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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해할 수 없으니 오해를 하는 법 (19/24)

신서유기 03

16. 이해할 수 없으니 오해를 하는 법

‘인간은 빛을 추구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둠을 의식화함으로써 성숙한다.’칼 융 Carl Gustav Jung(1875-1961)

흔들의자에 앉아 안경을 쓴 채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던 아돌프가 중얼거리며 내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었다. 이것이 내가 더 성숙해지기 위한 과정이라면 그 결과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이 암흑으로 뒤덮인 공간에서 탈출하고 싶었으니까.

이곳은 관음존자의 집무실이 아닌, 그가 나에게 개인적인 주술들을 전수해주기 위해 기문파공으로 시공간을 뚝 잘라 만들어놓은 어두운 방 안이었다. 한 줄기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 방 안에는 그와 나, 그리고 그가 앉아 있는 흔들의자와 내가 곳곳에 게워놓은 토사물만이 전부였다.

관음존자는 정신단련이라는 미명하에 하루도 빠짐없이 내 머릿속에 검은 환상을 심어놓고는 내가 미쳐가거나 제발 살려달려고 울부짖는 꼴을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지금은 조금 괴롭겠지만, 나중에 네가 실전에 나가서 이 환영 기법을 사용할 때가 되면 풍부한 레퍼런스로 도움이 되어줄 거다.’

지금 나에게 보여주는 이 사악하고 끔찍한 장면들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 일이 생겼을 때 그대로 사용하라는 의미였다. 다리에 털이 북슬북슬하고 몸통이 화려한 색상으로 뒤덮인 거대한 독거미가 지금 내 심장을 잔인하게 뜯어먹고 있는 장면을 환각으로 보여주면서, 그는 나에게 ‘조금’ 괴로울 거라고 단정 지어 말했다.

관음존자에 의하면 이 방 안은 시간과 공간이 멈추어진 특수한 장소였다. 그는 이곳은 현재가 끝없이 현재를 낳는 곳이라서 설령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니 푹 안심하라고 말했다. 말인즉슨, 내게 어떤 짓을 저질러도 정신이나 망가질 뿐 육체는 끝까지 버텨준다는 소리였다.

아돌프는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나를 다양한 방법으로 죽여 나갔다. 죽음 직전의 공포와 싸우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조금이라도 덜 무섭게 느껴졌다.

달도 뜨지 않은 새벽, 어둠 속에서 수십 마리의 광포한 늑대들에게 쫓기다가 낭떠러지 끝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순간이 아주 천천히 이어졌다. 전신을 지배하고 있는 공포심도 같은 속도로 달려들었다. 바닥으로 몸이 곤두박질쳐져서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튀었다. 그 순간까지도 나의 의식은 생생했다. 환각이라고 해서 아무런 고통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질러도 죽지를 않는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늑대들이 머리 아래 달려 있는 내 살점을 뜯어먹기 시작한다.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날, 나도 함께 죽었어야 했다. 원래는 진작 죽었어야 할 목숨을 구차하게 이어가고 있는 대가로 내가 이렇게 큰 형벌을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관음존자에게 제발 좀 죽여달라고 통사정했지만 그는 끝까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방 안에서의 훈련이 끝나고 나면 나는 한층 더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벌써 수백 번도 넘게 다양한 죽음의 순간을 체험했음에도 내가 언젠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될까 봐 몹시 두려웠다.

나는 거나하게 토악질을 해대고서 기진맥진한 채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른 차원으로 연결되었던 어두운 방이 사라지고 관음존자의 집무실 바닥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아돌프가 내 머리 맡에서 다리를 굽히고 앉더니 나를 흥미진진하다는 눈으로 관찰했다. 루비 알갱이보다 더 붉게 빛나는 관음존자의 눈. 내가 꾸준히 커가는 동안 그는 여전히 소년의 얼굴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따금 생각했다. 관음존자가 실제로 몇 살이나 됐을까 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너는 가르치는 보람은 없지만 지켜보는 잔재미가 있어.’

그 잔재미를 위해 나를 아직까지 살려두고 있는 것이었다. 관음존자의 손가락이 눈물로 얼룩진 눈가를 신기하다는 듯이 훑어 내렸다.

‘눈물은 인간의 심층에 쌓여 있는 찌꺼기들을 일부나마 깨끗하게 정화해주는 좋은 작용을 하지. 하지만 난 이런 추한 감정놀음 따윈 좋아하지 않거든.’

관음존자는 내가 울음을 터트리는 것에 언제나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에고가 제멋대로 폭주하는 것에 자신의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은 참으로 바보 같은 일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키들거리며 말한다.

‘사람의 수명이 일찍 닳는 이유는 다 쓸데없는 감정 소비에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기꺼이 투자하기 때문이야. 통상적으로 수명을 단축시키는 감정들 중, 그 양대 산맥을 바로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보지. 하지만 이 감정들은 타인을 조종하는 일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어.’

모든 환각 상태가 끝났음에도 이미 다쳐버린 마음은 연신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눈가에서 한시도 멈추지 않고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아돌프는 작위적인 표정으로 나를 딱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약 삼일 정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몸에 기운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겠군. 그나마 사흘 전에 먹었던 음식마저 방금 다 게워냈으니 넌 지금 몹시 허기가 졌을 거야, 그렇지?’

물론 배도 고팠지만 탈수 증상이 일어서 머리가 어지럽고 입안도 건조하게 말라붙고 있었다. 간신히 버석거리는 입술을 열어서 물을 달라고 하자, 아돌프가 내 입속으로 차가운 물을 흘려보내주었다. 여태껏 물맛이 그렇게 단 줄 미처 몰랐었다. 꽃 안에 담긴 꿀을 빨아 먹는 벌이라도 된 기분으로 꿀꺽꿀꺽 그가 준 물을 마시는데 관음존자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입에 넣자마자 바로 뱉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맛있게 먹으니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군.’

흐릿해진 눈으로 관음존자의 손에 들린 것을 보자 그것은 집무실 안에 있던 어항이었다. 어항에 반쯤 남아 있는 물은 집무실을 관리하는 비구니들이 제때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누리끼리한 물이끼와 정체불명의 검은 물질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내 머리 옆으로는 어항에서 떨어진 금붕어들이 얕게 고인 물웅덩이에서 팔딱거리고 있었다. 순간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토할 기운조차 없었다.

아무리 이런 취급을 당해도 저항하거나 반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속한 이 세계의 신이자, 나라는 장난감의 태엽 장치를 감아주는 유일한 주인이었다. 그가 더 이상 태엽을 감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언젠가 숨을 멈추게 되겠지.

관음존자가 내게 더러운 어항 물을 먹여놓고 태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두려움과 죄책감을 가지고 사람을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알려줄까?’

아돌프는 맥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일으켜서 세운 뒤 벽에 비스듬히 앉혀놓고는 주머니를 뒤적여 내 무릎 위에 사탕 하나를 올려놨다.

이게 무슨. 아돌프가 내게 이런 간지러운 물건을 줄 리가 없으니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봤다.

‘현아, 난 이제부터 급한 용무로 이 방을 열 시간 이상 비워둘 거야. 하지만 넌 내가 돌아오기 전까진 이 방을 떠나서는 안 돼.’

관음존자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포장 비닐 안에서 조금 녹아 있던 사탕에서 달달한 냄새가 진동했다. 배에서 꼬르륵 하고 아우성을 쳤다. 방 안에서 열 시간 동안 대기해도 좋으니 어서 이 사탕이나 먹고 싶었다. 아돌프는 사탕에서 결코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넌 내가 허락하기 전까진 이 사탕을 먹어서는 안 돼.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거나 바닥에 부숴버릴 수도 없어. 명심해. 만일 내가 이 방에 다시 돌아왔을 때 사탕이 사라졌거나 모양이 달라진 후라면 그 벌로 이제까지 네가 겪었던 그 같잖은 환상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지옥을 맛보게 해줄 거야.’

이미 사탕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버린지라 관음존자의 처사가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환영제야단의 수장이라는 남자가 어린애를 상대로 저런 유치한 심술이나 부리다니. 내가 울먹이든 말든 그는 확고했다.

‘그렇게 꼴사나운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구. 이건 단지 작은 시험일 뿐이야. 그러니 내가 이 방을 나가고 난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너 자신과의 싸움이 펼쳐질 거다. 내가 말했지?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타인을 조종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너는 삼 일간 굶주렸던 상황에서 다시 열 시간 동안 겨우 이 사탕 하나를 두고 수많은 내적 갈등을 벌이게 될 거야.’

맛나 보이던 사탕이 순간 무릎 위에서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내가 분명 먹지 말라고 했으니 넌 내가 두려워서라도 차마 이 사탕에는 손을 댈 수 없을 거야. 아마 앞으로 한 두어 시간 정도는 참을성 있게 나를 기다릴 거다. 그렇지만 대여섯 시간이 지나서부터는 두려움보다는 네 허기짐 때문이라도 일단 먹고 보자는 생각이 들걸. 그래, 고작해야 사탕 하나인데, 설마 나를 어쩌기야 하겠어?’

그는 음산한 목소리로 마저 말을 이어갔다.

‘사탕을 입에 댄 순간, 그 달콤함에 잠시간은 아주 행복하겠지. 그러나 사탕이 입안에서 조금씩 사라질수록 분명 내가 하지 말라고 했던 일을 저지르게 된 죄책감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너를 엄습할 거야. 후회와 자책마저 이어질 테지. 이리도 짧은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자신이 사탕에 손을 댄 걸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말이야.’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의 말대로 겨우 사탕 하나로도 나를 철저하게 고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관음존자가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가증스럽게 닦아주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다 너를 위한 거야.’

나를 위한 거라니.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의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해둬.’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엔 관심도 없었다. 그저 현재의 내 처지가 너무 가엾게만 여겨졌다.

‘중요한 것은 네가 이 사탕을 입에 대든 그렇지 않든 너는 항상 나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관음존자는 내 턱을 그러쥐더니 매일같이 내게 하는 고정된 질문을 던졌다.

‘……너는 누구의 것이지?’

나는 즉시 답했다.

‘저는 관음존자님의 것입니다.’

하아, 하아…….

새벽에 또 악몽을 꾸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마하데바 호의 수리가 완료된 직후, 그 무인도를 떠나온 지도 벌썬 반 달 가까이 흘러 있었다. 서쪽으로의 항해는 별 무리 없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으나 내 불면증은 극에 달해 있었다.

요즘 들어선 거의 확신하고 있다. 이건 꿈이 아니라 관음존자가 내 무의식의 강물로 띄워 보내는 경고의 돛단배라는 것을. 내 옆자리에 누워 있는 손우경을 보니 꿈에 대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의 예행연습이라, 관음존자의 말들이 바로 이런 의미였었나. 예전과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건 나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손우경이라는 사탕에게서 자신을 선택할 것을 계속해서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그 자그마한 사탕에 비해서 나를 유혹하는 존재의 부피는 더 크게 불어나 있기도 했다. 알록달록했던 색깔마저도 다르다. 나는 손우경의 갈색으로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캐러멜 사탕인가.

내 캐러멜 사탕은 현재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손우경의 이마에 손바닥을 얹으며 속에서 들끓는 불안함을 중화시키려 들었다. 간밤에 또 거칠게 섹스를 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얼굴을 만진다고 해도 그리 쉽게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이마에서 뺨으로 천천히 손을 끌어내렸다. 자고 있는 얼굴에 내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놈에게 손을 대고 있어도 내 옆에 있다는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숨을 죽이며 녀석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왼쪽 가슴에서 쿵쿵거리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더 크게 뛰었다. 그래도 부족한 감이 들어서 한 번 더 입 맞추고서 손우경의 얼굴을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는 관음존자에 대한 두려움과 너를 기만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비록 네가 내 왼손에 심어졌던 관음존자와의 연결점을 끊어놨다고 한들, 내게 그 몹쓸 감정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 그것은 그와 나를 질기게 연결해주는 이음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네가 이 사탕을 입에 대든 그렇지 않든 너는 항상 나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그때 그 사탕을 어쨌었는지 그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경이 너를 잃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 * *

전체 대륙 중 약 삼분의 일 정도의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쪽의 룸버린과 로고스 연합 지대는 어려서부터 동쪽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들에겐 사실상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 서쪽 지역은 크게 북의 ‘룸버린’과 남의 ‘로고스’로 나뉘는데 이 둘은 원래는 같은 마법사 집단에서 뿌리를 두고 갈라져 나온 가지로서 주로 강경파와 온건파로도 불린다고 했다.

가치관이나 마법적인 부분에 관하여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라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다가 동쪽과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연합국의 형태로 묶이게 되었다. 연합국은 자신들의 새로운 이름을 스스로 ‘세피로트’라고도 불렀지만 사실 외부에서는 잘 쓰이질 않았다.

강경파인 룸버린은, 오조가 본디 속해 있던 마법 교단으로 우리 환영제야단과도 심심찮게 부딪쳐왔던 집단이었다. 이곳은 카발라라는 신비주의적 교리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마법에 대해 탐구하는데 이 역시 새끼 여우가 주로 사용하는 소환마법이나 흑마법, 더 나아가 치유마법 등의 여러 가지 마법 장르를 폭넓게 연구하고 사용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다.

온건파인 로고스는, 다른 말로는 그노시스파라고도 불리는데, 직접적인 마법의 사용이나 인간 세계의 물질적인 것들에는 통 관심을 두지 않고 내부의 신성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신처럼 되는 것을 추구하려는 집단이었다. 이것은 우리 동양에서 참나를 깨우치기 위한 수행법과도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는데 그노시스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 바로 인식, 즉 깨달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 단체의 명칭인 로고스는 ‘말씀’ 혹은 ‘말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로고스의 고위 관계자들 중, 극히 일부는 단순히 언어의 힘만으로도 신처럼 공간이나 물질 등을 창조하는 언령의 기술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허나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아주 극소수에게나 전해진다던 그 언령 기술은 관음존자의 또 다른 주특기이기도 했다. 서쪽으로 출발하기 전에 바벨의 도서관 안에서 그는 허공 위에다가 에메랄드 태블릿의 글자들을 만들어내며 나에게 로고스의 힘을 선보인 적이 있었다. 비단 꼭 그때의 일이 아니더라도 그간 관음존자가 종단 내에서 언령의 힘을 보여준 예들은 전부 다 일일이 열거할 수 정도로 많았다.

여하튼 자세한 내력까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외관만으로도 서쪽 출신임이 명백한 아돌프는 아마도 로고스에서 그 능력을 빼내 왔을 것으로 추정됐다.

사실 현존하는 최강의 기예인 기문파공, 그 하나만으로도 무적이라는 칭호를 얻을진대 거기에 언령의 힘까지 더해진 관음존자는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이것 역시 내 추측이긴 하지만, 손우경도 그랬기에 똑같은 기문파공을 가지고도 결국엔 다섯 개의 검 수용소의 죄수 신세를 면치 못했으리라 본다.

어쨌거나 저 멀리 로고스의 땅이 보이고 있었다.

바다 위에서 보낸 길고 암울했던 나날에도 이제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 다가왔다. 다들 갑판으로 올라와서 오조에게서 서쪽에 도착한 후의 대략적인 주의 사항들을 들어가며 당분간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후드가 달린 검은 로브들을 걸쳐 입었다.

오조가 몇 년간이나 목 안에 끼워져 있던 작은 언어 번역기를 캑 토해내더니 바닷물에 휙 집어던졌다. 놈은 어디가 안 좋은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입을 열었다.

“Shit……, my throat hurts.”

언어 번역기가 제거되어서 지금 녀석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긴 기껏해야 목 아프다는 말이겠지 뭐. 새끼 여우는 양쪽 귓불에 꽂아놨던 바늘형 동시 통역기도 잡아 뺐다. 약 0.5센티 정도 되는 바늘 두 개가 손바닥에서 굴러다니다가 바닥으로 데구루루 떨어졌다. 어차피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곳에 돌아오게 된 오조는 영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그것들을 줍지 않았다. 환영제야단으로 망명한 후에 계속 불편함을 감수했다는 건 이해하지만 나중에 본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어쩔 생각인지 모르겠다.

나는 오조가 착용하던 바늘형보다 더 작은 나노사이즈로 제작된 신제품 동시 통역기를 양쪽 귓불에 찔러 넣고는 손우경과 파오에게 언어 번역기들을 내밀었다. 아부-게르다에서 이 물건들을 구매했을 당시 남은 재고가 인기 품목인 레몬맛과 박하맛이 전부라서 적당히 레몬 하나에 박하 두 개를 골라 왔다. 둘 다 시원한 박하맛을 고를 거라던 내 예상과는 달리 서로 레몬맛을 고르겠다고 싸워서, 나는 먼저 박하맛 언어 번역기를 목 안에 끼운 다음, 놈들에겐 남은 것은 니네끼리 알아서 하라고 전부 넘겨줬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뿐인 레몬맛을 차지하겠다고 저 덩치가 산만한 것들이 가위바위보나 하고 있는 꼴을 보니, 방금 전까지는 분명 멀쩡했던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목 안에서 차차 자리를 잡아가는 동그란 형태의 언어 번역기가 처음엔 영 익숙지가 않아서 몇 번이나 침을 삼키며 큼큼거리자 그제야 좀 안정이 됐다.

마하데바 호의 선원들은 로고스의 항구에 정박할 준비를 하면서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감사의 대상이 뭉뚱그려졌긴 했어도 직접 인사를 받아야 하는 인물은 따로 있었다.

사실 선장이 죽은 후에도 배가 좀 고장 났던 걸 제외하면 항해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신기한 것은 여기 있는 어떤 이들도 선장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딘지 모르게 다들 후련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다 선장실을 냉큼 차지해버린 손우경이 대부분 선장과 노예 계약을 맺었던 선원들의 계약서를 찾아내서 불쏘시개로 써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법적으로도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도 일전에 그 계약서를 읽어봤지만 서면상의 내용들은 도저히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에게, 즉 손우경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충분했다.

선원들은 아부-게르다에 돌아가는 즉시, 이제는 계약에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했다. 신을 믿는 그들의 풍습대로, 우리의 앞길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빈다며 마지막으로 동시 통역기를 잠시만 꺼달라고 하더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옴 샨티 샨티 샨티!

Om Shanti, Shanti, Shanti!

(당신에게 평화가 가득하길!)

배에서 화물을 내리는 사이, 우리 네 명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서둘러 항구에서 빠져나왔다. 막상 적의 영토에 진입했다는 생각이 드니 어째 잠시라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길거리 사방팔방에 오조처럼 피부가 창백하고 눈이 파랗거나 노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데다 그 분위기마저도 매우 삭막했다.

포타라카의 외곽 지대나 쿠르게오르 사막에서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마을들을 숱하게 봐왔었지만, 이곳의 집들은 당장이라도 무너지지 않는 게 진짜 용할 지경이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멀쩡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포대자루로도 안 쓸 것 같은 옷들 하며 구멍 뚫린 신발을 신고 다니는 행색이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그것도 어른들은 거의 없고 지나다니는 행인이라고는 스무 살 미만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들뿐이었다.

금이 간 담벼락 밑에서 맨발의 어린아이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고무를 자르고 있었다. 잘게 잘라낸 고무 위에 비닐을 꼼꼼하게 씌우더니 한 명씩 나눠 갖는다. 곧이어 비닐 처리가 된 고무가 아이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저걸로 대체 뭘 하려나 했더니 고무를 껌 삼아서 심심한 입을 달래려고 들었던 것이다.

내가 충격받은 얼굴로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자 옆에 있던 오조가 입을 열었다.

“여기선 저 고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이야.”

오조가 왜 그리도 유독 먹는 것에 집착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반면 파오와 손우경은 서쪽의 이런 실태에 대해서 이미 예전부터 다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항구에서 내린 뒤에도 놈들은 나처럼 당황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손우경은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파오야 천봉대원수 시절에 툭하면 서쪽으로 원정을 나왔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나는 뒤쪽을 슬쩍 돌아다봤다. 지금 우리 뒤를 따라오는 인원이 벌써 약 20~30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아까 배에서 내리기 전에 오조가 마을에 도착하면 분명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 그들에게 함부로 뭔가를 줘서는 안 된다고 미리 언질을 주긴 했었다.

하지만 내 주머니에는 배에서 얻어 온 과자 같은 것들이 좀 남아 있었다. 오조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저 뼈만 남아서 해골처럼 앙상한 아이들에게 이 과자들을 전부 보시할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나는 평소 자비심이 넘쳐흐르는 놈은 아니었지만, 보살의 실천 덕목인 육바라밀열반에 이르기 위해 보살이 실천해야 하는 여섯 가지 수행법으로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등이 있다. 본문에 언급된 보시 이외에 다른 것들의 자세한 뜻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테니 생략하겠다 중 제1의 덕목이 바로 보시였다. 보시란 널리 베푼다는 의미로서, 자비를 가지고 타인에게 조건 없이 부처의 가르침이나 재물 등을 나눠주는 것을 뜻했다.

한동안은 내 승려 신분을 망각하고 있었지만, 나의 이기적인 본성을 단번에 잠재울 정도로 저 아이들의 몰골은 심각하기가 짝이 없었다. 내 기분 탓인지 그 음울한 얼굴들에서 새카만 독기 같은 것이 뿜어 나왔다. 잘해봐야 약 열 살 전후로 보이는 아이들임에도 그 또래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특유의 천진난만함 같은 것이 완전히 소실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손우경과 파오는 뒤에서 달라붙으며 구걸하는 꼬마아이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서 묵묵하게 자기 갈 길을 걸어갔다.

주머니를 뒤적이던 나를 손우경이 팔을 잡으며 저지했다.

“주지 마. 한번 구걸에 맛들이게 되면 계속 저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어.”

듣고 있던 파오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아이들 전부를 네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어설픈 동정심은 보이지 마.”

어쩔 수 없이 무시하면서 계속 걷고 있는데, 뒤에서 따라붙는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어찌 보면 좀비들의 행렬 같았다. 앞뒤로 모여드는 아이들 때문에 더는 진전하는 것에 무리가 따르자 오조가 자신의 지팡이를 번쩍 치켜들었다(망가졌던 머리뼈 부분은 아교풀로 이어 붙여 잘 갈무리해놓은 상태였다).

몸이 날아갈 듯한 세찬 바람이 불어닥쳐서 다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는 사이, 우리는 로브 후드를 푹 눌러쓰고서 재빨리 그 장소에서 빠져나왔다.

마을을 벗어나는 강이 흐르던 가교에 들어서자 더는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없었다. 다리 건너 가까운 곳에서 보이는 언덕 위에서 잠깐 쉬고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서쪽에 도달한 뒤로 한 번도 벗지 않았던 답답한 후드를 목 뒤로 넘기자 그나마 숨 쉬는 공기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언덕 위에 쉴 자리를 잡았지만 다들 별다른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지금 이 적막한 분위기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인물은 파오와 오조였다.

그때 무인도에서 우리가 먼저 사라진 다음 대체 뭔 일이 있었는지 둘 사이는 더욱 어색해져 있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척살부의 공격을 받고 난 직후에는 오전 중에 마하데바 호의 수리가 끝나서 바로 승선을 했고, 배에서는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었다.

사실 아까 갑판 위에서 파오와 오조는 아주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는 거였었다. 간만에 파오를 만나게 된 새끼 여우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파오는 다시 무시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는지 예전처럼 오조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는 마을을 등지고서 일렬로 언덕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 순서가 자그마치 오조, 나, 손우경, 파오의 순이었다.

그날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고 싶어도 그럼 우리가 놈들을 미행했다는 게 들통 나는 관계로 그냥 조용히 닥치고 있어야 했다. 남에게 장난치는 재미로 살아가는 손우경은 이런 분위기에 슬슬 지루함을 느꼈는지 파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하기야 매사 견원지간처럼 굴긴 해도 한번 죽이 맞아떨어지면 손발이 착착 맞는 두 사람이기도 했다. 때마침 새끼 여우가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형, 이제부턴 뭘 어쩔 생각이야.”

“관음존자의 말로는 그 에메랄드 태블릿의 오류가 발생한 곳이 아마도 룸버린과 로고스의 연합 본거지인 ‘티페레트’일 거랬어. 여기 애들 카발라에 나오는 무슨 세피로트의 나무인가 뭔가 하는 형상을 따다가 각 지점마다 총 열 개로 된 성을 지었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아마 티페레트가 그 중앙에 위치한 요새일 거야. 나도 적진 내부까진 깊숙하게 들어가본 적이 없어서 거기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진 아예 몰라. 정확한 건…… 길잡이 역할을 맡은 그림리퍼가 알고 있겠지.”

거기까지 말한 파오가 내게 물었다.

“현이 넌 그렇게 서쪽으로 가고 싶어하더니 아돌프한테서 뭐 달리 들은 말이라도 있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서쪽 지리에 대한 자세한 것들은 전부 길잡이역인 오조에게 일임한다는 말밖에는 딱히 들은 것이 없었다. 그러자 파오가 한심하단 목소리로 나를 저격했다.

“야, 너도 참 대책 없는 놈이다. 여기가 한두 달 걸려서 도착하는 곳도 아닌데 관음존자의 옆구리를 찔러서라도 이곳의 내부 지도 같은 거라도 받아 왔어야지……. 마냥 서쪽에 가야 한다고 허구한 날 노래를 부르더니!”

찔리는 구석은 많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일단 잡아떼고 봤다.

“그야 팀에서 각자 맡게 된 역할이 있는 거겠죠. 통솔자 역할, 길잡이 역할, 해결사 역할, 누구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가 그렇지만 밥만 축내는 식충이 역할이라든가 말입니다.”

“흠, 우리 팀의 통솔자는 경험상으로나 연륜상으로나 마땅히 나일 거고, 길잡이는 그림리퍼, 힘쓰는 일은 대부분 우경이가 하는데…… 여기서 남은 한 명은 진짜 하는 일 없이 열심히 밥만 먹나 부다.”

놈의 억지가 묘하게 납득이 되어서 더 짜증이 솟구쳤다. 아무런 반박도 없이 인상이나 팍 구기고 있자 파오가 이번엔 애꿎은 손우경까지 끌어들여서 나를 이차로 공격해댔다.

“우경이 넌 왜 저런 놈을 좋아하냐.”

손우경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로 손을 얹더니 대답했다.

“그러게.”

파오의 말은 귀담아 듣지 말라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오히려 장난치듯 그 얘기를 수긍한 것이 더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오조 앞에서는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잡는 주제에 나한테는 얼간이처럼 굴고 있는 파오 놈도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오는 표정을 굳히고서 입을 다물고 있던 내 쪽을 힐끗 보며 손우경에게 또 다른 동의를 구하려고 들었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현이 저 녀석, 관음존자하고 말투랑 성격이 되게 비슷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하긴 어려서부터 보고 배울 대상이 오로지 아돌프밖에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긴 한데, 가끔씩 같이 얘기하다 보면 그 불쾌한 얼굴이 연상돼서 쟤한테 더 시비를 걸고 싶어진단 말이지. 사람의 호의를 순수하게 호의로 못 받아들이고 매사 재수 없게 비꼬는 말투 하며 누가 무슨 얘길 할 때마다 경멸하듯이 아래로 내리까는 시선 같은 게 아주 그놈이랑 판박이라구!”

그건 너에게나 한정적으로 그런 거겠죠. 내가 얼마나 예의 바르고 상냥한 사람인데. 그러나 파오의 그 발언에 손우경은 처음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진짜 그러고 보니…….”

손우경의 묘해진 시선이 내 옆얼굴에 화살처럼 쿡쿡 박혀왔다.

“그래, 그 건방지고 재수 없는 표정이랑…… 고집 하나는 더럽게 세서 자기 의견은 남한테 절대 안 굽히는 거랑…… 그 밖에 또 뭐가 있었지…….”

지금 관음존자의 결점을 들추는 건지, 아님 내 험담을 하고 있는 건지 듣는 나조차도 헷갈렸다. 손우경이 더듬거리며 중얼거리는 말들에 정말 나까지도 설마 그런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남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비치고 있는 건가. 관음존자의 판박이처럼? 내 호수같이 잔잔했던 가슴에 돌을 던진 장본인인 파오가 이 틈을 노려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전생에 나하고 무슨 원수라도 졌는지 아무리 놈을 좋게 봐주려야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너, 우경이가 서쪽에 가지 말자고 했던 거 거절했다면서.”

손우경이 이제 그만하라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다.

“됐어. 그건 나도 포기한 부분이라서.”

하지만 파오가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네 말대로 현재 서쪽까지 왔는데 넌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지? 설마 이제까지처럼 우리가 알아서 다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냐? 나나 우경이가 목적지를 잡고 나면 그림리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서 너는 거기에 아무 군말 없이 편승하는 거? 관음존자의 허무맹랑한 헛소리에는 허점들이 많지만 넌 언제나 그 부분을 똑바로 보려고 들질 않아. 너한테 푹 빠져 있는 이 자식이야 니 말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주겠지만, 난 이성적인 사람이라서 그런지 하늘에 뜬 별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딸 수 없다는 걸 잘 알거든.”

“…….”

“실력도 변변찮은 놈이 공연히 입만 살아서 그 잘난 자존심이나 세우지.”

내가 느끼고 있는 나의 싫은 부분을 남에게서 직접적으로 확인받는 순간은 언제나 괴롭다.

“내적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남들에게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린다고.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감추려면 남들에 비해서 자존심이 센 척하는 게 그나마 타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근데 말야, 자존심이 센 거랑 자존감이 높은 건 차원이 다른 얘기야.”

파오는 혀 안에 비수를 숨겨두기라도 했나 보다. 듣고 있는 내내 심장이 너무 아팠다.

“척살부 놈들에게서 두 번씩이나 공격당하면서도 관음존자를 향한 너의 불타는 충성심 때문에라도 난 적어도 서쪽에 도착하는 즉시, 네 입에서 이제부터는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이 틀림없이 나올 줄 알았다. 그저 결과만 생각할 줄 알지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런 무책임한 놈인 줄은 몰랐으니까.”

할 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허나 여기서 변명을 해봤자 나만 더 우스운 꼴이 될 거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관음존자에게서 서쪽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들은 후로는 출발하는 날까지 제대로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나도 세부적인 추가 설명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첫날에 내게 전달했던 말이 전부였다.

에메랄드 태블릿, 룸버린과 로고스가 그걸 가지고서 비밀리에 작당을 하다가 아틀란티스의 병기인가 뭔가가 깨어났다, 어쩌면 세상이 다시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네가 서쪽으로 가서 그걸 막고 와라, 무능한 너 말고 유능한 세 명을 더 붙여줄 테니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태블릿의 판독본도 훔쳐 와.

그런 중대한 일을 맡게 된 것이 왜 하필 저인가요.

왜냐하면 네가 이 일의 적임자니까.

적임자…….

서쪽으로 가는 내내 나도 이상한 점을 전연 못 느끼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 의구심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 있었다.

그건 바로 관음존자의 명령이었다.

그의 명령 속에 실은 어떠한 계략들이 숨겨졌든지 내가 관음존자에게 불복종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돌프가 세상이라는 장기판 위에 펼친 게임에 기용된 하나의 장기말이었다. 어쩌면 상대편의 왕을 잡기 위해서 언젠간 가차 없이 버려지는 패가 될지도 모른다.

파오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만 아니었더라도 저들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관음존자가 나보고 적임자라고 한 건가.

파오의 얘기가 전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듣고 있기가 거북해져서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 더 앉아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누군가 나를 잡거나 하진 않았다.

답답해진 마음을 물에 흘려보내려고 강이 흐르는 다리 밑 언덕으로 내려갔다. 언덕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서 몸을 굴렀다. 낮은 둔덕이라 크게 다친 건 아니었으나 가뜩이나 되는 일도 없어 죽겠는데 더 비참한 심정이 들었다.

신발 한 짝이 벗겨져서 저 아래로 굴러가 있었지만 일어나서 줍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에서 고약한 썩은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넘어지는 바람에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다 말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사람들에게서 욕을 먹고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 한두 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난 왜 이럴 때마다 조금도 익숙해지질 않는 걸까. 항상 의도치 않은 일들로 사람들에게서 큰 오해를 사도 변명할 만한 자격이 내겐 주어지지 않았다.

뻔뻔한 인간. 제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부모님을 죽인 원수의 밑에서 구차하게 살아남았을 때에도 나는 스스로 아직은 어리다는 핑계 뒤에 숨어서 그 따가운 눈총들을 견뎌냈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 서서 그런 시선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했지만, 그것은 실로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실제로는 내 얘기를 하는 게 아님에도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얼마나 더러운 자식인지 욕하는 것 같아서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거기엔 언제나 내가 있을 자리가 없었다.

관음존자에게서 삼장법사의 칭호를 받고 벼락 승진을 했을 적에도 당연하게 종단의 어느 누구도 축하를 하거나 법사 대우에 마땅한 존경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졌음에도 역시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법사 칭호를 받았던 다음 날 저녁, 관음존자는 비공식적으로 나를 척살부의 대원으로 임명했다. 공덕이 낮은 내가 삼장법사가 된 것도 정말 눈물 나게 과분한 상황이었지만 하물며 내가 척살부에 들어가다니 그야말로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척살부 내부에서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고 했다. 관음존자는 대장인 다이치를 따로 불러서 날 제대로 가르쳐보라고 명령했지만, 다이치는 실력 앞에서 밑도 끝도 없이 냉정해지는 남자였다. 지난번 파오에 의해 제대로 된 실력 발휘 한 번 못해보고 불귀의 객이 되긴 했지만, 원래 척살부는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자가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단체가 아니었다.

한 달에 서너 차례씩 척살부 대원들만의 회의가 열렸지만, 명목상의 불편한 초대는 받았을지언정 거기에서도 내가 낄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회의 장소에 있는 어떤 이들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들거나 말 한 마디 걸어주지 않은 채 철저하게 무시하기가 일쑤였다.

파오는 항상 내가 애써 아닌 척 감추려 드는 내 추악한 맨얼굴 위의 가면을 벗겨내는 능력이 몹시 탁월했다. 그의 말대로 변변찮은 실력도 없는 내가 날이 선 말투로 자존심을 세우는 까닭은, 그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가장 견디기가 힘들었던 곳은,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이 네 명의 틀 안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멤버들 안에 껴 있어야 하는지 매순간순간 자괴감이 느껴지지 않는 때가 없었다. 노력만으로 따라잡거나 언젠가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애초에 타고나기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괴물들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따라잡는 것만도 숨이 벅찼는데, 놈들은 내가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도 감히 닿지 않는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 같은 게 왜 여기에 있어야 할까.

내가 의견 같은 걸 말해도 놈들이 날 믿고 따라주기나 할까.

그런 자기비하적인 생각들이 시시때때로 급습하며 나를 수도 없이 괴롭혔었다.

그때 엎드려 있던 내 머리를 누가 살며시 들어 올린다. 내게 그럴 만한 상대는 세상에 딱 한 사람뿐이었다. 은회색 눈동자가 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듯 살피더니 다른 쪽 손으로 아까 벗겨졌던 내 신발을 흔들었다. 놈이 내게 신발을 신겨주며 입을 열었다.

“다시 가서 좀 때려주고 올까?”

왠지 놈다운 화법이었다. 발목을 붙잡고 신발을 딱 들어맞게 끼워 넣은 손우경이 뒤에 이어질 말에 대해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이윽고 놈은 내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며 다시 말했다.

“네가 혼자서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거 싫어.”

내 표정이 또 어땠길래 너야말로 그런 얼굴을 하는 걸까. 녀석이 딱 잘라서 얘기한다.

“……내가 네 꺼인데 굳이 열등감 같은 거 느껴야 하나.”

“…….”

“설령 네가 수백 가지의 단점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 잘난 내가 너한테 목을 매고 있잖아. 그 하나의 장점으로는 부족한가?”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다.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손우경에게 단 한 번이라도 삐딱하지 않은 말을 해주고 싶은데 나는 그럴 수조차 없다.

“……너…… 진짜 재수 없어.”

손우경이 내 얼굴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내 위로인지 자기 자랑인지 모를 말이나 해댔지만, 이렇게 안아준 뒤 내 등을 토닥거려주는 것만으로도 푹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있었다.

“파오 사형 말마따나 밤하늘에 뜬 별을 따다주는 건 나도 솔직히 무리겠지만, 만약 네 소원이 세계 정복이라고 해도 내가 다 이뤄줄게. 근데 고작 서쪽에 가는 것쯤 뭐 그리 대수라고.”

정말 내가 원하기만 하면 당장 세계 정복이라도 해줄 것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였다. 나는 손우경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놈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런 너를, 내가 어떻게 해야 안 좋아할 수가 있을까…….

* * *

파오는 이제야 제 무덤을 팠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놈은 우선 과묵한 체질이 못 되었다. 파오의 말에 의하면 아랫놈을 열심히 갈구는 맛으로나 간신히 버틴다던 군부 생활을 오래 해서 그렇단다. 그런 인간이니 그간에 나를 놀리거나 구박하는 재미로 살아가던 와중에 좀 전의 일로 나와 냉랭해져버렸으니 마땅히 스트레스를 풀 구석이 사라진 것이다.

새끼 여우와 더 불편한 사이가 된 것만으로도 이미 자기 입지가 좁아져 있었는데 유일하게 숨통을 틔워주었던 손우경이 파오와는 더는 상종도 안 하며 현아, 현아 하며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파오는 불쌍하게 쭈그려 앉아 아부-게르다에서 기념품으로 사 온 잎담배를 뻐끔거리며 손우경을 원망 어린 눈초리로 보며 구시렁거렸다.

“이 사악한 배신자, 지 애인한테는 간 쓸개 다 빼줄 놈. 나만 나쁜 놈 만들어놓고.”

듣고 있던 내가 손우경에게 저게 뭔 말이냐고 물었더니 신경 쓸 필요 없다며 딱 잡아뗐다.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지만, 파오 놈이 꼴도 뵈기 싫은 관계로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까는 감정적으로 너무 격해져 있어서 반론할 여지가 없었는데, 뒤늦게 생각해보니 파오 저놈도 지난번 갑판 위의 활약상을 제외하고는 그간 나보다 더 무용지물인 인간이었다.

항구 마을에서 빠져나온 뒤 우리는 종일 무작정 걷기만 하다가 불탄 폐허의 잔해가 남아 있는 들판 위에서 이른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다. 파오는 내가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로 만드는 저녁을 얻어먹기가 치사하다고 여겨졌는지 멀찍이 떨어져 앉아 담배 연기로 도넛 모양이나 만들며 인생무상에 대하여 저 혼자 떠들어대고 있었다. 만두를 우적거리며 서비터들에게서 두피 관리를 받고 있던 오조가 킹킹대며 속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 자꾸 머리카락이 빠져.”

손우경이 키득 웃으며 대꾸했다.

“오조 너 털갈이 하나 봐.”

“털갈이?”

“원래 있던 털이 빠지고 새 털이 나는 거야. 어릴 땐 다 그래.”

“그런가. 새 털이 빨리 나야 하는데.”

오조가 머리에서 빠지는 자기 머리카락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손을 툭툭 털어버렸다. 동물도 아닌 사람이 털갈이를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었다. 탈모 증상은 오조의 신체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간다는 반증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룸버린과 로고스의 마법사들이 모두 모인다는 티페레트 요새로 어떻게 찾아갈 것인지에 대한 의논이 이어졌다. 오조가 나뭇가지를 이용해 땅 위에 복잡한 배열로 이루어진 지도를 신중히 그려나갔다. 무슨 고대의 마법 문양 같아 보이는 지도였다. 한참 뒤, 지도를 전부 완성한 새끼 여우는 총 열 개의 지점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성마다 다른 성으로 옮겨 갈 수 있는 순간 이동 포털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케테르, 호크마, 비나, 헤세드, 게부라, 티페레트, 네짜흐, 호드, 예소드, 말쿠트 순이야. 이 열 개의 세피라가 모여서 하나의 세피로트유대교 신비주의 종파인 카발라에 나오는 문양. 그 모양이 나무와 흡사하여 세피로트의 나무 혹은 생명의 나무라고도 불린다를 형성하고 있어.”

나는 열 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세피로트 지도를 내려다보면서 오조에게 물었다.

“설마 여길 전부 다 하나하나 통과해야만 최종 관문인 티페레트에 도착한다거나 하는 그런 정직하고 뻔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문득, 아주 오래전 내가 경전을 탐구하던 당시에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들춰보던 모험 활극 소설들이 떠올랐다. 뭐, 티뷸라 궁의 장서각엔 오로지 불교 경전들만 꽂혀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내가 딱히 한눈을 판 것도 아니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정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코피까지 쏟아가며 열심히 경전들을 읽었었다. 근데 마녀 베라 후속편은 왜 안 나오지, 걔네 기억의 샘물을 찾기는 하는 건가…….

어쨌거나 그런 유의 소설에서는 방대한 설정들과 함께 낯선 장소명이나 처음 듣는 인물명이 나온다는 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언젠간 그 장소에 가게 된다거나 아님 그 인물들과 만나게 될 거라는 작가의 공공연한 예언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낯선 장소의 명칭들이 뭔가 그럴듯하게 등장하는 경우엔, 그 장소들을 하나하나 지나치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제대로 흘러가질 않았다.

입때껏 우리가 수없이 겪어야 했던 많은 일들을 상기해보니 어쩐지 저 열 개의 세피라들을 전부 거쳐야만 개고생 끝에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허나 오조는 나의 근심 섞인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대답했다.

“티페레트 요새는 딱 중간에 위치한 세피라인데 대체 뭐하러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해?”

음?

“우리가 지금 세피로트 가장 끝자락에 있는 말쿠트 세피라 근처에 와 있긴 한데, 이 세피로트 나무의 중심을 이루는 티페레트 요새에 도달하려면 말쿠트 위에 있는 예소드나 호드, 네짜흐, 이 셋 중에서 하나의 관문만 더 거치면 돼.”

나는 괜한 걱정을 해서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야, 그럼 세피로트 지도는 왜 전부 다 그려놨어?”

“……오랜만에 그리다 보니 재밌어서. 마법사 생도 시절엔 세피로트의 나무를 순서대로 안 틀리게 그리는 시험도 봤었단 말야.”

손우경이 입을 열었다.

“근데 각 세피라들끼리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가 어느 곳이든 하나만 들쑤셔놔도 세피로트 전체에서 다 알게 될 텐데. 순간 이동 포털들을 타고서 놈들이 대거 몰려오기 시작하면 우리만으로는 일일이 상대하기가 벅차다구. 티페레트에 가려면 꼭 그 방법밖에는 없는 거야?”

오조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다는 듯 손우경을 바라봤다.

“그럼 어쩌지. 난 룸버린에서만 나고 자란 북쪽 출신이라서 여기 로고스의 자세한 지리 같은 건 잘 모르는데……. 관음존자도 서쪽 지리에 대해서 별말을 안 했던 게 아마 각 세피라마다 연결되어 있는 저 포털의 존재 여부를 알고 있어서 그랬던 거 아닌가……. 일단 서쪽에 도착해서 아무 포털이나 하나만 잡아타면 굳이 내가 길잡이 역을 안 했더라도 크게 상관없었을 테니까.”

이로써 모든 의문이 풀렸다. 날 무능한 놈처럼 취급했던 파오를 힐끔 노려봤지만 놈은 모른 체하며 여전히 줄담배나 피워대고 있었다. 새끼 여우가 지팡이를 탕탕 찍으며 혼자 고민하는 동안 손우경도 바닥에 그려진 세피로트의 지도를 바라보며 다른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오조가 먼저 손바닥을 팡 치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티페레트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더 있어!”

“……그게 뭔데?”

“우리 마법사들은 물리적인 나이로 약 팔십 세가 넘어가면 룸버린이든 로고스든지 교단에서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게 되어 있어. 이렇게라도 노후 보장을 안 해주면 워낙 사망률이 높은 직업이라서 중간에 관두는 이들이 많거든. 여하튼 팔십 세 이상부터는 대마도사라는 칭호도 받는데 매년 교단에서 이 대마도사의 품위 유지비와 함께 개인적으로 마법 연구를 할 수 있는 탑을 하나씩 부여해줘. 그거 말고도 크리스털 공로 훈장이랑 사후 그리모어 출판권이랑 최고급 오크 신목으로 된 지팡이랑 그리고 또…….”

오조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대마도사가 된 다음에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혜택들에 대해 열거하기 시작했다. 아마 어린 마음에 대마도사들이 폼 나게 사는 모습이 꽤나 부러웠던 모양인데 얘기가 원래 주제에서 한참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드는 게 비단 내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오조는 용의 발톱으로 제작되는 삼종 식기 세트 얘기까지 꺼냈고 결국 손우경이 나서서 새끼 여우의 입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티페레트에 직통으로 가는 방법이 뭐냐구.”

“아, 맞다, 우리 그거 얘기하던 중이었지. 이 대마도사들은 내가 방금 말한 것 이외에도 아주 특별한 혜택이 주어지는데, 바로 티페레트 요새와 직접적으로 통하는 포털 장치를 그 개인 소유의 탑 내부에다가 연결해주는 거야. 연로한 탓에 교단 본거지에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오고 가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그냥 본인 자택에서 편하게 출퇴근하라고 그러는 거래.”

“오조 네 얘기는 세피라의 게이트들 말고 대마도사의 탑들을 노려보자는 거야? 그게 어딨는 줄은 알아?”

새끼 여우가 순간 서슬처럼 퍼런 눈빛으로 돌변해서는 한쪽 입가를 들어 올렸다. 근데 쟤는 원래가 파란 눈이긴 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 명은 잘 알지. 그 노인네가 아직 안 죽었으면.”

오조가 저런 식으로 험한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은 괴이쩍게 느껴졌다. 얘기가 나온 전후 맥락으로 유추하건대 한 명이라고 범위를 압축시킨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깊은 것 같았다.

새끼 여우는 소매 안에서 자기 그리모어를 꺼내 들더니 눈알이 활활 타오를 듯한 기색으로 앞 페이지부터 마구 넘겨대며 뭔가를 찾았다.

“으으. 여기다가 내가 분명히 적어놨는데…….”

오조가 포털이 있는 대마도사의 거처가 어딘지 찾아보는 걸로 우선 티페레트에 가는 것은 무사히 일단락된 듯했다.

이제 저녁도 다 먹었겠다, 한숨 돌리고서 적당히 오늘 밤을 지낼 곳이 있나 찾아볼 차례였다. 먹은 걸 소화도 시킬 겸 발이 닿는 대로 걷고 있는데 벌써부터 뭔가 막막해진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위로는 모래바람이 휘날렸다. 여기에 도착한 후로 만 하루 동안 녹음을 본 적이 없었다. 서쪽의 땅은 대종말 전의 사건들로 인해 어디를 가나 황폐한 불모의 세상이었다.

잘 믿기진 않지만 대종말 이전까지의 세계에서는 이곳 서양이 우리 동양보다 대다수의 것들이 훨씬 더 우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동양의 어떤 나라들은 오래전부터 서양인들의 지배를 받거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그들의 것을 추종했다고 하던데, 이 미개하고 척박한 땅을 보고 있자니 그게 대체 말이나 될 법한 소린지 모르겠다.

문건상의 기록들에 의하면, 대종말의 원인은 비밀리에 진행되던 어떠한 실험의 실패로 인해 서쪽에서부터 공기를 통해서 감염이 되는 무서운 바이러스가 퍼져 나갔다는 설이 있었다. 그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사람의 몸 안에서 흐르는 피가 밖으로 나 있는 모든 구멍들을 통해 전부 터져 나가고, 그 후로는 몸의 겉과 안이 완전히 뒤바뀌는 끔찍한 모습의 좀비 괴물이 된다는 것 같았다. 유리 돔에서 우연히 보았던 그 영상 속 여자도 바이러스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서 화면이 피로 물든 채 정지되었었다.

당시엔 전 인류가 극도의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 각지에서는 서양권의 나라들을 대상으로 심상찮은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었다. 무차별적으로 퍼져 나간 바이러스의 감염 때문에 실수로 파생된 일이었는지, 혹은 누군가의 계획된 의도였는지 몰라도 연달아 다섯 번의 핵폭발 사건이 벌어졌다.

군사 기밀 기지 두 곳과 원자력 발전소 세 군데.

고도의 방사능과 바이러스의 전이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게 도달했던 다른 국가들은 서둘러 땅속에 대규모의 지하 돔들을 건설했고, 그중에선 이런저런 피해 규모가 적었던 동양인들이 가장 많이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사전에 철저한 검사를 통해서 바이러스 미감염자들만을 들여보낸 사만여 개의 벙커 안에서도 다시 그 바이러스가 일파만파로 퍼지는 바람에 간신히 구원받았던 인구의 절반가량이 또 사라져갔다.

돔 안에서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아이러니한 종교 행위가 성행했다. 그리고 언제 그 바이러스에 걸릴지 몰라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내적 평화를 추구하는 ‘불교’였다. 이윽고 삼라만상의 심오한 철학을 기반으로 자기수행에 매진하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고, 우리 환영제야단의 유구한 역사 역시 그 돔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옥 같은 돔 생활 끝에 인간들이 돔 뚜껑을 열고서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어언 반세기가 지났다. 바이러스의 시초였던 이곳에는 아직도 당시의 병마가 사납게 할퀴고 지나간 흉터가 땅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한때 버려졌던 땅에도 다시 사람들은 모여들었지만, 나는 여길 직접 와본 다음에야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관음존자는 구태여 무엇 때문에 이런 저주받은 땅을 침략하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조직해가며 무의미한 피를 흘리고 있는 건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정말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소환술사 오조와의 전투들을 제외하고는 종단 측에서 연승을 기록하던 나날이었다. 아니, 이건 애초에 상대조차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새끼 여우도 일전에 자신의 몸 상태를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그런 얘길 하지 않았던가.

‘내가 정말 궁금한 건 아돌프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혼자서도 서쪽의 연합군 같은 건 얼마든지 궤멸시킬 수 있었을 텐데 왜 가만히 내버려두고 조금씩 피를 말리려 드는 걸까 하는 거지.’

나 같은 범인은 감히 그 속내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허나 어차피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이제 머리 아픈 생각일랑 그만 집어치우고 저녁에 신세질 야영 장소를 찾는 쪽이 좀 더 건설적일 것이다.

새끼 여우가 자기 그리모어를 주먹으로 후려치면서 어서 내 약도를 뱉어내라고 진상을 부리고 있는 반면, 파오는 안 어울리게 짙은 남색으로 흐릿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홀로 고독을 씹고 있었다. 마침 손우경은 내 쪽을 향해 서 있었는데 여태 날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민망해졌다.

손우경에게 오늘 저녁에 잠은 어디에서 자는 게 좋겠는지 막 의견을 물으려던 차였다. 내 입에서 위험하다는 말이 채 튀어나오기도 전이었다. 손우경이 귀신같은 몸놀림으로 등 뒤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검은 물체를 거세게 가격했다. 간만에 손우경의 중심에서 순식간에 봉인 해제되어 어느새 놈의 한쪽 손에 들린 여의봉이 날카로운 칼 모양을 한 채 누군가의 왼쪽 가슴을 꿰뚫었다.

“쿠어억!”

손우경이 사람의 심장에 박혀 있는 여의봉을 절도 있는 동작으로 뽑아내자 얼굴을 검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던 자객 하나가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뒤에서 공격한다고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0.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다. 머리보다 몸의 동물적인 감각이 다가오는 살의를 먼저 감지한 것이다.

손우경이 자기 발아래에 엎어진 채로 죽어 있는 자객을 냉정하게 걷어차며 여의봉에 피가 묻어서 짜증 난다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얜 피만 보면 굉장히 흥분해서 나도 못 말린다고. 소박한 환영 인사는 이쯤 해두고 거기서 숨어 있지 말고 빨리 빨리 좀 튀어나와라, 니네.”

손우경이 지금 어딜 보면서 말하는지 통 모르겠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 대신 어디선가 수십 개의 화염체가 손우경을 향하여 유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허나 손우경의 주위로 네모난 투명 방패 같은 것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더니 비처럼 날아오는 화염체들을 그대로 팡팡 튕겨버렸다. 덕분에 녀석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집중 포화에도 전혀 끄떡하지 않고는 불꽃들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온전한 자기 모습으로 돌아온 여의봉이 놈의 손안에서 자유자재로 휙휙 휘둘러졌다. 허공으로 내려찍은 여의봉 아래로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은신 기술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마법사 하나가 뇌수가 터진 채로 비명횡사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아무리 공격을 해대도 손우경에게는 작은 상처 하나 입히질 못했다. 기문파공으로 공간을 차단하는 방어막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여의봉을 이용해 차례대로 열댓 명의 마법사들을 모두 때려죽인 손우경은 그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있던 나와 그 밖의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피가 잔뜩 묻은 여의봉을 혀끝으로 핥으며 잔인하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여의봉이 언제나 봉인되어 있는 장소가 떠올라서인지 그 장면을 바라보며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피를 보면 흥분하는 것은 비단 여의봉뿐만이 아닌 듯했다. 놈이 내게로 시선을 고정하며 마치 유혹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집요하게 훑어 내렸다.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심장이 두근거리며 숨이 찼다. 손우경의 손에 들린 여의봉이 이상한 진동 소리를 내며 주인과 공명하고 있었다.

그때 머리에서 누군가 기괴한 음성으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서 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깜짝 놀라서 얼른 주변을 둘러봤지만 손우경 외에 오조와 파오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괴상한 목소리는 잠시 후 더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이미 목덜미까지 오소소하게 돋아난 소름은 통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환청 때문에 계속해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양손으로 팔뚝을 쓸며 지천에 깔린 마법사들의 시체를 눈에 담았다.

이런 장소에서 불시의 습격을 받다니.

지금쯤 다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였다. 원래부터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긴 했으나 이제야 그 실체에 더 가까워졌다.

강시 마을에서 손우경의 언질을 통해 내가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던 놈들을 내 손으로 처리한 적도 두 번이나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관음존자도 종단 안에는 분명히 연합군들과 내통하는 배신자들이 있을 거라 말했었고, 이런 전시에 적진에다가 스파이 한둘쯤 심어놓는 거야 당연한 처사였다. 실제로 우리도 매년 서쪽으로 무수한 숫자의 염탐꾼과 간자를 보내어 도처에 매복시키거나 오조 같은 놈들을 포섭해서 아예 우리 편으로 만드는 한편 거기에서 직접 정보를 캐내는 일들을 자행했었다.

유리 돔 안에 갇혔을 때부터 그 불길한 징조를 느끼긴 했었다.

다만 배와 섬 안에서 척살부의 공격을 당한 것도 그와 같은 선상으로 여겨야 할지 조금 망설여졌다. 우리는 출발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쭉 감시당하는 중이었고, 그때마다 우연한 타이밍으로 치부하고서 그냥 넘어가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다른 때라면 모를까, 오늘만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마하데바 호는 척살부의 공격과 더불어서 바다의 풍랑을 만나 중간에 며칠간이나 무인도에 정박했기 때문에 본래 예정된 날짜보다 한참 뒤에나 로고스의 항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배에서 내린 직후 항구 마을에 이르기까지 계속 로브 후드를 눌러쓴 상태라 우리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마을을 넘어서 지금 이 장소에 도달하기까지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내가 맞닥뜨린 것이라고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은 드넓은 불모지뿐이었다.

설령 마법사들이 은신 마법을 썼다고 해도, 마법에 대해서 그다지 큰 지식이 없는 나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모습을 숨겨가며 뒤를 밟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확실치는 않아도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 네 명 중에 정말 ‘첩자’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놈들은 뒤쫓아 온 게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오조는 로고스 태생이 아니라 여기 지리를 잘 모른다고 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진 어디로 어떻게 가겠다고 정하지도 않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드넓은 평원에서 대체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막막해서 우왕좌왕 헤매고 있던 차에, 우리 중 누가 의도적으로 지금 위치를 알려주지 않고서야 암만 대단한 추적 기술을 가진 놈들이라도 전혀 들키지 않고 따라오기란 무리였다.

대체 누가…….

그때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파오를 돌아보며 놈의 행동을 주시했다. 원래부터가 흡연자이긴 했어도 오늘따라 아주 잠시라도 쉬었다 가는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가.

만약 담배 연기가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로 작용한다면, 이런 허허벌판에서는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파오가 눈을 돌리더니 다시 습관처럼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라이터 불에 번쩍이는 얼굴이 싸늘해져 있었다. 불빛과 함께 폐부로 깊게 들이마신 담배 한 모금을 속에서 음미하던 녀석이 고개를 치켜들어 연기를 내뱉었다.

새카매진 밤하늘 위로 뿌연 연기가 뿜어져 올랐다.

* * *

아무래도 새로 들어온 신입 비구니인 것 같은데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르겠다. 식당 구석에서 산채 비빔밥을 먹고 있다가 내 앞에 식판을 내려놓은 그녀 때문에 하마터면 체할 뻔했다. 근 십년이 넘는 세월을 혼자 먹는 밥에 익숙해져서 다른 이와 마주 보고 식사한다는 게 머쓱할 따름이었다.

“여기서 같이 먹어도 되죠?”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먹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게 질문을 던져댔다.

“그런데 왜 맨날 여기서 밥 혼자 먹어요?”

그건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니까.

티뷸라 궁에서 관음존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사적으로 내게 먼저 말을 건 것은 이 여자가 처음이었다. 다른 비구니들처럼 단정하게 자른 단발머리였지만 피부가 깨끗한 편에다가 눈이 크고 꽤 반반한 얼굴이었다.

“전 여기 들어온 지 이제 막 두 달째인데 그쪽이 맨날 같은 자리에서 혼자서 밥 먹는 게 자꾸 눈에 띄더라고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시간에 들르는데도 내가 그렇게나 눈에 띄었나 싶었다. 여자가 헤헤 웃으며 귀엽게 눈꼬리를 접었다.

“다른 선배 언니들에게 그쪽이 누구냐고 물어봐도 대답을 잘 안 해주려고 들어요. 그냥 웬만하면 가까이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하던데.”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타인과의 대화가 너무 오래간만이기도 했으나 애초에 여자에게는 아무런 면역이 없었다. 그냥 비빔밥을 입에 푹푹 쑤셔 넣고 있자니 그녀가 자기 이름과 나이를 알려준다.

“제 이름은 이나라고 해요.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됐는데 고향에서 유일하게 절 돌봐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비구니에 지원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여기 들어가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하길래.”

나와 비슷한 연배이거나 조금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두 살이나 어렸다. 약간 철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두 달밖에 안 된 신입 비구니라서 아직 나에 대한 소문을 못 들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조만간 이 관심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그라질 것이다.

그릇에 남은 비빔밥을 마저 긁어 먹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나가 식판을 들고 일어선 나를 붙잡으며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일어선 위치에서는 이나의 뒤통수만 보였지만 그녀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

“제가 수다스럽게 굴었다면 정말 미안해요……. 그치만 꼭 한 번쯤은 대화해보고 싶어서 제 딴에는 크게 용기를 낸 거라구요…….”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이나가 더 작아진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름이라도 좀 알려줘요.”

그녀에게 이름을 알려주면 다른 사람들에게 곧장 가서 내 얘기를 물어볼 것 같았다. 어쩔까 하다가 내 옷자락을 부여잡은 그녀의 손이 떨리는 걸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저는 현이라고 합니다. 올해로 스물세 살이 됐고 지금은 장서각에서 경전 공부를 하는 중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까 일단 이 손 좀 놓아주세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이나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붙잡고 있던 내 옷자락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나에게 묻는다.

“현 씨는 혹시 내일도 이 시간에 와서 식사하실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이때가 가장 사람이 없는 시간대니까요.”

점심시간이 지나고서 황금 사원에 기거하는 대부분의 이들이 식당 안을 빠져나가면 그제야 느긋하게 들어와 항상 오후 두시가 넘어서야 밥을 먹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서 그 시간이 조금씩 앞당겨지고 있었다. 별 의미는 없었다. 이나가 계속 내가 밥 먹는 시간대에 자신의 식사 시간을 맞추다 보니까 별로 티는 안 내도 서서히 힘들어하는 것이 조금씩 눈에 보였고, 그게 미안해져서였다.

딱히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내가 식당에 오는 시간을 기억해두었다가 자기도 느지막하게 밥을 먹으러 왔다. 그렇다고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녀 혼자서 일방적인 말을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예전에 살던 곳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부터, 비구니가 되고 나서 겪어야 했던 수난이나 선배 비구니들에 대한 험담 같은 것들.

이나는 나와는 다르게 밝고 명랑한 여자였다. 음침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렇습니까, 혹은 그렇군요 정도였다. 수다스러운 그녀가 손뼉을 짝 치며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현 씨가 관음존자님과 함께 걸어가는 걸 봤어요. 와, 진짜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같은 일개 비구니들은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데 언뜻 보니까 두 분 사이가 되게 가까워 보이더라고요. 관음존자님이랑 무슨 말씀을 나눈 거예요?”

어제라면…… 오랜만에 그 ‘방’에서 정신 훈련을 받던 날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를 관음존자가 마침 수정궁 밖으로 나서는 김에 내 숙소에다가 던져놓고 가긴 했었다. 그러니 무슨 말씀을 나눴겠어. 나약한 놈, 멍청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너 같은 버러지를 데리고 낭비한 내 시간이 아깝다 등등이었다.

그러나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보는 이나를 실망시키기가 저어됐다. 나로서는 종단에 들어와 처음 사귄 친구라고 봐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그냥, 경전 공부를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어릴 적에 제 부모님…… 께서 돌아가신 직후로 뒤를 봐주고 계신 분이니까요.”

쓰레기 같은 내용물에 비해서 포장 기술이 너무 지나쳤다.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현 씨도 저처럼 부모님이 안 계시는군요. 어릴 적에 두 분 다 돌아가셨으면 정말로 힘들었겠네요.”

“……예전 일이라 괜찮습니다.”

이나는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내 손을 꼭 잡더니 뺨을 붉히며 소곤거렸다.

“지금은 출가자 신분이 됐긴 하지만, 저는 현 씨가 정말 좋아요……. 이런 저라도 현 씨가 힘드실 때에는 꼭 의지해주셨으면 해요.”

느닷없는 고백에 당황했지만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체온은 따뜻했다. 이나를 본다고 가슴이 설레거나 하는 감정은 없었지만, 나에게도 인간적인 호의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옛날부터 그랬다. 선천적으로 허약한 체질 때문에 몹시 외로운 환경에서 자라왔고 그렇기에 나에게 조금만 관심을 보여줘도 금방 마음을 내주었다. 지금은 사이가 험악하게 벌어진 파오와도 그랬고 이나에게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금방 놔주었다.

“첫인상만 보고 굉장히 차가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 씨는 제가 무슨 말을 하던 얘기도 잘 들어주고 의외로 다정한 구석이 많아요.”

그러던 이나가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갸웃거렸다.

“근데요, 나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어요. 같은 숙소를 쓰는 언니들이 왜 현 씨 얘기만 꺼내려 들면 다들 입을 다무는지 모르겠어요. 남자 얘기를 전혀 안 하는 것도 아니면서…….”

“…….”

이나가 갓 절인 오이무침을 아삭 베어 먹으며 자긴 상관없다는 듯이 입을 삐쭉거렸다.

“뭐 경쟁자가 없다는 건 나한테는 무지하게 잘된 일이니까.”

“…….”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비구니로 들어오게 됐을 때 엄청 의기소침해 있다가, 식당에서 우연찮게 현 씨가 혼자 밥 먹는 걸 보고 그날 밤 가슴이 설레서 잠을 못 잤지 뭐예요.”

이나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숨기지 않고 뭐든지 솔직하게 털어놓는 성격이었다.

“아직 내가 어려서 그런가? 언니들이 더 크면 남자 보는 눈이 바뀐다고는 하던데 나는 너무 사내답게 생기고 우락부락한 타입보다는 현 씨처럼 선이 곱고 아름다운 얼굴이 더 좋더라구요.”

내가 조금 의아스레 되물었다.

“아름…… 다워요? 남자인 제가요?”

허약하고 비리비리해 보이는 걸 이나가 돌려서 말하는 거겠지 싶었다. 그렇지만 이나는 나보고 겸손한 척하지 말라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장서각에서 경전만 읽느라고 평소에 거울도 안 보고 살아요? 저도 고향에서는 마을에서 예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고요. 비구니로 합격했던 날 제 뒤에서 남몰래 슬퍼하던 마을 청년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그런 제가 현 씨를 처음 봤던 날에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아세요? 와, 남자가 뭐 저리 곱게 생겼나 싶기도 하고, 내심 혼자 밥 먹고 있는 게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기도 했어요.”

“…….”

“쳐다보기만 해도 심장 떨려서 누가 함부로 접근이나 하겠어요? 나나 되니까 이렇게 말도 걸고 같이 밥도 먹고 하는 거지.”

눈에 콩깍지가 쓰인 여자들은 말에 과장이 심한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밥도 안 먹고 날 보며 배시시 웃고 있는 이나의 표정에는 왠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그 어떤 것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얘기했다.

“이나 씨도 예뻐요.”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익어갔다.

관음존자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무실로 가던 도중에 복도에서 이나와 마주쳤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만면에 화색을 드러내며 반갑게 뛰어왔다.

“현 씨, 이거, 이거!”

근처로 다가온 그녀가 대뜸 내 손에 작은 봉지를 들려주었다. 안에는 색색의 무지개떡과 약과 등의 주전부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같은 숙소의 비구니가 오늘 생일이라서 일 년 만에 가족들이 방문하여 푸짐한 생일상을 차려주고 갔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같이 축하해주다가 상에 오른 음식들이 너무 맛있어서 내게 챙겨주려고 일부 가져왔다고 말했다.

“절 음식만 먹다가 오랜만에 먹으니까 완전 맛있어요! 공부하다가 힘들면 이거 먹으면서 힘내요!”

그녀는 급한 볼일이 있는지 나한테 봉지만 전해주고 손을 흔들며 복도 저편으로 뛰어가버렸다. 성의는 고마웠지만, 지금은 관음존자에게 불려가는 길이라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으면 분명…….

봉지를 들고 고민하다가 이 자리에 서서 다 먹고 가려고 결심한 순간,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피처럼 새빨간 눈이 나와 손에 들린 봉투를 번갈아 훑어보며 흐음 소리를 냈다. 비록 그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불안해져갔다. 관음존자는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내 몸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내 팔에 닿는 순간, 심리적인 이유에선지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찌릿한 기운이 전해져왔다.

“내가 너를 부른 지가 언젠데 여기에 서서 뭘 하고 있지?”

이나를 못 본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는데. 설마 못 본 척해주는 건가. 그 짧은 찰나에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관음존자는 방에 들어가서도 이나는 물론이거니와 내 손에 들린 봉지에 대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돌프는 자기 할 얘기가 끝나자 나보고 이제 그만 나가보라며 상당히 바쁜 기색을 보였다.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면서도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집무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데 그가 등 뒤에서 넌지시 입을 열었다.

“……현아, 여기서 보니 네가 요즘 부쩍 마른 것 같은데.”

심장이 터질 듯이 조마조마했다.

“넌 가뜩이나 허약한 몸인데 풀 쪼가리만 나오는 식당 밥만으로 무슨 영양 보충이 될 리가 있겠어.”

지금 그의 입에서 식당 얘기가 나온 건 단순한 우연일 거다.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것 외에 밖에서 따로 만난 건 오늘 우연하게 마주친 게 다인데, 중요한 용무가 아니고서는 수정궁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 관음존자가 이나에 대해서 결코 알 리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을 다 하는군. 며칠 후에 종단의 주요 관계자들과 아부 게르다의 대부호들이 모이는 비공식 만찬이 열릴 거다. 그날은 네 녀석도 내 수행비서 겸 참석해서 여흥을 돋우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도록 해.”

문을 열고 나오는데 잔뜩 긴장했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결국 닫힌 문 앞에서 주르륵 미끄러지고 말았다.

오늘은 종단 내에서도 가장 급이 높은 고위 승려들과 관음존자에게 매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이득을 안겨다주는 아부-게르다의 거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만찬을 즐기는 날이었다. 말쑥하고 소박한 차림을 한 종단 큰스님들과 모피와 보석반지를 손가락 마디마다 낀 채 사치스러움을 풍기는 아부-게르다 인들의 극명한 대조가 눈에 확 도드라졌다. 어찌 보면 지금의 세상을 손끝만으로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단한 거물들의 모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관음존자가 있었다.

관음존자가 굳이 나를 이 자리에 데려온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말은 수행비서를 겸해 따라오라고 했지만, 이곳에서 내가 관음존자를 도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그도 명백하게 아는 일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나를 흘끗거리는 시선들과 함께 그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격식에 맞게 차려입은 옷들이 무척이나 답답하기만 했다.

온갖 고급 요리들로 점철된 진수성찬이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나오니 연회의 분위기가 한껏 더 무르익어갔다. 비록 부처를 모시는 몸이긴 하나 본래가 서쪽 출신인 아돌프의 취향대로 평상시에는 거의 먹어보지 못한 화려한 양식 코스들이 이어졌다.

모두가 웃는 낯으로 즐겁게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그 저변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고수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의중을 떠보려 드는 치열한 두뇌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때였다. 만찬이 열리고 있던 티뷸라 궁의 연회장 안이 별안간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내 부모님과도 인연이 있던 사람들과 부딪치기 싫어서 구석에 처박혀 꾸역꾸역 값비싼 음식이나 먹고 있던 나 역시도 잔뜩 시끄러워진 쪽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연회장의 양쪽 문이 벌컥 열리고 뚱뚱한 두 명의 요리사가 반원형의 뚜껑으로 덮여 있는 커다란 돔 플레이트 접시를 낑낑거리며 들고 들어왔다.

이윽고 관음존자가 나를 그쪽으로 부르더니 상당히 간드러진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오늘의 메인디시를 나보고 직접 커팅한 뒤에 여기 계신 손님들께 한 조각씩 나눠드리라고 명령했다. 어딘지 억지스럽게 꾸며진 듯한 상황이 상당히 기묘하게 느껴지며 속까지 마구 울렁거렸다. 뭔가가 삐끗하게 어긋나는 느낌인데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가 파악이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요리사들에게서 톱날로 된 긴 칼을 넘겨받고 회장 안에 모인 많은 이들의 흥미진진한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중이었다. 누군가 삑 휘파람을 불며 어서 자신에게 메인디시를 나눠달라고 소리쳤다. 더는 지체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음식이길래 이리도 큰 접시에 담긴 건지 나도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이 궁금했다. 요리사 두 명이 스테인리스로 된 뚜껑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갓 구운 고기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

순간 다리가 휘청거리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들고 있던 칼을 손에서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버텨보았지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끝이 결국엔 일을 내고 말았다. 칼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무척이나 현실감 없이 들려왔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는데 안에 든 것을 보고 흥분한 사람들의 고함이 점점 높아져간다.

어, 어떻게…….

나를 밀치며 그들이 달려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상이 아니야. 다들 미쳤다구…….

손아귀 힘에 의해 잔인하게 뜯겨나가는 살점을 보다 못해 입을 틀어막으며 연회장 밖으로 얼른 뛰쳐나갔다. 복도를 빠져 나가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벽에 양손을 대고서 있는 대로 토하고 말았다.

분노와 좌절감으로 뒤섞인,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이 날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몇 년간 강제로 억눌려 있었던 눈물이 쉴 새 없이 눈가에서 흘러내렸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서 소리 내어 흐느꼈다. 접시 안에 담겨 있던 것을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보려고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안에는 어떤 여자가 몸이 벗겨진 채로 붉게 익어 있었다.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끔 얼굴이 사정없이 뭉개진 채로 목까지 반대로 꺾여 있었지만, 그녀의 정체는…….

항상 밝은 목소리로 나를 현 씨라고 부르던 이나의 얼굴이 잘 떠오르질 않는다. 하기야 그녀를 다시 떠올릴 만한 자격도 없는 나였다. 이제는 누구를 원망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결과를 아주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관음존자가 내 곁에 머무르는 그 어떤 것이든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한번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어렸을 때 이후로는 이렇게 소리 내어 운 적이 드물었다.

혼자서 너무 외롭고 사람 냄새가 그리웠다. 그래서 그녀가 나에게 나눠준 사람의 따뜻한 온기에 취해서 현실을 외면한 채 아둔하게 굴었던 나 자신에게 강한 부아가 치밀었다. 조금만 더. 아주 잠시만이면 된다고 생각하며 다가오는 이나를 냉정하게 잘라내질 못했다. 그 결과는 후회로 다시 돌이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문 안에서는 아직도 광란의 인육 파티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눈이 벌게져서 사람 고기를 향해 달려들던 그 미친 무리들을 생각하니 다시 역한 오심이 밀려들었다. 고작 이런 통곡만으로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눈물과 함께 내 안에 남겨져 있던 크고 작은 미련들까지도 전부 다 씻겨 나갔다. 내심 언젠가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당치도 않은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합리한 일들 역시 나에게 주어진 잔인한 운명이자, 혼자서 온전하게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녀의 무의미한 죽음 앞에서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내 칼날 박힌 마음 따위 주지 않겠노라 이를 악물고 맹세했다. 그야 어디든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이라면 마주 선 상대의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점점 다가올수록, 내 심장에서 튀어나온 그 보이지 않는 칼끝이 머지않아 상대방을 깊숙하게 찔러버리고 말 테니까.

그러니 나는 이것이 유약하고 어리석은 내가 흘리게 될 마지막 눈물이기를 바랐다…….

이러다 조만간 신경 쇠약증에라도 걸릴 것 같았다.

눈을 뜬 다음에도 꿈의 여운이 현실을 침범하고 있었다. 섬에서 척살부의 환각 공격을 당했을 때에도 죽은 이나의 악령을 봤지만 내가 꾸는 꿈들은 한층 더 현실에 가까웠다.

시간이 벌써 이년이나 지났었나.

포타라카에 있을 때에는 그녀의 죽음을 거의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관음존자는 그날 이후로도 이나에 대한 추궁을 하지 않았지만 그 무언의 눈빛이 더 나를 압박했다.

침낭 옆자리에 손우경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아직 해도 안 뜬 푸르스름한 새벽인데 또 어딜 갔을까. 꿈자리까지 뒤숭숭한데다 놈이 눈에서 보이질 않으니 좀처럼 안심이 되질 않았다.

침낭에서 빠져나와 머리맡에 벗어둔 코트를 걸쳐 입고서 녀석을 찾아 나섰다. 당연히 별일이야 없겠지만 꿈 때문에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드넓은 평원의 저 끝자락에서 아마도 손우경이라고 추측되는 어느 사람의 인영을 발견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놈은 붉은 해가 하늘 가득 충만하게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을 충전하기 위한 운기조식 중이었다. 어제 불시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인지 언제 또 그런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서 여의봉마저 봉인하지 않고서 오른편에 놓아둔 채였다.

아무리 손우경이라고 할지언정 놈도 저렇게 재충전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상에 방해가 될까 봐 필요 이상으로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의 올곧게 뻗은 등을 보니 새삼 어제 있었던 일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자객이 손우경의 등 뒤로 바짝 날아올랐을 때, 순간 내 머리는 이미 끝났구나 하고 섣부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객이 먼저 그 자리에서 즉사해버렸다. 손우경의 반사 신경과 민첩함은 정말이지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녀석은 항상 그런 식으로 말했었다. 강시들의 마을에서 놈의 등 뒤를 따라붙다가 들켰을 때에도.

‘난 뒤에서든 어디서든 누가 나 노리는 건 다 알아.’

유리 돔 안에서 처음 기갑 괴물들이 나타났을 때에도, 손우경은 당시 코앞에 있던 나를 번쩍 안아 들고서 자기 등 뒤로 뻗어오던 촉수를 피해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었다. 우릴 미행하고 있는 녀석들에 대해 두 번씩이나 언질을 줬던 것도 다 저 녀석이었다.

그때 갑자기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제복 안쪽에서 축소시켜놨던 금강저를 꺼내어 원래의 크기로 되돌려놓았다. 관음존자가 내게 직접 하사한 물건이니 이 정도면 조건적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왼손으로 금강저를 쥐고서 천천히 놈의 뒤로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녀석과의 거리가 좁혀져갈 때마다 금강저를 쥔 손에서 극심한 경련이 일었다. 그렇게 손우경과 불과 약 일 미터도 안 되는 좁은 간격에 들어섰을 때.

내 목으로 첨예한 칼로 변한 여의봉이 겨누어졌다. 단 한 발자국만 더 움직였어도 저것이 순간적으로 내 목을 자를 뻔했다. 손우경이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바로 여의봉을 거두었지만 이미 목덜미가 쓰라려왔다. 아무래도 칼끝에 살갗이 얕게 베여나간 모양이었다. 녀석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 멱살까지 쥐고 윽박질렀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내 등 뒤로 살기를 머금고서 걸어오다니, 지금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내가…… 내가 하마터면 널 죽일 뻔했잖아!”

이런저런 일들로 싸운 적은 많았지만, 손우경이 이렇게까지 불같이 화를 내며 한 대 칠 기색으로 내 멱살을 잡았던 적은 없었다. 나는 멱살을 잡힌 채로 순순하게 내 잘못을 인정했다.

“미안해, 우경아. 내가 잠깐 어떻게 됐었나 봐.”

말끄러미 놈을 올려다보며 화가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사과하자 손우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너 진짜 왜 그래? 하더니 어디 아프냐면서 방금 전까지 화내던 것을 접고 내 걱정을 시작했다.

“……괜찮다니까. 그냥 어제 일이 생각나서 너한테 장난쳐본 거야.”

“장난? 장난칠 게 따로 있지, 명상 중에 뒤에서 살기를 띠면서 걸어오는 놈이 너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얼굴 확인이 아주 조금만 늦었어도 실수로 네 목을 따버렸을 거라구!”

또 심하게 화를 내서 어쩔 수 없이 놈을 껴안고서 달래야 했다. 기운 없는 동작으로 놈에게 쏙 안겨서 다시 미안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나에게 오만 짓을 다 하면서도 놈은 항상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하는 신체 접촉엔 약했었다.

게다가 정말로 많이 놀랐었던 것 같다. 얼굴을 기댄 녀석의 가슴에서 귓가를 통해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손우경은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금은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장난이라도 다신 이런 짓 하지 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얼른 알았다고 대답하고서 말없이 그대로 푹 안겨 있었다. 놈의 포근한 체온을 느끼자마자 잠시 내 결심이 무너질 뻔했지만, 나는 머리에서 이나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괜찮아. 지금은 너하고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 나는 그거면 됐어…….

* * *

오조가 그리모어 안에다 자세한 위치를 기록해두었다는 그 대마도사의 탑은, 알고 보니 새끼 여우에게 예전에 소환과 마법 기술을 전수해주었던 자기 스승의 거처였다. 교단의 소모품으로서 실컷 농락당했던 본인의 인생을 떠올려보면 당연히 좋은 기억이야 없겠지만, 어째 오랜만에 스승을 만나러 가는 제자의 태도치고는 불량하기가 그지없었다.

그야 이것은 오조가 서쪽에 와서 벌이게 될 통쾌한 복수극의 전초전이기 때문이었다. 새끼 여우의 스승이라는 그 대마도사는 글릭데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글릭데르의 탑은 로고스에 위치한 여러 세피라들 중 예소드와 네짜흐 사이에 있다고 했다. 그래봤자 예소드와 네짜흐가 어디쯤에 달려 있는 성인지도 모르겠다.

오조가 바람의 정령인 실프에게 글릭데르의 탑이 있는 곳을 알려주며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거기까지의 모든 일처리를 끝마친 새끼 여우는 졸려서 심통이 덕지덕지 묻어난 얼굴로 땅 위에다가 소환진을 그렸다. 뭉글이의 죽음 후로는 무슨 생각에선지 다른 소환수들을 부르지 않던 오조였지만 암만 해도 쏟아지는 잠 앞에서는 장사가 없나 보다.

완성된 소환진을 두고서 오조가 그 앞에서 주문을 외우자 별안간 찬란한 빛이 뿜어 나오더니 딱 예전의 뭉글이만 한 크기의 멍청하게 생긴 소환수 놈이 튀어나왔다.

생긴 것도 그렇고 몸통마저도 모두 거북이를 닮은 놈이었다.

오조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잠시 그놈을 바라보며 눈썹을 그러모았다. 이윽고 그것의 등 위로 올라가서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이내 잔뜩 실망한 얼굴로 소환수를 다시 이계로 돌려보냈다.

다른 소환진들을 몇 개나 더 그려봤지만 그다지 만족할 만한 소환수(침대)가 나오질 않는 모양이다. 눈알을 굴리며 계속 고심하던 새끼 여우는 최후의 강구책을 내놓게 되었다.

놈이 손우경을 슬금슬금 넘겨다보며 특별한 제안을 했다.

“우경아, 너 혹시 와이번외관상 드래곤처럼 생겼지만 드래곤보다 훨씬 크기가 작고 지능도 더 떨어지는 비룡종이다. 용에 비해서 한 단계 낮은 급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날개를 제외한 다리가 넷 달리면 드래곤이고, 둘이면 와이번으로 구분한다. 또한 판타지 세계에서 드래곤은 폴리모프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동료가 되거나 혹은 조언을 얻는 고차원적인 존재로 묘사되지만, 와이번은 오크나 오우거 등의 하급 몬스터들처럼 주로 초반부에 등장했다가 열심히 맞아 죽는 역할 등을 주로 맡고 있다 조종 안 해볼래?”

손우경이 그게 뭔 소리냐는 얼굴로 오조에게 되물었다.

“와이번?”

“응, 하늘을 날아다니는 큰 새 같은 거야. 와이번쯤은 되어야 우리 네 명을 등 위에 태울 수 있을 거 같아서. 실프가 그러길 글릭데르의 탑까지 가려면 적어도 열흘 이상은 계속 걸어야 한다는데 그럴 거면 하늘을 날아서 가는 게 더 빠를 거 같아서.”

“…….”

“난 자야 하니까 하루 종일 조종은 못할 거구, 와이번들 성격이 사나운 편이긴 한데 그래도 니 말이라면 좀 듣지 않을까 해서.”

손우경이 그렇게 재밌어 보이는 걸 거절할 위인이 아닌지라 협상은 즉각적으로 체결되었다. 오조가 지팡이를 질질 끌며 땅 위에 아까의 소환진들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원을 그린다. 마치 컴퍼스로 그린 듯이 한 치의 작은 삐뚤거림도 없는 원형의 틀이 만들어졌다. 저번에 오조가 세피로트의 지도를 그렸을 때에도 어렴풋이 느낀 거지만 소환술사가 되려면 그 필수 덕목 중 하나는 바로 그림 실력 같았다.

새끼 여우가 원 안에다가 소환에 필요한 문양과 기호들을 꽉꽉 채워 넣은 뒤 다시 주문을 외우고는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한 번 툭 내려쳤다. 소환진의 중간 부분에서 울퉁불퉁한 도마뱀의 얼굴이 불쑥 미끄러져 나오더니, 이내 힘차게 두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용?

아니, 용이라고 하기엔 크기가 좀 작은 편인데, 그래도 생긴 게 진짜 용처럼 생겼다. 그것도 되다 만 용.

와이번이 오조에게 갸아아악! 거리며 성깔을 부리고 있었다. 오조가 심드렁한 눈으로 지팡이 끝을 겨누며 파지직거리는 전기를 쏘아 보내자 와이번이 바로 하늘에서 툭 떨어지더니 두 다리로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아픈 시늉을 했다. 전기를 얻어맞고 풀이 죽은 와이번의 등 위로 오조가 부웅 날아올라 안착하곤 손우경에게도 어서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손우경이 나에게 시범 비행 좀 해보고서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한 뒤, 가볍게 와이번 위로 올라탔다. 오조와 손우경이 귀청이 떨어지게 포악한 소리를 지르는 와이번을 데리고서 바닥에서 조금씩 떠올랐다. 와이번은 등을 흔들어대며 자기 위에 타고 있는 그 둘을 떨어트려보려고 했으나 새끼 여우의 두 번째 전기 공격이 가해졌다.

결국 높은 하늘을 향해 비행하기 시작한 와이번을 목 빼고 올려다보다가 나는 어제부터 대화가 끊긴 파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조와 손우경이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비운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에겐 따로 확인해야 할 상황이 있었다.

어제부터 극도로 조용해진 파오도 나와 할 얘기가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늘에서 와이번이 점이 되어 사라지자 그쪽에서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 파오는 굳어진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저와 같은 생각이시라니 그것 참 다행이군요. 저 역시 당신에게 꼭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확인?”

한쪽 눈두덩을 실룩이던 녀석이 같잖다는 듯이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뭐 좋으실 대로.”

와이번을 타고 날아간 손우경과 오조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가늠이 안 되는 상황이라 파오의 심중을 우회적으로 떠보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다. 하긴 내가 떠본다고 걸려들 놈도 아니고. 저 능구렁이를 어쩔까 고민하다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파오에게 묻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말싸움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정공법을 쓸 수밖에.

“어젯밤에 제 나름대로 생각해봤는데.”

“…….”

“그동안 당신은 여기 서쪽으로 오는 것을 누구보다도 반대했었죠. 돌이켜보면 여행하는 내내 마하데바 호의 갑판 위에서 딱 한 번 당신의 실력을 구경하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에 있어서 임무에 대한 의지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막간의 기회가 생길 적마다 틈틈이 저를 회유하려 들기도 했고요. 그쪽이 계속 진짜 정체가 의심스럽다며 저와의 관계를 이간질시키려고 들던 손우경은 적어도 당신에 비해서는 매순간 진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더 가관인 건 우리가 유리 돔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을 때에도 당신은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어딘지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 제 말이 하나라도 틀립니까?”

파오가 예의 그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자긴 조금도 틀린 게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구는 낯짝 탓에 속에서 열불이 치밀었다. 하지만 놈과의 심리전에서는 절대로 먼저 화를 내거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나는 애써 평온함을 가장하며 연이어 얘기했다.

“전 이때까진 그걸 전부 파오 당신의 책임감 없고 비겁한 성격 때문이라고만 여겼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이 저로 하여금 그간의 의심을 확신으로 뒤바꾸는 데 크게 일조하더군요.”

“…….”

“추적자들에게 계속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던 게 파오 당신입니까?”

“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나는 그의 가죽 재킷을 손으로 들춰내서는 안에 들어 있던 담배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당신도 눈이 있다면 어제 그 녀석들과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겁니다. 그 어떤 것도 이정표가 될 수 없는 황량한 평원이었습니다. 어제 과할 정도로 입에 온종일 담배를 물고 계시던걸요. 원래가 흡연자라는 건 저도 압니다. 그러니 핑계 댈 생각 마십시오.”

그러자 파오가 분통 터지는 얼굴로 내게 화를 냈다.

“야, 그건 니들이 어제부터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걸었잖아! 그럼 담배라도 피우고 있어야지, 그 분위기에서 나 혼자 가만히 서 있어야 되냐?”

“그거야말로 자업자득입니다. 그리고 이젠 어떤 말을 해도 안 속습니다.”

“너야말로 속고 있는 거라구! 니가 지금 눈에 뭐가 씌어서 제대로 상황 파악을 못하나 본데, 손우경 그 이중인격 자식이 나랑 둘이 있으면 얼마나…….”

내가 말을 가로막았다.

“손우경이 저에게 이중적인 작태를 보이든 말든 주된 논점을 흐리지 마십시오.”

파오가 답답해 죽겠다는 눈으로 나를 흘겨보다가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 답답아, 내가 그만큼이나 눈치를 줬으면 좀 사람의 의도가 뭔지 파악이라도 해봐라!”

나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연기를 한다기엔 그의 태도가 정말로 속 터져 죽기 직전인 사람 같았다. 그렇지만 정신 바짝 차리자. 더는 놈의 감언이설에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었다. 파오가 뭐라고 지껄이든 간에 어제의 정황만으로도 의심할 만한 증거는 충분했다.

그 마법사 놈들은 우리 네 명 중 오직 손우경에게만 공격을 가했다. 만약 기습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손우경 한 명보다는 나나 오조, 파오에게도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퍼붓는 편이 우리의 전열을 흩뜨려놓기가 쉬웠을 텐데도.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모른 척 넘어가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당신이 이번 임무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라는 판단이 설 시엔 제 임의로 당신을 제명……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녀석이 손가락으로 내 한쪽 뺨을 푹 찌르고 있었다. 파오는 어이없어하는 내게 생긋 웃으며 웬 시답잖은 개소리를 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거지.”

“…….”

“확실히 너는 못 먹는 감이지. 아니, 독 사과인가.”

“…….”

“겉보기에는 반질반질 탐스러워 보이는데 한입 베어 물었다간 황천길을 걷게 된다구.”

말의 뉘앙스가 상당히 거북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 느낌은 뭐지. 아니, 이건 아니야. 더 상대했다간 속에 감춰져 있는 고약한 것이 튀어나와 나를 더 당혹스럽게 만들 것 같은 더러운 예감이 들었다.

어느새 바짝 붙어버린 몸을 물리고 싶었으나 날 내려다보는 녀석의 눈빛만으로도 온몸이 쇠사슬에 묶인 양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다시 본 게 몇 년 만이었지? 삼년 정도 됐었나. 내가 종단을 떠나던 마지막 날 저녁에 네가 찾아와 그랬었지. 솔직히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 내가 너한테 했던 짓들도 지독했고, 날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얘기라면 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 지난 일일 뿐입니다.”

하지만 파오는 자신이 한번 꺼내든 얘기를 그만둘 마음이 없어 보였다.

“네 절박한 표정까지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는걸. 나한테 떠나지 말아달라고 했었잖아, 네가 네 입으로.”

나는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책임을 회피했다.

“너무 오래된…… 얘기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었다. 내 입으로 했던 말인데.

그때는 포타라카의 많은 사람들이 아돌프의 악랄한 독재 행위에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가던 때였다. 그럼에도 관음존자는 자신을 24시간 동안 완벽하게 보호해줄 수정궁을 건축해야 할 정도로 매일같이 반란의 불씨가 끊이질 않았었다. 하지만 날고 긴다던 종단의 고수들은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혹은 다섯 개의 검 수용소로 보내졌다.

다들 마음속으로 이 어지러운 상황을 올바르게 바로잡아줄 영웅의 등장을 꿈꿨었고, 그 아돌프와 대적할 만한 맞수로 내심 파오를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믿음직스럽고 강인한 이미지였던 파오는 모두가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도 그 약해지는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로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런 그에게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꼭 그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나는 진심으로 그가 종단을 떠나지 않기를 바랐었다. 표면적인 사이가 험악하긴 했지만 종단 내에서 내가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파오뿐이었다. 그가 천봉대원수직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마치 세상으로부터 다시 버림받는 기분이었다. 티뷸라 궁 안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너무 삐쩍 말라서 여자 허리 같다는 둥 농담을 빙자한 성희롱을 하거나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소리나 해댔지만, 그렇게라도 내 안부를 물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파오밖에 없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그 차가운 시선들 속에 또 나 혼자 남겨지기가 두려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내게 한없이 상냥하게 굴던 이웃 형은 이제 없었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그의 방을 찾아갔고, 결국엔 차갑게 거절당했다.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녀석이 내게 저렇게까지 냉정하게 구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그저 나 혼자서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떠나지 말아달라고. 그래, 내가 내 입으로 했던 말이다.

웃통을 벗고서 바닥에 앉아 짐을 싸던 파오가 황당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던 걸 나 역시 잊지 못한다. 일분일초가 그렇게 긴지 미처 몰랐었다.

한참 동안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그는 나더러 어린 시절 소꿉놀이에서 혹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냐며 비웃었다. 창피했다. 몹시 창피하고 내 자신이 구질구질하게 여겨져서 어딘가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다른 말 한 마디 더 해보지 못하고 나는 도망치듯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날부터 나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파오가 종단을 떠난 후로는 의식적으로라도 그의 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날 저녁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한번 마음속에 깊게 파인 상처는 좀처럼 쉽게 아물지를 못하고, 내가 나약해지려는 순간들마다 절묘하게 나타나서는 자신의 치유되지 못한 아픔을 호소하려 들었다.

얼굴을 보지 못했던 시간 동안 파오의 대한 나의 증오심은 점차 깊어져갔고, 몇 년 후 서쪽으로의 여정 길에 그와 원치 않게 다시 재회하게 됐을 때 내 안에 차곡차곡 누적되어 있던 원망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크기였다. 그를 대하는 태도가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나로서도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나에게 그때의 얘기를 꺼내려 드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내 약점을 사용해서 날 뒤흔들려는 불순한 목적으로밖에는 안 보였다.

파오는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다가 이글이글해진 내 눈빛에 담긴 의중을 전부 받아낼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너. 기억 안 난다더니 그런 것치고는 날 바라보는 눈빛이 무척이나 뜨겁군.”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오는 꼴이라더니. 지금 내 모습이 딱 그 짝이었다. 파오를 추궁하기는커녕 공연히 예전 기억에나 사로잡혀 되레 궁지에 몰렸다. 파오는 정말 별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넌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며 착각하고 있겠지만, 그딴 건 다 네 피해망상에 불과해. 네놈이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랐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공주님 대접만 해줄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너에게 그저 네가 처해 있는 현실을 각성시켜줬을 뿐이라구.”

피해망상, 온실 속의 화초, 공주님 대접. 잠자코 듣자하니 아주 가관도 아니었다.

“네가 날 원망한대도 너한테 미안할 짓 같은 건 하나도 한 적 없어. 설마 사람들이 네 근처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긴 네가 암만 멍청한 놈이라도 그런 걸 모를 리가 없겠지. 그 악독한 관음존자가 유일무이하게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너였으니까. 네가 지나갈 때마다 사내놈들이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는지 알기나 해? 그래, 그 추잡한 얘기들은 아예 안 듣는 게 낫지. 하지만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자기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네 옆에서 얼쩡거리고 싶겠냐?”

나도 놈에게 해야 할 말들이 있었지만 파오의 궁색한 변명이나 듣자고 대화에 응한 것은 아니었다. 관음존자와 나를 둘러싼 숱한 오해들은 그와 내가 함께 있는 순간을 단 일각이라도 구경하게 된다면 자라목처럼 쏙 입을 다물 얘기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유일무이하게 애지중지하는 대상은 아닐지라도 썩 재미나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었다.

“게다가 내가 예전과 똑같이 대해줬으면 넌 그때부터 모든 걸 다 나한테만 의지하려고 들었을 것 아냐.”

하, 입에서 비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어린 나의 자립심을 키워주겠다고 내게 그런 식으로 차갑게 굴었다는 얘기였다.

“지난 일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들지 말고 그냥 너같이 약해빠진 놈이 나한테 귀찮게 달라붙을까 봐 미리 조치를 취했다고 해두십시오. 그쪽이 당신에겐 더 어울립니다.”

“현아.”

파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미안하지만 난 방금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심지어 네가 약하다는 둥의 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어.”

“…….”

“내가 오래도록 너를 쭉 지켜본 결과, 너는 너 스스로가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에만 틀어박혀서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들과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자기폄하를 하는 경향이 있어. 내가 네 단점을 꼬집었던 건 네가 그런 게 아니라고 발끈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였는데, 넌 예전부터 내가 뭔가에 대해 말할 때마다 인상을 구기거나 의기소침해서 자리를 피해버리기가 일쑤였지. 그것도 몇 년 정도 지나서 다시 만나게 됐을 때에는 나한테 꼬박꼬박 말대꾸나 하는 얄미운 놈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야.”

“…….”

“약한 게 뭐가 나빠? 평화로운 시대에는 사람 죽이는 기술이야 쓸모없는 일이고, 이런 환란의 시대에는 나나 우경이, 혹은 그림리퍼처럼 군부의 개로서 이용당할 뿐이다. 저 괴물 같은 손우경이 장장 오년의 세월을 수용소에나 처박혀 있었고, 그림리퍼가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끌려 다니며 무슨 꼴을 당했는지 잘 떠올려보라구. 넌 그때 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놈의 언변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내 쪽에서 점점 파오에게 설득을 당해서 뭘 어쩌자는 건지. 나는 두 손을 치켜들고서 이제 그만하자고 돌아섰지만, 녀석은 멈추질 않았다. 내 팔을 잡은 손에서 촉박함이 느껴졌다.

“마저 내 얘기 들어. 내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지만,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지금이 아니면 이제 더는 남은 시간이 없어.”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너한테 여태까지 차갑게 대했던 건 내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천봉대원수직에 오른 뒤에도 항상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놈들 때문에 난 잠 한숨 편하게 잔 적이 없었어. 말 한마디만 잘못 해도 나를 비롯해서 가족들의 안위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날들이었다구.”

“막강한 권력으로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당신과 군부의 요직은 모조리 장악하고 있던 당신의 가족들이 아닙니까? 지금 그 얘길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머리 뒤에서 파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종단 내에서 머리와 힘을 이끌던 양대 축 중에서 너희 아버지를 제거했으니 그다음이 바로 누구 차례였을 것 같냐?”

“그건…….”

쉽게 대답이 나오지가 않는다.

“관음존자의 최측근인 너라면 그가 사람에 대한 의심을 좀처럼 거두지 않는다는 것쯤은 다 알 거 아냐. 그 자식은 군부인 우리를 놔두고서 자신의 개인 사병인 척살부를 조직할 정도로 우리에 대한 견제가 심했었어. 계속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가며 환영제야단 내의 모든 사병을 외부로 돌린 까닭은 군부 주요 관계자의 대부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이 종단의 실권을 빠르게 장악하기 위해서였다구. 실제로 너희 부모님이 살해당한 날은 관음존자가 우리 아버지에게 아카나이트로의 첫 진격 명령을 내리고 군대를 응집해서 출전했던 첫날이야.”

“…….”

“네가 부모와 집, 모든 걸 다 잃어버렸을 때 나도 고작해야 열일곱 살이었다. 군대에 들어와서야 나도 비로소 내가 한낱 어린애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아까 말했다시피 너를 지켜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어. 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이지만 너는 관음존자 옆에 있는 게 제일 안전했을 거다. 개똥밭에 굴러도 뒈져버리는 것보단 그래도 살아서 더러운 꼴을 보는 편이 나으니까.”

그의 모든 얘기가 충격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치임에도 나는 단지 내 사정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의 처지는 아예 배제했던 것이다. 아돌프가 집권하고 난 뒤 종단 내의 모든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무리들이 부당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그 폭풍우 속에서 군부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던 파오의 가문만이 무사할 리는 없었다. 물밑에서 관음존자와 눈에 보이지 않는 알력다툼이 상당했던 것이다.

나는 그럼에도 그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장장 십년도 넘는 세월 동안 그를 미워했던 나 자신에게 도저히 체면이 서질 않아서. 놈을 미워함으로써 애써 정당화시켜왔던 나의 불행에 대해서 내가 엄청난 시간 낭비를 해왔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라서.

왜 하필이면 지금, 그것도 이런 순간에.

내 팔을 더 꽉 붙잡아오는 파오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간절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종단을 떠나기 전날 밤, 네가 그랬잖아. 떠나지 말아달라고. 관음존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너를 도와달라고 했잖아.”

그만하라고. 왜 지금에 와서 나한테 이러는 건데. 마음이 야생마처럼 괴롭게 날뛰어댔다. 뒤를 돌아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놈이 말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수락했겠냐.”

신기한 것은 파오의 말이 이어질수록 냄비같이 들끓었던 머릿속이 더 차분해졌다는 점이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몇 년 전만 됐어도 당신 말에 흔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내 멋대로 기대하고 내 멋대로 실망했었지만, 나를 그 시궁창 안에서 건져줄 것은 당신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나 때에도 그랬지만 한때는 그게 연애 감정이라고 착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손우경을 만나기 전까지는. 누군가에게 가슴이 설레는 것과 단순하게 신경 쓰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상황의 문제였다. 파오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손우경에게 묘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파오의 말이 더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무엇보다 오조에게 못할 짓 하지 마십시오.”

파오가 날 선 말투로 내게 되묻는다.

“……그림리퍼?”

“당신의 개인적인 원한은 젖혀놓더라도 앞으로 살날이 몇 년 남지 않은 아이입니다. 제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만 오조가 아무리 일방적으로 호감을 보였다고 치더라도 당신도 그 아이에게 아무 짓도 안 한 건 아니잖습니까.”

파오가 후 하고 짧고 불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두 번이나 잘 뻔했는데 안 잤어. 키스까진 그럭저럭 허락하는데 몸만 만지려고 들면 너무 거부감이 심해서. 옷을 벗길 수가 있어야지.”

“…….”

“걔가 우는 얼굴을 할 때마다 아주 어릴 때의 네가 생각나. 어린애들은 다 그런가? 너도 어릴 때에는 그런 얼굴로 자주 울었으니까.”

“…….”

“내가 너를 어쩌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난 뼛속까지 이성애자니까 다른 놈들처럼 널 보고 흥분하거나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건 아냐. 사실 너무 오래 봐와서 친동생 같은 느낌도 있고, 네가 멍청하게 굴면 한 대 패주고 싶기도 하거든.”

다른 놈들? 어쨌거나 파오 자신은 잘 모르는 듯하지만 이 말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었다.

“방금 뼛속까지 이성애자라고 했는데 그럼 오조하고 두 번이나 자려고 시도했다는 말은 뭐가 되죠?”

파오가 무심한 투로 대답했다.

“몰라. 걔는 좀 달라. 그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으면 아래가 서버린단 말야.”

이게 오조에게 희소식인지 아닌지 통 분간이 안 갔다. 확실한 건 파오가 오조를 싫어하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어떤 남자든 싫어하는 상대에게 자기 분신이 벌떡 서는 놈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파오는 새끼 여우에 대한 얘기는 슬그머니 접어두고는 다시 손우경에 대한 화제를 꺼내 들었다.

“손우경 그놈이 너한테 어떻게 구는지는 모르지만 진짜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새끼야. 너야 모르는 게 약이지. 그거 알아? 녀석은 첫날부터 너를 두고서 나를 지나치게 경계하고 있었어. 네 근처로만 가도 눈빛이 달라졌다구. 그리고 네가 독에 당해서 기절해 있는 동안, 삼일 밤낮을 쉬지도 않고 미친 듯이 그 짓을 해대는데, 그게 제정신이라고 생각하냐?”

당시에 기절했다가 깼다가를 반복했었지만 기억나는 거라곤 내가 눈을 뜰 때마다 놈이 내 몸을 타고 올라와서 한창 섹스에 열중하고 있단 것뿐이었다. 그 녀석이 제정신이 아닌 거야 파오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나는 붙잡혀 있던 팔을 뿌리치고서 파오에게 몸을 돌렸다. 뭐가 됐든지 이 긴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어느 정도는 의문이 풀리는 부분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부분도 상당했다.

“그래서 당신 정체가 뭐냐구요.”

“현아, 너 잠깐만 입 좀 다물어봐.”

허나 파오의 얘기는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어째서 당신과 나 사이의 일에서 손우경 얘기가 나와야 합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말 돌리려고 들지 마십시오. 나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수락했다구요? 그럼 지금 뭘 꾸미고 있는지부터…….”

파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뿜어 나왔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등 뒤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있기에 차마 뒤돌아보기가 저어됐다. 내 뒤에 있던 녀석이 재차 이야기했다.

“너하고 파오 사형이 어떤 사이인지 그거부터 다시 말해볼래?”

와이번과 오조는 어디에 있는지, 어쩌다가 손우경 혼자서 내 등 뒤에 서 있는 건지, 파오는 손우경이 걸어오는 동안 왜 눈치를 못 챈 건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투성이였다.

그것도 지금처럼 가장 오해하기 좋은 타이밍에.

“하늘에서 둘이 팔까지 붙잡고 뭔가 친밀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 같길래 나 먼저 내렸어. 근데 오자마자 말을 멈추는 걸 보니 내가 절대로 들으면 안 되는 둘 사이의 중요한 얘기였나 봐. 어쩌지? 나도 파오 사형이 현이 너 때문에 무슨 제안을 수락했는지가 무척 궁금해지는데.”

손우경이 태연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주변 공간이 잔뜩 일그러지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손우경은 이미 야차같이 험악해진 얼굴로 파오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몸을 붙잡고서 우선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려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우경아, 다 설명해줄 테니까 일단 나하고 따로 얘기 좀…….”

손우경이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나를 밀쳐냈다.

“……너도 같이 죽고 싶지 않으면 나 건드리지 마.”

순간, 마하데바 호의 선장이 손우경의 기문파공에 의하여 몸이 슬라이스로 층층이 저며진 채 죽어버렸던 기억이 났다. 파오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장면이 연상됐다. 손우경이 공간을 뭉개며 파오에게 다가가려는데 반사적으로 놈의 허리를 끌어안아 막았다.

“기다려봐!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구!”

그러나 녀석에게선 더욱 살기 어린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손우경이 이를 악물고 내게 묻는다.

“……저 새끼가 너한테 대체 뭔데.”

“우경아, 그런 거 아니야!”

“너한테 뭐길래 이런 순간에 감히 나한테 이딴 짓을 해가면서까지 네가 나를 말리려고 드냐구!”

이딴 짓이라니?

!

아……. 놈의 허리를 껴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나중에 그거 한 번만 더 해줘.’

‘뭘?’

‘지난번에 네가 뒤에서 나 껴안았던 거.’

손우경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엉덩이 안쪽이 사납게 퍽퍽 처박혔다. 뜨거운 불기둥은 애정 없는 몸짓으로 구멍에 쑤셔 넣어지는 데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연거푸 마찰되는 입구에서 피가 질질 흘렀다. 아부-게르다의 뒷골목 섹스 이후로 손우경이 나를 이리 거칠게 안는 건 처음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파오가 기문파공의 투명 벽에 갇힌 채 내가 손우경에게 범해지는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처음엔 차마 볼 수 없다는 듯이 아예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눈으로 더듬는 것 같은 끈적끈적한 시선이 내 몸 위로 따라붙었다.

파오에게 이런 낯 뜨거운 장면을 보일 바에야 차라리 죽고 싶었다. 방금 전 있는 힘껏 반항하다가 결국 찢어진 옷이 맨바닥에서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더 움직이지 못하게 등 뒤로 묶인 손목으로 통증이 밀려들었다.

손우경은 엎드린 나를 허리힘으로 계속 몰아치며 파오에게 비아냥대듯 입을 열었다.

“사형은 거기서 항상 내 껄 탐난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잖아? 실제로 보니까 어때?”

파오가 간신히 화를 삭이는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이 지독한 새끼, 그 정도면 거의 강간 수준이야.”

손우경은 파오와의 대화 자체에는 별 의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놈은 그저 나에 대한 음탕한 말들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늘어놓았다.

“그거 알아? 이 녀석 이 나이를 먹고도 아직 속살이 핑크빛인 거.”

엉덩이를 좌우로 잔뜩 늘리며, 놈이 안쪽 살을 파오에게 보여줄 수 없어서 유감이라는 듯 말했다. 여의봉이 들쑥날쑥하게 자랐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며 내장 안쪽의 민감한 부위를 연속으로 푹푹 쳐대고 있었다. 잠시도 내 입에선 신음이 그치지를 않았다.

“얜 이제 나 없이는 살지도 못하는 몸이야. 타고났을 정도로 음란한 뒷구멍을 가진 새끼라서 얼마나 내 좆을 쫀득하게 빨아 당기는지 말도 못해.”

손우경이 내 엉덩이를 찰싹 치더니 귓가에 웃음소리와 함께 나긋하게 속삭여온다.

“말해봐, 현아. 어떻게 해줄까?”

여의봉이 내장 안에서 무섭게 부풀었다. 내 아랫배에서 놈의 그것이 살을 뚫고 나올 듯이 늘어나고 있었다. 몸이 요동치면서 경련하듯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뭐하는 거야? 내 좆이 그렇게 좋아?”

손우경은 파오에게 과시하듯이 나를 안고 있었다. 녀석이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했지만, 파오 앞에서 녀석에게 이리 남창 취급이나 당하는 꼴을 보여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거기다가 오조가 언제 와이번을 타고 돌아올지 몰라 그것도 겁이 났다.

내가 어디까지 비참해져야 네가 만족할 수 있을까. 눈을 꾹 감고서 이 악몽 같은 순간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치 벌을 주는 듯한 정사 행위에 보다 못한 파오가 자기 사방으로 둘러진 투명 벽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격노에 찬 음성을 내뱉었다.

“이제 그만 좀 해, 이 정신병자 같은 새끼야! 걘 니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소유물이 아니야!”

“적당히 지껄였으면 그 아가리 다물어.”

“손우경, 흥분하지 말고 내 말 들어. 너도 알다시피 난 여자 좋아해.”

녀석이 내게 깊게 삽입하며 힘들게 대꾸했다.

“흡, 웃기는 소리. 사형은 여자를 안아서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지, 여자에 환장하는 인간은 아니야.”

“현이는 거의 십오 년을 보아온 형제 같은 사이다. 친동생 같은 녀석에게, 그것도 남자한테 모든 사람들이 다 너처럼 욕정을 품겠냐?”

“하아, 하아. 요새는 친동생을 그런 눈으로 쳐다보나 보지.”

“자그마치 십오 년의 세월인데 중간에 불쑥 나타난 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존재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게다가 저 녀석과 나 둘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들이다. 애초에 네가 참견할 구석은 없어. 관음존자도 현이 옆에 잠시나마 귀찮은 날파리가 꼬이는 걸 못 견뎌했는데 그깟 질투 때문에 이따위 추악한 짓거리나 저지르는 네가 아돌프하고 다를 게 뭐가 있어?”

“……얘한테 집중하는 중이니까 좀 닥쳐. 안 그래도 지금 사형을 어떻게 찢어 죽일까 고민하는 중인데 그 자식이랑 날 비교하지 마.”

“넌 머리 하나는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 새끼가 왜 현이 일만 엮이면 철부지 어린애처럼 행동하냐? 사람 얘기는 제발 끝까지 다 들어보고 판단해라. 아까 얘기가 나왔던 관음존자의 제안이라는 건, 이 서쪽으로 향하는 여정 길에 나보고 합류하라는 소리였고, 난 현이가 아니었으면 이런 병신 같은 판에는 끼지 않았을 거야. 말했잖아. 내 친동생 같은 놈이라구.”

파오가 뭐라고 하든 손우경은 내 엉덩이에 몰두한 채 점차 피치를 올리고 있었다. 녀석이 내 성기를 쥐고서 소젖을 짜듯 사정없이 흔들어댄다. 앞과 뒤가 동시에 자극을 받자 나는 파오에게 성교 행위를 보이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해져갔다. 머리가 하얗게 텅 비었다.

둔부가 허벅지와 팡팡 부딪치며 한층 다급해진 속도감을 자아냈다. 내가 먼저 사정을 했고 연이어 내 배 속으로 손우경의 정이 방대하게 쏟아져 내렸다. 정액이 민감한 지점에 흡수되면서 그 황홀감에 팔다리가 격렬하게 후들후들 떨려왔고 놈은 최후의 순간 내 허리를 부여잡고는 페니스를 깊숙하게 찔러 올렸다.

“아흣!”

손우경은 잠시 사정을 끝낸 여운에 취해서 나를 안고 있다가 엉덩이에 박혀 있는 페니스를 쑥 뽑아냈다. 몸 안에서 놈이 떨어져 나가자 나는 허탈한 기분과 함께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손우경이 파오에게 잔뜩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봤지? 얜 이런 상황에서조차 날 온몸으로 기껍게 받아들이고 있어. 사형은 이 병신 같은 판에 껴서 현이한테 뭘 해줄 수가 있는데? 아, 설마 관음존자에게서 해방이라도 시켜주려고 했나?”

파오가 진짜 기도 안 찬다는 듯이 대꾸했다.

“너야말로 머리통에 금고아칩이나 박혀 있는 주제에 아돌프한테 상대나 될 거 같냐. 너같이 유치한 놈을 두고 볼 바엔 차라리 관음존자 쪽이 더 낫겠다, 이 머저리 새끼야!”

“……그건 차차 두고 보면 알겠지.”

이제 나와의 볼일은 끝났는지 손우경은 파오가 갇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았지만 어렵사리 팔을 뻗어서 머리 위에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던 내 셔츠를 부여잡았다. 걸레처럼 변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땅에 뱀허물처럼 벗겨져 던져놓은 바지까지 전부 꿰어 입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데 몇 걸음도 채 떼지 못해 손우경에게 붙잡혔다. 그런 몸으로 지금 어딜 가냐고 놈이 날 다그쳤지만,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고서 계속 걸어갔다.

옆에서 손우경이 하는 말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걸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대로 계속 걷다 보면 생각이 날 듯도 했다. 허리가 아팠다. 하반신 아래로는 시큰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몸의 통증보다는 내 가슴 어딘가가 두들겨 맞은 것처럼 큰 멍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걸어야 했다. 가만히 있다간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하염없이 걷다가 보니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누군가 나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바닥이 내 얼굴을 정신없이 더듬으며 무슨 얘기를 건네고 있었다. 귓가에 소리는 들렸지만 정확한 의미 전달이 되질 않고 있었다. 내 얼굴을 매만지는 손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들자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도 누군지가 전혀 생각이 안 났다.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며 누구였는지를 떠올려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팠다. 주저앉아서 머리를 감싸 쥐는데 그 모르는 사람이 나를 덥석 껴안았다. 숨이 막혔다. 게다가 나를 껴안는 몸에서 어떤 전율 같은 게 느껴졌다. 이 사람 지금 떨고 있는 건가. 왜 그러지.

가슴이 너무 답답한데 나를 좀 놔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서 떨어지려고 아무리 애를 써봐도 상대방은 절대 날 놓치지 않을 것처럼 애절한 손길로 더 꽉 끌어안았다. 안긴 채로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보니 잿빛 하늘에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나도 저렇게 날고 싶었다. 언제나. 하늘로 손을 힘껏 뻗었지만 닿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귓가에서 희미하게 울리던 목소리가 점점 뚜렷해졌다.

“현아, 내가 잘못했어…… 제발 부탁이니까 정신 좀 차려봐…….”

울 것 같은 목소리다. 어깨에 얹혀 있던 내 고개를 떼어서 나를 안고 있던 사람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은회색 눈동자가 아주 예뻤다. 나는 손끝을 들어서 눈빛이 슬퍼 보이는 그 사람의 눈꺼풀을 만졌다. 가지런하게 자라난 눈썹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쳐다보며 헤실헤실 웃었더니 상대방이 뭔가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너…….”

그런 이상한 표정 짓지 말라고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그 순간 머리끝까지 졸음이 몰려들었다. 가물가물해진 눈으로 내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머리 위에서 자유로이 날아다니던 그 새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쉬어가는 페이지 8 <파오>

★ 오늘은 자신의 성적 취향에 관해서 진지하게 고찰해보는 시간을 한 번 가져봅시다

내가 현이의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실제로 그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약 석 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부모님은 물론 집안의 가솔들마저 전부 다 몰살당한 와중에 운 좋게 그 아이만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도저히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관음존자의 손에 거둬져 티뷸라 궁 황금 사원 안에 있단 소리까지 들은 후로는 훈련을 받다가도 몇 번이고 탈영할 뻔했다. 그 아이의 생사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나 주변 어른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고 한들 나는 일개 동자승이었다. 삼년간의 정식 군사 훈련을 받는 도중이라 아무 때나 밖으로 뛰쳐나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탈영 시도가 잦아지자 군부 측에선 날 함부로 하진 못하고 상부에 보고를 올린 모양이었다. 며칠 후 아카나이트에서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종단으로 복귀하신 아버지가 나를 따로 부르셨다.

천봉대원수인 아버지의 집무실에는 관음존자의 만卍자 문양이 아닌 이전 석가여래님의 문장이자 환영제야단의 정통표식인 옴ॐ자가 새겨진 휘장이 걸려 있었다. 군부에 몸담은 우리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아돌프가 언제 또 저걸 가지고 시비를 걸어올지 알 수 없었으나 내 부친은 여전히 석가여래의 전통을 고수하는 쪽을 선호했다. 아니, 실은 빨간 눈의 서양인인 아돌프 따위에게 굽힐 수 없다는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었다.

내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자 아버지는 주변 호위들을 전부 물리고는 나와 단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이네가 어떤 식으로 숙청되었는지 그 과정을 전해 듣는 동안 두 주먹이 절로 쥐였다. 무엇보다 그 어린 아이 혼자서 겪게 되었을 시련과 아픔을 떠올리자니 가슴 한쪽에서 천불이 들끓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점점 더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당시 나는 세상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이 호승심과 패기가 넘치던 나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에라도 티뷸라 궁으로 쳐들어갈 기세를 취하자 금세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멍청한 놈, 흥분하지 말고 어서 자리에 앉아!”

내가 씩씩거리다가 다시 바닥에 앉자 아버지는 나를 달래듯이 조금 차분해진 어조로 입을 여셨다.

“파오야, 내 말 잘 듣거라. 네 녀석이 대법의 하나뿐인 영식을 마치 친동생처럼 귀여워했던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너를 따로 부른 이유는, 앞으로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예전처럼 그 아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언질을 주기 위해서였다. 너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을 거다.”

나는 아버지의 비겁함에 치를 떨었다.

“분명 저에게 대법 큰스님은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이 환영제야단을 평생 함께 이끌어나갈 동반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이제 와서 발을 쏙 빼자는 말씀이십니까? 부모를 모두 잃고 혼자 남게 된 현이가 가엾지도 않으세요?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던 간에 전 지금이라도 그 아이를 데리러 가야겠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성미였다. 주먹에 얻어맞은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들고서 아버지를 똑바로 노려봤다.

“말리셔도 소용없습니다!”

“나라고 아무렇지 않은 게 아냐! 어린 시절부터 내 유일한 벗이었던 대법이 남긴 핏줄인데 나라고 그 아이를 그놈 손아귀에서 데려오고 싶지 않겠느냐? 그 건방진 꼬맹이가 두 달도 넘는 시간 동안 나를 바깥으로 나돌게 만들어놓고 뒤에서 저지른 짓거리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도발에 응하는 순간, 관음존자에게 반역이라는 빌미를 주게 된단 말이다! 우리 가문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놓은 많은 대업들을 내 선에서 한순간에 다 망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이에 비해 건장한 체격을 가진 아버지는 자신의 옆에 놓여 있던 서랍장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내게 던졌다.

“이게 뭡니까.”

“잔말 말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열어봐라.”

아버지의 분부대로 넌지시 상자를 열어봤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안에는 육포처럼 건조시켜 말린 사람의 머리와 손수건 한 장, 그리고 단도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쩍 건조되긴 했어도 그 머리의 정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대법 큰스님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상자 안에 든 손수건과 단도의 정체도 의문이었다.

“내가 아카나이트에 머무르는 동안 나에게 직접 보내온 상자다. 발신자가 누구인지는 설명 안 해줘도 알겠지? 이건 관음존자의 명백한 도발이다. 거기 들어 있는 물건들처럼, 친구의 죽음에 손수건을 들고 애도하든지 혹은 칼을 쥐고서 자기한테 복수를 하든지 스스로 결정하라는 의미로 보이더구나.”

“…….”

아버지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본보기로 한쪽을 잘라냈으니 다음 차례는 분명 우리다.”

바로 상자의 뚜껑을 닫아버렸지만 찝찝한 죽음의 향기가 내 코끝에서 기분 나쁘게 맴돌았다.

“……자칫했다간 삼족 멸살이야. 이럴 때일수록 정신 차리고 더 영리하게 굴어라.”

그렇게 아버지의 비겁함은 어느새 나에게까지 전염되고 있었다.

현이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눈길은 자연히 수백 명에 달하는 동자승 지원자들 속 그 아이를 향했다. 몇 달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원래도 말랐던 얼굴이 못 본 사이에 반쪽이 되어 있었다. 인형같이 예쁘게 생긴 외모 때문인지 주변 사내아이들이 자꾸 힐끔거리며 현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저런 얼빠진 것들 같으니. 하긴 나도 저 얼굴 탓에 일 년도 넘게 녀석의 방 창틀이 닳도록 드나든 전적이 있으니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다.

현이가 두리번거리며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오려고 드는 이유를 짐작해보니 양심의 가책마저 들었다. 결국 심사대에서 나를 발견한 녀석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쳐다봤지만, 애써 모르는 척해야 했다.

아돌프가 현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있는 게 다 우리 아버지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란 추측도 있었다. 적당한 미끼를 걸어두고 물밑을 노닐던 우리 쪽에서 그걸 덥석 물기만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하니 관음존자쯤 되는 사람이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자청하면서까지 우릴 자극하려 들까 싶었으나 지금도 나를 몰래 감시하고 있는 시선이 여럿 감지되고 있어 섣불리 단정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 동자승 테스트는 기본적인 체력만 잘 갖춰지면 아무 문제 없이 대다수가 합격하는 시스템이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자면 지금은 전쟁 중이었고 인적 자원은 소모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원자의 성격이 어떻든, 집안 환경이 어떻든, 그냥 팔다리 멀쩡하고 평범한 체력 수준만 지니고 있으면 통과된다. 약 오백여 명이 지원했다는 가정하에, 그중 정말 특수한 문제가 있는 몇몇 놈들만 제외하고는 대체로 전원이 다 합격하는 것이다.

그 정도로 간단한 테스트에도 낙오자는 생기는 법이다. 몸이 워낙에 허약해서 집 밖으로는 거의 나와본 적도 없는 현이가 동자승 테스트에 합격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어찌어찌 통과했다고 해도 내 선에서 떨어트렸겠지만.

합격점을 받고 다들 우르르 빠져나간 회장 안에서 현이가 혼자 오도카니 앉아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아, 네가 암만 기다려봤자 난 이제 너에게는 가지 않아.

남자들만 우르르 모여 있는 집에서 살다 보니 저 녀석을 처음 봤을 때에는 참으로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라고 생각했었다. 여자애였으면 데려다 키워서 나중에 색시라도 삼고 싶을 만큼 첫눈에 반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성별이 남자라는 건 며칠이 지나고서야 알았지만, 안 보면 보고 싶고 생각이 나서 내가 일방적으로 녀석을 만나러 간 적도 많았다.

그것도 고작 열 살짜리 꼬마한테 이 파오가.

그러나 그깟 애들 소꿉놀이 같은 감정에 상황 분간도 못하고 휘둘릴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미안, 너 하나 때문에 내가 가진 전부를 잃을 수는 없어.

동자승 입단 시험에 응시한 것이 정확히 열다섯 번인지 열네 번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현이는 내 예상보다는 꽤 오랫동안 버텼다. 사실 다른 심사위원들이 아직 일반 사병에 불과한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저 정도로 애원하는데 그냥 동자승으로 붙여주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나는 칼같이 잘랐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아까 들것에 실려 간 현이가 못내 걱정되었다.

마지막 테스트에서 내가 다신 여기에 얼씬도 못하게 하려고 좀 지독하게 군 경향이 있었는데 녀석이 기절하는 바람에 군 의무실 신세를 지고 말았다. 하루 정도는 그 일을 무시해보려고 했으나 이튿날 내 발길은 저절로 의무실로 향했다.

의무실 앞에는 나 말고도 먼저 온 손님들이 많았다. 뭣들 하냐, 니들! 이것들이 아주 빠져가지고! 내가 고함을 빽 지르자 다들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쳤다. 아마도 창문 틈으로 현이가 자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던 듯했다. 언제 현이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났는지 문 앞에는 어설프게 만든 꽃다발에 연애편지, 군용 전투 식량이 산같이 쌓여 있었다.

짜증 섞인 발길질을 하며 그것들을 탁탁 치워버리는데, 자꾸 요사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열한 살짜리 어린애치고는 풍기는 분위기가 정말이기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동자승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저 녀석의 사진까지 나돌고 있었다. 딸 치는 용으로다가. 그걸 한 장에 만 원이나 받는다던데 내가 점호 시간에 압수한 사진들만 해도 벌써 수백여 장이었다. 그래, 절대로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 나 말고도 저렇게 정신 나간 놈들이 태반이니까.

돌아가신 현이 어머님이 젊은 시절에 포타라카 제일가는 미인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젊었을 때 엄청 쫓아다니다가 군인은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던데 말이다.

울다 지쳐서 잠든 현이의 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다가 다시 돌아섰다. 나는 저 녀석이 가급적이면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주길 바랐다.

파란빛을 띤 고양이 눈이 나를 몰래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그림리퍼가 나를 볼 때마다 얼굴이 간질거렸다. 실은 얼굴 말고 거시기가 간질거려서 죽을 맛이었다. 저 조그마한 입술에 내 발기된 좆을 밀어 넣고 목구멍까지 닿게 해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내 좆을 빨다가 울면서 캑캑거리는 표정이 아주 근사할 것 같았다. 허나 안 될 말이었다. 저 자식 손에 죽어간 내 부하들의 비명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나에게 할 말이 있는지 내 주변을 계속 서성였지만, 쉽게 다가오진 않는다. 어릴 때에는 검은 눈을 가진 요사한 것 하나가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더니, 내가 대체 무슨 팔자인지 서른이 넘어서 파란 눈의 요물까지 알짱거리기 시작했다.

그림리퍼의 수명이 오년밖에 안 남았다는 얘길 들었지만, 그렇다고 놈과 나의 관계가 달라질 건 없었다. 순전히 자의였지만 어찌 보면 날 천봉대원수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는데 옆방에서 침대가 덜컹덜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우경은 벌써 이틀씩이나 독에 당한 현이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저 발정 난 새끼 같으니. 부러워 뒈질 노릇이었다. 고작 저런 망나니 같은 놈이 채가려고 그동안 관음존자가 금이야 옥이야 철벽 방어를 했단 건가.

닥치는 대로 아무 여자나 안아서 안에 쌓여 있는 욕구를 풀고 싶어도 스스로 자진해서 도시 안에 갇혀버린 터라 외로운 마음을 달래줄 이는 내 오른손뿐이었다.

의무적으로 자위를 하는데 문득 머리 안에서 파란 눈의 마법사가 야한 표정으로 내 거시기를 공들여 핥아주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부하들에 대한 죄책감에 그따위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들수록 더욱 큰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하, 진짜 단단히 미쳤네.

남자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항문을 통해서 성관계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림리퍼를 억지로 범하는 상상을 하다가 잇새로 욕을 내뱉었다. 정신 차려, 인마. 저놈은 갈아버려도 시원찮을 새끼라구. 내 하반신의 절박한 사정으로 날 몇 년 동안 믿고 따랐던 부하들의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다시 자려고 했는데 마침 현이가 비명 같은 교성을 마구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들아, 작작 해라 좀.

손우경이랑 도시의 상점들을 신나게 털다가 훔친 작물(?)들을 내려놓기 위해 잠시 숙소로 돌아왔다. 순간 방을 착각했나 싶었지만 아침에 옷을 갈아입느라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내 팬티가 여기가 내 방임을 재차 확인시켜줬다.

그림리퍼는 주인도 없는 남의 침대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뭐가 됐든지 애가 생긴 거 하나는 꽤 예술이란 말이지.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느라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졸다가 급속도로 기울어지던 고개가 허공에서 깜짝 놀라 멈추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더니 가뜩이나 큰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림리퍼가 말을 더듬으면서까지 변명하려고 애썼다.

“이, 이건, 그러니까아, 잠깐 방에 들어왔다가 잠이 들어서…….”

녀석의 손끝에 잡혀 있는 내 셔츠 자락이 그림리퍼의 변명을 더 구차하게 만들었다. 고양이처럼 도도하게 생겨가지곤 뭔가 자기 속마음을 조금도 감추질 못하는 타입이었다. 그런데다 만두를 먹다가 잠들었는지 입가에는 당면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얘가 진짜 내가 아는 그 랜드리올의 저승사자가 맞나 싶게 지나치게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나는 그림리퍼의 입가에 묻은 것을 손으로 떼어주면서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내 방에서 빨리 나가.”

하얀 피부가 화르륵 빨개지니까 그 대비 효과가 극명했다. 그림리퍼는 얼굴을 붉히며 내 방을 빠져나갔다. 내 입으로 나가라고 말해놓고서 막상 허전함을 느끼는 건 어째서 그런 건지.

그림리퍼가 뒤에서 나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따라오다가 그만 돌아가겠지 싶었는데 어느새 인간 자판기가 있는 거리에 도달해 있었다.

진짜 환장하겠네. 아부-게르다까지 와서 애를 볼 마음은 없었다. 나는 여자랑 자는 것도 좋아했지만, 본래가 음양의 신성한 조화를 통해서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 아, 됐고. 지금은 너무 쌓여서 치마만 둘러도 박아대고 싶단 말이야.

참으로 귀찮은 놈이었으나 아까 밥 먹으면서 이런 건 난생처음 먹어본다며 질질 짜는 꼴을 봤더니 제발 꺼지라는 말을 내뱉기가 꺼려졌다. 제기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걸 따졌다고. 뒤돌아서 날 쫓아오던 그림리퍼를 가만히 응시하자 놈이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도…… 저기 큰 건물에 들어갈 거야?”

인간 자판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알고나 하는 말인지. 내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림리퍼가 내게로 걸어와선 자신감 없는 손동작으로 슬며시 내 옷 끝을 부여잡았다. 뭐하는 거야, 이게.

“식당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들었어. 나는 당신이 거기 안 갔으면 좋겠어…….”

가지런히 내리깐 속눈썹이 정말 길었다. 나는 그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전혀 의도치 않은 말을 불쑥 내뱉고 말았다.

“그럼, 대신에 네가 상대해줄래?”

“…….”

나는 놈의 손목을 잡고서 으슥한 골목 아무데나 들어갔다. 너무 쌓여 있던 게 틀림없었다. 둘이 서 있기도 좁은 틈에서 그림리퍼의 등을 벽에 붙여놓고서 대뜸 작은 입술에 입을 가져다 댔다. 얘가 과연 키스 같은 걸 할 줄 알까 싶었는데 혀를 집어넣자 그림리퍼가 턱을 부들거리면서 입을 아기 새처럼 벌려댔다. 솔직히 기대도 안 했지만 키스하는 게 더럽게 서툴렀다. 그럼에도 놈이 내 혀를 열심히 입안으로 받아들이며 마치 자길 두고서 가지 말라는 듯이 목에 팔을 둘렀다.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팔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귀엽네.

잠시 후 나는 입을 떼어내고서 골목에 들어오기 전부터 발기해 있었던 내 페니스로 그림리퍼의 손을 끌어 왔다. 그림리퍼의 손바닥이 내 바지 안에서 솟아 있는 불룩한 것에 닿자마자 또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일부러 귓가에 대고서 속삭였다.

‘이걸 네 엉덩이에 넣을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어?’

“……왜?”

설명하기가 난감했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런 짓 하면…… 나중에 아기 생긴다고 우경이가 그랬는데.”

손우경, 내 인생에서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자식.

“걱정 마. 안 생겨.”

그림리퍼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질문했다.

“그럼…… 당신이랑 그거 하려면 혹시 옷 벗어야 해?”

날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터무니없이 진지했다. 새삼스럽게 엄청 예쁘네. 요물이 아니라 무슨 요정 같다. 허나 이러다간 내가 홀랑 넘어가게 생겼으니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자.

나는 놈의 턱을 그러쥐고서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긴 나도 네 썩어가는 몸 따위는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몸에 정 자신이 없으면 엉덩이만 내놓고서 하든가. 나한텐 어차피 너든 자판기에서 파는 창녀든 큰 차이가 없으니까.”

온통 유리 돔으로 둘러싸인 이상한 도시에 갇혀 있을 때, 나는 딱 한 번 그림리퍼의 몸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딱히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자기 수명이 이제 오년 남짓밖에 안 남았다는 녀석의 말이 자꾸 떠올라서 내 눈으로 그림리퍼의 몸 상태가 어떤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몸을 보게 되면 납득하고서 싹 잊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잠에서 깬 녀석이 싫다는 걸 억지로 로브를 들쳐서 놈의 비상식적인 몸을 봤는데도 그 얘기가 계속해서 떠올랐었다.

나는 그때의 기억들을 찬찬히 되새기며 놈에게 타격을 줄 만한 단어를 골라야 했다.

“물론 창녀들보다 네 쪽이 좀 더 혐오스럽지만.”

그림리퍼가 사색이 된 낯빛으로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크게 상처받은 얼굴이었지만, 애초에 그럴 의도로 한 말이었으니 전혀 달래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놈에게 쏘아붙였다.

“……알았으면 사람 성가시게 굴지 말고 그만 돌아가.”

어린애 울리는 취미는 없었는데 아마도 머지않은 시일 내로 내 주특기가 될 예정이다. 그림리퍼가 그렇게 울 줄은 몰랐는데 입맛이 아주 썼다.

늦은 새벽까지 마하데바 호의 선장들과 술을 마셨다. 손우경이 내게 눈짓하며 먼저 일어났다. 조금만 더 붙잡고 있어달란 소리였다. 간만에 서로의 의견이 일치했는지라 이런 일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협조해줄 의향이 있었다.

여하튼 나도 보통 주당은 아니었는데 선장 놈이 암만 해도 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우경이 식당을 빠져나가는 걸 조용히 곁눈질하면서 선장의 잔에 독한 술을 콸콸 들이부었다. 도수가 얼마나 높은지 취기가 올라서 띵 하고 현기증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손우경하고 역할을 바꾸는 건데. 하지만 놈의 기문파공이 아니면 애초에 가능할 일이 아니었다.

드디어 바다가 아닌 배에서 사는 술고래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속이 미친 듯이 쓰렸지만 후반부에는 상대에게 술을 먹이기만 하면서 나는 적당히 먹는 척만 했기에 웬만큼은 술이 깬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내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 앞에서 그림리퍼와 마주치고 말았다.

얘는 이 신 새벽에 잠도 안 자고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아부-게르다를 떠난 이후론 따로 얘기하거나 둘만 있던 적이 없었는지라 그림리퍼는 나와 마주치자 몹시 당황했다.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그림리퍼가 날 눈으로 붙잡고 있었다. 술에 취한 내 착각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었다. 저 자식이 저런 새파란 눈으로 사람 속을 긁어내듯이 쳐다보는 것이 정말로 짜증이 났다.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그림리퍼를 벽에 몰아붙였다. 녀석이 못 도망치게 팔 한쪽을 놈의 머리 위로 기댔는데도 키가 작아서인지 전연 무리가 없었다. 남은 손으로는 놈의 얼굴을 거세게 틀어잡았다. 그림리퍼가 고집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빼내려고 했지만 놔줄 마음이 없었다. 꽤 순종적이던 녀석인데 그때의 그 일로 내게 여전히 화가 나 있는 듯했다.

내가 상처 줄 때마다 자존심 상한 얼굴로 날 원망하듯 쳐다보던 그 시절의 현이를 보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이 녀석에게서 어린 시절에 해소되지 못했던 감정을 다시 재생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의 그 비겁한 꼬맹이가 지금 더 비겁한 어른이 된 것은 이제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난 너 싫어한다고 말했잖아. 근데 왜 자꾸 그렇게 쳐다봐?”

내가 아무래도 술이 덜 깼었나 보다. 속에 품고 있던 가시 같은 말들을 아직 스무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애송이에게 마구 쏟아내는 비열한 짓을 하고 있었다.

“종단에서 나온 다음에 내가 매일같이 무슨 상상을 했게?”

“으윽…… 이거 놔줘!”

“그림리퍼, 언젠가 너를 잔인하게 갈가리 찢어놓는 상상.”

빨리 술에서 깨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녀석이 나를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한번 터져 나온 과거지사의 불순물들을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 놈의 가느다란 손목을 움켜잡고서 나는 녀석의 얼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근데 실제로 네 얼굴을 자꾸 보다 보니까 조금씩 그 생각이 바뀌게 됐어. 내 힘만으로 널 죽여버릴 수 없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너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놈에게 두 번째로 키스했을 때에는 저번처럼 반쯤 장난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냥 놈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게다가 내 말에 일일이 상처받는 녀석의 여린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짜릿한 희열과 죄의식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바닥으로 몸이 미끄러진 그림리퍼가 주먹으로 내 가슴을 때렸지만 도저히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입술을 떼자 그림리퍼가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려대고 있었다. 내 키스가 싫었던 게 아니라 방금 전 내가 했던 말들 때문에 또 상처 입었던 거였다. 내 실수였단 걸 알았지만 태어나기를 허리하학적으로 타고난 인간인지라 그림리퍼가 우는 모습에 하반신이 욕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는 우는 그림리퍼를 안아 들고는 내 숙소로 들어갔다. 놈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는 다시 얼굴과 입술 등에 키스를 퍼부었다. 술에 취한 주정뱅이라는 역할에 마음껏 젖어들어서 그림리퍼의 로브를 벗기려고 했다. 그러자 그림리퍼가 심하게 발버둥을 치며 보는 사람의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놈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내게 애걸하듯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싫어……. 제발…… 내 몸…… 보지 마…….”

그림리퍼는 내가 자기 몸에 손을 댈까 봐 발작하듯 울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차마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긴 나도 네 썩어가는 몸 따위는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몸에 정 자신이 없으면 엉덩이만 내놓고서 하든가. 나한텐 어차피 너든 자판기에서 파는 창녀든 큰 차이가 없으니까.’

‘물론 창녀들보다 네 쪽이 좀 더 혐오스럽지만.’

내가 그림리퍼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마침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나는 기절하듯이 침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목이 탔다. 심한 갈증이 일어서 다시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발아래가 상당히 거추장스러웠다. 상체를 일으키는데 새벽의 술기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뒷골이 울렸다. 잘 뜨이지 않는 눈으로 뭔가 불편한 다리 아래쪽을 내려다보다가 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새벽에 내가 저질렀던 추태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났다.

기도 안 찬다.

그림리퍼는 아까 나한테 그런 꼴을 당하고도 이 방에서 나가지 않고 내 발밑에서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이렇게 잘 거면 그냥 내 옆에서 편하게 잠이라도 자든가. 옆에서 잘 용기도 없는 주제에.

일어나서 물을 마시려는 것도 포기하고 내 오른쪽 다리에 딱 붙어서 자고 있던 그림리퍼의 몸을 끌어 올려서 내 옆에다 얌전히 눕혀놨다. 곤하게 자고 있던 녀석이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끄응거리며 내 품으로 파고들어왔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년이라니.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종단에서 나온 뒤 언젠가 그림리퍼에게 황홀한 죽음을 선사하길 바랐던 내가, 이젠 그 녀석의 남은 생을 새벽 내내 뜬눈으로 헤아리는 신세가 됐다.

그때 정말 자기는 하는 건지 그림리퍼가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잠이나 자자.

쉬어가는 페이지 8 <파오>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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