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이 빌어먹을 도시에는 아주 슬픈 전설이 있어 (13/24)

10. 이 빌어먹을 도시에는 아주 슬픈 전설이 있어

본의 아니게 손우경과 팀을 이뤄 파오와 오조의 행적을 추적하게 되어버렸다. 앞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기척을 숨기며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나는 오조와 파오가 어디쯤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아주 멀리에서 간간이 보이는 소환수들의 모습을 통해 대략적으로 짐작할 뿐이었으나, 손우경은 달랐다.

그들의 몸에 추적 장치라도 붙여놓은 듯 내게 행동반경을 실시간으로 소상히 알려주는 놈의 초인적인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파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담벼락에 영역 표시를 하고 있단 것까진 굳이 안 전해줘도 괜찮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사람이 진지해질 틈을 안 주는 인간이었다.

“아,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내 중얼거림에 손우경이 서쪽의 먼 곳을 응시하며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전에도 말했었잖아. 난 앞이건 옆이건 뒤건 간에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뭐든 알아차릴 수 있다고. 지금은 평소보다 그 능력을 좀 더 개방해서 내가 읽어낼 수 있는 영역을 광범위하게 확장시킨 것뿐이야.”

그러고 보니 강시 마을에서도 내가 뒤쫓는 걸 귀신같이 눈치채곤 그와 비슷한 소릴 했었던 것 같다. 놈의 동물적인 감각이 남들보다 배는 뛰어나단 걸 알았지만, 그 관음존자도 이 정도 수준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알면 알아갈수록 신기한 녀석이었다.

근데 이럴 거면 나까지 굳이 동행할 필요가 없지 않나. 현재로선 몸에 남은 힘도 없거니와 내가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구석도 없는데. 특별히 내가 필요하지 않다면 먼저 숙소로 돌아가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고 싶었다.

그때 손우경이 성가시게 됐다는 얼굴로 나를 쓱 돌아봤다.

“유지하던 거리를 지금보다 훨씬 더 좁혀야 될 것 같아. 길이 여러 군데로 통하는 지역이라 이 상태로는 나중에 훑어봐야 할 범위가 너무 넓겠어.”

“뭐 그러시든가요.”

“그러려면 저쪽에서 알아차리지 못하게 기운 자체를 확실하게 지워둬야 하는데…….”

날 빤히 내려다보며 망설이는 꼬락서니를 보니 그 뒷말이 뭐가 나올지 뻔히 짐작됐다. 지금의 내 존재가 이 미복 잠행에 방해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잘됐네. 난 내 기운 같은 거 지울 능력 따윈 전혀 없으니까 여기서 이만 돌아가보도록 할게. 넌 열심히 미행해서 네가 말한 대로 삼일 이내에 여기서 나갈 방법을 꼭 찾아내길 바란다.”

“그렇게 삐딱하게 굴지 말고.”

필요 이상으로 비뚤게 구는 것도 맞지만 정말 걸어 다닐 기력 자체가 없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죽을 맛인데 더 이상 어떠한 요구도 들어줄 자신이 없다. 내가 우두커니 서서 영혼이 빠져나갈 듯한 눈으로 손우경을 바라보자, 놈이 내 얼굴에 손을 얹고는 시선을 맞춰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인데, 원한다면 어서 안아달라고 한마디만 해.”

“……네가 무슨 감언이설을 지껄여도 너한텐 절대 반응하지 않을 거야.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 아무러면 죽기야 하겠냐.”

“그럼 왜 항상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내가 무슨 눈을 하고 있는데.

마음의 외침을 거부하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꾸하려고 애썼다.

“그건, 널 감시해야 되는 게 내 임무 중 하나니까.”

손우경이 이제 이런 것쯤이야 물리도록 익숙하다는 듯 금세 되받아쳤다.

“얼마든지.”

“…….”

“제발 감시해줘.”

어떤 날 선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닫자 손우경과 계속 눈을 맞추고 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눈동자를 슬며시 다른 곳으로 돌리자마자 턱이 단단하게 붙들렸고, 이내 으름장이 귀를 파고들었다.

“눈 떼지 말고.”

혼혈의 피가 흐르는 아름다운 은회색 눈동자가 화난 듯 붉게 이지러진다.

“그게 네 역할이잖아.”

무턱대고 거칠게 부딪쳐오는 입술에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놈은 나에게서 모종의 불안함을 느낄 때마다 무언가를 확인받듯이, 또 각인하듯이 나를 침노하려 들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나에게는 이미 너의 것이 아닌 부분은 없어. 하지만 그거 알아?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려.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너의 세상에 결코 내가 안주할 수 없는 까닭은, 그 또한 이미 누군가의 거대한 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를 욕심내어 스스로 화를 자초하진 않을 거다.

내내 무반응이던 내 입안을, 난폭하게 휩쓸고 간 손우경이 마침내 밭은 숨을 토해냈다.

“좋아, 싫다면 더는 강요하지 않을게. 나라고 이 상황에서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네 목적은 확실히 해둬. 일단 이 도시에서 빠져 나가야 네가 충성을 다하는 아돌프 새끼한테 꼬릴 흔들 만한 일이 생기지 않겠어?”

녀석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키스를 당하는 동안 속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무감한 눈으로 놈을 끝까지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할까? 넌 지금 이 미행 자체에 엄청난 지장을 줘. 만일 나 혼자서 행동했다면 더 수월하게 움직였겠지. 애당초 녀석들과 이만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도 전부 너 때문이야. 넌 그저 방해가 될 뿐이라고.”

손우경의 확인 사살이 연거푸 잔인하게 이어졌지만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이 확실하게 말해주니 납덩이처럼 무거웠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오조와 파오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 사이의 거리도 이 정도가 딱 좋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이따위 번거로운 짓을 벌이는 건.”

놈은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훑어보며 차갑게 종용했다.

“내가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니까, 그냥 잔말 말고 따라와.”

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이런 수고까지 감수해주신다니,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감각의 영역을 확장하거나 반대로 기척을 감추는 일은 모두 ‘나’라는 개체를 주변 사물들과 동일시해서 만들어내는 일종의 잔기술에 불과해. 공기든 건물이든 길바닥에 난 폴 쪼가리든 그것과의 정신적인 동조화가 일어나야 가능해지지. 문제는 내겐 잔기술일 순 있어도 너한테는 아니란 거지만.”

“…….”

“눈을 감고서 마음속으로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떠올려. 네 자신을 광활한 바다 안에 포함된 그저 하나의 물방울이라고 상상해봐. 물방울에서 시작해서 주변으로 차츰 녹아드는 거야. 머리 안에 갇혀 있을 ‘나’라는 고유의 개별적 의식을 세상과 별개의 것으로 분리시키지 말고 그 경계선을 점점 확장시켜봐.”

말이야 쉽지 그걸 지금 당장 어떻게 따라 하라고. 바다 안에 푹 잠겨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봤지만 숨이 턱턱 막힐 따름이었다. 물방울에서 바다로, 의식의 확장이라니. 수행 중에 명상을 통해 나의 내면세계로 정신을 집중해본 적은 많았지만 이런 종류의 시각화 훈련은 그간 경험한 일이 없었다. 잠자코 나를 지켜보던 손우경이 이번엔 다른 대안을 내놨다.

“그게 당장 어렵다면…… 내 몸 아무 데나 붙잡고 나한테 집중해봐.”

내가 머뭇거리자 손우경이 내 손을 강제로 틀어쥐곤 자기 얘길 이어갔다.

“난 이미 주변과의 동일화 과정이 모두 끝난 상태야. 처음 시작은 조금 어렵겠지만 나하고 접촉한 부위를 떼지 말고 나 또한 너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해봐. 우선 내 호흡에 집중한 다음, 내 숨과 너의 것이 완벽하게 상합할 수 있게 천천히 그 간격을 맞춰.”

놈의 숨소리를 귀담아 듣다가 그 들숨과 날숨의 시작과 끝을 완전히 일치시키기 위해 호흡을 조절했다. 놈에게 꽉 붙들렸던 손이 놈의 왼쪽 가슴으로 끌려갔다.

“그다음엔 내 심장 소리를 느껴서 마치 너의 심장과 동일하게 뛰고 있는 것처럼 생각해.”

손바닥에 손우경의 심장 박동이 쿵쿵거리며 전해져왔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얼굴에 미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가슴에서 손을 떼고 싶었지만 녀석은 내 손을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못… 하겠어.”

“할 수 있어.”

“못한다고! 호흡은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심장 박동까지 똑같이…….”

“가능해. 그건 원래가 네 거니까.”

“…….”

네 심장이 내거라니. 이어져 있는 손을 통해 내 의식과 마음 모두 나에게서 손우경에게로 한순간에 전이되는 느낌이었다. 어느덧 내 안에서 강렬하게 타오르던 녀석의 존재감이 공기처럼 투명하게 바뀌고 있었다. 놈이 지금 뭘 어떻게 한 거지. 세상은 고동을 멈춘 듯 조용해졌고 이곳엔 오로지 손우경과 동일하게 호흡하는 숨소리만이 존재했다. 내 심장까지도 놈과 함께 뛰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평온해져갔다. 마치 오랜 명상 끝에 깊고 고요한 입정 상태에 들어서듯 모든 것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갑자기 주변의 사물들이 낯설거나 별개의 것이 아닌 나의 일부가 된 것처럼 여겨졌다. 손우경과 함께할 때 항시 긴장되고 불편하게 흐르던 기류가 맑아지며 내 시야가 단번에 넓어지는 기분. 아니,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녀석은 그런 내 변화를 가장 빠르게 파악했다.

“……잘했어. 지금부턴 녀석들 뒤로 바짝 따라붙을 예정이니까 이 상태와 마음가짐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해봐.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거의 투명인간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니 저쪽에서도 우리 존재를 그리 쉽사리 알아차리진 못할 거야.”

녀석은 그제야 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티내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우리는 마천루의 숲이나 다름없는 대로를 지나 복잡한 구조로 얽힌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눈으로 직접 보니 손우경이 무엇 때문에 미행하는 간격을 좁히자고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오조와 파오의 대략적인 행동반경만으로 추측하기엔 건물의 수가 너무 많고 조악한 환경이었다. 포타라카의 외곽 지대에서도 이런 허름한 뒷골목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아마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역시 그리 부유한 자들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월에 부식되어 곳곳이 허물어져가는 낡은 벽들이 오래된 유적지에라도 온 것 같은 빛바랜 인상을 주었다. 벽과 바닥은 붉은색 잉크로 인쇄된, 동일한 내용의 전단과 쓰레기들로 뒤덮여 있었다. 흡사 그것이 부적처럼 이 폐허를 단단히 봉인해두고 있는 듯했다. 수용소 지하에서 손우경과 처음 만났던 날, 놈을 봉인하려 벽 위에 빼곡히 붙여놓았던 관음존자의 부적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똑같은 문구가 적혀 있는 저 종이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 유리 돔의 도시는 무엇 때문에 세상과 격리된 것이며 그 흘러간 시간 속에 감춰진 진실은 또 무엇일까. 손우경이 전하길, 건물마다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유해가 널려 있다고 했다. 그간 탈출구를 찾는 일에만 매진해 있느라 자세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냥 무시해버리기엔 수상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여기서 체류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몸뿐만 아니라 의식까지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그러던 중 먼 곳에서 오조와 파오의 모습이 드러났다.

둘 다 상당히 데면데면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상태는 더 심각했다. 둘은 십 미터 이상은 족히 떨어진 거리에서 각자 행동하고 있었고, 오조의 혈기왕성한 소환수들은 뭉글이를 제외하곤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게다가 오조는 아주 느릿하게 걸으며 힘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끼니때도 지났고 파오 눈치를 보느라 고롱고롱 잠을 퍼 잘 수도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파오에게서도 출구를 찾겠다는 결연한 의지 따위는 조금도 엿볼 수 없었다.

나는 미심쩍어하며 입을 열었다.

“설마 니 추측이 다 틀린 거라서 내가 지금 헛고생하는 게 아니길 빈다.”

손우경은 따분해진 얼굴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 둘이 육탄전이라도 벌여주면 좀 재밌었을 텐데.”

“왠지 그래주길 바라는 말투다?”

“현이 너, 파오 사형이 종단군부에 있을 때 한 번이라도 전투하는 장면을 본 적 있어?”

떠올려봤지만 없었다. 관음존자가 내게 더 이상의 수행은 시간 낭비일 뿐이란 걸 깨닫고서 어느 한구석이라도 좀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며 먼지만 날리는 장서각에 처넣은 다음부턴,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방에 처박혀 두꺼운 경전들을 읽으며 보냈다. 당시는 전쟁 준비로 항상 시끄러운 시기였으나 오다가다 파오가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모습을 몇 번 본 걸 제외하곤 놈의 전투 방식이나 본실력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었다.

“없는데.”

“내가 몇 번이나 먼저 싸움을 걸어봤지만 그때마다 한 수 접는 척하고 제대로 된 실력 발휘를 한 적이 없어. 가늠하기가 힘든 사람이야. 그래서 짜증 나지.”

“놈이 짜증 나는 인간이라는 건 나 역시 동의하지만, 설마하니 네가 파오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손우경이 건방진 웃음을 삼켰다.

“그럴 리가.”

“근데 왜 그런 걸 신경 써?”

“환영제야단 수장들에겐 기문파공 말고도 대대로 종단 각 가문의 모든 기술과 비기들이 전수되는데, 그중 몇 가지 비전들은 공유되지 못하고 일부 유파들에게만 따로 계승되는 전례가 있었지. 자세한 얘기는 들은 적도, 물어본 적도 없지만, 사형의 가문이 선대부터 군부 쪽을 독식하고 있었다면 아무래도 혈류종을 쓸 텐데, 난 그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적으니까.”

“혈류종? 그게 뭔데?”

“뭐겠어, 살인 기술이지.”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답변이었다.

“근데 환영제야단의 수장들이라니. 방금 전 얘기는 꼭 네가 종단 후계자라도 됐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녀석이 키득 웃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맞아. 어차피 내가 쓰는 기문파공만으로도 이미 다 설명된 거 아니던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난 티뷸라 궁이나 포타라카 어디에서도 너를 본 적이 없을뿐더러 석가여래께서 따로 후계자를 키우셨다는 말 또한 들어본 적 없어!”

“그랬겠지, 난 스무 살이 되기 직전까지 ‘그곳’에서의 ‘출가’가 불가했으니까. 그리고 원래 종단 후계자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비밀리에 키워지는 법이야. 속으로 허튼 생각을 하는 놈들이 예상외로 꽤 많으니까.”

“그랬다면 아돌프가 어떻게 해서 지금의…….”

손우경이 실소를 머금다가 쉿 하고 주의를 주더니 눈길을 파오와 오조 쪽으로 돌렸다. 둘이 좀 떨어진 채로 뭐라고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우며 신중해진 손우경의 표정만으론 그 둘의 대화를 짐작키가 어려웠다. 곧이어 파오가 오조에게로 걸어가 목 근처에 손을 가져다댔다. 움찔거리던 발이 튀어나갈 뻔했지만 손우경이 바로 저지했다.

“지금 네가 나서서 뭘 어쩌려고? 별일은 안 생길 테니까 일단은 지켜보고 있어.”

마음을 진정시키고 돌아가는 추이를 살펴보니 목을 조르기보단 단순히 위협을 가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파오가 손을 거두고서 다시 등을 돌렸다. 오조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으나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 후로도 우리가 미행하는 내내 둘 사이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져갔다.

날이 저물어 시커먼 어둠이 곳곳에서 맹위를 떨칠 무렵, 파오와 오조가 탐색을 마치고 숙소 쪽으로 되돌아갔다. 이제부터 손우경과 함께 녀석들이 방문하지 않았던 장소들을 하나씩 수색해야 하는데, 힘에 부쳐서 더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으려던 걸 안간힘을 쓰며 버텨냈다. 다행히 밖이 어두워서 내 이런 상태를 손우경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앞서 나가는 놈을 뒤쫓으며 희미하게 흐려지는 시선을 다잡으려는데 녀석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렇게 멈춰 선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것은 지난번에 왔었던 그 낡은 공원의 정문이었다.

“……여길 무시해버리고 지나갔다는 거지.”

중얼거리던 손우경이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텅 빈 공원을 바라보다가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서려던 차였다. 나는 얼른 녀석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부탁인데……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아니면 너 혼자서라도…….”

입안에서 힘겹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심히 갈라져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대충 알아듣고 부탁을 들어줄 만도 한데, 뒤를 쓱 돌아본 녀석의 눈빛은 한없이 냉랭했다.

찰나에 스쳐 지나갔던 그 눈빛은 마치 이런 상황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설마 너.

좋지 않은 낌새에 잡고 있던 옷자락을 슬그머니 놓았지만 손우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지 놈은 완전히 몸을 틀어 내 안색을 물끄러미 살피더니 입매를 길게 늘어뜨렸다.

“나 혼자서 움직이는 건 크게 상관없는데 지금 네 꼴로는 숙소까지 돌아가기에도 상당히 벅차 보인다?”

“…….”

“나한테 안기는 건 죽어도 싫다 그랬고, 착하게 부탁하면 숙소까지 이동하는 거라도 도와줄 순 있는데 그건 또 자존심 상해서 못하겠지.”

일부러 저러는 거다. 안아달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지만, 숙소까지 돌아가는 데 좀 도와달라는 부탁 정도라면 해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저리 먼저 선수를 치고 나오니 정말 자존심 때문에라도 말할 수가 없지 않은가. 몸에 남겨진 힘을 안광으로 전부 끌어 모아서 놈을 쏘아보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으려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다리에 힘이 풀려서.

숙소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멀게만 여겨졌다.

“그럼…… 꺼져. 숙소까지 기어가든지 말든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힘없이 중얼거리는데 몸이 불쑥 들렸다. 여자처럼 안긴 자세보다 결국 또 이렇게 녀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더 굴욕적이었다. 손우경은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내 입으로 분명 삼일이라고 했으니 한번 내뱉은 말에는 책임을 져야지. 너도 알겠지만 사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아. 그러니 너와의 약속을 위해서라도 난 오늘 이 근방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볼 예정이고, 그러자면 아직 숙소로 돌아가기엔 많이 이르거든. 그렇다고 이렇게나 아픈 널 두고서 나 혼자 매정하게 가버릴 순 없잖아?”

비록 놈이 일방적으로 한 약속이긴 했으나 굳이 책임을 지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다만 나 하나 숙소에 데려다주는 일쯤이야 놈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일 텐데 구태여 저딴 식의 치사한 언변을 구사하며 함께 있길 고집하는 걸 보니 뭔가 꿍꿍이속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짜증 나는 상황에서도 내 등과 다리를 안전하게 받쳐주는 탄탄한 팔 안에서 도무지 벗어나고 싶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손우경은 이내 그 시커먼 속내를 드러냈다.

“넌 그다지 무겁지도 않으니까 근력 운동하는 셈 치고 공원이나 산책해보지, 뭐.”

이대로 기절해버리고 싶었다. 손우경의 두 팔 위에 짐짝처럼 덜러덩 얹힌 채 공원이나 배회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날 포획한 이 커다란 고양이님께서는 놔줄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날 안아 들고서 공원 곳곳을 어슬렁거리던 녀석이 얌전히 침묵하고 있는 내게 낯간지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고 있으니까 네가 진짜 인형이라도 된 것 같네.”

별안간 심사가 뒤틀렸다. 관음존자의 장난감 취급을 받는 것에도 신물이 날 지경인데 이 녀석까지 나를 인형이네 어쩌네 하는 헛소릴 지껄이니 더럽게 불쾌할 따름이었다.

온종일 놈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손우경이 내가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애당초 파오와 오조의 심리 상태를 분석해 앞으로 일어나게 될 변수를 가지고 결과를 조작하는 놈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거의 얼마 남지도 않은 체력으로 놈을 따라나선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었다.

“그럼 그 인형…….”

“…….”

“적당히…… 잘 가지고 놀다가 원래 주인한테…… 돌려주면 되겠네.”

“…….”

“안 그래? 인형이라며.”

장시간 침묵을 지키는 손우경과 대면하는 것은 왠지 무섭다. 특히나 나를 힐난하는 것 같은 저 고요한 은회색 눈동자가. 그럼에도 결국엔 나 자신에게 상처가 될 얘기들을 계속 꺼내가며 놈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길 바라는 내 마음이 지독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게 일일이 대꾸하지 않고 녀석은 그저 걷기만 했다. 걸음을 크게 서두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길을 헤매거나 하지도 않았다. 마치 어딘가의 목적지를 염두에 둔 듯한 움직임. 손우경이 나를 안고서 찾아간 곳은 우리가 일전에도 한 번 들른 적 있었던 그때의 그 관람차였다.

손우경은 가장 아래쪽 관람차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곤 그 안으로 나를 구겨 넣듯 거칠게 집어던졌다. 부지불식간에 내던져진 몸 여기저기가 녹슨 철판에 부딪혀 얼얼하게 아팠다. 관람차 문밖에 장승처럼 서 있던 녀석이 매서운 웃음을 삼키며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인형놀이 하자.”

멍해져 있을 틈도 없었다. 장신의 그가 관람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으르렁거리며 난폭해질 기세를 취했으니까 말이다. 꽉 틀어 잡힌 머리카락이 심하게 아팠지만 소리를 내기엔 얼굴 간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웠다.

“서쪽으로 떠나기 직전에 그 자식이 내게 뭐라고 했게? 당분간 잘 가지고 놀다가 멀쩡하게 제자리에다가 돌려놓으라던데. 네 생각엔 그게 뭘 지칭하는 것 같아? 그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널 어디 하나 손써볼 구석도 없이 처참하게 망가뜨린 다음 그 새끼 면전에다가 휙 던져놓으면 놈이 과연 어떤 얼굴을 할지 말이야.”

오늘 하루 내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확연히 달라진 그의 태도에 섭섭함이나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이 들었다.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난 성격이 나빠서 그런지 곱게 가지고 놀다가는 못 돌려주겠거든.”

혼자 들어가 있기에도 좁아터진 관람차 안이었다. 이런 비좁은 공간에서 놈의 악의를 고스란히 받아주기가 무척이나 버거웠다. 녀석은 내 멱살을 잡아끌어 내부의 왼쪽 의자 위로 몸을 들어 올리고는 비열한 음성으로 윽박질러왔다.

“하, 네까짓 게 뭐라고. 정 그렇게 불만이면 제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할 만큼 아주 난잡하게 범해줄까? 목이 터져라 울면서 새된 비명을 지를 때까지 마구잡이로 쑤셔 넣으며 하루하루 내 정액받이처럼 취급해줄 수도 있어. 너야 어차피 처음부터 그럴 용도로 따라온 거…… 씨발!”

거친 욕설과 함께 놈의 주먹이 내 얼굴 바로 옆으로 날아와 꽂혔다. 동시에 관람차의 낡은 유리창이 산산조각으로 박살 났다. 손우경은 피가 줄줄 흐르는 손으로 내 얼굴을 우그러트리듯 틀어쥐었다.

“그런 멍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말고 무슨 반응이라도 해봐! 잘 대해줘도 소용없고 내가 암만 심한 소릴 지껄여봤자 눈 하나 깜짝을 안 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정말 나한테 얌전히 안겼던 이유가 아돌프의 명령, 그거 하나밖에 없었던 거냐?”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실제론 한 방울도 맺히지 않았다. 아니, 울 수가 없었다. 유년 시절 관음존자에게서 교육받던 그 ‘방’ 안에서, 눈물은 나약함의 정수이자 상징이었다. 아마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도래한대도 내가 눈물을 흘리는 일은 결코 오지 않을 거다. 이미 그 방 안에서 내 평생치의 눈물은 다 쏟았을 테니까.

나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표정이 마비된 것뿐이다.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네가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싫을 리가…… 있겠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어. 관음존자가 아니었으면…… 진작 사라졌을 목숨이야. 그는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한 원수지만…… 그의 작은 변덕 덕택에 난 구차하게 생을 연명할 수 있었어. 난 남들에게서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을지언정…… 그 구차함을 선택했던 비겁한 인간이야. 그런데…….”

나는 어째서 손우경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아무리 구차한 인간이라도…… 너에게만은, 내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아.”

자존심같이 쓸데없는 건 아주 오래전에 버렸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너에게는 그깟 자존심이라도 부리지 않으면 내가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아서. 나는 그것 말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여태껏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었어.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조롱당해도……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 속에 버텨왔던 인생인지 너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 거다. 오물을 뒤집어쓴 채 살아가는 삶이라도,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살아 있는 편이 나았다. 아돌프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한 내 부모의 복수는커녕 넋조차 제대로 기리지도 못하는 겁쟁이가 바로 나였으니까.

“나는…… 네가 내 줄을 끊어줄 사람이라곤 생각 안 해. 왜냐하면…… 네 어께에도 그 줄들이 매달려 있거든.”

꾸역꾸역 말을 이어가면서도 아직도 피가 흐르는 손우경의 손등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 손이 지금 내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는 탓이다. 많이 아플까. 그래, 아프겠지…….

놈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줄 같은 건 없어. 나에게도, 그리고 너에게도.”

그렇지 않다. 그 줄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네 입에서 날 원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어. 그리고 그건 구걸 같은 게 아니야.”

얼굴이 다가와 서로의 입술이 거의 맞닿을 지경에 다다라서야 손우경이 통보했다.

안는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입부터 맞추는 버릇은 여전했다. 녀석의 입술이 마치 불처럼 뜨거웠다. 아니, 실은 내 입안이 뜨거운 걸까. 혀가 미끄러져 들어와 가장 연약한 곳을 휘감았다. 단순한 키스만으로도 정신이 함몰하고 몸이 점점 무너져간다. 달콤하고 짜릿한 입맞춤과는 별개로 내 옷들이 허물을 벗듯 차근차근 놈의 손에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옷까지 모두 벗어던진 손우경은 잠시 키스를 중단하고는 축축하게 젖어버린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퉁명스럽게 속삭여왔다.

“몸에 기운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까 전희 없이 바로 넣어줄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놈은 나를 그대로 안아 들고는 맞은편 의자에 앉더니, 마주 안은 상태로 내 뒤쪽 엉덩이에 대뜸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배에 닿고 있는 손우경의 발기된 페니스가 이미 거대해진 터라 뒤쪽을 꼼꼼하게 잘 풀어주지 않으면 삽입이 어렵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지만, 내장을 마구 휘저어대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자연스레 머리 안에서는 딱딱하고 두꺼운 살덩어리가 나의 몸속을 거칠게 찍어 올리는 장면들이 떠올라버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손우경이 하나였던 손가락 개수를 단숨에 세 개까지 늘리며 내게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다.

“네 배 속 깊은 곳에다 정기를 받아낼 지점을 심어놨다고 했지? 그건 단순히 나하고 섹스를 한다고 해서 모든 조건이 다 충족되는 게 아니야. 남자의 정액에는 생명을 잉태시키는 힘이 서려 있는 만큼 너의 그 지점에서도 내 정을 가득히 흡수해야만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어. 물론 같은 남자니까 네가 임신하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내가 여자가 아니니 녀석의 말처럼 설마 임신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미 그 과정 자체가 남녀가 아이를 잉태하기 위한 성교 행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놈에 의해서 내장 깊은 곳에 여자처럼 강한 쾌감을 느끼는 지점이 생겨난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그 부위를 손우경의 정액으로 흠뻑 적시기까지 해야 하다니.

설명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으나 이제 와 발을 빼기엔 너무 늦었다. 엉덩이 사이에서 손가락을 빼낸 손우경이 뻣뻣하게 굳어진 내 허리를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덧붙였다.

“내게 구차하게 목숨 구걸 같은 걸 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 다음번 이 행위를 조금이라도 더 늦추고 싶다면, 날 최대한 많이 사정시켜서 내 정을 모조리 흡수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어. 네가 먼저 떨어져 나가지 않는 한 원하는 대로 안아줄 테니까.”

요구의 정도가 평소보다 과했지만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내 말 알아들었으면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봉사받을 생각 말고 다리라도 활짝 벌려달라구.”

다리 말고 입이 활짝 벌어질 지경이었다.

머뭇거리는 양다리를 놈의 손이 좌우로 크게 벌렸다. 두툼한 놈의 귀두가 좁은 구멍을 참을성 있게 밀고 들어왔고, 순간 아래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동시에 저릿저릿한 쾌감 같은 것이 내 등줄기를 따라 일직선으로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놈의 물건에 봉인된 여의봉이 타인에게 주인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지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엄청난 크기의 생식기를 항문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런 쾌감을 느낀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내부에서 거북한 포만감을 실어냈다. 구불구불한 내장 깊숙이 밀려든 여의봉이 놈의 흥분 정도를 선연히 체감하게 했다. 묵직한 고환과 까슬까슬한 음모가 엉덩이에 맞닿아 섹스하고 있다는 현실감을 불러일으켰다. 부들거리는 아래턱이 달달 떨려왔다.

붙잡힌 허리가 절구를 찧듯 놈의 다리 위에서 튕겨나간다. 쾌감과 통증이 공존하는 시간 속에서 손우경은 앉은 자세로 힘 좋게 나를 위아래로 들어 올려댔다.

“이번엔 두 발을 의자에 얹고 내 어깨에 의지해서 니가 움직여봐.”

얼른 고개를 저었지만 놈이 허리에서 손을 떼며 강경하게 굴었다. 쭈그려 앉은 모양새로 놈의 페니스를 쪼아댈 생각이 들자 창피한 기분이었지만 한번 불붙은 몸은 내 의지를 무시하며 놈의 요구에 따르고 말았다. 손우경의 어깨를 붙잡고 갈라진 다리 틈으로 내 허리를 푹 찍어 눌렀다.

몇 번 정도 움직였더니 체력이 금세 고갈되어버렸다. 붉어진 눈시울로 숨을 헐떡거리자 손우경이 내 몸을 뒤로 돌려 무릎에 앉히곤 다시 허리를 힘차게 들썩여주었다. 그러면서 내 성기를 주물거리는 손길이 간지럽고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나 봐?”

“하윽, 으으응.”

내 것을 손아귀에 쥐고 마구 짜부라뜨리는 와중에 남은 손으로는 유두 끝을 연신 꼬집어대는 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신음을 흘려댔다. 아래가 사정없이 꿰뚫리는 동안 허리가 활처럼 휘고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특히 배 속 어딘가가 건드려질 때마다 눈앞에 별이 번쩍할 정도로 아득한 추락감을 맛봐야 했다.

나는 어느새 무릎을 꿇은 채 놈의 난폭한 분신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비좁아터진 관람차 안에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미끌미끌한 점액과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사타구니로 강렬한 수컷의 냄새를 품는다. 콧속으로 들어온 그 냄새가 오감을 마비시키고 한 줌밖에 남아 있지 않던 수치심을 깡그리 날려버렸다.

손우경의 단단한 허벅지와 치골이 엉덩이에 부딪히며 내 항문 안을 연신 파고들었다. 굵은 쇠몽둥이 같은 놈의 페니스가 거세게 퍽퍽 꽂힐 때마다 나는 짐승처럼 추하게 헐떡였다. 배 속이 부글거리며 안팎으로 연신 끓어 넘쳤다. 발기된 성기에서 아까부터 급박한 신호가 울려 퍼졌지만 그보다 뒤가 뚫리는 감각이 더 황홀해서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몸을 경련할 뿐이었다.

손우경은 벌써 오랜 시간 나와 교접하고 있었지만 아직 한 차례도 사정하지 않고 있었다. 정을 받지 못하면 섹스를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뇌리에 번뜩 그 사실이 떠올라 무심결에 허리를 흔들며 손우경의 사정을 유도했지만 놈을 자극시켜 섹스의 강도만 더 높아졌다.

관람차가 손우경의 새된 허리놀림에 나와 함께 덜컹거렸다. 슬쩍 뒤로 뺐다가 뿌리까지 단숨에 밀어 넣고 다시 뺄 때마다 살끼리 철퍽거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입안에 고인 침이 바닥을 수놓았고 땀으로 끈적거리는 전신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아, 악! 으하아악!”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무자비한 속도와 완력이었다. 비명 같은 신음성이 내 고막을 아프게 공격했다. 너무 오래 참아서인지 봐주는 것 없이 쉬지 않고 내장을 치고 올라오는 불기둥의 열기에 내부 점막이 화상을 입는 건 아닐까 우려될 지경이었다.

무방비했던 내부가 한껏 짓뭉개지고 헐 정도로 사정없이 문질러져서 급기야 전신의 세포들이 불티처럼 기묘한 감각으로 튀어 올랐다. 몸이 허공에 붕 뜬 듯한 감각에 빠져들며 일순, 열기가 중앙에서 허무하게 폭발해버렸다.

머리가 하얗게 텅 비어버린 찰나, 진득한 피로감과 해방감이 급속도로 밀려들었다. 쓰러져서 잠들고 싶었으나 상대방은 내게서 한시도 떨어져나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등 뒤가 온통 손우경의 체온으로 감싸였다. 놈은 내 귀를 물어뜯으며 혀로 안쪽을 핥았다. 여의봉이 쭉쭉 늘어나 내장을 비벼대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괴롭혀댔다.

놈이 뒤에서 나를 꽉 끌어안고서 애 타는 몸짓으로 피치를 올렸다. 손우경의 숨 가쁜 신음 소리가 귓가에 유혹적으로 들려왔다. 이미 몸이 하나로 섞여 있음에도 어떻게든 더 밀착해서 놈을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 놈에게 깔린 채 저속하게 몸부림치는데, 내부를 거칠게 쑤셔대던 기운이 점점 더 덩치를 부풀리고 있었다. 그때 배 속 한가운데에서 따뜻한 것이 넘치듯이 터져 나왔다. 그 직후 안에서 사정된 정액들이 어느 부분으로 스르륵 스며들더니 그곳을 기점으로 지독한 쾌감이 전신으로 폭죽 터지듯 황홀하게 퍼져 나갔다.

아까의 사정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 온몸이 전율하며 최상의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손우경이 쏟아낸 정이 배 속에서 모든 흔적을 감췄지만 그것을 더 느끼고 싶어 나는 한껏 바르작대며 놈의 성기를 꽉 물어댔다. 한동안 흐느끼듯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 나를 손우경이 껴안아 일으켜서 무릎 위에 앉혀놓곤 달래듯이 뺨과 목에 키스를 했다.

“엄청 잘 느끼네. 가뜩이나 민감한 곳에다가 기의 통로를 열어놨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에게 손우경은 다시 장난스러워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예전에 네가 혼수상태인 상황에서도 내가 거기에 방사해줄 때마다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더라. 애기처럼 울먹이면서 더 싸달라고 졸라대는데 귀여워서 실컷 박아줬어.”

저질스러운 발언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손끝의 떨림이 쉽게 잦아들지 않았지만 손우경이 몸을 꼭 안아줘서 조금은 진정이 됐다.

녀석은 내 어깨에 턱을 괴고서 지나가는 투로 제안했다.

나가자. 여기 너무 좁아.

놈과 야외에서 했던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막 세 번째로 절정을 맛봤을 때 나는 이 몹쓸 체위들에 대하여 어떤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까는 손우경에게 내 양쪽 허벅지를 개구리처럼 붙들린 채 허공에다 사정을 했고, 이번에는 관람차를 움직이는 조종기의 받침대 위에 내 한쪽 다리를 올려놓고서 별 해괴망측한 포즈로 헉헉거리다가 연이은 황홀경을 맛보게 됐다.

가랑이 사이로 정액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았으나 그것들이 전부 나의 내장에 흡수되었단 생각이 들자 뭔가 찜찜해졌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해대고도 지치지 않는지 여전히 내 몸 위에 올라타서 젖꼭지를 빨고 있는 손우경에게 나는 조속히 말문을 열었다. 왜냐면 내 두 다리가 다시 좌우로 갈라져서 놈의 어깨 위로 올라가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곤란하다.

심지어 네 번째 절정을 향해 가기에 나는 솔직히 너무 지쳐 있었다.

“이제 그만 좀 해. 슬슬 숙소로 돌아가봐야 하잖아.”

“아직 세 번밖에 안 했잖아.”

“세 번씩이나 했겠지. 그리고 말이 좋아서 세 번이지…….”

녀석이 워낙 사정을 늦게 하니까 자연히 섹스 시간이 무한정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남의 말은 일절 귀담아 듣지 않는 손우경이 자신의 좆을 내 구멍 안으로 불쑥 찔러 넣으며 한껏 불평해댔다.

“아래에 힘 좀 꽉 줘봐. 조이는 맛이 없으니까 나도 시들해지잖아.”

시들해진 것치곤 참으로 건강한 굵기였기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너 끈질겨.”

“방금 전까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니가 할 소린 아니잖아.”

그 말과 함께, 마찰된 탓에 잔뜩 예민해진 부위를 쓱쓱 문지르는 손우경에게 내 몸이 금세 정직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그것 봐.”

생글거리며 웃는 낯짝을 보니 분노가 치솟았다. 무엇보다 흔하디흔한 정상위를 오늘 처음으로 시도한터라, 달빛 아래 손우경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게 공연히 겸연쩍었다. 게다가 놈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주 작은 반응 하나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훑어보는 게 참으로 곤욕스러워서 죽을 맛이다.

녀석은 땀에 젖은 내 앞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 넘겨주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와중에도 놈의 허리는 힘차게 움직여댔다.

“평소에도 이 정도로만 착하게 굴면 좋은데.”

“흐윽, 윽, 윽!”

“너한테는 줄 같은 거 억지로 안 매달아놔도.”

녀석에겐 말허리를 잘라먹고 그 뒷말을 구태여 내 귓가에다 속삭이는 심한 악취미가 있었다.

……네 뻥 뚫린 칼집엔 내 무기만 꽃아 넣고 싶잖아?

눈이 핑핑 돌고 두 뺨이 화끈거렸지만 손우경은 도무지 귀엣말을 그만둬주지 않았다.

아직 밤은 기니까 네가 있을 자리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천천히 알려줄게.

“하윽, 으으으응!”

날 선 흉기가 아예 내 배 속을 반으로 쩍 갈라낼 모양이었다.

……난 보기보단 인내심이 아주 많으니까.

그것은 단숨에 내 급소를 노렸다.

* * *

눈을 떠보니 내 방 침대 위였다. 몸은 갓 잡아 올린 잉어처럼 팔팔하고 개운한 데 반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하는 걸까. 어젯밤 내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만행들은 뒤늦은 자괴감을 불러왔다.

누군가 엉성하게 입혀놓은 셔츠 단추를 풀어내리다가 가슴에 불그죽죽하게 얼룩진 흔적들을 발견했다. 어제의 일들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재생됐다. 엉덩이 안을 연신 드나들던 묵직한 감각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 탓에 단추를 잠그는 것도 잊어버렸다.

나를 내려다보던 은회색 눈동자, 거칠어진 숨소리, 젖은 입술, 땀이 흐르던 녀석의 턱, 그리고……. 열이 올라 뜨거워진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나는 어떻게든 그 살색 향연들을 지워보려 애썼다. 허나 지난 다음에 자책해봐야 다 소용없는 짓이다.

놈과 그 짓을 얼마나 했던 거지. 다섯 번째로 절정에 다다른 순간까진 머릿속에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는데, 그 후로는 기절해버렸던 건지 아무 기억도 나질 않았다.

어젠 뻔히 무리하는 줄 알면서도 온종일 놈과 돌아다녀 남은 체력마저 방전시키고 종국엔 거미줄에 걸린 먹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자 기분이 한층 더 더러워졌다.

내가 놈에게서 에너지를 충전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애초에 멀쩡했던 것을 제멋대로 꼬아놓은 건 그 녀석이었다.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매던 날 치료해준 일은 고맙지만, 관음존자와의 연결점을 뚝 끊어놓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 드는 건 나에 대한 지나친 월권 행위였다.

내 배 속 깊은 곳에 심어놨다는 ‘지점’은 어제 몸소 체험해본 결과, 실재했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가 않다. 암만 나와 몸을 섞기 위한 구실이라곤 하나 자신의 정을 통해 타인에게 기운을 나눠주는 일은, 미치지 않고서야 종단의 웬만한 고수들도 쉬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그런데도 놈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나를 꽁꽁 옭아매려고 드는 거지.

물론 동성을 선호하는 놈의 성적 취향상 남자인 내게 흥미를 느낀 걸 수 있다. 놈 말마따나 내가 그의 이상형에 부합할 수도 있고. 그럼 설마 첫눈에 반한 건가? 그럴 리가. 내가 입때껏 지켜본 바로는 손우경은 감정이나 직감에 의해 함부로 움직이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해 타산적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비상하리만치 두뇌 회전이 뛰어나고, 관음존자와 대적함에 손색이 없을 만큼 실력도 좋지 않은가.

가만히 돌이켜보면 수용소 지하에서 처음 만났을 때, 놈이 날 공격하지 않았던 것도 꽤나 괴이쩍은 일이다. 나중에 아돌프가 등장해 나를 놈에게 던졌을 때도 그렇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생면부지의 인물을 그대로 덥석 받아 든 점도 내 상식선으론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알고 지냈다고.

연심을 품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놈은 어쩌면 날 통해 관음존자에게 모종의 보복을 가하려 드는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선 그렇게 계속 이 핑계, 저 핑계를 열심히 둘러대고 있었다. 어제 일어난 불상사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가하고 싶었던가 보다.

나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내 이런 소모적인 감정도, 손우경이 이딴 어설픈 함정의 결과를 알면서도 기꺼이 발을 들이는 것도 전부 부질없음을 알기에.

방문 너머로 복도를 거니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던 생각의 불씨를 얼른 꺼트리고 태연함을 가장했다. 이윽고 문이 번쩍 열리며 지금 이 순간 가장 대면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 등장했다. 손우경이 침대 위에 엉거주춤 앉아 있던 내게 다가왔다. 놈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오조의 물의 정령에게서 간이 샤워실을 빌린 모양이었다.

길게 뻗어오는 손길에 무심코 몸을 내뺐지만 침대 위에서 도망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팔뚝을 붙잡히면서 겸연쩍은 분위기가 연출됐는데, 녀석이 싱긋 웃었다.

“내 예상보다는 일찍 일어났네. 몸 상태는 좀 어때?”

“……네 덕분에.”

“너 오늘은 여기서 그냥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그야 네 냄새만 맡아도 다시 설 거 같으니까.”

어제 볼 장 다 봤으니 오늘은 내가 있어봤자 걸리적거린단 뜻이었다.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나가봐야겠다고 고집했으나 손우경이 날 억지로 침대에 눕혀버렸다.

“거참 말 되게 안 듣네.”

“저리 비켜!”

놈을 밀쳐내며 일어서려는데 허리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하마터면 폭삭 주저앉을 뻔했다. 그런 내 팔을 붙들어주며 놈이 지껄였다.

“그러게 내가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정기가 충전된 거랑은 별개로 그 몸 상태로는 오늘 하루 침대에서 얌전히 요양하는 게 낫다구. 나도 어젠 꽤 오랜만이라서 힘 조절을 전혀 못했단 말야.”

아깐 하도 정신적인 대미지가 커서 몰랐는데 정말 허리를 기준으로 위아래가 아작이라도 난 듯 쑤시고 아파왔다. 그럼에도 친히 이불까지 덮어주려는 손우경을 마다하며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봤다. 놈과의 섹스 후유증으로 오늘 하루를 숙소 안에서 끙끙대며 보내기는 싫었다. 마음이 심란할 때에는 차라리 움직이는 게 백번 나으니까.

종국엔 손우경이 백기를 들며 날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고집 부려봐야 너만 손해지. 오늘은 어제와 달리 다시 그 둘하고 같이 움직일 거야. 붙여놓을 분위기도 아니고 이제는 괜한 수고를 반복할 이유도 없어졌으니까.”

“괜한 수고?”

내가 인상을 쓰며 되묻자 손우경이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서 태연자약하게 입을 열었다.

“오해하진 마. 네가 무책임하게 기절해버린 후로도 난 밤새 잠 한숨 안 자고 그 일대를 모조리 뒤지고 다녔으니까.”

“너 그럼 출구를 찾은 거야?”

조바심이 나서 재촉해 캐물었지만 놈은 여유로운 작태로 쉽게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삼일 이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직은 이틀이나 남았잖아?”

“지금 그딴 말이 어딨어? 정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면 여기서 더 지체할 필요 없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문이 열리고 하루 사이에 눈매가 퀭해진 오조가 들어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기색으로 날 다그쳐댔다. 내가 비록 너를 만 하루 동안 굶기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어제부터 다 같이 굶었는데 네놈의 위장은 무슨 우주하고라도 연결되어 있냐. 빨리 만두를 쪄서 놈의 조그마한 주둥이에 밀어 넣지 않으면 저 시한 폭탄이 언제 터질지 알 수 없었다.

내 축소 가방을 뒤져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를 침대로 가져온 오조 녀석의 아침밥을 준비하면서, 머리로는 방금 손우경이 한 말의 의미를 헤아려보려 애썼다. 이제 괜한 수고를 반복할 필요가 없단 건 어떤 실마리를 잡았다는 소리일 텐데. 왜 속 시원하게 얘기해주지 않는 거지? 어제 미행 도중 알아낸 장소라 파오와 오조에게 말하긴 그렇다 쳐도 나에게까지 숨기려 드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오조가 만두를 씹지도 않고 꾸역꾸역 삼켜대는 꼴을 지켜보고 있자니 내가 다 체할 것 같았다. 새끼 여우가 허락도 없이 남의 만두까지 먹어대는 동안 파오가 등장했고, 손우경은 간단히 아침 인사를 건네며 평소처럼 장난을 쳤다.

“역시 삼십대의 아침은 표정부터가 우중충하네.”

파오는 바지춤에 넣고 있던 손으로 그 어딘가를 벅벅 긁더니 심드렁한 얼굴로 하품을 했다. 하필 바지 안에 들어갔던 손이 이번엔 하품을 하는 입가로 향하자 그나마도 없던 식욕이 싹 사라져버렸다.

“어제 뭐라도 좀 발견했냐?”

손우경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젓자 파오가 날 은근슬쩍 곁눈질하며 다 알아봤다는 듯이 말했다.

“아, 어련들 하시겠어.”

“그러는 사형 쪽에선 별다른 수확이라도 있었나.”

“전혀.”

“그래, 그러셨겠지.”

놈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오조가 만두를 먹다 말고 내게 진지하게 묻는다. 양볼이 만두와 식탐으로 가득 차 날다람쥐처럼 빵빵하게 부풀어가지곤,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질문이었다.

“삼장, 여기 있는 액체를 죄 한 번에 꿀꺽 삼키면 내 배 속에 만두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나는 쓸쓸한 눈길로 오조를 가엾게 바라봤다.

“배 속에 걸신이라도 사냐.”

새끼 여우가 칭얼대며 말했다.

“배고픈데 먹는 시간도 아깝단 말야.”

나는 나 먹으려고 몰래 숨겨뒀던 만두를 말없이 오조의 입에 넣어주었다.

* * *

허리 관절이 팔십대 노인처럼 삐거덕거렸지만 참고 걸었다. 내 허리를 아작 낸 장본인은 파오와 함께 앞서서 걷고 있었고, 등 뒤에선 오조가 따라오는 중이었다.

인원을 반으로 나눠 출구 수색조를 짜자는 계획은 지난밤 이후로 암묵적인 동의하에 사장됐다. 어제만 두 끼나 굶게 된 오조는 여섯 개의 만두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후 뭉글이 위에서 긴 잠에 빠져들었고, 그 주변에서 새끼 여우의 서비터들이 같잖게 보초를 서며 따라붙었다.

파오는 어제 온종일 오조 앞에서 험상궂게 무게를 잡느라 진이 빠졌는지, 오늘은 손우경과 돼먹지도 않은 진상 짓을 부리는 데 전력을 다했다. 둘은 주로 자각몽루시드 드림, lucid dream, 꿈이 꿈임을 아는 것에 대해 논하며 낯 뜨거운 음담패설을 일삼았는데, 자각몽이란 수면자가 몽중에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는 것으로 이에 점차 익숙해지면 나중엔 꿈의 내용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꿈은 보통 잠재의식이 나에게 전하는 무언의 메시지로, 현재의 내 상황을 상징적인 의미로 보여주거나 미래에 대한 예지를 해주기도 한다. 그런 꿈을 본인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내 무의식에 접속할 수 있단 소리와도 일맥상통하니 일부의 수행자들은 이 꿈에 대한 훈련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파오는 새벽에 꿨던 자각몽에서 한 몸에 세 개의 얼굴이 달린 여자와 불같은 섹스를 나눴다며 낄낄거렸는데, 그녀의 질이 마치 사람 입처럼 생겨서 자신의 육봉을 물고 쭉쭉 빨며 통 놓아주질 않았다면서 그것의 환상적인 쫀득함을 실컷 자랑해댔다. 듣고 있던 손우경이 한쪽 눈썹을 찡긋 올리며 난색을 표했다.

“유계 차원에서 만난 것들과는 가급적 상대하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자각몽 꾼 지 얼마 안 되는 코흘리개들이나 했을 법한 짓이네.”

“얼굴이 세 개라서 그렇지, 계속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얼굴만 아니면 굉장한 몸매였다고. 내 아들내미가 간만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깊고 아늑한 질이었지. 관심 있으면 너도 소개해줄까?”

“사양하지.”

여자 없인 단 하루도 못 살던 파오가 벌써 한 달 남짓 금욕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니 비난할 마음은 없었지만, 내 귀가 썩어나갈 것 같으니 이제 작작 하고 좀 닥쳐줬으면 하는 소망이 들었다.

늘 그랬듯이 손우경은 모두가 다 같이 있는 장소에선 내게 말을 걸거나 친한 척 굴지 않았다. 게다가 오조와 파오를 미행하던 곳과는 정반대인 장소를 뒤지고 다닐 이유가 없음에도 지금 내게 설명 한마디 없이 뒷모습만 보이고 있는 녀석이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젯밤 일에 대해 연연해하고 있는 건 꼭 나뿐인 것 같아서.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손우경의 존재가 목 안의 생선가시처럼 거슬렸다.

그러던 중 파오가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을 걸었다.

“현아, 건너편에 보이는 저 큰 건물을 조사해보자.”

부수적으로 손이나 눈짓 등으로 가리켜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지칭한 건물은 상당히 웅장해, 한눈에 도드라지게 와 박혔다. 해당 건물 근처에는 파괴되어 흔적만 남은 동상들과 색 바랜 국기들이 죽 도열해 있었다.

[ ROCK*FELL*R CENTER ]

뭐라고 적혀 있는 거람. 아주 오랜 옛날에는 이 대륙이 수백 개 이상의 자치구들로 갈라져 각각의 국가명과 국기들을 지녔다고 들었는데, 이 돔 안의 폐허에는 반세기 전 문명이라고 치부하기엔 낯설고 뜬금없는 부분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역시나 다른 건물들처럼 출입구가 몇 겹의 시멘트가 발라져서 단단히 막혀 있는지라 우리는 그 건물 주변을 한참 배회해야 했다. 그러던 중 측면에서 또다시 이상한 문자가 적힌 문을 발견했다.

[ NBC STUDIO ]

공작새 날개로 보이는 로고가 인상적이었다. 그 역시 입구가 봉해져 있었는데, 이번엔 파오의 주먹이 가차 없이 부수어버렸다.

“입구가 꽉 막혀 있는 건물인데 구태여 안까지 들어가볼 필욘 없지 않습니까.”

“니 말도 맞긴 한데 이 건물을 멀리서 한두 번 보고 지나친 게 아니라서 말야. 한 번쯤은 내부가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더라고.”

“하찮은 호기심 충족에 낭비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때 누가 내 머리 위로 손을 턱 얹었다. 옆을 돌아보니 손우경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깐이면 되니까 너무 안달내지 마.”

머리에서 금방 손이 떨어져 나갔다. 부서진 문틈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손우경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는데, 이상하게도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러는 거지. 내키진 않았지만 나도 따라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실신하다시피 한 오조를 업고 있던 뭉글이가 돌연 낮은 소리로 그르렁거렸다. 어쩐지 진입을 꺼려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소환수의 기분까지 신경 써줄 여력이 없어, 아직도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지는 입구로 발을 들였다. 뭉글이는 계속 꾸물대다가 아주 한참 뒤에야 마지못해 따라왔다.

내부의 홀은 엉망이었다. 기념품 같은 걸 파는 상점이었던 것 같은데, 선반들이 무너지고 물건들은 바닥으로 쏟아져 발 디딜 구석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파오와 손우경은 이미 홀 한쪽의 층계를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놈들을 마저 따라가는데 액정이 전부 나가 있는 네모난 기계들이 계단 주변을 온통 에워싸고 있었다. 뭔가 특이한 양식으로 이루어진 홀 내부를 구경하며 건물 곳곳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 손우경과 파오가 어느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 나와 오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파오가 먼저 그 문을 열었다. 안에는 복잡한 기계들로 가득했고 벽장에는 무수히 많은 소형 테이프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에 길게 늘어선 기계들을 주욱 눈으로 훑던 파오가 의아하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긴 뭘 하던 곳이지?”

기계 위로는 아까 층계를 올라오며 봤던 네모난 유리창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앞에 바퀴 달린 의자 네 개가 주인 없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시 다수의 사람이 머물던 장소였을 거였다.

기계로 이루어진 선반 위에는 몇 개의 테이프가 놓여 있었다. 손우경은 그중 하나를 집어 사면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다시 선반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엔 뚜껑이 열려서 생긴 좁은 틈이 있었는데, 유심히 관찰하던 손우경이 손에 든 테이프를 그리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크기가 엇비슷한 걸 보니 아마도 여기에 넣을 수 있는 물건 같은데.”

놈의 추측대로 크기는 딱 맞아떨어졌지만 그게 전부였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손우경은 다소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여기에서 그만 나가자며 돌아섰다. 그런 그의 걸음을 파오가 좀 더 조사해보는 게 어떻겠냐며 붙들어두었다.

이어서 파오는 의자에 앉아 척 보기에도 복잡해 보이는 버튼을 마구잡이로 눌러보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사각의 새까만 유리창 중 하나에 번쩍하는 빛이 들어왔다. 실상 건물 안에 아직도 동력이 남아 있단 사실이 더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들 그 유리창 안쪽에서 인위적인 빛이 들어오는 것에 그보다 더 아연실색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서 유리창을 지켜보는데 그 안에서 덜컥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지지직거리는 화면 속에서는 샛노란 머리카락과 청색의 눈을 가진 여자가 얼굴을 들이민 채 나로선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구사하며 흐느끼고 있었다.

여자의 눈가에 새카맣게 칠해진 것이 눈물을 검게 물들였다.

-I just came with the breaking news, which will be the last one that I deliver. All the citizens of New York, please stop the useless riots and demonstrations from now on. The government indicated that they have postponed the fourth development of the vaccine around the two o’clock yesterday. This is, in fact, the renunciation of…….

(이제 막 들어온 속보입니다. 이것이 제가 전하는 마지막 뉴스가 될 것 같군요. 뉴욕 시민 여러분, 이 시각 이후로 무의미한 폭동과 데모를 모두 멈춰주시길 바랍니다. 어제 낮 2시경, 4차 백신 개발을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정부의 입장 표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의 포기 선언으로…….)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 깼는지 오조 녀석이 뭉글이 위에서 고개를 쳐들고 그 음성에 귀 기울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신? 포기 선언?”

“넌 저 여자가 뭐라는지 다 알아듣겠어?”

오조가 아리송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아, 대충은.”

-I feel also terrible to bring this kind of news, but all the exits of the dome have been closed and the provisional government forces will be pulled out of New York soon. The city council has requested an emergency conference to the government, however, it was turned down. As a result, all the material supplies of food and medicines will be stopped at any moment. Meanwhile, the laboratory for developing vaccine against the mutated various was destroyed by fire of unknown origin yesterday, and so far, no survivor has been found.

(이런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저 역시도 무척이나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미 돔을 벗어날 유일한 출구는 폐쇄된 상태이며, 그 주변을 임시 주둔하던 정부군의 철수 또한 결정되었습니다. 뉴욕 시의원회에서는 대책 마련을 위한 긴급 대화를 요청했으나 정부가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에 따라 식료품과 의약품을 위시한 모든 물자 보급이 전면 중단될 예정입니다. 한편 돔 안에서 변이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던 연구소는 어제 저녁, 원인을 알 수 없는 큰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아직까지 생존자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들 오조에게 시선을 모으자 녀석이 떠듬떠듬 통역을 해주었다.

“……돔의 출구가 폐쇄되고…… 뭘 개발하던 곳에서 불이 나서…… 사람들이 다 죽었나 봐.”

-I’m telling you again. There is no way to control the various anymore. Please stop the riots and street march. I ask you to put down all the guns in your hands, and go back home. Keep the last dignity as a human being and stay with your loving family until the very last moment comes.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변이 바이러스를 억제할 방법은 이제 더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거리의 가두 행진과 폭동을 멈춰주세요. 손에 든 총포를 내려놓고 이제 그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주십시오. 사랑하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을 지키고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변이 바이러스를 억제할 방법이 없대. 폭동을 멈추고 어서 집으로나 돌아가라고…….”

바이러스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손우경이 말한 것처럼 이 도시 자체가 외부와 격리되었다는 게 전혀 손써볼 수도 없는 모종의 바이러스 때문이란 말인가. 오조의 어린애 같은 통역으로는 현재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한정적이었다.

힘들게 말을 이어가던 여자의 얼굴이 점점 기괴하게 일그러져갔다. 몸 전체에 경련이 오는 걸 애써 참는 듯했지만, 옷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붉은 핏줄은 인간의 그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구역질나는 모양새였다.

붉은 핏줄은 점차 목으로 차올라 여자의 하얀 얼굴까지 점령해 나갔다. 상기된 얼굴 곳곳에 급격히 열이 오르면서 화상을 입은 것처럼 기포가 일어나더니 급기야 껍질 자체가 훌러덩 벗겨졌다. 그러자 여자가 품 안에서 작은 권총 하나를 빼어들었다.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눈 여자는 진한 눈물을 흘렸다.

- It was Jassie, in the hopeless morning of New York. Christ, you must be watching this, right? I love you so much and so sorry that I’m not with you right now…….

(희망이 사라진 뉴욕에서, 이상 앵커 제시였습니다. 집에서 이 방송을 보고 있을 크리스, 사랑한다, 얘야. 엄마가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사랑한다, 얘야. 엄마가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라고.”

오조의 말과 동시에 총구에서 발사된 총성이 내 귓가와 가슴을 단숨에 꿰뚫었다. 피 흘리며 숨을 거둔 여자의 몸이 괴상하게 발작하는 순간, 화면에 다량의 피가 튀었다. 연이어 화면 가득 암전이 찾아왔다.

보지 않는 게 좋았을 것 같은 영상이었다. 건물에서 빠져나와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던 우리는 한시바삐 이곳을 탈출하고 싶은 일념에 사로잡혔다. 나중에 오조가 덧붙인 말로 추정해본건대, 뉴욕이라고 불리던 이 도시에선 사람의 몸 깊숙이 침투해 무서운 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창궐했고, 어느 누구도 해결책을 찾지 못해 도시 전체가 강제로 폐쇄되어버린 듯했다. 전에 손우경이 예측했던 상황과도 거의 대부분이 일치했다.

그러나 총이 관자놀이를 꿰뚫었음에도 괴물이 되어 다시 살아나던 여자의 마지막을 상기해보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진실이 마침내 그 본모습을 드러냈다.

“대종말 때 대륙 각지로 번져 나갔다던 그 전염병의 시초가 이 도시였단 말이야?”

파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내 말꼬리에 다른 물음표를 추가했다.

“근데 왜 이 도시가 여기에 있지? 여긴 서쪽과는 멀리 떨어진 곳인데.”

손우경이 연달아 바통을 이어받는다.

“그건 우리가 무간도에서 봤던 그 거대한 ‘균열’만이 알고 있겠지. 대종말 이전에는 지금의 대륙이 하나로 붙어 있지 않고 오대양 육대주와 수백여 개의 섬들로 갈가리 나뉘어 있었다고 들었어. 인간이 땅속 깊은 곳에 만들어둔 돔 안에 처박혀서 수십 년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던 시기에, 대종말 무렵 발생한 그 균열이 세상의 형태를 재구성해버린 거지. 그건 아주 유명한 일화잖아.”

마침 하늘을 뒤덮은 유리 막에서 하루에 한 번, 렌즈 효과로 태양이 커다랗게 차오르는 장관이 연출되고 있었다. 다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잊고 고개를 든 채 그 경이로운 순간에 넋을 놓았다.

태양이 우리를 집어삼킬 듯이 팽창해왔다. 소름이 돋았지만 아름답고도 위대한 광경이었다.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가 자연 앞에선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지를 몸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누구도 신을 믿지 않는 시대이건만, 인간이 실수를 저질러도 신은 항상 용서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대종말 직전까지 각국에서 자행되어왔다는 생화학 무기의 개발은 전 인류에게 파멸을 가져다주었고, 인간은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는 대신 신을 원망하는 비겁함을 선택했다.

그러나 자연은 결코 인간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다. 문서상으로만 기록되어 있는 세계 3차 대전이 채 발발하기도 전, 공기를 통해서 인체에 감염되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서쪽에서부터.

저녁 내도록 도시 안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니다가 돌연 왜 이따위 헛고생을 해야 하는지 심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손우경이 어제 내게 했던 말들에 정녕 한 치의 거짓이 없다면 눈속임은 이쯤 해두고 슬슬 탈출구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게 사람 된 인지상정이 아닌가. 오조와 파오가 계속 옆에 붙어 있다지만 슬쩍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거나 따로 얘기할 기회를 전혀 못 만들 분위기도 아니었다. 혹시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놈은 온종일 나를 있는 둥 없는 둥 방치하기만 했다.

슬슬 휴지기에 이르렀던 내 인내심이 활화산처럼 폭발하려던 찰나였다. 파오가 지쳤다는 투로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언제까지 돌아다닐 작정이냐, 너.”

손우경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대답한다.

“그라우마탄급 소환수들이 우리를 공격했던 곳이 어디쯤인지 기억나?”

“아니, 모르겠는데.”

“난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어제 사형하고 오조가 돌아다녔던 그 부근쯤 아니었나.”

“…….”

손우경이 오조에게, 더 정확히는 새끼 여우의 길 안내를 돕는 바람의 정령 실프에게 청했다.

“난 밤눈이 어두워서 그러니 네가 그리로 안내해줬음 하는데.”

오조가 정령과 짤막한 대화를 나누다가 손우경에게 곧장 얘기했다.

“여기서 별로 안 멀대.”

그러자 파오가 퉁명스럽게 참견했다.

“뭔 속셈이냐.”

“속셈은 무슨. 생각해보니까 소환수 근처엔 당연히 소환술사가 존재했을 거고, 그게 오조가 아니라면 다른 놈이 숨어 있다가 우리 몰래 빠져나갔다는 거겠지.”

“그거 나 아니라니까아!”

다시금 불필요한 논쟁에 불이 지펴질 기세였으나 손우경이 진화에 나섰다.

“그래, 넌 아니라고 치자.”

파오가 쓰게 웃음을 삼켰다.

“그쪽 부근이라면 어제 충분히 뒤져봤으니까 뭔가 더 나올 구석은 없어.”

“사형.”

조용하게 뇌까린 사형, 이라는 음절에서 진중함이 배어나왔다.

“초대형 소환수들이 활개치고 다녔던 그 근처에 유일하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아마 한 군데 정도 남아 있었을 거야. 난 언뜻 본 거 같은데. 혹시 어제 발견하지 못했어?”

파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네 말인즉슨.”

“…….”

“날 의심하는 거냐?”

손우경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우린 한 배를 탔는데.”

“…….”

“다만 이 배에서 내릴 작정이라면 날 먼저 실력으로 설득시켜봐.”

놈은 파오에게 정면으로 싸움을 걸고 있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파오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파오는 손우경의 도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길고 긴 눈의 대화가 이어졌다. 허나 도중에 손우경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였다.

“그래, 나도 아직은 이 재미난 연극판의 흥을 깨트릴 마음이 없어. 하지만 내일까진 꼭 결론 내기로 약속해서 실망시키고 싶진 않거든.”

파오가 입매를 늘어뜨리며 내 쪽을 넘겨다봤다.

“그래서, 방금 급조한 쪽 대본에는 이다음에 뭐가 적혀 있던.”

“감동적인 결말은 별로 내 취향이 아니지만 개고생 끝에 이 지긋지긋한 도시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장면?”

“마무리를 지을 장소는 미리 섭외해놨고?”

손우경이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칼같이 대답했다.

“그야 당연한 말을.”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이를 으드득 갈며 옆에 있는 손우경을 노려봤지만 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장 먼저 오조와 뭉글이가 탑승하고 그다음이 파오였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손우경이 히죽거리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냐하면 이곳은 불과 어제도 들렀던 공원의 관람차 앞이었기 때문이다.

물어볼 것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분노로 머리가 샛노래져 잡다한 감정들마저 증발하고 가장 단순한 질문만 남겨졌다.

“……언제부터 알았던 거야.”

손우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너랑 관람차 안에서 섹스 할 때부터.”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전부터 어느 정도는 의심하고 있었어. 이 주변 일대가 소환수들로 인해서 쑥대밭이 됐는데도 여기만은 외관상으로 멀쩡해서, 아마 이곳 어딘가에 무언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였거든. 그러다 너랑 헐벗은 채로 뒹굴었는데 네 몸을 핥을 때, 반세기나 버려져 있던 공간치곤 먼지 한 톨 안 묻어 있는 게 수상했다고.”

“……파오는, 그러니까 여기에 우릴 가둬두려고 했던 건 그럼 파오인 거야?”

“속단하긴 이르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관람차와 떨어진 조종기 받침대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바닥으로 꺼져 들어갔던 관람차의 일부가 다시 정위치로 돌아오자 놈이 천진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들려줬던 꿈 얘기 기억나?”

그건.

‘그런데 난 이 장면을 수용소에 갇혀 있던 시절에 꿈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이 낡아빠진 관람차 꿈에선 항상 내 옆에 누군가가 같이 있었는데 내가 아무리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그 사람의 얼굴이 절대 보이지가 않더라.’

‘아침에 우연찮게 여길 발견하고 나서 굉장히 놀랐었거든. 예지몽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겹게 꿨던 꿈이라서. 그러다가 내가 여기 이 자리에서 고개를 딱 돌렸을 때, 옆에서 바로 네 얼굴이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의 얼굴에서 새삼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끝내 알려주지 않더니만 그 꿈은 진짜 예지몽이 맞았나 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손우경의 해맑은 표정 위로 꿈에서 봤던 피투성이가 된 놈의 모습이 투사됐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예지몽…….”

내 입가로 놈의 숨결이 바싹 다가왔다.

“삼일 이내로 여기서 나가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지켰으니까 너도…….”

“감동적인 결말 싫어한다며. 그리고 난 너하고 약속 같은 거 한 적 없어.”

“그럼 눈만 감아.”

한숨을 쉬며 눈을 감자 입술 위로 애틋한 온기가 닿아왔다. 혀도 넣지 않고 입술만 살짝 닿은 입맞춤이었다. 끝났나 싶어 슬그머니 눈을 뜨자 은회색 눈동자가 코앞에서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놈의 손이 팔목을 휘감아왔다. 관람차에 탑승해 자리에 앉자 미리 조작해둔 탈출용 기기가 별 탈 없이 작동해주었다. 기체가 바닥으로 쑥 꺼져 들어간 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서서히 동이 터오는 아침을 등지고서 오조와 파오가 우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만에 맡는 신선한 바깥세상의 공기인지. 폐부 가득히 숨을 들이쉬며 나는 잠시 등 뒤를 돌아봤다.

시간이 멈춰버린 폐허 도시,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방문객들도 찾지 않을 이 거대한 무덤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붉은 빛에 반사된 유리 돔의 표면이 찬란한 눈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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