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대마도사 글릭데르의 이상한 탑과 모래로 만든 일기장 (20/24)

17. 대마도사 글릭데르의 이상한 탑과 모래로 만든 일기장

진짜 왜들 이래.

머리가 아파서 자세한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아까 파오와 얘기하던 도중 내가 잠시 기절했던 것 같은데 지금 날 내려다보는 저 시선들이 부담스러워서 미치겠다. 손우경은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새끼 여우는 지팡이를 들고서 계속 나랑 손우경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음……. 근데 기절?

파오가 내 동공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계속 괜찮냐고 물어봤다. 나는 귀찮다는 듯이 놈의 손을 탁 쳐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파오가 날 만져대는 걸 뒤에서 손우경이 침묵하며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대수로운 일이라고 이렇게들 호들갑을 떠십니까. 저 일어나야겠으니 좀 비켜주세요.”

근데 내 옷 상태가 왜 이런 거지꼴인지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해도 기절하기 직전까지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바지는 너무 더러웠고 셔츠가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축소 가방을 꺼내 새 셔츠로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파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살면서 갑자기 어떤 기억들이 뚝 끊긴 적 있었냐?”

녀석의 질문에 나는 눈알을 굴려봤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한 번 있었던 거 같은데요. 아부 게르다에서 저녁에 산책을 하다가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 위에…….”

파오가 짐작 가는 것이 있다는 얼굴로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아니, 최근 거 말고.”

“기절했던 경우는 많지만 기억이 끊겼던 건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으면 머리가 견디다 못해서 정신 연령이 퇴행하거나 내부로의 현실 도피를 통해서 잠시나마 잊어버리려고 들지. 보니까 너 한두 번 이랬던 게 아닌 거 같은데.”

“것보단 제가 왜 이 꼴인지부터 설명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파오가 손우경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내가 설명해줄 부분이 아니라서. 그림리퍼하고 자리를 비워줄 테니 니네끼리 알아서 얘기하든가 해라.”

그렇게 말한 파오가 서먹서먹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낯을 가리고 있던 오조의 팔을 덥석 잡고 어딘가로 데리고 가버린다. 그냥 자기가 오조랑 할 얘기가 있던 게 아닌가.

어쨌든 내 축소 가방을 뒤적여서 안에다 잘 다림질해서 개어두었던 새 셔츠를 꺼내서 웃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손우경이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나한테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옷을 다 갈아입고 놈을 슬쩍 바라보자 그제야 내 옆으로 걸어와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뺨을 만지는 손길이 경직되어 있었다. 놈의 표정도 그리 좋지가 않다. 피로에 지쳐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넋이 나갔던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뺨을 만지며 지그시 응시하던 손우경이 날 껴안았다. 항상 있는 일이라서 당연히 거부하거나 하지 않고 안겨 있는데, 손우경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현아.”

“……어.”

손우경이 잡고 있던 내 머리를 자기 쪽으로 더 꽉 끌어안으며 이야기했다.

“아까는, 너 진짜 어떻게 돼버린 줄 알고 순간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

“미안해. 둘만 남겨놓고 가는 게 신경 쓰였는데 막상 네 입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정말로 눈에 보이는 게 없었어. 할 수만 있다면 널 작게 만들어서 하루 종일 나만 볼 수 있게 품에다 넣고 다니고 싶을 정도니까.”

“손우경, 너 미쳤어? 너야말로 진짜 왜 그래?”

뭐가 어찌 된 건지 제대로 설명이라도 좀 해주든가 전혀 영문도 모르겠는 말들을 하염없이 중얼거리는 손우경이 나로선 무척 답답하게 느껴졌다. 녀석이 내 고개를 치켜들게 하고서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져다댔다. 나를 만지고 있는 손길도 평소와는 달리 엄청 신중하기만 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게 넘겨주는가 하면 키스도 살며시 입술끼리 맞대는 정도였다. 내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듯이 닿고 있는 놈의 입술이 간지러웠다.

미치려면 곱게 미치라는 말이 있는데 얘가 진짜 곱게 미쳤나 보다.

“손우경. 그만하고 무슨 설명이라도 좀 해봐.”

“…….”

“뭐가 어떻게 된 거냐구. 게다가 넌 어울리지 않게 나한테 왜 이리 쩔쩔매고 있는데?”

하라는 대답은 않고서 내게 또 키스를 했다. 말캉한 혀가 안쪽으로 스며들어와 천천히 입안을 휘젓는다. 자기가 내킬 때에는 제법 다정하게 대해주기도 했지만 스킨십 자체는 강압적인 걸 좋아하는 터라 놈의 이런 모습에 기분이 얼떨떨했다.

손우경은 아까부터 내 표정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나한테 자기를 맞춰주고 있었다. 내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이라도 되듯이 손길도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녀석의 그런 가증스러운 작태에 거북함을 느끼고서 손을 들어 놈의 이마에 얹었다.

“너 어디 아파? 왜 이래?”

열은 없었다. 근데 이제야 느끼는 거지만 나는 어느새 손우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고 있었다. 열이 있나 확인하려고 놈의 이마에 손을 얹는 나라니. 내가 언제부터 이랬더라.

그런데 한번 이마에 얹힌 손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는다. 내 얼굴을 항상 만지작대는 손우경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이긴 하지만,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 결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고 싶었다. 코도 만져보고 싶고, 입술도…….

이마에서 손을 멈칫하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손우경이 입을 열었다.

“……만지고 싶으면 계속 만져도 돼.”

놈이 허락했지만 나는 그러질 않았다. 한번 만졌다가는 앞으로도 계속 그러고 싶을 테니까. 손을 떼려는데 녀석이 내 손목을 잡아서 재차 자기 얼굴로 가져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현아, 만약 나중에라도 오늘 일이 전부 기억나면 그때 나한테 다시 화내.”

대체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내가 다 잘못했어.”

심장이 불안하게 박동했다. 녀석이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널 놔줄 수 없어. 크게 화를 내도 좋고 날 때려도 상관없어. 어쩌면…… 네가 정말로 미쳐버린대도. 그런 거 다 내 옆에서만 해.”

“…….”

“너한테는 이미 내 자존심 같은 거 버린 지 오래야.”

손우경이 내 얼굴을 커다란 양손으로 감싸고 들게 했다. 놈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실제로 만질 수 있는 네 실물이 지금 여기 내 손안에 있는데.”

“…….”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지 않아.”

나하고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건지.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녀석에게 얘기했다.

“너 가끔씩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오늘따라 그 짓이 절정을 이룬다.”

손우경과의 이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도무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얼굴을 틀어쥔 놈의 한쪽 팔목을 붙잡곤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네가 나에게 왜 사과하는 건지, 지금 뭔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감이 안 잡히지만.”

이 말을 해도 되는지 살짝 고민이 됐다. 나는 녀석과 맞물렸던 시선을 머쓱하게 바닥으로 끌어내리면서 속에 담겼던 얘기를 마저 내뱉었다.

“이게 일단은 상대적인 거라는 걸 알아둬.”

“…….”

“이제껏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 너만큼 나한테 잘해준 사람은 없었어.”

기억이 사라진 부분에 뭐가 들어 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만일 다시 기억난다고 해도, 설령 그게 아무리 큰 잘못이라고 해도 나는 아마 손우경에게 화를 내진 않을 거였다. 내가 한 말 그대로였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손우경처럼 나를 대해준 사람은 없었으니까. 주위에서 내게 무슨 짓을 저지르든 나는 언제나 그걸 다 감수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이렇게 타인에게서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본 적도 손우경이 처음이었다. 기억조차 안 나는 일로 벌써 사과까지 받았으니 이젠 그게 무슨 문제든지 관계없었다.

“그리고 미칠 거면 네 옆에서 미치라는 말.”

다른 무엇보다 왠지 그 말이 인상 깊게 들렸다.

“그건 아예 전제 자체가 틀렸어.”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는데 축축한 물기가 목소리에 뒤섞여버렸다.

“……왜냐하면 난 이미 제정신이 아닌걸.”

오래전에 안 미쳤다면 난 아마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였다. 내 부모님이 눈앞에서 아돌프에게 살해당했던 날부터.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여태까지 내가 어떻게 맨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버텼겠어.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면서 나는 내가 미치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괜찮아, 이제부터는 다 잘될 거라고. 그래,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기겠지.

하지만 내게 처한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렇게 잔인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더 이상 물러날 구석이 없어지자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서 놓아버리기로 했다.

언제부터인가 관음존자가 그 방 안에서 내 정신 안에 심어둔 무서운 환각의 씨앗을 수십 개나 발아시켜도 며칠씩 앓아눕거나 공포에 질려 떨지 않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관음존자가 나에게 내린 첫 번째 임무는 바로 살인이었다. 아돌프가 알려준 대로 나는 환살 부적을 사용해서 내가 죽여야 할 상대방에게 어릴 적부터 그 어두운 방에서 경험했던 어떤 환각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내가 경험한 것 중에서는 그나마 경도가 약한 편이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가 오줌까지 지리며 점점 정신이 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벌써 옛날에 미쳐 있었다는 것을.

그러던 중 손우경 너를 만나서 내가 미쳤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그때의 시절로 되돌아갈 때가.

마지막에 있었던 일들은 정말 기억이 안 나지만, 사실 파오와의 대화 도중에 네가 나타나 나에게 했던 짓들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아직 내 머리에 남아 있었어. 솔직히 이렇게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조차 네가 끔찍하고 무서운 반면에 그럼에도 아직은 너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커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척을 하고 있었어. 다른 사람들 볼 면목도 없었고…….

너로 인해서 마치 내가 평범한 사람들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잠시 착각하고 있었나 봐. 오늘 있었던 일들은 내가 이때껏 경험했던 일들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이것 역시도 단순한 환각으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인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직 너에게서만은 상처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내 하찮은 욕심이었다.

네 얼굴을 보고 있는 게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그래도 참는 것엔 익숙하니까. 십오 년간 관음존자 밑에 있으면서 내 감정을 숨기는 데는 도가 텄거든.

나는 손우경에게 말했다.

“우경아, 부탁이 있는데.”

“…….”

“나 키스해줘.”

내게 입을 맞추는 동시에 눈을 감은 네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잠시 후 나도 살며시 눈꺼풀을 닫았다. 가능하다면 뜨거운 네 입술과 날 꽉 붙든 네 양손의 감각만을 기억하고 싶었다.

* * *

나는 빛과 어둠의 초환을 이루는 자, 글릭데르.

내가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인생이라는 하나의 긴 여정지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남기게 될 이 그리모어는 아마도 인류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위대한 업적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나의 자서전임과 동시에 내가 탐구했던 모든 마법적인 오의가 총망라된 비전 중의 비전이다.

그러니 나의 죽음 이후로 이 책을 발견하게 될 이들은 들으라.

진리는 그것을 구하려는 자에게는 언제나 열려 있는 동시성의 문임을 기억하라.

그 수많은 문들 중에서 어느 것을 열고 들어가든지 모든 것은 다 그대의 선택임을 알라.

다음 장을 넘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볼 것은, 이 ‘비밀들’에 대해서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자문해보는 것이다.

* * *

다음 날 손우경은 만 하루도 안 돼서 와이번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오조는 글릭데르의 탑으로 떠나기 전에 와이번의 목에 해먹 형태로 매달아놓은 천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퍼질러 자는 중이었고, 파오와 나는 안전장치 삼아 묶어놓은 가죽 끈을 붙잡고 현재 허공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손우경이야 와이번의 목에 걸터앉아 나름대로 즐겁게 놀고 있다지만, 뒤에서 하늘의 바람과 와이번의 날개의 저항을 다각도로 받고 있는 우리는 몸을 똑바로 가누는 것조차 버거웠다. 지금 우릴 태우고 있는 이 와이번 놈은 성격이 얼마나 포악한지 약 오 분에 한 번꼴로 자기 분을 못 이겨서 귀청이 떨어지는 울음을 토해댔다.

와이번을 타고 가면 좀 편하게 갈까 했더니 이럴 바엔 열흘이 걸리든 석 달이 걸리든 차라리 두 발로 걸어서 가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만 네 시간에 걸친 고공 비행은 체감상으로는 사십 시간, 그 이상으로 느껴졌다.

와이번이 하늘에서 긴 포물선을 그리더니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구름에 가려 있던 대마도사의 탑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냈다.

- 끼에에에에엑!

와이번의 울음소리에 몸을 바짝 엎드린 채 두 귀를 틀어막았다. 돼지 멱따는 소리도 저것보다는 더 아름다울 것 같다. 바닥으로 착륙하던 순간, 녀석이 갈무리하던 날갯짓 때문에 땅에서 흙먼지가 올라와 설상가상으로 숨까지 턱 막혀왔다. 먼지를 잔뜩 들이마시고서 콜록콜록하며 와이번의 몸에서 내려오려는데 손우경이 먼저 내려가 밑에서 손을 잡아줬다.

파오가 그 모습을 보며 꼴값들 한다며 빈정거렸지만, 왜 네놈은 와이번 목에 묶여 있는 해먹을 풀고 있는 건지 내가 좀 물어봐도 되겠냐. 황새가 보자기에 물어 오는 아기들처럼 와이번의 목에 걸린 해먹에서 쿨쿨 자고 있던 새끼 여우가 바닥으로 풀어헤쳐진 해먹 안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이제 도착한 거냐고 자다 깬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빼고 위를 쭉 올려다봤다.

대마도사 글릭데르의 탑은 별다른 특징도 없이 그저 드높게만 지어놓은 건물이었다. 담쟁이덩굴이 탑 전체를 촘촘하게 휘감아 올라가서 첫인상은 어딘지 고풍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다만 건물이 너무 오래돼서인지 아무도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음산한 우중충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이걸 뭐라 해야 되지. 좀 기분 나쁜 곳이라고 해야 하나.

마침 새끼 여우는 자꾸만 쏟아지는 잠의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자기 뺨을 양손으로 안 아플 정도로 찰싹거리며 때리고 있었다. 그런 오조에게 손우경이 물었다.

“야,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는 거 맞아?”

해먹 안 쪽잠이 불편했는지 오조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낑낑 일어나면서 대꾸했다.

“아으, 허리야. 내가 룸버린을 떠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글릭데르는 분명히 살아 있었어. 그렇게 쉽게 죽을 노인네가 아니야. 물론 나이가 많으니 어쩌면 죽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노망이 더 심해져서 자기 탑 안에 거의 유폐되어 있다시피 한다고 그러던걸.”

듣고 있던 손우경이 뭔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너 그 소문은 누구한테서 들었는데.”

손우경의 물음에 오조가 퉁명스러운 일자 눈으로 눈동자를 쓰윽 돌렸다.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해준 바람의 정령 실프가 허공에서 새끼 여우를 힐끔 내려다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서 소문을 들었던 게 아니라 허구한 날 실프를 통해 시시때때로 자기 스승의 생사 확인을 해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조가 말했다.

“뭐, 글릭데르가 죽었다고 해도 티페레트로 가는 포털은 아직까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커. 교단에서는 보통 작은 일처리 하나 하는 것도 서로 미루고 미루다가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처리하거든. 그러니까 한번 뚫어놓은 게이트를 다시 회수하려고 누가 이 탑을 방문하지는 않았을 거 같아.”

오조는 자기가 들어 있던 해먹을 바닥에서 주섬주섬 모아다가 어깨에 짊어지며 탑에 들어가기 전의 주의 사항들에 대해 일러주었다. 나는 주의 사항은 귀에 안 들어오고 새끼 여우가 해먹을 왜 한쪽 어깨에 들쳐 멨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 탑의 주인인 글릭데르는 우리 마법사들 중에서도 정신 세계가 굉장히 특이했던 사람이야. 탑 자체가 거대한 리추얼 의식이나 마찬가지라서 저 안에서 무엇을 보게 되든지 무시하는 편이 좋아. 그리고 탑 안에는 각 층마다 그냥 일반적인 방들도 있지만 다른 차원들로 연결된 방들도 더러 있을 테니 절대로 아무 문이나 함부로 열면 안 돼. 자칫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못 돌아올 수도 있어.”

오조의 말에 손우경이 의아함을 표했다.

“탑 안에 다른 차원으로 연결된 방들이 있다구?”

“아, 그건 우경이 네가 사용하는 기문파공하고는 다른 원리일 거야. 너랑은 다르게 교단 본부와의 포털을 연결하는 작업은 여간해선 쉬운 일이 아니라서 설치하다가 무수한 실패작들이 나올 수밖에 없거든. 이미 뚫려버린 차원 통로를 아무데나 내다버리기가 뭐해서 한 군데에 모아놓은 거라…….”

손우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뭐, 그렇겠지. 공간을 잘라서 이어붙이는 기술은 세상에서 딱 둘만 사용할 수 있는 건데. 바로 손우경과 관음존자.

키가 작은 오조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해먹이 자꾸 바닥에 끌리자 보다 못한 파오가 그걸 대신 가져가려고 들었다. 여태 야무지게 말만 잘하던 새끼 여우가 얼굴이 빨개지더니 당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아냐. 이건 내가 들 수 있어.”

후다닥 탑의 입구로 가버리는 오조를 바라보며 손우경이 대충 짐작이 간다는 투로 파오에게 말을 건넸다.

“대체 쟤한테 뭔 짓을 한 거야.”

그러자 파오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 짓도.”

* * *

……사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비밀도 아니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종말 이전의 인류는 지금의 세상보다 훨씬 더 진보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듯하다. 마법의 시대 이전에는 과학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과학의 시대에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초속으로 날아다니는 거대한 기계 용들이 입에서 미사일 브레스를 뿜을 때마다 수천만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마법’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언어’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언어는 모든 사물의 기초를 이룬다. 당신에게 예를 들어 ‘루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행동을 도모할 때 당신을 초청하거나, 혹은 부탁하거나, 아니면 함께 수다를 떨고 싶거나, 그 밖에도 당신의 도움이나 존재가 필요한 모든 순간들마다 모두 ‘루이’라고 그대의 이름부터 부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아랫배가 나왔지만 성격이 푸근한 루이가 될 수도 있고, 깡마른 몸에 대인 관계가 무척이나 서투른 루이, 어쩌면 피부 트러블에 시달리는 예민한 성격의 루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은 바로 당신의 이름인 ‘루이’다.

이번엔 반대로 당신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가정을 해보자. 사람들은 이제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갈 때나, 뭔가 부탁을 하거나, 등 뒤에서 날아오는 파이어 볼을 빨리 피하라고 고함을 쳐야 할 때 등등.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곤란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이름이 사라진 당신은 존재감이 점점 안개처럼 희미해져갈 것이고, 루이가 아닌 당신은 이제 더 이상은 예전의 당신이 아니게 된다.

이름이 없는 당신은 그럼 뭘까?

지금의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이름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정의한다. 꽃, 새, 배, 하늘, 바다, 마법사……. 그것은 모든 인류가 상호적인 동의를 통해 일궈낸 결과이자 ‘창조’ 행위이다.

대종말 이후로 지금은 금지된 종교 서적인 ‘성경’에 의하면 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말씀’, 즉 단어였다. 하나님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겨났다. 신은 말씀을 통해 7일간의 천지창조를 이끌어냈다.

그대는 고대 아랍의 신비주의에서 발현된 ‘아브라 카다브라avrah kadavra’라는 주문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가? 그것은 내가 ‘말을 통해 창조한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우리 로고스와 룸버린의 마법사 중 말이 가진 엄청난 힘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라 믿는다.

언어는 즉 창조다. 창조 행위는 우리가 마법을 행하는 기본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통해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남녀를 하나의 개체로 묶어버릴 수도 있다(동양에서는 이것을 음양의 조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혼은 임신과 출산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생명의 탄생은 그대가 결혼이라는 마법을 통해 일궈낸 하나의 창조 행위다.

하지만 언어는 언제나 창조 행위만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언어만큼 무서운 파괴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전쟁, 죽음, 질병, 이별, 이런 것들이다.

나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로고스에서 언령을 익히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왔다. 지금, 여든아홉으로 대마도사의 자리에 올라선 이후로는 단지 이 언령의 힘만으로도 사람의 목숨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가령 ‘내가 너를 죽이겠다’는 언령을 뱉게 되면 이 말을 듣는 자는 수 분 이내로 자신의 머리에서 스스로 떠올리게 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인과관계가 확실한 대우주의 법칙과 내가 한 것 이상으로 다시 되돌려 받는 마법의 역풍을 아는 자라면 결코 그런 어리석은 행위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이 언령의 핵심은 역시나 언어에 있다. 언령을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를 담아서 말로써 상황을 조종한다. 다만 이 상황이라는 것은 내 말을 듣는 상대방이 적어도 내 얘기를 알아들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지적 능력을 가졌거나 그에 준하는 동시대의 공통된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

여기 오래된 전설 중에 아주 재미난 일화가 있다.

대종말 전의 이야기다. 당시는 지금처럼 하나의 대륙이 아니라 오대양 육대주라고 불리는 신기한 개념과 수천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세상이었다. 우리가 어두운 땅굴 도시에서 반세기를 살아가는 동안 땅 위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균열은 그 모든 대륙들을 마치 패치워크처럼 섞은 뒤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탐험가가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서 아메리카라는 지역을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다(그는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을 지금의 아부-게르다로 추정되는 인도라고 생각했었다고 전해진다). 콜럼버스의 배가 아메리카의 해안에 도착했을 때, 신대륙의 원주민들은 아무도 그 배가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배의 형체마저 알아볼 수 없었다. 그야 원주민들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배라는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머릿속에 배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의 세상에는 절대 ‘배’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었다.

콜럼버스의 배가 해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던 것은, 정령들이나 고차원적인 존재들과 직접 교류하던 샤먼들뿐이었다. 샤먼들은 바다에서 배가 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원주민들에게 그 생김새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이윽고 원주민들 역시도 배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언어가 없으면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자신의 머리에 담긴 수많은 개념들이 눈이라는 영사기를 통해 투사되는 거대한 스크린이다. 한 시대의 뛰어난 구도자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는 에메랄드 태블릿에 다음과 같은 위대한 명언을 남겼다.

‘위와 같이 아래에서도 그러하다.’As Above, So Below

지금은 사라져버린 구시대 종교의 어느 기도문에 나오는 한 구절도 함께 첨부하겠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마법은 언어들로 이루어진 나의 내부 세계를 조립한 후, 그것이 불량이든 완제품이든 전혀 개의치 않고서 세상 밖으로 내 생각의 결과물을 내보낸다.

그러니 자나 깨나 그대의 생각을 조심하라. 당신의 삶을 이루는 그 모든 것이 실은 마법일지니.

* * *

겉과 안의 사이즈가 다른 건물은 이제 신선하지도 않다. 위로만 길게 솟아 있던 탑의 내부치고는 어째 더럽게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탑의 입구를 열고 들어서자마자 집주인의 성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거대한 시계추가 무서운 속도로 움직여댔다. 저거에 스치기라도 했다간 그냥 꿱 즉사였다. 오조의 직언대로 이 글릭데르란 놈도 보통 미친 인간이 아니구나 싶었다.

수백 개의 계단과 문들이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며 상하좌우로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그것도 계단의 배열과 문의 위치가 계속해서 바뀌어가고 있었다.

우리 세 명 다 오조만 쳐다봤다. 허나 새끼 여우는 꽤나 번거롭게 됐다는 얼굴로 지팡이나 붕붕 흔들어댔을 뿐이다. 손우경이 네가 막막한 표정을 지으면 어쩌냐고 조용히 짜증을 냈다. 정말 조용한 짜증이었다. 왜냐면 오조가 돌연 싸늘한 눈빛으로 변해서 바닥에다가 소환진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럴 때에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았다.

소환진에서 무슨 공같이 생긴 새카만 털실 뭉치들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털실들은 각각 계단들을 올랐다. 어떤 놈들은 계단에서 뾰족한 가시가 올라와서 죽어버리고, 어떤 놈들은 계단 위로 돌덩어리가 떨어져서 압사되어 죽어버렸다. 뭐 그 밖에도 일일이 열거하기가 귀찮을 만큼 아주 다양한 방법들로 죽어나갔다. 많은 털실 뭉치들이 보라색 즙을 뿜어가며 생명을 달리하는 와중에도 몸을 통통 튀겨가며 별문제 없이 계단을 올라가는 애들이 있었다.

오조는 그런 녀석들이 선점한 계단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쭉 올라가다 보면 포털이 연결된 글릭데르의 방까지 도착할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계단을 올라가던 털실 뭉치 하나가 끼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손우경이 생긋 웃으며 오조 너부터 먼저 올라가보라고 순서를 양보했지만 새끼 여우는 못 들은 척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은 거의 다 침입자 방지용으로 만들어놓은 부비트랩이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진짜 계단이 따로 있을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봐.”

우리는 털실 뭉치들이 차례차례 죽어나가는 장면을 구경하면서 막간을 이용해 점심을 챙겨 먹었다. 도톰한 만두를 한입씩 뜯어 먹고 있자니 이윽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털실 뭉치 하나가 꽤 위쪽까지 전진하는 중이었다. 오조가 그것 보라는 얼굴로 먼저 계단을 올랐다.

오조가 선택한 계단으로 뒤따라 올라가니 정말 다른 계단들이 정신 산란하게 배열이 바뀌는 와중에도 이 계단만큼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순서는 오조, 손우경, 파오, 나 순이었다. 계단 옆에는 허공 위에 매달려 있는 문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오조는 우리보고는 함부로 문을 열어보지 말라고 하더니 자기야말로 제일 먼저 앞서 나가면서 지나치는 문들을 하나씩 다 열어보고 있었다. 그러던 새끼 여우가 갑자기 어느 문 안으로 불쑥 들어가버렸다. 우리도 문 안으로 따라 들어가야 하나 계단참에 서서 한참 망설이고 있는데 별안간 오조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어깨에 짊어졌던 해먹 안에다가 뭘 잔뜩 쓸어 담고 나왔다.

해먹에서 삐져나온 물건들을 훑어보니 대부분이 희한한 마법용품들로, 별의별 것들이 다 담겨 있었다. 오조는 올록볼록해진 해먹을 바닥에다가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그 표면을 탁탁 정리하면서 유니콘의 뿔로 된 지팡이와 오팔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수정구슬은 따로 빼내서 자기 로브 안에다 챙겨 넣었다.

흠, 순 도둑놈이네, 저거?

오조는 적나라한 우리의 시선을 의식한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글릭데르가 어차피 죽기 전에 나한테 다 물려준다고 했단 말야!”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니.”

오조는 그 후로도 계단을 올라가는 틈틈이 문 안쪽으로 들어가서 온갖 마법 관련 용품들을 싹싹 긁어모아 가지고 나왔다. 해먹의 크기가 걷잡을 수 없이 켜져서, 결국엔 손우경이 뭉글이의 죽음 때에도 한 번 선보였던 공간을 압축시킬 수 있는 투명 상자를 기문파공으로 하나 더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새끼 여우가 양손을 입가에 공손하게 모으고서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꺄아, 이거 정말 저 주시는 거예요?’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뒤에 있던 파오가 입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왜 그 유리 돔 도시를 탈출하기 전엔 자기에게 그런 좋은 걸 안 만들어줬냐고 말이다. 아무래도 비슷한 놈들끼리 천생연분인가 보다.

어쨌든 티페레트로 이동하는 포털을 타러 온 건지, 마도사의 탑을 털러 온 건지 잘 구분이 안 가지만, 새끼 여우는 투명 상자를 마치 연장통처럼 옆구리에 끼고서 본격적인 절도 행위에 착수했다.

* * *

카발라는 연금술과는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응 관계이다.

카발라는 그 자체로도 신묘한 언어의 연금술을 뜻한다. 이 두 가지 체계가 추구하는 목적은 각각 다른 갈래로 가는 듯하면서도 종래에는 하나의 길로 일치한다. 그것은 신에 이르는 길,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마법사들과 연금술사들은 자기 자신이 만든 세계의 신이 되는 방법을 연습하기 위해 스스로 인조인간을 창조하려 했다. 그것이 바로 골렘과 호문쿨루스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한 것들로는 뭔가가 부족했다. 결국 우리는 연금술과 신비 의식의 오의들을 모아서 하나의 ‘완전한 것’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우리들 궁극의 목적인 생명의 나무 세피로트가 처음부터 완성된 자이자 신의 형상을 본떠 창조한 완전한 인간.

아담 카드몬Adam Kadmon.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인 카발라에서 나오는 인간의 원형을 뜻함. 크게 몰라도 되는 개념입니다만, 제가 만들어낸 신조어가 아닌 이상 대부분 각주를 달아드리고 있습니다.

팔년에 거쳐 진행된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실험에 참여한 우리는 모두 환희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다른 호문쿨루스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유리병 안에서 빠져나온 그것은 놀라운 속도로 자라났다. 우리의 지혜와 마법 지식의 정수들을 마른 스펀지처럼 빠르게 흡수하며 근 일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룸버린과 로고스의 여타 젊은 마법사들이 도저히 상대도 안 될 만큼 훌륭하게 성장했다.

아담 카드몬은 머리가 영리했으며 몹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십년이 걸려도 반절도 이해하기 어려운 카발라의 세피로트 체계를 아담 카드몬은 백 세가 훌쩍 넘은 대마도사들마저 통달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줄줄이 깨우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겐 식욕이나 수면욕, 또는 성욕과 같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충족시켜야 하는 부분은 물론 희로애락의 감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아담 카드몬은 항상 새로운 지식 체계에 굶주려 있었고, 그런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영악함을 드러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그것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담 카드몬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언령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저 아름다운 얼굴로 우리 중에서 누군가를 꼬여낸 것이 틀림없었다. 마치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뱀 같은 녀석이었다.

아담 카드몬은 언령을 통해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안에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은 형상을 창조해내었다. 형상 복제는 언령 기술 중에서는 어려운 편에 속하는 고급 기술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초보자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윽고 아담 카드몬은 형상 복제로 만들어낸 우리의 복제품들을 한 명 한 명 풍선처럼 터트리더니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이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웃어댔다.

이 자리를 빌려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있다. 사실 우리의 피조물인 그 아담 카드몬은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그저 남의 특기를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는 카피 능력이 있는 존재였을 뿐이다. 팔년에 걸친 실험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고 있었다. 마침내 교단으로부터 지원되던 막대한 예산이 전부 끊길 위기에 처하게 되자 서둘러 임시적으로 급조해낸, 조금 특이한 능력을 가진 일개 호문쿨루스였다.

허공의 형상들은 이제 나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이 형상의 한쪽 머리를 움켜쥐자 이상하게도 내 머리에서 깨질 듯한 두통이 함께 야기되었다.

나는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움켜쥐며 우리가 무서운 괴물을 만들어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 * *

계단을 오를수록 주위 풍경이 점점 기상천외한 곳으로 바뀌어간다.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 비정형의 아메바처럼 생긴 것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무중력의 우주에라도 와 있는 것 같았다. 물컹물컹한 액체가 내 몸통을 통과하며 쓱 스쳐 지나갔다.

글릭데르의 물건들을 싹쓸이하느라 그새 기운이 쏙 빠진 오조가 어느새 맨 뒤로 처져서 우리를 힘들게 따라오고 있었다. 계단 양옆에 달려 있는 문들이 자꾸 덜컹거렸다. 직사각형으로 된 문틈에서는 요상한 빛들이 새어나왔다. 파오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살짝 열어봤다가 그만 엄청난 장면을 목격해버렸다.

문 너머에서 커다란 얼굴이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너무 커서 그런지 피부에 난 모공 하나하나가 동굴처럼 커다랗게 보였다. 눈에 도드라진 실핏줄들이 너무 징그러웠다. 그것이 손을 들어 올렸다. 문 앞에 서 있던 파오에게 나이테처럼 거대한 지문이 다가오는 순간, 파오가 얼른 문을 닫아버렸다.

“뭐, 뭐야, 저건…….”

손우경이 다른 문을 열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문 안에서는 어떤 거대한 여자가 책상에 앉아 니은자로 된 자판기를 타닥타닥 두들기고 있었다. 혹시 이 문들 너머는 무슨 거인들이 사는 세상이라도 되는 건가. 그 여자는 우리가 문을 연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우, 이것들이 아직도 여기에서 헤매고 있네. 나 상반기까지는 꼭 책 내야 하는데…….

거인 여자의 표정은 굉장히 우울해 보였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이었다. 최소 여섯 시간 이상은 쉬지 않고 꾸준히 걸었을 텐데, 포털이 있다는 글릭데르의 방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체력이 달리는지라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걷기만 하다가 너무 지겨워져서 내 옆에 있던 문을 슬그머니 열어봤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가 바로 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그때 멀쩡했던 계단이 파도처럼 요동치듯 흔들렸다. 나는 두 다리의 중심을 잃고서 손잡이를 붙잡고 있던 문의 안쪽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 * *

광기를 드러낸 아담 카드몬이 떠나간 자리는 쑥대밭이었다. 교단이 입은 피해는 극심했다. 절반이 넘는 마법사들이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것에 의해 내 머리의 일부분을 다치게 되었다. 결국 아담 카드몬에 관한 것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관계자들은 이 일에 대해 함구할 것을 맹세하는 침묵의 서약을 했다.

다만 그때의 후유증인지 나는 성격이 괴팍해지게 되었다. 머리에서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로 말과 행동이 튀어나갔다. 게다가 때때로 귓가에 이상한 환청까지 들려와 계속해서 누군가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도 어떤 놈들이 나를 호시탐탐 없애려고 들어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영역에 틀어박혀 이 그리모어를 작성하는 중이다.

아담 카드몬의 참담한 실패 이후로 나는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의 신성을 깨우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했다.

나는 신이 되어야 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위대한 불멸의 존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험과 연구에는 늘 흡족한 결과 대신 시행착오만이 뒤따랐다. 내 정신적인 좌절감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쯤, 교단에서 나를 호출하여 별안간 어떤 아이를 떠맡겼다. 그 아이는 문차일드로 태어나 극히 드물게 무한한 그릇을 가진 소유자였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우칠 정도로 무언가를 배움에 있어서 빠른 습득력을 자랑했고, 문차일드라서 그런지 마법에 관한 이해도 역시 폭넓은 편이었다. 그러나 교단에서는 아담 카드몬 이후로 훗날 자신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영리한 후대 양성에 몹시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그 아이에게는 정신적인 지능을 낮추는 약물이 끝없이 투여됐고 그 영리하던 아이는 차츰 어눌한 말투와 멍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어차피 그 아이는 전쟁에서 소모품으로나 사용될 이레이저였다. 이레이저들은 개인이 가진 마나 에너지를 기준치 이상으로 극대화시켜서 중요한 전투 시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키워졌다. 사실 이레이저 따위로 쓰기에는 아까운 인재였지만, 나 또한 아담 카드몬에게 당했던 과거의 여파가 컸기에 그 아이를 한 명의 어엿한 마법사로 키울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아이에게 마법과 소환술을 가르치는 동안, 내 개인적인 실험을 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모두 그 아이에게 풀어나갔다. 맨몸으로 벗겨놓고 죽지 않을 정도로 매질을 하거나 며칠간 굶겼다가 썩은 음식을 주는 일쯤은 예삿일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정신 훈련이라는 핑계를 대고서 잔인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천성이 착한 아이였다. 내게 얻어터져서 보라색으로 퉁퉁 부은 얼굴로 바닥에서 딱딱한 빵을 뜯어먹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법에 관한 열의만은 대단했다. 소환술을 배운 지 약 2년 만에 수준 높은 상위 계급들과의 계약이 가능해졌다. 그야말로 천재였다. 아이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질투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를 가르칠수록 내 머리를 이렇게 미쳐버리게 만든 아담 카드몬이 생각났다.

마침 랜드리올전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나는 아이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라 초환이 금지되어 있는 어느 최상위 계급과의 계약을 준비시키기 위해 서둘러 교단으로 보고서를 올렸다. 랜드리올의 경계선이 무너지면 룸버린의 함락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머리가 유아 수준으로 멍청해지긴 했지만 직감만으로 그 계약을 거부하려 드는 아이를 달래려고 이번 일이 끝나면 너에게 아주 높은 직위를 부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에 아이가 기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물론 허울뿐인 직위였지만 아이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 * *

이곳은 낯선 세상이었다.

내가 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던 건 기억이 나는데 그렇다고 이런 한적한 풀밭에 떨어지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호수처럼 파란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빛깔을 자아냈다. 문에서 떨어진 모습 그대로 풀밭 위에 누워 있는데 주변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은은한 풀 냄새가 풍겨오는 신선한 공기가 몹시 상쾌했다.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가 녹음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이었으나 이상하게도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

누워 있던 등이 하도 불편해서 벌떡 일어나보니 놀랍게도 내 밑에서 누가 자고 있었다. 밑에 깔려 있던 것은 아직은 어린 소년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눈을 감고 있던 소년이 인상을 쓰며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향냄새…….”

손우경도 가끔 나한테서 향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그건 갈아입을 옷들을 전부 담아놓은 내 축소 가방 안에 나그참파 스틱들이 잔뜩 든 향 통을 방향제의 역할로 함께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포타라카에 있을 때야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니 자연스레 향냄새가 몸에 뱄지만, 외지에 오래 나와 있다 보니 자주 씻을 수가 없는데다 마음의 여유를 느낄 짬이 없었다. 이 나그참파 향에는 명상할 때 몰입에 도움을 주거나 정신을 맑게 정화해주는 힘이 있었다.

상체를 일으키며 소년이 두 눈을 떴다. 어린 녀석치곤 되게 잘생긴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스르륵 뜨인 눈동자 색을 보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은회색 눈동자가 나를 건방지게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뭐냐, 너.”

내가 아는 그 누구와 판박이처럼 닮은 얼굴이었다. 은회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풀밭에서 일어나 흠칫하고 있던 내 손목을 잡으며 다시 물었다.

“외부인 주제에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쪼그만 녀석에게서 쉽사리 범접하기 어려운 기백 같은 게 풍겨 나왔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데도 나는 충분히 소년에게 압도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두 눈동자가 밤하늘에 뜬 달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잡혀 있던 손목에서 강한 힘이 들어갔다.

“누구냐고 물었을 텐데.”

손목이 확 끌어당겨졌고 풀밭으로 쓰러지듯 등이 눕혀졌다. 순식간에 내 위에 걸터앉은 소년이 목을 틀어쥐고서 거만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이대로 네놈의 목을 따버릴 수도 있어.”

앳된 목소리지만 말투라든가 이 건방진 느낌이 자꾸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말없이 날 응시하던 눈빛이 조금씩 일렁거렸다. 소년이 고개를 숙여서 내 뺨에 코를 대고서 숨을 들이쉬었다.

“……너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녀석이 왠지 누구인지를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비록 어린아이긴 해도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상대는 세상에 딱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이 고개를 쳐들고서 내 얼굴로 손가락을 뻗는 순간, 등 뒤에서 화한 기운이 쏟아지더니 다른 억센 손아귀가 날 문 안으로 끌어당겼다.

소년이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나를 보며 외쳤다.

“이봐! 잠깐 기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 * *

인간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과연 어디에서 찾아오는 것인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나’라는 존재는 대체 누구인가.

이런 것들은 마법사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내면 성찰을 통해 스스로에게 한 번쯤은 던져본 질문일 것이다.

이번 장은 동양의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즉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 사람이거나 우리 마법사들 중에서 내면의 자아를 깨우쳐서 신과의 합일을 이룬 자들에게는 아무 보잘것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분명 관심을 가질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적어둔다.

마법은 잠재의식과의 긴밀한 소통 과정이다. 아무리 강력하고 넓은 마나의 그릇을 가졌더라도 자신의 내면 세계인 잠재의식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 속으로 마법의 힘을 불러올 수 없음을 명심하라. 거듭 말하지만, ‘위와 같이 아래에서도’, 그러함을 상기하라.

남녀노소 빈부에 관계없이 오직 잠재의식 안에 입력된 ‘말씀’들로 인해 당신이 사는 세상의 질이 결정된다. 이것은 대우주의 법칙이자 불편한 진실이다. 불행한 생각들이 입력된 잠재의식은 그대의 삶에 추악하고 기분 나쁜 것들을 끌어올 것이며, 행복한 생각들이 입력된 잠재의식은 그대의 삶을 기쁨과 충만함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줄 것이다.

지금이 전쟁 중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적을 죽이기 위한 마법 기술을 연마하고 있지만 기실 이 마법이란 것은 개개인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인간 중심의 기예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나의 인생을 기쁨과 충만함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만 아무리 써도 남을 만큼 풍족한 재산과 좋은 집,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성격과 외모, 그 밖에 원만한 대인 관계 등을 내 곤궁한 인생 속으로 끌어올 수가 있을까.

사실 이 잠재의식을 다스리는 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잠재의식에 ‘말씀’들을 입력한다고 해서 가능해지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이것의 해답은 자신의 ‘감정’ 컨트롤에 있다. 입력하고 싶은 ‘말씀’을 변성의식 상태에서 상상하며 그에 상응하는 감정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내가 원하는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감정이야말로 잠재의식에서 가장 쉽게 반응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인생의 해답을 푸는 열쇠가 그리 간단할 리는 없다.

살면서 항상 비슷한 경험이나 실수를 거듭 반복하게 되는 일이 생기지 않는가?

예를 들어 어릴 적 큰 개에게 물리는 경험을 하게 됐다고 가정해보라. 당시에 그 개에게서 오금을 저린 무서움과 공포심을 느끼게 됐다면 당신의 잠재의식은 분명히 그 감정을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내면에 그때의 기억을 빠짐없이 기록해둘 것이다.

잠재의식은 그대가 지나가다가 개 한 마리만 봐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것을 안에서 감지하고 그때마다 당신의 인생이라는 들판에다가 계속해서 무서운 개들을 풀어놓을 것이다. 그것이 약점이나 트라우마로 굳을 때까지 같은 일을 끝없이 반복함으로써 당신의 인생 리스트에는 결국 개 공포증이라는 특징 하나가 추가된다. 그리고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개들이 나만 보면 사납게 짖으며 물려고 든다고.

허나 애꿎은 개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그날의 일진이 나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내부 세계가 그러했기에 외부 세계에서도 똑같이 벌어진 일일 뿐이다.

잠재의식 안에 나의 싫은 부분들과 크고 작은 징크스들이 존재하는 한은 아무리 원하는 ‘말씀’들을 입력한다 해도 당신의 삶은 별반 나아지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이 불행하다면 그 원인을 바깥세상에서 찾아서 불평하려 들지 말고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소상히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여기까지 읽은 그대는 혹시 자신의 잠재의식 안에서 개 공포증이나 만성 질병, 가난같이 내게서 불필요한 찌꺼기들을 모두 깨끗하게 제거하고 싶은 욕망이 들지 않았는가? 마법사라면, 만약 입력이 가능하다면 반대로 삭제도 가능하지 않을까 의심을 가져라.

지금쯤 내 질문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을 것이다.

* * *

문 안에 빨려 들어갔던 나를 구해준 것은 손우경이었다. 녀석은 밖으로 끄집어낸 나를 끌어안고서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손우경이 내 머리 위에 턱을 기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짜…… 한시도 눈을 못 떼겠네…….”

내가 무슨 사고뭉치라도 된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근데 나 방금 너랑 완전 똑같이 생긴 애 봤는데. 그 얘길 해줘야 하나 조금 고민이 됐다.

“손우경, 너 있잖아. 어렸을 때 주변에서 되게 건방지다는 얘기 좀 들었지?”

녀석이 뜨끔하다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게 갑자기 뭔 헛소리야?”

고개를 뒤로 돌리자 왠지 불쾌한 빛을 띠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는데 역시나 내 착각이 아니었다.

“야, 기껏 안에 빠진 걸 힘들게 구해놨더니 왜 날 그런 눈으로 봐?”

“지금 나한테서 향냄새 나?”

“뭐?”

손우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뜯어보듯 응시했다. 내가 또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미간까지 찡그린 채로 난감해하고 있다. 그러다 잘 뻗은 코끝으로 내 뺨을 쿡 찌르며 이야기했다.

“향냄새가 맞긴 한데 네 체향이랑 섞여서 뭔가 더 좋은 냄새가 나. 그런데 대뜸 그건 왜 물어?”

“네가 어쩐지 향에 민감한 거 같아서.”

“그건 내 첫사…… 아니, 됐어. 파오 사형이 옆에서 토할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으니까 그만 일어나자.”

먼저 일어난 손우경이 내 팔을 잡아주면서 일어나는 걸 도와줬다. 그때의 일 이후로 확실히 부담스러울 정도의 과잉 친절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서 일어나며 파오에게 새끼 여우의 행방을 물었다.

“오조는요?”

파오가 엄지로 쑥 층계 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기서 전의를 다지고 있는데.”

손가락이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드디어 이 길고 긴 계단의 끝이 보였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여태껏 봤던 것들과는 형태부터가 다른 문 하나가 끊어진 계단을 딱 막아서고 있었다.

오조의 전신에서 탁한 느낌을 주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간 새끼 여우가 화를 내거나 흥분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그런 사소한 감정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기운이었다. 슬픔, 분노, 원한, 회한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구 뒤섞여서 스스로의 기운을 아예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탑의 주인인 글릭데르는 오조의 스승이라고 했지만 실은 자신의 어린 제자를 전쟁터로 내몰 정도로 인정머리 없는 인간이었던 듯했다. 사실상의 보호자나 마찬가지이니 오조의 생명 에너지를 깎아먹은 최상위 계급과의 계약에도 분명 저 대마도사의 입김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터였다.

요 며칠 오조는 글릭데르의 탑으로 찾아가는 것을 앞두고 생각이 깊어진 듯했다. 스승과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주진 않았지만, 나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오조의 몸은, 썩어가는 것과는 별개로 곳곳에 깊게 파인 흉터나 화상 자국 같은 것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소환술사인 저 아이가 전투 시에 적들과 직접 부딪쳐가며 싸울 확률은 희박했다. 전쟁터에 투입되기 직전까지는 스승의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마법과 소환의 기술을 배웠다는데, 아마도 그 당시 잔인하게 행해진 학대의 흔적들일 터였다. 사이즈가 너무 커서 발까지 질질 끌리는 오조의 로브는 아마도 평상시 몸을 가리는 용도였으리라 생각됐다.

온몸에서 미친 듯이 들끓고 있던 에너지들을 깔끔하게 정돈해낸 새끼 여우가 지팡이를 고쳐 쥐고서 차분하게 호흡을 골랐다. 다들 같은 생각이겠지만 저 아이의 복수극에 끼어들거나 방해하지 않을 작정이다.

마음의 정리를 끝낸 오조가 마침내 글릭데르의 방문을 열었다.

* * *

약 1년에 걸쳐 나는 내 정신이 온전히 돌아올 때마다 그리모어를 기록해두었다. 아흔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내가 겪었던 많은 일들과 후회하는 것들, 살아생전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몇 가지 비밀들, 그리고 내 평생의 업적과 연구 결과들을 모두 이 그리모어 안에 적어놓았다.

8챕터인 요르헤르의 장에서 총 120페이지에 걸쳐 빼곡하게 설명해두었지만, 나의 마법 인생은 자신의 내면 세계인 잠재의식을 탐구하는 기나긴 여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사실 내가 8챕터에서 기술해놓은 잠재의식에 기록된 ‘말씀’들을 삭제하는 방법들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번거로운 일들이다. 아마 8챕터를 보면서도 이럴 바엔 그냥 원래 살던 방식대로 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찮은 구석도 많고 어쩌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 말라.

나는 바로 이 마지막 장을 적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머리에서 배설하듯 회고하며 써내려갔을 뿐이니. 나는 내가 얻어낸 이 위대한 진리를 감히 세상 어떤 것과 견주어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노쇠한 내가 이번 장을 끝까지 완성시키지 못하고 도중에 죽어버렸다면, 아마 여태까지 했던 모든 말들은 그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모래 알갱이와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앞부분의 모든 이야기는 남들에게 차마 보여주기가 부끄러운 쓰레기 같은 기록들이다.

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페이지들을 허비해야 했음을 부디 양해해주길 바란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이 진리들을 얻게 된다면 그대는 더는 불필요한 감정들 때문에 휘둘리거나 자신의 에너지를 빼앗길 필요가 없다. 또한 복잡한 리추얼 의식이나 힘든 수행을 통해 힘들게 마법의 힘을 불러올 필요도 없어진다.

진리는 내 생각보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고, 안타깝게도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자신의 옆에 놔두고서 다른 먼 곳을 향해 눈을 돌리고 있다.

이것을 얻게 되면, 그대가 원하는 대로 온 우주가 그대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얻게 되면, 그대가 원치 않는 것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언제나 자연스럽게 그대의 곁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오, 그러니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가!

자 이제 내가 말하노니, 세상 모든 이치와 진리가 바로 다음 한마디에 담겨 있다.

나는 이것을 얻기 위해 내 평생을 바쳐왔으니, 그것은 바로…….

“어라, 이 사람 뭐 쓰다가 죽어버렸네.”

일격의 공격으로 단숨에 자신의 스승을 죽인 오조가 내 중얼거림에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모, 몰라, 그런 거……. 그냥 시답잖은 얘기였겠지…….”

글릭데르의 입에서 피가 뿜어 나와 쏟아진 페이지를 슬쩍 보니까 아마 이것 역시도 오조가 평소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는 그 그리모어인가 뭔가 하는 책 같았다. 어쨌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글릭데르는 자기 책상 위에서 꽁지에 깃털이 달린 펜으로 이 책에 뭔가를 마구 써내려가던 중이었다.

그때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 오조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글릭데르에게로 자기 지팡이 끝을 겨누었고, 바로 그 순간이 저 호호백발 노인의 최후가 되었다.

가슴 안에 쌓여 있던 해묵은 감정들이 온통 튀어나와 눈물을 펑펑 쏟던 오조였다. 하지만 그렇게 울면서도 스승의 그리모어를 자기 로브 안에다가 쓰윽 챙겨 넣으려 하고 있었다.

헌데 오조가 그리모어를 든 순간, 책이 갑자기 모래 알갱이로 변해서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새끼 여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지르다시피 했다.

“아, 안 돼! 내 사랑스러운 비전들이! 내가 이거 하나 얻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오자고 한 건데! 이 못된 늙은이가 아주 끝까지 사람을 가지고 놀아?”

그러자 등 뒤에서 장장 여섯 시간도 넘게 땀을 뻘뻘 흘리며 군말 없이 수많은 계단을 올라왔던 파오와 손우경이 금세 얼굴을 싹 굳혔다.

결국 참다못한 손우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새끼 여우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퍽 휘갈겼다. 다행히 주먹을 쓰지 않은 걸 보니 그나마도 많이 참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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