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형. 오늘 우승했다며? 기사 난 거 봤어. 축하…… 형?”
임성은 저를 반기는 동생들을 그대로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극적으로 우승한 사람답지 않게 반쯤 넋이 나간 모습에 쌍둥이 1, 2는 서로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방에 불도 켜지 않고 터덜터덜 들어간 임성은 그대로 쓰러지듯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야구장에서 집까지 어떤 정신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우승했다는 희열보다 김희도의 고백이 충격적이었다.
‘좋아해요.’
“헐. 미쳤어.”
머리를 감싸 쥐고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야구를 시작한 이후 임성의 첫 번째는 줄곧 야구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야구부를 이끄는 동시에 공부도 놓지 않아야 했다.
당시 다니던 중학교는 남중이었는데, 다른 학교 여자들에게 종종 고백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올라와선 대놓고 연락처를 요구하는 등의 호감을 표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모두 여자들이었다. 아니, 성별을 떠나서 김희도가 누군가를, 특히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모르겠네.”
갑작스러운 고백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김희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만 굴리는 자신을 가만히 보다가 한발 물러섰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팽창했던 공기가 누그러들었다.
‘숨은 선배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임성은 제가 숨을 멈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쁘게 뱉어 낸 호흡에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네요.’
오히려 예상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죠. 집에 가요. 데려다줄게요.’
김희도는 임성의 가방을 제 어깨에 두르며 문을 향해 턱짓했다. 열렬한 고백을 보내던 게 언제였냐는 듯 평소처럼 눈매가 곧고 무심했다.
‘내일 봐요.’
김희도는 구장에서부터 넋이 나간 임성을 현관 앞까지 데려다주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게 조금 전 일이었다.
“아. 아아.”
한참이나 머리를 싸매고 있던 임성이 천장을 보고 누웠다. 홍조가 발갛게 피어 있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음.”
깊게 가라앉았던 의식이 훅 떠올랐다. 임성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폰을 집었다. 으음, 대체 언제 잤지. 지금 몇 시야. 아, 저녁 8시 40분. 생각보다 오래 잤네. 눈을 비비며 액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던 사이, 꽤 많은 연락이 와 있었다.
「우승 축하해. 그동안 고생 많았다!!」 「후배가 완투했는데 선배로서 질 수 없지ㅋㅋㅋㅋ」 「드디어 우리 학교가 우승했네. 프로에서 보자.」 「최강 선유고ㅋㅋㅋㅋ」등 리틀 시절 동기부터 졸업한 선배들까지 다양했다.
선유고 야구부 단톡방도 300+이었고, 지금도 끊임없이 울리는 중이었다. 화면을 쭉 내리던 임성은 김희도의 이름에서 멈칫했다. 열어 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눌렀다.
-김희도: 지금 집 앞이에요. 잠시 나와요.
-김희도: 선배.
메신저를 보낸 시각이 7시 30분이었다. 지금은 8시 40분, 아니 막 41분이 됐고.
임성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모처럼 거실에 다 모여 있던 쌍둥이들이 헐레벌떡 뛰어가는 그를 불렀다.
“형. 어디 가. 저녁은?”
“치킨 시켜 먹어. 피자도 괜찮고.”
대충 대답하며 눈에 보이는 아무 신발이나 구겨 신었다.
1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기다리진 않겠지? 하필이면 타이밍이…… 꼭 일부러 피한 것 같잖아.
문을 열자마자 조금 습하고 진득한 여름 특유의 공기가 훅 끼쳤다. 임성은 김희도에게 전화를 걸며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김희도입니다.]
“미안. 잔다고 지금 봤다. 어디야?”
[집이요.]
“집? 알았어.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아니요. 안 와도 돼요.”
선명한 목소리와 함께 휴대폰을 든 김희도가 가로등 밑에서 걸어 나왔다. 정신없이 뛰어가던 임성은 그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쟤가 왜 여기에 있어.
“집이라며.”
“우리 집이란 말은 안 했는데.”
“한 시간 전에 연락했으니까 당연히 돌아갔다고 생각했지.”
“그럴까 했는데,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요. 그나저나 옷 안 갈아입었네요. 좋은 냄새 난다.”
한 발짝 다가온 김희도가 고개를 살짝 숙여 목과 어깨 근처에서 숨을 들이켰다.
그의 지적을 받은 후에야 아직 유니폼 차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흙이며 송진 가루가 여기저기 묻어 지저분한 자신과 다르게 김희도는 흰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이었다.
잘생긴 얼굴 때문인가, 셔츠와 바지라는 단순한 차림도 태가 났다. 괜히 비교되는 것 같아 바지에 더덕더덕 묻은 흰 가루를 빠르게 털어 냈다. 머릿속은 김희도가 집까지 찾아온 이유를 찾느라 바빴다.
“아까 낮에 한 말이요.”
유니폼을 털던 손이 멈췄다. 역시 그것 때문에 왔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농담이 아닐까? 깜짝카메라 같은 걸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내가 농담하는 거 봤습니까?”
임성은 여태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긴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의 반응도 대체로 그랬다. 어쩜 그렇게 침착하냐, 역시 주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셀 수도 없었다. 하지만 김희도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속내를 잘 들켰다. 처음부터 쭉.
“희도야.”
굳이 집 앞까지 찾아왔다는 건 자신의 대답을 듣고 싶어서겠지. 만약 김희도가 진심이라면 저 역시 진심으로 답해야 했다. 그게 무엇이든.
갈피를 잡지 못한 시선이 그의 신발 끝 즈음에 닿았다. 마음만큼이나 목구멍이 깔깔했다.
“희도야. 나는…….”
“지금까지 나 갖고 놀았어요?”
“뭐? 갖, 갖고 놀아? 내가 널? 야, 헐,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바짝 마른 입술을 어렵사리 떼어 냈던 임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함했다.
갖고 놀다니, 내가 김희도를?
“아니에요?”
“아니야. 절대 그런 적 없어!”
너무 놀라서 제가 하려던 말까지 잊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난 시합에 이기기 위해 필요했던 것뿐이잖아요. 아, 대회 끝났으니까 이젠 그것도 안 되나?”
그는 눈을 살짝 내려 뜨고 시선을 바닥에 둔 채 중얼거렸다. 노란 가로등 아래 드러난 얼굴은 놀랍게도 청초한 울적함으로 가득했다.
김희도가 울적해한다고?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일이라 더욱 당황스러웠다. 임성은 우선 그의 오해부터 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너랑 같이 야구 하고 싶었어. 나한테서 홈런 두 방이나 뽑아낸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고…….”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요?”
“아니. 전혀.”
전혀. 조금도 모르겠다.
“그렇죠? 그러니까 생각 좀 해 보세요. 대답은 그때 들을 테니까요.”
어느새 고개를 든 김희도가 임성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울함이 깃들었다고 생각했던 눈동자엔 날카로운 이채가 돌았다. 임성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주강고등학교와 선유고등학교가 맞붙은 대통령배 결승전 시청률은 0.97%를 기록했다. 이전 고교야구 최고 시청률인 0.4%에 비해 무려 두 배 가까이 상승한 수치였다. KBO리그 평균 시청률이 0.8% 언저리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게 나온 것이었다.
한호찬 감독이 경질되며 선수들로만 출전한 선유고에게 관심이 쏠렸다. 준결승, 결승전이 전국 대회 단골 우승 학교들이라 더 이목이 집중됐다. 심지어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역전 투런을 뽑아내다니. 드라마도 그렇게 극적이진 않을 거라는 말이 많았다.
팬들의 관심을 반영하듯 <그깟 공놀이!>에서도 대통령배 결승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 오가고 있었다.
<그깟 공놀이! 자유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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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BS 샤크스:: 어제 대통령배 본 사람? (댓글 10)
9회 말 투런ㄷㄷㄷ 웬만한 크보 경기보다 재밌었음ㅋㅋㅋㅋㅋㅋ
(댓글)
1.야구공: 222존잼ㅋㅋㅋㅋㅋㅋ
2.야구공: 뭔가 고딩들한테만 느껴지는 에너지가 있어
↳ 3.야구공: 그니까ㅋㅋ 우리 팀에선 전혀 볼 수 없는;;
↳ 8.야구공: 투수 둘 다 괜찮던데. 둘 중 한 명은 HR 1차 아니야?
↳ 6.야구공: ㅇㅇ우리 팀 갓차. 치연아 기다린다,,,,,
4.야구공: 애들 승부욕 오짐ㅋㅋㅋㅋㅋㅋ 귀엽더라
5.야구공: 선유고가 H감독 학교?
↳ 9.야구공: ㅇㅇ 감독 빤스런
7.야구공: 투런 친 애 존잘
↳ 9.야구공: 그 학교 투수도 훈훈하던뎅
↳ 10.야구공: ㅋㅋㅋ둘 다 아이돌 같음
[잡담] 이솔 페어리즈:: 우리 팀에서 임성 뽑을 수 있나? (댓글 16)
1라에서 나가려나? 잘생긴 좌완 갖고 싶다ㅋㅋㅋㅋㅋ
(댓글)
1.야구공: 이번에 잘 던지긴 했지만 폼이 무너졌었음. 청대에서도 별로였고;;
↳2.야구공: 진짜? 고교리그 안 봐서 몰랐어.
↳1.야구공: 이어서. 원래 고교리그 관심 있어서 좀 아는데 2학년 땐 나름 포텐ㅇㅇ
4.아구공: 좌완 급한 팀이 데려가겠지
↳6.야구공: 야 우리 팀 개급해
↳8.야구공: ??우리 팀이 더 급함. 선발 좌완 1명이 말이 됨?
↳10.야구공: 엠퍼러즈 팬?ㅋㅋㅋㅋ 씨발 우리팀ㅠㅠㅠㅠㅠ 살려줘..
↳15.야구공: 바이킹즈 팬이네
5.야구공: 솔직히 1라는 오바고 3~5라 안에는 나갈 듯. 내 생각임ㅋㅋㅋ
7.야구공: 우리 팀 왔으면222
↳13. 야구공: 33333333
9.야구공: 잘생긴데다 좌완이라 탐남. 잘생긴 좌완ㅋㅋㅋ
↳14.야구공: 잘생겼다는 말 존나 강조ㅋㅋㅋㅋㅋㅋㅋㅋㅋ
11.야구공: 이름이 임성임? 임이 성이고 이름이 성?
↳12.야구공:ㅇㅇㅇㅇ임성. 외자
“주장, 기사 엄청 떴어요. 이것 좀 보세요.”
우승하고 바로 다음 날, 여전히 들뜬 야구부원들은 교복 대신 유니폼을 입고 당당하게 등장했다. 야구부 전용 스포츠 백에 모자까지 야무지게 쓰고 부실에 옹기종기 모여 포털 기사를 검색했다.
고교야구치고 꽤 많은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개중 절반이 H감독 얘기였고, 나머지는 호투를 펼친 임성과 결승 홈런을 친 김희도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김희도의 사진은 프로 선수 뺨치게 많았다.
“우리 동생이 너랑 김희도 얘기하더라. 둘 다 다른 느낌으로 잘생겼다나 뭐라나. 야구 시합하는데 얼굴 얘기가 왜 나오냐고.”
“희도 덕분에 나도 꼽사리로 칭찬 들었네.”
임성이 창문을 열며 장난스럽게 웃자 박종열과 정의영이 눈빛을 교환하다가 동시에 “와, 미친놈. 존나 재수 없어.” 하고 분개했다. 난데없이 쌍욕을 얻어먹은 임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장. 지금 건 주장이 잘못했어요. 우리 누나도 주장 더 멋있어졌대요. 동생이 안타 친 건 안중에도 없더라니까요.”
조예준의 임성의 어깨를 짚으며 혀를 쯧 찼다. 아무리 주장이라도 방금 발언은 감싸기 힘들었다. 더 심각한 건 겸손이 아니라 진짜 꼽사리 꼈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이래서 얼굴에 간절함이 없는 사람들은 안 된다니까. 귀한 줄 모르잖아.
“야, 야. 우리 누나도. 야구 룰도 잘 모르면서 갑자기 공 던진 애랑 홈런 친 애 누구냐고 묻더라. 나 참. 어이없어서.”
조예준은 혀를 차며 얘기하자 정의영이 이때다 싶어 냉큼 끼어들었다. 두 사람은 곧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역시 인간은 껍데기가 최고라는 둥의 얘기를 했고, 주변에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감독 사건 이후 대놓고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여느 때보다 활기찼다.
김희도는 다른 사람의 얘기는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한쪽 턱을 괸 채 임성을 쳐다봤다. 바로 옆에 앉은 터라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도무지 착각이라고 할 수 없는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
모른 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반응하기엔 더더욱 곤란해 김희도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부실에서 간단한 미팅 후 교실로 돌아갔더니, 보충 수업을 하러 온 아이들이 임성을 둘러싸고 어제 경기에 관한 질문을 퍼부었다. 평소엔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던 아이들도 오늘은 친근하게 굴었다. 끝도 없는 칭찬 사례에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그렇게 오전 보충이 끝나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임성은 오랜만에 야구부 벤치로 향했다.
김희도는 왔을까. 아침에 시선 피한 거 눈치챘겠지? 아, 어색해지는 건 진짜 싫은데. 어떻게 해야 지금 사이를 유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려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벤치에 다다랐다.
녹음이 푸르게 우거지고 새파란 이파리들 사이로 햇볕이 소낙비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그 빛을 온전히 맞고 있는 둥근 뒤통수가 보였다.
“왔네?”
먼저 앉아 있던 김희도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임성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살짝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배야말로. 안 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는 옆으로 살짝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빵 먹고 있을 것 같다는 예상 그대로구만.”
임성은 옆에 놓인 샌드위치를 웃으며 가리켰다.
“뭐, 오늘은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난 음료수는 샀다.”
자, 이건 네 몫. 임성은 봉지를 뒤적여 바나나 우유를 꺼냈다. 빨대를 꽂아 김희도에게 내밀자 두 손으로 얌전히 받았다.
“…….”
커다란 손은 바나나 우유 몸통을 넉넉히 감싸고 임성의 손가락까지 닿았다. 유난히 무더운 공기 속에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낮은 체온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했다.
임성은 순간 숨을 죽였고, 김희도는 언제 손이 닿았냐는 듯 우유를 가져갔다.
“잘 마실게요.”
“아, 어.”
그냥 스친 건가, 깜짝 놀랐네.
임성은 손가락을 긁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허둥지둥 빵 봉지를 뜯었다.
어색할지도 모른다는 예상, 혹은 걱정과 다르게 분위기는 평소와 비슷했다. 그러니까 평소처럼 편하고 재미있다는 뜻이었다.
“3학년은 언제까지 나와요?”
“우리? 드래프트 끝나기 전까진 평소처럼 훈련해야지. 그 후에 어떻게 할지는 각자 선택하는 거고.”
공식적인 대회가 끝났으니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드래프트를 기다리며 꾸준히 훈련하는 수밖에.
“오늘 방과 후에 시간 비워 놨죠?”
고개를 끄덕인 김희도가 다시금 물었다.
“방과 후? 무슨 일 있었나?”
되묻는 말에 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하, 하고 숨을 내쉬더니 반쯤 남은 우유를 내려놨다.
“지금 나랑 장난해요?”
김희도가 눈썹을 가린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가 금세 뒤덮였다. 기다란 손끝을 보던 임성은 김희도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움찔했다.
“어깨 그냥 둘 겁니까? 병원 안 가요?”
“아…… 맞다.”
“아, 맞다?”
김희도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임성의 말을 따라 했다. 제가 뱉어 낸 것과 똑같은 문장인데 말투와 어감이 다르니 아예 다른 말처럼 들렸다.
임성은 오랜만에 혼나는 기분을 느끼며 이마를 머쓱하게 긁적였다. 몸이 재산인 운동선수가 아픈 걸 잊고 있다니, 당연히 혼나고도 남았다. 하지만 어제 일이 워낙 충격이었어야지.
“진짜 손 많이 가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희도가 바나나 우유를 쪽 빨며 말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남은 자율 학습도 끝난 시간, 임성은 매점에 가자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조예준과 박종열에게 일이 생겨 오늘 훈련에 불참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병원에 간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목적을 달성하고도 휴대폰을 집어넣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김희도에게도 보낼까? 손가락을 위로 움직여 김희도 이름 앞에 멈췄다. 그의 프로필은 태초 상태 그대로 눈, 코, 입 없는 파란 사람 형체였다.
나 오늘…… 까지 썼다가 지우고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훈련을 통으로 빠지는 건 지난가을에 부상을 입은 후 처음이었다.
애들 훈련은 제대로 하겠지? 새로운 감독과 코치가 얼른 부임해야 정상적으로 돌아갈 텐데.
아마도 신나게 놀고 있을 부원들을 떠올리며 뒷문으로 나가던 임성은 복도에 비스듬히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을 얼떨떨하게 불렀다.
“김희도.”
그동안 제가 김희도 반을 찾아간 적은 많았어도 그가 온 건 처음이었다. 또래 틈에서도 이질적이던 남자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잠깐 머리를 식히러, 화장실에 가러, 옆 반 친구를 보러. 등 여러 이유로 복도에 있던 아이들은 김희도를 연신 곁눈질했다.
“부실에 안 가고 뭐 해? 곧 오후 훈련 시작할 시간이잖아.”
“내가 거길 왜 가요.”
“왜 가냐니. 야구 선수가 야구부에 안 가면 어딜 가게.”
“우선순위의 문제죠. 따라오세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김희도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임성은 멈췄던 다리를 움직여 그의 뒤를 쫓았다.
교문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뒤로 하나둘, 하나둘 목청을 높이며 운동장을 뛰는 야구부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작하는 시늉은 하는구나.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이 주소로 가 주세요.”
지나가는 택시를 잡은 김희도는 다짜고짜 임성을 안으로 밀어 넣고 옆자리에 올라탔다. 어디 가느냐는 물음에 대답 대신 어깨를 붙여 가까이 앉았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달리는 택시 안에서 내릴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임성은 김희도에게 목적지를 세 번쯤 더 묻다가 포기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행히 퇴근 시간과 맞물리지 않아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어디 가는지 몰랐기에 맞게 도착했는지도 의문이었다.
“내려요.”
김희도가 택시 문을 열고 턱짓했다. 묘한 박력에 임성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차에서 내렸다.
A대학교 종합 병원.
김희도는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더니 양쪽 귀에 걸고서 콧등까지 끌어 올렸다. 자신과 있을 땐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에 의아해하다가 불현듯 어깨를 짚었다.
“너 어디 아프냐? 어제 이치연 공에 맞은 거 때문이지?”
아무래도 생각해도 이치연 그 새끼를 가만히 둬선 안 됐다.
“선배.”
당장 뛰어나가려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김희도가 몸을 틀어 임성과 마주 보고 섰다. 눈만 드러나서인지, 자연스럽게 시선이 마주쳤다.
“좋아해요.”
“어?”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갑작스러운 고백은 임성을 바보로 만들기 충분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어, 어. 소리만 내뱉을 뿐이었으니까.
김희도는 달뜬 고백을 한 사람답지 않게 몸을 휙 돌리더니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임성이 손으로 눈을 덮고 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뜨거운지 손바닥이 뜨거운지 모를 정도로 열이 올랐다. 문득 지금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와, 미치겠네.”
혹시 어깨 부상은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 이상 없었다. 물론 완벽하게 건강한 건 아니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누적된 피로에 의한 단순 근육통이라는 것이 의사 소견이었다. 당분간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푹 쉬라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이에요. 다시 한 번만 더 참고 경기 뛰어 봐요.”
진짜 가만 안 둘 거예요. 의사를 대신해 혼낸 건 김희도였다. 미간 찌푸린 채 경고를 하듯 말하는 김희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니까. 그나저나 의사 선생님이랑은 아는 사이야?”
늘 붐비는 대학 병원 진료는 김희도 덕분에 기다림 없이 곧장 진료를 볼 수 있었다. 비록 구내식당에서 밥 먹다가 끌려온 의사 선생님의 표정은 똥 씹은 것 같았지만.
“할아버지 주치의예요. 별로 신경 안 써도 되는 사람입니다. 그냥 무시해요.”
먼저 말을 꺼낸 것도,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병원까지 함께 와 준 것도 모두 그의 배려라는 걸 알았다.
“고맙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네 덕분이야.”
“좋아하는 사람 일이니까요.”
“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던 임성은 고장 난 로봇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정작 고백한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갈 길을 가는데, 고백을 받은 사람이 시뻘게진 채 땀을 뻘뻘 흘리는 묘한 상황이 이어졌다.
“선배. 지금 선배 표정이 어떤 줄 알아요?”
계단을 내려가던 김희도가 불시에 뒤를 돌았다. 그는 임성을 가만히 올려보다가 계단 서너 개를 한 번에 밟고 올라와 마주 보고 섰다. 김희도의 눈매가 꼭 웃는 것처럼 가늘게 휘어졌다.
내 표정이 어떤데? 차마 묻지 못하고 버석한 입술을 겨우 떼어 냈다.
“아…… 나는.”
열기가 실린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간지러움이 일었다. 쿵, 쿵, 쿵. 귓속에서 북이 울리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숨을 들이마시고 뱉는 행위마저 은밀하게 느껴졌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임성은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가죠.”
한동안 임성을 빤히 보던 김희도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임성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목구멍을 꽉 메운 숨을 뱉어냈다. 어느새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어디 가게?”
“밥 먹으러. 슬슬 배고플 시간이잖아요.”
생각보다 오래 진료를 받았는지 저녁 7시가 훌쩍 넘었다. 야구부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다시 훈련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 훈련 중이냐? 애들 통제 안 되면 단체는 패스하고 자율 훈련으로 돌려.
조예준에게 문자를 보내고 어느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김희도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니까 김희도와 어깨높이가 거의 일직선이었다.
17살 때 자신의 키가 얼마였더라. 180cm에서 아주 조금 모자라 다리를 늘린답시고 맨날 스트레칭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이 182cm 정도니까 김희도도 비슷하겠네.
“다 왔어요.”
김희도는 병원과 한 블록 하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기껏해야 분식집이나 평범한 음식점을 생각했던 임성은 건물 외관을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정말 이 가게에 오려 했던 것이 맞냐는 의문을 담고 김희도를 봤다. 그는 가게 문을 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딸랑, 문에 걸어 놓은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안 들어오고 뭐 해요?”
“잠깐. 이리 와 봐.”
그의 팔을 붙잡고 당기자 반쯤 열렸던 문이 다시 닫혔다.
“왜요?”
“여기 맞아? 잘못 찾아온 거 아니고?”
「♥SUGAR BAKERY & CAFE♥」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크림색 외벽과 그에 맞춘 옅은 노란색 간판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커다랗게 난 창문에는 풍성한 레이스가 잔뜩 달린 흰색 커튼이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힐끔 보이는 내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기자기함을 가져다 놓은 듯했다. 살짝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여동생들과 인형 놀이를 할 때마다 서로 가지겠다며 싸우는 공주님 성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설마 김희도의 취향인가? 그게 아니고선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이런 곳은 별로예요? 그런 것치곤 딸기 무늬 우산이나 곰돌이 도시락 통 들고 다니지 않았나?”
“그건 동생들 거라니까. 아니, 그것보다 너 사람 많은 곳 싫어하잖아. 그냥 조용한 곳 가자.”
이어진 말에 김희도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빙그레 웃었다. 길게 뻗은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것만으로도 싸늘하던 분위기가 변했다.
“선배가 있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들어가요.”
내가 안 괜찮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임성은 가방끈을 꼭 움켜쥐고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주춤주춤 발을 내딛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리는 게 느껴졌다. 왠지 못 올 곳에 온 것 같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야구를 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나 보다.
노골적인 관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과 달리 김희도는 누가 자신을 보든 말든 당당한 태도로 착석했다.
“여기 앉아요.”
임성은 그의 앞에 앉으며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밖에서 봤을 때보다 분위기와 소품이 더 오밀조밀했을 뿐 아니라 여자 손님밖에 없어 심리적으로 위축됐다. 이마를 짚는 척하면서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뭐 먹을래요?”
“뭐가 맛있는데?”
목소리도 저절로 작아져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
“몰라요.”
“모른다고?”
얼굴을 가리던 것도 잊게 하는 발언이었다.
“저도 처음 오거든요. 저기서 고르면 되나 봐요. 같이 갈래요?”
그는 계산대 앞에 자리한 투명한 쇼케이스를 가리켰다.
하도 당당하게 들어 오길래 혹시 아는 가게인가 싶었는데 처음이란다. 이건 이것대로 당황스러웠다. 그 사이 김희도는 쇼케이스 앞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가지 않으면 계속 쳐다볼 기세라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어색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평소에 주인이 꽤 신경을 쓰는 편인지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유리 케이스 안에 알록달록한 디저트가 보였다.
이미 품절인 것도 있고, 몇 개 남지 않은 것도 있었다. 딸기 케이크나 치즈 케이크처럼 익숙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카롱, 다쿠아즈, 스콘, 에클레어…….”
임성은 쇼케이스 위에 흰 마커로 적힌 글씨를 따라 읽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본 것 같으면서도 결국엔 이게 뭔가 싶은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잠깐만, 이 조그만 것 하나에 6,500원이라고? 한 입 거리도 안 될 것 같은 것들이 한 끼 밥값에 가까운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여기 있는 거 다 먹어도 배가 안 찰 것 같은데. 여전히 이해는 안 됐지만, 김희도가 먹고 싶다면 얼마든지 사 줄 의향이 있었다.
“뭐가 맛있을 것 같아요? 먹고 싶은 거 다 골라요.”
“글쎄. 봐도 잘 모르겠다. ……으음, 굳이 고르자면 치즈 케이크?”
뭘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대다가 그나마 익숙한 것을 말했다. 그는 톰과 제리에 나올 법하게 생긴 치즈 케이크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제가 대충 고를게요.”
“그래. 나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 계산은 이걸로 해.”
임성은 주머니에서 체크카드를 꺼내 김희도에게 내밀었다. 김희도는 토끼 모자를 뒤집어쓴 노란 단무지 캐릭터 카드를 빤히 쳐다봤다.
“이것도 동생들이 고른 거야. 동생들이.”
“안 물어봤는데요.”
그래. 나 혼자 찔려서 그랬다. 김희도의 손에 카드를 넘기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는 임성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턱밑에서 달랑거리는 마스크를 콧등까지 끌어 올려 썼다.
“헉. 부딪힐 뻔했네.”
화장실 입구는 살짝 낮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임성은 김희도가 앉은 자리로 걸어갔다. 작은 걸 넘어 좁아터진 것 같은 테이블에는 임성이 고른 치즈 케이크를 비롯해 조금 전 쇼케이스에서 봤던 디저트가 종류별로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렇게 모아 놓으니까 꼭 소꿉놀이 하는 것 같네. 이림이 세림이도 엄청 좋아할 텐데, 이따 몇 개 사갈까.
테이블에 맞췄는지 역시나 지나치게 작은 의자에 앉자 김희도의 무릎과 발끝이 맞닿았다. 걸친 것이라곤 얇은 하복 바지가 전부라 단단한 무릎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운동화 안의 발가락을 꿈질대다가 살짝 물렸다. 김희도가 의자를 당겨 앉는 것과 동시에 다시 닿았지만.
“여기 카드요.”
“그러고 보니 결제 알람 안 왔더라.”
휴대폰 문자를 확인해 봤지만, 역시 결제 내역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걸 김희도가 다 샀다는 건데.
“얼마 나왔냐?”
“됐어요. 원래 오자고 하는 사람이 사는 거예요.”
“후배에게 얻어먹을 순 없어.”
“여기서 선배, 후배가 왜 나옵니까. 내가 좋아서 사 주는 건데.”
또다시 시작된 ‘좋아’ 공격에 임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럴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귀까지 새빨개진 임성이 주섬주섬 지갑을 집어넣자 김희도는 승전보를 울린 사람처럼 눈꼬리를 접고 샐쭉 웃었다.
“……그, 그러면 잘 먹을게. 다음에는 내가 산다.”
“네.”
“왜 웃냐?”
“다음도 있구나 싶어서요.”
가뜩이나 휘어진 눈꼬리가 더욱 가늘어지며 보조개가 살짝 드러났다.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있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싶었다.
같은 생각인지 주변 사람들은 김희도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다가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다들 광대가 조금씩 솟아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칭찬이겠지.
이런 애가 왜 날 좋아할까.
“왜 그렇게 봐요?”
아무것도 아니야. 임성은 고개를 저으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덩달아 김희도의 어깨도 한껏 낮아졌다.
“사실은 나 이런 데 오는 거 처음이거든. 작고 반짝반짝해서 내가 앉아 있어도 되나 싶다.”
“……여자 친구랑 안 왔어요?”
“바빠서 여자 친구랑 자주 보지도 못했지만, 대부분 또또에 갔어. 그러다 결국 차였지.”
아침이고 저녁이고,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훈련과 연습이 꽉 차 있어 당시 여자 친구와 만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짬짬이 얼굴을 보고, 학교 근처 분식집에서 데이트하는 게 다였다. 그렇게 반년 정도 지나고 보기 좋게 차였다. 아무리 잘생겨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남기며.
“저는 분식집 좋아해요. 학교 벤치도, 매점도 상관없어요. 길거리에서 만나도 돼요.”
갑자기 웬 뜬금없는 말인가 싶어 포크로 케이크 귀퉁이를 자르다 말고 김희도를 쳐다봤다. 동요 없이 고요한 얼굴과 다르게 눈동자는 선명했다.
“전 좋아한다고요.”
“…….”
포크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먹어요. 살짝 녹았을 때 먹으면 맛있대요.”
임성은 포크로 뾰족한 케이크 귀퉁이를 조심스럽게 베어 냈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케이크를 입에 넣자 묵직한 식감과 혀끝이 아릴 정도로 짙은 치즈 맛이 느껴졌다.
“이것도 먹어 봐요. 안에 바나나 잼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 먹자.”
덩치 큰 고등학생 남자애 둘이 나란히 앉아서 알록달록한 과자를 먹는 모습은 확실히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여전히 주변에서 시선이 쏟아졌지만, 두 사람은 굴하지 않고 그 많은 접시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비웠다. 단맛으로 입 안이 얼얼할 정도였다.
“좀 괜찮아졌어요?”
“뭐가?”
달그락. 김희도는 빨대로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을 휘저었다.
“기분. 단 거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고 하잖아요.”
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입이 벌어졌다.
“야구도 그렇고, 감독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잖아요.”
“나름 숨긴다고 숨겼는데, 혹시 티 났어? 다른 애들도 알아차렸을라나. 팀 분위기에 영향 준 건 아니겠지.”
“아니요. 그건 내가…….”
김희도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가? 그다음은 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임성은 빈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본인은 모르는 듯했지만, 무의식중에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맨날 선배를 보니까 알았던 거고요.”
빠르게 말을 내뱉은 김희도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커다란 손은 붉게 달아오른 귓등을 모두 숨기지 못하고 한 뼘 드러냈다. 임성의 입이 점점 더 벌어졌다.
사람이 많은 장소를 극도로 싫어하는 김희도가 이런 곳에 온 게 이상하더라니. 내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였구나.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열기가 얼굴을 덮었다.
아, 여긴 에어컨을 안 트나. 왜 이렇게 덥지. 입 안의 타액을 삼켰다. 아직 혀끝에 단맛이 남아 있는지, 목구멍을 넘어가는 타액이 지나치게 달았다.
매사에 시큰둥하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아니,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라 어쩌면 관심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게 임성이 생각하는 김희도였다. 물론, 그런 성향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확실히…….
귀엽잖아.
언제였더라, 좋아하는 사람에겐 잘해 줄 것 같다고 했던 말을 이렇게 확인하게 될 줄이야.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 하는 건 반칙 아니냐. 심장이 쿵쿵 뛰다 못해 뚝 떨어지는 것 같잖아.
“……단 거랑 네 덕분에 좋아졌어. 진짜야.”
무의식중에 김희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가게 안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곧게 드러난 뒷 목이 붉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쩐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김희도의 앞이 아니었다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을 것이다.
“일부러 이러는 거죠? 다 알면서.”
그거야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 * *
전국 1차 지명을 받은 최대어 이치연을 상대로 극적인 투런을 뽑아낸 17세. 현직 고등학생 최초로 감독 비리를 고발한 선수. 어디서나 눈에 띄는 화려한 외모와 그에 상응하는 실력.
화제의 중심에 선 김희도에게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처음 고발했던 매체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김희도 선수. 베이스볼 매거진입니다.”
선유고 야구부원들은 카메라 뒤에 옹기종기 모여 신기한 얼굴로 인터뷰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번 대통령배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9회 말, 투 아웃 상황에서 끝내기 홈런.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는데요. 우선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아나운서가 빙그레 웃으며 김희도에게 마이크를 갖다댔다.
“임성 선배 덕분입니다. 선배가 없었더라면 홈런도 없었을 겁니다.”
선유고 유니폼을 입은 김희도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대답했다.
오오. 마치 방청객처럼 야구부 아이들이 신나게 추임새를 넣었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카메라 감독이 슬쩍 쳐다봤다.
“최근 감독 없이 준결승과 결승에 나갔습니다. 그에 따른 불안은 없었습니까? 팀원들끼리는 어떤 대화를 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임성 선배가 잘 다독여 줘서 힘낼 수 있었습니다.”
야. 네 이름 또 나왔어. 임성은 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이는 박종열을 무시하며 훈련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유니콘즈에 지명된 주강고 이치연 선수를 상대로 투런을 뽑아냈어요. 마지막 타석에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우승 트로피를 선배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그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선배를 무척 따르는 걸 보니, 팀 분위기가 무척 좋나 봅니다.”
웃음기 어린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쪽에서 마른 수건을 휘두르던 임성은 모든 대답이 ‘기승전선배’로 끝나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지금 김희도는 너무 노골적이었다.
“저 싸가지가 웬일로 우리에게 공을 다 돌리지? 벌써 이미지 메이킹 하는 건가? 야, 임성. 쟤 인터뷰하는 것 좀 봐. 우리한테 우승 트로피 주고 싶었대. 존나 싸가지 없고, 기특하지 않냐?”
처음엔 의아해하던 부원들도 박종열의 말에 오오, 하고 탄성을 뱉었다. 그리고 임성은 기뻐하는 아이들을 외면하며 더욱 힘차게 수건을 휘둘렀다. 진실이야 어쨌든 다들 좋아하면 됐지, 뭐.
“선배. 차도현 말 못 들었어요? 당장 멈춰요.”
어느새 인터뷰를 끝낸 김희도가 임성의 어깨와 팔을 봐준 의사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외쳤다.
임성은 아직 철수하지 않은 취재진과 부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이 정도는 괜찮아. 선생님도 허락했어.” 하고 변명하듯 말했다.
“수건 뺏기 전에 내려놔요.”
물론, 정색하는 김희도를 보고 수건을 조용히 내려놨지만.
* * *
대통령배 결승이 끝나고 일주일이 흐른 9월. 여름 방학은 어느새 끝이 났지만, 등교하지 않는 토요일이라 방학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처럼 일찍 끝난 훈련에 3학년들은 대부분 돌아갔으며, 1학년 몇 명과 2학년 다수는 각자의 취향에 맞춰 자율 운동을 했다.
곧 새로운 감독과 코치가 곧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대놓고 안도했다. 특히 2학년들이 제일 반겼는데, 가장 중요하다면 중요할 고2 겨울 방학이니 충분히 이해됐다.
임성은 부원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부실을 지키다가 제일 마지막으로 나왔다. 저녁 9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어?”
아침부터 공기가 습하고 먹구름이 꽉 끼어 있더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밖으로 슬며시 내민 손 위에 빗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부실에 남은 우산이 있었나? 그냥 정류장까지 뛰어갈까? 날씨가 더워서 비 맞아도 감기에 안 걸릴 것 같은데. 그냥 뛰자.
글러브가 든 가방을 품에 꼭 껴안고 막 뛰어가려는 찰나, 누군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부실 앞까지 걸어왔다.
“안 보여서 집에 간 줄 알았어.”
“갔죠. 근데, 누가 ‘여름이니까 괜찮겠지’ 하면서 비 맞고 집에 갈 것 같아서요.”
지금 이 말은 상대방, 그러니까 임성의 성향을 모르고선 절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언젠가 새빨개진 얼굴로 ‘맨날 선배를 보니까.’라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임성은 그러냐며 웃는 대신 시선을 떨궜다. 후두둑 떨어진 빗물이 고여 탁해진 웅덩이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좀 전까진 곤란하게만 느껴지던 빗소리가 반가웠다.
“희도야.”
임성은 김희도를 부르고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진심으로 고마워. 만약 네가 아니었으면, 난 버티지 못했을 거다. 어떤 방식으로든 무너졌겠지. 어쩌면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야구를 포기했을 수도 있어. 그러지 않도록 도와줘서 고마워.”
“네.”
“너랑 있으면 정말 즐겁고 재미있어. 더 얘기하고 싶고, 생각나고, 궁금해. 하지만…….”
“…….”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후 줄곧 고민했었다.
김희도의 감정과 현재의 상황을. 어쩌면 그가 내게 가진 마음은 특수한 환경에서 부각된 감정이 아닐까. 높은 곳에 올라가서 느끼는 아찔함이나 공포 영화를 볼 때 뛰는 심장을 마치 옆 사람 때문이라고 착각하듯 체취에 대한 호감을 ‘그런 좋아함’으로 느낀 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도 언젠가 거짓된 감정이라는 걸 깨닫지 않을까. 사실은 애정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자신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차라리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임성은 피가 밸 정도로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즘은 다른 사람 땀 냄새 맡아도 예전처럼 토할 것 같진 않지? 조금씩, 천천히 괜찮…….”
“……착각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임성은 최대한 돌려 말했지만, 김희도는 속지 않았다. 오히려 임성이 무던히 감싸고 감싼 본질을 기어코 끄집어내어 되물었다. 얼굴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였다.
“너 여태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낸 적 없다며.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진 것도 처음이잖아. 그래서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릴 수 있어.”
“내가!”
김희도는 그 한마디만 내뱉고 입을 다물었다. 턱 근육이 불거지고, 뺨이 떨릴 정도로 힘껏 이를 문 모습을 보고 손을 뻗었다.
저러다 입술 상하면 안 되는데.
“엇.”
김희도는 제 눈앞에 다가온 임성의 팔을 움켜잡고 앞으로 당겼다. 왼쪽 발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나머지 발이 엇갈리며 균형이 흐트러진 몸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했다.
김희도는 쥐고 있던 우산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임성의 양쪽 어깨를 붙들어 고정했다. 시선을 피하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후두둑, 자비 없이 떨어지는 빗물은 두 사람의 몸을 푹 적셨다.
“내가 언제 선배한테 강요한 적 있어요?”
마치 분노를 억누르는 듯 김희도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내 마음 받아 달라고 매달린 적 있냐고요. 선배가 뭔데 내 감정을 멋대로 단정해요? 선배를 좋아한다니까 우습게 보여요? 차라리 내가 싫다고 해요. 그러면 이렇게 기분이 더럽진 않을 테니까!”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아.”
손가락이 옷자락을 파고들고, 손등이 허옇게 변할 정도로 임성의 어깨를 세게 움켜잡았던 김희도는 그가 눈을 찡그리자 힘을 뺐다. 혹시라도 임성의 어깨에 무리가 갈까 봐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착각? 어떤 미친놈이 이런 착각을 해요.”
“희도야.”
임성은 그의 손등을 제 손으로 덮으며 다시 한번 김희도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은 기분 알아요? 선배를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면, 그때도 과연 착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내리는 빗속에서 김희도가 말했다. 마치 사냥감을 주시하는 날짐승처럼 눈동자에 새파란 안광이 돌았다.
임성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밖에는 여전히 세찬 소리를 내며 비가 내리고 있고, 부실은 습하고 눅눅한 공기로 꽉 찼다. 올해 들어 오늘이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좀 진정됐어?”
“조금요. 어깨는 괜찮아요?”
“괜찮아. 애초에 세게 잡은 것도 아니고.”
임성은 다소 멋쩍게 대답하며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었다. 비를 얼마나 맞았는지 그 짧은 사이 마른 수건이 다 젖었다.
그나마 날이 더워서 감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임성은 김희도가 운동장에 내팽개쳤던 우산의 물기를 탈탈 털어 낸 뒤 곱게 접었다.
“……미안해요.”
자칫 빗소리에 파묻힐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우산을 한쪽 구석에 세워 놓은 임성이 뒤를 돌았다. 고개를 푹 숙인 김희도가 보였다. 흠뻑 젖어 늘어진 앞머리 때문에 정확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풀죽은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데.
“아니야. 네 말처럼 내 멋대로 생각한 거야. 사과는 오히려 내가 해야지.”
임성이 축축한 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빗속에서 필사적으로 소리치는 김희도를 보며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그런 질문을 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체취 때문이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
“…….”
사과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또다시 말이 없었다. 임성은 물에 젖어 색이 진해진 수건을 쥐고 활짝 열린 문 너머를 응시했다. 여전히 흙바닥이 푹푹 팰 정도로 강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저래서 내일 그라운드는 쓸 수 있으려나.
“선배.”
“어? 응.”
멍하니 문밖을 쳐다보던 임성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새로운 수건을 든 김희도가 소리 없이 뒤에 서 있었다. 딱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목이 뻣뻣해졌다.
얕은 한숨을 쉰 김희도가 임성의 정수리에 수건을 얹더니 양손으로 두상을 감싸고 느리게 움직였다.
“이런 날씨라도 감기 걸려요.”
벅벅 털어대던 자신과 달리 마치 아기를 다루듯이 조심스러운 손길에 괜히 멋쩍어졌다. 사락사락, 머리카락이 손을 스치는 소리만 울렸다. 수건에 얼굴이 가려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됐어요.”
서툴지만 상냥한 손이 떨어져 나갔다. 김희도는 임성의 머리를 닦았던 수건을 꼭 쥐고 한 걸음 물러섰다.
“다정하네. 네 덕분에 감기 안 걸리겠다.”
“선배한테만.”
“응?”
“선배한테만 그래요.”
다른 사람 말고 당신한테만.
김희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충 빗물을 닦은 두 사람은 습기가 가득 찬 부실을 뒤로 하고 나왔다. 후두둑, 후두둑. 빗물이 나뭇잎에 고였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어젯밤엔 그렇게 시끄럽던 매미 울음소리도 빗소리에 파묻혔다.
“우산 하나 더 없어?”
“없어요. 처음부터 하나만 쓰고 왔거든요. 선배랑 어떻게 좀 붙어 있어 보려고요.”
임성은 전혀 거리낌 없는 태도로 말하는 김희도를 보다가 한쪽에 세워 둔 우산을 펼쳤다. 팡, 우산이 벌어지며 맺혀 있던 빗방울이 튀었다.
“그래. 어떻게든 붙어 가 보자.”
김희도는 우산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임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내가 들게. 공식적으로 내가 더 크잖아.”
“……거의 비슷하잖아요.”
“비슷하다는 말은 같거나 크다는 뜻이 아니지.”
“지금 키 재 보면 다른 결과가 나올 텐데요?”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고. 불만 있으면 누가 봐도 차이 나게 크든가.”
“와아. 엄청 치사한 거 알아요?”
“처세술이라고 하자.”
장난스러운 대답에 김희도는 코웃음을 치더니 나란히 섰다. 고등학생 야구부 둘이 쓰기에 우산은 지나치게 작고 좁아 딱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키가 비슷하다 보니 두 사람의 어깨와 팔이 겹쳐졌다. 비에 젖은 교복 셔츠 너머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상황이, 왠지 모르게 의식됐다. 임성은 고개를 정면으로 둔 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 김희도를 곁눈질했다.
“볼 거면 당당하게 보세요. 오히려 환영하니까.”
“안 봤거든.”
하지만 김희도가 대놓고 이쪽을 보고 있었기에 시선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모른 척 다시 고개를 돌리자 맞닿은 어깨가 살짝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 * *
신인 드래프트 날짜가 점점 가까워지자 3학년들은 영 싱숭생숭한지 좀처럼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다. 임성은 그들을 다그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뒀다. 아마 자신의 머릿속도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정식 주장으로 발표만 안 했을 뿐이지 이미 조예준이 야구부원들을 통솔 중이었다.
그사이 감독과 코치가 새로 왔다. KBO에서 뛰다가 몇 년 전에 은퇴한 감독은 프로 구단 코치, 해설 등의 제의를 뿌리치고 모교로 온 것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직관이나 TV에서 보던 사람을 감독으로 만나는 경험은 상당히 신기했다. 아직 많이 겪어 보진 못했지만, 한호찬 감독에 비해 훈련 방식이 체계적이라 기대가 됐다.
임성은 어깨 통증이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그나마 몸에 부담이 덜 가는 러닝 위주의 훈련을 했다.
임성이 눈을 떴을 때 밖은 아직 어스름한 새벽빛으로 가득했다.
AM. 5시 10분.
이제 아침 훈련은 강제가 아닌데도 몇 년을 이 시간에 일어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간단히 세수와 양치를 하고 후드가 달린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대문 앞에서 몸을 쭉쭉 늘려 꼼꼼하게 스트레칭 후 뛰기 시작했다. 가볍게 달리다가, 숨이 살짝 가쁠 만큼 빠르게, 그리고 다시 속도를 늦췄다가 목에 쇠 맛이 느껴질 정도로 빨리. 좁고 굽이진 골목과 모퉁이를 돌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던 임성은 근처 놀이터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의외라고 할지, 예상대로라고 할지 모르겠다.
“뛰다 왔어요? 땀 흘렸네.”
“어.”
“저는 이 근처 산책하다가…… 하하. 내가 들어도 개수작이다. 그죠?”
가까이 다가온 김희도는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다가 땀으로 범벅된 임성의 뺨을 쓰다듬었다. 스침에 가까울 정도로 짧게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며칠 전 빗속에서의 고백 후 같이 우산을 쓰고 내려오면서 김희도는 ‘알았어요.’ 하고 말했다. 뭘 알았는지 묻자 ‘지금은 잘 모르겠다는 거잖아요. 착각 같은 개소리는 하지 말고.’라고 말했다. ‘개소리’에 유난히 악센트가 들어간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아침 훈련을 하고, 점심시간에 만나 야구 얘기를 한 뒤 저녁 훈련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
그리고 오늘 김희도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산책 중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이제 와서 더 숨길 것도 없고, 솔직히 말할게요. 선배 보고 싶어서 왔어요.”
임성은 그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손등으로 누르며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빠르게 뱉어 냈다.
“우리 얘기 좀 할까?”
두 사람은 놀이터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아이들용 그네는 무척 작고 좁아 허벅지를 바짝 붙여야 했다.
“마셔.”
임성은 편의점에서 사 온 생수를 김희도에게 건넸다. 그가 말없이 물통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임성은 발을 앞뒤로 구르다가 그네 받침대가 흔들리는 걸 보고 급히 멈췄다.
“헉. 무너지는 줄 알았네. 애들이 타는 건데 이렇게 부실해도 되나?”
이림이, 세림이 조심하라고 해야겠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옆을 힐끔 봤다. 김희도는 상체를 살짝 숙이고 양 팔꿈치를 무릎에 얹은 채 생각 중이었다. 반듯한 선을 그리는 옆모습이 참으로 예뻐 홀린 듯 보게 됐다.
그때, 바닥을 보고 있던 김희도가 불시에 고개를 돌렸다. 저번부터 느꼈지만, 그는 타인의 시선을 참 잘 알아차렸다.
“잘생긴 것 같아서.”
멋쩍게 웃으며 변명 같은 칭찬을 늘어놓았다.
끼익. 그네에서 일어선 김희도가 임성 앞에 서서 양손으로 그넷줄을 잡았다. 눈앞에 그늘이 지며 자연스럽게 그를 올려다보게 됐다. 똑바로 쳐다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김희도의 시선은 의외로 옆을 향해 있었다.
“선배가 좋아요. 말하면 누그러질까 했는데, 오히려 더 미치겠잖아.”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모르겠다. 다만, 그의 목소리는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좋아해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
“지금 당장 믿지 않아도 괜찮아요. 믿을 때까지 계속 말할 거니까.”
그는 팔뚝의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그넷줄을 세게 잡으며 몇 번이고 숨 막히는 고백을 반복했다.
“너는 내가 왜 좋으…… 음, 좋…….”
“선배가 왜 좋냐고요?”
임성이 차마 묻지 못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토해 낸 김희도가 고개를 살짝 기울었다. 다른 부원들에 비해 살짝 긴 머리카락이 반듯한 이마를 스쳐 스르르 떨어졌다.
“잘 모르겠어요.”
딱히 원하는 대답은 없었지만, 모르겠다는 말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해 조금 얼떨떨했다. 김희도는 여전히 임성이 도망가지 못하게 그넷줄을 꽉 붙든 채 가만가만 입을 열었다.
“처음엔 거절해도 자꾸 찾아오는 귀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공 던지는 게 신기했어요. 내겐 그저 그런 일 중 하나일 뿐인데 저 남자는 뭐가 저렇게 재밌을까.”
“티 났냐?”
“엄청요. 그리고 다른 사람은 신경 쓰면서 정작 본인은 내버려 두는 게 거슬리고, 묵묵히 참는 모습에 화나고.”
“지금 좋아하는 이유 말하는 거 맞지?”
내용만 들어 보면 거의 시비 수준인데.
중얼거린 말에 머리 위에서 짧은 웃음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선배만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뒤로는…….”
그넷줄을 잡은 손을 떼어 낸 김희도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한참이나 높았던 시선이 이번에는 조금 낮아졌다. 김희도는 임성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고선 이마를 기댔다.
“내 생에 지금만큼 간절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예요.”
숨이 덜컥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중에 물러서려던 시도는 손등을 덮은 김희도 때문에 무산됐다.
“간절하다고?”
그 무신경한 네가?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내가 시큰둥하게 보였다면 그건 그래야 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내가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나도 모르겠어요.”
김희도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 * *
9월 중순에 접어들었음에도 한낮의 기온은 여전히 30도에 가까워 후텁지근했다. 그 열기는 신인 드래프트장에 고스란히 이어졌다.
관계자에게 미리 귀띔을 받는 1차 지명과 달리 드래프트는 지명하기 전까지 누가 어느 구단에 갈지 몰랐기 때문에 선수들의 심장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프로 야구 신인 드래프트 발표회■]
건물 입구에 걸린 커다랗게 걸린 현수막을 노려보던 임성은 숨을 길게 내뱉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꽤 넓은 발표회장에는 교복과 유니폼 등 각양각색으로 차려입은 아이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임성, 야. 여기다, 여기.”
손을 번쩍 들며 임성을 불렀던 박종열은 주변의 시선을 받고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박종열도 덩치론 어디 가서 지지 않지만, 애초에 여긴 그런 애들밖에 없었으니까.
“엄청 살벌하네.”
“긴장해서 그렇지. 그나저나 넌 유니폼 말고 웬 양복 입었냐. 회사 면접 보러 왔어?”
“사진 박제될 수도 있으니까 일부러 차려입고 왔지. 괜찮지 않냐?”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진 못하고, 말을 돌렸다.
“영상으로 보던 것보다 사람이 많네.”
“그치? 기사 보니까 이번에 드래프트 나온 선수가 1000명 정도래. 취업률 개빡세.”
사회자가 들어오자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드래프트 지명 방식은 작년 구단 성적의 역순이었다. 그러니까 10위 구단이 가장 처음 지명하고 9위 구단이 그다음…… 그렇게 열 개 구단이 한 명씩 뽑고 나면 또다시 10위 구단이 선수를 지명하는 방식이었다.
단상 바로 밑 테이블에는 각 구단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고, 카메라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 프로 야구 신인 드래프트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착석해 주시고, 총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자 벽 한 면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스크린에 각 구단 이름과 로고, 그리고 1라운드부터 10라운드까지 빈칸이 떴다. 그제야 드래프트 현장에 왔다는 게 조금 실감이 났다.
드디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10년 이상 쏟아부은 결과가 오늘 나온다. 과연 웃으며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불안으로 요동쳤다.
작년 10위 구단 관계자가 일어섰다.
“HR 유니콘즈입니다. 우선 여기 계신 모든 선수에게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1라운드 발표하겠습니다. 배성고등학고 투수 신연호 선수입니다.”
신인 드래프트의 막이 올랐다.
같은 시각, 선유고 야구부실. 불안하게 다리를 달달 떨어대던 조예준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부실 안을 서성였다.
“지금쯤 드래프트 중일 텐데. 주장은 당연히 뽑혔겠지? 한번 확인 해 볼…… 아니야. 부정 탈지도 몰라.”
조예준은 휴대폰을 열었다가 닫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당연히 주장이 지명받았다고 확신하면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내심 불안했다. 혹시 무음이나 진동으로 해 놓으면 연락을 못 받을까 싶어 벨 소리, 그것도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그럼에도 감감무소식이자 이번에는 휴대폰 전원을 껐다가 켜는 등 부산을 떨어댔다.
“헛짓거리할 거면 그냥 꺼져. 거슬리니까.”
가만히 있지 못하고 사부작사부작 난리를 치는 조예준과 달리 김희도는 평소와 같았다. 그러니까 평소처럼 싸가지 없단 뜻이었다.
하필이면 이 새끼를 여기서 만날 건 뭐람. 이럴 줄 알았으면 교실에서 결과를 기다릴 걸 그랬다.
“주장 앞에선 존나 가식 떨더니. 너는 지금 책 같은 게 눈에 들어오냐? 냉정한 새끼.”
조예준은 『전국 떡볶이 大정복. -매일 다른 종류의 떡볶이를 만들어 보자-』라는 이상한 제목의 책을 진지하게 읽는 김희도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형에게 연락 해 봐야…….”
조예준이 통화 버튼을 막 누른 것과 동시에 어디선가 벨 소리가 울렸다. 화들짝 놀란 조예준이 본능적으로 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지만, 여전히 잠잠했다. 그렇다는 건……!
반쯤 읽던 책을 테이블에 엎은 김희도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조예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평소엔 로봇인가 싶을 정도로 표정이 없던 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는데 그게 더 재수 없었다.
손바닥만 한 액정에 ‘임성’의 이름이 떠 있었다.
* * *
“기사님. 여기서 내려 주세요.”
“여기서? 학교 정문까지 좀 더 가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여기, 택시비요. 감사합니다!”
오후 6시가 막 지난 시간, 퇴근 시간과 겹쳐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혔다. 신호에 걸린 택시가 멈추자 임성은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렸다. 전력으로 10분을 뛰어 익숙한 교문을 발견하자 더 빨리 달렸다. 평소 러닝을 한 이유는 오늘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해가 뉘엿뉘엿 지는 늦은 오후, 짙은 금색으로 물든 그라운드에는 땅거미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것을 빠르게 밟으며 야구부까지 달려간 임성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부실 문을 열었다. 쾅. 오래된 문짝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세게 흔들렸다.
“김희도!”
느긋한 얼굴로 책 페이지를 넘기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왔어요?”
아무도 없는 부실에 홀로 앉은 그를 보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솟았다. 입을 꾹 다문 임성이 빠르게 걸어 그의 앞에 섰다.
임성은 보조개가 선명히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는 김희도를 충동적으로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으로 둥근 뒤통수를 감싸고 몸을 더 가까이 겹쳤다. 후,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고 곧 김희도의 손이 제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왜 집에 바로 안 가고 여기로 왔어요?”
“그거야…….”
구단에 지명을 받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김희도였으니까.
“선배랑 처음으로 밖에서 만나던 날, 약속 시각보다 30분 먼저 도착했어요. 그때 선배가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물었잖아요. 그때 제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해요?”
그때 김희도는 어깨를 으쓱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보고 싶어서요. 그때 조금이라도 빨리 선배를 보고 싶었거든요.”
“…….”
“다시 한번 물을게요. 선배는 왜 여기 왔어요? 나 있는 거 알았잖아.”
“……보고 싶어서.”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던 임성이 고개를 푹 숙이며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을 때처럼 가슴이 벅차오르고, 동시에 그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사람들의 축하도 뒤로한 채 무작정 학교에 왔다.
“왜 내가 보고 싶었는데?”
“그건…….”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댔다.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실망, 혹은 강하게 밀어붙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김희도는 선뜻 물러섰다. 목소리에는 희미한 웃음기마저 묻어 있었다. 안겨 있어 표정은 못 봤지만, 어쩐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화 안 나?”
“왜 화가 나요?”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하잖아. 착각이니 뭐니 헛소리하던 때와 비교하면 오히려 환영이지.
“어느 구단 지명받았어요?”
“페어리즈. 이솔 페어리즈.”
“아아. 다행이다. 전학 가야 하나 고민했거든요.”
“전학 가게? 난 너 절대 못 보낸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진심에 김희도가 눈을 깜빡이더니, 빙그레 웃었다. 활짝 웃을 때와 달리 입꼬리만 예쁘게 올라가는 것에 임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선배가 지방 구단에 지명받으면 그쪽 학교 가려고 했죠. 전 선배를 끝까지 따라갈 생각이거든요. 그게 어디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김희도가 좀 더 짙게 미소 지었다.
어쩌면 좋냐.
임성은 말없이 그를 안은 손에 힘을 줬다. 조금 건조한 흙냄새와 달큼한 김희도의 체취가 뒤섞여 머리가 어지러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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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이솔페어리즈
[잡담] 이솔페어리즈:: 올해 드래프트 결과 (feat. 아기 요정들) (댓글 32)
(내용)
8투수 1포수 1야수ㅋㅋㅋㅋㅋㅋㅋㅋ
★갓차: 유송고 우투 박송원★
1라 조원고 우투 허성재
2라 원영대 우투 박해운
3라 포항일상고 좌투 김찬진
4라 정일고 포수 송정삼
5라 선유고 좌투 임성
.
.
.
10라 선유고 야수 박종열
선유고등학교 야구부 3학년 중 3명이 약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프로행을 확정 지었다.
임성에게 주장 완장을 물려받은 조예준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다독이는 모양이었지만, 좀처럼 분위기가 잡히지 않는 듯했다.
임성은 「경★ 선유고등학교 야구부 프로리그 3명 배출 ★축」이라는 현수막이 대문짝만하게 붙은 부실을 지나 그라운드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이 헐떡이며 운동장을 뛰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흙먼지를 뿌옇게 흩날리며 스무 바퀴를 채우자마자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김희도만 제외하고.
흐뭇한 얼굴로 부원들을 지켜보던 임성의 얼굴이 점점 당황으로 물들었다.
기분 탓인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아니, 기분 탓이 아니라 진짜 이쪽으로 오고 있잖아.
상황을 정리하기도 전에 다가온 김희도는 다짜고짜 임성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껴안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손바닥이 땀범벅이라 참는 중이었다.
“선배 안 왔으면, 그대로 이탈했을 거예요.”
“죽부인이라도 된 것 같다.”
“그거 좋네요.”
참을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희도는 기어코 임성의 허리를 껴안고 몸을 밀착했다.
“부인.”
“인마, 까분다.”
김희도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 * *
무덥던 여름이 지나며 푸르던 나무가 예쁘게 물을 들였다. 거리에는 긴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며 가을이 훌쩍 다가왔단 것을 알렸다.
쌀쌀한 공기가 거리를 점령하는 딱 이맘때, 중학교 추계리그가 시작됐다. 작년까지만 해도 김희도 때문에 소명 중학교 경기를 보러 다녔다면 지금은 같은 그라운드에 섰을 뿐 아니라, 아니라…… 아니라…….
‘좋아해요.’
“우와. 미치겠네. 왜 자꾸 생각나냐?”
턱을 괴고 창밖을 보다가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은 게 처음도 아닌데 김희도의 고백은 이상할 정도로 뇌리에 박혔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불쑥불쑥 떠올라 마음을 술렁이게 했으며, 그때마다 임성은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종종 ‘산책’이라며 집 근처 놀이터까지 찾아왔다. 뭔가를 하는 건 아니고 그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집까지 돌아가곤 했다.
며칠 전에는 점심때 다른 일이 있어 벤치에 가지 않았더니 교실로 찾아왔다. 3학년 교실을 마치 본인 교실인 양 당당하게 들어와서는 “나와요.”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사이 김희도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묻지 않았다. 다만, “좋아해요.” 하고 끊임없이 고백할 뿐.
* * *
붉고 노란 가을도 스쳐 지나가고, 시린 바람과 함께 겨울이 다가왔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거리 곳곳에 늘어선 나무에 전구가 걸리며 화려함을 더했다.
학교는 겨울 방학에 돌입했지만, 3학년을 제외한 야구부원들은 매일 훈련을 이어 갔다. 조예준에게 들은 바로는 지난 전국 대회에서 우승 후, 지원이 많아져 내년 초엔 대만으로 전지 훈련을 간다고 했다.
얼마 전엔 메디컬 테스트를 받으러 입단 동기들과 병원으로 갔다. 허리, 발목, 팔꿈치, 어깨 등 관절 부위는 물론이고 안과 검진까지 꼼꼼하게 마쳤다. 다행히 걱정할 만큼의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 쌍둥이 1, 2는 일찌감치 밖으로 나갔고, 여동생들은 따뜻한 전기장판에서 귤을 까먹으며 온종일 만화를 보다가 일찍 잠들었다.
임성은 여동생 방의 불을 끄고 거실로 나와 휴대폰을 열었다. 선유고 야구부 42기, 선유고 야구부 전체, 페어리즈 신인, 페어리즈 구단, 조예준, 박종열…… 등 연락이 많이 와 있었다. 아래로 쭉쭉 내려가던 손가락은 김희도 이름에서 멈췄다.
매일같이 오던 연락은 이틀 전 저녁이 마지막이었다. 연말이기도 하고 김희도도 여러모로 바쁠 테니 연락 안 할 수도 있지.
“으음.”
뭐 하냐고 먼저 말을 걸어 볼까.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프로필을 누르고 닫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소파 위로 던졌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했을 연락을 고민하는 자체가 웃겼다.
이유가 뭘까. 나름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이 아버지가 머리를 털며 들어오셨다. 대자로 팔을 벌린 채 누워 있던 임성이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맞았다.
“밖에 진눈깨비 오더라.”
“그래요? 밥 차려 놨으니 드세요. 전 잠시 나갔다 올게요.”
휴대폰과 이어폰을 챙긴 임성이 운동화 끈을 질끈 묶었다. 좀 뛰다가 올까. 머리를 비우기에는 달리기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운동화 앞코를 바닥에 툭툭 치며 문을 열었다. 쌀알처럼 작은 눈이 찬 공기에 섞여 마치 비처럼 흩날렸다.
후우, 숨을 내쉬자 뿌연 입김이 선명하게 번졌다. 이어폰을 귀에 끼고 익숙한 골목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도 늦었으니 한 바퀴만 돌고 오자.
“…….”
그러니까 동네 한 바퀴만 돌 생각이었단 말이지. 학교를 향해 뛰어가는 게 아니라.
자정이 다 돼 가는 시각에 이게 뭔 난리냐,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자. 동네를 빠져나오던 방향을 틀어 다시 집으로 향했다.
꺾어지는 골목 어귀에서 숨을 길게 내뱉으며 속도를 늦췄다. 그사이 눈발은 더 거세져 이제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겉옷을 하나 더 입고 올 걸 그랬다. 감기에 걸리진 않겠지? 새빨갛게 언 코끝을 매만지며 현관문을 잡는데, 옆에서 뻗어 나온 손이 어깨를 움켜잡았다.
“헉.”
방심한 상태에서 팔을 잡히자 순간적으로 쳐 냈다. 그러나 떨쳐 나가기는커녕 임성을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설상가상 흩날리는 눈발 때문에 시야 확보도 잘 안 됐다.
“어디 갔다 왔어요?”
“어? 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방어 자세를 취하던 임성이 손을 내리며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뺨과 코가 새빨갛게 얼어붙은 김희도가 서 있었다.
지금 시간이 몇…… 아니, 그것보다 언제부터 기다렸던 거야. 보아하니 일, 이십 분 있던 것 아닌 것 같은데. 걱정과 당황이 섞인 시선으로 김희도를 봤다. 남색 목도리 위로 드러난 얼굴이 새빨갰다.
“언제부터 있었어? 전화하지.”
“했는데 안 받아서요. 누구 만나고 온 거예요?”
“뭘 누굴 만나고 와. 지금 내 꼴을 봐라. 그리고 손 좀 놔 줄래?”
김희도는 임성의 얼굴 곳곳을 뚫어지라 응시하다가 어깨를 잡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하지만 물러나거나 멀어지지 않고 여전히 바짝 붙어 선 채였다. 상당히 가까운 거리감이 사뭇 민망해 모르는 척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23)
모두 김희도에게서 온 것이었다.
“전화를 왜 이렇게 많이 했어?”
“내일 크리스마스잖아요. 아니, 자정 지났으니까 오늘이네. 메리 크리스마스.”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다.”
“눈도 오는데 목을 다 드러내놓고 다니네요. 따뜻하게 좀 입고 다녀요.”
그는 제 목에 감긴 목도리를 풀더니 임성에게 둘러 줬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달큼한 냄새가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아. 이러니까 생각이 안 날 수가 있나.
임성은 쌉쌀한 눈 냄새가 밴 공기를 마시며 김희도의 두 손을 감쌌다. 차갑게 얼어붙은 살갗은 김희도가 얼마나 자신을 오래 기다렸는지 알게 했다. 겨우 메리 크리스마스 한 마디 하려고.
“희도야. 사실은.”
사실은 나도 너희 집에 가고 있었어. 임성은 혀끝까지 치민 말을 삼키며 차가운 손을 꽉 잡았다.
* * *
겨울의 찬 기운이 아직 남은 2월의 어느 봄은 선유고등학교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임성은 학급 친구들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받은 꽃다발을 여동생들 품에 안겼다. 꽃 나라의 공주님이 된 것 같다며 좋아하는 쌍둥이들을 흐뭇하게 보다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휴가까지 안 쓰셔도 되는데. 전 부실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여태 한 번도 졸업식에 못 왔잖아. 고등학교 졸업은 봐야지 싶어서. 애들은 내가 데려갈 테니까 친구들끼리 맛있는 거 먹고 놀다 와라.”
“네. 이따 집에서 뵐게요. 아버지.”
임성은 손을 흔드는 여동생들과 아버지를 배웅하고 부실을 향해 걸었다.
저 멀리서 봉긋하게 솟은 마운드와 새파란 잔디, 그리고 흙과 스파이크 자국 등으로 누렇게 변색된 플레이트가 보였다.
일부러 천천히 걸어 부실 문을 열자 박종열을 비롯한 졸업생, 그리고 오늘 같은 날에도 유니폼 차림인 후배들이 보였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이미 울먹거리던 서찬규는 임성을 보자마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찬규, 울어?”
오히려 그 말이 도화선이 된 듯 서찬규가 벌떡 일어서더니 달려왔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후배들도 “주장, 가지 마세요.”, “우리랑 야구 더 해요.”, “1년만 더요, 네?” 하면서 우르르 안겼다.
“와, 너희들 너무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거 아냐? 진심으로 서럽네.”
박종열이 어이없어하든 말든 후배들은 개의치 않고 임성을 붙잡고 늘어졌다. 임성은 양팔을 크게 벌리며 제 품을 파고드는 아이들을 다독였다. 시커먼 사내놈들 우는 게 징그럽기밖에 더 하겠느냐마는 ‘우리 애들’이다 보니 다들 귀엽고 짠했다.
“지금 뭐 해요? 뭐 하냐고.”
하지만 눈물겨운 상봉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성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싸늘한 목소리에 후배들을 진정시키던 임성이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 정승처럼 서 있던 김희도가 빠르게 걸어왔다. 표정이나 시선이 어찌나 냉랭한지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치를 봤다.
“이리 와. 너도 안아 줄게.”
“누가 지금…….”
“싫어?”
다시 한번 묻자 김희도의 미간에 진 주름이 좀 더 깊어졌다. 하지만 차마 싫다곤 못 하겠는지 인상을 쓴 채 다가왔다. 다들 꺼져. 살벌한 시선을 느낀 아이들이 슬금슬금 옆으로 빠졌다.
분명 팔을 벌린 건 자신이었는데, 어느새 김희도에게 안겨 있었다.
“얼굴 좀 펴라. 애들 무서워하잖아.”
무서워하든지 말든지. 코웃음을 친 김희도는 임성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고 번쩍 들어 올리며 야구부원들을 쳐다봤다.
절대 넘보지 말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