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WAG THE DOG (17/24)

14. WAG THE DOG

왝 더 독,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든다. 하극상 혹은 주객전도의 경우를 지칭함.

드디어 마하데바 호의 서쪽 출항일이 오늘로 다가왔다. 동이 트기 전부터 안개 낀 새벽 항구에서 선원들이 배에 짐 싣는 모습을 구경하던 우리 네 사람과 한 마리(뭉글이)는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각자 딴생각에 젖어 있었다. 한 달에 약간 못 미치는 시간 동안 아부-게르다에서 계속 머물렀으니 그사이 이곳 음식이나 도시 자체에 꽤 정이 든 탓이었다.

파오는 당분간은 또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해야 하니 아마 환장하기 일보 직전일 거고, 오조 녀석은 입맛이 까다로워져서 이제는 만두 따위에 더 이상 감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출발 직전에 내가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의 모든 시험관을 만땅으로 채워놨으니 네 녀석의 입맛 기준은 다시 질적으로 무서운 하락세를 탈 거란다, 얘야.

손우경과는 아주 미묘해진 상태였다.

녀석이 나라카에서 돌아온 후로는 꼭 정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하루가 멀다 하고 잠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단둘이 남아서 눈만 마주쳐도 놈은 내게 덤벼들었고, 나도 거부하지 않고 있었다.

상황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이제 내 의지만으로는 흐름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수평선을 응시하던 파오가 옆에 있던 나에게 굉장히 신기하다는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현아, 지금이 새벽이라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바닷물 바로 위로 아주 작은 공간만을 남겨두고서 무슨 경계선 같은 게 실처럼 쭉 쳐져 있어.”

파오의 얘기를 듣고 수평선을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바다 위로 작은 틈새를 제외하고는 하늘의 색상이 미묘하게 달랐다. 바다 위로 하늘을 엉성하게 붙여놓은 듯한 저 미세한 색상 차이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손우경은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냥 일반 평지에서 봐도 땅하고 하늘 사이에 미세한 균열 같은 게 쭉 이어져 있어. 바다처럼 한정된 장소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세상 어디를 가도 저런 금 같은 게 쳐져 있다구.”

파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바다가 아닌 육지 쪽을 바라보며 땅에 얼굴을 바짝 대더니 연이어 호들갑을 떨어댔다.

“우와, 손우경 니 말대로 진짜 그러네!”

나도 사실 해보고 싶었지만 이미 땅바닥에 들러붙던 파오에게 혀를 쯧쯧 차준 다음이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오조는 새벽부터 승선하기를 기다리다가 어느새 심신이 지쳤는지 뭉글이에게 몸을 기댄 채로 나가떨어져 있었다.

그때 마하데바 호의 선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우리에게 어서 타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반쯤 기절해 있는 오조를 옆구리에 챙겨 들고서 모든 출항 준비를 마친 마하데바 호로 향했다.

마하데바는 이곳 사람들이 숭배하는 대상들 중 하나인 시바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위대한 신’을 뜻했다. 대종말 이전의 시대에는 이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저 시바 신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전해지나 요새는 그의 부인인 칼리에게도 완전히 밀리고 있는 추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칼리 숭배는 아부-게르다의 원형이던 옛 인도의 말세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인도인들은 인류의 운명적 시기를 총 네 가지 유가로 구분했는데, 바로 사트야유가, 트레타유가, 드바파라유가, 그리고 마지막 칼리유가Kali-yuga등의 네 단계였다.

이 네 가지 순환 주기는 찬란한 황금시대였던 사트야유가부터 시작해서 선善이 점차 감소하는 두 개의 과도기를 거쳐 마침내 도덕과 행복이 모두 무너진 암흑시대의 칼리유가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지금은 바로 그 칼리유가의 마지막 시대라고 일컬어졌다.

이름적인 연관성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이 칼리유가 때에는 무서운 얼굴을 한 죽음과 파괴의 칼리 여신이 현세에 강림하여 타락한 인류를 징벌하기 위해 세계를 온전한 파멸의 길로 이끈다고 아부-게르다 인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박의 이름을 위대한 여신을 칭하는 마하데‘비’가 아니라 위대한 신을 뜻하는 남성형의 마하데‘바’로 작명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험난한 바다를 항해하는 강인한 뱃사람들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우리가 승선을 끝내자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귓가 가득히 울려 퍼졌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 따름인데도 여태껏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생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먼 곳의 하늘에서 어두컴컴한 먹구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의 괜한 기우이길 바라지만 예감이 썩 좋지가 않았다.

* * *

안색이 칙칙해진 하늘이 엊그제 누구랑 이별이라도 했는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출항 전부터 하늘빛이 수상하다 했더니 결국 항해하는 사흘 내내 미친 듯한 폭우가 쏟아졌다.

이 배를 타게 해준 일등공신인 손우경이 막판에 나름대로 기지까지 발휘해서 짐칸 대신 선원실에서 묵게 된 건 천만다행이었지만, 워낙에 좁은 공간이라 벌써 며칠째 극심한 뱃멀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내 꼴을 구경하기 위해 방으로 찾아온 파오가 너 진짜 가지가지 한다며 앙칼진 시어머니처럼 구박을 해댔다. 나는 헛구역질이 나오는 입을 틀어막으며 파오에게 쏘아붙였다.

“그쪽 얼굴 보니까 더 토할 거 같은데…… 좀 나가주실래요…….”

파오가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마침 같은 선실에 있던 손우경에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우경아, 쟤 혹시 입덧해?”

손우경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런가.”

내가 두 녀석들을 동시에 노려보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둘 다 여기서 좀 나가!”

나의 정중한 부탁에도 두 녀석 다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꺼져달라는 최상급의 표현을 쓰지 않은 게 뒤늦게야 큰 후회가 됐다. 내가 벽에 붙어 있는 간이침대에서 탈수 증상으로 시들어가는 사이, 손우경과 파오는 뭔가를 열렬히 의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걸 왜 굳이 내 방에서 해야 하는지 둘 중에 아무나 설명 좀 해주라.

“……그럼 뒤처리는 네가 할래?”

“사형 말대로 그런 식으로 처리했다가 나중에 다시 승선할 일이 생기게 되면 뒷감당은 누가 할 건데?”

“방금 말했잖아. 니가 하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너야 어차피 살인죄로 감방도 한번 갔다 왔겠다, 진작에 버린 몸이잖아. 인생을 밑바닥까지 경험했던 놈이 뭐가 그리 겁이 나냐구.”

“사형 혹시 수영 잘해?”

“어? 아니. 포타라카 산간 출신이 어릴 때 물 구경이나 해봤겠냐. 수영은 갑자기 왜 물어?”

“바다 한가운데로 집어던지면 살아남을까 싶어서.”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왔다. 양손을 모아서 무릎 꿇고 사정이라도 하면 좀 나가줄까 싶었지만, 쟤네들은 남의 컨디션이야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을 놈들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셋 다 방문 쪽을 바라봤다. 이번에 나를 찾아온 것은 새끼 여우였다. 오조가 이미 만석이 된 선원실 내부를 둘러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녀석이 말했다.

“삼장, 나 배고파서 식당에 갔더니 아직 밥 먹을 시간 안 됐다고 이따가 오래.”

저 자식까지 포함해서 다들 사람이 아프든 말든 개의치 않고서 자기 목적만 충족시키려고 들었다. 하지만 불당 개 삼년이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읊는 법이다. 나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오조를 불러들였다.

“……얘네 좀 치워주면 만두 삶아줄게.”

배에서 제공되는 선원식이 예상보다 더럽게 맛이 없는 관계로 오조는 아부-게르다 이전의 조강지처인 만두에게로 다시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손우경과 파오를 힐끔 본 오조가 손을 쓱 내밀며 조잘거렸다.

“그럼 선불.”

너도 갈수록 영악해지는구나. 나는 머리맡에 있던 쉽고 간편한 요리의 ‘야채 만두’와 ‘삶기’ 모르이아 액체를 골라낸 후 오조에게 말했다.

“입 벌려봐.”

샬레를 쓰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새끼 여우가 입을 벌린 틈을 타서 각각의 스포이트를 놈의 입안으로 한 방울씩 흘려 보냈다. 오조가 입안에서 만두가 통통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지팡이를 높이 쳐들자 손우경과 파오가 내게 편히 쉬라고 가증스러운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서 슬금슬금 일어났다.

녀석들이 내가 묵는 선원실에서 나가고 난 뒤, 새끼 여우가 기운 없는 얼굴로 한쪽 볼에서 만두를 우적거리며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산장, 마이 아파?”

나는 대답했다.

“……입에 있는 거 다 먹고 나서 말해.”

오조가 입안에 있는 만두를 전부 오물오물 삼키고서 다시 물어본다.

“많이 아파? 아침에 우경이가 걱정했었어.”

니가 뭘 잘못 봤겠지. 걘 내 앞에서 걱정하는 내색 같은 건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데.

“……넌 뱃멀미 같은 거 안 해?”

오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응.”

손우경과 파오야 건강한 체질이니 이깟 뱃멀미 따위야 안 하겠지만, 어린 오조도 멀쩡한데 나 혼자 한심하게 자리에 몸져누워 있는 게 창피했다. 오조가 그런 나를 토닥토닥해주며 조금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주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균형 감각 훈련을 받아서 그래. 공처럼 생긴 물건에 넣어서 막 굴려대는데 그걸 두어 시간 정도 하고 나면 나중에 너무 어지럽고 속이 안 좋아져서 노란 위액까지 토하게 되거든.”

“…….”

“근데 삼장.”

새끼 여우가 기가 죽은 투로 물었다.

“나 복수 안 해도 되니까 우리 서쪽으로 안 가면 안 돼?”

도대체 이게 뭔 뜬금없는 소린지 나는 속이 메슥거리는 와중에 머리까지 울렁거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오조가 시선을 내리깔며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답했다.

“가기 싫어졌어…….”

“그러니까 왜.”

“나 혼자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관음존자의 명령대로 에메랄드 태블릿의 수호자가 부활하는 걸 막고 나면 우린 거기서 다 헤어지는 거지? 삼장도, 우경이도, 그리고 파오도 다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 맞지?”

오조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언젠가 찾아오게 될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녀석의 말대로 우리의 서유기西遊記는 목적이 전부 달성되는 순간,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그 뒷이야기는 이제 각자가 알아서 만들어나가야 할 몫으로 더는 함께 공유되지 못할 테니까.

“복수까지 다 해버리고 나면 나는 남은 오년 동안…… 뭘 위해 살아?”

“하나의 목표가 끝나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우면 돼. 그리고 그런 건 내가 너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뱉어놓고도 참으로 위선적인 얘기라고 생각됐다. 오조의 파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들여다봤다.

“삼장은 서쪽에서 임무를 마치고 나면 그다음엔 뭘 할 거야?”

그것은 새끼 여우의 질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았다. 허나 몇 달 가까이 혼자서만 고민하던 것이 타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해 너무나 쉽게 해결책이 나와버렸다. 내가 오조에게 말했다.

“그건.”

“…….”

“그때 가서 천천히 고민해봐도 늦지 않아.”

오조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떼었다.

“알았어. 나도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볼게.”

녀석이 방금 좋은 걸 알려줘서 고맙다며 그 보답으로 자기도 내가 아프지 않게 마법을 걸어주겠다고 했다. 그동안 오조가 이계의 괴수들을 소환하거나 정령을 부리는 것만 봐왔기에 느닷없는 마법 얘기가 왠지 낯설게 들렸다.

“네가 마법을 걸어서 날 낫게 하겠다고?”

“따지고 보면 내가 직접 하는 건 아니고, 삼장 스스로가 해야 되는 거야.”

“어떻게?”

작은 손가락이 내 가슴 부근을 콕 찍었다.

“이 안에는 누구나 마법이 가능해지게끔 도와주는 내부자가 숨어 있어. 내부자는 상위 자아인 수호천사와는 개념이 달라. 사실 일반 사람들은 걔가 그 안에 들어 있는지도 몰라.”

안 그래도 어지러워 죽겠는데 얘가 뭐라는 거니.

“마법은 그 내부자와의 소통 방식을 익히는 게 가장 중요해. 아까 삼장은 우경이랑 파오가 옆에 있을 때 속이 더 안 좋은 것같이 느꼈지만, 그 둘이 방 안에서 나가고 나니까 좀 괜찮아졌지? 지금은 그렇게까지 힘들어 보이진 않거든. 몸이 불편한 걸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신경을 썼던 만큼 더 아팠던 거야.”

“…….”

정말 그랬다. 그 녀석들이 옆에서 떠들어대고 있을 때에는 몸 상태가 최악이었는데 새끼 여우와 둘만 남고 난 뒤로는 조금 어지러울 뿐이지 말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늘 멍하거나 잠만 퍼 자는 오조가 오늘따라 영리해진 눈빛으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법 주문을 외우는 것은 간단해. 아까 내부자와의 소통 방식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 했잖아? 걔는 단순한 애라서 너무 어려운 말을 하면 잘 못 알아듣거든. 그냥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일인칭의 언어로, 긍정적인 표현을 써서 주문하면 돼. ‘나는 무엇이 될 것이다’ 혹은 ‘나는 무엇을 되기 싫다’가 아니라 마치 이미 다 이루어진 것처럼 ‘나는 무엇이 됐다’고 완료형으로만 말해야 해.”

불교의 참나 개념과 함께 아돌프가 가끔씩 들려주던 잠재의식과 현재의식의 원리와도 엇비슷하게 상응하는 얘기였다. 사실 언어 체계만 다를 뿐이지 역시 서양의 마법이나 동양의 주술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 것이 틀림없었다.

오조는 내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서 주문을 읊조렸다.

“삼장은 이제 다 나았어, 아주 건강하다, 이걸 자신의 입장에 대입해서 얘기해봐.”

녀석의 성의는 고맙지만 나는 이런 장난 같은 얘기들을 믿지 않았다.

“난 너희가 말하는 마나의 그릇이 터무니없이 작아서 그런 짓 해봤자 소용없어.”

나한테는 남들처럼 주술이나 마법을 사용할 만한 특별한 능력이 부여되지 않았다. 내가 현재 사용하는 환살 부적은 어릴 적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술 교습을 해주던 관음존자의 작품이었다. 당시의 그는 나를 ‘깨진 그릇’이라고 불렀다. 수행을 시켜봤자 기의 운용과 축적은커녕 줄줄이 새어나가기가 바쁘니 힘들게 가르치는 보람도 없다는 거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도 사소한 진전조차 없는 나를 머저리처럼 취급하다가, 타고난 지진아에겐 암만 욕을 해봤자 별수 없다는 걸 깨달은 아돌프가 뒤늦게 마련해준 임시방편이 바로 환살 부적이었다. 그러니 이런 간단한 마법조차 내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오조는 물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회유하려 들었다.

“삼장 말대로 그릇의 영향도 무시할 순 없지만, 마법의 기반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걸.”

내가 기대감 없이 형식적으로 되물었다.

“그 마법의 기반이 뭔데.”

오조가 딱 부러지게 대답한다.

“나 자신을 믿는 것.”

오조가 걸어주었던 마법의 효과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나는 괜찮다, 건강하다 하고 생각하며 잠들었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땐 울렁거림이 멎고 머리가 한결 개운해진 상태였다. 어릴 때 툭하면 아팠던 기억이 많아서 그런지 나는 내 몸 상태에 대해 언제나 자신이 없었다. 감기 기운이 있거나 조금만 열이 올라도 내가 원래 그렇지 뭐 하면서 금세 포기해버리는 경향이 컸다. 아프다는 생각을 늘 전제 조건으로 깔고 살아가는데 사실상 몸이 건강해지는 게 기적일 것이다.

컴컴한 방 안의 전등을 켜고서 밖으로 나가려고 옷을 갈아입었다. 씻는 것과 먹는 것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시점인데 배가 꾸르륵거리며 청결보다는 자신을 우선시하라고 언질을 준다. 식당에 가기 위해 선실을 빠져나오다가 우연히 맞은편 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던 손우경과 딱 마주쳤다. 녀석이 심술궂게 말했다.

“입덧은 좀 잦아들었어?”

“…….”

이럴 땐 무시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대꾸 없이 쓱 지나치는데 뒤에서 따라왔다.

“냉정하긴. 삼일 내내 옆에서 간호해준 사람한테 너무하는 거 아냐.”

나는 뒤를 돌아보며 삼일간 차곡차곡 응축됐던 화를 한 번에 폭발시켰다.

“간호 같은 소리 하네! 양심이 있으면 그딴 얘기 입 밖에 꺼내지도 마!”

선원실이 밀집되어 있는 복도다 보니 여기서 더 얘기했다간 듣는 귀가 많아서 이쯤에서 그쳐야 했다. 삼일 내내 뱃멀미에 시달리느라 반쯤 혼이 나가 있는 나를 놈은 인형놀이라도 하듯이 옷을 홀딱 벗긴 다음에 알몸이 된 내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며 잠시도 편하게 놔두질 않았었다. 잠이라도 혼자 잤으면 말을 안 하겠는데 선원실 벽에 붙어 있는 간이침대는 남자 두 명이서 같이 자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손우경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저 나름대로의 불만을 토로한다.

“……아부 게르다에 있을 때 착하고 귀엽고 야하게 굴던 너는 내 꿈이었나 봐.”

“그래, 그거 다 꿈이었으니까 좀 비켜. 나 밥 먹으러 갈 거야.”

복도 앞을 막아선 손우경이 또 내 말은 듣지도 않는다.

“싫어.”

놈이 내 턱을 거머쥐고서 강압적으로 입을 맞춰왔다. 키스할 만한 타이밍도 아니었지만 거부하면 시끄러워지니 빨리 하고 끝내는 편이 나았다. 아닌 게 아니라 상대방도 눈을 감지 않은 채 화를 내듯 혀를 투박하게 휘감아대고 있으니 피장파장이었다. 손우경이 입을 떼어내고는 내 턱을 잡고 있던 엄지로 입술에 묻은 타액을 쓰윽 닫아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키스할 때의 혓바닥은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가시 돋친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놈에게 못되게 굴려던 것은 아니었다. 손우경이 나라카에서 돌아온 직후,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린 나의 행동에 스스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우적대던 중이었다. 맨 정신으론 살갑게 굴 만한 성격도 안 되거니와 놈과 다시 거리를 둘 계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네가 암만 잘해줘봤자 어차피 난 빠져나갈 구멍만 찾고 있는걸.

눈을 쳐다보고 말하면 거짓말인 걸 들킬 테니까 손우경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서 맥없는 음성으로 양해를 구했다.

“나 삼일간 물 외엔 거의 먹은 게 없어. 그나마도 먹는 족족 다 게워내고.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런 거니까 나 뭐라도 좀 먹게 해줘.”

손우경이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목뼈까지 내려온 손길이 내 튀어나온 경추를 더듬는다. 고개를 들어서 놈을 슬쩍 올려다보니 녀석의 표정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게 굳어 있었다.

“목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야위어가는 건 보기가 싫은데.”

“…….”

“왜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까.”

내가 눈꼬리를 접으며 별것 아니라는 투로 얘기했다.

“내가 착하게 구는 게 너한테는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까.”

“날 홀리느라고 내 앞에서 꼬리 숨겨두느라 고생 많았겠다.”

손우경이 내 한쪽 볼을 쫙 잡아당기며 삐딱한 웃음을 흘렸다.

때마침 저녁 시간이라 식당 내부는 마하데바 호의 선원들로 가득했다. 저녁 메뉴는 콩을 주재료로 버터를 첨가하여 끓인 달 수프와 납작한 차파티 빵, 카레 가루를 묻혀 구운 닭이 전부였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배에서 삼시세끼 제공되는 음식들은 맛이 전부 최악이었다. 거의 매 끼니마다 등장하는 콩 수프는 승려인 내 입에도 역하기 짝이 없었으며, 차파티 빵은 한 달 전에 미리 구워서 만들어놨는지 무슨 돌덩어리를 씹듯 퍽퍽한 식감이었다. 유일한 고기 종류인 구운 닭은 표면에 양념도 잘 배어 있지 않은데다 이게 정말 닭고기가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위장에서 어서 음식물을 좀 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도 식판에 퍼 담긴 저녁거리를 보니 식욕이 싹 사라져갔다. 내 정면에 앉은 손우경이 구운 닭을 한입 먹어보더니 ‘너 아까 배 많이 고프댔으니 이것도 다 먹을래?’ 하면서 날 위해주는 척을 했다. 쟤가 정말 나를 좋아하긴 하는 걸까. 방으로 돌아가서 그냥 쉽고 간편한 요리나 만들어 먹을까 하다가 그래도 이왕에 여기까지 내려왔으니 꾸역꾸역 배나 채우고 올라가야겠다 싶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와 좀 떨어진 대각선상 위치에서 갑자기 왁자지껄하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쓱 들어보니 파오 녀석이 마하데바 호의 선장과 다른 선원들 틈에 둘러싸여 뭐라고 떠들어대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는지 몰라도 파오가 선장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파오가 큰 소리로 우리 이름을 부르며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손짓했다. 손우경은 식판에 손도 대지 않고 있다가 눈빛으로 내 의사를 물었다. 나도 이 음식물쓰레기들을 더 이상 나의 연약한 위장 봉투에다가 쓸어 담고 싶진 않았기에, 우선 술판이 벌어진 파오 쪽에 합류하기로 마음먹었다.

배의 탑승을 허락하기 전까지 엄청 깐깐하게 굴던 선장은 손우경이 자기 동생의 유골을 되찾아준 이후부터 우리를 꽤 친밀한 사이처럼 대해주었다. 방이 굉장히 좁긴 했지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선원실은 일반 선원들이 묵는 다인실이 아니라 항해사나 배의 주요 기술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일인용 개인실이었다. 물론 선장의 큼직한 방에는 바닥에 호랑이 가죽 카펫과 물침대까지 놓여 있을 정도로 무지하게 호화롭긴 하다만.

나와 손우경이 다가가자 몇몇 선원들이 선장과 파오의 테이블 쪽으로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나무로 된 탁자 위에는 갖가지 종류의 술들과 마른안주들이 널려 있었다. 손우경은 거기에 널려 있던 술병 하나를 챙겨 들더니 누구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서 자기 먼저 목을 축였다. 술은 한 번도 입에 대본 적이 없었지만 옆에서 잔을 건네주길래 무심코 받아 들었더니 선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거품이 잔뜩 이는 술을 따라주었다.

잔에 든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던 파오가 ‘현아, 잠깐만!’ 하고 만류하기도 전에 왠지 갈증이 나서 딱 한 모금을 들이켰더니 생각보다 너무 썼다.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혼자 술도 못 마시고 켁켁거리고 있으면 너무 빙충맞아 보일까 봐서 잔에 든 걸 억지로 목구멍 안에 다 털어 넣었다. 선장이 몹시 유쾌해진 목소리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파오 자네의 일행들답게 하나같이 주당이구먼!”

파오가 꽤나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야, 너, 그거 엄청 독한 혼합주인데…….”

술기운이 벌써부터 오르는지 내게 뭐라고 중얼대는 파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집중하려고 해도 자꾸 초점이 어긋나는 기분이다. 별안간 식도가 타들어가는 것같이 뜨거워졌다. 술병을 입에 대고 있던 손우경이 그런 나를 지그시 돌아보다가 파오에게 묻는다.

“얘 혹시 술 못해?”

파오가 끄응거리며 나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훑어봤다.

“대체 어딜 봐서 잘 마시게 생겼냐.”

의자가 흔들거렸지만 나는 꿋꿋하게 버텨냈다. 손우경이 고개를 기울여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흔들거리는 내 몸을 손으로 붙잡아주며 파오에게 말했다.

“심각한데. 일단 방에 데려다주고 올게.”

녀석이 의자에서 일어나 내 한쪽 팔을 붙들어 부축했다. 술잔을 입에 댄 파오가 손우경에게 심상찮은 눈초리를 보내자 놈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저 두 녀석이 뭔가 서로 신호를 주고받고 있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선원들과 목청이 터져라 큰 소리로 떠들어대던 선장은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내게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에이, 거참 시시한 녀석이로군!”

이 배에 탄 뒤부터 되는 일이라곤 없다. 사흘간 뱃멀미에 시달리다가 조금 나아지나 했더니 이번엔 술 한 잔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젬병 신세였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언제나 현실이 뒤따라주지 않는 게 무척이나 슬펐다. 남보란 듯이 뭐든지 척척 잘해내고 싶지만 그럴 능력은 되지 않고, 주변에는 인간의 범주를 무시하는 괴물들이 널려 있으니 나 자신이 더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이대로 현상 유지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괜찮은 척, 잘하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러나 척은 항상 척으로만 끝날 뿐이었다.

날 간이침대에 눕혀준 손우경이 이마를 쓸어주며 재우려고 들었다. 술에 취해서 꼬부라진 말투로 내가 말도 안 되는 억지나 부리고 있는 걸 참을성 있게 다 들어주면서.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자.”

정말로 이해가 안 됐다.

이런 내 자신이 나조차도 싫은데, 넌 대체 왜 나 같은 걸 좋아해…….

그냥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나라서? 우리 셋 중에선 그나마 내가 제일 네 취향에 부합하니까? 스스로를 비하하는 생각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혹시라도 손우경이 나를 재우고 다시 가버릴까 봐 마음을 졸였다. 내가 이기적인 놈이란 건 이제 잘 알겠다. 하지만 이런 기분으로 혼자 있기가 싫었다.

그보다 계속해서 이상한 혀 짧은 소리나 내고 있는 내 입부터 누가 좀 틀어막아주면 좋겠다.

“우경이…… 너도…… 사시른 내가 한시마지?”

손우경이 토닥거리던 손길을 멈추고서 흐 하고 웃었다.

“어, 되게 모자라 보이고 좋네.”

진짜로 한심하단 투의 답변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나는 초점이 풀린 눈으로 억울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너 내 방에서 나가아…….”

손우경이 즉시 대꾸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날 붙잡고 있는 손을 놔줘야 나가든 말든 하지.”

놈의 말대로 내 미친 손이 여태껏 손우경의 옷을 쥐고서 못 가게 붙들고 있었다. 얼른 손을 놓고서 벽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쪽팔려서 내일 쟤 얼굴은 어떻게 보지.

손우경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더니 상체를 나에게로 숙여왔다. 제발 귀에다가 대고 말 좀 안 했으면 좋겠다.

‘현아.’

숨결이 간지러웠다.

‘네 어설픈 여우 흉내보다 이게 더 귀여운데.’

녀석이 손가락으로 달아오른 뺨을 매만지며 상당히 안타깝다는 식으로 덧붙였다.

‘마음 같아선 너랑 더 놀아주고 싶지만 파오 사형이랑 급한 선약이 있어서.’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주면 안 되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거절당할까 봐 무서웠다. 아니, 그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잠시 쉬고 있으면 새벽에는 돌아올게.’

뺨과, 눈꺼풀, 마지막으로 입술에 키스해주며 손우경이 약속했다. 술기운에 몽롱해진 내 정신 상태로는 마치 꿈속에서 대화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온종일 잤는데도 또 잠이 쏟아졌다. 그러나 나는 비몽사몽 중에도 뭔가를 쉬지 않고 얘기하고 있었다. 이대로 손우경을 보내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

‘다시 안 오면 어쩔 건데.’

‘안 그래.’

‘그러면 그건…… 어떡하지.’

‘그것도 내가 해줄게.’

‘……왜?’

그리고 그 후의 대답은 키스로 돌아왔다.

* * *

겨우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이런 표현을 쓰기가 민망했지만 어쨌든 숙취 때문에 머리가 띵했다. 내 옆에서는 언제 돌아왔는지 손우경이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잠들어 있었는데, 어떻게 그 정신으로도 내 옷을 다 벗기고 잘 생각을 했는지 참으로 뛰어난 의지력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손우경에게 이불을 잘 덮어준 뒤 옷을 챙겨 입고 선실 밖으로 나왔다. 왜냐하면 화장실이 급했다.

선원실이 쭉 이어진 복도가 다들 잠들었는지 으슥할 정도로 고요했다. 갑판으로 올라가보지 않아서 시간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야심한 새벽녘인 듯했다. 꺾어진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 화장실로 가려는데 자동 감지기가 달려서 저절로 불이 켜지는 조명등이 마침 내가 진입하려던 복도의 맨 끝 부분에서 켜져 있었다.

흡.

자칫 소리를 낼까 봐 자체적으로 내 입을 가로막았다.

지금 복도 끝에 서 있는 건 눈을 씻고 다시 봐도 파오랑 오조였다.

니네 거기서 뭐하냐.

오조가 긴장한 자세로 복도 벽에 딱 붙어서 있고, 파오 녀석은 마치 순진한 애들 돈이나 뺏는 불량배 같은 포즈로 팔 한쪽을 벽에 기대고서 오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오의 손이 오조의 얼굴을 틀어잡았다. 새끼 여우가 고개를 빼내려고 했지만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누가 봐도 명백히 오조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내가 나서서 도와줄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파오가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잘 들리지가 않는다.

이윽고 오조의 팔목을 움켜잡은 파오가 새끼 여우의 얼굴로 거칠게 입술을 가져갔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데 몸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벽에서 몸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린 오조를 절대 놓치지 않고서 파오는 거의 폭력에 가까운 험악한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새끼 여우가 지금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여기에 있는 나에게까지 여실히 느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입술을 잡아먹힌 오조가 가냘픈 주먹으로 파오의 가슴을 사정없이 때렸지만 당연히 꿈쩍도 안 했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 주먹에도 힘이 들어갔지만 다리가 마비되어 있었다.

완전히 넋을 놓고 그 꼴을 황망하게 응시하는데 파오가 한참 만에 입술을 떼어내곤 손등으로 입을 쓱 닦았다. 새끼 여우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 없이 울었다.

그런 오조를 가만히 지켜보던 파오가 새끼 여우를 번쩍 안아 들고는 바로 등 뒤에 있던 자신의 방으로 순식간에 데려가버렸다.

“…….”

잠은 다 잤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잠에서 깨어난 손우경이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다가, 침대 구석에 음산하게 앉아 있던 날 보며 흠칫 놀랐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우경에게 털어놨다.

“내 주변에 여자들뿐만 아니라 어린애까지 가차 없이 건드리는 변태가 있었어.”

손우경이 잠에 덜 깬 음성으로 무심히 대꾸했다.

“누구? 파오 사형?”

“뭐야, 너 알고 있었어?”

“알긴 뭘 알아. 네 주변이랑 내 주변에서 우리 둘 빼면 그런 변태가 누가 남아.”

변태라면 사실 눈앞에 한 명 더 있긴 하지만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하다.

손우경은 어제 과음을 했는지 아침부터 영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녀석이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침대 끝에 있던 나를 당겨서 자기 품에 넣고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 더 잘 거니까 너도 자자.”

아침이라 불쑥 텐트를 친 녀석의 하반신이 역시나 우람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놈은 그것을 내 등으로 가져다대며 날 더 꼭 껴안았다. 내가 부자유스러운 몸을 뒤틀면서 싫은 기색을 내비치자 고양이 쥐 생각해주듯 녀석이 캐물었다.

“왜,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

“……등이 불편해.”

하지만 불편 사항의 신고 접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놈은 엉뚱한 소리까지 지껄였다.

“나중에 그거 한 번만 더 해줘.”

“뭘?”

“지난번에 네가 뒤에서 나 껴안았던 거.”

“…….”

나라카로 떠나던 새벽, 그때 얘기를 하는 건가.

손우경이 줄기차게 묻는다.

“근데 너도 지금 설레?”

“아니, 등이 불편하다고.”

새벽에 우연찮게 본 그 장면을 손우경에게도 사실대로 얘기해야 되나 고민이었다. 난 여전히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고,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큰…….

“소, 손우경, 잠깐만.”

잔다고 그래놓고 왜 남의 바지는 벗기는 건데. 손우경이 한 손으로 바지를 급하게 끌어내리더니 다른 손으로는 내 엉덩이 사이에다가 손가락 두 개를 끼워 넣었다.

“야, 아침부터 뭐하자는 거야.”

손가락이 둥글게 돌아가며 안쪽을 점점 벌려대고 있었다.

“금방 끝낼게. 잠깐 다리 좀 잡고 있어봐.”

손에 내 허벅다리를 우격다짐으로 들려주더니 직각으로 벌어진 다리 안쪽으로 탱탱해진 살덩어리를 불쑥 가져다댔다. 녀석이 자기 물건을 손에 쥐고는 내 구멍 주위에 귀두 끝을 슬슬 문질렀다. 귀두에서 말간 액이 흘러나와 메마른 항문을 촉촉하게 적셔온다.

쿠욱.

녀석의 두터운 몽둥이가 촘촘하게 다물린 내 아랫입을 야만스럽게 꿰뚫고 들어왔다. 이 짓을 벌써 수십 번째 하고 있지만 처음 삽입할 때마다 하반신에서 제대로 된 감각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것은 아주 느린 속도로 진입해왔고, 잠시 후 엉덩이가 따끔거렸다. 놈의 중심에서 무성하게 자란 털들이 내 가랑이의 여린 살들을 콕콕 찔러왔기 때문이다. 묵직한 크기의 고환까지 회음부에 찰싹 달라붙자 턱관절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나 진짜 쌀 거 같아.”

거기까지 말한 손우경은 내 허리와 허벅다리를 우악스럽게 틀어쥐고는 허리를 쓱쓱 움직였다. 거의 빼지 않은 상태에서 박다 보니 놈의 고환만이 철썩거리며 살에 부딪혔다. 나는 한쪽 다리를 치켜든 자세로 등 뒤의 손우경에게 정신없이 관통당하고 있었다.

좁아터진 방이라서 내가 지르는 신음 소리가 너무 색정적으로 울렸다. 고환이 맨살에 착착 휘감기는 소리는 더 야했다. 그러나 벌건 백주대낮부터 녀석과 이런 짓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놈이 점점 더 피치를 올려댔다. 가랑이에서 끈질기게 마찰되는 고환에 이제는 살이 짓무를 지경이었다. 그때 내 허벅다리를 붙잡은 손에서 순간 괴력이 발휘됐다. 힘 조절이 안 된 허벅지가 너무 아파서 악! 소리를 지르는데 녀석의 목에서도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까 쌀 거 같다더니 정말 자신이 얘기한 대로 이때까지 통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사정을 끝마친 것이다.

내 배 속으로 정액을 잔뜩 사출한 손우경은 잠시 후 그 상태로 나를 껴안고서 곧바로 잠들어버렸다. 나는 조금도 잠이 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엉덩이에 놈의 양물이나 처박고서 손우경이 깨어나는 걸 얌전히 기다려줄 마음 따윈 없었다. 그러나 녀석은 내가 자기 품 안에서 절대 못 빠져나게끔 이미 양팔을 허리에 포승처럼 두른 채 잠들어 있었다. 나를 껴안은 단단한 팔 근육은 절대로 풀리지 않을 듯이 견고했다.

한숨을 쉬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좀 전까지는 등이 불편했는데 이제는 엉덩이 사이가 불편했다. 귓가로 손우경이 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해보니까 저 녀석도 방금 전까지 술이 덜 깬 상태였던 것 같다. 술은 어떤 사람이든지 단순하게 만들어버린다.

머리도 어수선한데 그냥 잠이나 더 자야겠다 싶어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새벽에 목격한 그 충격적인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새끼 여우가 지금쯤 혼자서 어쩌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 * *

바다의 폭풍우가 너무 거셌다. 배가 격렬하게 요동쳐서 선실에 있는 물건들이 모두 바닥으로 떨어지고 깨져가며 난리도 아니었다. 서쪽으로 출항한 지 약 나흘 만에 맞는 대위기였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이미 손우경은 보이지 않았다.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가보니 머리 위에서 다른 사람들의 절박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배의 갑판으로 올라가던 도중, 역시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던 파오와 딱 마주쳤다. 다시 만나게 되면 오조의 일부터 따져 물으려 했었으나 지금은 그럴 경황조차 없었다.

갑판 위로 올라가자 거대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시커먼 하늘에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억수 같은 비를 마구 퍼부었다. 풍랑이 너무 세서 배가 속수무책으로 이리저리 뒤흔들리고 있었다. 키를 잡은 조타수의 건장한 팔뚝만으로는 감당할 영역이 아니었다. 선장의 명령에 따라 선원들이 중간 돛대의 돛을 걷기 위해 긴급하게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뭐가 참 이상했다. 혹시 배가 전복될까 봐 조마조마했던 심정이 갑판 위로 올라서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사라지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갑판에 도착해 있던 파오 역시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서 불쑥 입을 열었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눈을 멀쩡하게 뜨고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어. 분명 피부로 비를 맞는 감각은 있지만 실제로 옷이 젖지는 않고 있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종류의 기술을 쓰는 녀석들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파오가 그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대환영大幻影, 관음존자의 일루전 수법이군.”

타인에게 현실처럼 생생한 환상을 보여주어서 정신 상태를 극도의 혼란에 빠트린 후 허점을 치고 들어오는 공격 기술이었다. 대환영은 내가 사용하는 환살 부적 따위는 새발의 피에도 못 미칠 만큼 광범위하고도 강력한 환상을 보여주는데, 대체 이 기술이 왜 이런 곳에서 발현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 불능이었다. 수정궁 안에 틀어박힌 관음존자가 여기까지 행차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필시…….

그때 일순 번갯불 같은 섬광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와 파오의 위쪽으로 일곱 개의 인영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한 눈으로 머리 위의 그들을 바라보자 검은 제복의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두 번째 섬광이 머리를 덮치기 직전에 파오가 쏜살같이 나를 낚아채어서 다른 곳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녀석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를 빗물에 잔뜩 젖은 얼굴을 하고서 내게 큰 소리로 타박했다.

“이 멍청아, 정신 똑바로 차려!”

하지만, 저들이 왜 나를 공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야 저 일곱 개의 검은 인영들은 다름 아닌 ‘척살부’의 동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단순히 동료라고 칭하기엔 나와는 급 자체가 다르다. 얼굴이야 그동안 마주친 적이 수두룩했지만, 척살부 내에서도 아돌프의 수족으로 손꼽히는 실력자들이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나에게 섬광을 쏘아 보낸 저치는 우리 부대의 대장인 남자였다.

파오는 허공에서 점점 사정거리를 좁혀오는 놈들을 경계하며 내게 나직하게 물었다.

“……현아, 지금 일루전이 시전되는 범위가 대충 어디서부터 시작하냐.”

파오의 말에 얼른 눈을 돌려 사방을 훑어보니 배 주위의 공중에는 도합 열여덟 명의 추가 인원이 있었다. 먼 곳에서 배 하나가 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 배를 타고 따라온 듯했다.

놈들은 각각 여섯 명씩 조를 짜서 육망성을 만든 다음, 배 주위에서 삼중으로 된 결계각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일루전은 결계 안에서만 발현되는 중이었으나, 절대로 이 결계를 깨지 못하게 하려고 육망성의 결계각을 맡고 있는 놈들은 잘 훈련된 움직임을 선보이며 전혀 예측 불허의 궤도를 타고 있는 중이었다. 결계가 하나라면 모를까 삼중이라면 지금 어느 누가 와도 이 결계를 깨기란 불가능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그랬다.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데요……. 자그마치 삼중 결계각입니다. 대환영이 시전된 범위는 결계 안쪽이구요.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공격당하게 된다면 여기가 바다 한가운데인 걸 감안해도 아예 빠져나갈 구석이 없습니다…….”

파오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환각 상태는 어쩔 수 없이 감안해야 한다는 건가.”

그야말로 바다 한복판에 뚝 떨어져 사방에서 밀어닥치는 거대한 파도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우르르 쾅쾅거리는 뇌우를 시시각각 오감으로 체험하는 일은 실로 엄청난 압박감을 동반했다.

머리 위의 일곱 명을 예의 주시하느라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는 파오는 내게 다른 것을 물었다.

“총 몇 명이냐.”

“결계각의 열여덟 명을 포함해서 전부 스물다섯 명입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이럴 때 손우경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니, 어차피 결계각의 녀석들은 현재로선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야. 신경 써야 할 것들은 바로 머리 위에서 깍깍거리는 저 까마귀 떼겠지.”

일곱 명의 척살부 대원들이 하나둘씩 갑판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에게 외쳤다.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놈들은 나와 파오를 동그랗게 에워쌌고, 대장인 ‘다이치’가 나를 향해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경고를 내뱉었다.

“……애송이, 네 처신이나 똑바로 해.”

뒤에서 다른 척살부 대원이 치고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순식간에 목덜미에 날카로운 칼이 쓱 들이밀어졌다. 뒤쪽에서 들려온 것은 여자 목소리였다.

“감히 관음존자님을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네 하찮은 목숨으로 그 죗값을 대신해라.”

그러나 칼만 들이댔지 날 당장 죽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만약 그랬다면 그냥 비어 있던 등을 찔러버리는 게 더 간단한 일이었다. 나를 칼로 위협하고 있는 여자 대원을 차치하고라도 현재 여섯 명이나 되는 척살부 대원들이 파오를 향해서 살기등등한 기운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자세한 설명 같은 건 해주지 않았지만 우릴 바라보는 눈초리가 말 그대로 배신자를 대하듯 경멸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이치가 무표정한 얼굴로 파오에게 입을 열었다.

“전직 천봉대원수, 그쪽은 명성만 들어봤습니다.”

파오가 픽 웃으며 무참하게 응대해주었다.

“그거 참 미안하게 됐군,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몰랐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군부와 척살부는 환영제야단 내에서도 빛과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대외적으로 군부가 전쟁이나 반란 진압 등의 큰 일을 도맡는다면, 암살이나 뒤에서 수행해야 하는 비밀스러운 일들은 대부분 척살부의 몫이었다. 비록 백여 명 안팎의 적은 인원이었지만, 척살부는 관음존자의 직속 부대였기 때문에 대장인 다이치는 종단 내에서도 천봉대원수인 파오와 맞먹을 정도의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다이치는 알게 모르게 파오와 비교의 대상이었기에 지금 누군지도 모른다는 말은 그저 상대방을 도발하기 위한 대사라고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다이치가 후 하고 코웃음을 치며 손에 끼고 있던 가죽장갑을 벗어젖혔다.

“그분께서 딴생각 하지 못하게 그저 가벼운 경고 조치만 내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의 전신으로 숨길 수 없는 살기가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당신과는 한 번쯤 실력을 겨뤄보고 싶군요.”

관음존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다이치의 실력에 대해선 익히 두 눈으로 보아왔던지라 파오가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국이나 중국 등의 동양권 혈통이 판을 치는 종단 내에서 소수 인종 출신인 다이치가 척살부를 이끄는 대장 자리까지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이 보증됐다는 어떤 반증이기도 했다.

허나 다이치의 얘기를 듣고 있던 파오가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금세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다.

“……슬슬 몸이 달아서 찾아올 거라곤 생각했지만, 니들은 시간과 장소도 구분 못하냐?”

몸이 달아서 찾아올 걸 예상했다니. 설마 일부러 늦장이라도 부려가며 시간을 끌고 있었단 말인가. 파오는 섬뜩한 눈동자로 내 뒤에서 칼을 겨누고 서 있는 여자 대원을 곁눈질하더니 다시 다이치에게 시선을 주며 입가에 잔뜩 비틀린 미소를 머금었다.

“구린내 나는 암살자들이면 분수에 맞게 이런 장대한 쇼는 준비하지 말았어야지.”

파오의 한쪽 팔에서 붉은색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녀석이 팔을 들어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치자 내 목에 겨누어졌던 칼이 바닥으로 스르렁 하고 미끄러져 내렸다. 뭔가가 압력에 의해 펑! 하고 폭발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내 얼굴로 무자비한 핏방울들이 튀었다. 원래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몸통만 남기고 얼굴이 터져버린 시체가 갑판 위에서 남은 목을 통해 낭자한 핏물을 흘려대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윽고 폭발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다이치 뒤에서 대장을 비호하고 있던 다른 척살부 대원들의 머리통이 차례대로 펑펑 터져나갔다. 삼중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녀석들의 움직임이 일순간에 흐트러졌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다이치의 눈빛에 찰나의 당혹감이 지나갔다.

파오가 다이치에게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며 등골이 으스스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오합지졸들 대가리 노릇이나 하느라 눈깔에 뵈는 게 없나 본데.”

파오가 오른손을 다이치에게 들어 올리며 비웃는 어조로 의문을 제기했다.

“나와 실력을 겨뤄?”

눈에 보이지 않는 풍압에 의해 다이치의 몸이 저절로 밀려났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밀려나는 게 아니라 몸 주위의 공간이 뒤틀리고 있던 걸 다이치가 이를 악물고서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중이었다. 다이치가 도망치듯 하늘로 떠오르려는 차에, 텅 빈 허공임에도 뭔가에 가로막혀 다시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파오가 싸늘한 눈매로 돛이 전부 걷혀 디딤줄과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돛대 위를 올려다보며 매섭게 으름장을 놨다.

“방해하지 마, 손우경.”

그 말에 나도 위쪽을 바라보니, 손우경이 돛대 기둥의 가장 높은 활대에 걸터앉아서 아래쪽의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는 중이었다. 쟤는 언제부터 저기에서 저러고 있었던 거지?

손우경이 아주 유쾌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냥 쥐새끼가 도망가려고 들길래 사형을 도와준 거야. 혹시 몸이 무거워져서 경공법을 까먹었을까 봐!”

수십 미터에 육박하는 돛대 기둥 위에서 손우경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갑판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바닥에 사뿐하게 닿은 발소리는 이미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있었다.

손우경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바닥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돌아보며 파오에게 아는 척을 해댔다.

“그거 참 무서운 기술이네. 기로 혈관을 막아서 압력을 가하다니.”

“…….”

“나도 ‘그 사정거리’ 안에 붙잡히면 머리가 그대로 박살 나버리겠어.”

손우경이 눈을 접으며 생긋 웃고 있었지만, 명백히 시비를 거는 말투였다. 나로서는 그 정도나 떨어진 거리에서 기술의 핵심을 파악하는 눈썰미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입때껏 온갖 구박은 다 받아가며 꼭꼭 감춰뒀던 실력치고는 지금 너무 말도 안 되는 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대체 그런 실력을 뭣 때문에 숨겼다가 이제야 발휘를 하는 건지, 지금 상황을 비롯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내겐 전부 이해되지 않는 것들투성이였다.

파오는 평소의 손우경을 대하는 목소리로 적당하게 대꾸해주고 있다.

“어휴, 부끄럽게 그걸 위에서 다 본 거야?”

의외의 모습을 들켜서 부끄럽다는 듯이 얘기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당장 어느 누구라도 찢어 죽일 만큼 험악해져 있었다.

두 녀석이 때 아닌 신경전을 벌이는 도중, 잠시 잊혀 있던 다이치가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서 환영의 낫을 쏘아 보냈다. 악귀의 형상으로 생긴 환영 그림자가 거대한 낫을 들고서 파오의 목을 단숨에 베려던 차였다.

파오가 단지 눈빛 하나로 다이치의 양쪽 손목을 꺾어버리자, 거짓말처럼 낫을 든 그림자가 사그라졌다. 그것은 수인手印을 통해서만 조종되는 악한 영이었다.

파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잔재주 부리지 마.”

손목에서 시작된 뒤틀림이 이윽고 다이치의 몸 전체로 이어졌다.

“게다가 난 사신 따위는 질색이라고.”

방금 다이치의 그 기술은 공격 대상이 가장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주술법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한때는 그림리퍼라고 불리던 오조가 연상되는 사신의 모습이었다.

다이치의 몸이 꽈배기처럼 기괴하게 비틀려갔다. 비틀려가는 몸에서 피로 된 즙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머리를 터트려 죽이는 편이 더 낫지 저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인 몰골이라 나는 아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역겨운 장면을 본 탓인지 갑자기 머리가 푹푹 쑤셔왔다. 분명 어디선가 저런 장면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어떤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서 머리만 어지러웠다. 현기증이 일어서 잠시 이마를 짚고서 호흡을 고르는 사이, 손우경의 호전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건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 사형이 실력을 공개해준 대가로 주변 잔챙이들은 내가 처리할게.”

간만에 피 냄새를 맡은 손우경은 파오에 의해 자극까지 받아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놈은 이미 대장을 잃고서 결계의 대열마저 흐트러져 있던 다른 척살부의 대원들에게 그 화살을 돌렸다.

배 주변이 무슨 원형 경기장을 방불케 하듯 물기둥들이 하늘 끝까지 닿을 것처럼 동그랗게 솟구쳐 올랐다. 갑판 위의 선원들은 모두 배 안으로 도망간 지 오래였다. 그러니 이 장관을 구경하는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방금 파오의 가공할 만한 살인 기술로도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는데 불과 아침까지도 나와 몸을 섞었던 저 남자는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대단한 능력자였다.

기문파공으로 공간을 가르거나 이어붙이는 장면을 그간 숱하게 봐왔지만 설마 바닷물까지 들어 올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전에 관음존자가, 서쪽으로 가는 여정에 나를 포함한 단 네 명의 인원만으로 이 세상이 멸망할 징조를 막고 오라고 명했을 때에는 정말로 기도 안 차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잠귀신인 오조가 실은 굉장한 소환술사이며, 손우경은 현존하는 최강의 기술이자 관음존자의 주특기인 기문파공을 똑같이 구사하는 실력자인데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파오가 그동안 나에겐 드높은 벽이었던 척살부의 선배들을 아주 간단하게 뭉개놓는 모습까지 보고 나니 어째서 이런 조합으로 간소하게 인원을 꾸렸는지 이제야 납득이 갔다.

저 녀석들은, 진짜 무지막지한 괴물들이 맞구나.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한편으로 강한 자괴감까지 느껴졌다. 내가 어째서 이런 곳에 껴 있을까.

지름이 어마어마하게 큰, 원형 물기둥에 둘러싸여 배 주변에 둥둥 떠 있던 척살부 녀석들은 아직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손우경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떤 진언을 외웠다. 그러자 바닷물 안에서 길고 거대한 몸통을 가진 해룡이 나타났다. 몸이 연푸른색으로 된 그 해룡은 손우경이 만들어놓은 바닷물의 경계선 안에서 빙빙 돌아다니며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척살부 대원들을 하나씩 집어삼켜갔다. 평소에 무엇 하나만 해도 크게 생색내기를 좋아하는 손우경답게 현재 벌여놓은 판의 스케일이 장난 아니었다.

뭇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자 잔인하기로 악명 높던 그 척살부가, 등장과 동시에 손 하나 까딱해보지 못하고 저 단 두 명에 의해 너무 처참한 신세로 전락해버린다. 척살부 내에서 낙하산 취급을 받으며 언제나 고전을 면치 못하던 나이기에 지금의 기분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들의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인지 아니면 손우경과 파오가 보통 인간의 기준을 훌쩍 뛰어넘은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비록 우리가 같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저들과는 같은 선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인간 목숨을 파리처럼 취급하는 일련의 행동에서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질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적이 아닌 동료들로 인해 얼어붙은 몸을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콕콕 찔러왔다. 굳어진 목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오조가 혈색이 안 좋은 얼굴로 식은땀까지 흘려대며 내 옷자락을 붙들고서 겨우겨우 서 있었다. 울어서 퉁퉁 부르튼 눈 하며 어디가 많이 아파 보였다.

갑자기 왜 저러지 싶다가 잠시 기억에서 잊고 있던 파오와의 새벽녘 일들이 떠올랐다. 새끼 여우가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냐는 표정으로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와서, 하마터면 너야말로 새벽에 파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어볼 뻔했다.

“삼장…… 대체 무슨 일인 거야…….”

오조의 갈라진 음성이 덩달아 내 마음을 찢어놓았다. 대환영의 결계는 진작 해제되었지만 아직도 굵은 빗방울이 오조의 얼굴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처럼 성난 파도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출항 전부터 날씨의 조짐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얼굴색이 파리하게 질려 있는 새끼 여우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때 배가 기우뚱 기울었다. 예기치 못하게 몸의 중심을 잃은 순간, 나와 오조에게로 벼락같이 번쩍이는 섬광이 날아들었다. 나의 몸이 어느 다급한 손에 의해 끌어당겨지는 동안, 오조는 정통으로 섬광을 맞고 갑판 위에서 정신을 잃은 채 기울어진 경사각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오조야!!!”

배 바깥으로 주인의 몸이 굴러 떨어지자 어딘가에서 쏜살같이 달려 나온 뭉글이까지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다. 섬광을 쏜 것은 파오가 죽어가는 고통을 오래 느끼게 하기 위해 일부러 살려두고 있었던 다이치의 회심을 다한 일격이었고, 그 섬광을 쏜 걸 마지막으로 파오가 몸을 완전히 터트려버렸다.

나를 붙든 손우경에게서 벗어나 재빨리 난간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배 바깥의 바다에서는 해수로 된 방어벽과 해룡의 소환으로 인해 조성된 무서운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오조를 구하러 가야 하는데도 저 소용돌이 앞에 주춤하며 바다로 뛰어들 용기가 없는 나약한 내 자신에게 거대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녕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인간인가. 내 주변에 나보다 뛰어난 괴물들이 많다고 치부하며 스스로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겁쟁이로 규정했던 것은 타인이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한계를 그은 것도 나였고, 내가 그은 한계선 밖으로는 나가려 들지 않았던 것도 오로지 나였다.

미친 짓이라는 건 알지만, 그동안 쌓였던 울분과 오조에 대한 걱정으로 나는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난간 너머로 몸을 던지려던 나를 손우경이 만류했다.

“이거 놔! 당연히 오조부터 구했어야지 왜 날 먼저 붙잡은 거냐구!”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말도 안 되는 억지나 부리고 있었다. 손우경이 빠른 반사 신경을 발휘해 날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조와 함께 섬광을 맞고서 물고기 밥이나 되어 있었을 것임에도.

손우경이 흥분해서 날뛰는 내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이런 식으로 뺨을 아프게 때린 적은 처음이라 맞아서 얼얼해진 부위에 손을 대고 순간 멍청하게 놈을 바라보는데 손우경이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둘 다 구할 수 있었으면 그렇게 했겠지.”

“…….”

“그럼 너 말고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책이 뭔지 말해봐.”

나는 절망하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손우경의 뒤로 석상처럼 굳어진 파오의 모습이 보였지만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괴물 같은 능력을 자랑하는 저 두 명도 성난 바다 앞에선 평범한 인간들처럼 무기력했다. 관음존자의 직속 부대인 척살부의 난데없는 습격부터 오조를 집어삼킨 바다에 이르기까지, 오늘처럼 이렇게 나 자신의 무능함을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

내 앞에서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추위에 떨고 있던 새끼 여우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자책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새벽에 오조가 파오에게 험한 짓을 당했을 때 참견했어야 옳았다. 아님 아침에라도 손우경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오조와 함께 있어줬어야 했다. 그 밖에도 내가 뭘 더 후회할 수 있지. 결과가 벌어지고 난 후에 후회하는 일만큼 위선적인 행동이 또 어디 있을까.

소용돌이가 피어오르던 바다가 잠잠해질 때쯤, 우리의 시간도 함께 정지해버린 듯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서로 사이가 아주 좋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장장 반년의 시간을 거의 매일같이 공유해온 사이였다. 오조가 배 안에서 말했던 게 이런 거였나. 서쪽에 도착해서 목적을 전부 달성하고 나면 다들 헤어지는 거냐고.

급작스러운 사고로 동료를 잃게 된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다. 배는 난파된 것처럼 바다 위를 떠돌았고, 비가 그쳐 맑게 갠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배의 난간 위로 너덜너덜해진 물체가 힘들게 기어 올라왔다. 그 정체는 여섯 발의 발톱이 죄 빠져서 끔찍한 피투성이가 된 뭉글이였다. 입에 악착스럽게 물고 있던 축 늘어진 주인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것을 차마 뭉글이라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소환수의 몰골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앞까지 힘들게 엉금엉금 기어온 뭉글이는 자기 입에 물려 있던 오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마치 앞으로 주인을 잘 부탁한다는 듯이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 자리에 털썩 쓰러져버렸다.

다행히도 기절한 새끼 여우는 끊어질 듯 가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뭉글이는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았다.

쉬어가는 페이지 7 <오조>

★ 심심한 날, 친구가 필요한 날, 나는 나는 친구를 만들죠

배급 시간이 순식간에 훅 지나가버렸다. 바로 눈앞에서 내 순서를 빼앗겨버린지라 아쉬움이 더 컸다. 나도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으면 다른 아이들처럼 빵 하나 정도는 손에 쥘 수 있었을 텐데. 뒤로 밀쳐져 바닥으로 넘어졌는데 다리에서 피가 철철 났다. 아우, 아프다…….

며칠 동안 배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아서인지 그 허기짐에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빈민 구역마다 살포하다시피 하는 저 딱딱한 빵들이, 실은 거리의 쓸모없는 사람들을 서서히 죽이기 위해 독극물을 조금 첨가한 것이란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았지만 아무도 그 얘기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굶어 죽는걸.

빵을 배급하는 트럭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빵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고 그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이미 나처럼 빵을 얻어먹지 못한 아이들이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흙 묻은 작은 빵 부스러기를 발견하자마자 스스럼없이 입으로 털어 넣었다. 먼지만큼이나 작은 크기라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부스러기를 한참이나 혀로 음미하다 보니 배가 더욱 고파졌다. 이대론 쓰러질 것 같아서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양손으로 마구 흙을 퍼 먹었다. 하지만 목구멍으로 흙이 채 넘어가기도 전에 캑캑거리며 입에 든 것을 전부 토해냈다.

괜한 짓을 했나 싶어서 울상을 지으며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다가 그만 눈으로 흙이 들어가는 이중고를 겪었다. 거의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들 틈에서 오늘 획득한 빵들을 냠냠 먹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부럽게 쳐다보다가, 결국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속이 상했다. 딱 한입만이라도 좋으니 빵을 먹고 싶었다. 그러면 입안에서 아주 천천히 불린 다음, 몇 번에 걸쳐서 조금씩 삼킬 수도 있을 거였다. 연달아 꼬르륵거리는 배를 문지르면서 애써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다음번 빵 배급 날까지 몇 밤을 더 자야 하는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빈민굴의 아이들이 모닥불 근처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따뜻한 불을 쬐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나처럼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이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조금 더 불 근처로 다가갔다. 그때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장작개비에서 불꽃의 얼굴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헛것인가 싶어서 눈을 비비자 그제야 불꽃의 얼굴이 자취를 감췄다. 가끔씩 물이나 불, 구름, 바위 같은 걸 바라볼 때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생겼었다.

“그 파오라는 녀석, 고작해야 이십대 초중반이래. 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어린 나이에 그런 벼락출세를 했는진 몰라도, 혼자서도 우리 연합군 천 명을 너끈하게 상대한다더라.”

근래 들어 알게 모르게 자주 듣는 이름이었다. 동방의 환영제야단 군사들을 이끄는 천봉대원수 자리에 얼마 전 아주 파격적인 인사 등용이 있었는데, 그 남자의 이름이 바로 파오인 듯했다. 하지만 듣자하니 그 파오의 잔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는 우리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마다 포로로 사로잡은 마법사들의 목을 단칼에 베어서 그 잘린 목을 가지고 탑을 쌓는 악취미가 있다고 했다. 또한 평소엔 서쪽 마법사들의 두개골을 컵으로 사용해서 술을 따라 마신다는 소문도 있었다.

얘기를 듣기만 하는데도 너무 무서웠다. 덩치도 산처럼 크고 고블린같이 무시무시한 외형을 가진 사람이라던데 얼마나 나쁜 악당일지 덜컥 겁이 났다.

맨날 우리가 사는 곳으로 쳐들어오는 동양의 종단 녀석들은 정말이지 악독하고 야만적인 성격이었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끼리 만나 또다시 고아를 만드는 소모적인 일이 벌써 수년에 걸쳐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기나긴 전쟁으로 가난과 배고픔마저 끝없이 대물림되는 가운데 이곳 사람들에게선 이미 희망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셰릴은 더러운 바지 주머니에서 너덜너덜해진 종잇조각을 꺼내 들었다. 우리들 중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해서인지 유일하게 글씨를 읽을 수 있는 셰릴이 사거리에 붙어 있던 마법사 모집 전단을 가져왔던 것이다.

“여기 적혀 있는 내용에 따르면 마법사로 발탁만 되면 앞으로 배를 주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대. 훈련 중에도 틀림없이 하루 세끼 보장이라고 적혀 있다구.”

그러나 까막눈인 다른 아이들은 셰릴의 말에 뭔가 내켜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리마다 마법사를 모집한다는 전단이 가득 붙어 있었지만, 요즘 같은 전시에 마법사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자초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설령 세끼 식사에 눈이 멀어 교단에 지원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마법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정확한 기준은 모르겠지만, 마법사가 되는 전제 조건으로 무슨 마나의 그릇인가 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어쨌든 다른 아이들의 시시한 반응과는 달리 셰릴은 더 이상 빈민가에 남지 않겠다는 결심이 선 듯했다. 나는 셰릴의 손에 들린 전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봤다. 저길 갔다가 바로 쫓겨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어쩌면 빵 한 덩어리쯤은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판단을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거였다…….

셰릴의 시신이 성문 밖으로 내던져졌다. 마법사에 지원한 지 약 칠일 만에 그 지옥 같은 곳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그는 비참한 모양새로 죽어버렸다. 글씨를 읽을 수 없는 나를 대신해서 지원서를 작성해준 그가, 우리 둘 다 인적 사항에 고아라고 표기해둔 것이 화근이었다. 그 후 나와 셰릴은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군의관이었던 남자가 우리의 신체검사를 마치며 어차피 고아니까, 라고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을 때 수상쩍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바로 도망쳤어야 했다.

그들은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좁은 방에 나를 집어넣었다. 바닥이 좁은 대신 천장이 기형적으로 높은 방이었다. 아주 위쪽으로 숨을 쉴 수 있게끔 공기가 통하는 작은 환풍구 하나가 뚫려 있을 뿐,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먹는 것은 전단에 적힌 대로 하루에 세 번, 상한 냄새가 풀풀 나서 개도 안 먹을 것 같은 오트밀 죽을 시멘트 바닥 위로 부어주었다. 여기서 내보내달라고 울음을 터트렸다가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엄청나게 얻어맞았다.

이른 아침마다 어딘가로 끌려가 머리에다가 긴 주삿바늘로 형광색 액체를 주입받았다. 그걸 맞을 때마다 머리가 멍해지며 점점 기억력이 감소하는 듯했다.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옷이 홀딱 벗겨진 채로 강렬한 밝기를 가진 수십 개의 백색 형광등 아래에 누워 있었다. 눈이 부셔서 흐릿해진 초점이었으나 주변에서 사람의 머리로 추정되는 둥근 그림자들이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아마도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귓가로 여러 명의 말소리가 웅성웅성 들려왔다.

-보기 드물게 좋은 그릇이로군. 문차일드라니. 대체 이런 걸 어디에서 구해 왔지?

-운이 좋았습니다. 델드란도 같은 폐기 구역에서도 가끔씩 이런 행운이 벌어지는군요. 이번 달엔 지원자가 총 삼백여 명인데 이 아이와 함께 약 스무 명 정도가 추가로 더 합격했습니다. 어쨌거나 소모품인 이레이저로 쓰기가 아까울 정도의 굉장한 잠재력을 가진 아이입니다.

-내가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당연히 소환사 쪽으로 키울 예정이겠지?

-그야 물론입니다. 이 아이는 글릭데르 님께서 맡아주실 겁니다.

-그 노인네는 미쳐간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괜찮겠나.

-다른 분들께선 현재 격전지마다 투입 중이라 현재로선 그분이 가장 적격자입니다.

-이놈도 정말 불쌍한 녀석이군. 하필이면 그런 정신병자를 스승으로 만나게 되다니.

남자들이 가물가물하게 감겨오는 내 한쪽 눈꺼풀을 뒤집어 까며 불빛을 들이댔다. 눈이 아프고 괴로웠지만 이제는 발버둥 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팔뚝으로 연결된 호스를 통해서 차가운 액체가 대량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아침마다 머리에 맞는 주사와 똑같은 내용물인 듯했다.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앞으로는 네 이름과 함께 꼭 필요한 것들만 기억하도록 하렴.

지금은 내가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안 날 지경이었다.

내가…… 누구였더라.

나의 스승으로 배정된 글릭데르라는 남자는 마법과 소환에 관한 지식은 상당히 풍부했지만 온종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사람들 틈에선 ‘미치광이 글릭데르’라고 암암리에 불리고 있었다. 원래는 교단 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는 뛰어난 대마도사였다는데 어떤 사고로 머리를 심하게 다치고 난 뒤부터 성격이 괴팍해졌다고 한다.

그는 마법사의 상징인 지팡이 대신 언제나 피 묻은 톱을 들고 다녔다. 톱은 주변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경을 거스를 시에 상대방을 썰어버리겠다며 있는 대로 휘둘러대는 용도였다.

맨 처음, 글릭데르는 마법사 입문의 가장 기초 과정인 사고제어Thought control 마법사가 되기 위해 가장 기초적으로 수행하는 정신 훈련. 의식의 흐름을 아무 감정적 동요 없이 제3자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대로 지켜보는 훈련이다를 가르친답시고 날 일주일 동안이나 재우지 않았다. 그것도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선 채, 머리 위에 펄펄 끓는 기름 단지를 얹어놓고서 내가 잠시라도 졸거나 하면 기름이 곧장 내게로 쏟아지게끔 만들었다. 그 때문에 몇 번이고 심한 화상을 입었지만, 치료는커녕 갈수록 기름의 온도를 높여가며 날 두려움에 벌벌 떨게 했다.

그 남자의 밑에서 좀처럼 견디기가 어려운 갖가지 일들을 겪어가며 마법과 소환의 초석을 다지는 동안, 나는 점점 미쳐가는 것 같았다. 내 스승은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몹시 싫어했기에 내가 어쩌다가 실수로 질문 같은 걸 하면 그 즉시 불같이 화를 내며 나를 죽이려 들기 일쑤였다.

온종일 고된 훈련을 마치고 나면 감시관들이 나를 예의 그 좁은 방에 가두고서 밖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문이 쾅 닫히면 이 방에 나보다 앞서 갇혀 있던 원래 주인이 철문을 손톱으로 마구 긁어댄 자국이 눈앞으로 떨어졌다.

나도 저렇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람과 대화를 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이따금씩 벽을 보고서 혼잣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훈련장에서 가끔 마주치는 다른 임시 마법사 생도들도 나처럼 고아 출신에 주기적으로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주사를 맞기 때문에 다들 극도로 말수가 없고 어딘가 우울한 표정이었다.

오늘도 내 앞 시간에 콜로세움 연습장에서 소환술 연습을 끝마친 붉은 머리의 아이가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교단에서는 우리가 더 멍청하고 온순해지길 바라는 것 같았다.

좌우지간 그 주사 때문에 나는 과거의 무언가를 열심히 기억하려고 들어도 마법이나 소환의 지식 외에는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빈민가 시절 주변 아이들과 함께 따라 부르던 노래 하나가 문득 내 입을 통해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노래 전체를 전부 다 완벽하게 기억해내진 못했지만, 구슬픈 멜로디가 입에 익어서인지 그 가사에 섞여 있던 어떤 사람의 이름만은 아주 확실하게 생각이 났다. 어찌 생각해보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불러본 타인의 이름일 것이다.

천봉대원수 파오.

무서운 남자. 그리고 내가 싸워야 할 적.

내가 나중에 전쟁터에 나가면 언젠가는 그 무시무시한 남자와도 직접 만나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나는 엉덩이로 싸늘한 한기가 올라오는 시멘트 바닥 위에서 눕지도 못하는 자세로 몸을 웅크렸다.

가로막힌 벽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스르륵 두 눈이 감겨온다. 외롭고 슬픈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니 실로 다행이라고, 또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루에 세 번 딱딱하게 굳은 빵만이 식사로 제공됐지만 빵을 뜯어 먹는 순간이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다.

그렇게 눈을 감고서 항상 아름다운 것들을 상상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 하늘의 빛깔을 고스란히 머금은 깨끗한 호숫가, 싱그러운 녹음이 끝없이 펼쳐지는 언덕…….

나는 그 위에 편하게 드러누워 풀냄새가 나는 향긋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이내 달콤한 잠 속으로 푹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바닥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중이었다. 별안간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내 머릿속에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자다가 화들짝 놀랐지만, 내 머릿속의 목소리는 자신을 나의 ‘상위 자아’라고 말하며 일종의 수호천사Guardian angel, 혹은 영적 안내자Spiritual guide라고도 부른다. 오컬트에서는 모든 개개인이 태어날 적부터, 자신을 보호하거나 예술적인 영감을 주고 나아가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다. 마법사는 이 영적인 존재와 내면적인 접촉을 통해 차차 자신이 원하는 것, 알고 싶은 것, 미래에 대한 것 등 여러 가지 정보를 습득하게 된다. 물론 이 현상을 단순한 정신분열증의 하나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같은 거라고 나를 안심시키려 들었다.

처음엔 내가 정말 미쳐버린 게 아닐까 의심됐지만, 머릿속의 목소리가 나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기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사실 그것을 떨쳐버리기엔 이미 혼자라는 외로움에 너무 지쳐 있던 상황이었다.

목소리는 내가 잠들어서 꿈의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에만 나에게 나타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일들을 미리 예언해주기도 했다. 내일은 교단의 어느 고위 관계자가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올 거라는 말이나, 며칠 전 훈련장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갔던 어떤 사람이 조만간 큰일을 당할 거라는 등, 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내 수호천사가 미리 말해주는 것은 주로 불길한 일들에 대한 예언이었다. 룸버린과 로고스의 연합 본거지인 티페레트 요새에서 내려온 교단의 고위 관계자는 우리에게 어떤 실험에 동원될 인재를 찾고 있다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남자는 자신의 수염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일렬로 늘어선 마법사 생도들을 하나하나 쭉 훑어보며 지나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가 갑자기 내 앞에서 딱 멈춰 섰다.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긴장감 때문에 고개가 푹 숙여졌다. 날 잠시 쳐다보던 남자가 내 옆에 서 있던 다른 녀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이 녀석을 고르도록 하겠네.”

슬며시 고개를 돌려서 옆을 훔쳐봤다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내 옆에 서 있던 녀석은 불과 얼마 전, 콜로세움 연습장에서 바로 내 앞 시간에 소환 연습을 끝마쳤던 그 붉은 머리 소년이었다. 내, 내 수호천사가 나한테 뭐라고 얘기했더라.

나와 우연히 스쳐 지나갔던 어떤 사람이 조만간 큰일을 당할 거라고.

콧수염의 남자는 차갑게 웃으며 감시자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점심식사로 배급받은 빵 한 덩어리를 아껴가며 뜯어먹는 중이었다. 먹는 도중 퍽퍽한 식감에 목이 멨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맛있었다. 이 세상에 빵보다 맛있는 게 또 어디 있을까만두?. 나는 가급적이면 글릭데르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일부러 어두운 건물 뒤편에 숨어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나 혼자만의 소박한 만찬을 즐겼다.

빵을 한 삼분의 일쯤 먹었을 때, 건물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 안에서 네발 달린 무언가가 엉금엉금 걸어 나왔다. 저게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에서 헥헥거리는 빨간 혓바닥만 보였다. 눈을 전부 가리는 덥수룩한 털 때문에 더 뾰족해 보이는 주둥이에서 침이 질질 떨어졌다. 생긴 건 개를 닮았는데 개치고는 크기가 너무 크고, 몸통에 길게 자란 털들이 뭉글뭉글하게 엉켜 있는지라 무슨 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습장 부근의 마법 실험실에서 여러 동물의 종류를 섞어가며 합성 크리처를 만들고 있단 말을 내 스승에게서 들었는데 아마 그곳에서 탈출한 녀석인 듯 싶었다.

그 정체불명의 녀석이 킁킁거리며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손에 들린 빵에 코를 들이댔다. 나는 얼른 빵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아, 안 돼. 저리 가. 이건 내 빵이란 말야.”

하지만 그 녀석은 내 옆에서 계속 헥헥거리며 좀처럼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발을 붙이고 앉아 있는 덩치가 내 키보다도 더 컸다. 눈동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내 빵이었다. 차라리 내가 자리를 옮길까 하다가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에게도 소중한 점심이었지만, 이 녀석도 배가 많이 고파 보였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남은 빵을 반으로 갈라서 녀석에게 주었다. 녀석이 바닥에 내려놓은 빵을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이 싹 먹어치웠다. 남은 빵을 빼앗길까 봐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는데 뺨에 말랑거리는 감촉이 닿았다.

녀석이 나를 핥아준 것이었다. 간지럽기도 하고 기분이 묘해졌다. 옆에서 헥헥거리며 침을 흘려대는 게 이제는 뭔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빵을 입에 욱여넣고는 용기를 내어 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만져주니까 어쩐지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눈을 가리고 있는 털이 답답해 보여서 머리 위로 걷어내는 순간, 나는 커다란 충격에 손을 멈칫하고 말았다.

이 크리처에겐, 눈이란 게 아예 없었다.

왠지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만, 때마침 좀 떨어진 거리에서 글릭데르가 연신 내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또 억지를 부려 나를 괴롭힐 것이 뻔하므로 크리처를 내버려두고서 얼른 글릭데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뛰다가 뒤를 돌아보니 눈이 안 보이는 그 크리처는 여전히 어두운 건물 틈에 얌전히 앉아 빗자루 같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다른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여유가 생기는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꼭 크리처가 숨어 있는 건물 뒤편으로 가서 빵을 먹었다. 아침저녁은 방 안에서만 식사가 배급됐기 때문이다. 비록 혼자 먹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양이지만 하루 종일 내가 나눠주는 반쪽의 빵을 기다리는 크리처를 생각하니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빵을 뚝 잘라서 바닥에 놓자마자 또 순식간에 사라진다. 덩치를 생각하면 저 정도 양으로는 배가 많이 고플 텐데. 녀석은 내가 먹을 것을 줄 때마다 꼬리를 흔들며 내게 나름대로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일주일도 넘게 같이 빵을 먹다 보니 어느덧 나도 이 녀석에게 정이 들어서 점심시간이 되는 걸 누구보다 기다리게 되었다.

크리처는 내가 하는 혼잣말을 다 들어주며 마치 그에 호응하듯 꼬리를 계속 흔들어댔다. 아직 빵가루가 남아 있는 손가락을 입으로 쪽쪽 빨면서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는데 저 복슬복슬한 녀석이 자꾸만 혓바닥으로 나를 핥아대며 꼼짝도 못하게 굴었다.

“그러지 마아……. 나 이제 가봐야 한단 말야.”

마음이 약해져서 머리를 만져주니 녀석이 두 발로 서서 두툼한 두 팔을 내게 기대왔다. 털에서 냄새가 좀 나긴 했지만 놈의 몸은 따뜻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어서 나는 크리처에게 내일도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서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려 들었다.

그때 건물 틈을 막 빠져나가려던 내 앞으로 백색 가운을 입은 남자들 몇몇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손에 해머를 든 남자들을 올려다보며 나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들 중 한 명이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키더니 내 크리처를 발견했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여기에 숨어 있었나 보군! 누굴 골탕 먹이려고!”

눈이 안 보이는 크리처가 날 배웅해주려고 헥헥거리고 있었다. 도, 도망쳐……. 이 바보야. 남자들이 그런 크리처에게 달려가 손에 든 해머로 녀석의 몸을 마구 내리쳤다. 모든 것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진행되었다. 깨갱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크리처가 더는 울부짖지 않을 때까지, 남자들은 해머질을 거두지 않았다.

마치 감옥과도 같은 나의 독방에 갇혀서 뜬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웠다. 날이 밝아오자 환풍기 입구로 아침을 알리는 새하얀 여명 빛이 새어들어 왔다. 나는 다리를 쭉 펴고 일어나 위쪽으로 손을 뻗었다. 가까스로 닿게 된 햇빛을 손바닥 안에 담으며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남자들에게 울면서 사정하며 가져온 크리처의 머리뼈를 밤새 한숨도 안 자고 지팡이로 만들었다. 녀석의 혼을 내 곁에 잡아두려면 아마도 이 방법이 가장 나을 것이었다.

마땅히 그림을 그릴 도구가 없어서 벽에다가 내 손가락을 짓이겨가며 소환진을 만들어냈다. 열 손가락이 모두 피투성이가 됐지만 그런 건 관계없었다. 네크로맨시를 동반하는 소환술은 단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벽과 연결되었던 소환진에서 실제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내 상상 속의 크리처와 비슷한 얼굴이 쑤욱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게 만 하루 동안 지팡이 안에 묶어두었던 영혼을 불어넣은 다음, 여전히 심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대고 손가락으로 그림을 덧그리며 말했다.

“이제 너에게 눈을 만들어줄게.”

나에게서 두 눈을 부여받은 크리처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소환진 안에서 완전하게 다 빠져나온 크리처가 내 몸 위로 털썩 떨어져 내렸다. 너무 좁은 방이기에 크리처에게 몸이 깔린 채로 무거워서 끙끙거렸지만 그래도 녀석이 다시 돌아와서 너무나 기뻤다.

놈을 양팔 가득 끌어안고서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야 내 옆에는 이제 너you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생겼으니까.

안녕. 다시 잘 돌아왔어.

유.

쉬어가는 페이지 7 <오조>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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