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Ruler Ruler
글릭데르의 방 안에 설치되어 있던 포털이란 건 내 상상보다 그리 대단할 게 없는 물건이었다. 딱 한 사람 정도 올라갈 수 있는 작은 마법진과 그 옆에 끈으로 된 스위치가 연결되어 있는 게 전부였으니까.
나는 적어도 사람 몸통만 한 크리스털이라든가, 눈부신 빛이 새어나오는 문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색색으로 혼합된 차원의 공간 같은 게 벽 안에 이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거 직접 보니 순 맹탕이었다.
오조가 저 마법진 위에 올라가서 스위치를 누르면 티페레트의 포털로 몸이 알아서 전이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있는 건 비록 모양이 이렇지만 다른 세피로트의 성들에는 이보다는 더 그럴싸한 포털들이 존재한다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뭐가 됐든지 조만간 큰 결전을 앞두고서 사실 좀 기운 빠지는 모양새이긴 하다.
어쨌든 이 포털을 타고 가면 이제부터 적의 본거지이자, 룸버린과 로고스의 마법사들이 모두 총집결한다는 티페레트 요새의 한복판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과연 어떠한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실로 긴 여정이었다. 다들 포털 앞에서 침묵하며 뭔가 자신만의 상념에 잠긴 듯해 보였다.
나는 서쪽으로 떠나기 직전, 관음존자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숨겨진 비전을 그릇된 목적으로 깨우려 할 시, 석판 안에 신비한 힘에 의해 내재되어 있는 어떤 수호자 같은 것이 작동하도록 되어 있어. 뭐 아틀란티스의 병기라고나 할까.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라 뭐라 설명해줄 순 없지만, 단순히 지들끼리 까불다가 자폭하는 수준이 아닐 정도로 그건 아주 상당히 위험한 존재야.
-헤르메스의 유산은 그것을 깨우는 이가 선한 마음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합일시켰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만일 사악한 의도로 비전을 대했을 때에는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잠식되어버린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세상이 다시 한 번 멸망하기 직전이야. 어때, 설레지?
룸버린과 로고스가 우리에게 대적하기 위해서 에메랄드 태블릿에 숨겨진 힘을 개방하려고 들었다가, 그만 일이 크게 잘못되는 바람에 그것을 수호하고 있던 비밀 병기가 깨어났다는 소리였다. 그때에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관음존자의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었었는데, 점점 주위에서 듣게 되는 얘기가 많아져서인지 그 진위성의 여부를 가리기가 조금 애매해졌다.
-사실 지금 너하고 한가하게 노닥거릴 틈도 없는 엄청난 위급 상황인데, 알고 있어?
우리가 포타라카를 떠나온 지도 이제 약 십 개월째에 들어서고 있었다. 뜨거운 쿠르게오르 사막을 횡단하여 균열이 있는 사무타 지역을 거쳐, 어쩌다 이상한 유리 돔 안에까지 갇힌 채 꽤 오랜 시간을 허비했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부-게르다에서 출항 직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삼주 동안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뱃멀미가 극심했던 기나긴 선박 생활 중에는, 도중에 척살부의 습격을 받고 배의 동력원이 고장 나는 바람에 결국 무인도에까지 머물렀다가 아주 간신히 서쪽 항구에 도착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파오의 말처럼 대체 세상이 멸망할 징조 같은 게 어느 곳에 있다는 건지, 나는 그런 비슷한 낌새조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파오의 얘기가 정말 맞는 거라면, 나는 대체 어떡해야 좋지…….
-하지만 그게 설사 개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도 너는 내가 가라면 군말 없이 가야 되는 처지잖아? 게다가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입장마저도 전혀 아니지.
나는 포털 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손우경을 힐끗 바라봤다. 마음이 무거웠다.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이 되는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관음존자가 내게 지시했던 상황들을 머릿속에서 거듭 되새기고 있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딱 두 가지야. 앞으로 서쪽에서 벌어지게 될 귀찮은 일들을 전부 처리하고 오는 것과 가능하다면 놈들이 발견해낸 그 에메랄드 태블릿의 판독본을 가져오는 것. 물론 전자는 필수불가결의 요소고 후자는 그냥 네 선택 사항이야. 만일 내가 말한 그것들을 무사히 해결한다면 네가 돌아오는 즉시 전단공덕불傳檀功德佛의 지위로 파격 승진을 보장해주지.
그때에는 승진 얘기에 잠시나마 혹하긴 했었다. 관음존자는 나를 다루는 일에는 완전히 도가 튼 사람이었다. 전단공덕불이라니. 지금의 내 법사 지위만으로도 충분히 뭇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고 있는 와중에, 말 그대로 파격 승진이었다. 앞으로 전단공덕불에 오르게 될 내 모습을 상상하니, 아직 가지도 않은 서쪽으로의 여정을 어서 끝내고서 한시라도 빨리 티뷸라 궁으로 되돌아오고 싶었다.
당시엔 내가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생각조차 안 하고, 그 자리 자체만으로도 나의 새로운 존재 가치를 만들어 주리라는 무척이나 어리석은 착각을 했었다. 나 역시 낙하산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내 처지는 까맣게 잊어먹고서 관음존자가 새끼 여우에게 부여했던 금신나한의 자리를 아주 마뜩찮은 시선으로 바라본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노력한 것 이상의 결과를 바란다. 그리고 원하던 결과를 자신의 손에 얻지 못할 경우엔, 꾸준한 노력을 통해 그 결과를 얻어낸 사람들을 시기하거나 혹은 운 좋게 얻어낸 사람들을 당연히 욕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자책하거나 반성해야 하는 에너지를 외부로 전부 쏟아내어, 불편했던 마음에 면죄부를 주어 어느 정도 에너지 균형의 밸런스를 맞추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이의 뒷담화를 하게 되면 어쩐지 속이 후련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달라진 환경 탓인지는 몰라도 어찌 보면 이 짧은 기간 동안 나에게는 정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제는 그런 부담스러운 자리가 탐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을 시기할 마음도 별로 들지가 않았다. 아마도 관음존자가 죽으라면 적어도 죽는 시늉까지는 할 수 있는 나였다. 그런데도 지금 명령 완수를 코앞에 두고 저 포털 너머의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 왠지 조금도 내키지가 않았다.
사실 파오가 몇 번에 걸쳐서 내게 서쪽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들 때, 어느덧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었다. 그러나 진실을 듣는 것이 더럭 겁이 났었다. 아니, 내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배 안에서 오조가 서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을 때에도, 또는 손우경이 굳이 서쪽에 갈 필요가 있겠냐고 말했을 때에도.
정작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은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 마음속에서 계속 치솟고 있는 여러 의문점들을 전부 억지로 꽉꽉 눌러놓고서, 다른 이들의 말들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척 행동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에 항상 두근거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내 심장이 이렇게 뛰고 있는 이유는, 저 포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앞으로의 상황에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내가 이렇게까지나 불안해할 이유가 있을까.
얼마 전 파오가 그 악명 높은 척살부 대장인 다이치를 거의 데리고 노는 수준으로 상대하며 간단히 죽여버리는 모습을 봤었다. 놈은 단지 그 한순간만으로 여태껏 꼭꼭 감추고 있던 자신의 숨은 실력을 단번에 입증했었다. 물론 오조나 손우경의 실력은 입 아프게 말할 것도 없었다.
파오, 오조, 손우경 저 셋만으로도 이미 각각 수천의 군사력을 방불케 하는 무시무시한 조합이다. 그 셋의 맹활약을 여태껏 곁에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쭉 지켜봐온 산 증인인 내가, 그런 그들의 실력을 결코 의심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티페레트에는 절대로 가선 안 될 것 같은 어느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시 되돌아가자는 말은 차마 꺼내지도 못할 주제에 말이다.
그때 손우경이 내게 말을 걸었다.
“현아.”
놈은 딱히 날 쳐다보거나 하지 않고서 자기 두 눈을 포털 마법진 안에다가 고정한 채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
“객관적으로 말해서 아돌프와 나는 기본적인 능력치가 거의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야. 엄밀하게 따지자면 체력적인 면에서는 내가 더 강한 편이고 놈은 스피드적인 면에서 더 월등하지. 다만 녀석이 의도적으로 내뱉는 말들은 대부분 언령의 힘이 서려 있고, 그 말들은 타인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간단히 말해서 마치 최면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돼. 놈이 지나가는 투로 툭 던지는 말들도 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니까. 로고스에서도 아주 극소수의 고위 마법사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비전 같은 건데 녀석이 그걸 사용할 줄 알더라고.”
“…….”
“그리고 내가 티페레트로 가려는 이유는 놈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서도, 또는 말 같지도 않게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에메랄드 태블릿의 수호자인가 하는 핑계에 속았기 때문도 아니야.”
핑계? 손우경 너도 관음존자의 그 얘기들이 그저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그 석판에 담긴 비전들에 누군가 그릇된 목적으로 접근하려고 들 때, 안에서 어떤 사악한 존재가 깨어난다고 전해지는 말들은 진짜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벌써 수십 년도 훨씬 전에 룸버린과 로고스의 마법사들이 한데 모여서 그 에메랄드 태블릿을 가지고서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했던 걸로 알고 있어. 헤르메스라는 작자가 남긴 그 에메랄드 태블릿은, 내용 자체가 연금술을 비롯한 신비주의적인 오의가 가득 담긴 석판이었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그걸 가지고서 뭔가를 시도해보려는 놈들이 역사상 꽤 많았거든. 어쨌든 서쪽 마법사 놈들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있잖아? 그렇담 그 실험은 다 헛소문이었거나 아님 전설 쪽이 부풀려진 거짓말이겠지.”
손우경의 말대로 이 세상을 파멸로 이끈다는 에메랄드 태블릿의 수호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지금 그 공석을 관음존자가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긴 했다. 좌우지간 그런 사실을 진작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야 이런 얘기를 꺼내는 손우경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녀석을 쳐다봤으나, 놈은 계속해서 포털 안에 고정된 자신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손우경이 말했다.
“그런 내가 서쪽으로 가려던 이유는 단 하나야.”
“…….”
“이것도 나로선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 네 머리에 단단하게 심어져 있는 녀석의 강력한 최면 상태를 내 힘으로는 도저히 상쇄할 수가 없었어. 그건 이미 로고스의 언령 기술을 훨씬 넘어섰어. 네가 아돌프의 밑에서 그동안 겪어왔던 경험들과 어떤 개인적인 맥락들이 네 마음 저변에 깊숙하게 깔려 있어서 내가 거기에 접근하려고 들 때마다 너의 무의식 안에서 굉장한 거부감이 일어나니까.”
……최면 상태라고? 내가?
“네가 최면 상태라고 해서 그리 겁낼 건 없어. 모든 사람들이 다들 자기 자신에게 걸어둔 자가 최면 속에 빠진 채로 살아가니까. 물론 너의 경우엔 그게 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메시지라는 게 큰 문제긴 하지만.”
“…….”
“여하튼 지금의 너에겐 당장 크게 와 닿지 않는 말이겠지만.”
“…….”
“있잖아, 두려움은 실체가 없어. 그러니 그 실체가 없는 것이 너를 제멋대로 휘두르게 둘 필요가 없어. 그건 그냥 네 눈에 덧씌워진 색안경 같은 거야. 색안경을 벗고 보면 원래의 제 색상이 보이는 것처럼, 두려움이 네 시야를 모두 가리고서 지금 상황을 마치 더 나쁜 것처럼 호도하고 있을 뿐이라구.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것들은 원래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어. 단지 인간의 판단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호불호와 선악 같은 이분법적인 개념을 나눌 뿐이지. 낮은 낮이고 밤이 밤인 것처럼 모든 것은 그저 상대적인 개념이야.”
아니, 두려움은 결코 그 실체가 없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나 자체가 됐으니까…….
손우경이 쉬지 않고 얘기했다.
“나도 저 포털 이후로는 뭐가 나오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금 내 몸이 잘 움직이지 않으려는 걸 보면 분명히 좋은 일은 아니겠지.”
“…….”
“그렇지만, 내가 네 손목을 붙잡고서 이 관문을 넘어서주지 않는 한, 너는 평생 동안 같은 곳에서 계속 제자리걸음만 할 테니까. 내가 그깟 따라쟁이 놈의 말장난쯤은 내 행동으로 모조리 부숴줄 수 있다는 걸 네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줄게.”
거기까지 말한 녀석이 이제야 나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아돌프가 나한테 이런 미인계까지 써가며 뭘 준비해놓고 있을지도 살짝 궁금하고.”
“…….”
“그러니 이번 일들이 전부 끝나면 그때부터 제대로 각오해두는 게 좋아. 너하고 둘이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거든.”
그때 파오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손우경, 너야말로 그런 얘기는 좀 니네 둘이 있을 때나 따로 해주면 안 되겠냐?”
앞쪽을 보니 새끼 여우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다가 어느새 바닥에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파오가 지쳤다는 얼굴로 혼자서만 먼저 포털이 연결된 마법진 위로 쓱 올라선다. 놈이 스위치를 손안에 쥐고서 입을 열었다.
“뭘 그리 비장하게들 굴고 있어?”
파오가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한다.
“티페레트에 도착해서 뭐가 있든 간에 우리가 설마 이 멤버를 해가지고 누구한테 질 리가 있겠냐.”
그 말에 손우경이 픽 하고서 웃음으로 답변했다. 파오가 스위치를 꾹 누르자 녀석의 몸이 온통 무지개 색상으로 빛나며 다리부터 서서히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놈이 천천히 사라져가는 자기 몸을 신기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몸에서 남은 부분이 딱 목만 있게 되자, 나를 쓱 쳐다보며 정말 얄미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아, 물론 그 멤버 중에서 현이 너는 제외하고.”
그 순간 얼굴까지의 전이 과정이 전부 끝나버렸다. 나는 텅 빈 마법진 위를 바라보며 가만히 입가를 실룩거렸다.
내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알면 알수록 재수 털리는 인간이었다.
* * *
포털을 타고서 내 몸이 한 칸 한 칸 차례대로 이동되는 중이었다. 내 다리부터 시작하여 머리의 전이까지 끝나자 나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주변의 모습을 둘러보며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이곳은 아주 넓고도 둥근 홀 안이었다. 이 홀 안에는 각 벽마다 총 열두 개의 큼직하고 아름다운 조각상이 서 있었는데, 그것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에게 근처에 있던 오조가 저것들은 황도 12궁의 별자리들을 여자의 형태로 의인화하여 만들어낸 조각상이라고 알려주었다.
“우리 마법사들은 별의 위치와 흐름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거든. 저기 저 양자리에서 시작해서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게자리, 사자자리, 처녀자리, 천칭자리, 전갈자리, 궁수자리, 염소자리, 물병자리, 물고기자리의 순으로 조각상들은 배열되어 있어.”
근데 여자의 형태로 만들어놨다는 저 12궁의 조각상들 중, 하필 활을 쏘는 궁수자리의 조각상이 마치 초대받지 않은 침입자들을 경계라도 하듯 그 날카로운 화살촉을 딱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겨누고 있었다. 그 위압감에 금방이라도 저 활시위가 바짝 당겨질 듯해서 나는 왠지 모르게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아까 글릭데르의 방 안에 있던 그 초라한 마법진과는 다르게 이곳 티페레트 본거지에 위치한 포털은 외관상으로도 상당한 위용을 선보였다.
홀 바닥에 꽉 차게 그려진 이 거대한 마법진부터가 그랬다. 신비한 빛을 내뿜으며 꼬불꼬불한 문자들과 복잡한 디테일의 문양들이 새겨진 이 마법진은, 내가 여태까지 봐온 결계나 소환진, 마법진들을 통틀어서 가장 커다란 크기였다.
그 크기가 대략 어느 정도냐면, 만약 누군가 하늘에서 이 마법진 위에 서 있는 우리 네 사람을 내려다보게 된다면 대비 효과에 의해서 사람들이 무슨 개미처럼 작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제일 신경 쓰이는 부분은 바로 이 마법진 중앙에 놓여 있는 저 집채만 한 크리스털 덩어리였다.
수정은 보통 나쁜 기운이나 액운을 반사하며 정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형이상학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라도 그것을 신성하게 여기며 자신의 몸에다가 소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크리스털은 대종말 이후로는 일종의 부적 같은 의미로서 사람들이 앞 다퉈서 선호하는 대상이 되었고, 대륙 각지에서 품귀 현상까지 일어났었다.
관음존자가 황금 사원 내에 수정궁을 지으려고 할 때에도 종단 관계자들의 반대가 극심했던 까닭은, 바로 크리스털 자체의 드높게 치솟은 가격과 함께 궁을 지을 정도로 많은 수정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허나 관음존자는 자신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끊이지 않는 암살 시도들을 들먹여가며 결국 독단적으로 수정궁 건설을 밀어붙였다.
몇 년 후, 많은 희생 속에서 완공된 수정궁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그 많은 양의 수정을 충당하기 위해 종단의 자금은 바닥이 났으며, 공연히 사치를 부렸다는 평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관음존자의 악명은 더욱 극에 달했다.
그런 예전 생각을 하며 마법진 안에 놓여 있는 크리스털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각된 형태가 어째 많이 보던…….
그때 오조가 얘기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도 예전에 포타라카로 망명했을 때 깜짝 놀랐었어. 순간 내가 혹시 다시 티페레트에 와 있나 하고서 잠시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잘은 모르지만, 아마 관음존자도 분명히 여기에 있는 이걸 보고서 그대로 그 수정궁을 만들었던 거 같아.”
하나의 궁금함이 풀리자 이내 새로운 의문점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그렇다면 관음존자는 무엇 때문에 종단 내의 큰 반대까지 무릅쓰고 굳이 무리수를 둬가며 수정궁을 건축하려고 했던 걸까.
단순히 크리스털들의 효과가 마음에 들어서? 혹은 환영제야단의 지배자다운 멋진 풍모를 과시하려고?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완전히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는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언제나 신중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리는 편이었다. 내가 관음존자의 옆에서 약 십여 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가 계획하던 많은 일들이 결국엔 어떤 식으로 착착 맞물려 가는지 한두 번 보아온 게 아니니까.
포털을 타고 넘어오기 전에 손우경에게서 들었던 말들도 그렇고, 수정궁과 꼭 닮은 저 크리스털 덩어리를 보니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그것도 적의 주요 본거지 안에서,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환영제야단의 수장 아돌프가 기거하는 궁과 마치 쌍둥이처럼 생긴 크리스털 조각을 발견하게 되다니.
이게 그저 우연의 일치일 확률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당연히 이딴 게 우연일 리가 없었다. 분명히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어딘가에서 제 몸을 숨긴 채 도사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그런 일들이.
내가 정말로 관음존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오조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삼장, 여긴 단지 세피라 성들끼리 오고 가는 편리한 통로가 아니라 우리 서쪽 마법사들에겐 굉장히 중요한 장소야. 우리가 일단은 글릭데르의 포털을 타고 오긴 했지만 평상시에도 아무에게나 개방되는 곳이 아니거든. 사실 글릭데르는 미치긴 했어도 서쪽에서 몇 안 되는 대마도사들 중 하나이기도 했고, 포털을 마음대로 오고 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어. 여기가 바로 세피로트 나무의 중심인 티페레트인 만큼, 이곳에서는 모든 마법사들이 함께 모여서 대집회를 열거나, 혹은 어린 마법사들의 첫 입문식이나 위대한 대마도사들의 장례식 같은 주요 일정들을 처리하곤 해.”
오조가 중앙의 크리스털로 다가가 그중 아무 수정에나 손바닥을 댄다. 그러자 갖가지 크기로 삐죽삐죽 뻗어 있던 거대한 크리스털들이 사방으로 쫙 펼쳐지며 그 안으로는 중간에 구멍 하나가 뚫린 정교한 육각형 형태의 크리스털 기둥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에게 현자의 돌을 만들기 위한 화로, 아타노르가 있듯이 우리도 뭔가를 창조하려 들 때에는 항상 이곳에서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고는 해. 뭐, 이건 내 생각이긴 한데, 관음존자의 말대로 룸버린과 로고스의 마법사들이 한데 모여서 너희 환영제야단을 견제하기 위해 그 에메랄드 태블릿을 가지고서 뭔가를 연성시키려 들었다면, 아마도 이곳에서 일을 꾸몄을 거야.”
나는 크리스털 안에 텅 비어 있는 구멍을 바라보며 오조에게 물었다. 저 구멍의 정체는 무엇일까. 뭔가를 연성하는 장소?
“그럼 네 얘기는…… 결국 녀석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새끼 여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이 티페레트 요새의 지하에는 클리포트클리포트의 나무. 세피로트의 나무를 거꾸로 뒤집은 죽음의 나무. 세피로트 열 개의 세피라들 속성과는 각각 대응하는 반대 개념과 함께 악마의 힘을 가진다라고 불리는, 여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비슷하지 않은 장소가 한 군데 더 있어. 이곳이 대외적으로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것들을 처리하는 장소라면 그 지하 세계는 외부적으로 절대 발설돼서는 안 되는 아주 비밀스러운 일들을 행할 때마다 사용되는 장소야.”
“그런 비밀스러운 장소를 오조 네가 어떻게 아는데?”
새끼 여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예전에 최상위 계급과 처음 계약을 맺었을 때 바로 그 장소에서 의식을 치렀거든.”
“…….”
“여기서부터 지하에 있는 그 클리포트까지 가는 길은, 아무래도 떨어진 거리가 최상층과 최하층이다 보니 사실상 지름길 같은 게 전혀 없어. 내가 길잡이 역으로서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요새 안을 헤매지 않게 도와주는 것 정도야. 일단은 정면 돌파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어.”
듣고 있던 손우경이 나섰다.
“잘됐네.”
오조가 의아한 눈초리로 손우경에게 되묻는다.
“……잘되긴 뭐가 잘돼? 여기 요새 내부도 엄청나게 넓은데다가 지금 건물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마법사들도 굉장히 많을 텐데.”
손우경이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차피 우린 여길 싹쓸이하러 온 거 아냐?”
“……뭐어, 그렇긴 하지만.”
손우경이 천장을 힐끗 올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이곳이 가장 최고층이라면 여기서 가까운 층들마다 아마 교단 내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녀석들이 몰려 있는 방들도 있을 테지? 원래 그런 놈들일수록 대개 높은 곳들을 선호하니까.”
“…….”
“네 스승인 글릭데르 말고 아직 얼굴이 기억나는 놈들은 몇이나 되냐?”
손우경의 물음에 새끼 여우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다가 숫자를 세는 걸 포기하더니 문득 그 의미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경아, 나 다 안 세어봤는데도 열손가락이 훨씬 넘어. 그리고 너무 많아서 못 세겠어.”
손우경이 한쪽 입가를 들어 올리며 새끼 여우에게 연장자답게 조언해주었다.
“그럼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어느새 손우경의 손에는 여의봉이 들려 있었다. 놈이 그것을 허공에 휘두르며 우리에게 눈짓을 건넸다.
“……자, 그럼 다 같이 깨끗하게 청소하러 가볼까?”
* * *
이제 막 한 층을 지나왔을 뿐인데도 큰 소란을 듣고서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복도 끝으로 길게 이어지는 새끼 여우의 그림자에서 수십 마리의 뱀 대가리 같은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 뱀 괴물들은 처음엔 오조의 그림자를 양분 삼아서 자라나더니, 침입자를 막기 위해 다가오는 티페레트의 경비병들을 한입에 꿀꺽꿀꺽 집어삼키며 점점 더 크기를 키워나갔다. 새끼 여우가 어두운 복도에서 빠져나가자 뱀 괴물들은 그림자 안으로 쏙 사라졌다. 그러나 오조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그림자가 생기면 다시 그 안에서 어김없이 빠져나와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었다.
손우경은 새끼 여우더러 복수하라고 실컷 부추겨놓고는 오히려 자기가 더 신나서 날뛰어대고 있었다. 주인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여의봉이 한 번씩 크게 휘둘러질 때마다 사람들의 머리통에서는 뇌수들이 퍽퍽 튀어나왔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초기에 당황하던 것과는 달리 전열을 재정비하고서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초당 무수하게 쏟아지는 불꽃 공격에도 저 손우경 단 한 명을 맞히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이 기문파공으로 만들어낸, 뚫리지 않는 투명 방어벽이 놈의 주위를 에워싸고서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공격들을 다 튕겨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오는 그리 적극적으로 전투에 뛰어들지 않았지만, 평소의 성격대로 느긋한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파오는 손우경의 뒤쪽에서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서 마치 남의 싸움이라도 구경하듯 아주 가벼운 몸놀림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파오의 주변에서는 다른 놈들이 달려들기가 무섭게 무슨 폭죽이라도 터지는 것처럼 사람들 몸에서 피의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사람 몸의 피를 조절하는 그 능력 때문에 몇 미터 근처로만 와도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저 저놈들이 나의 적이 아닌 것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한 층을 깨끗하게 정리하고서 다음 층으로 진격하자 밑에서는 벌써 소문을 듣고서 우리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끝나 있었다. 수십여 명의 마법사 군단이 위층에 비해 한결 정돈된 모습으로 나란히 대기하는 중이었다. 근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로브를 입은 녀석들의 손에는 지팡이가 아니라 웬 무기들이 하나씩 들려 있는 게 아닌가.
그때 마법사 군단 선두에 서서 다른 칙칙한 놈들보다 조금 더 비싸 보이는 붉은색 로브를 입은 남자가 우릴 가리키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 층엔 이미 우리가 그 어떤 마법조차 사용할 수 없는 막강한 결계진을 쳐두었으니 이제 네놈들의 기술 따윈 완전히 무용지물이다! 얘들아, 가자! 놈들은 고작해야 네 명일 뿐이다! 다들 겁먹지 말고 공격해라!”
그러자 손우경과 파오에게서 연달아 풉 하고 비웃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병신들인가.”
“어후, 저런 새대가리들.”
손우경이 여의봉을 윙윙 소리 나게 휘두르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야, 우리가 주법을 못 쓰는 상황이라면 그건 니네도 마찬가지겠네?”
파오가 양쪽 주먹에서 우둑우둑 소리를 내더니 역시 앞으로 나오며 얘기했다.
“난 원래 주먹 휘두르는 게 주특기였고 주법은 그냥 심심풀이 취미로 배웠던 거라서 말야.”
마법사들의 결계진으로 인해 어느 누구 하나 공평하게 마법을 못 쓰게 되는 상황이 오자 놈들은 상대편을 손가락질하며 정말 미친 듯이 비웃어댔다. 손우경과 파오는 도저히 웃음을 못 참겠는지 배를 잡고서 계속 낄낄거리다가 이윽고 주먹을 사용하여 얼빠진 마법사들을 마구 두들겨 팼다.
그 와중에도 마나의 흐름이 막혀버려서 자기가 할 일이 없어진 새끼 여우가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서 잠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손우경과 파오는 둘이서 경쟁이라도 하는지 쉴 새 없이 사람을 패 죽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마법사가 비명과 함께 절규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오, 신이시여!”
파오가 진짜 황당하다는 얼굴로 손우경을 돌아보며 말한다.
“야, 너도 들었냐? 이 사람 방금 신을 외치면서 죽었어. 서쪽에도 아직 신을 믿는 사람이 다 있네? 그것도 마법사 주제에.”
“허.”
오, 신이시여라니.
신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는 나 같은 불교도의 입장에서도 방금 전의 그 장면은 내 나름대로의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사실 다신교의 풍습이 있는 아부-게르다의 상황을 제외하고는 우리 불자들이든, 서쪽의 마법사들이든 모두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강력히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우리들은 수행을 통해서 어느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기실 우리가 모시는 부처님은 그 가르침을 따르는 존재였지 어떤 신 자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 마법사가 죽기 직전에 외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신의 존재였다.
나는 그 순간에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게도 만약 정말로 신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가 않는다면, 어째서 그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이토록 부정할 수 있는 걸까. 무無를 부정한다는 것이 애당초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존재에 대해 확실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일전에 아부-게르다의 사람들을 보면서 잠시 느낀 거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어느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존재에게 자신을 통째로 내맡긴다는 것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일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생활 자체가 대체적으로 풍족한 편이기도 했지만, 매사 신을 향해 언제나 감사 기도를 드리며 그 절대자에게 자신의 행복 및 건강 등을 간구하는 일들이 사실 내 눈에는 그리 나빠 보이지가 않았었다. 비록 대종말 이후로는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버리긴 했지만, 원래부터 종교라는 것은 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행위였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은 종교라는 이름하에 자기 스스로가 신이 되려는 자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서쪽에서는 깊은 내면 성찰을 통해서 자신이 신처럼 될 수 있다는 그노시스 사상이 팽배해 있었고, 동양에서는 참된 깨달음에 이르는 참선수행법이 아니라 마장을 불러일으켜서 신과 같은 신통력을 얻기 위한 각양각색의 수행법들이 유행을 타고 있었다. 대체 어쩌다가 세상 꼴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지 잘 모르겠으나 아마 내가 신이라도 해도 지금 돌아가는 꼬락서니들을 보면 그리 구제해주고 싶은 마음은 안 들 것이다.
그때쯤 손우경과 파오가 마법사 무리들을 처단하는 일에 서서히 막을 내리는 중이었다. 나는 옆에서 졸고 있던 새끼 여우를 깨워서 어서 다음 층으로 내려가자고 얘기했다. 내 말에 바로 눈을 뜬 오조는 어딘지 눈빛이 냉혹해져 있었다.
오조가 로브 후드를 더 푹 눌러쓰며 다음 층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오조의 발걸음이 뚝 멈춘 곳은, 용과 사자가 음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어느 화려한 문 앞이었다. 새끼 여우가 그 앞에 서서 문을 열지도 않고서 가만히 있자 손우경이 잠시 지켜보다가 발로 문을 쾅 걷어찼다.
방문만큼이나 호화로운 방의 내부에서는 마침 어떤 남자가 어린 소년을 침대 위에 묶어놓고서 이상한 변태 짓에 열중하던 중이었다. 비역질에 푹 빠져 있느라고 밖에서 이 난리법석이 난 걸 아예 모르고 있었나 보다. 콧수염이 난 남자가 소년의 벌어진 두 다리 사이에서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우리에게 뭐라고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만 머리가 펑 터져서 죽어버렸다.
파오의 혈류종 아니면 손우경이 기문파공으로 한 짓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오조가 지팡이 끝을 치켜들고 있었다.
죽은 남자의 시체가 붉은 머리 소년의 몸 위로 털썩 쓰러지자 소년이 기겁하는 비명을 지르며 제발 살려달라고 외쳤다. 남자의 성기는 아직도 소년에게 꽂혀 있는 상태였다. 새끼 여우는 그것을 뭔가 울적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등을 돌려서 방을 나가버렸다.
보아하니 딱 오조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자신이 자처해서 저런 기름진 남자에게 뒤를 박히고 있었을 리는 없을 테니 아마 강압적으로 맺어진 관계였을 것이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소년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고서 일단 오조를 따라서 방을 빠져나왔다.
밖에 서 있던 새끼 여우의 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인데 아주 간신히 참고 있는 듯했다. 내가 걱정이 돼서 오조에게 다가가자, 새끼 여우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왜 우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오조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내 마음까지도 아파졌다.
어떻게 달래줄 생각도 못하고 그냥 우는 걸 지켜보는데 새끼 여우가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 내…… 수호천사가…… 그랬었어. 내일 교단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날 데려갈 거라고. 그 남자를 따라가면 틀림없이 나쁜 일을 당할 테니…… 나보고 얼굴에 더러운 흙을 묻히고서 제일 예쁜 애 옆에 서 있으라고…….”
수호천사?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원래는…… 내가 저기에……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무슨 일이었는지 대강은 짐작이 갔다. 아마도 오조가 큰 기지를 발휘해서 무사히 넘어갔던 일인 듯싶었다. 헌데 뒤늦게 저 빨간 머리 소년에게 모종의 미안함이라도 느끼는 걸까.
원,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그럼 실로 다행인 일이잖아? 네가 지금 운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
새끼 여우가 크게 외쳤다.
“그게 아냐!”
오조가 괴로운 음성으로 가로로 고갯짓을 하며 얘기했다.
“아, 아니야……. 내가 자꾸 자기 말을 안 믿으니까 내 수호천사가 저 방에 한번 가보라고 그랬어. 나는 계속 보기 싫다고 했는데 그 방에 가보면 예전에 자기가 했던 말들이 다 맞는지 안 맞는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거라구…….”
오조는 나를 가로질러서 손우경에게로 뛰어가더니 놈의 양팔을 꽉 붙잡고서 사정했다.
“우경아! 우, 우리 그냥 돌아가자! 나 복수 같은 거 이제 필요 없어! 괜찮아, 그런 거 안 해도 돼! 서쪽까지 힘들게 왔지만 세상이 멸망하는 징조 같은 거 못 찾았다고 하자! 내가 관음존자에게는 잘 말해줄게!”
새끼 여우가 저렇게 빠르게 말하면서 몹시 흥분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지라 다들 그저 놀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자꾸 돌아가자고 떼를 쓰는 오조를 손우경이 힘들게 진정시키려 들었다.
“야, 울지 말고 차분하게 얘기해봐.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데 그래.”
오조가 히끅거리면서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손우경을 올려다봤다. 새끼 여우가 상당히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짜 왜 저러는 거지.
“그냥…… 우리 빨리 돌아가자. 여기 더 있으면 안 돼…….”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오조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손우경이 새끼 여우를 다그쳐 묻는다.
“……네 수호천사가 혹시 무슨 다른 얘기라도 했어?”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내던 오조가 거듭 망설이다가 결국엔 실토를 했다. 그리고 그 말에 다들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오, 오늘…… 우경이 네가 죽는다고 그랬어…….”
“…….”
“아까 잠깐 잠든 사이에 수호천사가 나타나서…… 분명히 죽는다고 그랬어. 내가 안 믿는다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자기 말을 믿으라고. 오늘 너 분명히 죽는다고……. 정 못 믿겠으면 저 방에 들어가서 예전에 자기가 날 도와줬던 일의 결과가 지금쯤 어떻게 됐는지 한번 확인해보라구…….”
손우경이 무표정하게 오조를 잠시간 내려다보다가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푸하, 난 또 뭐라고. 아, 진짜 웃겨서 못 들어주겠네.”
새끼 여우가 울어서 눈물 자국이 엉겨 붙은 지저분한 얼굴로 손우경을 어리둥절하게 올려다봤다. 손우경은 거의 배를 잡고 실신할 때까지 웃다가 앞에서 점점 표정이 굳어져가는 오조에게 넌지시 입을 떼었다.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 그런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안 해줘도 돼.”
오조가 발끈하며 외쳤다.
“내, 내 수호천사가 하는 말은 절대 허투루 들으면 안 돼!”
“그래, 뭐 가급적이면 참고하도록 할게.”
손우경은 그래도 새끼 여우가 고집을 부리자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여 오조의 파란 눈동자에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얘기했다.
“근데 말야, 이 세상에 날 죽일 수 있는 놈은 존재하지 않아.”
“…….”
“설령 그게 관음존자라고 해도 말이지.”
차가운 목소리로 딱 잘라 얘기하는 손우경 때문에 오조는 불만으로 퉁퉁 부어터진 얼굴로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몸을 빙글 돌렸다. 저딴 놈에게 흘린 자기 눈물이 아깝다는 듯이 로브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북북 닦아내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등을 돌린 오조가 막 화를 내며 말했다.
“나도 몰라, 이제! 우경이 네가 죽든 말든 나 하나도 신경 안 쓸 거야!”
나조차도 오조의 저 얘기가 무척이나 불길하게 느껴지는 데 반해 손우경은 정말이지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자기가 죽는다는 소리에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나 싶었다.
그러나 오조가 등을 돌린 틈을 타서 손우경의 표정이 잠시나마 굳어진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뭐야, 너. 그러다 나와 눈이 딱 마주친 녀석이 얼른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지만, 내 마음은 이미 끝없는 불안감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손우경을 부르려다가 나는 아차 싶어서 얼른 그만두었다. 내가 여기서 돌아가자고 말할 처지도, 그럴 입장도 아니라는 걸 그새 잊어버리고 있었으니까.
오조는 다른 곳에다가 화풀이를 하려는지 다시 그림자 속의 괴물들을 총동원해가며 주변 기물들을 엉망진창으로 파손하는 중이었다. 벌써 저만치 멀어져가는 새끼 여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손우경이 심각해져 있는 나와 파오에게 농담하듯 입을 열었다.
“다들 들었지? 나 오늘 죽는다니까 둘 다 나한테 할 말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해보든가. 특히 현이 너는 이제 슬슬 나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도 되지 않았어?”
파오가 손우경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넌 이런 때에도 농담이 나오냐?”
“오히려 저런 얘길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쪽이 멍청한 거지.”
파오가 내 표정을 힐끗 보더니 다시 손우경에게 말한다.
“그런 얘길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멍청이가 여기 한 명 있는 거 같은데?”
손우경이 내심 기분 좋다는 듯이 흐음거리며 날 빤히 들여다봤다.
“왜, 현이 너도 내가 널 두고서 죽을까 봐 걱정됐어? 아까 오조 얘기에 심장이 철렁거렸어?”
내가 말이 없자 놈이 손을 뻗어서 내 한쪽 뺨을 어루만지며 아무 걱정 말라는 듯이 얘기했다.
“내가 널 두고 억울해서 어떻게 죽냐. 그리고 다른 놈이 너 채갈까 봐 어디 불안해서 맘 편하게 죽을 수나 있겠냐.”
나는 시선을 돌리며 나직하게 욕을 내뱉었다.
“……미친놈.”
손우경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깐 나와 억지로 눈을 마주치며 자꾸만 장난을 치려고 들었다.
“와, 살다 보니까 네가 나 죽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화도 다 내주네. 아까 오조가 나 죽는다고 펑펑 울었을 때에는 난감하기만 했는데.”
“……손우경.”
“왜?”
“너 진짜…… 바보야?”
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아니, 너보단 훨씬 똑똑할걸. 나 크면서 천재 소리 들으며 자랐는데?”
내가 불안해할까 봐 더 장난을 치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럼 그런 말 듣고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건데? 서쪽에…… 가자고 한 게 나라서?”
손우경이 잠시 침묵했다.
나는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애가 타는 것 같기도 한, 뭔가 복잡 미묘한 기분이었다.
“……자기가 죽는다는 말에 그렇게 박장대소하는 또라이는 네가 처음이야. 너 진짜…….”
“그만, 거기까지.”
“…….”
“그래, 나도 사람이니까 솔직히 저런 얘길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건 사실이야. 그것까지는 전혀 아니라고 부정 안 할게. 근데 원래 앞날이라는 건 일정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예측할 수는 있어도 사람에게 칼같이 정해진 운명 같은 건 없어. 그 순간순간마다 다 자신이 만들어가는 선택이라고.”
“…….”
“난 남의 빙의령 따위가 지껄이는 말에 속아 넘어가서 자신의 운명을 자기 손으로 나락에다가 떨어트리는 바보 같은 짓 따윈 안 해.”
“빙의령?”
“일단 오조가 말하는 그 수호천사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그런 존재들은 저렇게 남의 운명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사람하고 직접적으로 소통하려고 들지 않으니까. 그리고 우리 수행자들에겐 몸 안에서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빼앗기 위해서 보통 사념체들이나 잡귀들이 붙게 마련이야. 오조 정도 되는 녀석에겐 당연히 저놈 말고도 몸 주위에 여럿이 들러붙어 있는데, 안에 붙어 있는 놈이 상당히 강한 수준이라 다른 녀석들이 함부로 접근을 못하고 있어. 저런 빙의 현상은 보통 깊은 명상 도중이나 기가 허해졌을 때 자주 벌어지는 현상인데, 자기가 수호천사라든지 무슨 신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사람을 속이려고 든다고. 그럴 때면 주위에서 스승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 현상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해줘야 하는데 불행히도 여건상 그러지를 못한 거지.”
“……그런 거면 너야말로 오조에게 왜 진작 설명 안 해줬어?”
손우경이 입맛을 쩝 다시며 대답했다.
“내가 몇 번 떼어줄까도 생각했는데 본인이 너무 철석같이 수호천사라고 믿고 있어서 그러기가 좀 애매하더라. 보아하니 그동안 그 빙의령에게 의지도 많이 했던 것 같고, 그 녀석도 자기 숙주에게 크게 해를 끼치는 존재는 아니니까. 뭐,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냥 저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그래서 손우경이 그렇게 웃은 거였나.
말을 듣고 나니 한숨 돌리긴 했지만, 기분이 찝찝한 건 여전했다. 손우경은 그런 내 반응을 살피더니 씩 웃으며 얘기했다.
“네가 그런 거에 쉽게 현혹되는 타입이라면 나도 널 위해서 몇 가지 예언해줄까?”
녀석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난 절대로 안 죽어.”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난다.
“두 번째. 네 허락 없이도 안 죽을게.”
“…….”
“세 번째.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면 더는 네가 불안에 떨거나 무서워할 일들이 전부 다 사라질 거야.”
“…….”
“네 번째. 왜냐하면 앞으로 넌 나랑 계속해서 같이 있을 테니까.”
예언이 아니라 자기 희망 사항을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손우경이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펼치더니 이윽고 그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는 가볍게 입술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다섯 번째. 그리고 넌 지금보다 날 훨씬 더 좋아하게 될 거야.”
지금보다 더.
그런 게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 내 속마음도 모르고 손우경이 속삭여왔다.
“내가 불안해하는 건 세상에 딱 하나뿐이야.”
“…….”
“네 마음.”
“…….”
“그거 나한테 안 줄까 봐.”
언제나 남들보다 한발 더 앞서서 모든 상황을 다 꿰고 있는데다 자기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저 녀석도, 단 한 가지, 자신에 대한 내 마음만은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어떤 콧대 높은 절세미녀라 해도 네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않는 여자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이미 너에게 더 넘겨줄 마음도 없었다.
녀석과 조용히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데 그때 파오의 심기 불편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녀석이 담배를 태우면서 인상을 퍽퍽 쓰고 있었다. 놈의 발밑에는 다 피운 담배꽁초가 몇 개나 떨어져 있었다.
파오가 메슥메슥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니네 얘기 다 끝났으면 그만 갈래?”
* * *
티페레트 요새가 이렇게나 클 줄은 정녕 몰랐었다.
벌써 30층 가까이 내려왔지만 목적지인 클리포트는 아직이었다.
한 걸음 떼기가 무섭게 아래층에서 자꾸만 몰려드는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파오가 지친 목소리로 손우경에게 기문파공으로 저것들을 한 번에 다 베어버리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했다. 왜 방어벽을 만드는 것 외에는 기문파공을 안 쓰는 건지.
손우경이 여의봉을 일자로 쭉 늘어트려 마법사들의 복부를 한 번에 꿰면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자기도 그러고 싶지만 기문파공으로 방어벽과 공격을 동시에 행할 수는 없다고 했다. 게다가 상대가 다수의 마법사들이기 때문에 자칫 기문파공으로 공간을 가르는 사이에 뭐라도 날아오면 몹시 곤란해진다고 덧붙였다.
그 와중에도 손우경의 방어벽은 모든 공격을 전부 다 튕겨내고 있었다. 놈이 절대로 안 죽는다는 게 바로 저런 얘기였나. 어차피 공격 자체가 전혀 먹히질 않으니 죽을 위험도 없다는 거였다.
좌우지간 이번 층도 대충 다 마무리가 됐는데 오조가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위에 걸터앉아서 낫처럼 생긴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음산한 눈빛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림리퍼라. 그래, 내가 죽음의 사신이지.”
방금 죽어나간 어떤 놈이 오조의 얼굴을 알아보고서 ‘그림리퍼 이 더러운 배신자야! 지옥에나 떨어져라!’ 어쩌고 하는 지독한 말들을 늘어놨던 것이다. 게다가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붉은 머리 소년과 남색 행위를 하던 콧수염 남자와 극소수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오조가 딱히 복수할 만한 대상들이 그리 엿보이지 않았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오늘 우리가 찾아올 걸 알고 미리 도망간 느낌이었다.
최상층에 위치한 방들은 대부분 비어 있는 상태였고, 우리가 한 층 한 층 내려갈 때마다 실력 있는 놈들은 안 보이고 수준 낮은 놈들만이 떼거지로 나타나서 공연히 힘을 빼려고 들었다.
파오가 담배를 태우면서 아무런 기운이 없는 듯한 오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둘의 관계는 항상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지만, 지난번 파오가 오조의 팔을 붙잡고서 어디론가 데리고 간 다음부터는 아무래도 좀 나아진 듯해 보였다. 뭐, 글릭데르의 탑 앞에서는 파오가 새끼 여우의 발밑으로 질질 끌리는 해먹을 먼저 들어주려고 하기도 했었고…….
여행 초반부에 오조의 말 한 마디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파오를 떠올려보면 그나마도 장족의 발전이긴 한데, 옆에서 아무런 참견 없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무인도에서도 어렴풋이 느낀 거지만, 파오에게는 가급적 오조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는 편이 둘 사이의 관계 발전을 위해 더 나은 듯했다.
저 뻔뻔한 인간이 설마 쑥스러움을 타는 건 아니겠으나, 이제 와서 오조에게 뭔가를 대놓고 얘기한다는 것도 사실 우스운 일이었다. 그야 저 둘 사이는 애초부터 파오의 일방적인 원한 관계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랜드리올전의 대참패 이후로 자기 혼자서만 살아 돌아오게 된 파오가 패배의 원인이자 그 원흉인 새끼 여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아마도 죽은 부하들에 대한 면목이 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녀석의 그런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오조가 파오를 너무 좋아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 터라 자꾸 신경이 쓰였다. 지금도 파오의 시선을 느낀 새끼 여우가 자기 혼자서만 의식하고 있는 게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인생도 사실 그리 정상적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가끔 오조를 보면 연민을 넘어서 어떤 동정심 같은 것이 일었다. 내가 누굴 동정할 처지가 안 되지만, 그럼에도 저 녀석에게 측은지심이 드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내내 교단에게 소모품으로 이용당하다가 이제 저 아이에게 남겨진 인생이 고작해야 오년뿐이라고 한다. 소환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데다가 예쁜 얼굴, 거기에 착한 성품까지 가졌는데도 그런 오조가 앞으로 약 오년 후면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실 그 오년도 말이 좋아서지, 정말 실제적으로 남겨진 시간은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옆에서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던 소환수도 죽어버리고, 녀석에게 이제 의지할 곳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아까 수호천사인지 빙의령인지가 한 말에 혹시라도 손우경이 죽을까 봐서 누구보다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오조가 떠올랐다. 아마도 자기가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사라질까 봐, 저 아인 그게 너무 무서웠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런 심정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처지였기에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몹시 쓰라렸었다.
지금 내 코가 석자인지라 뭔가 도와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나는 새끼 여우가 진심으로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다른 놈도 아니고 하필이면 파오라서, 그 사이를 응원할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조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내심 둘이서 잘됐으면 하는 마음도 컸다.
오늘따라 파오에게서 끝없이 쏟아지는 시선을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고 있던 오조가 붉어진 자기 얼굴을 후드로 가리며 시체 더미 위에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녀석은 파오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근처에 있던 아무 문으로나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시체들 안에서 검푸른 색상의 전류가 오조를 향해서 피어올랐다.
-이 배신자여! 죽어라!
손우경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파오가 먼저 뛰어들었다. 파오가 간신히 오조를 끌어안고 몸으로 보호하는 순간, 파오의 등에 하마터면 전기 공격이 꽂힐 뻔했으나 손우경이 얼른 기문파공으로 방어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동시에 파오가 등 뒤에 있는 시체 더미들을 모조리 터트려버렸다.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듯 전부 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파오가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오조를 꽉 껴안은 상태였다. 그것 때문에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석상처럼 굳어서 아예 움직이지를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저절로 튀어나간 파오는 물론이거니와 파오에게 등 뒤에서 끌어안긴 오조도 그랬고, 지금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는 나와 손우경도 그러했다.
우리들 중 가장 굳어 있던 오조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서둘러 파오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들었다. 단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랑 손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 어린애가 엄청난 부끄러움과 혼란 속에 빠질 것은 내가 오조의 입장이 아니라도 자명한 일이었다.
오조는 결국 파오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원래 자기가 들어가려고 했던 문 안쪽으로 후다닥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파오가 나와 손우경 쪽을 잠시 쳐다보다가 자기도 에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새끼 여우가 안에서 문고리를 꽉 쥔 채로 당기고 있는지 문이 잘 열리지를 않는다. 파오가 한숨을 내쉬면서 문에다 대고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나와. 아님 이 문 부순다.”
손우경은 벌써 자리까지 깔고 앉아서 이 흥미진진한 광경을 매우 재밌다는 듯이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문 안에서 아무 대답이 없자 파오가 진짜로 문고리를 붙잡고서 문 한쪽을 단숨에 뜯어내버렸다. 방문 앞에 딱 붙어서 있던 새끼 여우가 경악한 얼굴로 확 떨어져 나간 문짝을 보며 입술을 오들오들 떨었다. 파오는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대며 오조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난 돌려서 말하는 거 싫어하니까 이 자리에서 그냥 얘기할게.”
파오는 정말 무감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번 일 끝나면 너 나랑 한번 자자.”
그 말에 새끼 여우의 눈이 커다래진다. 지금 쩍 벌어진 내 턱이 잘 안 다물어지는데 그 당사자는 오죽할까 싶었다.
“너한테 느끼는 게 단순히 성욕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떤 여자보다도 너랑 자고 싶어. 밤마다 니 얼굴 떠올리면서 딸 치는 것도 더는 못할 짓이다.”
살다 살다 저런 무식한 고백은 난생처음 듣는다. 오조가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파오가 자기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서자 깜짝 놀라 뒷걸음질하며 대답했다.
“시, 싫어!”
파오가 어림도 없다는 식으로 반문한다.
“나 좋아하는데 그게 왜 싫어?”
새끼 여우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파오를 노려보며 재차 거절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랑 자는 건 싫어…….”
파오가 픽 하고 웃음을 삼켰다.
“하긴 어느 모로 보나 네가 확실히 손해긴 하겠다. 난 변태라서 너 같은 어린애가 감당하기엔 성관계도 정상적이지 못할 거고, 성욕이 왕성해서 나랑 한번 자기 시작하면 넌 하루에 한 번씩은 의무적으로 같이 뒹굴어줘야 해. 내 좆은 꽤 큰 편이라 네 작은 엉덩이엔 잘 들어가지도 않을걸? 그리고 여자 없인 하루도 못 살아서 어쩌면 너 몰래 바람피울 수도 있어.”
단어 선택이 좀 거칠긴 하지만, 바람 운운하는 걸 보니까 저거 오조보고 사귀어달라는 말 아닌가? 새끼 여우가 입술을 뻐끔거리며 차마 아무 대답도 못하는 중이었다. 파오가 거기에 쐐기를 박는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지금 너한테 나 좀 받아달라고 매달리는 거야.”
고개를 푹 숙인 오조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몸…….”
“…….”
“당신이…… 혐오스럽다고 했잖아…….”
세상에나, 오조한테 저런 말까지 했단 말인가. 파오는 그게 뭐 어쨌냐는 투로 대꾸했다.
“뭐 솔직히 네 몸이 멀쩡한 건 아니니까.”
그러자 바닥으로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저 잔인한 새끼가 진짜 애한테 못하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파오는 개의치 않고 오조의 턱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우는 얼굴이 엉망이었는데도 저렇게 예쁘게 생길 수가 있나 보면서도 퍽 신기했다.
“나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어. 네 얼굴만 봐도 혐오스럽고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정말 싫었었는데.”
“흐흑…… 흑…….”
“사실은 처음 봤던 날부터 너하고 계속 자고 싶었어.”
오조를 처음 봤던 날이면, 그때 티뷸라 궁의 요사 안에서 다들 접면했던 날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예전에 전장에서? 어쨌거나 오조가 여전히 흐느끼며 말한다.
“그, 그러면… 안 돼……. 나 잘못 만졌다간… 당신도 죽어…….”
“아까는 손우경한테 죽는다고 난리치더니 이번엔 또 나야? 니가 진짜 저승사자라도 되냐.”
“내 몸 안은…… 온통 독이라서… 당신도 죽어……. 유도… 내 피 때문에 죽었고…….”
파오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럼 죽지 뭐.”
오조에 큰 눈동자에 눈물이 더욱 고여왔다.
“내가 당신…… 쳐다보는 게 불쌍해서…… 이러는 거야? 쳐다보지 말라고 하면…… 이제 나 안 그럴 테니까…….”
“말귀 참 못 알아듣네. 누가 쳐다보지 말랬냐? 앞으로 내 옆에 딱 붙어 있으라는 소리잖아.”
“나, 나는 이제…… 오년밖에 못 사는데…….”
파오가 얼굴을 가까이 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럼 네 오년 나한테 줘.”
파오가 오조를 품에 껴안고서 마치 독백하듯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림리퍼 네가 오년밖에 못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화가 났어. 내 부하들을 다 죽여놓은 주제에 감히 내가 미워하지도 못하게끔 완전히 시한부 인생이 되어버린 너한테. 그런데 너한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차츰 나에게 화가 나더라. 남은 시간이 정말 오년뿐인가 하고서 계속 자문하는 나 자신에게.”
파오는 자포자기했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근데 죽은 놈들은 죽은 놈들이고.”
“…….”
“이제 내가 좀 살아야겠다.”
파오가 오조의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곧장 고개를 틀어서 입술을 가져다 댄다.
새끼 여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래전 내 귓가에 들려오던 소문으로는 파오가 천봉대원수직을 그만두고 난 뒤,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폐인처럼 살아간다고 했었다. 나는 당시에도 녀석을 계속 미워하던 중이라 그런 얘기마저도 코웃음을 치며 귀담아 듣지 않았으나, 지금 와서 다시 돌이켜보니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단 한 번의 전투에 자신의 손으로 키워냈던 팔천의 군사를 전부 잃어버리고 오직 혼자서만 살아남은 파오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지 타인인 나로서는 그 십분의 일마저도 짐작 가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림리퍼인 오조를 미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사람은 너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 시, 자신을 지탱시킬 힘으로써 타인을 증오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분노 에너지 또한 쓰러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새로운 원동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나와 손우경이 붙어 있는 모습만 봐도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뾰족한 날을 세우던 파오였으나 정작 자신은 남들 보는 앞에서 오조와의 애정 표현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녀석들이 키스하는 장면 같은 건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아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바닥에 앉아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손우경을 질질 잡아끌며 잠시 다른 곳으로 피해 있으려고 하는데, 녀석이 히죽거리며 헛소리를 해댔다.
“현아, 우리도 이번 일 끝나자마자 잘까?”
“…….”
“나도 너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같이 자고 싶었는데.”
“……넌 나랑 계속 자고 있잖아. 자꾸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말고 그만 좀 일어나.”
손우경이 내가 내민 손을 붙잡고서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내 어깨에 한쪽 팔을 둘렀다. 그러더니 뒤를 흘끗 돌아보며 중얼거린다.
“파오 사형, 큰 결심 했네.”
“뭐가?”
“오조 앞으로는 그 오년마저도 안 남았는데 어떻게 시작할 생각을 하지. 내가 저 입장이면 아마 하루하루 미쳐버릴 것 같은데.”
손우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에 걸쳐진 팔을 들어 올려 내 머리 위로 손을 얹으며 말한다. 놈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듯 만지작거린다.
“그래, 나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냐.”
녀석은 내 뺨에 입술을 대면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내게 거듭 재확인을 받는다.
“……자칫 다칠 수도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내가 쳐놓은 방어벽 안에서는 나오면 안 돼.”
놈이 허공에 대고 보이지 않는 벽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이것이 아까부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유롭게 돌아다니던 이유였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나 자체가 실질적으로 전력에 크게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있었지만, 손우경은 티페레트로 오기 직전에 자신의 몸 말고도 나에게 기문파공으로 만든 방어벽을 설정해주었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법사들과의 싸움에는 절대로 나서지 말라고 나에게서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었다.
그리고 내게 따로 설명하진 않았지만 손우경은 아까 파오에게 말한 것처럼 기문파공으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듯했다. 이건 내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도 나 때문에 자신을 비롯한 기문파공 방어벽을 두 개나 만드느라고, 좀 전부터 체력을 소모해야 하는 여의봉이나 휘두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놈에게 도움은 못 될망정 항상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내가 손우경에게 말했다.
“네 생각만큼 나 그렇게 약해빠진 놈 아니야. 나도 충분히 내 몸 하나 정도는 알아서 지킬 수 있어. 그러니까 이 방어벽, 그만 됐으니까 가져가.”
하지만 손우경은 완고했다.
“거참, 말 안 듣는다. 자꾸 시끄럽게 굴면 네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 때까지 이 자리에서 확 덮쳐버린다?”
“넌 진짜 머리에 그런 거밖에 안 들었어? 너 지금 괜히 나 때문에 기문파공도 제대로 못 쓰면서 여의봉으로 시간 낭비하고 있는 거잖아.”
손우경이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며 딴청을 부렸지만, 내가 계속 놈을 쏘아보자 그제야 뭔가 섭섭하단 투로 입을 연다.
“……난 가끔 네가 나한테 좀 상냥하게 대해줬음 소원이 없겠다. 나긋나긋하고 잘 웃고, 뭐 있잖아, 그런 거…….”
나한테 바랄 걸 바라라. 삐딱해진 눈으로 놈을 쳐다보자 손우경이 나하고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또 장난을 치려고 든다. 놈이 손가락으로 내 뺨을 콕콕 찔러온다.
“하긴 이게 또 네 매력이지. 쉽지 않은 거.”
손우경은 내 주위로 둘러져 있던 기문파공의 장막을 거두어내더니 느닷없이 자기 두 팔로 날 번쩍 안아 들었다. 졸지에 무슨 공주님처럼 들려 안긴 내가 누가 볼세라 빨리 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손우경이 씩 웃으며 이제 몸 풀기 운동은 그만하자고 대꾸해줄 뿐이었다.
“갑자기 뭔 말이야! 그게!”
“네 말처럼 기문파공은 한 번에 두 개 이상은 발현될 수 없어. 이걸 전수했던 내 스승도 두 개까지가 최대치라고 했었으니까. 공간이 몇 개로 나뉘는 현상들도 단순히 육안으로만 보면 모두 동시에 뻗어나가는 것처럼 보일 순 있어도 실은 각각 시간차를 달리했을 뿐이라구.”
“근데 그걸 나보고 어쩌라고?”
“딱히 내가 무리하면서까지 너한테 힘을 쏟고 있던 건 아니었어. 말했지만 네 털끝 하나라도 다치는 꼴 같은 거 내가 못 보니까. 대체 너한테 얼마나 더 내 능력을 보여줘야 날 무능한 놈 취급하는 것 좀 그만둘래?”
가만히 듣자하니 기가 막힌다.
“내가 언제 널 무능한 놈처럼 취급했다고 그래?”
“그럼 내가 지켜준다고 했으면 계속 그 말만 믿어. 자꾸 너 혼자서 불안해하지 말고.”
손우경은 아직 파오와 오조가 들어 있는, 문짝이 뜯겨나간 채 문이 반만 열려 있는 방 쪽을 슬쩍 곁눈질하며 혼잣말 같은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저 녀석 울분도 대충 가라앉았을 거고, 뭐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니.”
거기까지 말한 놈이 왠지 꿍꿍이가 느껴지는 얼굴로 날 의미심장하게 내려다봤다.
“현아, 나 꽉 잡아.”
녀석이 나에게 간단하게 주의를 주기가 무섭게 우리의 주변 공간이 둥글게 어그러졌다. 날 안고 있는 손우경의 몸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뭔가 심상치 않은 징조라 내가 얼른 손우경의 목에 팔을 둘렀더니 놈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떨어진다.”
“뭐?”
녀석의 머리카락이 낙하하는 공기에 휩쓸려 머리 위로 나부끼는 모습이 눈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문파공에 의해 원형으로 잘린 바닥이 층층마다 전부 쪼개져가며 우리의 몸은 아래층을 향해 질주하듯 떨어져 내렸다. 이 미친 자식이 건물 바닥 전체를 기문파공으로 한 번에 꿰뚫어버린 것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나의 절박한 비명 소리가 티페레트 요새 내에 마치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