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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선을 넘어서 (22/24)

19. 사선을 넘어서

심장마비로 하마터면 사망 직전까지 가는 줄 알았으나 빌어먹게도 비명을 질러댄 내 목만 잔뜩 쉬었다. 바닥에 앉아서 못해도 약 십년 이상은 수명이 단축됐을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파오와 오조가 차례대로 바닥으로 내려왔다.

쟤네가 저 높이에서도 마치 무슨 계단이라도 내려오는 것처럼 사뿐하게 훌쩍 뛰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새끼 여우는 나와 손우경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했는지 바닥으로 푹 숙인 고개는 물론, 얼굴을 가리고 있는 로브 후드를 아예 걷어 올릴 생각조차 않는 듯했다. 파오는 손우경의 야유 섞인 농담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자기 머리 위로 뚫려 있는 수십여 층의 바닥들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바닥이 절단된 부위에서 먼지처럼 하얀 돌가루가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기문파공으로 이게 가능했으면 첨부터 힘들게 고생할 필요도 없었잖아.”

손우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도 방금 전에야 생각난 거라서.”

“이 괴물 같은 놈. 네 녀석이랑 같이 있으면 내가 반푼이라도 된 느낌이라서 성질 나.”

“뭐, 사람마다 타고난 능력 편차라는 게 있는 거니까, 너무 낙담하진 마. 그나저나 위에서 볼일들은 잘 보고 내려왔어?”

파오는 자기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오조의 팔을 붙잡아서 앞으로 끌어 오더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너 죄지었냐? 왜 내 뒤에 숨어 있어?”

파오는 아무래도 새끼 여우 다루는 법에 그리 능숙하지 않은 듯했다. 오조가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있던 시선을 살짝 치켜들고서 앞에 서 있던 손우경이랑 옆에 있는 파오를 슬그머니 훔쳐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시 후드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손우경이 능청스러운 말투로 파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아, 좀 친절하게 대해주라고. 애가 사형 눈치만 보고 있잖아.”

확실히 평소에도 불편하게 지내던 사이인 만큼 너하고 자고 싶단 얘기랑 키스 한 번으로는 비틀렸던 관계가 쉽게 진전되지는 않는 법인가 보다. 사실 오조는 우리 눈치를 본다기보다는 파오에게 자기 손목이 붙잡혀 있는 것 자체에 상당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파오가 그런 새끼 여우의 손목을 놔주며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참는 것이 나에게도 여실히 느껴졌다. 오조는 파오의 화난 표정을 살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게…… 아직은 가까이에 있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쟤네들도 갈 길이 참 멀구나 싶었다. 결국 오조는 예전처럼 파오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자 차차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갔다. 것도 내 뒤에 숨어서. 손우경이 한쪽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온몸을 부들거렸다. 녀석은 남은 손으로는 파오의 어깨를 탁탁 토닥이면서 아주 대놓고서 사람을 약 올리고 있었다.

“그러게 평상시에 좀 잘해주지.”

“……내 어깨에서 당장 그 손 안 내리면 지금 네놈 몸에 있는 혈관 다 터트려버린다.”

손우경은 재빨리 손을 떼어내며 양손을 치켜들고서 과장된 항복 선언을 했다. 아무튼 둘 다 건수만 생겼다 하면 사사건건 서로를 놀리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그때 그 일 이후로 손우경이 요즘 내 앞에서 티가 날 정도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손우경은 그 일로 내가 몹시 충격을 받아서 지금 부분 기억 상실증에 걸린 줄 알 테니까 일단 표면적으로나마 파오와 긴밀한 사이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파오와의 얘기를 손우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듣지 않았던 게 그나마도 천운이긴 했다. 과거의 일들이야 어쨌든 듣는 것만으로도 놈에게 오해를 살 만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혹시라도 파오가 손우경 손에 죽을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새끼 여우 눈에서 눈물을 쏟게 하기는 싫었다.

마침 내 뒤에 숨어서 안정을 취하고 있던 새끼 여우가 갑자기 내 옷자락을 붙잡고서 등 쪽으로 이마를 기대어온다.

“삼장…….”

“…….”

“이거…… 내 꿈인 거… 아니지…….”

나는 대답했다.

“그래. 이거 꿈 같은 거 아니야. 파오가 너한테 자기 좀 받아달라고 말했잖아.”

그러나 오조가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난 왜…… 안 믿기지.”

“…….”

“이상해……. 나한테 이런 좋은 일이…… 생길 리가 없는데…….”

내 옷자락을 붙잡은 새끼 여우의 손으로 녀석의 작은 들썩거림이 전해졌다. 아이가 천천히, 느릿하게 자기 안에 감춰졌던 속마음을 오직 나에게만 모두 속삭여왔다.

“나 있지. 예전에는…… 잠에서 깨고 싶지가 않았었어.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나는 삼장이랑, 우경이랑, 그리고 파오하고 다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어……. 이게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그런지……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게 겁이 나……. 사실은 이게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고. 누가 그럴까 봐서. 눈을 떴을 때…… 혹시라도 내가 예전에 살던 그 차가운 방 안일까 봐서……. 나는 다시는 그곳으로는……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오조의 고백이 이어질수록 내 가슴이 먹먹해져갔다. 내가 이 아이에게만큼은 아주 특별하게 마음이 기울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세상 어느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다 과거의 상처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지만, 나는 나와 비슷한 오조의 아픔에 가슴 깊이 공명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아픔의 양상도, 자라온 환경들도 많이 달랐었지만, 나는 오조에게 나의 불운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들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아이가 더는 상처받지 않기를, 또 행복해지기를 원했었다.

게다가 오조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 네 명이 이러한 모양으로 유지되고 있는 그 중심점에는, 바로 내가 있었음을 말이다. 녀석은 이번 일이 다 끝나고도 우리의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고 있었지만, 나는 답변을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내가 확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우경이 아무리 자기 옆에 있으라고 말해봤자, 파오가 관음존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해봤자, 그리고 오조 네가 앞으로도 우리가 다 같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울먹여봤자.

나는 이미 우리에게 예견된 슬픈 결과를 알고 있었다.

오조에게는 아주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얼굴을 보고 말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이것만 다 끝나면 배고프니까 만두 먹자. 내가…… 너만 만두 두 개 쪄줄게.”

“…….”

“아니면 내 것도 그냥 네가 먹어.”

나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손우경이 티페레트 요새의 밑바닥까지 뚫어놓은 이 맨 아래층에는, 우리가 더는 내려갈 곳이 없었으나 대신에 또 다른 통로가 있었다. 그렇게 지금 내 눈앞으로 여덟 마리의 뱀들이 조각된 거대한 문이 큼지막한 자물쇠에 잠긴 채로 안쪽에서부터 엄청나게 수상쩍은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누가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저기가 바로 오조가 말했었던 지하의 클리포트라는 장소일 것이다.

그리고 저것은 우리에게 놓인 가장 최후의 관문이자 바로 이별의 시작점이었다.

손우경과 파오는 서로 간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마치고 어느새 그 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새끼 여우를 돌아보며 일부러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럼, 우리도 갈까?”

* * *

억지로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간 장소는 후끈한 공기로 인해 숨이 턱턱 막혔다. 무슨 부화장 수준으로 조성된 공기가 마치 한낮의 사막을 방불케 하듯 너무나 후덥지근했다. 게다가 조명이라도 켜놨는지 공간이 온통 기분 나쁜 붉은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 클리포트라는 곳은 우리가 처음 최상층에서 봤던 공간의 모습과도 대부분 일치하기는 했으나, 문제는 마법진과 크리스털, 그리고 벽 안의 조각상들이 모두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지금 거꾸로 서 있는 게 아닌지 큰 착각이 들 정도로 완전히 확 뒤집혀버린 이 공간 안에서 혹시라도 머리 위로 뭔가가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었다. 황도 12궁 조각상들의 표정들마저 정상적이질 못하고 다들 하나같이 공포에 질려 있거나 절규하고 있는 기괴한 얼굴들이었다. 조각상들 모두 다 입을 크게 쩍 벌리고 있다는 점도 어딘지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는 부분이었다.

우리가 그 넓은 지하 세계를 연신 경계하며 얼마간 걸어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만약에 대비하여 활짝 열어두었던 문이 뒤에서 철커덕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심장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파오가 얼른 뛰어가서 잠긴 문을 다시 열어보려고 했지만 암만 힘을 줘도 열리지가 않았다.

대체 누가 뒤에서 문을 잠근 거지?

설마 우리가 이곳에 들어오는 걸 누군가 기다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서로 심상치 않은 눈빛을 교환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촉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을 때였다.

-찌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고막이 찢어질 만큼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네 명 다 양쪽 귀를 틀어막으며 들려오는 소리에 아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그때 하늘만큼 높게 지어진 천장의 마법진 안에서 웬 거대하고 새카만 대가리 하나가 쑤욱 빠져나오고 있었다.

“…….”

귀가 멎을 듯한 이 소음 속에서도 나는 마법진안에서 나오고 있는 그것을 향해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극도의 긴장감에 의해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머리털이 주뼛 곤두섰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위협을 가할, 어떤 가공할 만한 존재임은 틀림없었다.

머리 안에서 일전에 관음존자가 내게 일컬었던 그 에메랄드 태블릿의 수호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정말로 이곳에서 세상을 멸망시킬 악의 징조가 태어난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타이밍 자체가 뭔가 수상쩍은데…….

붉게 물든 공간이라 그런지 그것은 마치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는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가장 먼저 매끈매끈한 머리 부위가 마법진 안에서 천천히 흘러나왔고, 그 후로는 두 팔과 육중한 몸통이 연달아서 등장하고 있었다. 꼭 날개처럼 생긴 그것의 검은색 팔이 허공을 한 번 가르자 머리 위에서 아주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 거센 풍압으로 인해 나는 잠시나마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이윽고 그것의 몸 전체가 절반가량 등장했을 때, 나는 진정으로 내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저건 대체 뭐지……. 마침내 그 커다란 몸이 바닥으로 풀썩 내려앉자마자 땅이 온통 뒤흔들리며 공기마저 진동했다.

파오는 영혼이 홀랑 나간 듯한 눈동자로 후후 웃으며 말했다.

“난 이제…… 내 앞에 뭐가 나와도 전혀 놀랍지가 않아…….”

손우경과 오조도 거의 비슷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 오기까지의 수많은 날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쪽으로 가네 마네를 놓고 서로 감정이 상해가며 입과 입으로 격전을 벌여야 했던 그 또렷한 기억들이…….

그것의 까만 눈망울이 정확히 우리를 내려다보며 다부진 주둥이를 꾸엑꾸엑 벌려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손우경은 자못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제길, 너무 귀여워서 못 죽이겠잖아.”

내가 저 자식이랑 오래 있다 보니 알게 된 건데 별로 생김새답지 않게 꽤 귀여운 생물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쿠르게오르 사막에서도 맨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놈이 길가다가 발에 차일 정도로 수두룩하게 돌아다니던 사막의 미어캣들은 그냥 못 본 척하며 지나갔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저것의 정체는 바로.

거대한, 대왕 펭귄이었다.

턱시도 같아 보이는 검은색 털옷을 입고 대왕 펭귄이 뒤뚱뒤뚱하며 우릴 향해 걸어왔다. 파오가 김빠진 목소리로 이게 뭐야 하고서 말문을 열려던 차였다. 순간 대왕 펭귄의 눈에서 붉은 광선이 뿜어 나와서 근처 바닥에 내리꽂혔다.

우리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펭귄 눈에서 쏘아진 광선이 바닥을 녹일 정도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손우경이 한쪽 손으로 나를 안고서 허공으로 떠올랐고, 오조와 파오 역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오조가 지팡이로 푸른 불꽃을 쏘아 보냈지만, 펭귄의 몸통에서 즉시 튕겨나갔다. 이후 파오가 접근하여 주먹으로 펭귄의 머리를 내리쳐봤지만, 오히려 파오의 짧은 비명 소리만이 터져 나왔다.

“야, 이 자식 몸이 완전 돌덩어리야!”

상황 파악이 적당히 끝난 손우경은 나를 바닥 안전한 곳으로 내려다놓고서 기문파공으로 보호막까지 만들어둔 다음에야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놈이 가슴 앞으로 모은 두 개의 손가락을 좌우로 찢어발기자 공간이 파지직 갈라지며 펭귄에게로 향했다.

손우경의 기문파공 위력이야 다들 겪어봐서 잘 알고 있으니 이제 다 끝난 거라고 섣부른 판단을 할 즈음이었다. 펭귄의 주변으로 얼음 같은 방어벽이 불쑥 솟아올라 손우경의 기문파공을 막아냈다. 공간끼리 맞부딪치며 방어벽이 박살 나버렸고 손우경의 기문파공 또한 사라져버렸다.

아래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저 펭귄이 대체 어떻게 해서 기문파공을 막아낸 거지?

펭귄은 눈을 통해 공중으로 광선을 마구 쏘아댔다. 손우경과 오조, 파오는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며 그 광선을 쉴 새 없이 피하는 중이었다. 펭귄은 그 둔탁해 보이는 몸에 비해서 움직이는 속도가 장난 아니었다. 오조 등이 몇 번이나 다시 공격해보려는 시도를 했으나 지금은 광선을 피해 도망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광선 공격이 생각보다 잘 들어먹질 않자 펭귄이 주둥이를 쩍 벌려댔다.

-꾸에에에엑!

귀청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입안에서 마치 용암 같아 보이는 부글부글한 액체가 호스에서 물이 뿜어지듯 콸콸 쏟아져 나왔다. 이번엔 손우경 쪽에서 기문파공으로 자신의 뒤쪽에 떠 있던 파오와 오조의 몫까지 방어벽을 드리웠다. 용암이 투명 방어벽에 막혀서 바닥으로 쉴 새 없이 흘러내려왔다. 내가 있는 곳까지 용암이 흘러오진 않았으나 이미 펭귄의 주변은 새빨간 지옥도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대왕 펭귄은 양쪽 날개를 사용해서 손우경의 방어벽을 깨부수려고 했다. 방어벽에 금이 쩍쩍 가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이지. 설마 기문파공이 무적이 아니었다는 건가. 펭귄의 공격 때문에 땅까지 엉망이라서 오조가 소환진을 그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파오도 속수무책으로 날아다니는 걸 보면 녀석의 혈류종은 아무래도 대인용 기술인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비참하게 여겨졌다. 손우경이 만들어준 안전한 보호막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내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었다. 이 보호막이 아니었더라면 손우경은 방금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진행하는 두 개의 기문파공을 사용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손우경이 방어벽으로 된 기문파공을 거두고서 이번엔 층층이 슬라이스 형태로 공간을 나눠들어갔다. 공간이 수십여 개로 갈라지며 펭귄의 몸통으로 날아들었다. 펭귄 녀석이 다시 얼음 방어벽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른 펭귄의 등 뒤로 다가간 오조가 완성된 주문을 발동시키자마자 갑자기 천장에서 불에 타들어가는 무수한 돌덩어리들이 생겨나 바닥으로 날아들었다. 펭귄의 머리와 몸통으로 불타는 돌덩어리들이 떨어지자 놈이 괴악한 소리를 지르며 땅을 쿵쿵 뛰어댔다.

그로 인해 바닥이 다시 울렁이며 천장까지 흔들려댔다. 허나 오조의 마법으로도 펭귄을 죽이지는 못했다. 나는 녀석들이 전투에서 저렇게 고전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파오도 기회가 생기는 대로 펭귄에게 다가가 자기 주특기를 시전하려 들었으나 전혀 통하질 않았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마땅히 몸 안에서 피가 흘러야 하는데도 그게 통하질 않으니 파오가 답답한지 큰 소리로 사자후를 토하며 아주 환장하겠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놈이 진짜로 그 에메랄드 태블릿의 수호자인 거 아냐?”

대왕 펭귄이 터무니없이 강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럼에도 저 녀석이 세상을 멸망시킬 악의 근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포악한 성질과는 달리 놈의 귀여운 생김새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꾹 닫혀버린 입구 쪽을 돌아보며 다시 현재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그야 약 십개월 전에 룸버린과 로고스의 실수로 발동됐다는 크리처가 하필이면 우리가 이 장소로 들어오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다는 게 대체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냐고.

관음존자의 말대로 만약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면 그 수호자라는 존재는 결코 아군과 적군의 구분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물론 중간에 꼼수를 쓰긴 했지만 우리가 최상층부터 시작해 한 층 한 층 계단을 내려왔을 때에도, 이곳의 마법사들은 갑작스러운 침입자들에게 대비할 시간이 있을 정도로 평소의 일상생활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물론 우리가 장소를 아예 헛짚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돌프가 나에게 서쪽으로 향하는 여정에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오조를 길잡이로 내세운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실제로 오조는 이번 여정 내내 자신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잘 이행했고, 서쪽에 도착해서도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전혀 막힘없이 길을 안내했었다.

막말로 룸버린과 로고스의 마법사들이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어 우릴 엿 먹일 작전을 꾸몄다면, 분명 서쪽 대륙의 중심부이자 세피로트의 핵심인 여기 티페레트 요새에서 뭔가를 도모했을 터였다. 오조 얘기로도 최상층에서 봤던 그 마법진 안의 크리스털 덩어리가 실은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창조의 화로라고 했었으니까.

장담컨대 우리는 반드시 와야 할 장소로 맞게 찾아온 게 틀림없다.

하지만 손우경과 파오의 말대로, 나는 이것이 정녕 관음존자의 속임수였음을 아주 뒤늦게야 깨닫고 말았다. 나의 병신 같은 책임감과 오조의 길잡이 역으로서의 성실한 임무 이행이 톱니바퀴처럼 함께 맞물려서 오늘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듯싶었다.

오조와 파오가 펭귄의 주의를 끄는 사이에 손우경의 3차 공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펭귄은 싸움을 진행할수록 점점 더 진화하고 있었다. 펭귄이 손우경의 공격에 얼음 방어벽을 만들어내고는 좌우 양쪽을 날아다니던 파오와 오조를 양날개로 각각 후려쳤다. 둘 다 일직선으로 나가떨어지더니 벽에 쿵 부딪쳐서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몸이 튼튼한 파오는 별문제 없이 다시 허공으로 튀어 올랐으나 바닥으로 나가떨어진 새끼 여우는 전혀 일어나질 못했다. 파오가 허공에서 펭귄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바닥에 널브러진 새끼 여우를 얼른 안아 들었다. 손우경이 펭귄과 격전을 벌이는 동안, 파오가 쓰러져 있던 오조를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와 잘 부탁한다고 짧게 말하고는 서둘러 손우경을 지원하러 나섰다.

다행히 새끼 여우는 숨이 붙어 있었다. 잠시 기절한 듯했다. 파오도 오조를 안아 들자마자 그것부터 확인하고서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더 지체하지 못하고서 내게 데려온 것이었다. 나는 창백해진 오조를 끌어안고는 어서 이 싸움이 끝나기만을 소원했다.

아까 오조가 손우경에게 오늘 죽는다고 했던 말들이 뇌리에서 자꾸 떠올라서 내 마음이 마치 촛불처럼 촛농을 일으키며 바짝 타들어갔다. 심장이 불안하다 못해 뜨거워졌다. 일이 이렇게 다 꼬여버린 게 다 내 책임인 것 같아서 너무나 괴로웠다.

평범한 나의 눈으로는 제대로 포착하기도 어려운 날쌘 움직임들이 공중으로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파오가 벽을 타고 저 높은 천장까지 뛰어 올라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도움닫기를 한 뒤, 펭귄의 눈으로 발을 날려 찍어내렸다. 다행히 얼음 방어벽이 쳐지기 전이라 그 공격은 무사히 성공했다.

불시에 눈을 찔린 펭귄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중심을 잃은 사이에 손우경의 손으로 여의봉이 쥐였다. 단숨에 길이가 쭉 늘어난 여의봉이 아주 거대한 망치 형태의 무기로 변했다. 양손으로 망치를 쥔 손우경은 펭귄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서 정수리에 무기를 꽂아 넣었다.

공간 전체가 펭귄의 비명으로 강하게 진동했다. 다시 양쪽 귀를 틀어막는데 그 소리에 기절해 있던 오조가 눈을 떠서는 자신도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펭귄이 바닥으로 푹 쓰러지자 손우경은 확인 사살차 바닥으로 수십 개의 기문파공을 쏘아 보냈다. 그렇게 펭귄의 몸통이 끔찍한 몰골로 슬라이스처럼 얇게 저며져갔다. 손우경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손으로 염화구를 만들어내 펭귄의 몸에다가 불을 붙였다.

대왕 펭귄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곱씹어보던 손우경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어마어마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등지고서 녀석은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윽고 바닥으로 따라 내려온 파오가 손우경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 정말 잘했다는 식으로 씩 웃어 보였다.

순간마다 너무 긴장하면서 보느라고 뻣뻣하게 굳었던 내 몸에서도 쥐가 날 지경이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오조가 다급하게 외쳤다.

“피해!”

오조의 외침에 손우경과 파오가 좌우로 떨어져 나갔다. 놈들이 서 있던 자리로 바닥이 모조리 솟아나 있었다. 하지만 손우경보다 한발 느리게 행동한 파오는 그만 큰 부상을 입고 바닥에서 쓰러져 있었다. 새끼 여우가 자신도 아직 몸이 성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파오가 쓰러진 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나는 방금 전 공격이 날아온 곳으로 얼른 고개를 들어봤다.

그리고 내 온몸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 어째서…….

거꾸로 매달린 어느 조각상의 벌어진 입에서 내겐 누구보다 익숙한 사람이 그 여유로운 모습으로 걸터앉아 있었다. 작은 체구임에도 이 드넓은 공간 안이 온통 그의 존재감으로 가득 들어찬다. 하얀 얼굴에 박힌 두 개의 새빨간 붉은 보석이 시리도록 오만한 빛깔을 띠고서 아래쪽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내 머리 안에 든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게 도난이라도 당한 듯 텅 비워져갔다.

그가 냉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니들.”

내 귓가에서 본격적인 지옥의 서막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 * *

관음존자가 조각상의 입안에서 몸을 일으키자 발이 닿는 허공으로 투명한 계단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는 공중에서 투명 계단들을 밟으며 우아한 동작으로 바닥을 향해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손우경도 그 모습에 몸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관음존자의 시선과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내가 있는 곳이었다. 마치 메두사의 얼굴이라도 본 듯 나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그가 내게로 점점 다가오는 걸 멍청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머리에서 왜? 라는 물음조차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직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예상했던 순간보다 그 시간이 좀 더 일찍 다가온 것뿐이었다.

바닥으로 두 발을 딛게 된 관음존자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요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나를 조종할 수 있는 남자.

관음존자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리 와.”

몸이 반자동적으로 일으켜 세워진다. 머리가 거부하고 있었지만, 이미 두 다리가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 무척 멀게만 느껴졌다. 불현듯 형언할 수 없는 공포심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손과 발은 물론, 몸 전체가 요동치듯 잠시도 쉬지 않고 전율하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미리 예감이라도 하듯 내 영혼이 전하는 경고인 것 같았다.

이제 관음존자가 있는 곳까지는 채 열 발자국도 남지 않은 거리였다. 그때 등 뒤에서 누가 날 붙잡았다. 그 손의 감각을 알면서도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가지 마. 놈에게 가면 안 돼!”

그러자 관음존자가 나를 대신하여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했다.

“……하, 가만히 들어주고 있기가 상당히 거북하군 그래.”

손우경과 나 사이로 공간이 잘려 내려왔다. 손우경이 날 잡고 있던 손을 놓친 순간, 관음존자가 순식간에 내 앞까지 몸을 이동시켜서 녀석의 몸으로 이차적인 기문파공을 쏘아 보냈다. 손우경이 방어벽을 만들어내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기문파공끼리 부딪치자 둘 다 단번에 사그라졌다. 관음존자가 차갑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건 분명히 내가 너에게 잠시 빌려주는 거라고 말했잖아?”

“개소리 집어치워. 현이에게 손대지 마!”

“현이?”

관음존자가 키득키득 웃으며 허공에 떠 있는 손우경에게 농담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남의 걸 가지고서 실컷 재미를 봤으면 남자가 돼가지고 슬슬 적당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네가 너무 불쌍해서 잠시 가지고 놀라고 빌려준 거라니까? 아마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네 취향일 거야. 이건 내가 나름대로 네 의견들을 반영해서 길러낸 역작이니까.”

손우경이 어이없다는 듯 비웃는 얼굴로 관음존자에게 기문파공 공격을 연속적으로 가했다. 아돌프는 쓰러져 있던 날 한쪽 팔로 들어 안고는 가볍게 자리에서 비켰다.

“아, 그리고 네 것도 아닌 것에다가 이딴 보호막 같은 건 쳐두지 마.”

역시나 공중에 뜬 상태에서 그가 내 몸에 둘려 있는 손우경의 보호막을 뱀 같은 눈길로 찬찬히 훑어보더니 손가락을 튕겨서 없애버렸다.

“다시 가져가. 이제부터 날 상대하려면 기문파공 하나 가지곤 네 몸을 지키는 것조차 벅찰 테니까.”

확실히 손우경은 관음존자에게 들려 있는 나 때문에 쉽사리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닥에서는 방금 전 쓰러진 파오를 오조가 울면서 어떻게든 깨워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불에 타고 있는 대왕 펭귄의 시체와 그 주위에 흐르는 뜨거운 용암.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이었다.

손우경이 말했다.

“역시나 무슨 일 하나씩을 벌일 때마다 항상 조잡하고 더러운 수작을 부리는 게 네가 하는 짓다워.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하고 있나 했더니 고작 이런 거냐?”

“그야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으니까.”

손우경이 대왕 펭귄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마 저것도 네놈 짓이겠지. 하찮은 크리처 따위가 기문파공을 막아내는 걸 봐선.”

관음존자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하찮다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내가 오늘의 첫무대를 장식하려고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손수 공들여서 만든 놈인데. 좀 전에 기문파공을 가로막힌 네가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얼굴이 아주 볼 만하더군.”

손우경도 킥 하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뭐? 에메랄드 태블릿? 철 지나서 쉰내까지 나는 떡밥을 가지고 무슨 세상 멸망이 어쩌고 들먹일 때부터 알아봤어. 나 하나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짓을 벌이다니 감격해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이 씹새끼야.”

“…….”

“하긴 네놈이 아무리 잘난 척해봤자 넌 하늘이 두 쪽 나도 절대로 날 죽일 수가 없으니까. 안 그래?”

손우경이 단순히 허세를 부리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비록 관음존자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날 안아 들고 있던 손아귀에 순간적으로 강한 힘이 실렸으니까. 손우경은 엄청난 분노가 잠재된 듯한 고요한 음성으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얘기해봐.”

“네 나름대로는 머리를 굴린 거겠지만, 넌 나를 그 안에서 절대 풀어줘선 안 되는 거였어.”

“…….”

“왜냐하면 난 거기에서 네놈을 어떻게 죽여버릴까 바로 그 생각만 곱씹으며 살았었거든!”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였다. 멀리 떨어져 있던 손우경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나와 관음존자의 앞까지 다가와 아돌프의 목을 손으로 노렸다. 관음존자가 옆으로 목을 꺾어 피하더니 나를 안고 있던 손 말고 다른 손으로 손우경의 심장 부위를 관통하려고 들었다. 손우경이 그 팔을 붙잡아 다른 손으로 아돌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얼굴을 맞아서 고개가 돌아간 관음존자는 발로 손우경의 복부를 퍽 걷어찼다.

각각 한 대씩 서로 주고받은 손우경과 관음존자 사이에서 살벌한 시선들이 이어졌다. 손우경이 나를 힐끗 쳐다보며 관음존자에게 제안했다.

“……현이는 내려놓고서 나랑 일대일로 제대로 붙지그래.”

관음존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원한다면.”

그러자 내 주위로 투명한 상자 같은 게 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관음존자가 기문파공으로 만들어낸 공간 상자 안에 갇혀서 놈들과는 비교적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송되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투명한 벽을 암만 두들겨봐도 밖으로는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관음존자가 내게 싸늘해진 눈빛으로 읊조렸다.

“그쯤에서 얌전히 있어.”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누가 봐도 안전한 장소에 도착했고, 이윽고 내 주변을 둘러싸던 장벽 역시 사라졌다.

나라는 상황이 정리되자 이어지는 손우경의 공격에 관음존자가 다시 허공의 계단들을 밟고 올라가며 그 공격들을 전부 다 튕겨냈다. 그것도 언령의 힘으로.

-깨지지 않는 방어벽, 방어, 방어, 방어, 되돌리기.

아돌프는 기문파공으로 공간 위에 투명 계단을 만든 다음, 자신은 일부러 여유 있게 올라가는 모습을 보이며 정작 손우경의 공격에는 전부 언령만으로 방어 기술을 구사했다. 마치 손우경이 자신한테는 아예 상대도 안 된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그만둬라. 너는 내게 이길 수 없다.

언령 기술을 사용할 때의 관음존자는 목소리 톤을 한결같이 일정하게 유지했었다. 그러나 손우경은 관음존자의 언령이 섞인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서 초 단위로 이어지는 공격들을 계속해서 퍼부어댔다.

“영 진전이 없는 놈이군. 오년 전에도 이미 확인하지 않았던가? 너와 나는…….”

관음존자가 계단을 올라가다가 걸음을 멈추고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손우경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공격을 마구 쏘아 보낸 게 아니라 관음존자와 자신의 주변에다가 뭔가를 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처럼 공간 전체를 에워싸는 투명하고 거대한 상자 안에 갇혀버리게 되었다.

“난 너처럼 언령 기술을 사용할 순 없지만 그에 상응하는 조건은 만들 수 있지. 내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내가 곧 주인이니까. 넌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어.”

그것의 크기는 이 클리포트의 공간과도 거의 엇비슷한 수준이었으나 다만 손우경의 말처럼 도망칠 구석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똑같은 기문파공을 사용하는 자에겐 이런 식의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

“그걸 누가 모른대냐? 다만 네놈의 잘난 언령 기술은 틀어막을 수 있는 거거든. 근데 말야. 지금 네가 밟고 있는 계단들도 좀 전부터 내가 만들어준 거야, 이 멍청아.”

관음존자가 밟고 있던 계단들이 공중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렸지만, 그는 조금이라도 몸을 휘청거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침착한 기색으로 손우경의 어리석음을 탓하려 들었다.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운 행동이군. 네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녀석이라면 이런 짓을 두 번이나 반복할 순 없을 텐데.”

관음존자가 자기 머리 위로 둘러진 기문파공의 장벽을 올려다보며 의아한 투로 물었다.

“오년 전이랑 같은 방식으로 날 상대하겠다고? 지금 제정신이냐?”

설마 오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둘 사이의 과거지사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는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무질서한 혼돈으로만 여겨졌다. 관음존자가 물건을 품평하는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게다가 이건 일반적인 공간 상자가 아니라 외부에서 끼어들지 못하게끔 방어벽을 구성하고 있군.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이런 걸 만들어두면 네 기문파공 중 절반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손우경은 고개를 좌우로 우둑거리며 곧 치열하게 시작될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놈이 대꾸했다.

“내가 한 수 접어주는 거다. 네 녀석이랑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싸울 작정이라서. 그래야 나중에 나보고 치사했다느니 어쩌니 하는 딴말을 못하지.”

“……한 수를 접어줘? 네가? 나한테? 설마 지금 내가 언령을 못 쓰는 것 때문이라면 괜한 개수작 부리지 말고 이쯤에서 집어치워라.”

관음존자는 웃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손우경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관음존자를 노려보며 다소 격앙된 어조의 말들을 내뱉었다.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년 전에 다시 만났을 때 네 녀석은 분명 예전과는 달리 기문파공을 절반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지. 벌써 잊은 건가? 내가 사형으로서 가르쳐줬잖아.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진행되지 않는 한 기문파공은 완성된 게 아니라구. 게다가 애초에 네가 사용하는 언령 기술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일 순 있어도 실은 단순한 흉내 내기에 그치지 않아. 아무런 깊이가 없단 말이지. 그러니 반쪽짜리 기문파공을 언령 기술과 섞어 쓴다고 해서 눈속임이 가능할 것 같냐?”

관음존자의 기문파공이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니? 방금 손우경은 오년 전에 관음존자와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예전과는 달리 기문파공 기술을 전부 다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관음존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 떨기는.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굳이 너를 상대하는 일에 두 가지나 쓸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손우경은 관음존자가 말하는 사이 그의 사정거리 안으로 불쑥 치고 들어가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한번 증명해봐. 어차피 난 계속해서 공격만 할 거니까.”

녀석의 손이 허공을 가르자 첨예한 균열이 생겼다. 불시의 공격이었는지라 관음존자가 얼른 등을 뒤로 숙이며 몸을 피했다. 배 부위로 공간이 갈라진 기문파공이 스쳐 지나가자 아돌프가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다시 몸을 정상적으로 세웠다.

손우경이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피하지만 말고 일단 방어벽부터 한번 만들어보시지? 그럼 무적일 텐데 말야.”

손우경의 도발에도 관음존자는 방어벽 대신에 공간을 가르는 기문파공으로나 맞대응했을 뿐이었다.

투명한 공간이 사방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그것은 손우경과 관음존자가 둘이서 맞붙고 있는 하나의 링이나 마찬가지였다. 막상막하에 용호상박. 언뜻 보기에는 스피드 쪽은 아돌프가 우세했지만, 공격의 파동이나 범위 자체는 손우경 쪽이 훨씬 더 컸다. 그럼에도 관음존자는 피하는 속도가 빠르니 공격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손우경이 공격을 피하려던 관음존자의 뒤쪽으로 재빨리 이동하여 뒷덜미를 잡아채려 했으나 간발의 차로 놓쳐버린다. 그럼에도 공격은 멈추질 않았다. 손우경이 처음으로 기문파공 말고도 거대한 화염 덩어리를 날려 보내는 변주를 넣었다. 그러자 관음존자가 기문파공으로 방어벽을 만들어냈다. 벽에 부딪친 손우경의 화염 기운이 사라지자마자 자신도 다른 손으로 화염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마치 거울이라도 보고 있는 듯하다. 저 둘의 전투 방식이 너무 흡사했다. 저렇게 빠른 속도에서 순간적으로 몸이 반응하는 방식들이 꼭 한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래전에 저 둘은 도반 관계라 했었고, 아까 손우경이 분명 자기 스스로를 사형이라고 칭하며 흡사 관음존자에게 기문파공을 전수해준 것처럼 말했으니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관음존자에게서 무언가를 배웠던 것보다, 요 근래 손우경의 옆에서 놈이 싸우는 장면들을 자주 목격해서인지 지금 어느 쪽이 진짜 오리지널인지가 너무 명확하게 보이고 있었다.

‘내가 그깟 따라쟁이 놈의 말장난쯤은 내 행동으로 모조리 부숴줄 수 있다는 걸 네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줄게.’

그때 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갑자기 머리에서 격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양쪽 관자놀이로 손을 얹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불현듯 무언가가 생각나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 그리고 위아래로 마구 흔들리는 내 몸.

잔인하게 내리떠진 은회색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속삭여왔다.

‘빠져나갈 수가 없는 몸이야. 그 자식이 머리를 아주 잘 썼어.’

아래쪽이 사정없이 거칠게 쑤셔 넣어졌다.

‘독에 당해서 지금 제정신도 아닌 너에게 할 소리는 아니지만 사실 난 네가 아주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잠시만 더 속아줄게.’

웃고 있는 남자의 입이 내 입술을 탐스럽다는 듯이 빨아들인다. 몸 마디마디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픈 와중에도 남자는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배 속으로 들어선 탄력적인 물건이 자꾸만 나의 내부 깊은 곳으로 꿈틀꿈틀 기어들어가 어느 지점으로 처박힌다. 그곳이 아예 뭉개지는 듯한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혀 나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내 모든 걸 그 자식이 전부 훔쳐갔으니 너는 내가 갖겠어.’

이것은 확실치는 않아도 손우경과의 기억 중 일부였다. 독 운운하는 걸로 봐선 아마 유리 돔에 갇혀서 내가 삼일 동안 정신을 잃었을 때쯤인 듯하다. 나를 향한 그 지독한 소유욕 말고도 신경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훔쳐가. 자신의 모든 걸 훔쳐가다니.

기문파공을? 아니면 대체 무엇을 말인가.

손우경의 정체가 진심으로 수상하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역시 유리 돔 안에서 파오와 오조를 미행했을 때에도 녀석은 그때 나에게…….

‘환영제야단 수장들에겐 기문파공 말고도 대대로 종단 각 가문의 모든 기술과 비기가 전수되는데…….’

‘근데 환영제야단의 수장들이라니. 방금 전 얘기는 꼭 네가 종단 후계자라도 됐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손우경이 키득 웃으며 나를 내려다봤었다.

‘맞아. 어차피 내가 쓰는 기문파공만으로도 이미 다 설명 된 거 아니던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난 티뷸라 궁이나 포타라카 어디에서도 너를 본 적이 없을뿐더러 석가여래께서 따로 후계자를 키웠다는 말 또한 들어본 적 없어!’

‘그랬겠지, 난 스무 살이 되기 직전까지 ‘그곳’에서의 ‘출가’가 불가했으니까. 그리고 원래 종단 후계자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비밀리에 키워지는 법이야. 속으로 허튼 생각을 하는 놈들이 예상외로 꽤 많으니까.’

‘그랬다면 아돌프가 어떻게 해서 지금의…….’

그 질문의 대답은 결국 얼렁뚱땅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부-게르다에 진입하기 직전, 손우경이 파오와 서로의 정체를 두고서 애먼 시비가 붙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인데, 뭐 한 가지 정도는 말해줄게.’

‘당신도.’

‘그리고 이 녀석도.’

‘원래는 전부 다 내 손아귀에 있어야 할 것들이지.’

말인즉슨, 설마 환영제야단 수장 자리가 애초에 관음존자가 아니라 바로 손우경의 것이기 라도 했단 말인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나 같은 게 끼어들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판이었다. 자신이 쳐놓은 투명 장벽으로 몸이 튕겨나간 손우경이 다시 관음존자에게 달려들었다. 끝이 나지 않을 듯한 싸움이었다. 이 공간 안이 너무 더운 것도 체력을 깎아먹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겠지만 실력이 비슷한 상대끼리 붙어서인지 관음존자도, 손우경도 상당히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기문파공이 관음존자의 한쪽 뺨을 미세하게 스쳐 지나갔다. 십오 년 가까이 지켜봤지만, 아돌프에게 상처를 낸 사람은 손우경이 처음이었다. 손우경이 큰 소리로 말했다.

“스피드 하나로는 날 이긴다며 호언하던 놈이 점점 체력의 한계에 부딪치나 보지?”

“웃기는군. 너야말로 당장이라도 나가떨어질 것처럼 지쳐 보이는데? 묏자리를 내가 알아봐줄 테니까 그 안에서 평생 쉬는 게 어때?”

“그럴 수 있으면 재주껏 얼마든지 해봐!”

확실히 체력 면에선 손우경이 한수 위였다. 녀석이 양손을 들어 올려서 공간을 엑스자로 찢기 시작했다. 관음존자를 향해 엑스자의 기문파공이 퍼져나갔다. 아돌프 역시 허공에다가 널따란 투명 방어벽을 펼쳤다. 그런데 엑스자로 공격을 가하던 기문파공이 관음존자의 방어벽에 닿는 부분만 깨끗하게 상쇄되고는, 남은 부분이 곡선으로 휘어 점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네 개의 꼭짓점이 한데 모여 관음존자에게로 쏘아졌다.

미처 새로운 방어벽을 만들어내지 못한 아돌프가 서둘러 몸을 피했으나 이번에는 한쪽 팔의 일부가 찢겨나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채 피가 흐르는 자신의 팔을 물끄러미 돌아보던 아돌프가 빨간 눈으로 머리 위에 떠 있는 손우경을 말없이 쳐다본다. 큰 중상은 아니더라도 살점 일부가 뜯겨나간 것이니만큼 일반 사람들이라면 벌써 고통에 몸부림을 쳤을 텐데도 그는 눈 하나 꿈쩍도 않고서 오히려 더 침착해 보이기까지 했다.

“전혀 진전이 없었던 건 아니군.”

손우경은 조롱하듯 말했다.

“말했잖아, 거기에 갇혀 있는 동안 네놈을 대체 어떻게 죽일까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했다고. 오년 전에는 방금 전 그 공격이 네놈 방어벽에 그대로 막혀버렸지만, 상황 자체에 조금 더 변주를 줘봤어. 어때, 맘에 들어?”

“…….”

그때 관음존자의 눈동자가 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뭐 네놈만이 그런 변주를 줄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한 관음존자가 손으로 수인 동작을 취하며 입으로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웠다. 관음존자를 상대로 싸움의 우위를 다져가던 손우경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으로 추락한다. 나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긴고주의 존재를…….

순식간에 이 클리포트 안에 쳐져 있던 손우경의 거대한 방어벽이 사라졌다. 관음존자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녀석에게로 긴고주를 외우며 걸어갔다. 금고아칩이 관음존자의 긴고주와 반응하자 손우경은 바닥에서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며 거의 반쯤 무릎을 꿇었다.

끝장이었다.

나는 녀석이 저렇게 아파하는 장면을 도무지 두 눈 뜨고 바라볼 수가 없어서 애써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긴고주가 그치고서 누군가.

――――――으아아아아악!

손우경의 고통 어린 비명 소리에 한껏 외면했던 고개를 돌린 순간, 내 심장이 뚝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저게 방금…….

내가 제발 그만둬달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으나 허사였다. 이미 관음존자의 작은 손이 손우경의 머리카락을 거머쥔 채로 남은 눈알을 마저 뽑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두 개의 눈알이 빠져버린 손우경이 기문파공으로 자신의 주위를 방어했으나 그때는 이미 관음존자가 피로 물든 자신의 손에 담긴 눈알 두 개를 모두 터트려버린 다음이었다.

관음존자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숨을 쉬는 것도 잊고서 무작정 달려 나가려던 찰나에 다시금 내 주변으로 아까와 같은 투명막이 쳐져 허공으로 몸이 들려 올라갔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마구 울부짖고 벽을 두 주먹으로 쿵쿵 두드리며 여기서 내보내달라고 애원했다. 당신이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제발 그 녀석만은 죽이지 말아달라고 목을 놓아 간청했다.

눈물이 흘러서 앞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이나의 죽음 이후로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전부 나 때문이다. 손우경이 두 눈을 잃어버린 것도, 지금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도. 전부 다 저주받은 나의 운명에 개입한 탓에 나와 함께 불행의 늪으로 빠지고 만 것이었다. 절망스럽게 투명 상자 안에서 몸이 미끄러져 내리는 나를 바라보며 관음존자가 사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 지금 당장 우경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나 같은 건 이제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제발요…… 관음존자님…… 당신 말이라면 이제 뭐든 다 들을 테니까…… 우경이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투명 바닥에 엎드려서 나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울며 사정했다. 그때 내 몸에 둘러진 투명 상자가 쓱 사라졌다. 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내 눈앞에는 관음존자의 구둣발이 바로 보였다. 그가 나를 불쌍하다는 얼굴로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벙긋거렸다.

그것은 언령이었다.

-……지금이야.

나는 온몸을 벌벌 떨면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 안 돼요, 관음존자님……. 하지만 관음존자가 갸륵한 미소를 지으며 내 제복 안쪽에 꽂혀 있던 금강저를 빼내더니 내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 서쪽으로 출발하기 전에 바벨의 도서관에서 그가 나에게 지시했던 말이 떠올랐다.

‘보기보다 아주 위험한 놈이니 이번 일까지만 이용하고서 후에 뒤탈이 안 남게 처리해버릴 생각이다.’

‘그런 위험한 존재라면 차라리 이번 임무에서는 제외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공연히 수용소에서 빼냈다가 더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아니, 그 녀석만큼이나 이번 임무에 적합한 인재는 없어. 당분간은 네가 의심받지 않도록 가급적이면 그놈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해라. 내가 때가 되면 너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길 터이니.’

‘중요한 역할이요?’

관음존자가 나에게 자신의 진언이 새겨진 금강저를 쓱 내밀었었다.

‘여행 도중에 요긴하게 쓰일 거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따로 신호를 보내는 순간이 오면 이걸 꺼내 절대 주저하지 말고 그 손우경이라는 남자의 심장을 찔러라.’

‘관음존자님께서도 그렇게 강하다는 녀석을 제가 무슨 재주로…….’

‘아니, 너라면 충분히 가능해.’

‘…….’

‘현아, 내가 지금부터 기문파공의 약점을 하나 알려주마.’

관음존자가 기문파공으로 나와 자신의 사이에 방어벽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러고는 연달아 화염구를 쏘아 보냈다.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으나 다행히도 기문파공의 장벽은 튼튼하기에 그지없었다. 이윽고 아돌프는 내게 준 그 금강저로 자신이 만든 방어벽을 한번 관통시켜보라고 명령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바로 이행해보았다. 그 후 신기하게도 화염구도 튕겨냈던 방어벽이 의외로 금강저는 물론 사람의 팔까지도 쑥 통과시키는 것이 아닌가.

‘기문파공으로 만들어내는 공격과 방어를 가리켜서 사람들은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로 비유하는 데 반해, 사실 이 기문파공은 극도의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현실 창조 기법이므로, 비슷한 성질의 형이상학적인 것에만 대응이 된다. 그러니 기문파공으로는 칼이나 총, 그 밖의 물리적인 힘은 결코 막을 수 없다.’

나는 연신 갸웃거리며 물었었다.

‘근데 그건 관음존자님의 약점인데 그 손우경이란 남자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면 너도 알게 될 거다.’

지금 내 몸은 나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관음존자가 언령을 통해 내 몸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어느새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손우경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금강저가 강제적으로 쥐인 내 왼손에서 아무리 힘을 풀어보려고 해봤자, 그럴수록 더 단단하게 고정되고 있었다.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손우경은 여의봉을 손에 들고서 사방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비록 기문파공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긴 했지만 안전은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거기다 이대로 가다간, 현재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 손우경의 심장으로 곧장 돌진하게 될 내 금강저를 바라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될 수 있는 한, 몸 안 가득 최대한의 살기를 끌어 모았다. 이게 통할지 안 통할지 나로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으나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단 한 번이라도 연습해봐서 참 다행이었다.

있잖아, 우경아.

너를 좋아하지 않으려고 정말 수없이 노력해봤어.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더라.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너를 죽일 수가 없어.

우경아, 그러니 제발, 제발 그때의 그 일을 기억해줘…….

지금 네 심장을 노리는 건 아주 나쁜 녀석이니까 절대로 아무런 주저 따위 하지 마. 넌 언제나 나한테 뒤에서 누가 노리든지 그런 것쯤은 다 알고 있다고 했잖아.

너하고 이렇게 빨리 헤어지게 될 줄 알았다면 나도 조금은 더 솔직해질 걸 그랬나 봐.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너를 많이 좋아했어.

그래봤자 개죽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너를 내 손으로 해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죽음을 각오했던 일이었다. 내가 너를 알기도 훨씬 더 전에 관음존자가 발설한 자신의 계획 속에서, 예정된 너의 죽음과 나의 역할에 대해 언급했을 때까지만 해도 너와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누구보다 죽는 것을 두려워했던 내가,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네가 없는 세상이었다. 네가 더 이상 내 옆에 없을까 봐서 그게 너무 무서워.

하지만 시간이 차츰 갈수록 그 정해진 결말에 대한 초조함과 죄책감으로 나는 매일 밤 네가 내 앞에서 죽게 되는 악몽을 꿨다. 네가 나에게 잘해줄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이것이 언젠가는 깨어날 꿈임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마음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은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가능하다면 너하고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었어.

미안해, 우경아. 나 같은 놈 용서하지 마.

그렇게 손우경의 등이 내 근처까지 다다랐고 녀석은 나의 살기를 감지하고서 그 순간 여의봉을 크게 휘둘렀다. 마땅히 죽음을 예감한 나는 눈을 꽉 감았다.

“!”

나는 떨리는 손으로 놈의 가슴에 박혀버린 금강저에서 손을 떼어냈다. 왜, 어째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목으로 휘둘러졌던 여의봉이 어느새 저만치 내팽개쳐져 있었다. 대신에 손우경이 나에게 자기 가슴을 온전히 내주었다. 금강저가 꽂힌 왼쪽 가슴에서 피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행여라도 소리가 새어나올까 봐 입을 가리고서 숨죽여 울고 있는 나에게 손우경이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음성이었다.

“……현아, 내 눈이 멀었는데 왜 니가 울어?”

눈물이 통 멈추질 않았다. 눈이 뽑혀나가 피투성이가 된 녀석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다. 놈이 손을 뻗어서 울고 있는 내 얼굴을 어루만진다.

“…미안, 우경아…… 미안… 해…….”

“괜찮아.”

녀석은 눈이 보이지도 않으면서 내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난 네가 처음부터…… 독배인지 다 알고 마셨어.”

“……흐흑.”

“그러니까 내 선택에 대한 후회 같은 건 안 해.”

“왜, 왜……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어? 지금…… 눈도 안 보이면서……. 너 바보야? 나한테…… 뒤에서 누가 오는 거…… 다 안다고 했잖아…….”

손우경이 아주 느릿한 손동작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빙그레 웃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익숙한 향냄새가 나서. 그냥…… 왠지 너일 거 같더라고.”

나를 지켜준다며 자기만 믿으라던 녀석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양손이 내 얼굴을 감싸 쥐고서 아주 슬픈 목소리로 얘기했다.

“나 너 우는 얼굴…… 딱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더듬어서 눈물로 범벅이 된 그곳에 자기 입을 슬며시 가져다대더니 다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근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 순간 손우경의 입에서 쿨럭 하고 붉은 핏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내 몸으로 털썩 쓰러진 손우경을 붙잡고서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혼잣말을 주절거리며 끝없이 울고 있었다.

“……아,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우경아, 또 장난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응?”

손우경은 대답이 없었다.

“제발 일어나……. 우경아, 제발…….”

녀석의 축 늘어진 몸이 내 품 안에서 전혀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안 믿어…… 또 장난치는 거지…… 나 안 속을 거니까… 빨리 일어나라구…….”

놈을 꼭 끌어안고서 나는 단 한 번만이라도 기적이 일어나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내가 속해 있는 이 척박한 삶의 현실 속에서 결코 그런 기적 따위는 일어나주지 않았다.

마침내 손우경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쉬어가는 페이지 9 <아돌프>

★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서쪽에서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서, 그 후로 나는 어느 곳에든지 그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든 금세 지루해졌다. 한 집단의 행동 패턴을 파악한 다음, 그 집단을 전체적으로 와해시키는 과정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도미노 같은 것이었다. 내가 어느 부분 하나만 툭 건드려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단순하고도 신비한 존재였다. 그리고 나로서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누군가를 쉽게 믿고, 쉽게 배신하는 일들이 끝없이 반복됨에도 인간은 결국엔 자기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생물이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쿠르게오르 사막의 밤이 차가워져온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는데도 체온이 금세 떨어졌다. 불편한 몸이었지만 이것만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딱히 뭔가를 먹지 않아도 상관없는 몸임에도 허기가 진다. 어쩌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파괴 본능 때문일까.

티페레트의 크리스털 안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오로지 무언가를 파괴하는 일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 공들여서 만드는 어떤 무언가를 완성 직전까지 옆에서 지켜봤다가 한순간에 부수어버리는 일은 나에게 커다란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에게서 뿜어 나오는 두려움, 조급함, 불안함, 시기심, 공포 등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에너지는 나의 생명력을 유지해주는 원천이었다. 그중 내가 가장 맛있게 여기는 것은 다른 어느 무엇보다도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를 창조했다는 세피로트의 그 멍청한 마법사들은 거기까진 미처 몰랐는지 언제나 내 환심을 사기 위해 인간들이 좋아할 법한 물건이나 음식들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사막은 내 예상보다 광활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중간중간에 사막을 여행하는 인간들을 죽임으로써 어느 정도 에너지를 보충받긴 했지만, 벌써 엿새째 아무런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 겁에 질린 인간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황홀한 에너지들을 떠올리며 나는 모래바닥 위에 그냥 누워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계속 그런 에너지를 끝없이 공급받을 수 있을까.

딱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머리 위에서 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동양인인가 보군. 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암만 해도 명을 재촉하는 여행자인 모양인데 마침 배가 고픈 적절한 시기에 잘 나타났…….

“인간이 아니로군.”

“…….”

“영혼이 없다. 그런데도 껍데기만 움직이고 있다니.”

벌떡 일어나서 그 중년의 동양인 남자를 제대로 쳐다봤다. 얼굴에 주름살이 좀 있긴 하지만, 말쑥하고 제법 유쾌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남자 역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신기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보아하니 갈 곳이 없는 처지인 듯싶은데 혹시 괜찮다면 나를 따라가겠느냐?”

감히 나를 상대로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나야말로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었다. 나의 외모가 어떤 인간 남자들 사이에선 꽤 혹할 만하다는 것은 경험상으로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의 몸에서는 욕망 에너지 같은 것들은 전혀 방출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단 에너지의 흐름을 아예 읽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순간 당혹했지만 간만에 저 인간에 대한 큰 호기심이 일었다. 저 남자의 주변 환경을 차근차근 붕괴시킬 과정들을 상상하니 온몸에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덧그리며 그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남자는 나에게 이름을 물었다.

“……저는 아돌프라고 합니다.”

나를 돌봐주던 서쪽의 마법사들 중, 대종말 이전의 역사에 대해 아주 관심을 많던 글릭데르라는 남자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듣자하니 이 아돌프라는 이름은 한때나마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어느 독재자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던데 글릭데르는 그 인물에게 아주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거나 글릭데르는 그 지루한 인간들 가운데에서 그나마 흥미로운 생각들을 하는 축에 드는 녀석이었다.

남자는 한쪽 눈을 실룩이며 내게 말했다.

“어감이 좋지 않은 이름이구나. 만약 나를 따라갈 생각이 있다면 내 너에게 새로운 법명을 지어주랴?”

나는 곧바로 사양했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이 이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자기가 타고 왔던 갈색 말에 나를 태워주며 인자한 목소리로 자신에 대한 소개를 했다.

“혹시 포타라카에 있는 동방의 환영제야단을 알고 있느냐. 나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처의 여러 설법들을 전하고 있는 석가여래라고 한단다.”

그렇게 말한 석가여래가 허공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어지간하면 크게 놀라는 성격이 아니었던 나는 그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남자가 내민 손을 기점으로 공간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그 안으로 낯선 풍경들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석가여래는 내가 탄 말의 고삐를 붙잡고서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스승님, 바깥에서 또 다른 아이를 데려오신 겁니까.”

검은 도복을 입고 마루에 정좌를 하고 있던 남자아이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어린 녀석치고는 꽤 남자답게 생긴 얼굴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시건방진 인상이었다. 그 녀석은 은빛이 도는 회색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석가여래에게 다시 말했다.

“어제였나, 머리 검은 짐승은 좀처럼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그건 우경이 네놈을 말하는 거다. 또 수행을 빼먹고 밖에 나갔더구나.”

“어차피 밖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여긴 스승님께서 ‘바깥’에서 데려온 것들로 가득 채워놓으신 가짜 공간이 아닙니까. 하늘도 가짜, 바람도 가짜, 풀잎들도 가짜. 모든 게 가짜투성이이니까요.”

“……다른 아이들이 듣기 전에 제발 그 입 좀 다물거라.”

내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분란의 조짐이 보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석가여래는 나를 그 녀석에게 떠맡기고는 자신은 마구간으로 말을 가져다놓기 위해 사라졌다.

놈이 차가운 어조로 얘기했다.

“난 손우경이라고 한다. 갈아입을 옷을 줄 테니 따라와.”

나는 저 손우경이라는 인간이 아주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석가여래가 쿠르게오르 사막에서 보여줬던 그 기문파공이라는 기술을 얻어내기 위해 이곳에 체류하기로 결정한 지도 약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나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이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이 이상한 공간은 법당과 수행장, 숙소 등이 붙어 있는 이 건물을 제외하고는 주변에 사오십 채의 집이 전부인 곳이었다. 그것도 스무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만이 살고 있는.

게다가 이 마을을 벗어나면 주변으로는 산과 들이 끝없이 펼쳐지는데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계속 같은 풍경들이 펼쳐지기만 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 들어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쨌든 마을이 아니라 이 안에서 먹고 자고 하는 인간이 단 한 명 존재했는데 그것은 손우경이었다. 나조차 이곳에서 자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으나 저놈은 자주 이 장소를 비우는 석가여래를 대신하여 자신이 마치 이 건물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행세하고 있었다.

이 마을의 아이들은 아침저녁으로 이곳을 찾아와서 부처라고 불리는 불상을 향해 지극정성으로 예불을 드리고 때때로 석가여래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받는다. 다만 여자아이들을 제외한 이곳의 모든 남자아이들은 석가여래 밑에서 기문파공에 대한 수행을 전수받았는데, 다들 손우경과는 그 격차가 상당했다. 손우경은 6세 때부터 석가여래의 손에 발탁되어 길러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실력이 뒤처진다고 해도 수행 자체를 게을리 하진 않았다. 그 이유는 석가여래가 현재 바깥세상에서 이끌어가고 있다는 환영제야단의 다음 세대 수장 자리를 놓고 기문파공에 따라 그 후계자 자리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손우경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매일같이 부처님 불상 뒤에서 경전을 베고서 잠을 청하거나 마을 뒤쪽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서 딴짓이나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손우경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항시 태도 자체가 당당했으며, 자신이야말로 제일 좋은 것을 차지할 만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환영제야단의 수장 자리와 기문파공의 계승자 자리도 당연히 전부 자신의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했다.

대부분이 고아라는 이 마을 안에서 녀석은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인간 계집애들은 마을에서 손우경만 지나갔다 하면 얼굴이 붉어졌고, 석가여래 밑에서 같이 기문파공을 배우는 도반 녀석들도 손우경을 자신이 닮고 싶은 남자로서 동경하고 있었다.

놈은 어린 나이치고는 꽤 건방진 말투를 쓰긴 했으나 항상 사람들에게 묘한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나 차갑고 사나워 보이는 외향에도 마을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알게 모르게 하나하나 챙겨주는 경향마저 있었다. 수행하는 데 있어 누구 하나 뒤처지거나 혼자서만 소외당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출중한 외모와 매력적인 성품, 거기에 보기 드물게 엄청난 재능까지 겸비한 녀석이긴 하나, 놈에게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내면의 어두운 부분들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예상컨대 앞으로도 만인에게서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며 어두운 곳보다는 밝은 곳에 서 있는 것이 더 어울릴 만한 인간이었다. 설령 어둠 속에 서 있더라도 언제 어디에서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인간. 놈에게는 나와는 달리 영혼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일까.

그때 내 몸속에서 급속도로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우경 저놈이 절망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녀석을 밑바닥까지 추락시켜서 그 속에 감춰진 어두운 부분들을 모조리 끄집어내길 원했다. 그리하여 악의로 가득 찬 네 혓바닥이 타인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을 나는 기필코 지켜보고야 말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옥 같은 절망을 맛보게 될 손우경에게서, 진귀하게 흘러나오게 될 그 거대한 부정적인 에너지가 대체 얼마나 추악하고 아름다울지가 나는 벌써부터 큰 기대가 됐다.

마침 손우경은 수행장 마당에서 키우는 개에게 먹이를 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석가여래가 바깥세상에서 가져다준 것인데 사실 남들에겐 별로 티를 안 냈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꽤 귀여워하고 있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래, 우선은 저것부터.

나는 언제나 쾌청하게 맑은 이곳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우선 내가 이곳을 다 망가트려버리면 손우경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고.

만 삼 년째 되던 해, 나의 기문파공이 거의 다 완성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손우경도 기문파공의 계승자 자리를 놓고 최종적으로 시공간을 여행하는 마지막 수행에 들어가던 해이기도 했다. 환영제야단의 수장 자리는 구태여 내가 차지하지 않는대도 그리 개의치 않았다. 손우경이 높은 곳에 올라서 있을수록 놈을 추락시키는 일이 더 재미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손우경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석가여래가 나를 따로 불러내서 기문파공으로 만들어낸 어느 우주 같은 새카만 공간 속으로 데려갔다. 나는 허공에 몸이 둥둥 뜬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여긴 뭐하는 곳입니까.”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라고 하는 곳이란다. 이곳에선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각, 감정, 경험들이 전부 다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 네가 알고 싶은 그 어떤 것들이라도 이곳에는 다 존재한다. 우리 불교식으로는 삼라만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우주의 대도서관이자 무수한 평행우주의 어머니인 곳이기도 하지.”

“…….”

석가여래가 연이어 말을 이어갔다.

“얘야, 사실 너도 어느 정도는 눈치챘겠지만, 나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시간 여행자란다. 잠시 네가 살고 있는 우주에 개입하긴 했지만 이제는 슬슬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갈 시기가 왔어. 나는 우경이 녀석이 마지막 수행에서 돌아오는 대로 이 환영제야단을 전부 물려줄 생각이다.”

석가여래는 내 이마 한가운데로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영안이 위치한 자리가 몹시 뜨거워지며 석가여래의 손가락을 통해 무슨 기운 같은 게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너 또한 놀라운 재능을 가진 아이지. 하지만 섭섭하게 듣지 말거라. 인간이 아닌 너에게 내 자리를 물려줄 수는 없다. 너와 우경이는 음과 양의 상반된 속성을 가졌지. 너는 앞으로 그림자 속에서 녀석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빛이 없으면 어둠도 없으니, 우경이가 찬란한 빛의 속성을 갖는다면 너는 절대적인 어둠의 힘을 갖겠지. 그러나 너와 우경이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작용을 하기에 절대로 상대방을 죽이거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둠의 힘이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너를 제어할 수 있는 물건 하나를 우경이에게 구해 오게끔 일러두었다. 물론 녀석은 그것이 너와 연관이 있는 물건이라고는 아직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방금 전 석가여래의 손가락에 연결된 영안을 통해 나의 계승식이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내 의지도 아닌데 석가여래가 나를 손우경 따위의 그림자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다니……. 허나 석가여래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서 이 드넓은 우주의 공간 안으로 손을 뻗더니 별안간 어느 책 한 권을 불쑥 꺼내 들었다.

“이 우주의 도서관에서는 어떤 기록이라도 다 열람할 수 있지. 바로 이것이 내가 선택한 너희의 운명이다.”

“이걸 왜 저에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내 질문에 석가여래가 답했다.

“우경이 녀석은 아직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네가 옆에서 잘 보필해줘야 한다.”

나는 나와 손우경이 운명이 적혀 있는 책을 받아 들고 살펴봤다. 석가여래는 내가 책의 마지막 장을 다 넘길 때까지도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책장을 덮은 내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걸 선택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배에다가 나는 아까부터 준비해두었던 기문파공을 푹 찔러 넣었다. 허나 석가여래는 마치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기라도 했는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것이 너의 선택이라면…….”

머리를 통해서 많은 기억들이 전해져왔다. 눈앞으로 광활한 우주심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석가여래의 기억인가. 아니, 지구의 기억들이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어느샌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깨달아지고 있었다.

삼엽충들부터 시작해 공룡들이 나타나고 인간의 시초인 원시인들이 등장했다. 실크로드, 만리장성, 신대륙 발견, 증기기관차, 전기의 발명, 다이너마이트, 전화기, TV, 할리우드…….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반복이었다. 생물학 무기 개발의 실패와 연이은 핵폭발 사고로 인해, 고도화된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과욕은 마침내 인류에게 대종말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지구는 더 이상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황폐한 죽음의 별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기억 속의 석가여래는 모든 것이 말라붙은 땅 위에 서서 두 손을 치켜들었다.

그의 기문파공으로 지구의 대지와 하늘이 완전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여느 평행우주이자 과거의 시공간에 존재하고 있던 다른 지구의 하늘을 뚝 떼어다가, 지금의 세상에다가 그대로 붙여 넣었다. 하지만 그것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공간을 찢어서 앞뒤를 바꾸어놓는 과정이었다. 그로 인해 땅에는 두 개의 공간을 이어붙인 흉터 자국인 ‘균열’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과거의 하늘과 현재의 대지가 맞물려가는 도중, 시공간을 넘나드는 돌연변이들의 등장과 함께 땅의 배열조차 엉망이 되어버렸다.

수십만 년이 흐른대도 회생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죽음의 별 지구는 반세기 후 다시 땅 아래에 숨어 있던 인간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모든 기억들이 다 흡수된 나는 이것이 석가여래의 덫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주의 도서관에서 모든 미래들을 전부 다 엿볼 수 있는 그가 짜놓은 어느 정교한 덫에 내가 빠졌음을 말이다. 그가 처음부터 나의 정체를 몰랐을 리 없었다. 사막에서의 만남도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이 순간에 석가여래에게서 환영제야단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았고, 더불어 기문파공으로 지구의 시공간을 끝없이 유지해야 하는 엄청난 책임이 함께 뒤따랐다. 아니, 기문파공의 계승자와 환영제야단의 수장자리는 애초에 이 책임에 걸맞는 자를 간택하기 위한 하나의 시험이었을 뿐이었다. 인간이 아닌 나는 영원토록 죽지 않을 테니 이것만큼이나 안전한 존재도 없었다. 석가여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것 또한 그 아이가 겪어야 할 일들이겠지.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석가여래는 아주 막대한 책임들을 나에게 지우고서는 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연 뒤, 내게 짤막한 인사만을 남긴 채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얘야, 네게 필요한 건 인간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이란다. 그럼 잘 있거라.”

지금도 간혹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을지, 아님 처음부터 석가여래의 의도에 의해 벌어진 결과였는지를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지구에 감쪽같이 붙여놓은 이 어마어마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그 후로도 반쪽짜리 기문파공을 사용하게 되었다.

석가여래의 충고를 받들어 나는 나의 법명을 자비심의 상징인 관음존자로 정했다.

바깥세상의 세월은 안에서와는 다르게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환영제야단은 물론 온 세상을 내 손아귀 안에서 마음껏 주무르는 나날이 이어졌다.

초반에 석가여래를 원망했던 마음과는 다르게 인간들의 정점에 서게 된 이 위치에서는 내가 원하는 에너지들을 얼마든지 흡수하기가 쉬웠다. 인간들에게서 죽음에 관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얻어내는 방법이야 간단했다. 그중 내가 자주 애용하는 방법은 바로 ‘전쟁’이었다.

더군다나 환영제야단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을 당시, 우주의 지식들이 한꺼번에 전해졌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아돌프가 아니었다. 세상의 이치와 모든 것에 통달한 자가 되었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행 중인 손우경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바보 같은 녀석. 어차피 돌아와봤자 이미 네 자리는 내 것이 된 지 오래다.

원하는 것은 다 내 손안에 넣었다. 남들처럼 불사를 바라지 않아도 나는 원래가 죽지 않는 몸이었다. 서쪽의 마법사들이 에메랄드 태블릿과 카발라의 오의를 총동원해서 만들어낸 호문쿨루스이자 완전한 인간인 아담 카드몬. 그것이 바로 나였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들에게서 부정적인 에너지를 흡수해도 나는 끝없이 허기가 졌다. 이런 날일수록 새빨간 피가 보고 싶었다. 나는 부재가 잦았던 석가여래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종단을 이끌어가던 환영제야단의 양대 산맥 중 더 연약한 쪽을 잘라내러 갔다. 나에 대한 하극상은 생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역죄를 덮어씌울 예정이었다.

코트를 걸치고 티뷸라 궁을 나서는데 내 귓가에 고통에 젖은 인간들의 비명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원한과 증오 에너지인가. 뭐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지.

아무튼 간에 버러지 같은 녀석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부분들만 전부 모아다가 조립했는지는 몰라도 절대로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놈이었다. 놈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은 비록 내 작은 변덕이긴 했으나 얼굴을 보는 순간 잘만 키워내면 적당한 때에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에게 엄청난 미인이 좋다고 했었나. 언젠가 머지않은 시일 내에 손우경이 곧 돌아올 것이다. 물론 시간 여행의 하루는 이곳 시간으로는 만 일 년이었다. 몇 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까지는 저 버러지를 내 곁에 두고서 잠시 유희거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버러지는 내가 나눠주는 기운을 받아먹으며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완전히 미치지 않을 정도로만 괴롭히며 녀석의 정신 상태에다가 내가 공들여서 만든 프로그램을 깔아두었다. 놈의 심층 저변에 깔려 있는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에너지는 항상 나에게 만족할 만한 커다란 포만감을 가져다주었다. 석가여래와 손우경 이후로 내게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인간들의 기준에서도 굉장히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버러지는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미인이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긴 해도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분명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컸을 녀석이었다. 인간이란 내면의 본질보다는 겉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추종하는 슬픈 습성이 있으니까 말이다. 좌우지간 그럼에도 녀석이 저리도 자존감이 낮아진 원인은 오로지 나 때문이었다.

인간은 상호의존적인 동물로서 자기 스스로의 생각보다는 타인이 해주는 말들이나 대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명체였다. 그래서 남들의 거짓된 평가 하나로도 마치 자신이 실제로 그런 것인 양 착각하게 되는 경향이 컸다.

나는 버러지를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고립시켜서 오직 나 하나만을 따르도록 만들어놨다. 거기다 매일같이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앵무새처럼 반복적인 세뇌를 시키면 어떤 인간이든지 더는 자신에게 주어진 놀라운 잠재력을 믿지 못하게 된다.

서쪽의 마법사들이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냈듯이 나 또한 내 구미대로 녀석을 길러냈다. 나를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결코 내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저 나약한 존재는, 내게 오싹할 정도의 큰 쾌감을 불러 일으켰다. 나중에 잠시라도 손우경 따위에게 넘겨주기가 아까울 만큼.

아침 일찍 녀석을 불러서 왼손을 통해 기운을 전해주는데 밤새 장서각에 처박혀서 경전을 읽던 버러지가 피곤에 지쳐서 감히 내 앞에서 잠이 들었다. 깨울까 하다가 나는 그 잠든 얼굴을 자세하게 들여다봤다.

늙지 않는 나와는 다르게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커버렸다.

그런데 버러지도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 왜냐하면 인간이니까.

나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늙지를 않는다.

영혼을 가진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우주심을 통하여 모든 것을 깨닫게 된 나마저도 그것은 아직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손우경은 내가 한창 진행 중이던 천도 프로젝트를 완전히 박살 내고서 나를 죽이기 위해서 티뷸라 궁으로 찾아왔다. 인간의 영혼이 거의 완성되기 직전이었는데 아쉬운 노릇이었다.

어찌 되었건 놈은 석가여래의 기문파공 최종 시험의 일환으로 그저 며칠 동안 시간 여행이나 다녀왔을 뿐이겠지만, 상황은 이미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우리가 도반으로서 함께 수행을 하던 그 마을은 벌써 십수 년 전에 내가 모조리 파괴해버린 지 오래였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맨몸뚱이 하나 덩그러니 남은 녀석에게 나는 이제야 달콤한 조소를 머금었다.

왠지 울 것 같은 표정의 손우경을 보니 짜릿한 마음이 일었다. 실은 끔찍하게 아꼈던 자신의 스승도, 다른 도반들도 모두 다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 너도 잘난 척해봤자 어차피 인간이었지. 하지만 아직은 끝이 아니었다. 너는 더 고통스러워야만 해.

손우경은 나의 언령 기술을 가로막기 위해 자신의 기문파공으로 거대한 필드를 시전했다. 그러나 실력 자체가 거의 비슷한 조건이라면 단지 이 순간을 위해 십년 이상을 준비한 자와 엄청난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은 자의 싸움은 애당초 상대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다.

기절해버린 손우경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나는 석가여래에게 발탁된 그림자 인간으로서 나의 반대 개념이자 빛인 너를 죽일 수가 없겠지만, 너를 위해 끝없는 고통을 체험할 아주 좋은 장소를 만들어두었다. 아니, 이젠 네가 나의 그림자 인간이 되어야겠지.

그러니 어서 눈을 뜨고 내가 사는 심연의 세계로 들어와라, 손우경.

쉬어가는 페이지 9 <아돌프>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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