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1)

#2

주말을 앞둔 금요일 아침. 하늘을 꽉 매운 구름이 심상치 않은 걸 보니 비가 내릴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 신발장 근처에 놓인 우산 중 아무거나 집었다.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앉아 지나가는 풍경을 응시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가까운 시각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어? 비 오네.”

생각 없이 창밖을 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먹구름으로 뒤덮였던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창문에 착 달라붙었다가 미끄러졌다.

처음엔 한두 방울씩 툭툭 떨어지던 빗줄기는 학교에 도착했을 즈음엔 어느새 제법 거세게 쏟아졌다. 우산을 안 가져왔으면 쫄딱 젖을 뻔했다.

비 오는 날은 실내 훈련으로 대체되어 평소보다 좀 더 일찍 끝나는 편이었다. 물론 그만큼 강도가 빡세지만, 훈련 시간이 짧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입생들은 실내에서만 훈련하는 건 처음이겠구나. 부디 그만두는 애들이 없어야 할 텐데. 신입생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며칠 전에 뛰쳐나가 소식이 없는 김희도. 오늘도 안 오려나. 이따 점심시간에 한번 가볼까. 내가 생각해도 끈질기긴 하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뾰족한 우산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느새 저들끼리 모인 물웅덩이를 피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비에 젖은 공기와 흙 비린내, 곳곳에 자리한 나무가 뿜어내는 축축한 냄새가 가득 스몄다.

곧장 야구부로 향했던 임성이 문 앞에서 멈칫했다.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 오는 날엔 늦는 애들이 많은데, 예준이가 벌써 왔나?

그나마 일찍 나오는 몇몇 부원들을 떠올리며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임성을 맞이한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어?”

마스크를 낀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멈춰 있던 임성은 금세 웃으며 젖은 우산을 탁탁 털어 내고 부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우산꽂이를 문 옆에 내려놓곤 우산을 꽂았다.

“아침부터 비 엄청 오네. 오후에는 그쳐야 할 텐데.”

마치 친한 친구를 대하듯 친근하게 말하며 창문을 열었다. 비가 오는 날엔 미리 환기하지 않으면 큼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여기에 땀 냄새까지 섞이면 진짜 감당 불가고.

“속은 좀 괜찮아?”

“……우산이 그게 뭡니까?”

코끝까지 올렸던 마스크를 반쯤 내린 김희도가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분위기를 풀어 볼 겸 던진 말이라 딱히 상관없었다.

“음? 이거?”

임성이 쓰고 온 우산은 빨간 바탕에 장화를 신은 병아리가 프린팅된 것이었다. 180cm이 넘는 남자가 쓰기엔 지나치게 깜찍하긴 해. 표정에 잘 드러나지 않은 김희도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픽 웃었다.

“아무거나 집어 온다는 게 여동생들 거 갖고 왔나 봐.”

“여동생?”

“응. 정확히는 쌍둥이 여동생. 남자 쌍둥이들도 있어.”

임성은 배를 드러낸 채 한창 자고 있을 동생들을 떠올리며 가방을 내려놨다. 그리고 공용 배트를 비롯한 장비들을 꺼냈다. 습도에 취약한 나무 소재 배트는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우리 부모님 대단하시지? 여동생들은 올해 초등학교 들어갔고, 남동생들은 너랑 동갑이야. 열일곱. 걔들은 여기 옆 문화고에 다녀.”

임성은 부실을 정리하는 척하며 멀뚱히 서 있는 김희도를 곁눈질했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웬일이야? 생각보다 일찍인데.”

“코치님이 열어 줬습니다.”

어떻게 들어왔냐는 질문이 아니데. 하지만 임성은 재촉하지 않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직접 찾아왔다는 건 어쨌든 대화할 의지가 있단 뜻이었으니까. 그 와중에 김희도가 정말 야구를 그만둔다고 하면 어떻게 붙잡을지 생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게 집착하는 이유가 뭡니까?”

“집착?”

설마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던 터라 살짝 당황하며 되물었다.

집착, 집착……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닌가.

임성이 김희도와 같은 그라운드에 선 것은 중학교 3학년, 단 한 경기, 두 번의 맞대결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맞대결이 준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갔다.

그 후로 임성은 시간이 날 때마다 김희도가 출전하는 시합을 보러 다녔다. 어떤 선수일까 궁금했고, 나날이 발전하는 플레이를 보며 홀로 감탄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다시 대결 해서 설욕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쟤한테 두 번 던져서 두 번 다 홈런을 맞았는데, 이번에는 꼭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말겠다고.

같은 지역이니까 주말리그든 전국 대회든 한 번은 만나지 않을까. 그때는 꼭 이기고 싶었다.

그리고 선유고 야구부에서 김희도를 봤을 땐, 오래 알고 있던 유명인을 만난 것처럼 신기했다. 호승심은 이내 호기심과 그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일방적인 친밀함으로 바뀌었다.

맞대결이 아니라 같이 뛰면 어떨까, 하는.

“할 말 없으면 가겠습니다.”

“잠깐만.”

미련 없이 돌아서는 김희도의 팔을 붙잡았다. 무심한 시선이 제 팔에 감긴 임성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비가 내리면서 공기가 조금 차가워진 탓에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손대지 마세요. 누가 만지는 거 안 좋아합니다.”

“아, 그래. 미안하다. 뭐가 그렇게 급하냐? 맞아. 할 말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우선 앉자.”

김희도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안도했다. 내심 뛰쳐나갈까 봐 조마조마했거든.

“뭐 마실래? 바나나 우유는 없지만, 물이랑…….”

“됐습니다.”

임성은 아이스박스에서 제 몫의 물만 꺼내고 김희도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만둘 거냐?”

“그럴까 합니다.”

이런저런 얘기 좀 하다 천천히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조급했던 것 같다.

김희도의 대답 이후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툭, 투두둑. 먼지가 뿌옇게 낀 창틀에 빗방울이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침묵이 가득한 공간엔 마치 트라이앵글을 두드리는 것 같은 빗소리밖에 울리지 않았다.

그럴까 합니다, 라니. 그만둔다고 단번에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설사 그렇게 말했어도 김희도를 놔줄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쉽게, 또 빨리 끝낼 생각이었으면 반에 찾아가지도 않았다.

계속되는 침묵 속에서 임성이 부실을 훑었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녹은 철제 선반에는 글로브가 포지션별로 놓여 있었고, 구석에는 야구공이 가득 담긴 박스가 여러 개 있었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오래된 라커에선 시큼한 냄새가 나는 유니폼이 비어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먼지가 쌓인 선풍기까지 둘러보던 임성의 시선이 다시 김희도에게 닿았다.

그는 얼굴을 쓸어내리듯 입과 코를 감싸고 있었다.

나한테서 냄새나나. 무의식중에 김희도와의 거리를 벌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와서 그만두기 아쉽지 않아?”

“별로. 딱히 재밌지도 않고.”

추후 알아본 바에 의하면 김희도가 야구를 시작한 건 14살이었다. 그 말인즉슨, 자신은 야구를 시작한 지 몇 달밖에 안 된 초짜에게 신나게 홈런을 얻어맞았단 뜻이었다.

분하면서도 다행인 건 그해를 시작으로 김희도는 마치 재능이라는 단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눈부신 활약을 펼친 것이었다.

재능.

누군가에게는 미치도록 간절하고 부러운 것이,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뭔가에 몰두하려면 흥미는 물론, 재미도 중요했다. 애초에 임성이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한 이유도 공 던지는 게 재밌어 보였으니까. 당사자가 재밌지 않다는데 굳이 토를 다는 것도 우스웠다.

“뭐라고 안 합니까?”

“네 생각이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해. 뭐, 좀 열 받긴 하네.”

천재의 여유 같은 건가. 웃음기 섞인 대답을 들은 김희도가 마스크를 조금 더 내렸다. 아랫입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것이 이제는 턱밑까지 내려왔다. 임성은 목을 조금 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아직 고교야구 경험 못 해 봤잖아. 중학교 때와는 많이 다를걸?”

프로는 아예 논외로 치고 리틀 야구단과 중학, 그리고 고교리그는 의외로 많은 부분이 달랐다. 중학 시절 잘하던 선수가 갑자기 곤두박질치기도, 반대로 재능을 꽃피우는 일도 더러 있었다.

임성은 일부러 도발하듯이 말하며 김희도를 힐끔 살폈지만, 그는 코를 틀어막았던 손을 조금 내렸을 뿐이었다.

“좋아. 그러면 모의 시합만이라도 해 봐.”

턱에 걸린 마스크에 시선을 둔 채 툭 내뱉었다.

모의 시합은 야구부 내에서 편을 갈라 연습하는 일종의 청백전이었다. 정규 이닝이 9회면 모의 시합은 5회 이내로 짧게 끝났다. 하지만 모의 시합에서 타 학교와의 연습 경기에 나갈 선발 멤버를 발탁하는 일이 많아 부원들 사이에 은근한 신경전이 있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물론 김희도가 참가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너랑 하고 싶으니까.”

마스크를 보던 시선을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맞췄다. 반듯하게 뻗어있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갔다. 처음으로 김희도의 변화를 이끌어 낸 임성이 조금 짓궂게 웃었다.

* * *

엊저녁까지 퍼붓던 비가 무색하게 오늘은 아침부터 해가 쨍쨍했다. 새파란 하늘에 바짝 떠오른 해를 보며 박종열은 이렇게 금방 그칠 게 뭐냐고, 이제는 태풍을 기다린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당장 2주 뒤로 다가온 전반기 주말리그를 대비해 오늘은 실전 감각을 끌어 올리는 모의 시합이 있었다.

감독의 지시하에 두 개의 팀으로 나뉘었다. 빨간 조끼를 입은 A팀은 임성과 조예준이 배터리를 이뤘고, 파란 조끼의 B팀은 투수 양민성과 포수 지용우가 나섰다. 그 외엔 각 팀당 신입생 두 명을 필수로 포함해 적당히 배정됐다.

임성과 양민성은 전혀 다른 타입의 투수로, 임성이 구속이 제구력이 뛰어나다면 양민성은 큰 키를 활용해 공을 위에서 내리꽂듯 던지는 파이어볼러였다.

지난 2년간 임성이 선유고 에이스로 뛰었지만, 양민성 또한 최근 여러 시합에 주전으로 나서며 주목받는 중이었다.

아마 오늘 결과에 따라 다음 주에 있을 연습 경기의 선발이 정해지겠지. 두 사람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임성은 연습복 위에 빨간색 조끼를 걸쳐 입으면서 그라운드 입구를 살폈다. 곧 시합 시작이니까 지금쯤 와야 하는데. 흠, 도박 실패인가.

“주장. 아까부터 왜 자꾸 기웃대요?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어? 그게 사실은…… 아, 저기 왔네. 여기야, 여기!”

누군가를 기다리듯 자꾸 입구를 힐끔대던 임성이 두 손을 번쩍 흔들었다.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던 조예준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김희도. 여기다.”

교복 차림에 흰 마스크를 낀 김희도가 걸어왔다.

“재수 없는 새끼. 여긴 또 왜 왔어? 시비 걸려 왔냐?”

“내가 불렀어.”

“네? 주장이 왜요?”

김희도를 향해 험상궂게 말하던 조예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 깐 감자처럼 동글동글한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왜긴…….”

김희도가 야구를 못 하겠다고 선언한 날 임성은 코치에게 부탁해 그의 탈퇴를 미뤘다. 설득해 보겠다는 임성의 말에 코치는 3주의 유예 기간을 주며 그 안에 데려오지 않을 시 가차 없이 탈퇴 처리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그전까지 김희도는 아직 선유고 야구부 소속이란 뜻이었다.

“우리 애니까 불렀지.”

“잠깐만요. 우리 애요? 쟤가요?”

임성은 종종 후배들을 ‘우리 애들’이라고 칭했는데 그 말이 지금 나온 것이다.

임성은 해괴한 표정을 한 조예준을 지나쳐,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김희도를 데리고 코치에게 갔다.

“코치님. 김희도도 신입생입니다. 연습에 참여할 자격 있습니다.”

코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비스듬하게 걸터앉은 감독을 돌아봤다. 그렇게 하라는 듯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자 A팀 3루수로 들어갔던 신입생 한 명과 김희도를 교체했다. 중학교 때 이름을 날린 기댓값이 적용한 것이었다.

미안. 3루 신입생에게 눈으로 사과하자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붕붕 저었다.

양 팀에게 약 3분간의 작전 시간이 주어졌다.

김희도를 데려온 게 퍽 못마땅한지 조예준은 아랫입술을 뚱하게 내밀었다.

인마, 기분 풀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장난을 쳤다. 그 사이 연습복으로 갈아입은 김희도가 걸어왔다. 교복 차림일 때 풍기던 풋풋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리 어려도 운동선수라 이거지.

“이제 찾아오지 마세요. 그 말 하러 때문에 왔습니다.”

임성은 대답 대신 웃었다. 지키지 못할 말은 아예 하지 않는 편이라서.

“내 모자라도 쓸래? 햇볕 따가울 텐데.”

“필요 없습니다.”

모자챙을 잡고 살짝 들어 올리자 김희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임성을 주축으로 김희도를 제외한 A팀 팀원들이 둥글게 모였다.

“민성이는 강속구를 던진다. 아마 타이밍 맞춰서 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그래도 고민하지 말고, 칠 수 있겠다 싶을 때 마음껏 휘둘러. 그러려고 청백전 하는 거니까. 찬규랑 성원이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 원진이, 박종열, 너희 키스톤이 내야 수비 핵인 거 알지? 부담 가질 필요는 없지만, 방심하진 말자.”

항상 주변을 다독이던 임성이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작전을 내리자, 김희도를 제외한 신입생들은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삑-!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아이들의 시선이 감독에게 향했다.

“오늘 활약 보고 다음 주 연습 경기에 기용할 생각이니까 다들 죽을 각오로 해라. 청백전이라고 대충하는 놈은 가만히 안 둔다.”

선공은 A팀이었다. 첫 타자는 2학년 김원진으로 센스가 좋고 발이 빨라 리드오프인 1번에 적격이었다.

양민성은 직구 대신 변화구를 택했다. 아직 팔이 덜 풀렸는지, 평소보다 구속이 느렸다. 따악, 데굴데굴 구르는 땅볼을 B팀 수비가 잡아 아웃시키며 청백전이 시작됐다.

투수와 타자로 포지션이 나뉜 프로 선수들과 다르게 초중고에서는 투타를 겸비하는 선수가 종종 있었다. 임성 또한 상황에 따라 타석에 나가 공을 치기도 했다. 한때는 무려 초등부 이하 MVP를 탔을 정도로 재능 있는 타자였지 않나.

오늘도 ‘상황’ 중 하나였고, 배트를 양손으로 꽉 잡은 임성이 타격 자세를 취했다. 바로 전 타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했으니, 직구를 던질 가능성이 컸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양민성은 자신을 늘 직구로 잡고 싶어 했으니까.

예상대로 공이 정면으로 뻗어 왔다. 외부에서 지켜볼 때보다 훨씬 체감이 빨랐다. 임성은 배트를 안쪽으로 당기며 휘둘렀다. 퉁, 배트에서부터 전해진 진동으로 손바닥으로 저릿저릿해졌다.

“아!”

잘 맞혔다고 생각 한 공은 하필 유격수 정면으로 떨어졌다. 1루를 향해 빠르게 질주하던 임성은 1루수가 공을 받는 것을 보고 멈췄다.

쩝. 손맛 좋았는데, 저게 잡히네.

“완전 아까웠어요.”

엄지를 치켜드는 조예준에게 따봉을 되돌려 주며 물을 들이켰다.

양 팀 스코어는 아직 0 대 0이었다.

임성의 뒤를 이어 타석에 들어선 건 김희도였다. 그는 타격 자세를 취하기 전에 임성을 힐끔 쳐다봤고, 눈이 마주친 임성이 씩 웃으며 물통을 쥔 손을 흔들었다.

조예준은 장난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임성 옆에 서서 도끼눈을 뜨고 김희도를 노려봤다.

“재수 없는 자식. 얼마나 잘하나 보…….”

딱! 조예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뻗어 나간 공은 수비수 사이를 깔끔하게 빠져나갔다. 좌중간을 깔끔하게 가르는 장타였다. 김희도의 다리가 그리 빠르지 않았음에도 넉넉히 2루에 도달했다. 만약 빠른 주자였다면 3루까지 달렸을지도 모르지. 저 플레이를 보니, 좀 전에 제가 놓친 기회가 더욱 아쉬워졌다. 점수를 낼 수 있었는데.

“나이스, 나이스. 김희도. 좋다!”

역시 잘하네. 속으로 생각하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A팀 애들도 박수를 치고 하이파이브 등을 하는 등 김희도의 플레이에 환호했다.

처음 쳐 보는 양민성 공, 그것도 팀 내에서 손에 꼽히는 강속구에도 전혀 망설임이 없지 않나. 이건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체격이 그리 큰 편이 아닌데도 파워는 월등히 좋아 맞기만 하면 거의 장타로 이어졌다.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였다.

“다들 잘 봐라. 이번에 홈런 못 치면 장을 지진다.”

뒤이어 박종열이 배트를 붕붕 휘두르며 타석에 섰다.

아쉽게 홈런은 아니었지만, 볼넷으로 출루한 박종열에 이어 서찬규가 안타를 뽑아내며 김희도가 홈플레이트(*득점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밟은 오각형의 베이스)를 밟았다.

양 팀의 균형을 깨는 귀중한 선취점이었다.

“아싸! 득점.”

빨간 조끼를 입은 애들이 좋아했다.

“잘 쳤다. 타이밍 어떻게 잡았어?”

“떨어져요.”

활짝 웃는 낯으로 무심코 김희도에게 어깨동무를 하려던 임성은 귓가에 서늘하게 꽂히는 목소리를 듣고 한발 물러섰다. 무표정한 얼굴이 티 나게 일그러진 걸 보니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아, 가까이 가는 거 싫어했지.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

김희도는 임성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리를 이탈했다. 미처 붙잡을 새도 없었다.

“어? 이제 곧 수비해야 하는데 어디 가? 야, 김희도!”

놀란 임성이 다급히 김희도를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딜 가는 거야. 설마 집에 가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하겠냐 싶으면서도 이미 전적이 있다 보니 불안했다.

아직 A팀이 공격 중인 것을 확인하고 김희도를 쫓아가려는 찰나, 다행히 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저걸 다행으로 봐야 할까?

“……잘 돌아왔다. 부실 다녀왔나 봐.”

우선 생각나는 말부터 내뱉었다.

“야. 너 미쳤냐, 정신 나갔어? 그 꼴은 대체 뭐야.”

임성의 목소리 위로 조예준의 것이 겹쳐졌다.

“조예준, 아직 시합 중이다. 목소리 조금만 낮추자.”

“주장. 지금 목소리가 안 키우게 생겼어요? 저 새끼, 지금 마스크 낀 거 맞죠?”

“음, 그런 것 같네.”

임성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희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시하며 마스크를 콧등까지 끌어 올렸다. 땀과 먼지 등으로 엉망이 된 아이들 틈에서 마스크를 낀 김희도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A팀뿐 아니라, B팀, 그리고 대기 중인 아이들까지 모두 김희도를 힐끔댈 정도로.

“저거 완전 또라이잖아.”

조예준이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A팀 공격이 끝나며 공수 교대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헛. 임성은 급하게 글러브를 끼며 마운드에 올랐다.

정신 차리고 집중하자, 집중.

파앙! 포수 미트에 스트라이크 하나를 꽂아 넣고 힐끔 뒤를 돌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스크를 낀 김희도가 수비 중이었다.

저건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억지로 모의 시합에 부른 것에 대한 반항심? 아니면, 냄새나니까 꺼지라는 무언의 항쟁?

아무리 뺨에 감기는 바람이 차갑다 한들 야구부의 계절은 무척 뜨거웠다. 실제로 지금 임성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수가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중이었고.

“볼.”

아, 정신을 놨더니 금세 볼이 됐다. 임성은 손안의 공을 굴리며 타자를 응시했다.

3학년 정의영. 박종열과 함께 팀 내 분위기 메이커였지만, 플레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게다가 3년 동안 동고동락하다 보니 자신의 약한 부분을 잘 알았다.

“볼.”

저것 봐. 속으라고 던진 회심의 변화구에도 안 넘어가잖아.

정의영이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해 보자 이거네. 임성이 따라 웃으며 공을 뿌렸다.

정의영은 배트를 앞으로 뻗다가 멈췄다. 스윙? 노 스윙인가? 포수 조예준과 정의영이 심판 역할을 맡은 코치를 동시에 봤다.

“스윙.”

코치가 스윙을 선언하자 정의영은 분한 얼굴로 헬멧을 두드리며 물러났다.

이 코스로 던지면 배트가 나올 줄 알았다. 잘 아는 건 저쪽만이 아니거든.

첫 번째 모의 시합은 최종 A팀의 승리로 끝났다. 끝까지 B팀의 마운드를 책임졌던 양민성은 기분이 좋지 않은지 다 들리게 욕설을 내뱉으며 글러브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와 배터리를 이뤘던 포수 지용우가 널브러진 글러브를 주워 양민성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갔다.

“다음 시합은 20분 뒤에 한다.”

감독과 코치가 자리를 비우자 아이들, 특히 한껏 상기된 1학년들이 앞다투어 소감을 얘기했다. 바운드 된 공을 잡았던 1학년은 주먹까지 불끈 쥐고 열변을 토했다. 임성은 흐뭇하게 웃으며 아이들의 대화를 들었다.

김희도는 그사이에 섞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곧장 수돗가로 가 시합 내내 한 번도 벗지 않은 마스크를 처음으로 내리고 세수를 했다. 찬물을 한참 끼얹다가 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자.”

“…….”

김희도는 임성이 건넨 수건을 받지 않고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눈썹 밑까지 내려왔고, 채 닦지 못한 물방울은 턱 끝에서 아슬아슬 매달려 있었다. 방금 시합이 끝나서일까, 흰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홍조가 상당히 묘했다.

“안 받아? 직접 닦아 줄까?”

손에 쥔 수건을 다시 흔들자 김희도는 머뭇머뭇 받아들더니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하더라. 부드러우면서 묵직한 스윙이었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려고 했지만, 닿기도 전에 김희도가 몸을 물렸다. 굳은살이 박인 임성이 손이 허공을 어색하게 더듬다가 내려왔다.

“몸에 손대는 거 불쾌하다고 말 안 했나요.”

여전히 코를 틀어막은 김희도가 말했다.

“그랬지. 자꾸 잊어버리네. 좀 있으면 브리핑인데, 같이 가자.”

“약속은 모의 연습 참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그 이상은 바라지 마라, 김희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 평가 궁금하지 않아?”

“전혀.”

안 궁금합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한 김희도는 멀뚱히 선 임성을 내버려 두고 홀로 부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부실엔 희뿌연 먼지만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가뜩이나 공기가 정체돼 불쾌한데, 여러 사람의 옷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더욱 짜증이 났다.

“기분 나빠.”

교복만 챙기고 얼른 나가려던 김희도는 문득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코에 갖다 댔다. 축축한 물 냄새 사이로 낯선 체취가 섞여 있었다. 코끝이 눌릴 정도로 얼굴을 깊게 묻었다가 고개를 젖혔다. 가늘게 뜬 시야 너머로 전등 빛이 번졌다.

“위험해.”

무엇이 위험한지도 모른 채 김희도가 중얼거렸다.

* * *

“김희도.”

임성은 가방을 메고 막 부실을 나가는 김희도를 불렀다. 여전히 연습복에 빨간 조끼 차림인 임성과 달리 그는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덤덤한 표정과 깔끔한 옷차림. 살짝 젖은 앞머리가 아니었다면, 조금 전까지 시합을 뛴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얘기 좀 하자.”

“약속은 끝난 거 아닙니까?”

김희도가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말했다.

“알아. 아는데.”

같은 팀으로 뛰어 보니 김희도가 필요하다는 걸 더 절실히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집착하는 것 같지만 정말,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임성이 다시 입을 떼어 냈을 때, 뒤에서 시끌벅적 소리가 울렸다. 브리핑을 마친 아이들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임성은 김희도의 얼굴이 급격히 굳는 모습을 보고 그를 데리고 나왔다. 부원들 있는 데서 말했다간 무슨 내용이든 거절당할 거란 강한 확신이 들었다.

“어? 주장, 어디 가요?”

조예준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임성은 부실 뒤편에 자리한 공터에 도착하고 나서야 붙잡은 손을 놓았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네.”

사람들 피해서 여기까지 오고. 분위기를 풀어 보려 던진 농담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래, 원래 이런 거에 반응 안 했지.

괜히 돌려 말하는 것보다 본론을 꺼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말하기 직전,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이마를 닦았다.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김희도를 찾느라 씻지도 못했다. 온몸이 땀에 절어 상당히 찝찝했지만, 지금은 눈앞에 있는 남자와의 대화가 더 중요했다.

“모의 시합에 나와 달라고 한 거 맞아. 그게 포기한다는 말은 아니었거든?”

나 지금 되게 치사한 것 맞지? 임성은 스스로 뻔뻔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내뱉었다.

표정을 굳히고 내내 듣기만 하던 김희도가 한 발짝 다가왔다. 임성은 그제야 제가 너무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서너 발자국 떨어졌던 거리는 어느새 발끝이 마주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턱을 살짝 든 김희도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 이거 너무 가깝지 않나. 설마 억지로 시합에 참여시켰다고 때리려는 건가? 갈피를 잡지 못한 눈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눈꺼풀을 반쯤 내리깐 김희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짧게 내 쉬었다. 후우, 후우. 그 행동이 세 번 정도 이어졌다.

“뭐 해?”

“잠깐. 움직이지 말고.”

김희도는 본능적으로 물러서는 임성의 양팔을 붙잡아 고정했다. 그 상태로 숨을 내뱉자 뜨거운 숨결이 귓가와 뺨에 달라붙었다. 오싹한 간지러움과 소름이 쭈뼛 돋아나 등허리를 지르르 울렸다.

임성의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모자가 툭 떨어졌다.

“이상하네.”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임성의 팔을 놨다. 낮은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었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임성은 귀를 감싼 채 김희도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마치 불에 댄 듯 귀 전체가 뜨끈뜨끈했다.

김희도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부실 창문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불빛이 유난히 새까만 머리카락 위에서 반짝였고, 그 아래 기다랗게 뻗은 속눈썹은 깊은 그늘을 만들었다.

단정하고 또렷한 선을 최대한 화려하게 그려 내면 저런 얼굴이 되지 않을까. 지금 이 당황스러운 상황마저 잊을 만큼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참 예쁘게 생겼다. 그것은 질투라든가 부러운 감정이 아닌, 예쁜 것을 봤을 때 나오는 순수한 감탄에 불과했다.

그 순간 김희도가 눈을 치켜떴다. 고양이처럼 길게 빠진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훔쳐본 것도 아닌데 왠지 뜨끔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씩 웃었다.

김희도는 습관적인 미소를 짓는 임성을 보다가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어? 뭘?”

“연습 경기. 그쪽 말대로 연습 경기에 출전하겠다고요”

김희도는 저보다 두 살 많은 임성을 ‘선배’나 ‘주장’이 아닌 ‘그쪽’이라고 칭했다. 조예준을 비롯한 임성의 열렬한 신봉자들이 들었다면 버릇없는 놈이라고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호칭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야.’나 ‘너.’라고 하는 게 어디냐.

“하지만 거기 까집니다. 그 뒤로도 어쭙잖게 도발하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알았어. 대신 훈련에 참여해. 적어도 누가 어느 포지션인지는 알아야 하잖아.”

자꾸만 늘어나는 조건에 김희도는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극적인 협상 타결인가.

“그동안 귀찮게 해서 미안했다. 하지만 분명 후회 안 할 거야.”

임성은 다른 애들에게 하듯 손을 뻗었지만, 김희도가 물러선 게 더 빨랐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다 벌레라도 발견한 것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습관이라 잘 안 고쳐지네.”

임성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보통 이러면 싸가지 없다며 욕하기 마련인데, 저 남자는 멋쩍게 사과했다. 참 이상한 사람이야. 김희도는 코끝을 매만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임성이 교실에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혹은 찾아온 사람이 임성이 아니었다면 김희도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야구를 그만뒀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글러브나 배트를 잡지 않았겠지.

임성의 제안을 굳이 받아들인 것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아주 중요한 것을.

* * *

겨우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어젯밤부터 내린 빗줄기는 운동장 곳곳에 물웅덩이를 만들고 마른 흙을 질퍽질퍽하게 만들었다. 일기예보는 이번 주 내내 비 소식을 전하며 봄꽃놀이를 기대하던 사람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어으. 신발 홀딱 젖었네. 주장, 밖에 비 엄청…… 어?”

흠뻑 젖은 운동화 감촉이 퍽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들어오던 조예준은 김희도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책가방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 냈다.

“퇴부 하러 온 거? 알아서 꺼지면 되지 굳이 찾아올 필요까지 있나. 평소 매너는 개 같은데 이상한 곳에서 예의 차리네.”

“…….”

“야, 예준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리고 희도 야구부 안 나가.”

내가 쟬 어떻게 데려왔는데 나가라니. 임성은 김희도가 냉큼 나가겠다고 할까 봐 얼른 조예준의 말을 정정했다.

“네? 그 지랄을 해 놓고요?”

당연히 그만둔다는 말을 기대했던 조예준은 나가지 않는다고 말을 듣고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임성과 김희도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놈, 저 저 싸가지 없는 놈이 뜬금없이 청백전에 참가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임성이 김희도에게 관심 있다는 것쯤은 그와 같이 문일중 경기를 보러 다닌 조예준이 가장 잘 알았다.

“인마, 지랄이라니. 그날 컨디션이 안 좋았겠지. 이제 같은 팀인데 지난 일은 털고, 다 같이 잘해 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이랑 잘 지내는 건 무리예요.”

인사는커녕 투명 인간 취급하는 김희도를 노려보며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들은 임성이 양 눈썹을 내리며 쓰게 웃었다.

비록 시작은 엉망이나 같이 훈련하고 생활하다 보면 차차 나아지겠지.

“오늘은 비 와서 실내 훈련할 것 같다. 예준아, 메뉴 받아 놓은 거 갖고 있어?”

“가져왔어요. 여기요.”

조예준이 가방을 뒤적여 노란색 공책을 꺼냈다. 빛바랜 표지에 귀퉁이가 닳은 노트를 펼치자 학년과 포지션별로 훈련 메뉴와 경기 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임성이 1학년 때부터 개인적으로 만든 자료로, 조예준이 입학한 후부터는 공동으로 관리 중이었다. 나름의 시크릿 노트라고 할까.

“오늘은 웨이트 위주로 하자. 코치님껜 내가 말할 테니까, 너는 수건이랑 장비 챙겨서 체육관으로 가.”

“예.”

착실하게 대답한 조예준이 포수 마스크와 미트를 꺼내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비가 와서 습도가 높은 날이나 반대로 심하게 건조할 땐 장비가 쉽게 망가지기 때문에 미리미리 점검하는 게 좋았다. 가뜩이나 야구처럼 매일매일 쓰는 장비는 금방 소모되니까. 조금이라도 오래 쓰기 위해선 열심히 관리해야 했다.

“교실 가시려고요?”

임성이 가방을 챙기는 모습을 본 조예준이 물었다.

“숙제 있어서. 시간 맞춰서 다시 올게.”

마지막으로 글러브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들도 운동부는 대충 넘어가 주곤 했지만, 임성은 가능한 수업에 참여하려고 했다. 수업 시간만이라도 집중해서 듣는 것은 물론이고, 숙제도 빠트리지 않았다. 시험 기간엔 등하굣길과 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풀며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타고난 성실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다녀오세요. 여긴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우리 예준이 든든하네. 이번엔 얼굴 새파래져서 찾아오진 마라.”

“에이, 주장. 그땐 진짜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래. 그래. 가방을 비스듬히 걸쳐 멘 임성이 우산을 집어 들었다. 노란 병아리 우산에 이어 이번에는 분홍색 바탕에 장화를 신은 오리가 깜찍하게 찍혀 있었다.

“이따 봐. 김희도 너도.”

임성이 손을 팔락팔락 흔들며 사라지자, 부실 공기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김희도와 조예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것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전부였다.

참을 수 없는 어색한 분위기에 조예준이 김희도를 힐끔 곁눈질했다. 그는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임성이 사라진 문을 보고 있었다.

“야. 주장 말이 맞아? 진짜 다시 들어 온 거냐?”

“…….”

저 자식이 또 쌩까네. 진짜 좋아할래도 좋아할 수 없는 놈이라니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성격 좀 고쳐라. 야구는 개인이 아니라 팀…… 야! 김희도!”

어디가. 벌떡 일어선 김희도 조예준을 무시하고 미련 없이 부실을 나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은 조예준이 보호구를 정성스레 닦던 수건을 내팽개쳤다. 물론, 내던지고선 기겁하고 다시 주웠지만.

“싸가지 없는 새끼.”

아무리 생각해도 김희도와 잘 지낼 자신이 없었다.

* * *

김희도가 야구부에 합류한 지 이틀이 지났다. 연습복을 입은 김희도가 등장했을 때 부원들의 반응은 불호, 그 자체였다.

첫날의 그 참사를 겪은 신입생들은 아무래도 선배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고, 2학년들은 저들 나름대로 단단히 벼르는 듯했다. 올해 프로로 진출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선 3학년들은 특히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당장 석 달 뒤에 전국 1차 지명이었다. 그 안에 모든 기량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작은 것 하나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개중 몇몇은 김희도가 아무리 중학교 때 이름을 날렸다 한들 고등학교에선 보여 준 건 아무것도 없지 않냐며, 괜히 팀 분위기만 망치는 건 아닐지 걱정했다.

임성이 3학년을, 조예준이 2학년을 전담으로 맡아 설득했다. 하지만 조예준도 임성의 부탁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일 뿐, 결코 김희도를 환영하는 건 아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더럽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주장이 본인 때문에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걸 알면, 알아서 기어야지. 뭐가 잘 났다고 목을 빳빳하게 세우냔 말이야.

어쨌든 설득에 설득을 거쳐서 김희도는 선유고 야구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걱정한 것보다 성실하네.”

마지못해 들어온 만큼 설렁설렁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김희도는 훈련에 꼬박꼬박 참여했다. 다만 훈련 내내 표정이 안 좋았는데, 특히 땀에 전 아이들이 좁은 부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더욱 심각해졌다.

낯빛이 많이 안 좋은데. 괜찮은가. 임성이 그를 살피러 가면 코를 틀어막으며 물러섰다. 대놓고 피하는 모습이 화날 만한데도 임성은 오히려 김희도를 걱정했다.

“괜찮아?”

“저리 가요.”

임성이 가까이 다가가자 김희도가 미간을 찌푸리며 멀찍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멀어진 거리를 가늠하던 임성이 머쓱하게 콧등을 긁었다. 처음 한두 번은 그저 우연이겠거니 하고 넘겼던 일은, 몇 번의 반복을 거치고 확신으로 굳어졌다.

짐작 가는 이유가 하나 있긴 한데. 임성은 문 근처에서 공기를 급히 들이마시는 김희도를 보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왠지 물어보기 민망했다.

“……있잖아, 혹시 나 냄새나? 그때 네가…….”

“네. 나요.”

“어?”

“토할 것 같아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희도가 치고 들어왔다.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것도 바로 말할 줄 몰랐던 터라 순간 굳었다. 그러나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야, 나 매일 샤워해. 옷도 빨아 입고.”

그래서 뭐 어쩌라는 시선을 한 김희도를 보고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어쨌든 무슨 뜻인지 알겠다. 가급적 가까이 안 갈게.”

급한 대로 라커에서 수건을 꺼내 얼굴과 목을 닦았다. 마른 수건이 금세 축축하게 젖은 걸 보니 땀 냄새가 날만 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김희도의 입이 달싹이는 것과 동시에 조예준이 “주장!” 하고 부르며 부실에 들어왔다.

“어, 예준아. 왜?”

“코치님이 불러요.”

“그래. 이다음에 페퍼(*페퍼게임: 2인 1조로 타격과 수비 연습을 병행)니까 둘 다 수분 보충하고 나와.”

한 번 더 얼굴을 닦은 임성이 먼저 나가고, 조예준은 못마땅한 얼굴로 김희도를 노려보다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혼자 남은 김희도는 빨래통 맨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수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우리 예준이.”

임성은 어느새 제 옆에 따라붙은 조예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어깨동무가 익숙한 듯 아무 반응 없는 조예준 쪽으로 상체를 좀 더 기울여 몸을 밀착시켰다.

“예준아. 내 땀 냄새 많이 불쾌하냐? 막 역겹고 그래?”

임성이 고개를 살짝 숙여 연습복의 목 부분을 쥐고 킁킁댔다. 딱히 심한 것 같진 않지만, 본인 것은 잘 모를 수 있으니 조예준에게 확인했다.

“내 성격 알지? 상처 안 받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다.”

조금 전 김희도의 반응을 떠올리며 넌지시 말했다.

냄새가 얼마나 지독하면 토할 것 같다는 말이 바로 나올까. 유난히 깨끗하게 굴진 않아도 훈련 후엔 항상 샤워하고, 연습복도 매일 빨아 입었다. 일주일 내내 같은 연습복과 유니폼을 입는 팀원들과 비교하기 미안한 수준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보통이에요. 결렬하게 움직이면 너도나도 다 나는 그 정도요. 김희도 때문이면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새끼가 개유난이니까요. 지는 무슨 꽃향기라도 나나? 괜히 지랄이야 지랄이.”

처음에는 평범하게 말하던 조예준의 목소리는 끝 즈음에 완전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 * *

가장 먼저 야구부에 도착하는 건 보통 주장인 임성이었다. 해가 막 떠오를 즈음 도착해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하고, 여기저기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했다.

그 후 그날 연습 메뉴얼을 살피다 보면 팀원들이 하나둘 도착했고, 훈련에 필요한 물품을 챙겼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스트레칭을 했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매일 이어지는 일상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라, 오래된 문고리에 열쇠를 끼우고 돌렸다. 간편한 도어락으로 바꾸자는 의견은 수없이 부실을 들락날락하며 문고리에 선배들 땀이 묻어 있다는 이유로 가볍게 무시됐다.

문을 열자마자 밤새 묵은 후텁지근한 공기가 확 끼쳐왔다.

간단히 부실 정리를 후 아이스박스에 물과 이온 음료를 채워 놓고 의자에 앉아 노트를 꺼냈다.

한쪽 턱을 괸 채 노트를 내려다보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일찍 왔네.”

임성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김희도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원래 이 시간에 옵니까?”

“보통은. 너는 왜 이렇게 일찍 왔냐?”

“그냥요.”

짧게 대답한 김희도는 가방을 내려놓더니 교복 상의 단추를 풀었다. 가까이 가면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예민하게 구는 주제에 옷은 아무 곳에서 훌렁훌렁 잘 벗었다.

옷을 걸쳤을 땐 다소 말라 보이던 육체는 탄탄하고 매끈한 근육으로 촘촘히 덮여 있었다. 그것은 팔을 들어 올리거나 등을 구부릴 때 더 잘 드러났다. 등에서 허리로 내려오는 몸 선이 특히 시선을 끌었었다. 하얀 피부와 군더더기 없게 꽉 짜인 예쁜 육체는 운동선수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투박함이 없었다.

“희도야.”

아무 생각 없이 옷을 갈아입던 김희도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임성이 등 뒤에 와 있는 걸 발견하고 흠칫했다.

“허리가 아주 딱 잡혔네. 견갑근, 광배근…… 이야. 진짜 잘 만들었다. 어깨랑 팔도 좋잖아. 이래서 장타를 잘 치나?”

보통 공을 던지거나 칠 때 상체를 많이 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야구의 기본이자 중심은 하체였다. 등허리가 몸 전체의 균형을 잡아야 정확하고 안정된 움직임이 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김희도의 육체는 성장 중이라는 걸 감안해도 완성형에 가까웠다. 이대로 키만 조금 더 크면 완벽하겠는데.

“한번 만져 봐도 되냐?”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김희도의 몸 곳곳을 훑었다. 불순한 의도 따위는 조금도 없는, 좋은 것을 봤을 때 느끼는 순수한 감탄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아니요.”

“그래.”

임성은 눈을 반짝이던 게 무색하게 깔끔하게 물러섰다.

현재 시각 6시 10분. 아침 훈련까지 약 20분가량 시간이 남았다. 몸 좀 풀어 놓을까.

글러브와 공을 챙기고 운동장으로 나가는 등 뒤에서 아마 김희도의 것일 발소리가 겹쳐졌다.

따로 운동할 줄 알았는데 같이 하려는 건가. 의외긴 해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가운 쪽에 가까울까.

혼자 열심히 뛰는 것도 좋지만, 함께 뛰면 지루함도 덜고 은근한 경쟁심이 생겨 활력소가 됐으니까.

임성은 깍지 낀 손을 위로 쭉 뻗었다가 허리를 굽히며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게 내렸다. 그리고 뒤로 돌려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가며 팔꿈치를 늘렸다. 양어깨도 돌리고 손목과 다리 등 충분한 스트레칭을 한 뒤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새파랗게 동터 오는 하늘이 보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김희도는 두어 뼘쯤 뒤에서 따라왔다. 속도를 맞출까,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젓고 달리기에 집중했다.

30바퀴가 넘어가자 슬슬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기어코 50바퀴를 채우고 멈췄다. 목구멍에서 껄떡대는 숨을 내뱉으며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었다.

“후, 힘들다.”

무릎을 짚은 채 호흡을 정리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이쪽을 보고 있는 김희도와 눈이 마주쳤다.

아, 맞다. 냄새난다고 했지. 몸을 슬쩍 물려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같이 50바퀴는 돌았을 김희도에게선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살짝 상기된 뺨이 아니었다면 방금 학교에 도착했다 해도 믿었을 것이다.

“수건 줄까, 닦을래?”

예의상 물은 말에 김희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마의 땀을 훔치던 임성이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잠깐만 기다려. 새것으로 갖다줄게.” 하고 말하며 걸음을 돌렸다.

“아니요. 그거 주세요.”

부실로 향하던 임성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거? 그것의 정체가 뭔지 잠시 생각하다가 제 목에 걸린 수건을 눈으로 가리켰다. 설마 이건 아니겠지 싶어서.

“이거 내가 쓰던 건데? 부실에 새 수건 많으니까 그거 써.”

“그거 달라고요.”

왠지 강압적으로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무슨 소리야. 당연히 기분 탓이겠지. 임성은 수건을 매만지면서 본인에게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다가 살짝 잡아당겼다. 스르륵 흘러내리며 손을 덮는 수건을 김희도에게 어색하게 내밀었다.

달라고 해서 준 건데 왜 이렇게 긴장되지. 괜히 숨을 죽이고 김희도의 반응을 살피게 되는 걸 보면.

그는 아무렇지 않게 수건을 받더니 제 입과 코를 넉넉하게 감쌌다. 가슴팍이 크게 솟아올랐다가 천천히 내려앉는 모습은 땀을 닦는 것보다 냄새를 맡는 것에 가까웠다. 수건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발갛게 달아올랐다. 운동장 50바퀴를 돌고도 멀쩡했던 애가.

“여기요.”

수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던 김희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약간 쌀쌀맞아 보이는 표정으로 임성에게 다시 수건을 건네고선 몸을 휙 돌렸다.

“……뭐였지.”

흔들림 없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 * *

땅거미가 길게 늘어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였다.

주말리그를 이유로 감독과 코치가 하루 동안 자리를 비우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평소 감독, 코치 때문에 농땡이는 꿈도 못 꾸던 아이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떠들었다. 진정시키려 해도 3학년이 먼저 나서서 놀자고 외치니 방도가 없었다.

“아이스크림 내기할 사람 여기 다 붙어라.”

박종열이 엄지를 치켜세우자 그 위로 손가락들이 하나둘 쌓였다. 대충 세어 봐도 10명이 훨씬 넘었다.

“편 갈라서 공 3박스 누가 먼저 치나 내기하자.”

누가 야구부 아니랄까 봐 내기도 공놀이로 진행됐다. 짜식들. 임성이 흐뭇하게 웃으며 몸을 돌리자 조예준이 주장은 참여하지 않느냐며 불렀다.

“웨이트 더 하려고.”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놀아요.”

“한 시간만 하고 올게. 예준아, 애들 사고 치지 않게 잘 봐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고.”

끝까지 아쉬워하던 조예준은 박종열이 편 가르기를 한다고 크게 소리치자 얼른 아이들 사이에 섞였다. 금세 와글와글 떠드는 부원들을 뒤로하고 웨이트실로 향하던 임성이 불시에 뒤를 돌았다. 조용히 뒤따라오던 김희도가 멈춰 섰다.

“넌 내기에 안 끼어?”

“내가 왜요?”

정말 자신이 끼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 저게 김희도였지.

“나 따라오면 땀 냄새 많이 날 텐데. 이번에도 토할지 몰라.”

걱정스럽게 건넨 말에 김희도가 무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없다는 뜻인가? 도통 표정 변화가 없어서 모르겠단 말이지.

“알아서 적당히 해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중간중간 수분 보충도 꼭 하고.”

벤치 프레스에 눕자 천장에 매달린 전등이 눈을 따갑게 찔러 댔다. 축축한 손을 바짓단에 비벼 닦고 최대한 어깨를 바닥에 붙인 채 바벨을 들어 올렸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세며 무심코 감았던 눈을 떴다가 김희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임성의 머리맡에 서서 운동하는 모습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음, 오늘 아침에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밑에서 올려다보는, 턱과 콧구멍이 부각되는 굴욕적인 구도임에도 김희도는 여전히 잘생겼다. 다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선명한 시선에 임성이 바벨을 내놓고 상체를 일으켰다.

“바벨 들게? 비켜 줄까?”

“아니요.”

짧게 대답한 김희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옆에서 운동을 했다.

원래도 이상했지만, 오늘따라 더 이상하네. 임성은 허리를 내리며 런지 중인 김희도를 곁눈질하다가 다시 바벨을 쥐었다.

각자 말없이 운동한 지 약 1시간째, 임성은 땀범벅이 된 상의를 펄럭이며 김희도를 불렀다.

“이따 초 재기 하러 갈 건데, 같이 할래?”

“됐습니다.”

넌지시 건넨 제의에 칼 같은 거절이 날아왔다. 웨이트실까지 쫓아온 사람치고 무척 단호해 괜히 머쓱해졌다.

요 며칠 운동장을 뛰며 나름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경계심이 강한 길고양이에게 일방적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 * *

솜을 여러 개 뭉친 것처럼 활짝 폈던 봄꽃이 지고 파란 싹이 그 자리를 메웠다. 차갑고 매섭기만 하던 바람에 미약한 열기가 실리며 계절은 초봄에서 완연한 봄으로 무르익는 중이었다.

아침 훈련, 수업, 점심, 수업, 오후 훈련. 저녁 훈련. 매일 반복되는 것 같으면서도 세세히 들여다보면 각기 다른 일상이 이어졌다.

“감독님, 임성입니다. 부르셨습니까?”

임성이 들어온 걸 알면서도 감독은 고개를 들지 않고 한쪽 다리를 꼰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성은 양손을 뒤로 돌린 채 다소 거만한 자세로 앉은 감독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김희도 말이야.”

감독은 여전히 휴대폰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느긋한 말투와 달리 휴대폰을 만지는 손가락은 바삐 움직였다. 뿅, 뿅. 게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좀 어때?”

“재능 있고 센스도 좋습니다. 분명 팀에 전력이 될 겁니다.”

뜬금없이 왜 김희도에 관한 걸 묻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부원들과 사이를 말하는 건지, 김희도 개인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솔직한 감정이었다. 기껏해야 정규 연습에만 참여할 줄 알았던 김희도는 매일 아침 자신과 함께 운동장을 뛰는 중이었다. 나란히 달리는 건 아니고, 몇 발짝 뒤에서 김희도가 따라오는 형식이었다.

부실에 사람들이 많을 땐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지만, 첫날처럼 역겹다는 둥 대놓고 시비를 걸지 않았다. 특이점이라면 마스크를 벗지 않는단 점일까. 마스크를 코 중간까지 끌어 올린 채 훈련을 하는데 보는 사람이 숨이 막혔다. 더 웃긴 건 자신과 달리기 땐 맨얼굴로 뛰다가 다른 아이들만 오면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었다.

“걔 기초 훈련 열외 시켜라.”

“예?”

당장 2주 뒤가 주말리그 시작이었다. 끝나면 곧바로 전국 대회가 있을 거고, 또 후반기 주말리그로 이어졌다. 8월까지 쉼 없이 달리려면 체력이 얼마나 중요한데, 기초를 빼라니.

다소 당황스러운 얘기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감독이 고개를 들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모자 아래로 드러난 시선이 썩 곱지 않았다.

“두 번 말해야 하냐?”

김희도의 요청인가? 하기만 그렇다기에 김희도는 오늘 아침에도 일찍 부실에 왔다. 두 사람은 이제 당연하다는 듯 함께 스트레칭을 하고 러닝까지 마쳤다.

김희도의 요청이 아니면? 감독이 저러는 이유가 뭘까.

보통 1차 지명으로 유력한 선수가 무리한 일정으로 혹사당하는 경우 해당 연고지에 기반을 둔 프로 구단이 학교 측에 자제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김희도는 이제 겨우 1학년으로 구단이 직접 관여하기엔 시기가 일렀다.

“인마. 왜 대답이 없어?”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감독이 다시 한번 채근하자 임성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오늘 오전에 자리 비우니까 애들 잘 잡아서 훈련 시켜. 중요한 시기에 분위기 망치지 말고 알아서 잘하라고. 감투를 씌워 놨으면 걸맞게 행동해야지.”

“알겠습니다.”

“가 봐.”

귀찮은 듯 손을 휙휙 내젓는 감독을 뒤로하고 감독실을 나왔다.

푸릇하던 하늘은 어느새 해가 환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먼지가 낀 창문 너머로 그라운드 정비를 하는 부원들이 보였다. 임성은 복도에 선 채 흙을 고르는 아이들을 보다가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들 모여 봐.”

임성이 부원들을 불러 모았다. 아직 앳된 티가 물씬 풍기는 신입생부터 3학년까지 50명 남짓한 부원들을 보다가 눈으로 교문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등산할 거다. 2 스팟 찍고 올 건데, 신입생도 있으니까 시간은 안 재.”

평소처럼 운동장 뛰기가 아닌 등산을 한다는 말을 들은 부원들이 술렁거렸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리둥절해 하는 신입생들과 달리 2, 3학년들은 대놓고 경악했다.

“미친. 등산한다고?”

선유고등학교.

오래전 터를 잡은 학교가 으레 그렇듯 선유고 역시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 뒤에는 승황산이라는 악명 높은 산이 버티고 있었는데 약 10년 전, 등산로를 조성한다며 길을 닦았다. 뛰거나 걷는 덴 무리가 없었지만, 극악의 경사로를 자랑해 차를 타고 오르면 몸이 뒤로 쏠리는 기분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산을 오르겠다는 말은 곧 ‘오늘 너의 허벅지를 터트리고 말겠다.’ 하는 뜻과 같았다.

“강요 아니니까 빠져도 돼. 추후 불이익도 절대 없다. 100% 자진 참여야. 이의 있는 사람?”

“갑자기 웬 이의입니까?”

조예준이 대표로 물었다. 보통은 그냥 ‘뛰어’ 인데 갑자기 의견을 묻는 것이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임성은 모자를 살짝 들어 이마의 땀을 닦고 다시 눌러썼다.

“하기 싫은 사람 있으면 얘기하라고.”

“열외 시켜 줍니까?”

“원하면. 대신 그냥 쉬는 건 안 되고, 매일 하던 훈련 하면 된다. 루틴은 다들 알지?”

나. 못 가. 임성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3학년 무리에서 손이 불쑥 솟았다. 눈치를 보던 2학년 몇 명도 슬금슬금 손을 올렸다. 임성은 손을 든 아이들을 모두 옆으로 뺐다.

“더 없어? ……없으면 앞줄부터 출발한다. 시작.”

하나둘. 하나둘. 우렁찬 고함이 이른 아침을 갈랐다. 열 맞춰 뛰는 무리 중엔 마스크를 낀 김희도도 섞여 있었다.

임성은 제일 앞에서 뛰며 팀원들 이끌었다. 정상에 다다를수록 아이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걸음이 현저히 느려졌다. 몸을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땀이 후두둑 떨어졌다.

“미친. 개힘들어.”

누군가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옥의 등산을 하고 학교로 돌아온 아이들은 남아 있던 인원과 합류해 단체 필딩을 시작했다.

그 후 펑고까지 끝낸 아이들은 푹 삶은 시래기처럼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와 씨. 항상 역대급이지만, 오늘은 존나 역대급이었다. 중간에 기절하는 줄 알았네.”

박종열이 드러누운 채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자 정의영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헐. 정의영 새끼 웃는 것 좀 봐. 드디어 실성했나 봐.”

박종열이 검지로 옆머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야. 임성. 너 주장인 거 잘 알겠으니까 감코 없는 날은 좀 쉬엄쉬엄하자. 꼭 이렇게 티를 내야 되겠냐?”

양민성이 불만을 터트렸다. 정작 등산을 했던 애들은 별말 없는데, 학교에 있던 양민성이 과도하게 화내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곧 리그 시작하잖냐. 할 수 있을 때 빡세게 해야지.”

씨발, 핑계 대기는. 달래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양민성이 잇새로 욕을 중얼거렸다.

“민성이 말도 맞아. 이러다 시합 전에 힘 다 빼겠다.”

임성이 박종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우리 박종열이. 답지 않게 웬 약한 척일까.”

“야. 나는 너랑 다르게 존나 섬세하거든? 유리 같은 남자라고.”

불만을 농담으로 받아치자, 박종열 역시 농담으로 응수했다.

“일어나기나 해라.”

임성은 박종열에게 손을 뻗으면서 김희도를 곁눈질했다. 주저앉거나 드러누운 부원들 사이에서 그는 유일하게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렇게 뛰고, 뛰고 또 뛰었음에도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무표정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불만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상의 윗부분을 움켜쥔 김희도가 마스크 아래로 떨어진 땀을 닦았다. 셔츠가 딸려 올라가며 근육이 탄탄하게 올라붙은 복근이 슬쩍 드러났다.

“다들 거지 꼴인데 왜 쟤 혼자만 반질반질하냐. 세상 진짜 불공평하다.”

박종열은 다 들리게 중얼거리더니 괜히 손가락을 브이로 만들어 제 턱밑에 갖다 댔다. 그 모습을 본 3학년들이 우웩 토하는 시늉을 했다.

“김희도. 등산 어땠냐?”

“뭘 말하는 겁니까?”

“하기 싫었다든가, 힘들었다, 같은 감상.”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늘 그렇듯 시큰둥한 대답이었다. 등산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는 걸 보니, 기초 훈련에 열외해 달라고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역시 감독의 독단적 의견이었나.

부원들이 겨우 한숨 돌리고 있을 즈음 코치가 호루라기를 목에 걸며 등장했다.

“초 재기 할 거니까 일렬로 서라.”

“예? 코치님. 저희 산 타고 왔는데요? 펑고도 한 박스나 했습니다.”

“그래. 잘했다. 1학년부터 순서대로 서.”

누군가의 애원 섞인 말을 가볍게 무시한 코치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으으. 아이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어기적어기적 줄을 섰다.

* * *

훈련이 끝나고 코치는 앞으로 연습 경기 일정을 짧게 브리핑했다. 호신고를 시작으로 금요일 영풍고, 황운공업고, 그다음 주 목요일에 신라고등학교와 경기가 있었다. 주말리그 시작 전에 서로 전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호신고와의 대결에선 양민성이 선발로, 토요일 경기엔 임성이 등판하기로 결정 났다.

조예준은 첫 연습부터 웬 양민성이냐고 투덜대다가 임성의 타박을 듣고 아랫입술을 뚱하게 내밀었다.

“오늘 인터뷰 있는 거 알지? 훈련 영상 담아 간다니까 다들 4시까지 늦지 말고 와.”

심드렁하게 이어진 코치의 말에 아이들이 “오오, 매스컴 타는 건가?” 하고 눈을 반짝였다. 지역 내 작은 언론이긴 해도 매스컴은 항상 기대되고 설레는 일이었다.

“앗싸. 영어 쪽지 시험 있는데, 수업 짼다.”

조예준처럼 수업 안 하는 게 좋을 수도 있고.

임성은 걸음을 빨리 놀려 서둘러 야구부로 향했다. 선생님의 심부름이 생각보다 늦게 끝났다. 다급히 뛰어 도착한 곳에는 이미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평소엔 연습복 차림으로 훈련하는데, 촬영을 의식해서인지 다들 유니폼을 차려입고 뻣뻣하게 움직였다.

“야. 뭘 벌써부터 긴장해. 로봇이냐?”

감독의 인터뷰가 끝난 후 훈련 하는 모습을 짧게 찍을 예정이라고 했다. 촬영까지 시간이 많이 남기도 했고, 대부분 풀샷으로 잡으니 얼굴은 안 나올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아이들은 배트를 허공에 휘두르거나, 캐치볼을 하는 등 벌써부터 난리를 쳐 댔다.

한쪽에선 “나 오늘 좀 멋있지 않냐?”, “이럴 줄 알았으면 유니폼 빨아 올걸.”, “방송 나가고 기획사에서 연락 오면 어쩌지?”, “미친놈아. 개소리 좀 작작 해라.” 같은 잡담이 이어졌다.

잔뜩 긴장한 아이들을 웃으며 보던 임성은 무리와 떨어져 홀로 서 있던 김희도를 향해 손짓했다.

“김희도. 이리 와 봐.”

그는 코끝을 살짝 찡그린 마뜩잖은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다가왔다.

“나랑 잠깐 어디 좀 가자.”

힐끔 시간을 확인한 임성이 먼저 걷자 김희도가 뒤를 따랐다. 함께 부실로 가는 두 사람을 보던 정의영이 박종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저 자식 저거. 임성 말은 은근히 잘 듣지 않냐?”

“누구? 김희도?”

“어. 누구 김희도랑 말해 본 사람?”

정의영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동기인 1학년들조차도 입을 다문 채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김희도는 임성을 제외한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다는 걸.

* * *

“공기가 후끈후끈하네.”

여전히 고장 난 에어컨을 대신해 낡은 선풍기가 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본격적인 여름이 되기 전에 에어컨을 고쳐야 할 텐데. 감독님께 한 번 더 건의 해야겠어. 속으로 중얼거리며 부실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딸깍. 뒤따라온 김희도가 망설임 없이 선풍기 전원을 껐다. 힘없이 회전하던 선풍기가 꺼지자 부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안 더워?”

“더러운 선풍기가 일으키는 냄새가 더 불쾌합니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던데. 임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봄바람이 파도치듯 불어와 두 사람 사이를 살랑살랑 스쳐 지나갔다.

“창문 안 열어도 괜…….”

“왜? 텁텁한 냄새 싫다며.”

자신도 모르게 말했던 김희도는 임성의 대답을 듣고 멈칫했다. 임성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김희도를 의아하게 보다가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앉아 봐.”

그리고 선반에서 뭔가를 꺼내 되돌아왔다. 여전히 서 있는 김희도의 손목을 잡아 의자에 앉히고선 그의 앞에 섰다.

“뭐 합니까?”

“희도야. 나 믿지?”

임성은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모호한 말을 건네며 웃었다.

“아니요.”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솔직한 답변에 임성이 씩 웃었다. 살짝 치켜 올라갔던 눈꼬리가 보드랍게 뭉개지며 입술이 크게 벌어지는 웃음이었다.

“요즘 애들은 솔직하다니까.”

그 요즘 애들 중 한 명인 임성은 여전히 눈꼬리를 살짝 내린 채 손에 든 물건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색색의 실과 함께 가늘고 뾰족한 바늘이 나란히 있었다.

“너 유니폼 단추 떨어질 것 같아서. 인터뷰 시작 전엔 달아 놓는 게 좋을 거야.”

임성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단추를 눈으로 가리켰다. 굳이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꿰매야 하니까. 뛰다가 잃어버리면 찾기도 힘들거든. 임성은 바늘에 검은색 실을 꿰고선 한 발짝 앞으로 걸었다.

“나 믿…… 아, 안 믿는다고 했지. 안 믿어도 좋으니까 움직이지 마라. 찔리면 꽤 아플 거다.”

바늘을 든 임성이 상체를 숙이자 유니폼 상의가 벌어지며 곧은 목과 쇄골이 드러났다.

언더 티 안 입었나 보네. 김희도는 무심코 생각하며 목 한가운데 우뚝 불거진 울대뼈를 응시했다. 한참이나 울대뼈에 머물렀던 시선은 이윽고 날렵한 턱 날을 지나쳐 둥근 귓등과 얼굴까지 차례대로 훑었다.

어느새 웃음기를 거둔 임성은 미간을 잔뜩 좁힌 진지한 얼굴로 바느질 중이었다.

대부분 사람 좋게 웃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오랜 훈련으로 햇볕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는 결이 좋아 건강한 느낌이 났다. 우뚝 솟은 코와 위아래로 도톰한 입술까지 모난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쳐다보는 본인도 상대방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꽤나 집요한 시선이었다.

“음. 어렵네.”

임성이 콧등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유니폼 자체가 짙은 남색에 단추 또한 검은색이라 구분하기 어려웠다. 눈썹 앞머리를 더욱 모으며 상체를 더 숙였다. 그의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무릎을 짚고 있는 김희도의 손등 위로 뚝 떨어졌다. 뜨거웠다.

김희도는 숨을 조금 쉬기 힘들고, 숨을 조금 더 깊게 들이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김희도가 자신도 모르게 임성에게 다가간 순간, “다 됐다.” 하고 말했다. 그 순간 김희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임성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뭐야.

“혹시 진짜 찔렸어? 느낌은 없었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이건 대체 뭡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깜빡이던 임성이 이내 머쓱하게 웃었다. 양팔까지 걷어붙이며 집중한 것에 비해 결과는…… 그냥, 열심히 했다는 말밖엔.

“투수가 손재주가 좋을 거라는 건 편견이야.”

김희도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지레 찔린 임성이 머쓱하게 변명했다.

자신이 봐도 좀 너무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너덜거리던 단추가 제대로 붙었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다른 애들 단추도 몇 번이나 달아 봤는데, 도무지 늘지 않네.”

“다른 사람 단추도 달아 줘요?”

김희도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커졌지만, 둘 다 눈치채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고개를 끄덕인 임성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안 쓰는 반짇고리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간단한 건 해 주지. 근데 한 번 겪은 애들은 다시 부탁하지 않더라고. 하하. 이건 임시방편이니까 너도 집에 가서 제대로 달아. 그리고 슬슬 돌아가자.”

창문을 닫은 임성이 먼저 나갔고, 김희도는 고개를 숙여 제 유니폼을 내려다봤다. 일렬로 반듯하게 달린 단추 중 유독 튀는 게 하나. 곧은 손끝이 어색하게 매달린 단추를 매만졌다.

* * *

호신고등학교와 올 시즌 첫 연습 경기를 무사히 마치고, 마침내 금요일이 됐다. 오늘 연습 상대인 영풍고는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아침 일찍 운동장에 모였다.

원정 경기에는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아 임성은 해가 뜨기 전부터 바쁘게 뛰어다녔다. 매니저가 있었다면 편했겠지만, 작년에 그만둔 뒤로 아직 공석이었다. 어쩌다 보니 임성이 매니저 몫까지 하는 중이었다.

장비와 물, 얼음이 든 아이스박스 등을 꼼꼼하게 챙기고 부원 명단을 눈으로 훑었다. 빠진 사람 없이 다 왔나? 인원을 체크하던 그의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마스크로 얼굴 반을 가린 김희도가 서 있었다.

“뭐 필요한 거 있어?”

“없습니다.”

뭔가 필요한 게 있는지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아까부터 주변을 서성대기에 하고 싶은 말이 있나 했더니.

“그러면 이것 좀 챙겨 줄래? 이따 버스 오면 짐칸에 넣으면 돼.”

임성이 김희도에게 아이스박스를 건넸다. 거절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말없이 받더니 다시 임성의 뒤를 쫓았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 처음엔 의아해하던 임성도 곧 제 할 일을 했다.

스코어북까지 챙기고 나서야 겨우 여유가 생겼다. 버스 도착 전에 준비해서 다행이네. 임성은 모자 뒷부분이 앞으로 오게 뒤집어쓰며 버스를 기다렸다.

“임성. 너는 어째 갈수록 패션이 구려지냐? 그 좆같은 해골 티는 또 입었네?”

2학년 일부, 3학년들은 대부분 사복 차림이었다. 개중에서도 임성은 특히 눈에 띄었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 미묘한 쪽으로.

“내가 뭐. 나름 괜찮지 않냐, 예준아?”

“아무리 주장이라도 그 말엔 동조할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임성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그러냐며 믿는 조예준이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정말 별로라는 건데.

이거 나름 신경 써서 입었다고. 누가 괜찮다고 말해 줄 사람? 임성은 억울한 얼굴로 자신의 패션 세계를 이해해 줄 동지를 찾다가 김희도와 눈이 딱 마주치곤 “진짜 별로야?” 하고 물었다.

김희도의 시선이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며 임성을 훑었다.

흰 티와 청바지만 입어도 태가 날 남자는 기하학적인 해골 무늬 셔츠에 장수풍뎅이를 떠올리게 하는 반들반들한 갈색 겉옷, 그리고 발목에서 뚝 잘린 애매한 기장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뭐가 이상한지 물으면 어느 하나를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라고 할까? 저런 겉옷은 일부러 사려 해도 못 구할 것 같은데. 그나마 얼굴이 저 정도니까 봐줄 만하지. 솔직히 패션만 뚝 떼 놓고 보면 안구 테러에 가까웠다.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묘한 기대감에 차 있던 잘생긴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겠는지 이번에는 신입생 무리를 쳐다봤다. 하나같이 눈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소풍 가냐? 그만 떠들고 얼른 타.”

감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자칫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에 때마침 버스가 도착했고, 코치의 지도하에 부원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운전석 바로 뒤는 감독과 코치의 지정석이었고, 임성은 그다음 좌석에 앉았다.

으음. 영풍고에선 이수호와 장용식이 배터리로 나오겠지? 비밀 노트를 꺼내서 일정을 확인하던 임성은 인기척을 느꼈다. 당연히 조예준이라 생각하고 노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앉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가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 눈을 깜빡였다.

“자리 있습니까?”

“어?”

현재 버스 통로를 앞에서 점령하고 있는 김희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오가지 못했다. 야, 뭐하냐. 좀 들어가. 뒤에서 빨리 좀 가라며 성화였다.

“옆에 자리 있냐고요.”

“아, 어. 잠깐만. 가방 치울게.”

잠시 얼떨떨하게 있던 임성이 얼른 가방을 바닥에 내리자 김희도가 옆에 앉았다. 그리고 곧장 팔짱을 끼더니 눈을 감았다. 임성은 그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코치에게 붙들려 제일 늦게 버스에 탄 조예준은 자연스럽게 임성에게 갔다가 먼저 자리를 차지한 김희도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안 비키고 뭐 하냐. 주장 옆자리 내 지정석이거든?”

김희도는 눈을 뜨지도 팔짱을 풀지도 않았다. 잠든 것 같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무시할 뿐.

“야. 김희도. 계속 앉아 있을 거냐고.”

조예준이 김희도가 앉은 의자를 발로 툭 쳤다.

“조예준. 소란 피우지 말고 얼른 자리에 앉아. 도착 전까지 다들 체력 보충해 놔.”

코치의 말에 조예준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이다가 빈자리에 앉았다.

선유고 야구부원들을 태운 버스가 출발했다. 3학년들은 바로 눈을 감았으며 2학년들은 폰 게임을 하거나 옆 친구와 잡담을 했다. 그리고 1학년들은 모든 게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불쌍한 신입들. 지금 많이 즐겨. 이따 지옥을 경험할 테니까.”

박종열은 양손을 입가에 대고 외치며 다소 짓궂게 말했다.

출발한 20분쯤 지났을 무렵, 잡담을 하던 아이들도 어느새 잠들며 버스가 고요해졌다.

임성은 잠시 감았던 눈을 금세 다시 떴다.

마치 시험 치기 직전처럼 약간의 흥분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도무지 진정이 안 되네.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영풍고 타자들이 잘 치는 코스와 구종을 중얼거리며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임성은 창문에 비치는 김희도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걸까?

“컨디션은 좀 어때?”

김희도가 마스크를 눈 바로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이제는 마스크가 그의 일부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평소랑 같습니다.”

“좋다는 뜻이네.”

임성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려다가 손을 내렸다. 만지는 거 싫어한댔는데, 또 실수할 뻔했네.

“오늘 선발 투수는 이수호고, 포수는 장용식일 가능 성이 커. 이수호는 우완에 결정구는 체인지업이야. 배트 근처에서 급격하게 꺾이거든. 이렇게.”

김희도는 손짓까지 섞어 가며 이것저것 설명하는 임성을 가만히 응시했다.

“왜?”

“아니요. 평소랑 좀 다른 것 같아서.”

“티 나냐? 오랜만에 실전 뛰니까 좀 긴장되네.”

김희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는 40분을 더 달려 영풍고 앞에 멈췄다. 자, 내리자. 코치의 말에 맞춰 커다란 가방을 멘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감독이 상대 학교 감독과 인사하는 사이 선수들은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선 영풍고 선수들이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보호구를 착용한 조예준이 다가와 기분은 어떤지 물었다.

“괜찮아.”

“오케이. 늘 하던 대로 합시다. 주장이야 워낙 잘하니까요.”

그래. 잘해야지. 희미하게 웃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아직 조금 쌀쌀한 바람이 콧속을 상쾌하게 스몄다. 후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미트를 향해 힘껏 공을 던졌다.

* * *

최종 스코어는 [선유고등학교 7 : 5 영풍고등학교]로 선유고의 승리였다. 이기긴 했지만, 수비에서 실책 두 개가 나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선발로 나섰던 임성은 총 3이닝 동안 1실점을 했다. 타 학교와 하는 건 오랜만이라 평소보다 팔에 힘이 들어가고, 스트라이크 존에서 많이 벗어났다. 생각할 게 많은 경기였다.

그리고 김희도는 2안타 3타점이라는 영양가 있는 플레이를 펼치며 팀 내 최고 득점을 올렸다. 저렇게 쉽게 치는데 저렇게 잘 친다고?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경기력이었다.

“오늘 실책 두 개나 나온 거 다들 알지? 돌아가서 반성회 한다. 각자 플레이하면서 느낀 점, 어떻게 고칠 건지 생각해. 나가지 않았던 애들은 만약 나갔더라면 어떤 플레이를 했을지 생각해 보고.”

코치가 짐짓 엄하게 말했지만, 다행히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침에 김희도에게 임성의 옆자리를 빼앗겼던 조예준은 일찌감치 버스에 올라타 임성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김희도는 이것 좀 보라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콧방귀를 뀌는 조예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빈 좌석에 앉았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어 학교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흙 범벅인 유니폼도 채 갈아입지 않고 감독, 코치 앞에 정렬해 오늘 경기에 관한 브리핑을 들었다.

“임성. 구속이 그것밖에 안 나와? 작년보다 더 줄었잖아. 리그 시작 전까지 무조건 구속 끌어 올려. 알겠어?”

“알겠습니다.”

내심 신경 쓰던 것을 지적받자 입맛이 썼다. 대체 뭐가 문젤까. 하다못해 재작년만큼이라도 나오면 좋을 텐데, 올라가긴커녕 떨어지면 어떡하냐.

“오늘 저녁 훈련은 자율로 돌린다. 정신머리 제대로 박힌 놈들이면 연습하겠지. 임성, 조예준. 애들 잘 챙겨.”

감독과 코치가 자리를 뜨자 아이들은 각자 흩어져 훈련을 시작했다. 오늘 시합에 나갔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상대 투수와 경기 내용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나 오늘 4타수 1안타 쳤어. 존나 자존심 상해.”

정의영은 공이 가득 담긴 카트를 피칭 기계 앞으로 끌고 갔다. 한 줄로 선 아이들이 피칭 머신 앞에 서서 공이 튀어나오는 타이밍에 배트를 휘둘렀다. 자율 훈련이라도 농땡이를 피우는 선수는 없었다. 특히, 3학년들은 더욱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다.

임성은 수건을 잡고 마치 공을 던지듯이 앞으로 훅 뻗었다.

가급적 어깨에 무리를 주지 않고 구속을 끌어 올릴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고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땀범벅이 될 때까지 수건을 휘두르다가 천천히 멈췄다.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탁 뱉어 내며 확인한 시간은 막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 인터뷰 떴다. 인터뷰.”

누군가가 말하자 너도나도 휴대폰을 꺼냈다. 포털 사이트 한구석에 며칠 전 인터뷰한 내용이 작게 떠 있었다. 3줄 남짓한 짧은 기사였지만, 학교 이름과 동영상까지 뜨자 아이들은 흥분해서 날뛰었다. 어찌나 호들갑을 떠는지 누가 보면 공중파 TV에라도 나온 줄 알겠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다가온 조예준이 호흡을 임성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주장은 실물이 훨씬 잘 생겼는데 이건 표정이 좀 경직됐네요.”

「이제 곧 시작하는 주말리그에서, 부원들과 열심히 하여 좋은 결과 보여 드리겠습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선유고등학교 야구부 주장. 임성(17)」

조금이 아니라 완전히 경직 제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전에도 몇 번 해 봤어도 여전히 인터뷰는 어색했고, 그 어색함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곧이어 부원들이 열 맞춰 운동장을 도는 모습과 배트를 허공에 휘두르는 장면 등이 나왔다. 밭에서 막 캔 감자처럼 투박한 아이들 틈에서 단연 눈에 띄는 존재가 한 명 있었으니.

“아니. 왜 얘만 그림체가 다르냐고. 짜증 나게.”

바로 김희도였다.

조예준이 액정 속의 김희도를 마구잡이로 찌르며 불만을 토했다. 조예준 말처럼 그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김희도. 여기 너 나왔다.”

마침 훈련장에 들어오는 남자를 불렀다. 그는 두 사람을 힐끔 보더니 별다른 대꾸 없이 구석으로 가 배트를 잡았다. 반갑게 불렀던 것이 무색한 반응이었다.

“저 새끼가 사람 말을 똥으로 아나. 이참에 버릇 좀 고쳐야겠어요.”

“그냥 연습하게 놔둬. 예준아, 여기 너 나왔다.”

당장에라도 달려가려는 조예준을 말리며 한 곳을 가리켰다. 어, 정말이네. 조예준은 동영상 속에 언뜻 지나가는 제 모습을 몇 번이나 돌려봤다.

“나 한 타임 더 한다.”

“또요?”

또라니. 아직 한참 부족한데. 더 해야지.

경악하는 조예준에게 웃어 보이며 다시 수건을 잡았다.

* * *

구석에서 벽을 향해 테니스공을 던지던 임성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시계는 어느새 5시 40분을 막 가리키고 있다.

조금만 쉬다가 다시 할까. 임성은 상의를 훌렁 벗어 양쪽을 잡고 비틀어 짰다. 땀을 어찌나 많이 흘렸는지 마치 물처럼 후두두 떨어졌다.

자율 훈련이고 뭐고 가장 먼저 집에 갈 것 같던 김희도는 여전히 구석에서 스윙 중이었다. 온몸에 힘을 실어 힘껏 친다는 느낌보다 가볍게 휘두르는 것에 가까웠다.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다가갔다.

“김희도. 너 공 얼마까지 칠 수 있냐?”

“얼마든지.”

“오.”

자만이라곤 한 톨도 섞이지 않은 담담한 대답에 감탄이 내뱉었다. 자신감은 모든 선수에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뭐, 김희도는 자신감이 아니라 실력에 가깝겠지만.

피칭 속도를 150km/h으로 맞추고 김희도를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못 하겠으면 말해. 낮춰 줄게.”

“누르기나 하죠.”

깡. 깡. 깡. 그는 자신의 말을 책임지기라도 하듯 휘두르는 족족 공을 맞혔다. 촘촘히 짜인 그물망은 쉬지 않고 연신 출렁댔다.

저 정도 실력이면 자신만만해할 만하지. 새삼 그의 실력에 감격한 임성은 저도 모르게 김희도를 와락 껴안았다. 따끈따끈 달아오른 품에 낮은 체온이 닿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양손을 번쩍 들며 물러섰다.

“아, 무심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평소라면 매몰차게 내쳤을 김희도에게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너무 열 받아서 할 말을 잃었나? 임성은 그답지 않게 눈치를 보며 김희도를 살폈다.

“너 왜 그래?”

김희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은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창백했고, 반듯한 이마를 뒤덮은 땀은 옆얼굴을 타고 연신 흘러내렸다.

“희도야.”

입을 꽉 다물고 있던 김희도는 임성이 양쪽 뺨을 누르자 짧고 거친 숨을 여러 번 토했다.

가슴이 빠르게 튀어 올랐다가 내려갈 때마다 점점 더 창백해졌다.

“입으로 숨 쉬어. 입으로. 너 지금 계속 들이마시기만 하잖아.”

임성이 큰소리를 치자 훈련을 하던 아이들이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우선 양호실부터 가자.”

김희도의 어깨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는 마치 뜨거운 불을 만진 아이처럼 깜짝 놀라며 몸을 물렸다. 순식간에 텅 빈 손을 보던 임성이 처음으로 얼굴을 굳혔다.

“나랑 닿는 거 싫은 건 알겠는데, 지금은 좀 참아라.”

임성은 억지로 김희도를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이번에는 내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정신조차 없어 보였다.

“조예준. 김희도랑 양호실에 갔다 올게.”

“예? 예. 다녀오세요.”

김희도의 어깨를 감싼 채 노을이 붉게 깔린 복도를 걸었다.

아무리 자신보다 작다 한들 거의 180cm에 가까운 남자라 어깨를 안다시피 하며 걸어야 했다. 마치 타이어를 허리에 묶고 운동장을 뛰는 것처럼 몸에 열이 올랐다.

“괜찮냐? 거의 다 왔으니까 조그만 참아.”

고개를 숙인 김희도를 연신 곁눈질하며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119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양호실로 가는 길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선생님! 여기 환자 있어요.”

임성은 양호실 문을 발로 열어젖히며 외쳤다. 그리고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대는 김희도를 침대에 앉혔다. 얼굴을 뒤덮은 땀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같은 게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괜찮아?”

김희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했다.

양호 선생님은 어딜 가셨지. 문이 열려 있는 걸 보면 퇴근한 것 같진 않은데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김희도의 상태는 더욱 나빠져 색색대던 숨은 훅훅 소리가 날 만큼 거칠어졌다. 혹시, 지병이라도 있는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김희도, 괜찮아? 어디가 아픈지 말해 봐. 구급차 부를까?”

김희도의 이마를 짚는 것과 동시에 맞닿은 육체가 크게 흔들렸다. 눈가와 뺨은 한여름에 핀 봉숭아를 빻은 것처럼 발그스름하고, 또렷하던 눈동자는 열에 들떠 흐렸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열기가 생각보다 더 뜨거워 당황스러웠다.

“상태가 심각한데.”

이마를 짚은 채 속삭이는 목소리에 김희도가 타액을 삼켰다. 꿀꺽. 목구멍에 솜을 구겨 넣은 것처럼 답답했다. 아니, 정정. 솜이 아니라 솜사탕이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솜사탕이 녹아내리며 단내가 퍼지는 느낌.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임성은 김희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굽혔던 허리를 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어.

“아무래도 안 되겠다. 구급차 부를, ……게. 음, 어?”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팔이 붙들렸다. 놀랄 정도로 뜨거운 손바닥이 땀이 남이 끈끈한 임성의 팔에 닿더니 다섯 개의 손가락이 옥죄듯 꽉 움켜쥐었다.

뭐지? 의문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휙 돌아갔다. 미처 방비할 새도 없는, 찰나였다.

“뭐야, 잠깐…… 김희도?”

어느새 자신은 양호실 침대에 누운 채였고, 김희도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목덜미에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콱. 단단한 것이 살갗을 파고들더니, 그대로 짓씹었다. 무슨 상황이야. 임성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의식중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제 목에 달라붙은 것을 떼어 내기 위해 나머지 팔을 뻗었다. 하지만 곧 깍지가 껴진 채 침대 위에 눌러졌다. 손바닥이 겹쳐지며 손가락 사이로 흰 손가락이 얽혔다.

“크흑!”

이번에야말로 살점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을 고통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얼굴에 열기가 번지며 이마와 뺨에 식은땀이 줄줄 맺혔다.

“너, 김희도 너 지금, 뭐하냐?”

김희도는 임성의 경악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의 목을 씹었다. 좀 전까지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악력이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퍼덕여 봐도 금세 제압됐다.

이 손으로 공 던지면 150km는 우습게 나오겠다. 이 와중에도 투수 하면 참 잘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윽, 야, 좀, 노……, 놔!”

임성이 무릎 끝으로 김희도의 복부를 강하게 찼다. 김희도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 그의 어깨를 밀치며 재빨리 빠져나왔다. 턱과 어깨로 이어지는 목 부근이 말 할 수 없이 욱신욱신댔다. 김희도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뜨겁고 물컹한 것이 묻어 나왔다. 뭔지 대충 짐작 갔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손바닥으로 상처를 꾹 누르며 뒤로 물러섰다.

비틀대던 김희도가 몸을 바로 했다. 힘 조절을 하지 않고 때려서 꽤 아플 텐데도 멀쩡해 보였…… 아니 취소, 전혀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야, 정신 차려.”

“……해 주세요.”

한참 만에 입을 연 김희도의 목소리는 상당히 이상했다. 손바닥으로 설탕 알갱이를 비비는 것처럼 묘하게 거칠면서도 그 설탕을 졸이고 졸인 것처럼 달착지근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방금 그가 한 말이었다.

해 줘? 대체 뭘? 궁금했으나 차마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말로 이상한 답이 돌아올 것 같아서.

두 사람은 마치 대치하듯 서서 서로를 응시했다. 수평이 완벽하게 맞춰진 저울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안 돼.”

“왜요?”

임성은 뭔지 모르면서 거절했다. 그랬더니 곧바로 의문 섞인 질문이 되돌아왔다.

“왜 안 되는지 말해봐요.”

“왜 안 되냐니…….”

임성이 머뭇거렸다. 그거야…….

김희도를 똑바로 보던 시선이 흔들린 것은 한순간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의 찰나. 하지만 김희도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고 마치 초식 동물을 사냥하는 맹수처럼 빠르게 움직여 임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임성은 문을 박차고 나가려 했지만, 김희도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다가온 손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손목을 붙잡고 벽으로 밀었다. 쿵. 뒤통수가 얼얼했다.

“어, 아아, 잠, 잠깐, 야, 야! 김희도!”

바짝 다가온 김희도가 뱉어 낸 숨이 뺨을 간지럽혔다. 그러니까 이런 게 이상하잖아. 평소에는 가까이 가려고만 하면 매몰차게 밀쳐 내면서.

임성이 어깨를 살짝 비틀며 벗어나려고 하자 김희도가 벽을 쾅 하고 짚었다. 금방이라도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아니면 귀찮게 했던 것에 대한 복수? 임성은 벽과 김희도 사이에 갇힌 채로 눈을 굴렸다.

눈 주변이 유난히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김희도는 좀 전과 다른 의미로 위태로워 보였다.

꿀꺽. 그의 목 한가운데 불거진 울대뼈가 크게 움직였다. 벽을 짚었던 팔이 안쪽으로 굽어지며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좀 전 그가 깨물었던 목이 파르르 떨렸다.

“김희도. 희도야.”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던 김희도가 멈칫했다.

“우선 진정하고. 혹시 무슨 일 있는 거면 얘기해 봐. 응?”

임성은 눈앞의 남자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요.”

김희도가 입을 달싹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덕분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쪽 냄새가 너무 좋아요.”

“뭐?”

다만, 이해를 못 했을 뿐.

김희도는 할 말을 잃은 임성을 꽉 끌어안았다. 평소 조금 낮다고 생각했던 김희도의 체온은 오늘따라 무척 높았다. 마치 온몸으로 열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임성은 그에게 끌어안긴 채 창 너머를 멍하니 응시했다. 느리게 넘어가던 해가 어느새 산등 끝에 걸려 하늘이 타는 듯 붉었다.

“야, 그게 무슨…….”

“가만히 있어요.”

김희도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나도 뭘 할지 모르겠으니까.

임성이 풀려난 건 그로부터 약 30분 가까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나마도 아쉬운 듯 김희도는 몇 번이나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선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떨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발끝이 맞닿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김희도.”

“……네.”

“나 지금 너무 당황스럽다. 설명 좀 해 주지 않을래?”

“…….”

김희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발갛게 번진 홍조를 가만히 보던 임성이 입을 열었다.

“오해라면 정말, 정말 미안한데, 너 혹시 나 좋아…….”

“아니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부정이 날아왔다. 무슨 헛소리야,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라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 표정이었다. 높은 확률로 예상했던 답변이라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아……, 으음,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애써 지어내지 않아도 괜찮아.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야.”

너무 곧바로 부정한 게 민망했는지 그답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임성이 허탈하게 웃자 김희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네 말은 지금…… 음?”

임성이 무심코 한 걸음 물러서자, 김희도가 딱 그만큼 따라왔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는지, 본인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임성은 굳이 그 사실을 꼬집지 않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냄새가 좋다는 게 무슨 소리야? 이해가 안 돼서. 너 나 보고 토했잖아.”

김희도가 부실에 들렸던 날, 입을 틀어막고 뛰쳐나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지금은 정반대란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모르겠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고.

“그때 내가 피한 건…… 그쪽 냄새, 그러니까 체취가 너무 자극적이라 그랬습니다.”

김희도는 임성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틀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평소와 다른 모습보다 내용이 더 충격적이었다.

“자극적?”

임성은 제가 들은 게 맞나 싶어 다시 물었다.

“내 후각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예민해요. 어렸을 때부터요.”

그는 여전히 고개를 비스듬히 내린 채 말했다.

김희도는 선천적으로 아주, 무척이나 예민한 후각을 갖고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 나는 특유의 냄새는 물론, 아침저녁 공기나 특정 공간, 날씨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거나, 혹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것도 무척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개중에서도 타인의 체취, 특히 후텁지근한 열기와 함께 훅 끼치는 땀 냄새는 참기 힘들 정도로 싫어했다.

문제는 김희도가 운동부에 속해 있다는 점이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야구도 땀이 많이 날 수밖에 없었는데, 김희도는 그걸 견디지 못했다.

만약 김희도가 활발했거나 하다못해 양해를 구할 줄 아는 성격이었다면 자신의 상황을 말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사회성은 바닥을 기었다. 무리가 그를 배척하기도 했고, 김희도 역시 섞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명심해라. 가족에게도 치부를 드러내선 안 된다. 아무도 믿어선 안 돼. 그 믿음이 네 머리를 겨누는 총이 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끊임없이 듣던 말이었다.

후각의 고통이 너무 크다 보니 야구 자체에 대한 흥미까지 떨어졌다. 아니, 처음부터 흥미가 있었는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야구부 스카웃 제의도 거부하고, 특기생이 아닌 일반 전형으로 선유고에 진학했고.

“……그러니까 날 보고 구역질을 했던 건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좋아서였다고? 내 따, 땀 냄새가? 만약 농담이면 지금 말해.”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임성이 말을 더듬었다. 김희도 또한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래. 우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여전히 이해가 안 됐지만, 김희도가 이 상황에서 굳이 거짓말을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전 실제로 눈 돌아간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바닥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겼던 임성은 뭔가를 떠올리고선 고개를 휙 들었다. 시선을 받은 김희도가 살짝 멈칫했다.

“혹시 중학교 때 부원들이랑 서먹했던 것도 그 이유야?”

“딱히 서먹서먹하진 않았습니다. 말을 안 했을 뿐이지.”

항간에선 그걸 서먹하다고 하는 거야. 목 끝까지 치민 말을 삼켰다.

“첫날 애들이랑 싸운 것도 냄새 때문이고?”

“예.”

그제야 김희도의 행동과 상황이 아주 어렴풋이 이해됐다. 물론 그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가뜩이나 냄새에 예민한데 땀으로 범벅된 사내놈들이 득실득실했으니 싫었겠지.

“나는 왜 괜찮은데?”

김희도의 사정을 듣고 나니 문득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다. 타인의 체취는 불쾌하다면서 자신은 어째서 괜찮은지. 대체 뭐 때문에?

“모르겠습니다.”

김희도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이유를 알았다면 고쳤겠지. 운동하는 애 후각이 예민하면 여러 가지로 불편할 테니까.”

임성은 수긍하듯 말하며 제 목을 더듬었다. 울퉁불퉁한 살점이 손끝에 닿자, 욱신대는 통증과 함께 묘한 소름이 돋았다.

참 야무지게도 씹어 놨다. 아무래 그래도 보통 이렇게까지 하나. 아니야, 쟤도 경황이 없었겠지.

“일부러 이런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이해하는데 네가 봐도 이건 좀 심하지 않냐?”

“……죄송합니다.”

“미안하지? 너 힘 되게 세더라.”

임성은 좀 전 김희도에게 제압당했던 것을 떠올리며 웃었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해도 꼼짝없이 당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은근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오늘부터 근력 운동 더 빡세게 해야지. 팔굽혀펴기랑 바벨도 추가해야겠어. 속으로 훈련 메뉴를 생각하며 손을 내렸다.

굳은살이 박인 손엔 피가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피범벅은 아니지만, 이대로 나가면 이상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크니 밴드라도 붙여야겠다. 목에 붙일 것을 찾을 요량으로 일어서자 김희도가 움찔하며 따라 일어섰다.

“두통약이라도 줄까?”

“아닙니다.”

엉거주춤 일어섰던 김희도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앉았다. 어깨를 으쓱한 임성은 양호 선생 자리로 향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다치는 애들이 많아서일까, 잘 보이는 곳에 반창고 상자가 떡하니 있었다.

임성은 접착테이프의 반을 뜯어내며 상처를 곁눈질했다. 하필이면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근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으음. 거울 보고 붙여야지.

“헉.”

밴드를 들고 별생각 없이 몸을 틀었던 임성은 바로 앞에 선 김희도를 보고 숨을 덜컥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던 남자가 어느새 눈앞까지 와 있었다. 자칫했으면 부딪혔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김희도는 흠칫하며 물러서는 임성을 가만히 쳐다봤다. 풀어졌다고 생각한 긴장감 섞인 침묵이 다시 흘렀다.

“…….”

“…….”

또렷한 시선이 임성의 목에 난 상처로 향했다. 깨끗하던 살갗에 잇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고, 그 주변은 발갛게 부어올랐다. 자신이 했다는 걸 알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따악. 임성은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오므리고 김희도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딱밤이었다.

난데없이 딱밤을 맞은 김희도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 상황이 못내 당황스러운 듯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안에 갇힌 숨결이 뜨거웠다.

“지금 네 눈깔 완전 맛 갔거든. 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고 정신을 못 차리냐?”

스스로 타인과의 접촉은 극도로 거부하고, 냄새에 민감하다는 김희도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구는 이유를 모르겠다.

임성은 팔을 들어 코를 킁킁대 봤지만, 그때도 지금도 땀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반창고 이리 주세요.”

“응?”

“안 보이잖아요. 상처. 제가 붙일게요.”

“아, 그럴래? 고맙다.”

단순히 반창고 붙여 주려던 걸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였나? 임성은 담담한 김희도의 반응에 다소 멋쩍어하며 손에 든 것을 건넸다.

미간을 찌푸린 김희도는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반창고를 붙였다. 몇 번이고 빨리고 물려 잔뜩 예민해진 살갗에 접착 면이 닿자 목이 움츠러들었다. 김희도의 시선이 파드득 떨리는 목에 지그시 달라붙었다.

“어으. 다 됐냐?”

“다 됐습니다.”

“고맙다. 고맙긴 한데…….”

임성은 목덜미에 붙은 반창고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김희도의 뺨이 옅게 떨렸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

본인이 생각해도 심했다는 걸 아는지 김희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좀 더 밀어붙여도 될까?

“고의성이 없었다는 건 알지만, 이쪽도 피해가 막심해서 말이지.”

“변상하겠습니다. 얼마면 됩니까?”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얼마 줄 수 있는데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해?”

“원하는 만큼.”

그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한 임성이 피식 웃었다. 진지한 얼굴로 저렇게 말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거참 드라마 주인공 같은 대사네. 변상은 됐고, 언제 몸 한번 만지게 해 주라. 몸과 몸의 교환. 공평하지 않냐?”

내용만 놓고 보면 상당히 묘했지만,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몸을 확인하겠단 건 말 그대로 근육 상태를 보겠다는 뜻이었으니까.

본인 입으로 말했듯 김희도는 타인이 제 몸에 손대는 걸 극도로 꺼렸다. 양민성과 마찰이 있었다는 것도 아니까 더욱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저 체격에서 그런 파워가 어떻게 나오는지 항상 궁금했다. 근육을 만진다고 모든 걸 알 순 없지만, 대 근육이 어느 쪽에 자리 잡았는지, 소 근육의 발달 정도를 확인하는 건 상당히 도움 될 것이다.

“예.”

탐탁지 않아 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김희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협상 끝. 애들 기다리겠다. 그만 돌아가자.”

한껏 떨어진 노을로 발갛던 복도는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쯤 얼추 훈련이 끝났겠다. 몇 명은 이미 집에 갔을지도 모르지.

“안 가?”

조예준이 3학년들을 통제할 순 없을 테니, 난리 났겠다. 걱정하며 양호실을 나가는데, 따라 나오는 기척이 없었다. 문틀을 잡은 채로 돌아보자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김희도가 보였다. 그는 반창고 껍데기를 들고 바닥을 보다가 제 이름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묘한 흥분으로 번들대던 눈동자는 바람이 불지 않는 파도처럼 잠잠했고, 손대면 발갛게 묻어날 것 같던 얼굴 역시 안정을 되찾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기분 안 나빠요?”

“뭐?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 줄래?”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에 임성이 되물었다. 뭔가 질문하는 것 같긴 한데 내용을 모르겠다.

“아니요.”

김희도는 고개를 천천히 젓고선 임성을 스쳐 지나갔다.

* * *

“주장. 훈련 마무리……, 뭐예요. 왜 그래요?”

감독, 코치도 없겠다, 분위기 브레이커인 김희도와 평소엔 물렁하게 굴어도 훈련할 때는 자비 없는 임성까지 자리를 비우자 애들은 완전히 신났다.

부주장인 조예준이 진정시키려 해도 박종열이 뜀틀에 올라가서 “이쯤 했으면 훈련 다 한 거지. 그만 때려치우고 놀자. 이런 날도 있어야지!” 하고 외쳤고, 아이들은 양손을 번쩍 드는 걸로 화답을 했다. 당연히 훈련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우르르 운동장으로 뛰어가 족구를 하며 놀던 야구부 애들은 저 멀리서 걸어오는 임성을 발견하고 갑자기 훈련하는 척을 했다.

완전 범죄를 꿈꾸며 누가 봐도 어색한 알리바이를 만들던 아이들은 가까이 온 임성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예준은 개중 가장 먼저 튀어나와 임성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목은 왜 그래요? 싸웠어요?”

“싸우긴 뭘 싸워. 안 싸웠어.”

임성은 반사적으로 반창고가 붙은 제 목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분명 김희도 양호실에 데려…… 잠깐만. 야, 김희도. 설마 네가 저랬냐? 어?”

걱정이 가득하던 눈동자에 점점 험악한 빛이 번졌다. 함께 나갔던 두 사람 중, 한 명의 상태가 엉망이 돼서 돌아왔다. 누가 범인인지 모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희도가 입을 열지 않자 조예준이 주먹을 꽉 쥐고 한 발짝 다가섰다.

“네가 저렇게 만들었냐고 묻잖아. 귓구멍 막혔냐?”

이 새끼가 꿀이라도 처먹었나, 왜 말을 안 해? 김희도가 싸가지가 있든 말든 상관없지만, 주장을 상대로 하극상을 일으키면 얘기가 달라졌다.

뭐야.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신입생들이 웅성웅성 한곳으로 모였고, 선배들은 한 걸음 떨어져서 이 상황을 관전했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흥미진진한 게, 딱 봐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야, 예준아. 진정해. 김희도는 아무 잘못 없어. 그리고 내 상태가 왜? 완전 멀쩡하잖아.”

이러다 정말 주먹다짐이라도 할까 봐 둘 사이로 급하게 끼어들었다. 조예준의 표정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멀쩡…… 거울 안 봤어요? 지금 그 꼴을 보고 멀쩡하단 얘기가 나와요?”

김희도 앞을 막아선 것도 모자라 두둔까지 하는 임성을 보며 조예준이 분통을 터트렸다. 생각보다 과격한 반응에 주춤했던 것도 잠시, 임성이 가볍게 웃었다.

“뭐, 별다를 게 있겠냐. 훈련하다가 다치는 거 흔하잖아.”

“야. 내가 봐도 심각하다. 특히 여기.”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 하고 씩씩대는 조예준을 대신해 정의영이 나섰다. 그는 멀찍이 서서 임성이 다친 부분과 똑같은 위치의 제 목을 두드렸다.

“다 안 가려졌어. 뭐하면 그런 자국이 남냐?”

아. 반창고 하나 더 붙일 걸 그랬나? 무심코 목을 더듬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별일 아니니까 다들 걱정 안 해도 돼. 조예준, 너도 흥분 좀 가라앉혀라.”

“그 꼴을 하고도 별일이 아니라고요? 둘이 짰어요?”

제 말이라면 무조건 긍정하며 받아들이던 조예준이 드물게 화를 냈다. 그 마음이 이해 가기도 하고, 또 민망해 조예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팔을 들어 올리자 목 부근에 난 상처가 욱신거렸다. 이쯤 되니 김희도가 어떻게 깨물어 놨는지 궁금해졌다.

“이번엔 진짜 신경 쓸 일 아니야. 김희도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다.”

그렇지? 얼른 그렇다고 말해. 무언의 동조를 구하며 김희도를 곁눈질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입을 다무는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예준이나 김희도나 쉽지 않았다. 이럴 땐 역시.

임성은 박종열에게 뭐라도 좀 해 보라며 눈짓을 했다. 김희도와 다르게 단번에 알아들은 박종열은 손뼉을 짝 치며 이목을 돌렸다.

“자, 다들 잘 놀았지? 슬슬 정리하자. 지금부터 후딱 하면 금방 집에 갈 수 있다.”

부원들은 여전히 대치 중인 세 사람을 힐끔 보고선 바닥에 떨어진 공을 줍기 시작했다.

박종열에게 눈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상황이 대충 정리되자 임성은 김희도와 조예준을 양쪽에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도 정리 해야지.”

조예준은 이런 식의 어깨동무가 익숙한 듯했고, 김희도는 순간 움찔했지만 제 어깨에 닿은 손을 쳐내진 않았다.

“주장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이번엔 그냥 넘어갈게요. 하지만 다음에는 절대 안 돼요.”

입술을 뚱하니 내민 조예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김희도. 너 내가 주시하고 있으니까 조심해라.”

김희도는 당연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어깨에 일방적으로 걸쳐진 손을 힐끔 쳐다봤을 뿐.

“어디 계속 그따위로 굴어 봐.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그사이에 낀 임성은 반쯤 포기한 채로 한숨을 내쉬듯 웃음을 내뱉었다.

임성은 함께 하교하던 조예준에게 “한 사람의 냄새만 특별하게 느낄 수 있을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 집에 가서 어떤 야식을 먹을지 고민하던 조예준이 고개를 갸웃대더니 좋아하는 사람 생겼냐고 물었다.

“내가 연애할 시간이 어딨냐? 운동 시간도 모자란데. 그냥…… 후각이 예민해서 모든 냄새가 싫은데 한 사람의 체취만 좋은 거.”

조예준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새로 나온 드라마예요? 아니면 웹툰? 제목이 뭔데요.”

드라마, 웹툰. 그렇지. 보통 저렇게 생각하겠지. 저 역시 직접 겪지 않았다면 조예준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드라마나 웹툰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김희도와 자신 사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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