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백 번째 원숭이 효과
다시 깨어난 오조는 뭉글이 옆에서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저 아이는 자신의 남은 인생이 고작 오년뿐이라는 말에도 저렇게 서럽게는 울지 않았었다. 다이치의 섬광을 맞고 내상을 입었는지 몸 곳곳에서 피가 나는 중이었기에 한시바삐 치료를 서둘러야 했지만, 섣불리 다가설 수가 없다.
뭉글이의 시체가 갑판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오조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책했다. 마치 통증 같은 울음소리였다.
“유가 죽은 건 전부 나 때문이야……. 내 피를 마시고 죽었어.”
아닌 게 아니라 피가 새어나오는 오조의 로브가 무서운 속도로 녹아들고 있었다.
어느새 몰려든 새끼 여우의 서비터들은 주인의 슬픔을 따라 축 늘어진 채로 그 주변을 배회하며 뭉글이의 죽음을 추모했다. 나 역시 이제 다시는 뭉글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나지 않았다. 오조의 푸근한 침대이자 새끼 여우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였던 뭉글이였다. 그리고 원래 이름은 ‘유’라고 했던가.
애잔한 기분에 사로잡혀 속으로 유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는데 별안간 오조가 자기 손가락을 마구 물어뜯으며 바닥에 대고 뭔가를 그렸다. 정신적인 충격 탓에 혹시 자해라도 하는 건가 했는데 여태껏 가만히 있던 손우경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오조는 손우경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고 절망하듯 울면서 고개를 저어댔다.
“무, 무리야……. 아무리 나라도…… 두 번씩이나 혼을 잡아둘 순 없는걸…….”
순간 손우경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말하려다가 현재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애써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모두 지켜보고 있던 파오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눈물만 펑펑 쏟아내고 있는 새끼 여우의 팔을 휙 붙잡았다.
“……됐으니까 그만 질질 짜고 일어나.”
와,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놈.
속으로 암만 욕해봤자 놈에겐 들리지도 않을 거였다. 파오가 오조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지만 오조는 이내 중심을 잃으며 풀썩 꼬꾸라지고 말았다. 뭉글이의 숭고한 희생으로 인해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현재 몸 상태가 그리 좋을 리 없었다. 아직 팔이 잡혀 있는 오조는 행여나 파오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잔뜩 겁내고 있었다. 새벽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더는 두고 봐줄 수가 없었다.
내가 막 끼어들려던 차에 파오가 오조의 팔을 놓아주고는 제 등을 보이며 앉았다.
“못 걷겠으면 업혀.”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새끼 여우는 경직된 표정으로 파오의 넓은 등을 바라봤다. 나도 내 귀에 들린 말을 의심하고 있는데 오조야 오죽할까 싶었다. 파오는 나와 손우경을 쓱 넘겨다보며 뭉글이의 뒷수습을 부탁한다고 말하고서 차마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오조를 억지로 자기 등에 들쳐 멨다.
얼결에 파오에게 업힌 오조가 기겁하며 내려달라고 발버둥 쳤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오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 때문에 파오의 가죽 재킷이 치칙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새끼 여우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떻게든 등에서 내려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빨리 내, 내려줘! 내 피 닿으면 진짜 큰일 나아!”
그러나 파오는 버둥대는 오조를 등에서 번쩍 들어 올려 한 번 더 고쳐 업을 뿐 물러서지 않았다.
“난 그딴 걸로 안 죽어. 내 피부는 어려서부터 독이란 독에는 다 당해봐서 네 염산 같은 피 따위는 그냥 간지러운 수준이라구.”
손우경이 낮은 음성으로 비웃는 소리를 냈다.
“……호신강기護身罡氣 내공으로 몸 주변에 강기罡氣의 방어벽을 쳐서 마치 투명한 갑옷을 입은 것처럼 적의 공격이나 암기 등을 막는 기예 중이면서 허세부리긴.”
오조는 결국 파오의 넓은 등에 업힌 채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서비터들이 개미 새끼들처럼 그 뒤를 줄서서 졸졸 따라갔다. 울어서 더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온몸의 피부가 그렇게 새빨개진 오조는 처음 봤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나눌지 내심 궁금했지만 그것 또한 내가 관여할 영역은 아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일단 뭉글이의 시체를 회수하려는데 갑자기 녀석의 몸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뭉글이의 몸 사방에 네모난 직사각형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표면은 유리처럼 투명했지만 햇살을 반사해서 공간적인 이질감이 느껴졌다.
소환수를 감싸 올린 직사각형의 투명 상자는 차츰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내 그것은 손우경의 손바닥 위로 올라갔다. 손우경은 축소된 상자를 주머니에 넣고는 그걸 아연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나를 책망하는 시선으로 노려봤다.
설마 아까의 일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싶어서 눈길을 피하지 않고 같이 마주 봤다. 사과해야 될 것 같기도 하고 또 고맙다는 인사도 해야 될 것 같았지만, 어쩐지 내 행동이 거기까지 미치지가 않는다. 이상하다. 다른 사람에겐 그깟 사과나 감사 인사쯤이야 쉬운 일인데 손우경에 한해선 유독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다는 게.
그렇다고 너를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걸까.
손우경은 또 삐딱해진 눈빛으로 나를 긁어내렸다. 할 말이 있으면 차라리 말로 하든가, 상대하기가 버거워져 몸을 돌려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팔목이 당겨지고 말았다.
“나한테 사과해.”
“무슨 사과.”
“정말 미안한 게 하나도 없어?”
“…….”
목숨을 구해준 은인한테 왜 오조 말고 날 구했냐고 소리를 질렀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내가 녀석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건 이미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다. 말을 뱉고 난 뒤 뺨까지 얻어맞고 나서야 이번에도 또 실수했다는 걸 알았지만, 그걸 순순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붙잡힌 팔목이 너무 아팠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사과의 뜻을 내비치지 않으면 손우경은 절대 이 팔을 놔주지 않을 거다. 미안해. 단지 그 한 마디면 족할 것을 나는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너한테……그런 말 하기 싫어.”
손우경이 화가 나서 무뚝뚝해진 음성으로 반문했다.
“왜 그런지 알아?”
“…….”
“네가 나 좋아해서 그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고개를 돌렸다가 같은 타이밍에 끌어당겨진 팔 때문에 금세 몸이 껴안기고 말았다. 손우경은 얼굴이 타들어갈 정도로 부글부글하게 끓는 눈동자로 나를 힘껏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바닷물에 처박아버리고 싶다, 진짜.”
여기선 대답을 안 하는 편이 내가 조금이라도 오래 살 수 있는 지름길인 듯해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놈이 내 턱을 꽉 그러쥐고 매섭게 윽박질러댔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나불대면 정말 너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
“오조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 어떤 놈이든지 내 허락 없이 너한테는 손가락 하나 못 대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아무 말도 안 꺼낼 수가 없었다. 눈을 보며 말할 염치가 없어서 시선을 내리깐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 내가 심했어.”
“뭐가 미안한데.”
완전 돌아버리겠네. 손우경에게서는 굳이 내 입으로 뭘 잘못했는지 실토하게 하겠다는 강경한 의지가 엿보였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게 미안하단 사람 태도야?”
“너 오늘따라 진짜 왜 그래? 그래, 내가 다 미안해. 너한테 미안한 짓 한 거 알겠으니까 이거 좀 놓고 말하자.”
붙잡힌 턱을 뿌리치려 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손우경은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혼내듯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잘했어, 잘못했어?”
그런 말투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리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잘못했어.”
손우경이 그제야 씩 웃으며 내 턱을 놓아주었다.
“그래, 착하다.”
아무리 시공간이 멎은 방 안에서 오년간의 옥살이를 했다지만, 따지고 보면 나보다 한 살이나 연하인 손우경에게서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다. 놈이 상황마다 날 살살 구슬려가며 자기 입맛대로 길들이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사방에 온통 덫이 쳐진 기분이라 함부로 도망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내게서 기어이 사과까지 받아낸 손우경은 저조했던 기분이 다시 정상 궤도에 들어섰는지 입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을 걸었다. 왠지 짜증이 나서 녀석을 한 번 퉁명스럽게 쏘아봐주고 다친 오조에게 가보려고 하는데, 마하데바 호의 선장이 팔짱을 낀 채로 내 앞을 척 막아섰다. 그의 등 뒤로 무수하게 깔려 있는 선원들의 굳은 표정을 살펴보니 어째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한참 노발대발하던 선장이 화를 내다가 지쳤는지 잠시 물 한 잔을 벌컥 들이켜고는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선장실에 마련되어 있던 푹신한 물소 가죽 소파가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손우경은 선장과 그 무리들이 나타나자마자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그럼 힘내, 한마디 말만 남기고는 어딘가로 튀었다. 아까 어떤 놈이든지 자기 허락 없이 나한테는 손가락 하나 못 댄다고 지껄였던 놈이랑 분명히 같은 녀석이었다. 이 입만 번지르르한 인간 같으니.
선장이 내 앞에서 침까지 튀겨대며 하나하나 되짚어주지 않아도 이미 내 육안으로 직접 산출해본 배의 피해 정도는 막심했다. 그것도 우연히 만난 폭풍우 때문이 아니라 손우경이 기문파공으로 쓸데없이 이런저런 재주들을 부리다가 파생된 피해였다.
돛들이 갈가리 다 찢어진데다 앞 돛대의 기둥은 약 사분의 삼 가량 날아가버렸다. 뱃머리에 나무로 정교하게 조각해놓았던 시바 신의 선수상 또한 불경스럽게도 아예 박살 나버렸고, 그 외에도 선박 곳곳이 부서지거나 무너져 내려 못 쓰게 된 곳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기문파공으로 인해 급격히 조성된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엔진을 풀가동시키는 바람에 동력원이 망가져버린 게 가장 큰일이었다.
오늘 불시에 받은 습격이, 해적 나부랭이들이 마하데바 호의 화물칸을 노리고서 접근한 게 아니라 명명백백히 우리를 노린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말로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선장은 아부-게르다 특유의 억양까지 섞어가며 거친 욕설을 내뱉다가 내 눈앞으로 한 뭉텅이의 종이를 홱 내던졌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아, 그래. 배 타기 직전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
종이 첫 장에 적혀 있는 건 손해 배상 청구서였고, 다음 장부터는 무슨 갑과 을의 계약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게 적혀 있었는데…….
나는 계약서에 적힌 내용에 자체적으로 침침해지려는 눈을 부릅뜨며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갔다. 이거 설마하니 지난번에 손우경이랑 파오가 한 번씩 읽어보고는 어처구니 없어하던 그거랑 같은 내용인가.
거래 계약서
제1조. 갑 _____ 과 을 _____ 은 상호 합의하에 다음과 같은 계약을 맺는다.
제2조. 을은 이 계약서에 서명함과 동시에 이후로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잃는다.
제3조. 을의 재산과 토지 소유권은 갑에게 귀속된다.
제4조. 갑은 을을 갑에게 필요한 어떤 용도로 사용하거나 타인에게 대여할 수 있다.
제5조. 을은 갑이 원할 경우 성적인 요구에도 응해야 한다.
제6조. 을은 갑에게 업무에 따른 보상 및 금전적 대가를 요구할 수 없다.
제7조. 을은 타인에게 옮을 염려가 있는 전염병이나 심각한 신체적 부상을 입은 경우를 제외하고 휴무를 요청할 수 없다.
제8조. 을은 갑의 허락 없이는 임신하거나 아이를 가질 수 없다.
제9조. 특수한 상황으로 아이가 태어났을 경우, 그 아이 또한 갑에게 귀속된다.
제10조. 계약서 이전에 을에게 아이나 배우자가 있을 경우에도 역시 갑이 모든 권리를 갖는다.
제11조. 을이 범죄 행위에 가담하거나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할 경우, 갑은 을의 행위에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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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조. 을이 계약서상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하여 담보로 양쪽 손목을 건다. 갑은 언제든지 을의 손목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때 파오가 손목이 어쩌고를 얘기하던 게 바로 이 부분이었구나. 놈들이 왜 서로를 노예로 소개하며 나 말고 쟤나 데려가라고 옥신각신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아직도 많이 남은 뒷부분은 더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건 거래 계약서가 아니라 그냥 노예 계약서였다.
선장은 기름진 눈동자로 내 얼굴을 훑으며 그윽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손해 배상 청구서에 서명하든가, 아님 자네가 그 계약서에 이름을 적기만 하면 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덮어두도록 하겠네. 내가 쭉 지켜봤는데 자네처럼 살결이 희고 아름다운 동양인이라면 꽤 비싼 가격에 팔릴 테니까. 환영제야단 출신의 엘리트 미청년이라면 아마 아부 게르다에선 부르는 게 값일 걸세. 만약 배 수리비를 충당할 만한 가격에 팔리지 않는다면 뭐 내 밑으로 거둬줄 수도 있고.”
선장의 끈적끈적한 시선에 소름이 끼쳤다. 일전에 선장의 발밑에서 틈틈이 물담배나 갈아주며 온종일 발판 역할을 하던 꼬마가 생각났다. 어린 나이에 대체 저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는데 계약서를 읽고 났더니 머릿속에 대략적인 상황들이 그려졌다. 아마도 그 아이의 부모가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이 노예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서,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식의 인생까지도 불행 속으로 끌어들였으리라.
나는 제복 안에서 펜 한 자루를 꺼내 종이 서류 맨 위에 놓인 손해 배상 청구서의 빈칸을 빼곡하게 채워 넣고 마지막으로 내 자필 사인을 했다. 선장에게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건네며 내가 말했다.
“관음존자님 앞으로 청구하십시오.”
배상 액수에 0이 몇 개가 붙었는지 차마 세어보지도 못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선장이 입맛을 쩝 다시며 종이를 받아들자 내가 덧붙였다.
“그리고 방금 그 얘기는 다른 사람들에겐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특히 나라카에서 고라토의 목을 가져왔던 그 손우경 씨 앞에서는요.”
그럼 당신 목숨을 보장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서쪽에 도착할 때까지 무의미한 살인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윤기가 반질반질한 가죽 소파에서 일어나 선장실에서 나가려다가 어느새 내 뒤에 서 있던 녀석 때문에 그만 심장이 멎어드는 줄 알았다.
손우경이 날 보며 상냥하게 미소 짓더니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다.
“어쩌지. 방금 다 들었는데.”
내가 다급하게 녀석을 말렸다.
“우경아, 잠깐만 기다…….”
손우경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선장을 바라봤다. 그때 방 안의 공간이 기이하게 어그러지며 수십 개의 층들로 나뉘기 시작했다. 내가 고개를 다시 돌렸을 때, 이미 선장의 몸통은 슬라이스처럼 얇게 저며진 채 무참하게 썰려 있었다.
나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진정 난감하기만 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 바다 한복판에서 아직 목적지엔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방금 이 배의 총책임자를 죽여버렸다.
가급적이면 손우경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종일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는 건 내 탓만이 아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대체! 넌 참을성도 없어? 아무리 그래도 선장을 죽여버리면 어쩌자는 건데?”
손우경이 무책임하게 대꾸했다.
“그게 뭐. 우린 어차피 배에 탔는데 선장이 무슨 상관이야.”
“……됐다. 너하곤 말을 말아야지.”
“너야말로 저 새끼가 네 면전에 대고 그딴 더러운 말이나 지껄이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둬?”
“무슨 말을 지껄이든 무시하면 그만이야. 게다가 남한테서 짜증 나는 말을 들었다고 그때마다 너처럼 사람을 죽이거나 하진 않아.”
손우경이 애써 화를 억누르려는 나를 관찰하듯 지켜보다가 도무지 이해 안 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아.”
“…….”
“나한테는 이렇게 화만 잘 내면서 넌 정작 진짜로 화내야 할 순간이 언젠지는 아예 구분도 못해?”
솔직히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고, 나에 대한 손우경의 마음까지 잘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앞뒤 분간도 못하면서 충동적으로 살인이나 하는 녀석에게서만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종일 여러 가지 일을 겪은 터라 탈진할 것 같아서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몸을 숙인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이 모든 현실을 외면하고 있으려니, 손우경이 옆자리에 앉아 내 손목을 잡아떼고는 자신 쪽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좀 그냥 내버려둬. 너 아니더라도 지금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니까.”
“현아, 내 말 들어봐.”
“무슨 말을 들어. 네가 방금 생각 없이 저지른 일 때문에 지금 내 머리가 아픈 건데.”
“여유를 갖고서 다시 생각해봐. 머리가 서쪽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서 넌 주변 상황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어.”
나한테 또 뭔 얘기를 하려고.
손우경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놈이 생긋 웃으며 여러 개의 화살이 복잡하게 박혀 있던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선장을 죽였다고 서쪽으로 어찌 갈지 고민하는 것보다 네가 먼저 고심해봐야 할 문제는 아돌프 자식의 수하들이 왜 우릴 공격했을까가 아냐?”
“…….”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래, 오늘 척살부 대원들이 나타나 나와 파오에게 배신자 어쩌고 운운하며 공격해왔다. 척살부의 행동은 관음존자의 지시 그 자체였다.
관음존자가 왜 나를…….
손우경은 점점 혼란 속에 빠져가는 나를 보며 그런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넌 버림받은 거나 마찬가진데 굳이 서쪽에 가서 귀찮은 짓을 벌여야 돼?”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야. 그분은 절대 나를 버리시거나…….”
여태껏 웃고 있던 손우경의 얼굴에서 싹 웃음기가 걷혔다.
“……‘그분’이라, 거참, 계속 들어주기가 그러네.”
손우경의 차가워진 말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심어져 있던 불안의 씨앗이 싹을 틔워 내 심장을 가시넝쿨처럼 아프게 파고들었다. 마음이 급속도로 초조하고 불안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손우경이 내 뺨에 양손을 대며 나를 진정시키려고 들었다.
“너를 개에 빗대서 표현하고 싶진 않지만.”
“…….”
“넌 지금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된 상태야. 조건 반사라고. 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녀석이 어떤 말로 위로를 하든 너무 무서웠다. 혹시나 관음존자가 나를 배신자로 여기고 우릴 처단하기 위해 척살부 대원들을 보낸 것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내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걸 관음존자에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내 안에서 질식할 만큼 거대해진 두려움은 나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종용했다. 나는 이미 두려움의 노예였다. 이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짓을 저질러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벌벌 떨며 패닉 상태에 빠져 있을 줄은 몰랐다. 어느새 손우경은 나를 껴안고서 등을 가만가만 두드리며 달래고 있는 중이었다. 놈의 옷자락을 절박하게 쥐고 있던 손에서 흥건한 땀이 배어나왔다.
손우경의 품은 따뜻했지만 안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러다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이 울타리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손우경의 등을 껴안았더니 놈이 또 멈칫거리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보다 갈 길이 더 머네.”
만일 우경이가 죽으면 어떡하지. 우경이는 5년 전에도 관음존자에게 져서 수용소에 갇혔었는데…….
이번엔 감옥에 가두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손우경의 웃옷 자락을 덥석 쥐고서 때 아닌 성화를 부렸다.
“우, 우경아. 서쪽, 우리 빨리 서쪽에 가자.”
녀석이 나를 가엾다는 눈초리로 내려다봤다. 그 눈빛은 강한 연민이 뒤섞인 착잡함이었다.
“내가 널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
손우경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을 매만지던 손이 땀에 젖어가던 이마를 쓸어 넘겨주다가 다시 뺨으로 내려와서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도대체 뭐가 그리 무서운데.”
그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네가 내 왼손에 있던 관음존자와의 연결점을 끊은 다음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너의 죽음에 관한 무서운 꿈들을 꾸고 있다고는. 내 꿈속에서 재생되는 불운했던 과거의 편린들과 네가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되는 예지적인 악몽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를 거닐고 있다. 그것이 나의 불안함이 만들어낸 환영인지 혹은 관음존자의 고약한 소행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끝내는 현실이 될까 봐서 나는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웠다.
손우경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는 입술에도 지그시 도장을 찍었다. 놈이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마치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설마 너 하나쯤 못 지켜줄 거 같아서 그래? 내가 그렇게나 못 미더워?”
네가 못 미더운 게 아니라…….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얘기들이 혀끝을 맴돌았다. 녀석은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은 나에게 그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태연자약하게 웃어 보였다.
“뭐가 됐든지 난 네가 이런 식으로 무서워하거나 아까처럼 화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
“예전에 내가 거의 억지 부리다시피 해서 너랑 첫 관계를 맺을 때에도 더 반항하거나 싫어할 줄 알았는데, 네가 반쯤은 체념하는 눈빛이라 하면서도 상당히 찝찝했거든. 물론 네가 반항할수록 난 더 불타올랐겠지만.”
그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던 건 자기도 인정하나 보다.
“지금은 그나마 좀 나아졌지만, 초창기에 네 표정은 정말 감정이 아예 결여된 사람처럼 보였거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한테 엉덩이 대주던 놈들치고 첫 관계에서 울음을 안 터트린 녀석은 찾아보기가 힘든데…….”
녀석의 입에서 옛날에 같이 잤던 남자들 얘기가 나오는 걸 그냥 듣고 있기가 거북했다. 어쩐지 가슴속에서 화가 치미는 것도 같고. 하지만 나는 그 거북한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하진 않았다. 손우경은 그런 내 얼굴을 탐색하듯 세세하게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넌 첫날은 고사하고 그동안 내 앞에선 단 한 번도 울지를 않더라.”
“…….”
“울면 좀 어때서.”
녀석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런 이상한 얘기들을 늘어놓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주 어릴 적에 매일같이 돌아오는 수행 시간마다 내 스승인 석가여래는 나에게 그런 말들을 해줬어. 수행자는 감정 같은 하찮은 것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고, 감정은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상想일 뿐이라고, 그리고 깨달음의 경지는 그 상이 완전하게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손우경이 자신은 전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살을 덧붙여나갔다.
“그딴 걸 내 입으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넌 십년도 넘는 세월을 관음존자 밑에서 그 녀석의 사상이나 주술 방식을 고스란히 보고 배웠을 테니까. 아돌프가 너를 어떤 식으로 가르쳤을지는 대강 짐작이 가.”
손우경이 석가여래를 제 스승으로 칭하듯, 서로 사제 관계의 호칭으로만 부르지 않았을 뿐이지 따져보면 관음존자는 나를 가르친 유일무이한 스승이었다. 그 때문에 관음존자와 도반 관계였던 손우경이 나를 가끔 어린애 대하듯 하는 것도 전혀 납득이 안 가는 일은 아니었다.
녀석이 말했다.
“놈은 분명 감정적인 것들은 전부 배제하라고 말했겠지. 타인에게 감정을 드러내거나 그런 것에 연연하는 일은 수행에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마음 따위 버리라고. 그렇지만 그건 석가여래의 깨달음을 흉내 내기에 급급한 반쪽짜리 가르침에 불과해. 게다가 너는 깨달음을 얻어 해탈했기에 감정이 무뎌진 게 아니라 힘껏 억누르고 있을 뿐이잖아.”
일전에 관음존자가 나에게 삼장의 경전 내용들을 달달 외우고 있어도 거기에 있는 구절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며 핀잔을 주던 것이 생각난다. 말 그대로 구색 맞추기였다.
“깨달음? 해탈의 경지? 그런 거 몰라도 상관없어. 쓸데없는 것을 좇느라고 시간 낭비할 바엔 잠이라도 한숨 더 자는 게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이 된다구. 아돌프가 무엇을 가르쳤든 간에, 또 네가 현재 느끼는 게 어떤 것이든 내 앞에선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해도 돼.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웃고 싶으면 웃고. 그거야말로 사람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요소니까.”
내가 언제부터 손우경에게 조금씩 감정을 표현하게 됐더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놈의 페이스에 휘말려가면서 손우경이 원하는 대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는 내 마음속 심연에 내려진 닻을 다시 끌어 올릴 자신이 없었다. 그 닻이 내려졌던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폭풍우가 몰아쳤을 즈음이었다. 한번 바닥에 박혀버린 닻은 설령 나를 어정쩡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영원히 표류하게 만들지라도 다시는 생사가 불분명한 미지의 영역으로는 데려가지 않을 거였다.
“이젠 네가 나한테 화도 내기 시작했으니까 다음번에는 좀 펑펑 울려볼 작정이야.”
그런 것까지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짜는 놈을 애당초 나처럼 얼빠진 녀석이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섹스로는 아무리 해도 울리기가 힘든데 내가 어디까지 못되게 굴면 좀 울어볼래?”
끝까지 못되게 굴지도 못할 거면서.
손우경은 다시금 무감해진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김 빠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난 네가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정말 싫은데. 꼭 인형…….”
뒷말을 삼키며 손우경이 정정했다.
“그래. 넌 인형 같은 거 아냐.”
“…….”
지난번 유리 돔 안에서도 인형 어쩌고를 운운하다가 결국 서로의 감정이 폭발했던 것을 놈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이지.”
녀석이 나에게 내 인형, 이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심장 한구석이 살짝 간질간질해지기도 했지만 마치 나를 소유할 수 있는 물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손우경에게 말했다.
“알면 다시는 그런 호칭 나한테 갖다 붙이지 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서만은 장난감 취급 받고 싶지 않으니까.
놈이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옮기며 나름대로 해명을 했다.
“내가 너한테 인형이네 마네 그런 식으로 말한 건.”
“…….”
“맨 처음에 같이 잤을 때 네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하니까 왠지 위화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고.”
“…….”
“넌 모르겠지만 나하고 섹스하고 나면 네 얼굴에 요사한 색기 같은 게 흘러서 진짜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뭔가가…….”
나는 조용하게 윽박질렀다.
“……부탁이니까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줘.”
그러자 손우경이 딱 잘라서 말했다.
“아무튼 그냥 네가 예쁘다는 말이었어.”
“…….”
“나도 계집애들 같은 단어는 쓰고 싶진 않지만 네가 자꾸 예뻐 보이는 걸 어쩌라고.”
더 이상은 함부로 막말을 지껄이지 못하게끔 얼른 놈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 안쪽에서 놈이 웃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낯이 뜨거워서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손우경, 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이 얘긴 그만하자.”
귓불이 바짝 타들어가기 직전이었다.
* * *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거려봐도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 같은 건 발견되지 없었다. 뚱딴지같은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곳은 마하데바 호의 고장으로 인해 임시 정박 중인 어느 한 무인도였다.
선장을 살해하고 난 뒤 일말의 가책조차 없어 보이던 손우경은 이왕 일이 꼬인 김에 파오와 합심해서 배 안의 실권까지 장악해버리고 말았다. 저 두 무법자들의 후안무치한 행동에도 아무 힘도 없는 선원들은 눈물을 머금고 굴복할 도리밖에 없었다.
사실 선원 중에서도 거친 풍모를 지닌 용감한 바다 사나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며칠 전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갑판 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다들 어디서들 지켜보고 있었는지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행동했다.
좌우지간 사나흘가량 배 안에서 왕처럼 떠받들리며 지내던 두 놈이 먹고 놀면서 선장의 숨겨진 패물을 탐욕스럽게 약탈하는 것도 지쳤는지, 고장 난 동력원을 수리할 만한 곳을 찾겠다며 근처 섬으로 이 배를 통째로 옮겨 온 것이다. 허나 배를 옮기는 과정 또한 범상치가 않았다.
손우경은 마하데바 호의 탑승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을 진행시켰다. 녀석이 기문파공으로 결계를 이루고 있던 척살부 대원들을 골탕 먹이던 날, 화룡정점으로 그 대미를 장식했던 것은 바로 연푸른색 몸뚱이를 지닌 거대한 해룡이었다. 놈은 그때의 그 해룡을 다시금 불러내더니, 돛을 매다는 밧줄을 해룡의 몸에 묶은 뒤 배를 근처에 있는 섬까지 끌어당겨줄 것을 명령했다.
그래도 일종의 신수인 해룡이 고작 인간의 지시에 따를까 싶었는데, 잠시 후 동력이 고장 나버린 배는 물살을 좌우로 쫙 가르며 쾌속으로 바다를 질주하는 진기한 장면을 연출했다.
손우경은 해룡의 머리 위에 올라가기 전 나에게 ‘너도 같이 탈래?’ 하고 물었지만, 나는 탐탁지 않게 나를 내려다보는 큼직한 해룡의 눈동자를 보며 즉시 거절했다. 파충류처럼 동공이 긴 타원형으로 찢어진 눈동자가 나를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섬뜩했다.
이윽고 해룡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선 녀석이 잔뜩 신나는 목소리로 나아갈 방향을 지시했는데, 여태까지 내가 겪었던 뱃멀미는 애들 장난이었다. 해룡의 움직임에 따라 바다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마하데바 호의 안은 그야말로 초주검 상태에 임박했다.
그에 아부-게르다 출신의 신실한 선원들은 양손을 모으고 각자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 또한 비슈누의 꿈힌두 사상에서는 비슈누 신이 꾸는 꿈으로 이 세상이 유지된다고 믿고 있다의 일부이기를 바라며 그 꿈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속되기를 기원했다. 한 손엔 입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토사물을 받아내는 통을 들고서 말이다.
어쨌든 해룡의 도움으로 무사히 근처에 있던 섬에 도착한 우리는 손우경을 제외한 모두가 땅으로 내려서자마자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쓰러져갔다. 그나마 가장 멀쩡해 보이는 사람은 파오 정도였는데, 녀석마저도 손우경 저놈을 언젠간 꼭 죽여버리겠다는 원한 깊은 눈으로 노려봤다. 나도 해룡이 이끄는 바다 썰매는 두 번 다시 타고 싶지 않았다.
오조는 뭉글이가 죽은 이후로 한 번도 깨지 않고서 쭉 잠들어 있었다. 정신적인 충격이 클 것임을 감안해도 너무 오래도록 눈을 뜨지 않으니 저러다가 계속 일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자고 있는 오조를 배 안에서 데리고 나온 것은 파오였다. 게다가 그날 내상이 심각했던 오조를 치료해줬던 것도 파오였다. 뭐지, 대체. 평소에는 못 잡아먹어 안달하더니 정말 잡아먹기라도 한…… 됐다, 그만하자. 이런 생각은.
녀석이 무슨 속셈으로 새끼 여우에게 자꾸 친절하게 굴고 있는지 궁금했다. 24시간 내내 붙어 있는 게 아니니 그간의 사정을 전부 파악할 수야 없겠지만, 저 꽉 잠긴 의문의 방문을 여는 열쇠는 아무래도 내가 목격했던 그날 새벽에 있는 듯했다. 낌새가 살짝 이상해지기 시작했던 건 아부-게르다에서 내가 손우경과 밤을 지새우고 돌아온 후부터지만, 키스하는 장면까지 목도한 마당에 그게 언제부터였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서 파오의 등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새끼 여우의 주위에서 뭔가 텅 빈 공간감이 느껴졌다. 뭉글이가 없는 오조라니, 눈 안에서 도드라지는 빈자리가 어색하기만 했다. 어딘가에서 금방이라도 그 덩치 큰 소환수 놈이 튀어나와서 언제나처럼 오조의 옆을 굳건히 지키고 서 있을 것 같았다. 뭉글이와 크게 접점이 없던 나도 이런 적적한 기분이 드는데 새끼 여우가 감당해야 할 상실감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안 갔다.
어쨌거나 섬에다 잠시 정박시킨 배를 마하데바 호의 선원들이 수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며칠간 이 무인도에서 체류하기로 결정했다. 서서히 날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섬 전체를 올려다보니 울창하게 자라난 숲 너머로 검은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저 혼자만 컨디션이 쌩쌩하신 우리 손우경 님께서 나한테 이 섬 안에 뭐가 있는지 탐사해보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부러 코웃음 치며 가볍게 무시했다. 그런데 분명히 무시했는데 어째서 나는 또 손목을 붙잡혀서 섬 안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는 중인지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동력원의 고장이 아니더라도 그날 척살부와의 격전으로 손상된 선박 곳곳을 수리하는 중이라 작업이 완료될 때까진 마음 편하게 섬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아니, 그보단 해룡 때문에 입은 피해가 더 심각했다. 이동 중 꼬리가 스친 지점마다 선박 외곽이 움푹 파인데다 바다 위를 종횡무진하며 워낙 쏜살같이 움직인 터라 배 내부의 물건들이 떨어지고 쏟아져서 아예 남아나는 게 없었으니까……).
일단 급한 대로 배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모래사장 부근 숲 속에다가 잠잘 곳을 마련했는데 한동안 침대 생활을 하다가 맨바닥에서 자려니 몸이 영 익숙지가 않았다. 전날 섬을 둘러보기는커녕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놈이 질릴 때까지 야한 짓이나 하다가 늦은 밤이 다 되어서 돌아온지라 파오의 눈총까지 톡톡히 받아야만 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딱 하나 있었는데 새끼 여우가 섬에 정박한 지 만 이틀 만에 드디어 눈을 떴다는 점이었다. 잠에 빠져든 지도 벌써 열흘 가까이 되었으니 이번 수면이 이때까지 중 최장 기록이었다.
새끼 여우는 입맛이 없는지 그 좋아하던 야채 만두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정말로 기운이 없는 듯했다. 서쪽으로 출발하기 전에 반 삭발이던 백금발의 머리가 이제는 많이 자라서 목덜미를 뒤덮고 있는데다 살까지 빠져서 더 가늘어진 얼굴선이 누가 봐도 그냥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처럼 보였다.
내가 봐도 저리 예쁜데 여자라면 아주 환장하는 파오 자식이 안 건드리고 배길 수가 있겠나 싶었다. 파오와 손우경은 이른 아침부터 본격적인 섬 탐사에 나선지라 다행히 새끼 여우와는 마주치지 않았다. 내리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새끼 여우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볼까 했지만, 그런 걸 평소에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어야지 말이다.
한 차례의 대화도 없이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뭉글이를 잃어버린 오조는 다시 잠을 청하려 해도 쉽게 되지 않는 듯했다. 모종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파오가 배에서 내리기 전에 함께 챙겨 온 오조의 지팡이는 어째서인지 동물의 얼굴뼈가 달려 있던 부분이 반으로 쪼개져서 더는 손쓸 도리 없이 망가져버린 상태였다.
오조가 그 지팡이 끝에 달린 머리뼈를 껴안고서 또 눈물을 뚝뚝 짜내고 있던 도중이었다. 둥글게 움직이며 새끼 여우를 호위하고 있던 서비터 놈들이 난리가 났다. 서비터들의 격한 반응이 아니더라도 나도 눈이 달려 있으니 순식간에 나와 오조를 에워싸버린 저 조그마한 것들의 정체가 뭔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진흙으로 만든 인형? 아니, 인형이라기엔 살아서 움직이고 있으니 뭔가 다른 표현이 필요했다. 저 이상한 것들은 도대체 뭐지.
내 손바닥보다 살짝 더 큰 몸집이었다. 눈대중으로 이곳에 응집한 머릿수를 대강이나마 헤아려보려고 했지만 갈수록 그 숫자는 점점 더 늘어갔다. 그것들의 진흙으로 된 몸의 형체는 손으로 대충 만든 것처럼 일정하지 않고 각양각색이었다. 역시나 진흙으로 이루어진 얼굴에는 조막만 한 눈과 입이 달려 있긴 했는데 형태가 너무 단순해서 멀리서 보면 그냥 점 세 개를 쿡쿡 찍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놈들이 고 짧은 발로 땅바닥 위를 아장아장 걸어 다녀서인지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녀석을 잡아 올려서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으나 이내 손안에서 흙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더니 바닥에서 다시 원래의 형태로 합체가 되어버린다. 오조의 서비터 애들은 저 괴상한 진흙 생명체들을 잔뜩 경계하며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진흙 생명체들은 어쩐 일인지 오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새끼 여우가 두 다리를 모은 채 웅크리고 앉아서 슬퍼하고 있는 모습을 세세하게 관찰하는 듯했다. 오조는 고개를 숙이고서 우느라고 아직 저 녀석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수많은 진흙 생명체들이 모두 바닥에 앉아 눈에서 진흙을 마치 눈물방울처럼 뚝뚝 떨어트렸다. 떨어진 진흙 방울은 다리 사이에서 오조의 지팡이와 엇비슷한 형태로 변해갔다. 놈들은 오조처럼 그것을 끌어안고서 눈에서 연신 진흙을 흘려대고 있었다.
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걸 봐선 지능이 낮아 보이긴 해도 꽤 순수한 생명체인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와 함께 갑자기 모든 녀석들이 후다닥 풀숲으로 도망쳐버렸다.
결국 손우경과 파오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한 마리의 진흙 생명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근데 둘이서 무슨 사냥이라도 하고 왔는지 파오의 어깨와 손우경의 양손에는 산짐승과 날짐승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쨌든 내가 방금 본 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냥 얼떨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저 둘의 관심사는 내가 아닌 오조에게로 몽땅 쏠려 있었다. 나는 일단 진흙 생명체들에 대한 것은 잠시 보류하기로 마음먹었다.
손우경은 들고 있던 통통한 꿩 몇 마리를 바닥에 던져놓고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오조의 앞에 멈춰 섰다. 새끼 여우가 인기척을 느끼고서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손우경이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오조에게 투명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유가 죽었을 당시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공간 상자야. 땅에 묻어주든가, 아님 네가 갖든가.”
오조가 말없이 상자를 받아 들었다. 녀석은 푹 꺼져 들어간 눈매로 작게 축소된 채 이후로는 영겁의 세월 동안 계속 잠들어 있을 뭉글이를 말끄러미 바라봤다. 손우경이 이제 자기 할 도리는 다 했다는 얼굴로 돌아서려는데 그 순간 오조가 입을 열었다.
“우경아.”
“?”
“이거…… 네가 예전에 갇혀 있었다는 그 감옥하고 비슷한 원리지?”
손우경이 오조의 질문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시간과 공간의 찰나를 박제해놓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쉽게 말해 사진 같은 거야.”
오조가 멍한 눈으로 투명한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얘기했다.
“그럼 나도 이 상자 안에 들어가면 죽지 않을 수 있겠다.”
“…….”
“서쪽에 도착해서 모든 일들이 다 마무리되면…… 그땐 나를 기문파공으로 유처럼 박제해줄래?”
애처로운 부탁을 건네고 있는 오조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손우경은 한쪽 눈썹을 넌지시 들어 올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달변가인 녀석치고 그에 대한 대답은 사뭇 느리게 나온 편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래줄 순 있는데.”
“…….”
“시공간이 멈춘 방 안에서 단 하루라도 지내본다면 마음이 바뀔 거야. 그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걸.”
“…….”
“주위에 아무도 없이 오직 혼자서 그 길고 긴 시간들을 버텨낼 자신이 있다면, 너 좋을 대로 해.”
오조에게는 담담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었지만, 유경험자인 손우경의 눈동자에서는 아직 채 사그라지지 않은 강한 분노의 기운이 타오르고 있었다. 일전에 환상 고래의 꿈속에서 만월을 등지고서 내게 했던 몇몇 고백이 떠올랐다.
‘너,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느낄 수가 없다는 게 진짜 어떤 건 줄이나 아냐.’
‘다시 바깥으로 나온 다음에야 내가 그 안에 장장 오년의 세월이나 갇혀 있었단 걸 깨달았어. 근데 그게 고작 오년뿐이라니. 분명히 내가 느꼈던 세월의 무게는 그 이상이었으니까.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비참한 체념이 들 정도였는데.’
그때에도 지금과 거의 같은 요지의 말들을 했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장난치는 걸 즐겨하고 매사 자신감으로 충만한 손우경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그 안에서 몹시 힘든 시간들을 견뎌냈던 것이었다.
손우경은 그럼에도 결심이 확고하게 섰는지 자신의 눈길을 피하지 않는 오조에게 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이미 마음 굳혔으면 귀찮게 더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지금 당장이라도 널 공간 안에다가 박제해줄게.”
손우경이 오조의 팔을 붙잡았다. 정말 이 자리에서 새끼 여우를 기문파공의 주법으로 꽁꽁 묶어버릴 기세였다. 사방으로 투명한 막 같은 게 펼쳐지고 있었다. 오조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얼른 몸을 뒤로 빼내려고 들자 손우경은 그제야 피식 웃으며 새끼 여우를 겁주던 것을 그만두었다.
“거 봐, 그럴 맘도 없으면서 괜한 소리는 왜 하냐.”
오조가 새침해진 표정으로 손우경을 노려보다가 못내 서글픈 기분이 밀려들었는지 또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손우경이 얘 좀 어떻게 해보라는 얼굴로 나를 쓱 돌아봤다. 하지만 녀석이 오기 직전까지 난 말 한마디조차 못 붙여본 형편이었다.
파오는 어쩌고 있나 해서 슬쩍 돌아봤더니 멀찍이 떨어져서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망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파오가 끼어드는 것도 좀 우습긴 하지만 지금 너무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오조가 서럽게 울면서 바닥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전 같았으면 뭉글이의 등으로 피신했겠지만, 여섯 개의 다리가 사라진 터라 이제는 자신의 두 다리를 사용해야 했다. 나와 손우경이 자연스레 파오를 힐끔거리자 놈이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니네 왜 동시에 날 쳐다보는데.”
그 말에 손우경이 히죽거리며 맞받아쳤다.
“아니, 그냥 따라갈 건가 해서.”
“네가 울려놓고서 어째서 내가 그 뒷수습을 해야 되지?”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잃었던 점수를 한 번에 만회할 좋은 기회잖아?”
지난번에 배 위에서 파오가 다친 오조를 들쳐 업고 내려간 걸 손우경도 다 봤는지라 저렇게 틈만 나면 둘을 엮어서 파오를 골리려고 들었다. 그거야 손우경 본인도 파오에게 나랑 같이 있을 때마다 성적 취향이 어쩌고저쩌고 당한 것이 꽤 있으니 당연한 처사이긴 한데, 어지간한 일에는 그저 픽 웃어넘기는 파오가 오직 새끼 여우와 연관된 일에서만큼은 대놓고 짜증 내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네가 지난 새벽에 저지른 일을 다 알고 있다. 세상에 인간이 어찌 저리 뻔뻔할 수가 있단 말인가. 과거의 일들을 반추해봤을 때 놈은 나를 비롯하여 순진한 어린애들을 대상으로 크나큰 상처나 주는 몹쓸 불한당이었다.
내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놈을 맹렬하게 쏘아봤으나 파오의 낯짝은 철판 두께 수준이었다. 녀석은 손우경과 섬을 탐사하면서 잡아왔는지 아까부터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멧돼지 한 마리를 바닥에 툭 내려놓고는 느닷없이 그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놈은 뒷주머니에서 꺼내 든 작은 단도로 이미 죽은 멧돼지의 가죽을 쓱쓱 벗겨내며 솜씨 좋게 살을 발라내고 있었다. 멧돼지를 차근차근 다듬어나가는 손길도 수준급이긴 했지만, 마치 부처와 같은 인자한 표정으로 구슬땀까지 흘려가며 때 이른 저녁 준비를 하는 파오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이 지금 무리하고 있구나…….
파오는 환상적인 손놀림으로 멧돼지의 뼈와 살을 분리해놓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우경이 잡아 온 꿩들의 깃털까지 뽑아대며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점점 늘려가고 있었다. 누차 얘기하지만 아직은 저녁 먹을 시간도 아니었다. 점심을 먹은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정수리 위로 해가 쨍쨍했다. 그런데도 파오는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와 바닥에 가지런히 얹어놓고는 손바닥 사이로 나뭇가지 하나를 미친 듯이 비벼가며 힘들게 불을 지피려고 들었다.
허, 저런 돌은 새끼를 봤나. 손우경도 그 꼴을 지켜보다가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을 만들어내며 진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냥 술법으로 불 피우면 되잖아…….
파오가 남의 얘기는 들은 척도 않고 비효율적인 수동 작업을 되풀이하던 끝에, 마침내 연신 마찰시키던 나뭇가지 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녀석이 마침내 해냈다는 얼굴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굵은 팔뚝으로 쓰윽 문지르며 성취감이 느껴지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휴, 야생의 수렵 생활이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군!”
이미 자신이 부여한 딴 세상에 푹 빠져든 파오를 내버려두고 손우경이 내게 눈짓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손우경과 함께 오조가 사라져간 방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손우경이 가다 말고 뒤쪽으로 후 하고 입바람 소리를 내자 놀랍게도 잠시나마 무서운 광풍이 불어닥쳤다. 내 등 뒤에서 어느 집 미친놈인 줄은 모르겠으나 ‘아, 안 돼! 내가 애써 힘들게 키운 불씨가!’라며 누군가의 절망 어린 탄성이 들려왔다.
숲 속으로 새끼 여우를 찾으러 가면서 나는 아까 본 그 진흙 생명체들에 대한 것을 손우경에게도 알려주었다. 하지만 손우경은 내 얘기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였다. 뭐 이런 외딴섬에 그런 희한한 게 살고 있을 수도 있지, 라며 미온적인 반응이었다.
반응이 워낙에 신통찮은 관계로 나도 금방 대화의 흥미를 잃고 오조의 행방을 살펴보고 있는데, 앞서 가고 있던 손우경은 뭔가 딴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근래 들어 녀석은 나에게 좀 무심해진 것 같았다. 혹은 내가 놈에게 말려들어가고 있다고 해야 되나. 어쩌면 지난번 선장실에서 하도 한심한 꼴을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놈의 관심이 예전만은 못해진 느낌이다. 내게 슬슬 질려가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손이 언제나처럼 고집스러웠다.
대체 왜 나에 대한 손우경의 마음이 식었을까 봐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어야 하는지가 언짢기만 했다. 이런 유치한 연애 놀음에 신경이나 쓰고 있을 땐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숲으로 이동하는 내내 한 번도 내 쪽을 봐주지 않는 손우경에게 야속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 아부-게르다에서부터 나는 내 중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신에게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하고 타인의 생각이나 기분 따위를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나의 주체성이 손우경에게로 전이되어버린 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온종일 눈으로 손우경을 좇고 있다. 녀석의 별 의미 없는 말이나 행동에도 혼자 의미를 부여해서 확대 해석하기 일쑤였다. 어느새 놈의 작은 습관 따위가 눈에 익어서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파악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녀석과 어떤 상황에 처할 때마다 손우경이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 건지도 저절로 예측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손우경에게 어떤 식으로 굴었는지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예전의 나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손우경이랑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놈이 나에게 끈질기게 치근덕거리는 걸 귀찮다는 듯이 대했던 걸까. 전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내 이런 감정을 절대로 손우경에게만은 들키기가 싫었다. 더 관심 없는 듯이 행동해서 저쪽에서 안달 내며 먼저 다가오게 만들고 싶은데, 그러기가 쉽지 않아서 속으로 조바심이 났다. 아무리 해도 손우경처럼 유연하게 행동하기는 힘들었다.
그때였다.
인적이 닿지 않았던 숲 속이라 험한 길을 앞장서서 헤쳐 나가던 손우경이 움직임을 뚝 멈추고는 조용히 나를 불렀다.
“현아.”
“…….”
“앞을 좀 봐봐.”
녀석의 지시에 따라 내 시야의 대부분 가리고 있던 손우경 너머로 고개를 쭉 내밀자, 하늘을 향해 높게 치솟아 있는 어느 아름드리 고목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우둘투둘한 껍질로 둘러싸인 굵은 기둥 위로 싱그러운 녹색 이파리가 풍성하게 돋아난 가지가 전체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어 척 보기에도 아름답고 신묘한 기운을 자아내는 나무였다.
그리고 굽이치듯 구불거리며 땅 위로 불룩 튀어나온 나무뿌리들 사이로는 울다 지쳐 어느새 잠이 든 듯한 새끼 여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오조의 두 허벅지 위에는 평소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무척이나 꺼려하는 그리모어가 얹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또 뭔가를 쓰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틈만 나면 남의 일기장―오조의 주장에 의하면 위대한 마도서―을 훔쳐보려고 드는 손우경이 그 근처로 다가가 대뜸 그리모어부터 집어 올린다. 놈이 그리모어를 뒤적이며 가장 마지막으로 글씨가 갱신된 페이지를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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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의 페어리 더스트 만들기)
오조가 그리모어에 적는 것들은 보통 에녹어(천사들의 문자)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암호를 섞어 쓰는 터라 죄송한 말씀이지만 신서유기 한국어판에서는 원문 그대로의 번역을 싣지 못했습니다. 대신 우경이는 그 암호와 문자 체계를 그럭저럭 알아볼 수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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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은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므로 녀석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갖가지 색상의 글리터와 자잘한 보석을 담은 투명한 유리병을 미리 준비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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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를 지나가던 요정들 중에서 할 일 없는 녀석이 걸려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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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리 더스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요정의 몸에서 나오는 분비액이 필요한데 요정의 눈물은 희귀한 아이템이므로 아쉬운 대로 며칠 안 씻은 요정들에게서 비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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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들은 상당히 민감하므로 비듬을 얻어낼 때 조금이라도 더럽다는 기색을 보이면 절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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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의 몸에서 얻어낸 물건을 아까 준비했던 투명 유리병 속 글리터와 잘 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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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수 두어 방울을 떨어뜨리고 마지막으로 달콤한 캔디향이 나는 향료를 함께 넣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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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0일가량 이것을 창가에 놔두고 하루에 몇 번씩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줍니다. 그러는 사이에 요정들이 자주 들락거리면서 훌륭한 페어리 더스트가 발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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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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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당신은 약 백 일 후 페어리 더스트가 겉보기에는 예쁘지만 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0.O######@@@@.
(오, 좌절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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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마법사들에게 자랑한 뒤 그들도 당신과 똑같이 시간 낭비를 하게 만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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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마법사들이 앞 다투어 페어리 더스트를 만드는 진짜 이유입니다.)
“……오조 좀 미친 거 같다.”
손우경은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로 오조의 그리모어를 탁 닫아버렸다. 내가 안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물어봤지만 녀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평온하게 자는 새끼 여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근심걱정이라곤 전혀 없어 보였다. 자고 있는 오조를 깨울까 하다가 어차피 일어나봤자 이미 고장 난 눈물샘의 수도꼭지를 다시 잠그기가 어려울 듯하여 그냥 자는 애를 업어가기로 했다.
손우경이 오조를 들쳐 업으려던 걸 내가 만류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 하고 나서 곧장 후회했다. 당연히 오조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손우경이 새끼 여우를 업고 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놈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신경 써줄 때마다 못 견딜 만큼 추악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됐어. 내가 업고 갈게.”
“……왜? 네가 업기에는 무거울 텐데.”
“…….”
손우경은 현재 상황을 완벽히 곡해하고 있었다.
“야, 내가 아까 오조한테 그런 얘길 했던 건 다 일부러…….”
“나도 알아, 네 얄팍한 의도쯤은.”
“알면 뭣 때문에 그래?”
손우경과 누가 오조를 업을 건지에 대해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날 툭툭 건드렸다.
“오조 너 잠깐 가만히 있어봐.”
새끼 여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걸 일단은 내버려두고서…….
어?
오조가 시끄러운 말소리에 깼는지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눈으로 나와 손우경을 멍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니네 싸우려면 다른 데 가서 싸워. 나 자야 된단 말이야.”
부루퉁해진 아랫입술이 연신 삐죽거렸다. 내가 물었다.
“여기까지 걸어와서 대체 뭐 하고 있었어?”
나와 손우경의 보폭으로도 약 한 시간 이상이나 걸린 거리였다. 내 질문에 새끼 여우가 손끝으로 거대한 나무 밑동을 가리켰다. 거기엔 흙이 파헤쳐졌다가 다시 덮인 흔적들로 인해 주변의 땅보다 더 진한 색상의 작은 무덤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변변찮은 묘비명도 없었지만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당연히 짐작이 갔다. 오조는 침울한 눈동자로 무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우경이 얘기 듣고 생각해봤는데 유도 그런 외로운 곳에서 계속 잠들어 있고 싶지는 않을 거 같아서…….”
숙여진 고개로 새끼 여우의 팔이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긴 로브 소매에 감춰져 있던 하얀 손가락이 온통 흙투성이다. 녀석은 화가 나서 자리를 피했던 것이 아니라 손우경의 말을 듣고서 뭉글이를 적당한 곳에 묻어주기 위해 멀리 사라졌던 것이었다.
나는 저렇게 순수한 아이를 상대로 무슨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치밀었다.
그때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생명의 나무처럼 하늘 위로 아름답게 솟아 있는 나뭇가지가 바람결에 술렁거렸다. 오조가 신성한 어감의 단어들을 나직이 읊조리자 나무 주위로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원형의 빛들이 생겨났다. 주문을 점점 외워나감에 따라서 그 반딧불들은 뭉글이의 무덤가로 하나둘씩 모여들어 그 주위를 따스한 빛으로 감싸주었다.
자신을 구해준 뭉글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봐주지 못했던 오조의 슬픔이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애도의 묵념을 표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야영지로 돌아온 오조는 더 이상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정신력이 강한 아이인 것 같았다. 다만 파오 놈께서 니들이 자길 내버려두고 떠난 사이에 혼자서 소처럼 일하다가 주부 습진에 걸렸다며 우리가 돌아오자마자 마구 역정을 냈다. 미친놈이 하는 헛소리는 그저 무시해주는 게 상책이었으나 녀석이 고작 잡일 좀 했다고 계속 큼큼거리며 공치사를 늘어놓는 통에 적당히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며 때워보려고 했다.
그러나 파오는 자신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해하지 않으면 이따가 저녁 식사로 멧돼지 바비큐와 꿩 꼬치구이를 단 한입도 나눠줄 수 없다며 딱 잘라 얘기했다. 손우경이 그 꿩은 자기가 잡은 거라고 말했지만, 애당초 인간의 언어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벌써 멧돼지 고기 한 점을 잘라서 불 위에다 노릇노릇하게 굽고 있었는데 그 향이 코끝에 자석처럼 끌려 들어와서 나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냄새는 그렇다 치고 고기 표면에서 좔좔 흘러나오는 육즙과 돼지기름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그 얘기에 콧방귀조차 안 뀔 것 같던 손우경이 얼른 파오의 귀에 대고 뭐라뭐라 속닥이자 파오가 엄지를 번쩍 치켜들더니, 자기 뒤에 쌓여 있는 고기 쪽으로 가보라며 이미 치켜든 엄지를 뒤쪽으로 시원하게 쭉 뻗었다. 손우경은 바비큐용 고기와 꼬치를 탐욕스럽게 품에 잔뜩 쓸어 담아서 파오가 활활 피워놓은 불가로 가져갔다.
자기가 먹을 고기를 열심히 굽는 손우경의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입에서 그만 침이 흐를 뻔했다. 나는 별수 없이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여가며 파오에게 아첨을 해야 했다. 허나 놈은 내 말투가 무미건조하다며 존경을 담아서 찬양 어구를 다시 한 번 정성껏 준비해 오라고 했다.
쳇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내가 평소 관음존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준비해두었던 수많은 문구들을 머리에서 되새기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새끼 여우가 갈팡질팡하는 눈초리로 여길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파오이니만큼 오조가 쉽게 못 다가오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하는데, 키힝거리며 고픈 배를 부여잡고 있는 새끼 여우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나는 파오에게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준비했던 말을 건넸다. 아까보다 더 많은 존경이 담긴 말이었다.
“……빌어먹도록 존경하옵는 파오 님. 사실 그다지 큰 존경심이 들지는 않으나 미천한 소인께서 저녁밥을 드셔야 하는 관계로 잠시 동안은 알랑거려주도록 합지요.”
파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꺼져. 네놈에게 줄 고기는 없다.”
“난 그깟 고기 따윈 안 먹어도 상관있지만, 오조는 어쩔 겁니까.”
“……너 방금 안 먹어도 상관있다고 말한 거 같은데.”
“무슨 말씀입니까. 그깟 고기 따위는 절대로 먹는다니까. 아무튼 오조 어쩔 거냐구요.”
“그림리퍼 핑계나 대면서 네가 무조건 먹겠다는 얘기로 들리는군.”
파오는 손우경이 애써 구워놓은 큼직한 바비큐 한 덩어리를 냉큼 가져와선 내게 건네주며 이야기했다. 물론 뒤에서 거의 다 익은 고기를 순식간에 빼앗긴 손우경이 신랄한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쟤한테 갖다줘라.”
“직접 주시는 게 어때요.”
“잔말 말고 이거나 갖다 주고 와서 너도 먹어.”
맛있어 보이는 멧돼지 뒷다리에서 노오란 기름이 뚝뚝 떨어졌다. 더불어 내 입에서도 침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어쨌거나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고기를 가져다주자, 새끼 여우는 며칠 굶은 애처럼 포악스럽게 굴더니 내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고기를 왁왁 뜯어먹었다. 뭐, 따지고 보면 며칠 굶은 애가 맞기는 하다.
바비큐와 꼬치들이 익어가는 불가에서는 이미 손우경과 파오가 둘러앉아 입을 한시도 쉬지 않고 우적거리며 서로 경쟁하듯이 고기를 해치우고 있었다. 더 늦었다간 나한테 남는 몫이 없을까 봐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잘 익은 통구이 한 점을 집었다. 짧은 사이, 고기 맛을 보게 된 오조 녀석이 파오건 뭐건 간에 슬그머니 불가로 와서는 꿩 꼬치를 양손에 쥐고서 입안에다 허겁지겁 쑤셔 넣는 중이었다.
순간 정말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배의 수리가 다 끝나는 즉시 우리는 조만간 서쪽 땅에 도착할 것이고, 앞으로 아마 다시는 이렇게 다 같이 둘러앉아서 고기를 나눠 먹을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시간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에 나는 지금 현재에 머무르며 내게 이러한 추억이 존재하게 된 것에 일단 감사하기로 했다. 지금은 오로지 내 눈앞에 주어진 저 푸짐한 만찬을 즐기는 것만 생각하자.
허나 내가 잠시 어울리지 않는 감상 속에 빠져 있는 동안, 그 많던 바비큐와 꼬치는 벌써 반도 안 되게 팍 줄어 있었다.
* * *
나는 애벌레 침낭 속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자다가 너무 덥고 불편해서 눈을 떠보니 손우경이 침낭 안에 들어가 있던 나를 폭 껴안고서 옆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하루 종일 공연히 나 혼자서 거리감 비슷한 걸 느끼고 있던 터라 바로 코앞에서 나를 안고 자고 있는 손우경의 모습에 조금은 평정심을 되찾았다.
다만 내 가슴 부근에 올가미처럼 둘러진 팔이 너무 무거웠다. 팔을 확 걷어내고 싶어도 침낭 안에 자진해서 갇혀버린 상황이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갑갑해하고 있던 차였다.
모닥불을 중간에 두고 내 반대편에서 자고 있던 파오가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서 막 일어난 녀석의 머리 언저리만 보였다. 날 압박하고 있는 손우경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나 제대로 된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발자국 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이런 오밤중에 어디를 가는 거지. 소변을 보러 가는 것치고는 너무 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쫓는 또 하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안 봐도 뻔했다. 새끼 여우였다. 왜 나는 새벽에 눈 뜰 적마다 저 둘의 밀회 현장 같은 걸 목격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오조가 파오에게 남모르게 호감이 있는 거야 여기에서 눈 있는 사람들은 사실 다 아는 이야기였고, 파오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지난번 새끼 여우에게 그런 행동을 저질렀는지가 궁금했다. 랜드리올의 저승사자, 그림리퍼라면 자다가도 이를 벅벅 갈던 파오가 아니던가.
솔직히 저 둘의 뒤를 몰래 따라가보고 싶지만, 그런 건 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다시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귓가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궁금하면 한번 따라가볼래?”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떠보니 손우경이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눈을 뜬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이 얘기했다.
“나는 저 둘만 있을 때 파오 사형이 오조에게 어떤 식으로 굴지 궁금해서 미치겠던데.”
“……너도 다 알고 있었어?”
“둘 다 저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있나.”
내가 허리를 일으켜 세우자 손우경이 내 애벌레 침낭의 일자로 된 지퍼를 내려주며 키득거렸다.
“……그냥 우리 볼일이나 볼까. 안에 있는 것도 마저 벗겨보고 싶은데.”
내 허리를 살살 더듬으며 놈이 은근하게 물어왔지만, 나는 손을 탁 치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우경은 아쉽게 손을 털고 일어나더니 파오와 오조를 집어삼킨 숲의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녀석이 한쪽 어깨를 들썩이며 내게 말한다.
“그럼 가볼까.”
우유부단한 나에 비하면 놈의 추진력은 정말이지 인정할 만했다.
다만 손우경이 저번처럼 기척을 지워준답시고 대뜸 딥키스를 해왔다. 나한테 자기 흔적을 묻혀두는 거라지만 손을 팬티 안으로 집어넣을 필요까진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아래가 반쯤 빳빳하게 발기한 채로 파오와 오조의 미행을 시작했다.
숲 속으로 사라진 녀석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밤에도 부엉이 같은 시력을 가지신 손우경 님께서 자기 은회색 눈동자를 불빛 삼아서 어둑해진 밤길을 귀신같이 추적했으니 말이다. 결국 우리와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그 미행 대상들이 시야에 들어왔으나 지금은 애무를 받다가 만 페니스가 고통스럽기만 했다. 손우경이 불편하게 걷고 있는 나를 흐응 하는 눈초리로 넘겨다봤다.
놈의 부축까지 받으며 고개를 바닥에 떨어트린 채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손우경이 쉿 하는 소리를 냈다. 힘들게 고개를 들어서 보니 나무 틈으로 파오와 오조가 대치한 상태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예전과 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오조 쪽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파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새끼 여우가 무표정하게 일관하고 있는 파오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날 나한테 뭐 하려고 했던 거야.”
상대방에게서 성급하게 해답을 구하려는 오조와는 상반되게 이미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무장한 파오는 쉽게 대답해줄 심산이 아닌 듯했다. 놈은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능글맞은 미소나 지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대체 무슨 소린지 내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봐.”
새끼 여우가 화난 듯이 눈을 치켜뜨고서 파오를 억울한 눈으로 쏘아봤다.
“그, 그날…… 방 안에서 나한테…….”
“너한테 내가 뭘?”
뒷말이 이어질 리가 없었다. 새끼 여우는 예전 일을 회상하다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서 있던 파오가 오조에게로 걸어가자 새끼 여우가 슬슬 뒷걸음을 친다. 파오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면서 내 뒤는 왜 따라온 거지.”
그 말에 오조가 뒤로 더 물러서려던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파오가 오조에게 다가가서 풀 죽은 듯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깐 새끼 여우의 턱을 박력 있게 붙잡아 올렸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저 파오가 내가 원래 알던 파오가 아닌 느낌이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원숙한 남자의 얼굴로 오조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는데 새끼 여우는 청순하다 못해 애절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모조리 받아내고 있었다.
평소에 놈팡이 짓이나 하는 파오와 온종일 잠만 자거나 만두나 뜯어먹던 오조였기에 저 둘이 저런 치명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줄은 예상치 못한지라 지금 몰래 지켜보고 있는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파오가 오조의 얼굴을 쓸어 넘겼다. 새끼 여우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으려 하자 파오가 등을 부축해주며 바닥으로 앉혔다. 파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이래봤자 너만 힘들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꽤 다정하게 얼굴을 매만져주고 있었다.
“기대 같은 거 하지 마. 이것도 일시적인 변덕이니까.”
오조가 힘들게 입술을 열었다.
“다, 당신을 보면.”
새끼 여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나른하게 뜬 눈꺼풀이 정말로 예뻤다.
“내 여기가 자꾸 간질간질해.”
“…….”
오조의 손이 자기 하반신으로 내려갔다. 괴로운 얼굴로 자기 하반신을 문질러대는 오조를 보며 내 뒤에 있던 손우경이 하 하고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나도 발기해 있던 상태라 그 말에 허리 아래가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파오가 오조의 하반신으로 손을 가져다댔다. 검은 로브 자락을 들추며 뜨거워진 눈동자로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자 새끼 여우가 창피했는지 글썽거리던 눈을 질끈 감았다.
“보, 보지 마아.”
파오가 오조에게 입술을 가져다대는 순간, 나는 급속도로 그들과는 정반대편으로 끌려갔다. 손우경이 아주 빠른 걸음으로 파오와 오조와는 최대한 멀리 떨어지도록 숲 속을 걸어 나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놈이 나를 나무에 확 밀쳐놓고 아무 말도 없이 입술부터 가져다댔다.
방금 그 장면을 보면서 흥분했는지 배에 닿은 놈의 사타구니가 크게 부풀어 있었다. 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손우경과 입이 맞물려 있는 동안 서로의 아랫도리도 동시에 마찰시키며 급히 타오른 욕정의 불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한번 타오른 불길이 쉬이 꺼질 리가 없었다. 주변에 가시가 돋친 덤불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나서 환경적인 방해 요소가 너무 많았다. 손우경이 내 허리를 움켜쥐고서 나를 나무 기둥 위로 들어 올려 유두와 배꼽 부위를 혀로 핥아대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시 장소를 바꾸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숲을 빠져나가니 넓게 펼쳐진 바다와 모래사장이 눈에 띄었다. 너무 확 트인 공간이었으나 손우경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고서 내게 키스를 퍼부으며 옷가지를 하나씩 벗겨나갔다.
이윽고 옷이 다 벗겨졌을 즈음엔 바다와 밀접해 있는 모래사장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었다. 미행 전부터 어설프게 세워놓은 내 성기가 여러 가지 외부적인 자극에 의해 잠시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나갈 듯이 팽창해 있었다.
아까 파오 앞에서 얼굴이 새빨개져 있던 오조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역시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주변이 다 뚫린 야외에서 손우경 앞에 발가벗고 서 있는 것이 못내 창피하기만 했다. 나신으로도 당당하기 그지없는 손우경이 중심부를 가리고 있던 내 손을 잡아떼며 생글거렸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남자니까 서는 게 당연하잖아.”
손우경의 여의봉이 어느덧 내 입가까지 자라나서 입술로 말간 액을 흘려보내며 장난을 쳐대고 있었다. 놈의 귀두에서 나는 진한 냄새가 언젠가부터 더는 비위가 상하지 않는다.
손우경은 나를 모래사장 위에 눕히고서 중심부의 크기를 줄인 다음, 내 얼굴 위로 자기 것의 뿌리를 쥐고는 아래로 가져다댔다.
“빨아줘.”
놈에게서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혀끝으로 액이 뻐끔거리며 새어나오는 귀두 구멍을 살짝살짝 핥다가 다시 입을 크게 벌려서 놈의 것을 머금었다.
잠시 후, 손우경도 허리를 반대로 굽혀서 내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묻는다. 그런데 놈은 구강 성교도 엄청나게 잘했다. 녀석의 입 안으로 쪽쪽 빨리는 기둥과 불알 탓에 나는 정작 손우경의 것은 잘 애무해주지도 못했다. 그저 입안에 처박혀 있는 수준이었다.
손우경은 불알과 항문 사이인 회음부를 혀로 간지럽게 핥아 올리며 흡입하듯 빨아들여 내 몸을 흐물흐물하게 녹여놨다. 항문으로 혀가 불쑥 들어왔을 때에는 기겁하는 줄 알았으나 그나마도 테크닉이 좋아서인지 신음성만 흘렸을 뿐이었다. 아래에서 일정한 자극을 주며 할짝거리는 감각에 다리가 연달아 움찔거렸다. 밑에서 손우경의 입이 닿지 않은 자리가 없었다.
손우경은 내 하반신에서 상체를 떼어내고는 나를 정상 체위로 돌려놓았다. 놈에 비해서 급한 것은 내 쪽이었다. 녀석이 내 허리를 받쳐 올려서 자기 무릎에 얹어놓고, 축축해진 구멍 입구에 귀두 끝을 걸쳐놓고는 남은 부분은 나보고 잘 끼워 넣어보라고 말했다.
놈은 섹스를 할 때마다 꼭 내게 무리한 체위를 시키거나 저런 식으로 내 엉덩이로 자기 좆을 삼켜달라는 둥의 변태 같은 요구들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도 항상 몸을 달뜨게 만들어놓고는 내 쪽이 아쉬워서 애원하는 상황들을 지켜보며 즐거워한다.
어찌 되었건 더 급했던 건 나였으므로 숨을 꾹 참으며 엉덩이를 아래로 푹 찍어 누르는데 역시 크기가 만만치 않은지라 항문이 너무 쓰라렸다. 손우경의 목을 껴안고서 다리를 좀 더 벌려서 쇠몽둥이 같은 좆을 안에다가 꾸역꾸역 밀어 넣는데 절로 인상이 쓰였다. 놈이 날 놀리듯이 입을 열었다.
“좀 천천히 먹어. 이러다 체하겠다.”
얄미워서 눈을 흘겼더니 붙잡혔던 허리가 쑥 아래로 처박힌다.
“아윽!”
그 후로는 손우경이 알아서 몸을 움직여댔다. 모래사장 위에서 밀물이 밀려오든 말든 내 자세를 착실하게 뒤바꿔가며 자기 욕구를 푸는 것에 충실했다. 손우경 자체도 절륜했지만, 기본적으로 놈의 여의봉은 주인의 기분을 상대방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준다 하니 지금 내 배 속에 녀석의 페니스가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지복감이 느껴졌다.
양쪽 손목을 붙잡힌 채 녀석의 등에 다리를 휘감고서 한참을 헉헉대다가, 손우경이 첫 사정을 끝내자 턱 끝이 부르르 떨려왔다. 손우경이 쾌감으로 인해 딸꾹질까지 하며 들썩거리는 나를 꽉 껴안고서 키스를 해주다가, 이번엔 얕은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수중 섹스를 시도해야 했다.
페니스가 엉덩이에서 피스톤질을 할 때마다 바닷물이 내장으로 함께 휩쓸려 들어왔다. 바다에서 손우경이랑 오만 짓은 다하다가 다시 모래사장으로 나온 뒤에는 상당한 양의 물이 뒤에서 주르륵 흘러나왔다.
바다에서의 체력 소모가 컸던지라 조금 쉬고 싶었지만 손우경은 내 몸에 한번 들어온 이상 엔간해선 빠져나갈 생각을 안 했다. 그렇게 몸이 뒤집혀진 채로 엉덩이에 올라탄 놈에게 꾹꾹 박히고 있던 중이었다.
나와 손우경의 주변으로 어제 낮에 봤던 그 이상한 진흙 생명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손우경이 연거푸 허리를 놀리다 말고 잠시 동작을 정지했다. 그것들은 섬의 숲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오더니 우리가 엉겨 붙어 있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나와 손우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저 진흙 생명체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싶지 않아 손우경에게 내 몸에서 이제 그만 내려가라고 말했지만, 놈은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구경꾼이 늘어난 것에 발정하여 내 뒤쪽에 실컷 더 박아댔을 뿐이다.
“앗, 아흣, 하악, 그만, 손우경 그만해! 아흣!”
맨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질퍽질퍽했다. 양팔이 뒤로 꺾였다. 놈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엉덩이와 페니스를 착착 끼워 맞췄다.
재앙은 그 후에 벌어졌다.
수백 마리의 진흙 생명체들이 방금 나와 손우경이 했던 체위를 따라 하며 낯 뜨거운 장면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손우경에게 몸이 마구 흔들리면서도 너무 기가 막혀서 허 하고 웃고 말았다.
아직 사정이 끝나지 않아서 강한 허릿심으로 연신 나를 몰아붙이고 있는 손우경이 별안간 내 머리카락을 꽉 움켜잡았다. 섹스 도중 심하게 흥분하면 가끔 이렇게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귓가에 흡 하고서 참는 소리가 나더니, 배 속으로 후끈한 정기가 쏟아져 나왔다.
항상 이 정도로 많은 정액을 배 속으로 전부 흡수하고 있노라면 이러다 손우경의 아이라도 배는 게 아닌지 불안해진다. 붙잡힌 머리 때문에 위로 바짝 들려 올라간 고개로 때마침 밤하늘에서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사방에 널린 그 진흙 생명체들은 여전히 두 마리씩 짝을 지어서 성교 행위를 묘사하는 중이었다.
나는 별똥별을 향해 작은 소원을 빌었다.
별님. 전 이제 다 필요 없으니 부디 내일 당장 이놈의 세상이 콱 멸망하게 해주세요.
* * *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관음존자는 때때로 날 자기 집무실로 불러놓고는 자신은 책을 보거나 다른 업무를 보며 나를 일부러 방치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집무실이 넓은 편이긴 해도 내가 거기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스무 살을 넘긴 후에야 그런 일이 차츰 드물어졌지만, 그가 그렇게 아무 이유 없는 심술을 부리는 날이면 나는 온종일 밥도 먹지 못하고서 본의 아니게 아돌프의 곁에서 그의 일과를 면밀히 살펴보게 되곤 했다.
사람들에게서 잔악무도한 폭군 소리나 들어가며 살고 있지만 기실 그가 업무 시간에 처리하는 서류의 양은 상당했다. 단순히 반역하는 놈들이나 처단해가며 세월을 흥청망청 죽이고 있진 않았었다. 실제로 관음존자가 집권한 다음부터 무법 지대를 방불케 했던 포타라카의 치안이나 대외적인 기강이 안정된 것도 사실이었다. 허술하게 굴러가던 공공기관들도 나름대로의 절차와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는 동쪽 북반구에서나 활동하던 환영제야단의 세력권마저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그날도 내가 집무실의 고행을 겪던 날이었다. 관음존자는 어김없이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내가 이제 안중에 들어왔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너, 백 번째 원숭이 현상이라고 들어봤냐?’
나는 배가 고파서 기운 없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집단 의식의 힘에 관한 이론이야. 옛날에 어떤 섬에 살던 원숭이 한 마리가 흙이 묻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기 시작하자 그걸 본 다른 원숭이들도 똑같이 따라 했다고 해. 그렇게 고구마를 씻어 먹는 원숭이들의 숫자가 약 백 마리에 도달하자, 다른 장소에 살고 있던 원숭이들은 물론이고 점차 지구상의 모든 원숭이들에게 그 습관이 널리 퍼지게 됐다는 얘기가 있어.’
‘뭐, 그냥 먹기엔 고구마에 묻은 흙이 더러웠나 보죠.’
‘이건 꼭 원숭이가 아니더라도 어떤 집단에 새로운 방식의 사고나 생활 습관이 나타나고 그게 대략 백 이상의 일정 머릿수 사이에서 공유될 시 같은 종에 한해 그 집단의식이 전체적으로 공명하는 것을 뜻해.’
관음존자의 손에 들린 두꺼운 책의 제목을 쓱 훔쳐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런 얘기에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나에겐 너무 어려운 얘기였다.
‘달리 말해서 개인 한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이 전체에게 미치는 영향을 상상해봐. 그 생각이나 사상은 어쩌면 좋은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전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일 수도 있겠지.’
내게 물에 고구마를 처음 씻어 먹은 원숭이를 예로 들어 구구절절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건 관음존자 자신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환영제야단의 수장인 아돌프 단 한 사람의 생각이 이미 ‘공포심’라는 집단의식을 인간 세계에 무차별적으로 퍼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이걸 인간에게도 한 번 적용해볼까? 어느 한 사람의 정신이라는 하드디스크에 강제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시킨 다음, 이게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다른 녀석들에게 복제되는지 실험해보는 거야. 현이 네 생각엔 전 대륙의 모든 인간들에게 이 새로운 프로그램이 동일하게 가동되기까지는 대충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 같냐?’
‘새로운 프로그램이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프로그램 제목은 아무래도 ‘전염병’이나 ‘전쟁’, 이런 자극적인 소재의 것들이 재밌겠지. 그 외에도 괜찮은 의견이 있다면 말해봐.’
나는 불안해진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설마 방금 말씀하신 그 새로운 프로그램인가 뭔가 하는 실험을 진짜로 진행하실 건 아니시죠?’
관음존자가 비스듬히 턱을 괴더니 피처럼 붉은 눈동자로 나를 넘겨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하, 넌 진짜 머리가 나쁘구나.’
아돌프가 나를 멍청하다고 구박하는 일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더군다나 내가 넘어가지 않으면 뭘 어쩌겠는가. 그러나 관음존자가 나에게 저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아직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원숭이가 어쩌고 프로그램이 저쩌고를 늘어놓더니 정작 차후 계획에 대한 것을 묻자 날 한심한 놈으로까지 취급하고 있었다.
그때 아돌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기를 느끼는지 근처 옷걸이에 걸려 있던 큼직한 하얀색 털 코트를 걸쳐 입더니 다시 거드름을 피우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하게 기대앉았다. 털 코트가 관음존자의 몸이 파묻힐 만큼 큰 사이즈였다는 게 왠지 인상 깊었다.
그는 의자를 빙글 돌리며 내가 딱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프로그램에 대한 실험이라면 이미 예전부터 대규모적으로 가동하는 중이잖아.’
그러자 내 머리에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 전쟁 말이구나!’
관음존자가 쯧쯧 혀를 찼다.
‘멍청아, 그거 말고. 그건 지금의 실험을 더 가속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지.’
‘그럼 실험 중인 프로그램이 대체 뭔데요.’
아돌프가 집무실용 책상에 놓여 있던 경전 하나를 내게 휙 던져주며 그 질문에 대한 간결한 답변을 돌려줬다.
‘뭐겠어, 바로 종교지.’
* * *
아침에 일어나보니 셔츠의 단추들이 엉망으로 채워져 있었다. 가뜩이나 관음존자의 꿈을 꾼지라 마음이 뒤숭숭한데 심지어 바지 안에는 팬티가 없다. 어제 저녁 백사장에서 드문드문 벗겨냈던 내 옷들을 다시 주워다가 급하게 입혀놓은 티가 물씬 난다.
희미하게 불씨가 남아 있는 모닥불 주위에서는 손우경과 파오, 오조 등이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보니 어젯밤 내가 겪었던 그 수많은 일들이 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인가 싶었다.
나는 내 허리를 껴안고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이 곯아떨어진 손우경의 팔을 조심조심 떼어내다가 문득 놈의 가지런한 눈썹을 넋을 잃고서 바라봤다.
좌우 대칭이 완벽하게 자라난 저 짙은 눈썹은 항상 볼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누가 이 녀석이 좋은 이유를 단 한 가지만 대라고 하면 나는 지체 없이 눈썹이라고 대답할 것 같았다. 다른 남자들같이 송충이처럼 너무 지저분하게 자랐거나 반대로 인상이 흐릿해지는 빈약한 숱도 아니었다. 원래가 잘생긴 얼굴이기도 했으나 손우경의 눈썹은 유명 화백이 섬세한 붓끝으로 그려놓은 그림들처럼 보면 볼수록 아름답게 여겨지는 걸작이었다.
무심결에 손끝으로 눈썹 라인을 더듬다가 거기에다가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의 신체 일부분에 집착하고 있는 내가 변태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나 그 마음을 억누를수록 충동이 거세졌다. 하지만 아침에 꾼 꿈의 내용들을 재차 상기하며 눈썹에다 하는 도둑 키스는 이만 접기로 했다. 게다가 입술을 댔다가 행여나 손우경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지라 물안개가 낀 싸늘한 아침 공기에 다 꺼져가는 모닥불을 다시 살리기 위해 축소 가방을 뒤적여 혹시 몰라 여분으로 하나 챙겨 온 라이터를 찾아냈다. 나에게는 불의 정령을 부리는 재능도, 손으로 불꽃을 피우는 능력도, 그도 아니면 나무를 마찰시켜서 불을 피우는 재주마저도 없으니 이것만이 최선이었다. 왠지 내 눈가가 축축해지는 것은 아마도 지금의 기온 탓이겠지…….
딸칵거리며 습도가 높은 주변 공기에 불이 잘 붙지 않는 라이터를 켜고 있는데 내 앞으로 누군가 불쑥 다가왔다. 눈보다 위험을 먼저 감지한 몸에서 강한 떨림이 진동했다. 기척을 숨기고 있던 검은 제복의 사내들이 숲에서부터 그 모습을 하나씩 드러내고 있었다.
척살부 대원들이었다.
내 앞에 서 있던 녀석이 옴 마니 반메 훔의 진언을 외우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끔찍한 모습의 악령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저 환각일 뿐이라는 걸 잘 알지만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저 기괴한 이미지에 온몸이 공포심으로 딱딱하게 굳어갔다.
목이 삐뚤어져서 얼굴이 흉측하게 망가진 여자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얼굴을 자신과 똑같이 만들려고 들었다. 내 몸을 더듬어오는 수많은 손들. 저 뒤쪽으로는 양쪽 손목에 의수를 차고서 입이 귀까지 찢어진 남자와 한쪽 팔이 없는데다 심장이 뻥 뚫려 있는 남자의 모습들도 보였다.
그것들은 여태껏 내가 살해했거나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죽기 직전인 모습들이었다. 선두에 서 있던 여자가 피눈물을 철철 흘리며 나를 원망했다.
이건 다 너 때문이야! 너!
악령의 속삭임에 깜빡 넘어가려던 찰나였다.
일그러진 공간이 다시 원상 복귀되며 수많은 악령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자 이제 내 앞에는 손우경의 뒷모습만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는 방금 나에게 죽음의 환상을 심었던 검은 제복의 사내가 악령들보다 더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 이 기술에 면역이 없는 오조와 파오는 필시 지금쯤 끔찍한 악몽 속에서 헤매고 있을 터.
척살부 녀석들이 손우경을 상대로 신중하게 포위망을 좁혀왔다. 손우경도 현재 환각을 보고 있는지 쉽사리 움직이지를 앉았다. 녀석이 내게 물었다.
“내게 지금 환영 주법을 건 자가 녀석들 중에서 어떤 놈인지 구분할 수 있겠어?”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다. 방금 죽어버린 녀석을 제외하고는 총 열네 명의 척살부 대원들 중 오직 단 한 명만이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좌표를 불렀다.
“동남쪽으로 다섯 시 방향. 거리는 약 이백 미터 안팎.”
방금 내가 말한 동남쪽 방향으로 공간이 수십 개의 가로로 쪼개져 들어갔다. 허공이 칼처럼 변해서 사람을 난도질하는 장면을 일전에 선장실 안에서도 봤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곧이어 귓가를 찢어발기는 비명이 들려왔고, 손우경은 그제야 자기 주위로 몰려들던 척살부 대원들을 훑어보며 비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놈이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손으로 자기 머리카락 수십 가닥을 뜯어냈다.
“시시한 잔기술이라서 웬만해선 잘 안 쓰는 건데 니들이 감히 아침부터 엿 같은 환각 상태를 들이밀었으니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라구. 내가 암만 생각해도 그냥 곱게는 못 죽여주겠다.”
녀석이 손에 얹힌 자기 머리카락을 입으로 후 하고 불자 잠시 후 손우경이 수십 명으로 늘어났다.
세상에, 분신술이라니……. 단지 열세 명밖에 안 되는 척살부보다 세 배 이상 많은 인원이기도 했다.
똑같이 생긴 손우경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였다. 당황한 척살부 녀석들을 상대로 손우경들이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놈들이 생긋 웃으며 한꺼번에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중에서 과연 누가 진짜일까?”
어떤 녀석이 진짜든지 척살부 대원들을 흠씬 두들겨 패는 주먹들은 하나같이 정직하게 보였다. 구태여 기문파공을 쓰지 않더라도 현란한 싸움 기술과 타고난 힘만으로도 사람의 심장을 뚫거나 목을 180도로 틀어버리는 게 저렇게 손쉬운 일이라니. 내가 여태 몸담고 있던 조직인 척살부에 그동안 속으로 품고 있던 경외심 같은 것들이 마음속에서 송두리째 뽑혀나갔다. 아니, 그보다 손우경 저 녀석이 괴물인 게 맞는 거겠지.
손우경의 일방적인 살육전을 강 건너 불구경처럼 바라보고 있는데, 또 내 주위로 남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는 진흙 생명체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짜증 날 만큼 아장거리는 걸음걸이로 말이다.
녀석들은 손우경과 척살부가 싸우는 장면을 향해 모든 시선을 쏟아부었다. 수백 여 개의 눈동자가 그 역동적인 움직임에 따라서 같은 방향으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손우경이 마치 준비 운동이라도 하듯이 척살부를 가볍게 전부 쓸어버리는 사이, 진흙 모방꾼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다가 종국엔 그 짧은 시간 내에 한 마리도 남김없이 싹 다 전멸해버렸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