍청이는 처음 봤다면서 막 웃어댔어. 그러고는 내가 앞으로 살날이…… 이제 몇 년밖에 남지 않았대. 그럴 바엔 더 이상 쓸데없는 고생은 그만하고 얼마 안 남은 날들은 자기 밑에서 편하게 지내볼 생각이 없냐고 그랬어…….”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픈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나질 않았다.

“그럼,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건데…….”

“아마도 이거만큼은 남아 있을 거야.”

숫자를 열 개 이상은 셀 수 없는 오조가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게 내 눈앞으로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들었다.

누가 좀 저 아이를…….

녀석의 손가락을 잡으려고 했지만 오조가 먼저 손을 거두었다.

“아, 안 돼. 아직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고 있어서 자칫하다간 삼장 네 피부까지 녹아버릴 거야. 내 피는 강한 독성이라 잘못 만졌다간 진짜 큰일 나.”

내가 이를 악물고 얘기했다.

“……위에서 그딴 계약을 하랬다고 그걸 또 순순히 받아들이는 놈이 어딨어.”

“나도 정말 하기 싫었어…….”

로브가 벗겨져버린 놈의 상반신은 도저히 저 예쁜 오조의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처참하게 썩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차마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소환의 대가로 계속해서 생명 에너지를 갈취당했던 오조는, 그래서 매일같이 잠을 자며 자신의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했던 것일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그 어떤 것도 녀석의 입으로 직접 확인받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과는 달리 정작 입에서는 험한 얘기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이제 겨우 오년밖에 안 남았다면서 너 지금 제정신이냐?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길잡이 역할까지 하면서 여길 따라와? 네 능력보다 더한 존재를 소환해내려고 어린 너한테 결계 치는 법조차 안 가르쳐주고서 마치 널 소모품처럼 이용했던 놈들로 넘쳐나는 곳이야! 관음존자가 널 배려해서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 게 아니란 건 너도 다 알고 있잖아! 그러니 여기저기에서 그만 이용당하고 오늘이라도 당장 돌아가! 남은 시간이 하루건 이틀이건 앞으로 이제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란 말이야!”

내 다그침에 오조가 양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냐. 관음존자가 내게 억지로 강요했던 게 아니라 그저 제안만 했었어. 현재 처한 상황들을 자세하게 설명해주면서 혹시 서쪽으로 다시 가볼 생각이 없냐고. 그리고 나만큼 센 녀석들도 좀 붙여줄 테니까, 이왕 가는 김에 교단 놈들한테 네 마음껏 복수라도 하고 오면 어떻겠냐고 묻길래…….”

“그럼 당연히 싫다고 했었어야지!”

오조가 풀 죽은 목소리로 내게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나도 조금은 억울해져서.”

새끼 여우의 한쪽 눈동자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물방울이, 그만 툭 하고 흘러내렸다.

* * *

늦은 저녁, 다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나 역시 내 임시 숙소로 돌아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침대 스프링이 망가졌는지 허리가 영 불편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그 외에 잠이 안 오는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와 상관없는 타인에 불과한 오조에게 아까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만약 이 사실을 관음존자가 알게 된다면 또 아직 멀었다는 핀잔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돌프가 말하길, 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것은 타인을 신경 쓰는 마음이라고 했었지. 설마 내가 짧은 사이에 새끼 여우에게 정이라도 들었다는 건가. 오조의 삶이 앞으로 오년이 남았든 십년이 남았든 더 이상 사사로운 정에 휩쓸려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또…….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망가진 침대 스프링이 어떠한 반동도 없이 누군가의 더해진 체중을 실었다.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는 단단한 팔뚝에 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손우경이 나를 품 안에 가두고는 머리카락 사이로 코끝을 들이밀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너 왜 다시 친한 척해. 그때 이후로 나하고 상대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기갑 괴물들과 싸울 때 잠시 도움을 받았던 건 논외로 치고 몇 주 동안 거의 아는 척도 안 하던 주제에 갑자기 내가 잔뜩 약해져 있을 때 이런 식으로 들러붙는 건 명백히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은 그동안 내가 상대를 안 해줘서 무척 외로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당장 이거 놓고서 다시 네 방으로 돌아가. 너에겐 이미 후불도 지급했고 더 이상 네 애인 취급당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손우경은 내가 차갑게 굴수록 더 세게 껴안으며 귓가에 낮은 속삭임을 남겼다.

‘내 인형.’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잠이 안 와.’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매정하네. 오조한테는 그렇게 열내주더니.’

녀석이 내 귓바퀴를 혀로 핥아대며 자꾸 목이 움츠러들게 귀엣말을 건넸다.

‘현아, 나도 좀 불쌍하게 생각해줘.’

귀에 쪽 하고 키스를 하는데 너무 간지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손우경은 날 한참이나 말없이 껴안고 있다가 문득 회의감이 느껴지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실 너랑 한 번만 자보면 알 것 같았는데, 여전히 모르겠다.”

“…….”

“아까 널 다시 건드리는 게 아니었어.”

놈의 손이 내 얼굴을 꼬집듯이 어루만지며 후 하고 한숨이 섞인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나도 진짜 너란 놈을 잘 모르겠다. 남들이랑 싸울 때에는 완전히 미친놈 같고, 남자인 나한테 이상한 변태 짓도 하고, 파오하고 있을 때에는 서로 병신 같은 농담이나 주고받고, 심지어 새끼 여우한테는 때때로 다정한 형처럼 굴기도 하고.

“……대체 어느 게 네 진짜 모습이야.”

내 뜬금없는 질문에 손우경이 등을 돌리고 있던 내 고개를 뒤쪽으로 당기면서 대답했다.

“이거.”

그렇게 답한 손우경이 내 입술에 키스했다.

* * *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근 십 몇 년간 늘 새벽같이 일어나서 아침 예불을 드리던 습관 탓인지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또 아침 일찍부터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몸에 둘러져 있던 손우경의 팔을 떼어내서 놈이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왔다. 내 상체가 전부 벗겨져 있는데다 가슴과 팔 부위 곳곳에 남겨진 이 붉은 자국들로 봐선 아마 밤새 커다란 인간 모기 하나가 다녀간 듯했다.

내일부터는 모기 방지용 사각 결계라도 치고 자야지 정말로 안 되겠다.

인간 모기의 그 반반한 얼굴을 잠시간 노려보다가 왠지 방 안 공기도 답답하고 속도 갑갑해서 해서 일단 문밖으로 나갔다.

어제는 워낙 경황이 없고 날도 어둑해진 참이라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 건물의 복도는 군데군데 함몰하거나 부서져 있어서 자칫 잘못했다간 발이 빠지거나 땅으로 떨어질 염려가 있었다.

게다가 바깥으로 연결된 복도 난간 쪽을 내려다보니 어제 죽어나간 기갑 괴물들의 껍데기가 거리의 오만 곳에 흉측하게 널려 있었다. 이 죽어서도 비위 상하는 새끼들 같으니라고. 아침부터 공연히 내 눈만 버렸다.

가볍게 운동이나 할 겸 길게 이어진 복도를 쭉 걸어가다가 그만 발걸음이 뚝 멎었다.

한쪽 벽면이 완전히 깎여나간 복도의 끝에 오조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찬란하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맞이하듯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역광을 받으며 서 있었다. 때마침 바람의 정령들이 다가와 자신들의 투명한 몸을 그에게 통과시키며 새끼 여우를 위해 시원한 바람을 선사해주었다.

오조가 천진난만하게 미소 지으며 로브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가루를 꺼내어 정령들을 향해 후후 불어주었다. 밝게 빛나는 태양 광선이 새끼 여우의 전신을 환하게 감싸 안았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반짝반짝한 가루들이 점차 오조의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때, 눈의 착시 현상 때문인지 오조의 새하얀 뒷모습이 빛과 함께 금방이라도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릴 듯이 밝게 빛났다. 마음 한구석에서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 두 눈이 아리도록 하염없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쉬어가는 페이지 3 <파오>

★ 퇴직금이나 많이 얹어주세요

지금이 대체 몇 시야.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다가 손으로 침대 옆자리를 더듬어 아직 남아 있는 온기를 확인했다. 어젯밤 내 침대에서 밤새도록 뜨거운 밤을 보냈던 귀여운 그녀는 자신의 연락처가 담긴 쪽지 한 장만을 달랑 남겨놓고 사라진 뒤였다.

‘전 맹세컨대 파오 님이 처음이에요.’

그녀의 달뜬 목소리를 상기해보며 이불을 슬쩍 들춰 어젯밤 남겨진 흔적을 확인해보니 정말 그녀의 말대로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처녀였던 모양이었다. 처음이라서 그런지 입구에 귀두 끝이 진입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실신할 지경으로 무척이나 아파했었지. 어제는 술에 잔뜩 취해서 급하게 밀어 넣느라 그 보드랍고 좁은 옥문의 첫 감촉을 제대로 맛볼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진짜 죽여주게 꽉꽉 조여댔었지.

나는 두 팔로 여유롭게 뒷머리를 받친 채 혀끝으로 윗입술을 쓸며 새벽에 있었던 정사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떠올려보려고 노력했다.

새벽 내도록 여자 안에서 질펀하게 줄줄 흘러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아침이 밝아오니 내 하반신의 중심부가 이불 안에서 꼿꼿하게 솟아오른 것만 빼고는 꽤 만족스러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나저나 누가 내 위에 올라타서 앙앙거리며 저것 좀 빼줬으면 좋겠는데.

“안녕하십니까, 천봉대원수님!”

상관에 대한 예를 다 갖추는 합장을 하며 나에게 우렁찬 아침 인사를 건네는 파릇파릇하고 귀여운 어린 신병들이었다. 놈들에게 손을 까닥여주며 황금 사원 내부의 긴 복도를 거닐었다.

그리고 언젠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분명 나와 몸을 섞었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는 몇몇 비구니들이 날 본체만체하며 내 곁을 도망치듯 스쳐 지나갔다. 정말 상쾌한 아침이군. 그 모습을 즐겁게 음미하고 있다 보니 그만 다른 누군가와 몸이 쾅 부딪치고 말았다.

남자치곤 지나치게 하얀 피부를 가진 여느 곱상한 얼굴이 어딘지 눈에 익었다. 그동안 계속 전쟁터를 나도느라 못 본 지도 꽤 오래됐는데 여전히 위험한 분위기를 흘리고 다니는 걸 보면 저 녀석도 참 엔간하다 싶었다. 부모님께서 널 남자로 낳아주신 걸 천만다행으로 알라구.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벌써 수십 번 넘게 건드리고도 남았을 테니까.

“안녕, 현아. 상당히 오랜만이구나.”

내 안부 인사에도 별말 없이 나를 힐끗 올려다보는 눈초리가 썩 곱게 느껴지진 않았다. 제발 부탁인데 너까지도 날 그렇게 단죄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진 말아주라. 아무래도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현이의 얼굴은 무언가를 심하게 갈등하는 기색으로 역력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워낙 고집도 세고 자존심이 강했던 녀석이라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막상 입 밖으로 내뱉을 만한 성격은 못 되었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서 있는 현이를 남겨두고서 가던 길을 떠나려는데 내 등 뒤에서 녀석의 마지못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정말로.”

“…….”

“지금 이 사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는 건 아니시겠죠.”

무뚝뚝하게 들려오는 녀석의 음성과는 달리 고개를 돌려서 직접 보게 된 현의 표정은 바로 절박함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내 대답을 되돌려주었다.

“나한테 사랑 고백을 하려거든 저쪽에 줄서 있는 여자들 뒤로 가서 차분하게 네 순서나 기다리렴.”

“……그딴 농담이라면 집어치우십시오.”

내 짓궂은 농담에 어쩐지 화가 나 보이는 현이의 어깨에 한쪽 손을 얹으며 나는 웃는 낯으로 나직하게 얘기했다.

“이건 널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어디서든지 간에 항상 입조심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은 복도 천장 위에 숨겨져 있는 감시 카메라가 너무 많았다.

“방금 뭐라고 했지?”

여태껏 딴 데 집중하느라 내내 등을 보이고 있던 관음존자가 그제야 의자를 돌려서 자기 방에 들어온 직후부터 아예 안중에도 없었던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곳은 수정궁 건축을 거의 코앞에 두고 잠시 임시적으로 마련된 아돌프의 집무실이었다.

“관음, 날 천봉대윈수직에서 좀 잘라주면 안 되겠냐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돌프는 의아함에 젖은 눈빛으로 내 눈동자를 직시했다. 살면서 눈싸움이라면 거의 져본 역사가 없었지만, 관음존자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일은 항상 거북스러운 기분을 동반했다. 녀석은 딱 잘라 말했다.

“왜? 난 너 안 자를 건데. 사실 너만큼 쓸모 있는 놈도 드물어. 설마 나한테 간간이 들어오는 그 제보들 때문에 공연히 제 발 저려서 그러는 거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그 이유라면 어차피 관심 없으니까 앞으로도 여잘 만나고 싶으면 얼마든지 만나든가. 게다가 너는 좋든 싫든 반드시 여자를 안아야만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니까.”

어젯밤 그저 술김에 생각 없이 내지른 결론이 아니라 장장 몇 년에 걸친 아주 확고한 결심이었다. 나는 내 제복에 붙어 있던 천봉대원수의 문장과 손목에 박혀 있던 보라색 인증석을 관음존자의 책상에 전부 올려놓고서 마지막으로 정중하게 부탁했다.

“원하시면 추잡한 죄목을 갖다 붙이셔도 됩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실망감도 커질 테니까요.”

“내가 시간을 좀 더 줄 테니까 다시 생각해봐. 지금은 네놈 사표 처리나 해줄 정도로 그렇게 한가한 시기가 아냐.”

아돌프가 내가 방 안에 들어오기 직전에 이미 붙잡아둔 자객의 시체에서 심장 부위를 손으로 도려내며 가벼운 말투로 거절했다. 팔다리가 처참하게 뜯겨나간 그 자객은 아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처참한 몰골을 하고서 간신히 숨만 붙은 채 살아 있던 상태였다. 바닥으로 휙 던져진 심장이 통통거리다가 피에 젖은 바닥 가장자리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실력 자체가 몹시 뛰어난 외과 의사라고 해도 저렇게 사람 몸에서 원하는 부위만을 절묘하게 떼어내진 못할 텐데.

항시 보게 되는 장면임에도 절로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었다.

피로 물든 자기 손가락 끝을 뇌쇄적으로 핥아 내리며 나를 강경하게 바라보는 관음존자에게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당신과 싸워봤자 절대로 못 이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선 내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 자꾸 무모한 일에 도전하고 싶어지거든요. 다들 내가 영웅 흉내라도 내주길 바라는 듯한데 저에겐 그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관음존자가 죽어버린 시체에 이제 흥미를 잃었다는 듯 손을 완전히 털고서 무심하게 대꾸했다.

“하긴 웬만큼 실력 있던 놈들 중에서 현재로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놈은 고작 너 정도밖에 없으니까.”

“…….”

“내가 널 기특하게 보는 이유 중 하나는 네가 매우 영리하기 때문이지. 게다가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주제 파악을 아주 잘하고 있거든.”

어린애 같은 얼굴로도 저딴 건방진 말을 지껄여대는 저 가느다란 목을 당장이라도 이 두 손으로 잔인하게 따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누군가를 죽일 수만 있었다면 놈은 벌써 수백 수천 번도 넘게 죽었을 목숨이었다. 온전히 개죽음을 선택했던 나의 동료들과는 달리 나는 불의를 위해 내 자신을 희생시키기엔 너무나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고작해야 나와 종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남에게 등 떠밀리듯 애꿎게 순교할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그걸 누가 알아준다고 그래.

그러니 금방이라도 풍선처럼 터져버릴 것 같은 내 본성을 애써 억눌러가며 점점 일그러지려는 안면 근육에 잔뜩 힘을 주었다. 관음존자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고는 타이르듯 말했다.

“야아, 수용소도 벌써 꽉 찬 마당에 너 자꾸 그런 식으로 굴면 그냥 나한테 죽든가 해야 돼.”

“보내주십시오. 아직 부하들의 시신도 회수하지 못했는데 랜드리올에 한 번쯤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죽은 것도 억울한데 망자의 넋을 기려주는 이가 그래도 한 사람쯤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정말로 후회 안 할 자신 있냐? 다른 경쟁자들도 없으니 이대로 종단에 계속 머무르면 네 앞날은 탄탄대로일 텐데.”

“퇴직금이나 섭섭지 않게 잘 얹어주십시오.”

관음존자는 흐음 하고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내게 다른 제안을 했다.

“좋아.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강요하진 않겠어. 다만 이 사표는 아직 수리해줄 수 없어. 내가 보기에도 지금으로선 반대파들에게 가장 큰 기대주이자 다크호스가 아마도 파오 너일 테니까. 중간에서 난감해진 네 입장을 내가 너그러이 이해해줄 테니 당분간은 머리나 좀 식혔다가 상황이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와라.”

“그런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만. 내가 용인해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야. 네가 되돌아오는 시기는 나중에 내가 정해주도록 하지. 그리고 한 가지…….”

관음존자의 임시 집무실 문을 닫고 나오는 길이었다. 오늘부로 다른 생각들은 당분간 일절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비록 한시적인 제한이 걸려 있는 자유였지만 어딘지 홀가분한 심정이 들었다. 현실에서 도망쳐버린 비겁자의 길을 선택했지만 앞으로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야 했던 죽음의 공포.

그것은 관음존자와 반대파들 사이에 첨예하게 날이 선 대립 관계에서 내가 느껴야 하는 부담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아무런 부담감도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타인을 위해서 목숨을 걸 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진작부터 깨달고 있었다.

허나 내 부하들을 단 한순간에 모두 잃게 되었던 그날의 저녁.

‘그것’이 미친 듯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는 이미 껍데기만 남아버린 내 부하들의 시신들로 가득했었다. 살아남은 것이 결코 죄가 될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그때의 내가 느꼈던 절망감만은 그 무엇과도 비견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럼에도 손가락 하나조차 꿈쩍할 수 없이 그저 바닥에 누워만 있는 무능한 내 자신을 끝없이 저주하고 원망해야 했다.

달빛만이 오롯이 나를 비추고 있던 검은색 하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뛰어올랐다.

거대한 낫처럼 보이는 지팡이와 바람결에 펄럭이는 새카만 로브 자락이 마치 저승사자가 잔혹한 춤을 추어대는 듯한 기묘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내 곁을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만 푹 눌러쓴 로브에 가려진 그림리퍼의 얼굴에서 나는 그 짧은 찰나에 아주 아름다운 파란색 눈동자를 발견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완전히 모호해진 순간, 내가 보았던 그 눈동자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인상과 충격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것은 내가 마치 죄인임을 확인받는 끔찍한 낙인과도 같았다.

쉬어가는 페이지 3 <파오> 편 마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