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Let ME Out (12/24)

9. Let ME Out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도시에 갇힌 뒤, 내 몸과 정신은 시간의 흐름에 점점 무감각해져가는 것 같았다. 안팎을 완벽히 분리하는 거대한 돔이 머리 위의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유리 껍질로 이루어진 알 같았고, 나는 그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미약한 생명체인 것처럼 느껴졌다.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하듯 당장 저 돔을 깨부수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가 끝없이 피어올랐다.

상상과 현실의 괴리가 불만을 낳아 임계 수치에 다다랐을 즈음, 파오 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놈은 어느 상점의 유리창을 깨부수고는 쇼윈도에 진열돼 있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끄집어내는 중이었다. 눈대중만으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쏙쏙 골라내 메고 있던 자루에 탈탈 털어 넣은 녀석은, 약 반 시간 전에 다른 가게에서 훔쳐 입었던 코트 역시 더 비싸 보이는 검은색 가죽 재킷으로 바꿔 입었다.

원래도 양심이라곤 없는 위인이었으나, 종단에서 무일푼으로 쫓겨난 후로 몇 년씩 객지를 떠돌다 보니 어느덧 거지 근성이라도 몸에 밴 모양이었다. 뭐, 그 밖에도 휘황찬란하고 번쩍번쩍한 패물과 장신구들을 몸 여기저기에 잔뜩 걸치고 있었는데 눈깔이 멀쩡하다면 제발 거울로 니 꼴 좀 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조용히 혀를 차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내 얼굴로 쏟아지던 조용한 눈빛과 맞닥뜨렸다. 그 주체인 손우경은 예의 그 짐승 같은 시선으로 나를 한껏 허기지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답지 않게 묘한 침묵을 지키던 놈이 이윽고 무척이나 슬프다는 얼굴로 입을 뗐다.

“……나, 고기 먹고 싶어.”

가뜩이나 사납게 생긴데다 일반인에 비해 송곳니마저 첨예하게 발달한 터라, 녀석이 지금 배고프다고 투정하는 건지 아님 날 먹고 싶다고 간접적으로 협박하는 건지 쉽사리 의중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때 큼직한 다이아 반지를 손가락에 끼던 파오 놈이 기름진 말투로 불쑥 끼어들었다.

“흠, 고기가 없으면 삼장을 먹으면 되잖아.”

일부러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하는 녀석의 표정에서 다분한 고의성이 느껴졌다. 나는 그 말 같지도 않은 농담에 내심 혹해하는 손우경을 애써 외면했다. 허튼소리를 지껄인 파오에겐 개솝우화대종말의 여파로 대부분 소실되어버린 많은 역사적 기록들을, 개솝 P. Shit이라는 사람이 여기저기에서 잔뜩 긁어모아 동식물과 기타 사물들을 인격화한 주인공으로 내세워 풍자적으로 집필한 책이다. 가뭄이라 먹을 것이 없어서 봉기를 일으킨 토끼 나라의 백성들에게, 철없는 토끼 왕비가 ‘토끼풀이 없으면 당근을 먹으면 된다’고 얘기했다가 그만 단두대에 귀가 잘려 죽게 된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목인 개솝우화는 「이솝우화」라는 고서의 패러디라고 하며, 개솝 P. Shit의 익살스러운 필명은 배설물을 뜻한다고 한다에 등장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단두대형을 선고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 혼자 혁명을 일으키기엔 능력이 많이 부족한터라 사형 선고는 그저 상상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반드시 출구를 찾겠단 의지로 평소보다 이르게 움직였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시간이 대체 얼마나 흐른 걸까. 일출과 일몰만으로 그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요즘 들어 낮이 이상하리만치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파오의 도둑놈 자루는 훔친 물건들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슬슬 숙소로 돌아가 내일을 위한 재정비를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때 누군가 내 제복 자락을 잡고 가볍게 흔들어댔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두 개의 파란불이 깜빡이며 나름대로 충전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삼장, 우리 밥 언제 먹을 거야?”

이곳에서 유일하게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시계가 존재한다면 그건 바로 매 끼니마다 재깍 울려대는 오조의 배꼽시계일 것이다. 얘는 전생에 굶어 죽기라도 했었는지 밥에 관한 집착만은 상당했다.

그보다 왜 다들 날 보며 밥 타령을 해대는지 모르겠다. 혹시 이 괴물 같은 녀석들에게 나란 존재는 오로지 허기나 채워주는 역할인 건가, 문득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내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지는 생각은 접어두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새끼 여우의 등쌀에 못 이겨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 3.0」부터 꺼내 들었다. 알록달록한 모르이아 액체가 든 시험관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데 유독 야채 만두용 액체가 거의 밑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간신히 열흘 남짓 버틸 만한 용량이었다.

내 옆에 찰싹 붙어 턱을 괴고는 초롱초롱 두 눈을 빛내는 저 만두 귀신에게, 나는 차마 만두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얘길 할 수 없었다. 키우던 여우에게 먹이를 주지 않으면 저 배은망덕한 것이 도리어 나를 물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샬레 안에서 만두와 감자, 호밀빵 등이 뿌연 김을 뿜으며 먹음직스럽게 삶기고 있었다. 혼합 요리 중 부피가 가장 작아서인지 인기가 별로 없는 계란 부침을 내 몫으로 따로 만들며 그 위에 적당히 간을 하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서 서글픔이 솟구쳤다. 이 사소한 음식 배분에서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내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는 어떤 이의 시선을 느꼈다. 서글펐던 마음은 곧 정체 모를, 어쩐지 이름을 붙이기가 저어되는 간질간질한 감정으로 대체되었다. 누군가 내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건 싫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물에 탄 먹물처럼 먹먹하게 번지던 그 감정을 서둘러 가라앉히며 느슨하게 풀어지려던 마음을 한 번 더 꽉 조였다.

이 기분에 잠시라도 이끌려선 안 된다.

어차피 우린 섞일 수 없으니까.

모두의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진작 만두 두 개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선 뭉글이의 등짝에 찰싹 들러붙어 있던 거머리를 떼어냈다. 막 기분 좋게 잠들려던 차에 수면을 방해받은 새끼 여우는 잠결에 주변을 더듬더니 근처에 놓인 지팡이를 말아 쥐었다. 그 순간, 바닥에서 수상쩍은 빛이 뿜어 나오며 다른 차원과 연결된 통로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꼴을 관망하던 손우경은 잠이 덜 깬 상태로 변성 의식에 들어선 오조의 뒤통수를 무자비하게 후려갈겼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오조가 서둘러 소환 자체를 무마시키기 시작했다. 차원의 입구에서 사악한 기운과 함께 스멀스멀 기어 나오던 어느 흉측한 대가리께서는, 하필 내 쪽을 쳐다보며 못내 아쉬운 입맛을 쩝 다시더니 마침내 점이 되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이 웃지 못할 촌극을 보고 있자니 포타라카의 수정궁 인근에 떠돌던 괴담이 떠올랐다. 내용인즉슨, 아돌프의 수정궁 근방에서 유난히 비구니들의 실종 사고가 잦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원인이 가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관음존자의 침실 문 앞에는 새빨간 글씨로 ‘내 잠을 깨운 자, 지옥으로 떨어지리라’라는 시구가 적혀 있는데, 돌이켜 보면 아돌프는 허튼소리를 지껄일 만큼 그리 유머 감각이 풍부하진 않았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졸음에 압사 직전인 오조가 맞은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부루퉁하게 입을 열었다.

“나 졸려.”

“오후 일정에 대해 다시 의논할 거니까 너 잠깐 일어나 있어봐. 언제까지고 여기 계속 처박혀 있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

“음, 내가 생각하기에…….”

“네가 생각하기에?”

오조는 망설임 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내가 생각하기에 삼장은 쓸데없는 일에 너무 열 올리는 것 같아. 언제나 비슷한 얘기만 반복하다가 결국 밖으로 나가서 출구를 찾아보자는 결론만 나는데 말이야. 게다가 내가 대화에 참여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번지르르한 핑계에 반해 놈의 얼굴에는 나 졸리니까 귀찮게 굴지 말라고 적혀 있는 듯했다. 잠자코 듣던 파오가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래, 이 상황에서 의논 좀 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 하지만 쓸데없이 책임감만 투철한 놈들일수록 시간 낭비에 일가견이 있는 반면, 늘 합리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멀잖아?”

얼핏 듣기에 오조 편이라도 들어주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나에 대한 비난에 불과했다. 촌철살인의 날카로운 비수로 응수해주고 싶었지만 머리에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웬만한 빈정거림으로는 파오에게 손톱만큼의 타격조차 가하기 어렵다.

내가 뭐라고 쏘아붙여줄지 고민하는 사이, 손우경이 그새 뭉글이 위에 널브러진 오조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쓸데없는 짓이고 책임감이고 간에.”

손우경은 생긋 웃으며 엎어져 있던 오조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그러곤 하던 말을 마저 잇는다.

“내가 잘 수 없으면 당연히 너도 잘 수 없어.”

마치 종단군부에서나 통할 법한 이기적인 연대 의식이었다. 그곳은 진정 평등과 개고생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었으니까. 평등하게 다 같이 개고생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곳이 바로 종단군부라고 할 수 있었다.

불만에 가득 찬 새끼 여우의 볼따구가 만두같이 부풀었다. 손우경은 낄낄거리며 녀석을 (힘으로) 얌전하게 앉히고는 우리를 스윽 돌아보았다.

“내 생각에도 더 이상 의논 같은 건 전혀 무의미할 것 같고, 이제부터는 좀 다른 시도를 해볼까 하는데.”

파오가 되물었다.

“이를테면?”

손우경이 파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 이건 단순히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누군가 일부러 우리 발목을 잡으려고 이 공간을 이용한 것 같아.”

하지만 파오의 반응은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그건, 네 억측일 수도 있잖아?”

“난 조금도 억측이라고 생각 안 해. 잘 떠올려봐. 현이가 독에 당했던 날, 분명히 우리 외에 누군가가 이 도시 안에 있었어. 그놈은 필시 여기가 어떤 곳인지 사전에 알고 있었을 거야. 왜냐하면 이 도시에 발을 들이자마자 이계의 소환수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릴 공격해 왔으니까. 오조, 너는 지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가 될 텐데?”

오조가 느릿하게 눈알을 굴려보더니 갑자기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토해냈다.

“……그러고 보니 진짜 그러네?”

새끼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로 주절거렸다.

“그래, 맞아. 아주 아주 특수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한, 그 녀석들은 현계에서 머무는 동안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 놈들 주변에서 그걸 감당해주는 소환사가 있지 않고서야 스스로 그 에너지를 충당할 수 없으니까. 그럼 누가 대체…….”

오조는 부연 설명을 바라는 눈초리로 손우경을 올려다보았다. 손우경이 말했다.

“서쪽 놈들이 암만 머저리 짓을 하고 있대도 환영제야단의 동태를 살피는 것까지 느슨하게 하진 않을 거야. 모르긴 몰라도 실시간 감시를 위해서 종단 곳곳에 끄나풀을 심어놨을 가능성이 커. 그건 우리가 출발하기 전부터 누군가에 의해 계속 미행당하는 중이란 점만 봐도 짐작이 가능한 부분이지. 우리를 뒤쫓아 와서 이 도시 안까지 침입했던 그놈이라면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출구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자 오조가 나를 힐끔거리며 아쉽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치만 걔는 벌써 삼장이 죽여버렸는데.”

날 향한 새끼 여우의 은근한 책망은 그렇다 쳐도 파오 놈의 쯧쯧 혀 차는 소리만은 참아주기가 어려웠다. 놈이 한심해 죽겠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적은 일단 포로로 삼은 다음, 골수까지 푹 우려내 필요한 정보를 전부 얻은 뒤에나 죽이라고 안 배웠냐? 군부 필수 교육 과정에서 왜 3년씩이나 고문 기술 같은 걸 단계별로 가르치겠냐? 어?”

“……그것 참 애석하게 됐군요.”

“진심 어린 사과야 당연히 받겠지만 어째 네 표정이 별로 미안해 보이질 않는데?”

“애초에 당신에게 사과한 기억 따윈 없습니다만. 그리고 뭘 착각하나 본데 저는 전쟁터에서 소모품으로 쓰이는 군부 출신 따위가 아닙니다.”

“하, 너야말로 뭘 모르나 본데 그 소모품조차 쓸모없는 불량품 따윈 취급하지 않는다구!”

점점 쓸데없는 방향으로 불길이 번져가는 이 열띤 분위기 속에서 제 삼자인 손우경이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얼른 끼어들었다. 하지만 녀석의 말은 내 입장에서 하등 유리할 것 없이 찬물을 들이붓는 격이었다.

“뭐어, 가장 빠른 지름길이 어이없게 막혀버린 건 맞아. 솔직히 말해서 누구 씨가 섣부른 개인행동을 하기 전에 나나 사형에게 먼저 논의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차피 이미 저세상 문턱 밟은 놈을 되살릴 순 없으니까…… 이 얘긴 그쯤에서 끝내자. 중요한 건 이 도시 어딘가에 분명 나가는 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니까.”

녀석이 하고 싶었던 말이 내 편에서 날 거들어주려던 건지, 아님 거들어주는 척 쏟아지는 비난에 편승하고 싶었던 건지 난 잘 모르겠다. 놈이 날 비난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아님 둘 다인가. 왠지 의도 자체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화법이다. 자기 할 말은 다 하면서도 잇속은 잇속대로 챙기는?

어쨌거나 파오의 활촉은 나를 대신해 손우경을 향했다.

“그럼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이 상황에서 달라지는 점은 뭔데? 한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서 그게 마치 사실인 것처럼 포장해서 뭐 대단한 거라도 발견한 척 굴지 마. 여태껏 우리가 매일같이 해왔던 일 자체가 바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출구를 찾는 일 아니었나?”

거슬릴 만한 파오의 도발성 발언에도 손우경은 침착했다. 그야 그는 대화의 주도권을 호락호락 내어주는 인물이 아니니까. 딱 한 번, 관음존자와의 대면을 제외하고는.

“우리 관점을 좀 바꿔보자. 나도 그렇고 다들 이제까지는 그저 ‘출구처럼 보이는’ 걸 찾고 있었을 뿐이잖아? 하지만 이렇게 외부와 격리된 장소에다, 애초에 겉보기에도 문으로 보이는 출구 같은 걸 만들어놨을 리가 없어. 만약 눈에 쉽게 띄는 출구가 있었다면 건물마다 해골들이 가득 쌓인 그런 참상들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사람은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도 그냥 죽기보다는 차라리 사는 쪽을 택하니까. 나는 이곳 어딘가에, 어쩌면 아주 가까운 곳에 외부로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어떤 교묘한 장치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자면 여기에서 우릴 빠져나가게 해줄 열쇠는 굉장히 의외성이 있는 장소거나 물건일 거야.”

“그러니까 무슨 근거로.”

“여태 설명했잖아? 오조는 이미 다 알아차린 눈치인데 설마 추가로 더 설명이 필요한 거야? 그 역겹게 생긴 괴물 녀석들은 소환사의 도움 없인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고 놈들은 이 도시에서 간발의 차로 우리를 공격했어. 소환에 뒤따르는 역 에너지를 감당해주는 그릇은 소환수들과 일정 거리 이상은 떨어질 수 없다고 아까 오조가 말했고. 게다가 이곳에 우리 외의 다른 존재가 있단 걸 이미 현이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했어.”

손우경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뭔지 알 듯 말 듯 아리송했다. 그 녀석들 역시 우리처럼 출구의 유무 따위 고려하지 않고 이 저주받은 장소에 발을 들였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뭔가 중요한 이음새 하나가 빠진 듯한 헐거운 기분인데 그게 대체 뭐지.

“사형도 그간 겪어봐서 알겠지만 이 도시의 동력원은 이미 오래전에 끊겼어. 그렇다면 차라리 원시적으로 작동하는 수동 장치 같은 걸 찾아보는 편이 현재로선 가장 큰 해결책이 될 거야. 그러다 보면 아마도 이 빛바랜 도시에서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나 어떤 물건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야. 먼지는 결코 거짓말을 안 하는 법이니까.”

“너 이 도시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그새 까먹기라도 한 거냐?”

“구태여 이 도시 전체를 다 뒤져볼 필요는 없어. 현이가 죽인 그 쥐새끼가 숨어 있던 자리부터 시작해서 그 주위로 계속 반경을 넓혀가면서 샅샅이 뒤지다 보면 조만간 쥐구멍이 나올 거라고.”

여전히 파오가 반문했다.

“왜 하필 그 장소에서 시작해야 되는데?”

그러자 손우경이 날 힐끗 보며 조금은 미안하단 얼굴로 쓰게 웃었다.

“만에 하나 그 녀석이 그라우마탄급의 소환수 수십 마리를 단번에 소환할 정도의 대단한 실력자라면…… 그렇게 쉽게 죽었을 린 없을 테니까. 게다가 녀석이 꽁꽁 숨어 있던 장소는 감시하려던 목적치고는 우리 숙소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어.”

파오가 그 뒷얘기를 듣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꽤나 과장된 몸짓으로.

“과연 그렇군. 하기야 약한 놈들의 특성은 언제든 자기 도망칠 구석 정도는 자기 근처에다 마련해둔다는 거지. 현이 손에 죽었을 정도라면 확실히 그 정도의 실력자였을 리는 없겠고 그저 별 볼일 없는 잔챙이에 불과할 테니!”

헐거웠던 이음새를 조이는 나사못이 내 심장에 쾅쾅 박히고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잔챙이를 들먹이며 유쾌하게 나를 비웃고 있는 파오 때문에 손우경이 나를 돌아보며 변명하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거기까진 얘기하지 않았어.”

“…….”

정리해보자면, 지난번 내가 죽였던 그놈이 고작 내 손에도 죽어나갈 만큼 무지하게 약해빠졌던지라 몸을 사리기 위해 가급적 출구 근처에서 은신하고 있었을 거란 추측이었다. 손우경이 주장하는 바는 그랬고, 그 얘길 차마 내 앞에서 직접 꺼내기가 저어되니 다른 녀석들의 입을 통해서 핵심을 전달한 것이었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솜씨가 가히 천재적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상당히 그럴싸한 추론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놈들에게서 이런 취급이나 받으면서 함께 다녀야 하는 내 처지가 문득 더없이 가련하게 느껴졌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오조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럼 우리를 이곳에다 가둬놓고 이계에서 소환수들을 불러온 건 대체 누구야?”

오조 역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걸출한 천재 소환사이니만큼, 아무래도 그라우마탄급의 소환수들을 불러들인 인물이 누구인지 순수한 호기심이 이는 것 같았다. 손우경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오조가 재촉하듯 말을 덧붙였다.

“내가 방금 전 공기의 정령들에게 살짝 물어봤는데 이곳엔 우리 외에는 그 어떤 생명체의 반응도 없다고 그랬어. 우경이 네 말대로라면 그자가 첫날 소환을 끝내고서 혼자 이 도시를 빠져나갔다는 거야? 네가 짐작하는 그 출구를 통해서?”

손우경이 곤란한 기색으로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

“어쩌면, 지금 우리 안에 있을 수도 있겠지.”

지난번 공원에서 손우경이 넌지시 언급했던 것처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현 상황을 반추해봤을 때 언젠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그 대상은 어쩌면 파오라든가, 파오라든가, 혹은 파오 저놈이라든가.

어느 누가 됐든지 간에 그 가능성의 문은 모든 방향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사실은 좀 편파적으로.

물론 나의 사감이 어느 정도 섞여 있긴 했으나 애당초 우리를 이 도시로 끌어들인 것도 저 녀석이었고, 항시 출구를 찾는 일에 그리 의욕을 보이지 않는데다 노상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까지, 파오를 의심할 여지는 충분했다. 허나 내가 파오를 슬쩍 곁눈질하며 동태를 살펴봤을 때 녀석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외려 이 상황 자체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며 대답을 촉구하는 오조에게 손우경이 한쪽 눈썹을 장난스럽게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만일 우리들 중에 첩자가 숨어 있다면 가장 의심이 가는 사람은.”

“가장 의심이 가는 사람은?”

녀석이 씩 웃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너.”

오조의 호수같이 파란 눈동자에 손우경이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눈이 잔뜩 휘둥그레진 오조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물음표를 토해냈다.

“……뭐어?”

새끼 여우가 그제야 발끈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아냐!”

손우경이 오조를 진정시키듯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도시 안에 우리 외에 다른 생명체 반응이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객관적으로 말해서 의심 가는 모든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건 바로 너야. 네 개인적인 사정이야 어떻던, 룸버린에서의 고위직까지 마다하고 적으로 싸웠던 환영제야단에 망명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도가 수상한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피부색으로 차별을 두자는 건 아니지만 우리 중 유일하게 백색 피부를 가진 서양인은 오조 너뿐이야. 달리 생각해보면 네가 이중 첩자일 가능성도 전혀 무시할 순 없어.”

손우경의 신랄한 말에 새끼 여우가 굉장히 충격 받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기왕에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난 서쪽의 마법 계통이나 소환 체계에 대해선 아는 바가 많지 않지만 사실 동서양의 수행 체계는 명칭만 다를 뿐, 근본을 관통하는 건 똑같다고 봐. 그러니 그라우마탄급의 소환수를 불러내는 그릇은 그리 흔치 않을 테고, 그 그릇이 지금 내 옆에 존재하고 있는데 의심을 안 해볼 순 없지. 단순히 생각해봐도 이건 아주 쉽게 결론이 나는 문제야.”

“그, 그건…….”

평소엔 오조가 잠을 자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손우경이 오늘따라 잠까지 방해해가며 꽤나 짓궂은 말들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 오조를 보니 그 생각이 싹 날아가버렸다. 듣고 보니 전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새끼 여우가 정말 룸버린의 이중 첩자라면 서쪽으로 향하는 우리를 이 도시에 가둬놓는 이유가 설명될뿐더러, 도시에 첫발을 들였을 때 우릴 공격했던 그 소환수들의 출처가 분명해지는 셈이었다.

오조는 동물 머리뼈 지팡이를 바닥으로 쿵 내리찍으며 잔뜩 자존심이 상한 눈빛으로 손우경을 노려봤다. 새끼 여우의 전신에서 파란빛을 띤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 기운에 방 안 모든 사물이 조금씩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온 유리창이 터져나가고 물건들이 뒤집히면서 내부가 아수라장으로 돌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어떤 기운의 압박감은 실로 엄청났다. 그로 인해 나조차도 두 다리가 후들거려 내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맞은편 벽으로 주르륵 밀려난 침대는 기어이 벌컥 뒤집혀버렸으며 탁상을 비롯한 작은 집기들은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해 산산조각이 났다(이런 때 구태여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건 아니지만 하필 이곳은 공교롭게도 내 방이었다……).

오조의 몸에선 계속해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 나왔다. 일전에 보았던 그 최상위 계급이 금방이라도 허공을 찢고 방 안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손우경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도리어 놈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그만둬.”

불같이 달아올라 씩씩거리는 오조에게 손우경이 서늘하게 경고했다.

“날 이길 수 없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넌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까.”

어찌 보면 도발이나 다름없는데 괴이쩍게도 오조의 흥분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흥분할 거 없어. 난 단지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얘기한 것뿐이니까.”

새끼 여우는 지팡이 끝으로 손우경을 겨누며 강경하게 소리쳤다.

“두 번 배신은 안 해!”

두 눈까지 이글이글 빛내며 발끈하는 걸 보니 룸버린을 배신한 전적을 내심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모양이다.

“그럼 스스로 증명해봐. 그놈들에게 복수하러 간다면서? 언제까지 이 도시에 갇혀서 잠만 잘 거야?”

손우경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떨던 오조가 별안간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녀석이 사라지자 눈을 끔벅거리며 손우경을 미적지근하게 바라보던 뭉글이 역시 제 주인을 따라 둔중한 몸뚱이를 이끌고 나갔다.

내내 가만히 있었던 파오가 은근히 손우경을 타박했다.

“굳이 그럴 것까진 없잖아. 그림리퍼에 관한 건 지난번에 끝내기로 한 거 아니었냐.”

“아니, 쟤만 맨날 퍼 자는 게 억울해져서.”

듣자하니 사전에 둘이 이미 이에 관한 얘기를 나눴던 낌새였다. 그 사실 자체도 좀 놀랍지만 어쩐지 파오가 오조에게 관대해진 것 같아 아연해졌다.

손우경은 깨져나간 유리창 너머를 보며 해쓱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방금 그거 봤어? 오조 몸 안에서 시커먼 혼백 같은 게 수백 개나 튀어나와서 내 주변을 에워쌌던 거. 까딱하면 골로 가는 줄 알았어.”

키득거리며 웃고 있지만 이제야 한숨 돌렸다는 얼굴이었다.

“분명 의심할 여지는 충분하지만.”

파오의 말에 손우경이 연이어서 대꾸했다.

“그래. 오조가 진짜 첩자라면 이런 귀찮은 짓까지 벌이진 않았겠지. 중간에 제거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문득 손우경의 행동에 작은 의문이 들었다. 의심 가는 인물에 대해 파오와만 긴히 이야기한 것도 그렇고, 오조에 대한 의심을 너무 쉽게 거둔 것도 그렇고. 그렇다면 대체 지난번 그가 내게 했던 얘기들은 다 뭐였는지.

‘너, 여기서 내가 아니면 대체 누굴 믿을 거야?’

대단히 뭉뚱그린 말이었지만 나와 손우경 자신, 오조와 파오를 분리하고 그들을 향한 의심을 내포한 발언이었다. 그러니까 더 모르겠는 거다.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설마 나를 의심하고 있나?

갖가지 생각이 혼란스러운 가지들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짜증 날 정도로 신경이 쓰였던 부분은.

“당시 랜드리올전에 참가했던 정예 부대 규모가 어땠다고?”

손우경의 질문에 파오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팔천 기.”

“음, 생각보다 훨씬 무식한 숫자였네. 그나저나 사형도 참 무능하다. 팔천 기씩이나 데리고 가서는 오조 놈에게 전멸이라니. 맨몸으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어.”

“그래, 관음존자가 치사하게 퇴직금 한 푼을 안 주더라고.”

두 녀석은 장난스럽게 대거리하며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도중에 손우경이 멍하니 선 내 어깨를 툭 치며 뭐하고 있느냔 눈짓을 했다. 그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두 다리를 움직였지만 생각은 여전히 한곳, 그 자리에 그대로 고정된 채 꿈쩍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짜증 날 정도로 신경 쓰이는 부분은,

‘방금 그거 봤어? 오조 몸 안에서 시커먼 혼백 같은 게 수백 개나 튀어나와서 내 주변을 에워쌌던 거. 까딱하면 골로 가는 줄 알았어.’

내 눈에 그런 혼백 같은 건 전혀 보이질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조가 폭주하며 도시 곳곳을 부수고 있는 동안, 뭉글이는 뒷발로 귀를 벅벅 긁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항상 본인 몸을 뒤덮고 있던 오조라는 이불이 사라져서인지 녀석은 왠지 좀 침울해 보이기도 했다. 사실 처음에는 뭐 저렇게 생긴 놈이 다 있나 싶었는데, 자꾸 보다 보니 그새 정이라도 들었는지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오조와 그가 불러낸 소환수들의 행적을 뒤쫓아 도시 곳곳을 어슬렁거리던 두 놈은 어느덧 극도로 조용해진 내게 관심을 돌렸다. 기분이 가라앉아 별로 말을 섞고 싶진 않았지만 파오 녀석이 자꾸 신경을 긁어대는 바람에 결국 놈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말았다.

손우경은 나랑 둘이 있을 때에나 낯간지러운 말들을 지껄이며 귀찮게 들러붙는 편이지, 이런 때에는 파오와 한통속이 되어 내 시시각각적인 반응을 관망하는 쪽이었다.

“넌 또 뭐가 그리 불만이냐.”

“그쪽에서 계속 성가시게 굴지만 않는다면 이 불만도 금세 사라질 것 같습니다.”

파오가 내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까 우경이 자식이 네 보잘것없는 실력에 대해 너무 직접적으로 비난해서 그런 거지? 내가 듣기에도 좀 심하더라고. 어떻게 앞에서 대놓고 너에게 그따위 인신공격을 할 수 있는지 말이야.”

미안한데 그건 너였거든요.

그래도 파오의 지적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내 기분이 저조한 이유는 명백했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 저 세 괴물과의 확연한 실력 차이에서 기인한 열등감이 내 약해빠진 마음을 갉작갉작 파먹고 있었다. 비록 오조의 몸에서 뿜어지는 살기를 느낄 수는 있었어도 저 손우경처럼 그 혼백들을 감지하거나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다.

때마침 손우경이 흐음 하며 내게 말했다.

“아돌프가 개안 수행 같은 건 전혀 안 시켜줬나 봐.”

딱히 잘난 척하는 말투거나 날 비하한 건 아니었지만 순간 생각을 읽힌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사실 개안은 수행자의 덕목 중에서 가장 기본 중에 기본이야. 생각보다 별로 어렵지도 않아. 서쪽의 마법사들은 아스트랄 투사라는 걸 통해서 혼적인 존재에 더 심층적으로 접근하기도 해. 물론 준비되지 않은 자에겐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지만, 마음의 눈을 떴을 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더 빠르게 통달할 수 있거든. 너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까막눈은 아닌 것 같지만 시각이나 청각, 후각, 미감, 촉각에 준하는 오감이나 그 형태가 확실하게 인지된 것들만 볼 수 있지. 실제로도 오조가 불러내는 4대 원소 애들은 잘 인식하고 있잖아? 이를테면 불의 정령 같은.”

이어서 손우경은 대뜸 자기 엄지를 이로 물어뜯었다. 손가락에 송골송골 피가 맺히자 내 이마로 슥 가져다댔다. 그러곤 이마 정중앙에 낙인을 찍듯 가볍게 짓눌렀다.

“효과는 아주 잠시뿐이겠지만 일종의 점안식점안식點眼式 혹은 개안식開眼式이라고도 부른다. 불상이나 불화를 제작할 때 일정한 의식을 행한 후에 눈동자를 새기며 신성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그러한 행위 일체를 일컫는다이라고 생각해봐.”

피가 묻은 녀석의 아랫입술이 유독 붉어 보였다.

이윽고 손우경의 뒤쪽 공간이 대뜸 괴상하게 이지러졌다. 새까맣고 형태가 불분명한 것들이 건물 사이사이와 바닥 틈새에서 빠른 속도로 오갔다. 뿐만 아니라 도저히 형언하기가 어려운, 잔혹하게 어그러진 형상의 무언가가 도시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었다. 이승을 떠도는 저급한 영들이라면 여러 번 만나본 적 있지만, 그것도 다섯 개의 검 수용소처럼 부정적 에너지가 심하게 응축된 장소라든가 퇴마 행위의 일환으로 주술과 부적을 사용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저것들은 자못 인간의 형태를 지녔으면서도 그 범주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지독하고 처참한 생김새였다.

손우경이 그런 내 귓가에 대고 비밀을 이야기하듯 속삭였다.

‘이런 것들을 평소에도 보게 되면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금방 미쳐버려.’

내가 독에 당했던 그날 밤, 손우경이 나를 끌어안고서 건넸던 말들이 떠올랐다.

‘문 앞에서 심장과 팔 한쪽이 없는 남자가 널 아주 무섭게 쳐다보고 있어.’

그때에는 피곤함에 지쳐서 그리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는데 실제로 손우경은 봤던 것이다. 원한에 젖어 날 따라온 그 남자의 원혼을.

벌컥 두려움이 엄습했다. 다시 손우경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놈 쪽에서 새하얗고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눈을 뜨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때문인지, 내 주변에 널려 있던 그 음산하고 사악한 형상의 존재들이 좀처럼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날, 내가 잠들기 직전에 손우경이 뭐라고 말했더라.

‘괜찮아. 내 허락 없이는 너한테 아무 짓도 못해.’

힘겹게 놈을 둘러싼 빛을 마주하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내가 고민하고 있던 부분을 녀석은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야 난 기본적으로 항상 너한테 집중하고 있으니까.”

문득 놈이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 때문에 전혀 놈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손우경은 자신의 피가 묻은 내 이마를 손끝으로 닦아냈고, 곧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원하는 것만 보는 인생도 그리 나쁜 건 아냐.”

하마터면 평소같이 장난기 어린 그의 눈동자를 넋 놓고 볼 뻔했다. 옆에서 파오가 심기 불편한 목소리로 넌지시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손우경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와, 지랄들 한다.”

손우경이 파오 쪽으로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남 일 참견할 시간에 머리 위나 조심하지 그래.”

오조가 부순 건물의 파편이 공교롭게도 파오의 머리로 수직 낙하하는 중이었다. 물론 시각적 인지 능력이 아주 평범한 내가 그것을 깨달은 때는, 이미 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아이고, 저런…….

* * *

오조가 내 등 뒤에서 턱을 와들와들 떨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내가 친히 파오급의 단단한 돌머리는 그 정도 충격으로 박살 나지 않는다고 상냥하게 설명해주었지만, 정작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파오의 눈빛이 하나도 상냥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손우경은 지금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단 표정으로 연신 파오와 오조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걸 잊지 않았다.

“정 어지러우면 아예 충격 요법을 시행해보는 것도 괜찮아. 파오 사형의 머리를 가격한 저 돌덩이보다 한 열 배 정도 큰 바위를 불시에 뚝 떨어트려보는 게 어때?”

그러나 파오는 진짜 머리가 많이 아팠는지 달리 응수도 않고 묵묵히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낼 뿐이었다. 농담이 안 통할 정도면 꽤 화가 났다는 뜻인데, 나는 그보다도 새끼 여우가 파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왜냐하면 파오에 대한 내 사감을 떠나서 설령 손우경의 말대로 열 배 남짓한 바위를 놈 머리에 떨어뜨린대도 큰 타격은 없었을 것이므로.

내가 그간 놈을 지켜봐왔던 세월이 얼만데.

종단군부에 입문해 몇 가지 기초를 다지면 이후로 몸을 금강석처럼 강건하게 만드는 ‘금강불괴’ 습득을 위한 고된 수련이 시작된다. 금강불괴金剛不壞란 어떠한 것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강인한 신체와 정신을 뜻한다. 정신은 잘 모르겠지만, 군부 놈들이 걸핏하면 주먹으로 바위를 깨부수며 지들 힘자랑 하는 걸 한두 번 목격한 게 아니었다.

하물며 천봉대원수의 직위까지 올랐던 파오의 몸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나 진배없었다. 방금 녀석의 머리로 떨어진 게 말이 좋아 파편이지 실은 한쪽 벽면 너비의 석판인데, 만일 그가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저걸 맞고도 과연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손우경도 그걸 알기 때문에 서둘러 경고하지 않고 평소처럼 농담 따위를 건넸던 것이다. 아마도 파오가 화난 건,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위인이 다름 아닌 오조였기 때문일 거다.

오조의 고백 이후 파오의 적개심이 눈에 띄게 수그러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부하들에 대한 원한까지 모두 사라지진 않았을 터, 그동안은 서쪽 놈들에게 이용당했던 오조의 과거나 시한부 생을 감안해 애써 그 원한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왜인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오조 녀석이 일방적으로 어색한 기류를 느끼고 있을 때쯤, 바로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저 혼자 파오의 팔천 군사를 전멸시킨 괴물 녀석이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지.

그때 파오가 바닥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내 뒤에 숨어 있는 오조에게 용건이 있는 듯 보였다. 오조가 작은 손에 경련이 날 정도로 내 옷자락을 세게 거머쥐는 것이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중재에 나섰다.

“실수로 벌어진 일이니까 어른이라면 그쯤 해두세요. 충분히 미안해하고 있잖습니까.”

웃음기 사라진 파오를 대면하는 일은 제아무리 나라도 거북하다. 언제나 실없는 농담과 저질 발언을 입에 담고 사는 인간이라 그렇지, 본래는 차갑고 빈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우경도 인상 자체가 사나운 편이라 이따금씩 무표정을 지을 때면 어딘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파오와는 경우가 달랐다. 오히려 웃고 있는 얼굴에서 커다란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파오에게는 숨길 수 없는 특유의 냉혹한 분위기가 있었다.

놈의 가문은 엘리트 고위 군관들을 대대로 배출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어렸을 땐 집안끼리 왕래가 잦았는데, 내 기억에 당시 파오의 본가는 늘 엄격하고 팽팽한 긴장이 흘러넘치는 장소였다. 파오를 두고 흔히 어디서 저런 천박한 돌연변이가 나왔냐며 끝없이 수군거리긴 했지만, 선대에서부터 대물림된 피가 사라지진 않는 법이다.

파오는 날 투명인간 보듯 지나치며 내 등 뒤로 긴 시선을 보내왔다.

“계속 그렇게 숨어 있을 거라면 평생 내 눈앞에 얼쩡거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낮게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는 첨예하게 날이 서 있었지만 어쩐지 내 귀에는 회유하는 것처럼 들렸다. 오조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내 등 뒤에서 빠져나오자 자연히 파오의 시선이 그 새끼 여우에게 고정됐다.

“난 고작 이런 걸로 죽지 않으니까 제발 짜증 나게 굴지 마.”

부모에게 크게 혼이 난 어린애처럼 오조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내내 파오의 발끝만 헤아리는 오조의 큼지막한 눈동자에 금방이라도 물이 고일 듯해 조마조마했다.

“난 널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일로 더 싫어하게 되진 않아.”

결과적으로 여기서 더 싫어하게 될 수 없을 만큼 이미 충분히 미워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차라리 니가 내 머리통을 돌덩이로 후려쳐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고 얘기해라, 이 화상아.

오조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파오를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인데 울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말이야, 지나간 일에 대해서 절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런 걸로 당신의 기분이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당신의 소중한 부하가 몇 명이나 죽었든 그때의 나에게는 그래야 할 명분도, 당위성도 있었어.”

가끔 오조는 그 어린애 같은 말투로 정작 어른들도 하기 힘든, 어른의 말을 하곤 한다.

“나는 지금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만약 같은 상황에 처해진대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때처럼 행동할 거야. 내게 지켜야 할 가족 같은 건 없었지만 당신의 부하들이 먼저 내가 살고 있던 곳의 사람들을 공격했어. 그쪽에서 흘렸던 피가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면 서쪽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소중한 이를 잃게 됐을 때 똑같이 슬퍼하며 울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 부모님은 전쟁 중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어. 보통 나 같은 전쟁고아들은 거의 굶어 죽거나 외곽에서 몸을 팔며 비렁뱅이처럼 비참하게 살아가. 그나마 운이 좋으면 교단에 의해 거둬져 소모품처럼 평생 이용당하다가 몸이 망가질 즈음 다시 길바닥에 버려지고.”

늘 그렇듯이 녀석의 목소리가 담담해져갈수록 상대방은 점점 더 할 말을 잃게 된다.

“당신의 이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수없이 들어왔어. 천봉대원수장 파오. 그를 충심으로 따르는 용맹한 부하들은 수천수만에 이르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사기와 승리의 함성이 드높게 울려 퍼지네. 이건 내가 살던 곳의 어린아이들이 부르던 노래 가사야. 이 뒷부분도 있지만…… 그건 여기서 얘기하지 않을게.”

이어서 오조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파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랜드리올전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승리라고 생각했어? 그렇기 때문에 나란 존재가 거슬렸던 거야?”

세상 만물의 이치는 항시 양면성의 원칙이 적용된다. 음과 양, 낮과 밤, 선과 악,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실 우주의 법칙은 만물에게 평등하기에 어떤 것이든지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시각이며, 모두 각자의 입장에 서기에 상대적으로 반대편이 생기기 마련이다.

단 한 번도 서쪽의 입장에서는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내가 속해 있는 곳이 곧 진리이자 정의라는 생각이 마치 굳은살처럼 머리에 박여서 ‘적’은 ‘적’이라는 단순한 굴레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조의 말처럼 환영제야단의 승리 이면에선 전쟁의 아픔을 가진 이들이 패배자란 낙인 아래 살아가고 있었을 게 명백한데도.

“아까는 당신이…… 다쳤을까 봐 걱정됐어.”

저 아이는 결코 거짓을 말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당신한테서 미움받고 싶지가 않았어.”

“…….”

“단지 그것뿐이야.”

거기까지 말한 오조가 몸을 돌려서 자리를 피하려 들었다. 그리고 그 걸음이 잠시 멈추었던 것은 파오가 새끼 여우의 긴 이야기 끝에 처음으로 내뱉은 짤막한 물음에 의해서였다.

“그 노래, 뒷부분 가사가 뭐였어?”

잠시 후 변성기도 안 지난 듯한 작고 아름다운 미성의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울려 퍼졌다. 어린아이들이 따라 불렀다는 노래치곤 마치 장송곡같이 어둡고 묵직한 분위기가 흘렀다.

남편을 잃은 여자가 울면

아이가 따라 울고

젖먹이 갓난애는 울던 엄마 품에 안겨서

어느덧 제 어미가 반으로 갈린지도 모르고서

나오지 않는 젖을 빨며 울다가 잠든다네.

동쪽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귓가에서 구슬프게 들리는 것은

억울하게 길 잃은 이매망량이 처자식을 찾을 길이 없어

비통함에 젖어 울부짖는 소리라네.

아이야, 그 바람 소리를 듣지 마라.

아이야, 동쪽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지 마라.

검은 눈의 사신들이

창끝마다 네 아비들의 창백한 목을 걸고서

이제부터 너를 붙잡으러 온단다.

“그다음은…… 생각이 잘 안 나…….”

정말로 뒷부분의 가사가 떠오르지 않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물기에 젖어가는 그 목소리로는 더 이상 어떤 노래도 부르기 벅차 보였다.

* * *

종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리를 했던지, 오조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뭉글이와 함께 죽은 듯이 잠들었다. 나조차도 기분이 이상한데 파오는 두말할 것도 없겠지. 평소답지 않게 녀석은 저녁 내내 침묵을 지키며 어떤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내 방으로 돌아와 오조가 날려먹은 유리창을 판자때기로 기우려 시도하길 수차례, 아무런 공구 없인 무리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다른 방에서 베개와 쿠션 몇 개를 주워 와 창문 틈에 차곡차곡 끼워 넣었다. 뭐 이 정도면 꽤 괜찮네. 쿠션들 사이로 바람이 숭숭 새어 들어오긴 해도. 침대에 누워서 취침 준비를 하는데 어느새 손우경이 들어와 내 옆에 털썩 드러누웠다. 나가달라는 완곡한 표현이든 혹은 꺼져달라는 간곡한 표현이든 이미 아무 의미가 없다.

녀석이 등을 돌려 내 쪽으로 자신의 몸을 슬그머니 기울여왔다.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간질이다가 이내 귓가에 속삭였다.

“고집 그만 부려. 벌써 열흘이나 지났으니 몸에서도 슬슬 한계가 느껴질 거야.”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놈의 숨결이 너무 가까웠다.

“……정 잠이 안 오면 자장가로 밤새 긴고주나 외워줄까.”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나중에 네가 울면서 제발 좀 안아달라고 애원해도 못 본 척할 거야.”

손우경이 저따위 장난 섞인 엄포를 놓지 않아도 지금 당장 날 좀 어떻게 해달라고 애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몸 상태가 가면 갈수록 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1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관음존자의 기운을 전해 받으며 목숨을 연명해온 까닭에, 이미 내 몸에서는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발생하는 기능들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했다.

하지만 현재 내 목에 걸린 생명줄을 붙잡고 있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저 손우경이었다. 그러니 아돌프의 주구 노릇이나 하며 구차하게 살아왔던 나라고 한들, 지금의 이 상황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작금의 굶주림을 더 견디지 못하고 녀석이 던져주는 미끼를 덥석 물게 된다면 그 순간 놈이 나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음을 나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꼴이니까.

하물며 섹스로 길들여지는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저쪽에서 강제적으로 내게 손을 댄다면 마음이 한결 홀가분할 텐데, 손우경은 그날의 고백 이후로는 날 먼저 원하거나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물론 침대 위에서 가볍게 키스를 하거나 성적인 접촉 자체는 줄어들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항상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어놓고 자신은 중요한 순간에 손을 싹 거둔 채 내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기 일쑤였다.

추측컨대 아쉬운 건 너지 자긴 아니라는 거다.

지금도 녀석은 어제 저녁 내 목덜미에 남겨놓은 흔적을 다시 할짝거리며 내 인내심이 어서 바닥나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머지않아 가볍게 목이 물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놈은 그런 소소한 반응을 보며 내심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녀석과 같이 있으면 항상 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이 계속해서 이어지다 보면 마침내 쓸데없는 고집은 그만 부리고 현실에 안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서쪽으로의 여정이건, 관음존자의 명령이건, 내가 누구건, 그런 것들을 전부 다 싹 잊어버리고 이대로 등을 돌려서 아마도 날 보고 있을 손우경의 은회색 눈동자에 내 두 눈을 똑바로 끼워 넣으면. 모두 다 끝나는 문제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그럴 순 없었다.

그때 놈의 손아귀 힘에 억지로 몸이 돌려졌다. 마침 손우경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참에 눈앞으로 불쑥 놈의 얼굴이 밀려들자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가 정말로 어려웠다. 내가 얼마나 나약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차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까 싶어 얼른 녀석의 표정을 살펴봤지만 딱히 별다른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놈은 그저 무표정하게 날 빤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손우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는 결국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놈이 수긍하며 답했다.

“그건 그래.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너랑 말장난하자는 거 아니야.”

남은 심각한 데 반해 내 가슴 돌기나 태연하게 더듬으며 웃고 있는 손우경에게 조금은 화가 치밀었다. 이러한 고민이 오직 나 혼자만의 몫인 것 같아서 더 그랬다. 잔뜩 날이 서서, 내 가슴에 머물러 있던 녀석의 손을 쳐내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이런 짓, 구태여 내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잖아.”

“정말 네가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는 낯이었지만 눈이 차가웠다. 그런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눈동자를 굴리자, 이번엔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서 다시 눈을 맞춰왔다. 좀처럼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너, 혹시 사람 마음 같은 거 읽을 수 있어?”

“글쎄.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가끔씩 내가 혼자 생각하고 있는 걸…… 너에게 그대로 들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심지어 오늘 낮에도 그랬고.”

갑자기 침대 시트에 등이 거칠게 닿았다. 내 양손목을 붙잡은 손우경이 빠르게 몸 위로 타고 올라왔다. 순식간에 두 몸이 부대끼면서 내 사타구니에 묵직하게 짓눌린 녀석의 하반신이 적나라한 위압감을 자랑했다.

“그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도 한 번 맞혀볼래?”

비록 바지에 가려져 있으나 워낙 집요하게 문질러대는 바람에 그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얼굴에 저절로 붉은색 열꽃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창피하지도 않은지 허리를 상하로 짐승처럼 움직여대며 평소처럼 지껄여대는 손우경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기본적으로 너에게 항상 집중하고 있으니까.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기분일지가 눈에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뿐이야.”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좀 떨어져!”

“난 말야, 지금 네 몸에 걸쳐진 이 불필요한 옷가지들을 전부 벗긴 다음, 양쪽 유두를 민감해질 때까지 물고 빨면서 니 입술이 숨을 야하게 헐떡거리는 소리가 듣고 싶어. 그 뒤엔 싫다고 거칠게 반항하는 두 다리를 벌려 내 어깨 위로 올리고 네 안에다가 내 걸 힘껏 박아 넣고는, 밤새 네가 실신해버릴 때까지 허리를 움직여보고 싶은데…… 혹시 이런 내 생각들이 너한테 전부 읽히고 있어?”

“네가 지금 니 입으로 말하고 있잖아!”

“거짓말, 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

거침없는 몸놀림으로 아래쪽을 연신 비벼대던 손우경이 그제야 행동을 멈추고는 내 뺨을 지그시 깨물었다. 뺨에서 자연스레 목덜미로 넘어온 입술이 아마도 어제와 같은 자리라 예상되는 부분을 쪽쪽거리며 야릇하게 빨아댔다.

흔적 위에 새로운 마킹을 덮어씌운 녀석이 나긋해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보면 알아. 그러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방금 전의 강렬한 자극으로 인해 이미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내 중심부를 다시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에게 놈이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솔직하게 안아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너도 편하잖아? 나랑 자는 거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리 자존심 상해해?”

손우경은 후 하고 짧게 숨을 토해내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하긴 상관없나’ 하고 혼잣말을 했다.

“어차피 놔줄 생각은 없어.”

손과 발끝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바지를 벗어 던지고서 제발 안아달라고 사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놈의 입가에 왠지 모를 차가운 비웃음이 걸려 있는 듯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괴롭게 몸을 비틀다가 문득 녀석의 앞섶으로 시선이 쏠렸다. 놈의 그것은 당장이라도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로 충분히 거대해져 있었다. 허나 팽창하고 있는 욕망에 비해 손우경의 표정은 지극한 평온함 그 자체였다. 녀석이 이 상황에서 차분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손우경이 바지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고 괴물처럼 꿈틀대던 존재를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핏줄들이 힘껏 도드라진 탄력적인 살덩어리가 어둠 속에서 흉측하게 번들거렸다. 놈은 분출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손목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서 여태껏 참고 있던 울분이 숨통과 함께 터져 나왔다.

“넌……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야.”

내심 이대로 안아주기를 기대했건만 놈의 정신력은 내 생각보다 한 수 위였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간청하기 전까진 꿈쩍도 안 할 작정인 듯했다.

손우경은 눈썹 하나 미동치 않는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자기 것을 꽉 움켜쥔 채 점점 스퍼트를 올려나갔다.

“그걸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손목의 일정했던 움직임이 그만 뚝 멈추었다.

……내가 여기서 정신이 더 나가기 전에 네가 포기했으면 좋겠는데 말야.

일부러 조준한 내 얼굴로 하얀색 점액질이 투두둑 튀었다. 녀석이 사정을 이렇게 빨리 끝낸 것은 내가 알기론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꽤 오랜 시간 참고 있었던 탓이리라 생각된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손우경의 냄새가 코끝을 아릿하게 찔러왔다. 어째서인지 내 아랫도리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뜩이나 몸 상태도 안 좋았는데 어떤 미친놈에게서 뜨거운 키스까지 받으니 점점 정신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이 녀석보다 좀 더 제정신이 아닌 인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 꿈을 통한 엄중한 메시지는 하루하루 경고성이 짙어져간다. 매일 저녁, 내 꿈속에서는 붉은색 고깃덩이로 참혹하게 변해버린 손우경의 너절한 시체를 끌어안고서 작고 어린 아이가 목 놓아 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린 시절의 나. 그 아이는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채 여전히 두려움에 젖어 어두운 밤길을 헤매고 있었다. 누군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다가와선 내게 묻는다.

대체 왜 울고 있니.

내가 대답한다.

-…….

하지만 이미 두려움으로 마비가 되어버린 내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아침이 오자 몸 상태는 더 최악으로 치달았다. 손우경이 밤새 몸을 지분거리며 잠을 못 자게 만든 이유도 있었겠지만 놈에게서 흡수했던 정의 기운이 이제 몸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인 듯했다. 내게 있어 병과 약을 동시에 주는 존재가 관음존자 외에도 한 명이나 더 있었다니. 좀 더 약게 생각해서 이왕에 버린 몸이니 원하는 대로 응해줘서 내 잇속이나 챙기면 그만인데도 그럴 만한 주제도 못 되는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했다.

차라리 손우경이 날 가볍고 편리한 상대로 대해준다면 우리의 관계는 좀 더 건설적으로 변할 수 있었을 거였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그렇다면 나는 너로 인해 죄책감과 두려움에 젖은 악몽을 꾸며 매일 아침 일어나지 않아도 될 테고, 너 역시도 내게…….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가 부담스러워서 미칠 노릇이었다. 순간 불쾌해져서 인상을 쓰자 손우경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아무튼 질릴 틈이 없네.”

“내가 어떻게 하면 좀 질려줄래.”

“수줍게 웃으면서 기습적으로 모닝 키스라도 해주면…….”

지극히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불시에 입술이 닿은 손우경이 조금 놀랐는지 눈이 커졌다. 나는 곧장 입술을 떼고서 손등으로 훔치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됐지? 그 약속 꼭 지켜라.”

멍해졌던 녀석이 잠시 키득대다 상반신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미안한데 수줍게 안 웃었으니까 방금 건 무효야.”

제대로 관리를 안 해서 잔뜩 구겨진 종단 제복을 대충 꿰어 입고서 오조의 방으로 향했다. 새끼 여우는 염불 외듯 엄청난 끈기를 가지고 깨워야 간신히 일어날까 말까 한 애였다. 의지를 다지며 가던 중, 멀리 떨어진 복도 끝 오조의 방에서 나오는 파오를 목격하고 순간 내가 헛것을 봤나 두 눈을 비벼야 했다. 뭐야, 저건?

서둘러 걸음을 옮겨 오조의 방문 앞에 선 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 열자 새끼 여우가 멍청한 얼굴로―진짜 그렇게 멍청해 보이는 얼굴은 처음이었다―허공을 멀거니 응시하고 있었다. 침대 끝에서 두툼한 배를 완연히 드러내고 처자고 있는 뭉글이를 보니, 복도를 쭉 걸어오며 걱정했던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방 안에 흐르고 있는 공기가 왠지 모르게 미묘했다.

“방금 파오 왔다 갔어?”

내 물음에 오조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멍해졌다.

“왜 온 건데.”

“……몰라. 왜 왔는지 잘 모르겠어.”

“와서 뭘 했는데?”

“그냥 자고 있었는데 누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눈을 떠보니까 침대 옆에 그 사람이…… 서 있었어.”

이러면 안 되는데 나 왜 흥미진진해지냐.

“그래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갑자기?”

“몸을 보여달라구.”

“몸?”

이 인간이 애한테 대체 뭘 하려고.

“나는 싫다고 말했는데 억지로 로브를 막 들어 올려서 내 몸을 계속 보더니 그대로 나가버렸어. 아무래도 기분 나빴나 봐…….”

억지로 몸을 보여준 자기가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썩어가는 자기 몸을 파오에게 보여줬다는 게 내심 신경 쓰이는 듯했다. 오조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삼장 너도 그때 내 몸 보고서 기분 나빴지?”

아직도 뇌리에서 선명하게 기억나는 오조의 몸은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가운데 보라색과 녹색 등이 뒤섞여 오래된 시체를 연상케 하며 부패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걸 보고서 기분이 나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였다.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오조를 보고 있자면 간혹 이 아이에게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강력하고 성스러운 힘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새끼 여우의 영혼이 무척이나 순수하다는 증거였다. 겉모습이 아무리 멀쩡하고 괜찮아 보이는 사람도 마음속에 탁하고 더러운 것들을 숨기고 있다면 어떠한 눈속임으로도 그 추한 본성을 결코 숨길 수 없는 법이다.

서쪽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바벨의 도서관에서 보게 된 에메랄드 태블릿에 기록된 말들이나As above, so below. 안과 같이 밖에도, 위와 같이 아래서도. 현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명한 어록. 신비주의와 오컬트의 기본 정신임과 동시에 비기독교권의 종교적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과 영감을 주었다. 자신의 내면 세계가 외부 세계로 고스란히 투사된다는 것을 뜻하며 인간을 전체 우주의 일부분처럼 동일시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 자기계발서와 심리학 분야에서도 자주 언급될 만큼 간결하고도 심오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이 각주는 번역자인 작가 개인의 해석으로써 사실과 조금 다를 수 있다), 인간 안의 소우주가 세상 밖의 대우주로 이어지는 개념을 보더라도 내부의 것은 항시 외부로 고스란히 투사되고 그것은 언제나 나의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 명상을 통해 참나와 불성을 깨우치는 수행은 본디 자신의 내면을 갈고닦는 행위였다. 다만 그것은 쉽지 않은 길이었고 머리로 아는 지식과 몸의 실천은 완전히 다른 영역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나는 거울로 내 자신을 투영해 보지 않는다. 나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이 얼마나 끔찍하고 추악한 놈인지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오조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나는 널 딱히 싫어하지도 않을뿐더러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싫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새끼 여우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모방은 창조의 엄마라고 누가 그러더라.”

“누가?”

“몰라. 내가 그걸 알았으면 누구라고 미리 얘기했겠지.”

오조는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배를 쓰다듬으며 언제나처럼 굶주린 새끼 여우의 기색을 내비쳤다.

“그런데 말야.”

“…….”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엔 싫어한다는 말이지?”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그 난감한 질문에 내 대신 대답을 해준 것은 어느새 소리 없이 들어와 문가에 비스듬하게 서 있던 손우경이었다.

“어른들은 원래 다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걸 좋아해. 입 밖에 내뱉는 순간 그 말에 책임져야 하니까.”

그 얘길 왜 날 쳐다보면서 하는 건데.

오조는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눈을 하며 손우경에게 재차 해답을 구했다.

“그럼 내 몸은 왜 보고 간 거야?”

놈이 싱긋 웃으며 간단하게 즉문즉답을 펼쳤다.

“그야 나쁜 어른이라서.”

* * *

입안이 텁텁하다. 느끼한 음식을 잔뜩 먹은 뒤 개운한 입가심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꿈자리도 뒤숭숭한데 어제 파오의 머리통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던 그 가엾은 석판의 파편이 바닥에 널려 있는 살풍경을 보니 마음까지 심란해졌다. 끔찍했던 사고 현장을 둘러보는데 괜스레 현기증이 핑 돌았다. 실상은 어제 잠을 통 못 잤더니 졸려서 하품이 난 거였지만 말이다.

손우경은 말없이 주뼛거리는 오조와 저기압에 먹구름이 잔뜩 낀 파오의 중간 지점에 서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오늘은 이 지점에서 조를 둘로 나눠서 움직여보는 게 어때. 그동안은 항시 네 명이서 같이 움직였지만 사실상 행동반경도 너무 겹치고 시간적으로 비효율적이었잖아.”

거기까지 말한 녀석이 내 쪽을 쓰윽 넘겨다보며 이번엔 어느 누구라도 예상 가능할 법한 소릴 지껄여주었다.

“물론 난 무조건 현이하고 움직일 거지만.”

나는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제안은 정말 감사한데 반드시 거부할게.”

빈말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손우경과 이 텅 빈 도시를 사이좋게 돌아다닐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를 대하는 손우경의 태도는 언제나 낮과 밤의 괴리감이 상당했지만, 둘만 남았을 때에는 더욱이 그 정도나 수준이 달랐다. 시달리는 일은 저녁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리고 오늘은. 오늘만은 잠시라도 놈과 붙어 있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발목을 지탱하는 힘이 서서히 풀려가는 느낌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시시각각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간 분명…….

아무튼 내 거부 의사 표명과는 관계없이 어느덧 얘기가 착착 진행되는 중이었다. 내 의견이 묵살되는 일은 여태 비일비재했고 그런 걸 크게 신경 쓰는 편도 아니었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이 상황 자체가 내키지가 않았다. 게다가 파오 또한 이 제안에 불만이 많은 듯 보였다.

“내 의사는 어쩌고서 그런 걸 니 멋대로 정해?”

손우경이 오조를 잠시 흘끗거리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저쪽에서 사형이랑 가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네 명 중에 그 절반인 두 명이 선택했는데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으니까 그걸로 된 거 아냐?”

우리와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새끼 여우는 섣불리 근처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확실히 파오 쪽으로만 계속해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손우경이 놀리는 말투로 선심 쓰듯 얘기했다.

“뭐 그쪽은 머리를 크게 다친 부상자가 있으니까 원하는 방향으로 먼저 선택권을 줄게. 언제나 노약자와 어린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니까.”

“그렇게 치면 성적 소수자도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지. 남자 엉덩이만 보면 거시기가 벌떡 서버리는 무서운 불치병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서 따가운 눈총과 모진 질책을 받았을 텐데, 그 인생사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저런, 마음에도 커다란 장애가 있으니 내가 도무지 이길 수가 없네. 나는 엔간해선 남에게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불굴의 남자지만 이것만큼은 파오 사형의 완벽한 승리야.”

“자식, 겸손하긴. 나는 현역 시절에 전쟁 포로와 죄수들의 참담한 인권 문제에도 여러모로 힘을 쏟던 자비로운 사람이었지. 악명 높은 다섯 개의 검 수용소 죄수 출신에 흉악범이기까지 한 네놈이 지금 이렇게 회심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전부 다 이 몸의 훌륭한 공덕이라고.”

허구한 날 끝이 안 나는 놈들의 헛소리에는 절대로 참견할 생각이 없었지만, 방금 파오가 한 말에 대해서는 한 가지 기억나는 일화가 있었다.

때는 파오가 천봉대원수로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밖으로는 하루가 지나기 무섭게 서쪽과의 전쟁 소식이 들려오고 안으로는 아돌프를 암살하려던 반역자 무리들이 기승을 부릴 때, 다섯 개의 검 수용소 및 기타 감옥의 수용 인원이 거의 한계치에 임박했었다.

그로 인해 포로와 죄수들의 처분을 놓고 긴급회의가 열렸었는데, 불교적인 교리를 전승하는 환영제야단의 수장임에도 보리심불도에서의 깨달음을 추구하며 그 깨달음으로 널리 중생을 교화시키려는 마음 따위는 약에 쓰려도 없을 아돌프의 깊은 뜻을 받들어 모두들 새롭게 수립될 죄수 처형 제도와 그 막대한 유지 비용에 갖은 의견을 모으던 중이었다. 그때 파오가 본래 회의 시간보다 약 두 시간 늦게 대웅전에 당도했다. 놈은 단번에 고위 불자들 간의 갑론을박을 싸늘하게 일축시켜버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디서 거칠게 허리 운동이라도 하다 왔는지 전신이 땀과 묘한 냄새로 젖어 있던 놈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좌중을 경악케 했다.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착석하자 상관의 지각으로 계속 눈치만 보고 있던 그의 부관이 귓속말로 돌아가는 상황을 소상히 전했고, 놈이 그제야 딱 한마디를 꺼냈다.

‘기껏 힘들게 잡아다놨더니 이제는 그 뒤처리를 하느라고 이리도 애를 잡수시는군요. 앞으로 저희 군부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생포 명령 같은 건 받지 않겠습니다. 잡아다가 죽일 바에는 아예 그 자리에서 죽이는 편이 서로에게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이, 이보게, 대원수. 포로나 반역자 놈들에게서 얻어내는 정보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에 파오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전 그런 거 모릅니다. 그저 내려진 명령에나 충실할 뿐.’

거기까지 말한 파오는 눈을 감고 앉은 자세로 잠들었다. 군부 전체를 통솔하던 파오가 더 이상은 생포 명령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리자 그간 관음존자에게 입안의 혀처럼 아첨하며 목숨을 연명하던 뒷방 늙은이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사형 제도에 관해 쏟아지던 갖가지 의견들이 점차 수그러들었고, 어차피 파오의 선언처럼 앞으로 수용소 내에 추가적인 인원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무의미한지라 그날의 회의는 서둘러 종결됐다.

따지고 보면 파오가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죄수들의 인권이 더 나아지거나 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의미 없는 피는 보지 않게 됐다.

파오는 방탕한 기질은 다분했지만 실력 면에서는 흠잡을 구석이 없는 인물이었고, 혈기 넘치는 군부 놈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또한 대단했었다. 당시의 자리에는 관음존자가 참석하진 않았지만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협소한 틀 안에서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회의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것은 파오였다.

그래서 그때에는 다들 파오라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전부 해결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나 역시도.

잠시 과거의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현실의 파오는 손우경과 합을 이루어 도저히 두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촌극을 찍고 있었다.

“가진 거 하나 없는 무일푼인 주제에 어디다 대고 지적질이야.”

“야,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재임 기간에 뒤로 몰래 꼬불쳤던 돈이 얼마나 많은지 니가 알기나 해? 이번 일만 끝나면 아방궁이라도 지어서 수백 명의 미녀들과 죽는 그날까지 향락과 주지육림을 즐길 거라고. 그때 가서 네놈의 불쌍해진 꼬락서니를 신나게 비웃어주마.”

“어제 머리를 다치더니 지금 꿈이랑 현실이 아예 분간이 안 되나 보지?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은 법이니까 차마 말리진 않겠는데, 가급적 빨리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생기네. 실직자인 것도 서러운데 과대망상증까지 앓고 있으면 처지가 너무 가엾잖아.”

저 미친것들.

저 두 놈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저렇게 하찮은 일로 유치한 말싸움만 벌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진즉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별개로 파오의 횡령이 정녕 사실이라면 종단에 복귀하자마자 밀고부터 해야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섰다.

그때 내 목덜미에서 섬뜩한 살기가 감돌았다.

손우경과 파오도 지들끼리 하던 허튼소리를 집어치우고서 살기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파괴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존재는 다름 아닌 오조였고, 새끼 여우는 내가 한 끼 정도 굶겼을 때 나오는 살벌한 표정으로 우리 모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침밥은 분명히 줬던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

그러나 새끼 여우가 말없이 노려보는 대상은 다행히 파오에 국한되어 있었다. 손우경이 파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제 그만 체념하라는 투로 말했다.

“같이 안 가주면 살해당할 거야. 나도 사형한테서 망상병이 옮았는지 벌써부터 ‘문 너머의 여자’가 헛것처럼 보이는 거 같은데.”

“…….”

여태껏 장난스럽게 웃고 있던 파오가 표정을 거두며 오조에게 말했다.

“따라와, 그림리퍼.”

파오는 등을 돌려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천천히 움직였다. 오조가 잠시 멈춰 서 있다가 지팡이를 질질 끌며 그를 뒤쫓아 갔다. 이제 남은 것은 나와 손우경. 손우경은 파오와 오조가 사라진 방향을 지켜보다가 별안간 눈썹을 모았다. 뭔가를 예의주시하는 듯했다.

“……역시나 그쪽 방향이시다 이거지.”

놈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내 마뜩찮은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무슨 꿍꿍이야, 너.”

나를 비스듬히 쳐다보던 손우경은 자기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더니 조용히 공기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러고는 눈을 꾹 감고서 숨을 일정하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반복적인 호흡법을 통해 몸의 모든 감각을 활성화했다. 놈의 행위는 보통 자신을 제외한 주변의 사물을 감지하기 위해 수행자들이 자주 쓰는 행법이었다.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받는 아돌프가 주변에서 수상한 기척을 느낄 때마다 정신을 집중하며 행한 호흡법과 아주 유사했기에, 곁에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무심코 손우경의 가지런히 모인 눈썹을 훑고 있다가 놈이 갑자기 눈을 뜨는 바람에 얼른 시선을 돌려야 했다. 녀석이 날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저 두 사람을 미행할 거야.”

“미행? 내가 너하고 그런 구차한 짓을 왜 해야 하는데.”

“기억력이 참 나쁘네. 지난번에 내가 한 얘기 다 잊어버렸어?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믿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세운 가설이 전부 맞는다면 저 두 사람 중 한 명은 틀림없이 이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통로를 알고 있어.”

“……네 가설이 맞다 치자. 우리가 미행을 한들 저 둘 중 하나가 통로의 위치를 곧이곧대로 알려줄 것 같냐?”

손우경은 씁쓰레하게 웃으며 내 얼굴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나는 네가 지금이라도 자빠뜨리고 싶을 만큼 예뻐서 좋긴 한데, 이런 식의 백치미는 별로 안 좋아해.”

“집어치워.”

손등으로 탁 걷어낸 놈의 손가락이 아랑곳없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놈은 뒷얘기를 이어갔다.

“내 말 들어. 나도 아직 어딘지 확실히 아는 건 아니지만 출구라면 분명히 이 근처에 있어. 저 두 명 중 한 명이 나갈 곳을 알고 있고, 우릴 이곳에 붙잡아두는 게 목적이라면 아직은 그 탈출 방법을 알려주고 싶지 않을 거야. 잘 생각해봐. 아까 내가 방향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저쪽에 넘겨줬잖아?”

‘뭐 그쪽은 머리를 크게 다친 부상자가 있으니까 원하는 방향으로 먼저 선택권을 줄게.’

“…….”

그게 단순히 파오를 놀리려고 했던 말이 아니라는 건가. 매사 장난스럽게 굴지만 손우경은 상당히 교묘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하기야 오조와 파오의 비틀린 관계를 모르는 것도 아니니 그 두 명을 한 팀으로 묶으려고 했을 땐 어느 정도 반발이 있으리란 걸 놈이 절대 짐작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일부러 양쪽을 동시에 자극해서 결국엔 전부 원하는 대로 되어버렸지……. 하지만 내 머릿속에 여전히 가장 핵심적인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 가. 파오와 오조의 관계상 둘이 같은 편일 리가 만무한데 미행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반경을 서서히 좁혀가는 거지. 우리에게 출구에 대한 힌트를 전혀 넘기고 싶지 않은 거라면 저쪽에서 처음부터 선점한 방향이야말로 진짜 해답이 있는 곳이겠지. 안 그래? 이 도시가 얼마나 크든지 간에 이제부터 나머진 완전히 무시해도 좋아. 너에게 죽어나간 그놈처럼 답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거든.”

“하지만 저들도 한쪽이 다른 한쪽을 속이려고 들 텐데?”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허점이라구. 둘 중 한 명이 우리의 시선을 애써 딴 데로 돌리려고 한 것처럼 저 안에서도 둘 사이에 똑같은 과정이 반복될 거야. 통로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파오 사형과 오조가 어색하고 꿉꿉하기 짝이 없는 관계니만큼 분명 둘 사이에선 극도의 긴장감과 함께 심리적인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겠지. 만일 저 둘의 관계가 지금 같지 않았다면 미행하기가 꽤나 까다로웠을 거야. 그렇게 둘이 움직이는 행동반경을 전부 파악해둔 다음, 우린 나중에 녀석들 중 하나가 일부러 가지 않았던 장소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신중하게 뒤져보면 돼.”

손우경이 별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녀석이라는 것도, 또 일견 다혈질로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두뇌가 비상하게 좋은 편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럴 때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든다. 예전에 철천지원수인 관음존자와의 대면에서 딱 한 번 심하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 그 후로 그는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내 생각이 미처 닿지 못한 부분까지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니. 어째서 이 사람에게 나는 강한 믿음보다 불확실한 의구심이 더 강하게 드는 걸까.

내 생각, 내 마음, 내 어떤 것 하나도 이 녀석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저 머리 좋은 녀석에게 모든 걸 다 줘버리고 결국엔 농락당할 내 말로가 너무나 비참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내가 물었다.

“이건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

“뭐든지.”

“어제 파오 머리에 건물 파편 날려버렸던 거, 설마 너였어?”

손우경이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꽤 놀란 표정을 했다. 어제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지만 너무 앞서나간 억측이려니 여기며 금세 묻어버렸던 가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생각이 맞을 거라는 어떤 확신이 든다. 오조와 우리는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고, 폭주하던 소환수들은 그 주인의 곁에서 필요 이상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오조란 자석을 따라 철붙이처럼 이끌려 다녔다고 할까.

아무리 괴물 같은 능력과 뛰어난 동체 시력을 가진 손우경이라지만 파오의 참견에 빈정거리듯 머리 위나 조심하라고 했던 것은, 혹시 어쩌면 미리 준비된 언사는 아니었을까. 그 짧은 순간에 벌어진 상황치곤 너무 절묘했다. 아주 찰나였지만 파오의 머리 위로 떨어진 건물 파편은 소환수들이 힘 조절을 못해 박살 난 것치고는 꽤 반듯한 모양새였다. 마치 기문파공으로 공간이나 물체를 뚝 잘라내기라도 한 듯. 하물며 멀리서 날아온 것도 아니고, 하필 파오가 서 있던 자리로 수직 낙하하던 물체를 그저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수상한 점이 너무 많지 않은가.

하지만 손우경은 이 장소에선 기문파공을 사용할 수 없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었나. 만약 내 가설이 사실이라면 내게 언제나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이 남자는 역시 믿을 수 없다.

녀석이 한쪽 입가를 불쾌하게 들어 올리며 방금 전 내 말에 반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오조와 파오 둘 중 어느 쪽이라도 그들을 미행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평소에는 오조가 온종일 잠을 자든 밥을 먹든 그다지 관심도 두지 않던 네가 어제는 구태여 그의 잠을 방해하면서 자극하려 들었지. 오조가 소환수들을 이용해 건물을 부수고 들쑤시는 일은 우리가 출구를 찾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질 않아. 그 점을 네가 몰랐을 거라곤 생각 안 해. 넌 아마 적당한 때를 노리고 있었겠지. 파오와 오조 사이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킬 만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을.”

손우경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얼굴로 내 얘길 경청했다.

“요즘 들어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예전만큼 험악할 정도로 흘러가진 않았으니 미행하기에 최적인 조건은 아니었겠지. 어때, 내 말 틀려?”

누구에게나 달변인 그가 아무 대꾸도 없다는 것은 지금 내 얘기를 반박할 구석이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조금이라도 질릴 수 있게 나도 백치미가 철철 넘쳤으면 좋겠지만 어쩌다 보니 누구 밑에서 눈칫밥 먹고 자란 지가 꽤 오래돼서 말야.”

퍼즐을 맞추는 것은 처음에나 어렵지 거의 다 완성돼갈 즈음엔 그저 남는 조각을 빈자리에 밀어 넣기만 하면 된다.

“근데 너무 착착 들어맞으니까 갑자기 화가 나려고 하네. 나한테 영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잠시나마 보여줬던 것도, 아마 그때가 나와 모두의 이목을 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서 그랬던 거야?”

아돌프의 개인 친위대이자 특수 수행부인 ‘척살부’는 종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재들로 구성된, 명실공히 최고의 암살 집단이었다. 그리고 이 척살부에는 종단의 일반 비구들과는 다른 디자인의 검은색 제복과 관음존자의 만자 표시가 새겨진 배지와 완장이 부여됐는데, 어느새 그 모습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집도하는 살인귀들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걸친 대가로 나는 주변으로부터 끊임없이 능력 부족을 지탄받았고, 척살부의 동료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그런 나를 단지 관음존자의 장난감 정도로만 여겼다.

놈에게서 잠시 신통력을 얻어서 내가 여태껏 보지 못했던 세계를 봤던 것보다, 녀석이 원하는 것만 볼 수 있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말해주었던 것이 솔직하게, 진심으로 기뻤었다. 종단 내에서도 쓸모없는 미운오리새끼 같았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상이 손우경이었기에.

그러나 우연을 가장한 모든 필연의 밑바닥에는 철저한 각본이 짜여 있었고 거기엔 나의 반응까지도 지문으로 일일이 적혀 있었단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놈의 작은 호의에 기뻐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놈은 뒤로 떨어져 나가려던 내 손목을 세게 붙잡고는 완강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넌 내 예정에 없었어.

나 역시 미안한 얘기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넌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듯이 행동했고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나도 알아. 여기선 기문파공을 사용할 여건이 안 된다고 했었지? 그럼 파오 머리로 떨어진 그 파편의 형태는 뭐라고 설명할 건데?”

짜증이 났다.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오조의 감정을 이용하고 파오까지 조종해서 모두를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내가 비록 관음존자의 장난감이나 다름없다지만, 적어도 녀석에게까지 그런 취급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손우경은 내 손목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는 차분하지만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난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앞을 내다봤고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었어. 난 공간을 자를 수도, 이어붙일 수도, 혹은 파괴해버릴 수도 있고, 원한다면 물의 신전으로 쳐들어가서 신의 비기를 훔쳐 올 수도, 염동력으로 누군가의 머리 위에 거대한 물건을 떨어트릴 수도 있으니까.”

녀석이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는 걸 들어주고 싶지 않아 팔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손우경은 오히려 나를 바짝 끌어당겨 억지로 제 품 안에 넣었다.

“근데 나도 사람 마음을 어쩌지는 못해.”

궤변이다. 궤변일 뿐이다.

“노력하고 있어.”

대체 뭘.

“네가, 겁먹지 않게.”

아니, 너의 이런 행동이 나를 겁먹게 하고 있어.

손우경은 놈의 가슴으로 기울어진 내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제 슬슬 움직이지 않으면 그 둘의 행방을 놓쳐버리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걱정 마. 나갈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들고 놈을 올려다봤다. 손우경이 평소처럼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확신했다.

삼일 이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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