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
새파란 싹이 둥글게 맺힌 봄.
까만 교복 대신 하늘색에 가까운 민트색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임성이 운동장으로 나왔다. 잔뜩 긴장한 그의 곁에는 올해 같이 입단한 신입 선수들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이솔 페어리즈 신입 투수 임성, 등 번호 69번.
딱히 의미가 있어서 69번을 고른 건 아니고, 다른 선수들이 택하고 남은 것 중 가장 빠른 번호를 택한 것이었다.
이솔 페어리즈, 일명 ‘요정 구단’에 들어간 꼬마 요정 임성은 2군 구장이 있는 이천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도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막상 프로에 오니 그간 자신이 했던 게 얼마나 어설픈지 깨닫게 됐다.
임성은 마치 처음 야구를 배우는 아이처럼 코치와 선배들에게 하나하나 물으며 2군 생활에 적응했다.
작년 시즌 말에는 페어리즈 홈구장에서 팬들에게 인사를 했다. 구장을 빽빽하게 채운 사람들은 페어리즈 응원 타월을 흔들며 신인 선수들을 환영했다.
“내가 여기 서 있다니. 되게 신기하지 않냐?”
박종열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쿵, 쿵.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페어리즈 2군은 선수용 숙소가 따로 있어, 퓨처스 리그에서 뛰는 선수 대부분은 그곳에서 지냈다. 임성이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휴대폰 확인이었다. 가족, 친구들, 야구부 선후배들…… 그중에서도 김희도의 연락이 가장 많았다.
누구와 방을 쓰냐, 누구와 어떤 훈련을 했느냐, 누구와 밥 먹었느냐, 같은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하나하나 답장을 한 후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69번 유니폼을 정리했다.
페어리즈 유니폼을 입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제 등 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거울에 비춰 보곤 했다.
“손가락을 조금 더 틀어서 그립을 쥐어 봐. 그래야 휘는 각도가 더 커진다.”
“이렇게요?”
“아니. 엄지를 옆으로 빼야지.”
임성이 손목을 젖히자 권재영이 직접 손가락을 벌리며 폼을 수정했다. 페어리즈 마무리 투수인 권재영은 지난겨울 팔꿈치 수술을 받고 2군에서 재활 중이었다. 선유고 출신인 권재영은 임성이 직속 후배에다 같은 좌완이라는 걸 알고부터 대놓고 챙겼다.
직구와 슬라이더. 그리고 3학년 전국 대회 끝 무렵 공식 경기에서 처음 던졌던 체인지업. 임성이 현재 구사할 수 있는 변화구는 세 가지였다. 이젠 잘 던지지 않는 싱커까지 합치면 이제 갓 프로에 입단한 신입 투수치고는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다양한 구종을 구사할수록 타자를 상대하기가 쉬웠다. 그러기 위해선 배울 것도 많고 노력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변화구를 익히거나 구속 끌어올리는 기술뿐 아니라 좋은 근육을 만드는 법, 체력을 효과적으로 키우는 법도 배웠다. 이게 아마와 프로의 차이구나 싶은 것도 많았다.
* * *
프로 야구가 개막하고 석 달쯤 지났을 무렵, 임성의 퓨처스 첫 등판 일정이 잡혔다. 그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김희도에게 연락했다.
[선배!]
만약 목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엄청나게 반짝거리지 않을까. 임성은 휴대폰을 귓가에 좀 더 붙이며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임성이 프로 세계에 차근차근 적응하는 사이 김희도는…… 죽을 쒔다. 죽 쒔다는 표현 말고는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스탯이 엉망진창이었다.
쟁쟁한 상급생들을 제치고 두 번이나 MVP에 뽑혔던 애가 몇 경기째 무안타, 그것도 삼진으로 물러나기 일쑤였다. 핵심 멤버가 그 지경인데, 팀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지금 선유고 주말리그 순위는 하위권을 맴도는 중이었다.
“잘 지냈어? 요새 좀 어때?”
[감독이 오늘 ‘너보다 고양이가 더 잘 칠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기록을 듣고 슬럼프라는 건 대충 짐작했지만, 고양이까지 등장할 줄은 몰랐다. 삼각형 귀를 쫑긋거리며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김희도를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그러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깨닫고 헛기침을 했지만.
“희도야. 잠깐 밖에 나올래?”
[찬 바람 쐬고 정신 차리라고요? 지금 부모님 오셨어요.]
“나 지금 너희 집 근처인데, 부모님 계시면 못 나오겠네. 다음엔 미리 연락하고 올게. 밥 잘 챙겨 먹고 또 통화하…….”
[아뇨, 아뇨! 아니요! 지금 나갈게요.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다급한지 통화 중이라는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지금 나가요. 잠깐만 기다……, 아니. 전화 끊지 말고요.]
쾅, 탁탁. 쾅! 현관문이 닫히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헐렁한 상의와 추리닝 바지, 그리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김희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휴대폰을 든 채 주변을 빠르게 살피다가 임성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그리고 인사를 할 틈도 주지 않고 임성을 꽉 껴안았다. 뒤로 넘어가는 어깨와 허리를 감싸고 제 쪽으로 당기며 뺨을 마구 비볐다.
“주인 반기는 고양이 같네.”
야구 하는 고양이를 따로 상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좋아해요. 진짜.”
“잘 지냈지?”
임성은 좀 더 진하게 미소 지으며 김희도의 양쪽 뺨을 감싸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흰 피부 위에 발간 홍조가 봄꽃처럼 피어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네. 근데, 너 출루율은 어떻게 된 거냐?”
“……며칠 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또 야구야.”
부드럽게 웃으며 정곡을 찔렀다. 김희도는 움찔하더니 임성의 목 뒤와 귓등, 마지막으로 어깨의 체취를 핥듯이 들이마시곤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예전에 말하지 않았나. 나는 선배 때문에 야구 한다고.”
보고 싶었어요, 좋아해요. 수줍게 고백하던 남자는 어딜 가고 묘하게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세 경기 연속 무안타는 심하지 않냐? 거의 양심 없는 수준인데.”
“뭐가 심해요? 이틀 만에 연락한 사람이 더 양심 없지.”
“그건, 좀 바빠서, 선배들에게 변화구도 배우고, 밸런스도 다시 잡고…….”
“나는 선배밖에 없는데, 선배는 딴 놈에게 변화구를 배워요? 심지어 그걸 나한테 말하네?”
“딴 놈이라니. 선배한테 배우는 게 얼마나 영광인 건데. 손가락 위치까지 직접 잡아 준다고.”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김희도의 얼굴이 굳어 갔다.
“그건 그렇고…… 너는 왜 그러는 거야.”
결국 말끝을 흐리며 김희도의 양손을 붙잡았다.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궁지에 몰리는 건 자신이니까.
“이 손으로 가볍게, 정확하게 휘두르는 거. 안타, 홈런. 네 특기잖아.”
“치면요? 치면 뭐 해 줄 건데요?”
임성에게 붙잡힌 손을 빼낸 김희도가 되레 손등을 덮어 왔다. 그새 굳은살이 더 박인 커다란 손이 임성의 손을 넉넉하게 감쌌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무척 맹랑했다.
“뭐, 뭐 해 주면 되는데?”
훌쩍 가까워진 얼굴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임성은 사람의 겉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사람을 나누는 방식은 야구 선수와 일반인, 야구를 좋아하느냐 아니냐, 야구 선수 중에서는 투수와 야수가 다였다. 하지만 김희도는 그런 분류 따위는 다 깨부술 정도의 외모를 지녔다. 화려하고 예쁜 생김새인데 그것을 이루는 선은 굵어서 오묘한 분위기가 났다. 이렇게 생긴 애가 똑바로 눈을 맞추면서 뭘 해 줄 거냐고 묻는데, 누가 무시할 수 있겠어.
“다 해 줬으면 좋겠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그게 무슨 말이야.”
“선배에게 원하는 건 많지만, 아무것도 안 해 줘도 괜찮거든요.”
“…….”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요.”
김희도가 수줍게 웃었다. 정말 좋아 죽겠다는 듯이.
“야, 기, 김희도. 너 말이야. 인마. 이 자식이!”
저런 말은 어디서 배우는 거냐. 밤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팀에 와야지. 야구 같이 하기로 했잖아. 계속 이러면 프로고 뭐고 망해. 뭐, 프로 선수 못 된다고 인생이 망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난 너랑 같이 그라운드에 서고 싶어.”
“알았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 말이나 뱉어 냈는데, 용케 알아들은 김희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어리즈 갈게요. 같이 야구 해요.”
그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 * *
전반기 주말리그를 최하위로 마무리한 선유고는 뒤이어 출전한 황금사자기에서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거뒀다. 4번 타자로 출전한 김희도는 세 경기 연속 홈런, 심지어 멀티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아마야구 팬과 스카우터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고교야구에 관심 없는 포털 사이트에 그의 사진과 활약상이 담긴 기사가 올라오곤 했다.
[주장. 김희도 새끼 기록 봤어요? 시즌 초만 해도 진짜 존나 못 쳤거든요. 오죽하면 감독님이 김희도 대신 고양이 세우라고 했겠어요.]
김희도와 고양이. 또 나왔네. 대체 학교에서 뭘 어쩌길래 저런 말이 나오나. 처음으로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원래 실력 찾은 거지. 걔 잘하잖아.”
치면 뭐 해 줄 건데요?
도발적인 시선으로 묻던 김희도를 떠올리자 갑자기 목이 탔다. 임성은 냉장고를 열어 꺼낸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젖은 입술을 닦았다.
그렇게 김희도가 고교 기록을 갈아 치우며 전국 대회를 휩쓰는 사이, 퓨처스 리그 등판 일정이 다가왔다.
“임성. 잠은 좀 잤냐?”
“못 잤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 코치가 으하하, 하고 웃었다. 그리고선 임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름의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너한테 기대 안 하니까, 그냥 막 던져. 막.”
임성은 더그아웃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마운드로 걸어갔다. 오늘 상대팀은 HR 유니콘즈로 현재 퓨처스 리그 1위를 달리는 팀이었다. 그 말인즉슨, 선수층이 두텁고 실력이 좋은 선수가 많다는 뜻이었다. 최근 실력 부진 등의 이유로 베테랑들이 대거 내려와 상대하기 더욱 까다로웠다.
글러브를 끼기 전, 맨손을 비볐다. 생각보다 더 긴장했는지 손바닥이 차가웠다.
음, 평소 김희도의 체온보다 조금 낮은가? 무심코 생각하다가 비교 대상이 김희도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걔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오나 싶어서.
“임성. 인마. 뭐 하냐?”
“죄송합니다.”
임성은 자신을 부르는 선배 포수의 말에 얼른 대답하며 공을 쥐었다.
포수 사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바닥을 디디며 팔을 내던졌다.
초구는 몸 쪽으로 휘어지는 변화구. 파앙! 단단한 공이 포수 미트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스윙!”
심판이 콜을 외치는 것을 본 임성이 숨을 가득 들이켰다. 여태 던졌던 수많은 공 중 하나일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들썩였다. 새로운 출발선에 선 기분이었다.
만약 김희도가 이걸 봤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 봐요. 잘할 거라고 했잖아요.’ 하고 말하려나. 임성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으며 공을 꽉 쥐었다.
임성의 퓨처스 리그 첫 등판 공식 기록은 3.2이닝, 1자책, 2실점이었다. 비록 실점을 허용했지만, 다행히 타자들의 방망이가 불을 뿜으며 페어리즈의 승리로 끝났다.
“이야. 생각보다 더 강심장이네. 하나도 안 쫄아 보이더라.”
“다 재영 선배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은혜를 아는 놈 같으니.”
모자를 벗고 권재영에게 꾸벅 인사를 하자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마운드에서 내려와 더그아웃에 앉아 있었던 터라 어떻게 던졌는지도 잘 모르겠다. 2군이라도 프로 선수에게 공을 던졌다고 생각하니 현실감이 없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김희도에게 연락하려다가 수업 시간이란 걸 깨닫고 머쓱하게 휴대폰을 내렸다.
“성아. 밥 먹으러 가자.”
“네. 선배님.”
권재영과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개인 운동까지 한 후 숙소로 복귀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침대에 누워 있던 권재영이 “전화 왔어. 계속 울려서 내가 대신 받았다. 너 씻는다고 하니까 아무 말도 안 하고 끊던데?” 하고 말했다.
임성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4)
김희도.
“어? 재영 선배. 혹시 전화 온 사람이…….”
“이름은 모르겠고 젊은 남자던데. 중요한 전화였어? 내가 받으면 안 됐나?”
“그건 아니고…… 아니, 중요한 건 맞지만.”
임성이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말 할 것도 없이 김희도였다. 임성은 권재영을 힐끔 보고선 방을 슬쩍 빠져나왔다.
[저 지금 이천으로 가고 있어요.]
인사말을 할 새도 없이 대뜸 본론부터 들렸다.
이천은 페어리즈의 2군 구장이 있는 곳이자 현재 임성이 지내는 장소였다. 서울에서 아무리 빨리 와도 한 시간 남짓이었고 왕복이면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시간을 확인했다.
PM. 10:17
밤 10시 17분은 PC방에서도 청소년은 쫓아낼 시간이었다. 근데 여길 온다고?
“네가 여길 왜 오냐?”
[그런 말 듣고 가만히 있으라고요?]
“무슨 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방 쓰는 선배가 대신 받은 것뿐이야.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게 말이 돼?”
임성은 자신이 왜 변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했다.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흐르고, 한숨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돼요?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은데.]
정말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김희도가 말했다.
* * *
“오래 기다렸어?”
“좀 전에 왔어요. 차 안 막혔어요?”
긴 다리를 접어 벤치에 앉아 있던 김희도가 고개를 들었다.
“밤이라 별로 안 막히더라. 우리 일주일 만에 보는 건가?”
“정확히는 열흘.”
벌써 열흘이나 됐구나. 구단에 적응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요즘은 등판 준비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갔었다.
“너 내일 경기 있지 않냐? 컨디션 조절 안 해도 돼?”
“지금 컨디션 조절 하러 왔잖아요. 저 내일 홈런 칠 거거든요. 선행 주자 수만큼 투런, 쓰리런, 만루 홈런. 아무도 없으면 솔로 홈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소리 내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통화할 땐 어이없었는데, 막상 얼굴 보니까 기분이 풀리다 못해 반가웠다. 나 혹시 얘한테 약한가. 속으로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나 오늘 첫 등판 했어. 안타 맞고 실점도 먹었는데 엄청 기분 좋더라.”
“안타도 실점도 상관없어요. 잘했어요.”
“하하.”
딱 예상했던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그 모습을 본 김희도가 눈꼬리를 내리며 따라 웃었다.
“넌 왜 웃냐?”
“선배가 귀여워서요.”
“귀여워하는 네가 더 귀엽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를 정리하려고 손을 올리자 김희도가 고개를 슬쩍 숙였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것 봐, 얘가 더 귀엽다니까.
임성은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대신 김희도의 뒤통수를 쓸었다.
그리고 첫 등판 때 느낀 감정과 던진 구종, 고교리그와 다른 점 등을 말했다. 김희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가끔씩 자신의 의견을 내곤 했는데, 타자 입장을 듣는 거라 많은 도움이 됐다.
“선배는 야구 진짜 좋아하네요.”
“재밌잖아. 요즘엔 꼭 투수 시작 할 때처럼 막 두근거리고 신나.”
김희도는 벤치 끝을 꽉 잡고 잠시 침묵하다가 턱을 비스듬히 내리고 시선만 치켜 올렸다. 그새 자란 머리카락이 이마를 쓸며 부드럽게 쏟아졌다.
“나도 내가 진짜 유치한 거 아는데, 웃긴 거 알아서 절대 안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무슨 말 하려고 그렇게 뜸 들여?”
그냥 평범한 얘기를 할 거라면 저런 표정으로 머뭇거리진 않을 것이다. 이미 그에게서 몇 차례 폭탄선언을 들었던 터라 덩달아 긴장 됐다.
“……내가 좋아요, 야구가 좋아요?”
김희도는 마치 눈치를 보듯이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임성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야구.”
하. 어이없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유순했던 눈매 역시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보다 네가 더 좋지. 뭘 당연한 걸 물어.”
김희도가 이상 반응을 보이기 전에 얼른 진심을 덧붙이곤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내지는 ‘당연한 거 아니에요?’ 같은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장난이었는데 놀리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빴나? 뒤늦게 걱정하며 김희도에게 시선을 돌렸던 임성이 순간 멈칫했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옅게 흔들리고, 그 안에 자리한 눈동자는 기묘한 열기에 휩싸인 채 더욱 떨렸다. 떨림, 흥분, 그리고 밤처럼 깊은 애정. 지금은 누가 봐도 그의 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희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희도가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그와 맞닿는 곳마다 불길이 이는 것처럼 뜨거웠다. 임성은 고개를 살짝 들며 숨을 들이마셨다. 봄 냄새가 벅찰 정도로 가득 스몄다.
“정말 좋아해요.”
야. 지금 고백하는 건 진짜 반칙 아니냐?
* * *
임성은 퓨처스에서 꾸준히 등판하며 2군 생활을 익혔다. 코칭 스태프는 물론, 2군에 잠깐씩 내려오는 선배들, 특히 투수에게 여러 조언을 구하며 자신만의 투구 스타일을 만들었다.
선배들은 독한 자식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살갑게 대하는 모습이 싫지 않은 듯 했다.
그 사이 1차 지명도 지나고, 어느새 신인 드래프트 기간이 다가왔다.
“작년 생각 안 나냐? 그땐 너희가 저기 앉아 있었잖아.”
트레이닝 코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TV를 가리켰다. 벽 한쪽을 차지하는 커다란 화면에 [KBO 신인드래프트 현장]이라는 멘트와 함께 익숙한 공간이 보였다. 각자 취향에 맞춰 운동 중이던 선수들의 관심이 TV로 향했다.
저게 벌써 1년 전이네. 시간 진짜 빠르다.
임성은 마지막으로 아령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으며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선유고 후배들…… 예준이도 저기 있겠지. 며칠 전에 한 통화에서 떨려 죽겠다며 앓는 소리를 하던 조예준이 떠올랐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텐데.
드래프트 결과 선유고 선수 중 페어리즈에 입단한 선수는 조예준 한 명이었다. 그는 또다시 주장과 배터리를 짜게 됐다며 좋아했고, 소식을 들은 김희도는 대놓고 똥 씹은 얼굴을 했다.
판이하게 다른 반응에 웃음이 났다.
* * *
시즌 후반, 이솔 페어리즈는 용병들의 부진과 중심 타자들의 잦은 부상으로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잔여 경기를 아무리 계산해도 가을 야구가 힘들다고 판단한 페어리즈 및 하위권 구단 팬들은 장난식으로 어둠의 한국 시리즈, 일명 ‘김희도 리그’를 치렀다.
애매한 순위를 해서 이도 저도 아닐 바에 화끈하게 꼴찌를 하고 전국 지명권을 얻자는 의견이 일부 나왔다. 그만큼 김희도의 실력이 독보적이란 뜻이었다.
프로 10개 구단 팬이 모인 <그깟 공놀이!> 에서도 김희도의 이름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잘생긴 외모와 출중한 실력이 어우러져 재작년 이치연을 뛰어넘는 관심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김희도 선수. 베이스볼 러브입니다. 안타깝게 우승은 놓쳤지만, MVP에 선정되었어요. 축하드립니다. 아직 1차 지명까지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만, 벌써 김희도 선수를 향한 팬들의 관심이 지대합니다. 특별히 원하는 구단이 있을까요?』
『이솔 페어리즈에 갑니다.』
‘가고 싶다.’가 아닌 ‘간다.’였다. 확신으로 가득한 대답에 잠시 멈칫했던 리포터가 다시 마이크를 가까이 댔다.
『혹시 이솔 페어리즈 말고 다른…….』
『다른 구단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지명 전에 대충 어느 구단이 뽑을 거라는 소문이 나기 마련이라 대부분 그 구단을 얘기하거나 모호하게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래야 나중에 타 구단에 갔을 때 덜 민망하니까.
하지만 김희도는 처음부터 줄곧 “이솔 페어리즈.”를 외쳤다. 처음 몇 번은 그러지 말라고 말리던 임성도 이젠 될 대로 되라 싶은 심정으로 내버려 뒀다.
페어리즈 팬들은 김희도의 발언을 적극 환영했고, 타 구단 팬들은 못마땅해 하면서도 완전히 놓지 못했다.
그리고 김희도가 그렇게 부르짖는 페어리즈는 현재 6연패를 달리는 중이었다. 올스타전까진 그럭저럭 버티던 용병 투수가 퍼진 것이었다. 그것도 한 명도 아닌 둘 다.
선발 투수가 이닝을 먹지 못하니, 당연히 불펜에 과부하가 걸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타격 사이클도 내려가 딱히 반등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 연패가 이어지자 구단 SNS와 유튜브 채널에 비난 댓글이 쇄도했다.
소속팀이 욕먹는 걸 보는 임성의 심정도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퓨처스 리그에서 묵묵히 공을 던질 뿐.
그해 「김희도 리그」의 최종 승리자는 페어리즈였다. 9위 엠퍼러즈와 불과 2게임 차였다.
* * *
이듬해, 조예준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희도는 열아홉 살이 됐다.
고3이 된 김희도는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처음엔 응원하는 팀이 꼴찌를 한 것에 분개하던 일부 페어리즈 팬들도 김희도의 활약을 본 후에는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꼴찌 한 보람이라도 있어야지.
그리고 3월 말, 봄바람과 함께 프로 야구가 개막했다.
임성은 2군에서 1년을 꽉 채우고 두 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그 사이, 동기 몇 명이 1군 무대를 밟기도 했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1군에 서는 것보다 밸런스를 잡는 게 우선이었고, 차근차근 하다 보면 기회가 올 것이라고 여겼으니까.
고등학교 때 지적받던 구속은 걱정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올랐다. 페어리즈 선수들과도 많이 가까워졌다. 워낙 서글서글하고 예의가 바르다 보니 선배, 동기, 후배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잘 지냈다.
페어리즈 부동의 마무리 투수이자 작년에 잠깐 같은 방을 썼던 권재영이 특히 임성을 예뻐했다.
권재영 본인 왈, 아무도 전수해 준 적 없다는 변화구를 알려 주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후원받는 브랜드의 야구 용품을 주거나 일부러 2군까지 찾아와 밥을 사 주고 돌아가곤 했다.
“권재영 선배님 맞죠? 가까이서 보니까 포스가 장난 아니네요. 주장은 안 떨려요?”
“떨릴 게 뭐 있어. 장난도 잘 치고 되게 괜찮은 선배야.”
“중고등학교 땐 후배들이 그렇게 따르더니, 이젠 선배님들까지 섭렵했네요. 역시 주장, 대단하십니다.”
임성 덕분에 덩달아 권재영에게 저녁을 얻어먹은 조예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퓨처스 경기를 끝내고 여느 때처럼 개인 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트레이닝 룸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2군 매니저가 시뻘건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헉, 허억. 성아.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다.”
“저를요? 무슨 일 있으세요? ……여기 수건요, 땀 좀 닦으세요.”
“지금 땀이 문제가 아니야. 성이 너 콜업 됐어.”
“네?”
콜업이 뭐더라?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져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1군 콜업 됐다고. 1군! 너랑 민기 올리라고 방금 연락받았다. 얼른 짐 싸라.”
매니저는 마치 자신이 콜업 된 것처럼 기뻐하며 임성을 와락 껴안았다.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믿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매니저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하다가 얼른 짐을 꾸리란 말에 숙소로 뛰어갔다.
옷장 문을 열어젖히고 구단 로고가 박힌 민트색 후드 티, 아이싱 티, 연습복, 그리고 유니폼을 차례대로 응시했다. 그러다 유니폼이 구겨질 정도로 꽉 움켜잡으며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신호음이 채 한 번이 넘어가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희도야. 나 1군 등록됐다. 방금 전달받았어.”
숨이 벅차오르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그 누군가가 김희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하잖아요. 이제 부르는 거 보니까 거기 감독도 참 감 없네요.]
축하한다는 말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임성은 휴대폰을 귓가에 좀 더 가까이 붙이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귀가 간질간질했다.
[진심으로 축하해요. 지금 선배 옆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지금 통화하고 있잖아.”
[그거론 부족하니까 그렇지. 어깨랑 등은 어때요? 또 무리하는 건 아니죠?]
“응. 좋아.”
[…….]
이것저것 묻던 김희도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혹시 끊겼나 싶어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지만,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나도, 좋아해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듯 억눌린 고백이었다. 임성은 입술을 꽉 깨물며 쿵쿵 뛰는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야. 그런 말을 전화로 하면…….”
[지금 갈게요. 우리 만나요.]
다소 조급한 목소리가 울리고, 현관문을 여는지 덜컹대는 소리가 뒤이어 울렸다.
“아니, 아니야. 안 와도 돼. 어차피 나 지금 서울 가.”
지난 1년 반 동안 김희도는 이천에 자주 찾아왔었다. 얼굴을 보는 시간은 고작 몇 분밖에 없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1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를 달려왔다. 그 무심한 놈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활짝 웃곤 했다.
[서울 오면 조예준이랑 떨어지겠네. 속이 다 시원하다.]
“어. 예준이는 여기서 좀 더 배울 것 같아.”
[영원히 거기 찌그러져 있으라고 해요. 아예 다른 팀으로 가면 더할 나위 없고.]
“그 말 예준이가 들으면 난리 나겠다.”
[알 게 뭐야.]
흥. 김희도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희도야. 나 지금 나가야겠다.”
[도착하면 연락주세요.]
“등록만 되고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뭐. 아무튼 알았어. 이따 보자.”
[오자마자 연락해요. 바빠서 까먹었다는 변명 같은 거 안 믿어요, 나.]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잠실구장으로 가는 내내 배 속이 긴장으로 울렁거렸다. 1군 마운드…… 거기에 선 제 모습을 그려 보려 했으나,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구장에 도착한 임성과 최민기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2군 사무실보다 훨씬 넓고 사람이 많아, 심리적으로 살짝 위축됐다.
“어. 임성, 최민기. 오느라 고생 많았다.”
“안녕하십니까!”
두 사람은 구단 관계자에게 90도 가까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 * *
며칠 뒤 일요일, 잠실구장. 아직 경기 시작 전인데도 관중들로 시끌벅적했다. 페어리즈 홈경기라 민트색 유니폼을 입은 팬이 훨씬 많았지만, 그조차도 지금은 부담이었다.
“야, 임성. 너 괜찮냐? 완전 새파랗게 질렸는데.”
임성은 오랜만에 만난 옛 룸메이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괜…… 안 괜찮습니다.”
“그래 보인다.”
권재영이 킬킬 웃으며 임성의 등을 퍽퍽 쳤다. 제법 세게 때렸음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역시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며칠 전, 구단에 도착한 임성은 감독에게 불려갔다. 지난 1년 반 동안 가끔 스치듯 얼굴을 본 적은 있어도 독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일까? 설마 콜업 되자마자 다시 돌아가라는 건 아니겠지? 탁. 파일을 책상에 내려놓은 감독이 잔뜩 긴장한 임성을 쳐다봤다.
‘데이터 잘 봤다. 직구 변화구 비율도 적절하고, 구속도 많이 끌어 올렸더만. 사사구가 적은 거 보면 노력했네.’
‘감사합니다.’
팀 감독이니 2군 선수 기록 보고를 받는 게 당연하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연예인이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재영이 말로는 체인지업이 그렇게 좋다며? 박재이 느낌 난다고 칭찬 많이 했다. 데이터로 모든 걸 판단할 순 없지만 나쁘지 않다.’
‘감사합니다.’
‘내일 경기에 등판해 봐라. 불펜으로 나가 봐.’
‘네. 감사합니다.’
“씩씩해서 좋네. 신인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자세한 건 김세현 코치에게 듣고.”
‘네. 감사합니……?’
앵무새처럼 감사합니다만 외치던 임성은 뒤늦게 감독의 말을 이해하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감독님.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감독은 이미 회의실을 나간 뒤였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매니저를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관계자 외 출입 엄금이라 적힌 회의실엔 투수 코치뿐 아니라 주장, 주전 포수, 데이터 팀 등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오늘.
무수한 걱정 속에서 임성은 처음으로 1군 경기에 합류했다. 험악하거나 예민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다르게 그라운드 분위기는 자유롭고 편했다. 특히 FA로 이적한 선수들은 친정 팀 선수와 인사를 하고 농담도 나눴다. 임성은 권재영에게 끌려가 오늘 대결 팀인 폭스 선수에게 인사를 했다.
“얘가 요새 내가 키우는 애. 잘생겼지?”
“안녕하십니까. 임성입니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래. 열심히 해라. 야, 권재영 네가 키우긴 뭘 키워. 후배 앞길이나 안 막으면 다행이지.”
“형이나 잘해. 하도 헛스윙 해서 선풍기인 줄 알았잖아.”
“뭐래. 네 공은 거의 기어 오는 수준이거든.”
권재영과 폭스 선수가 아옹다옹하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아, 긴장돼 미치겠네.
커다란 전광판에 선발 라인업이 떴다. 불펜에서 대기 중인 임성은 전광판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지만, 구장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SS 폭스와의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 초, 양 팀 선발 투수는 호쾌한 피칭으로 타자를 아웃시켰다.
파앙, 팡! 미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함께 덜컹거렸다.
“인마, 뭘 벌써부터 쫄아. 점수 타이트하면 안 나갈지도 몰라. 설마 쌩 신인을 1, 2점 차에 내보내겠냐.”
그래. 재영 선배의 말이 맞다. 지금 우리 팀이 2점 앞서는 중이니까 나가도 필승조가 나가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 푸는 데 집중했다.
『SS 폭스와 이솔 페어리즈의 경기가 펼쳐지는 잠실구장입니다. 현재 스코어는 3 대 5. 페어리즈가 2점 앞선 상황에서 투수 교체를 요청합니다. 임성. 작년 5라운드로 지명 받고 올해 첫 등판하는 신인 선수네요.』
권재영의 설마?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재영 선배. 타이트한 경기엔 안 보낸다면서요. 살짝 원망스러운 눈길로 권재영을 보자 머쓱한 얼굴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잘해라.
임성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그라운드로 걸어 나갔다.
마운드에 발을 디디고 서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 푹 잠긴 것처럼 귀가 먹먹하고 바늘구멍을 통해 보는 것처럼 시야가 좁아졌다.
후우, 하. 임성. 할 수 있다. 이날만 기다렸잖아. 글러브를 낀 손을 가슴에 얹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우선 집어넣는 것부터. 포수 미트만 보고 던지자.
오른쪽 다리로 무게를 지탱한 채 상체를 틀었다가 팔을 앞으로 뻗었다. 살짝 높았던 손목이 내려가며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공이 허공을 갈랐다.
따악. 스트라이크 존에서 살짝 비켜난 공은, 다행히 폭스 타자가 배트를 휘두르며 아웃 카운트로 기록됐다.
“후우.”
와, 미치겠네. 이제 겨우 공 한 개 던졌을 뿐인데 진이 다 빠졌다. 이렇게 해서 타자를 아웃시킬 수 있을까? 퓨처스에서 던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압박감이 온몸을 눌러왔다.
로진백을 만졌음에도 손바닥이 금세 축축해졌다. 임성은 옆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공을 던졌다. 배트에 맞은 공이 파울 지역으로 떨어졌다.
“잘한다. 그대로 던져.”
“파이팅, 임성 파이팅!”
더그아웃에서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볼.”
대놓고 유도하는 어설픈 변화구에 타자는 속지 않았다. 심판의 볼 판정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때 정면에 앉은 포수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다음에 던질 공을 주문했고, 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볼 판정을 받으며 카운트는 2-2가 됐다.
임성. 정신 차려. 풀카운트는 안 된다. 하나만 더 넣자. 제발.
“릴렉스, 릴렉스. 긴장하지 마.”
더그아웃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고 귓가에서 웅웅댈 뿐이었다.
“야, 임성. 미트 똑바로 보고, 어깨에 힘 풀어.”
깡.
하나만, 제발, 제발 하나만.
기도를 하듯 중얼거리며 던진 공은 폭스 타자의 배트에 정확히 맞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홈런은 아니겠지? 고개를 휙 치켜들고 공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공이 뻗어 나갈수록 숨통이 조여 드는 느낌이었다. 펜스를 향해 힘차게 날아가던 공은 다행히 외야수 글러브 속에 안착했다.
데뷔 첫 아웃 카운트였다.
“하아.”
이미 투 아웃 상황에서 올라왔던 터라 곧바로 공수가 교체됐다.
“잘했다. 이따 공 챙겨라.”
야수들이 임성의 어깨와 등을 툭 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땀을 식히거나 이온 음료를 마시는 등 여유로운 선수들과 다르게 임성의 다리는 풀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특히 마지막 공을 생각하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홈런인 줄 알았어. 임성은 반쯤 넋 놓은 채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벅지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충분히 물 마시고. 혹시 모르니까 다음 이닝도 준비해.”
코치가 다가와 임성에게 수건과 물을 건넸다.
가만히 있는데도 팔이 저릿저릿했다. 오랜 시간 꿈꾸고 그토록 원하던 마운드인데도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구장을 빽빽하게 채운 팬들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 이닝? 할 수 있을까.
“선배. 임성 선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임성은 자신의 이름을 듣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그라운드에 시선을 둘뿐, 여길 보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환청까지 들리는 건가.
“임성 선배. 임성.”
임성은 올해 2년 차 신인 선수였다. 이번에 들어온 후배들 대부분은 아직 2군에 있었고, 지금 자신을 선배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임성은 소리의 진원지를 홀린 듯 찾아 나섰다.
“선배.”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선이 빠르게 돌아갔다.
“여기예요.”
더그아웃과 가까운 좌석에 선유고(先喩高)라는 글자가 선명히 적힌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처음엔 믿을 수 없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김희도……?”
임성은 한숨을 내뱉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진짜 김희도 맞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헛것을 보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야 쟤가 어떻게 여기 있어.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요. 잘 던졌어요?”
“아웃, 아웃 카운트 잡았어.”
목이 메어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토하듯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더 들어 김희도를 올려보며 남은 말도 내뱉었다.
“어쩌면 나 다음 이닝에 또 올라갈지도 몰라.”
“잘됐네요. 선배 공 던지는 거 좋아하잖아요. 마음껏 던지고 오세요.”
와아아아아! 그때,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렸다. 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페어리즈의 추가 안타가 터진 것이었다. 그라운드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김희도를 쳐다봤다. 보호 펜스를 꽉 잡은 김희도가 확신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할 겁니다. 뭐, 못 해도 상관없고. 내가 먹여 살린다는 말은 기억하죠?”
아직도 그 얘기냐? 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임성. 거기서 뭐 하냐?”
“네, 코치님. 지금 갑니다.”
마지막으로 김희도를 한 번 더 돌아보고 더그아웃으로 복귀했다. 그사이 페어리즈는 1점을 더 추가해 총 3점을 리드하며 폭스의 추격을 따돌렸다.
임성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망하면 어때요. 내가 먹여 살릴게요.’
지금보다 훨씬 앳된 김희도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그라운드 내에서 가장 높은 곳인 마운드. 여기에 선 이상 열심히 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잘해야 했다. 하지만 너무 잘하려다 보면 얻어맞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고, 도망가는 투구를 하게 됐다.
‘내 공은 절대 맞으면 안 돼.’가 아니라 ‘맞으면 어때. 다음 타자 잡으면 되지.’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하고 단순한 걸 왜 잊었는지 모르겠다. 떠올리지 못할 만큼 긴장했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임성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차갑던 손바닥에 어느새 잔잔한 온기가 돌았다.
스윙!
직구와 비슷한 폼으로 던진 변화구에 타자가 헛스윙으로 화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개의 공.
“아웃!”
심판이 아웃콜을 외쳤다.
『아, 신인에게 멀티 이닝은 가혹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처음보다 훨씬 안정된 모습을 보입니다. 직구와 변화구를 적절하게 썼어요.』
『네. 맞습니다. 특히 체인지업 폼이 직구와 비슷해서 오원석도 깜빡 속은 것 같습니다. 임성은 신인답게 씩씩하게 잘 던졌어요. 반면에 오원석 선수는 좀 더 적극적으로 플레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임성은 모자를 벗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팀원들의 박수와 관중의 함성, 응원 단장의 목소리까지 모두 들렸다.
아, 마운드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이렇구나.
짜릿했다.
성공적인 데뷔와 승리의 기쁨을 느낀 경기가 끝난 후 임성은 구단 채널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양옆에 깜찍한 날개가 달린 페어리즈 로고 스티커가 붙은 카메라를 든 PD가 등판 소감을 물었다.
“사실 생각이 안 납니다. 그저 사람만 맞추지 말자는 심정으로 던진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첫 등판한 신인다운 대답에 PD가 소리 내 웃었다.
“하하. 그런 것치고 무척 과감한 투구를 보였는데요. 어떻게 긴장을 푸셨나요? 무슨 생각을 하며 던졌습니까?”
“김…….”
“김?”
PD가 임성의 말을 따라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 김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매일 가던 분식집이 있는데, 거기 떡볶이와 김밥이 엄청 맛있거든요.”
“오, 김밥 맛집인가 봅니다. 다음 기회에 한번 소개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팬 분들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아, 분식집 이름을 알려 줘도 좋겠네요.”
망했다. 망했어. 웃음 섞인 PD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며 던졌냐는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김희도였다.
선배가 좋아하는 야구를 해서 잘됐다는 말과 함께 활짝 웃던 얼굴이 생각났다. 그걸 그대로 내뱉으려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이야. 김밥 생각 하며 던지다니 너 은근 골 때리는 놈이었구나. 하긴,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 여기서 버티지. 오늘 고생했다.”
권재영은 보기 드문 신개념 인터뷰였다며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고, 다른 선배들 역시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한동안은 이걸로 놀려 먹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김밥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미팅이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구장을 뛰쳐나왔다. 페어리즈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곳곳에 보였지만, 그들의 관심은 오늘 첫 데뷔한 신인 선수가 아닌 한쪽 벽에 기대어 있는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
“왔어요?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
입매를 굳히고 휴대폰을 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무심한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본 임성이 성큼성큼 걸어가 그를 꽉 껴안았다. 놀란 듯 움찔대는 남자를 더욱 세게 안고 어깨에 턱을 얹었다.
“무슨 일 있어요?”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목소리가 들뜬 게 스스로 느껴졌다.
“얼굴 보여 주면 안 돼요? 보고 싶은데.”
“안 돼. 절대.”
어쩐지 지금 제 표정을 보여 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 * *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주섬주섬 물러선 임성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첫 아웃 카운트 공이야.”
“프로 인생 통틀어서 하나밖에 없는 거잖아요. 나한테 줘도 돼요?”
처음부터 김희도에게 주려고 했던 거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뺨을 발갛게 물들인 김희도는 공을 만지작댔다.
“진짜 기쁘다.”
하. 얜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엽고 난리냐. 임성은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 쓰며 입을 열었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긴장 풀리고, 제구도 잡혔어.”
“찾아온 보람이 있네요. 그것보다 선배…….”
바지 주머니에 공을 집어넣은 김희도가 한 발짝 다가왔다. 수줍던 눈동자는 어느새 다른 감정을 품고 빛났다. 왠지 모를 박력에 밀려 주춤주춤 물러서던 임성은 어느새 등이 벽에 닿은 걸 깨닫고 멈췄다. 더 갈 곳이 없었다.
“일주일에 세 번. 약속했잖아요. 우리 한 달 동안 못 한 거 알아요?”
“그건…… 고등학교 때잖아.”
“그때 선배는 분명 ‘야구부에 들어오면’이라고 했어요. 전 아직 선유고 야구부고요. 여전히 약속이 유효하단 뜻이죠.”
나름 일리 있는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택했다. 김희도가 씩 웃으며 임성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 임성의 모자 끝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가요.”
“어딜?”
“어디든.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느긋한 목소리와 달리 손목을 붙잡은 아귀힘은 억셌다.
뛰듯이 빠르게 걸어 도착한 곳은 카페 건물 화장실이었다. 다행히 화장실 안에 사람이 없어 아무 의심 없이 칸에 들어갈 수 있었다.
“헉, 아. 잠깐……. 김희도. 잠깐 기다려 봐.”
“여기서 어떻게 더 기다려요. 그리고 선배는 맘대로 나 안아 놓고 나보곤 왜 기다리래?”
쾅. 문이 닫히고 곧장 벽에 밀어 붙여졌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소름 돋는 것도 잠시, 뜨거운 온기와 함께 거친 숨이 목을 파고들었다.
살갗이 씹히는 감각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임성은 다급히 김희도의 어깨를 짚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아프…… 좀 진정해.”
“선배는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진정하는 게 가능해요?”
상체가 틈 없이 맞붙고 다리는 복잡하게 엉켰다. 목덜미에 번지는 저릿한 통증에 눈을 찌푸리면서 그 언젠가를 떠올렸다.
비가 잔뜩 오던 여름 끝 무렵이었나, 김희도에게서 첫 고백을 받고 ‘내 체취가 좋아서 착각한 거 아니냐.’ 하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좋아해요.”
“……알아.”
“아니요. 선배는 몰라요. 내가 선배를 보면서 무슨 생각하는지 상상도 못 할걸.”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제 잇자국이 난 부분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내일쯤 지워지려나. 얼마큼 세게 물어야 자국이 사라지지 않을까.
“다 깨물었어? 이제 좀 만족하냐?”
김희도는 쇄골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일주일 내내 안고 있어도 부족할걸요. 뽀뽀해 주면 채워질지도.”
서로의 콧날이 스치며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후, 살짝 갈라진 숨이 아랫입술에 내려앉았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화장실은 숨소리마저 적나라하게 울렸다.
“어린 자식이. 냄새 맡는 걸로 참아라.”
임성은 제 모자를 벗어 그에게 씌우며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살 훑었다.
“너 또 키 컸지?”
고등학교 입학 즈음엔 확실히 작다가 자신이 졸업할 땐 시선이 거의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야 했다.
“얼마냐?”
“지난달에 쟀을 때 185.7cm이었어요.”
“185cm?”
“쩜, 칠. 185보다는 186cm에 가깝지 않을까요?”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더니.”
“애 취급 하지 마세요.”
뚱한 표정으로 저렇게 말해 봤자 귀엽기밖에 더 한가.
“대체 뭘 먹으면 그렇게 크냐? 나도 딱 3cm만 더 크면 좋겠다.”
“딱히 뭘 먹진 않은데. 먹고 싶은 건 있지만.”
임성이 씌워준 모자챙을 만지던 김희도가 제 손 냄새를 맡았다.
“아, 너 저녁 전이지? 첫 승…… 은 아니고, 첫 홀드 기념으로 내가 산다. 뭐 먹을래?”
“김밥이요.”
김밥? 뜬금없이 웬 김밥이냐고 물으려다가 오늘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곤 이마를 짚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건 그냥 한 말이니까 김밥 안 먹어도 돼.”
“그럼 곤약이 잔뜩 들어간 매운맛 떡볶이.”
“그것도 나 때문이잖아.”
“묵은지 김치찌개.”
“너 먹고 싶은 거 말하라니까.”
“선배.”
한층 낮은 목소리로 김희도가 말했다. 울퉁불퉁한 잇자국으로 가득한 목을 매만지던 자세로 임성이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김희도는 눈이 마주치자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싸늘하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가 좋아하는 게 내가 좋아하는 거예요. 이젠 알 때도 됐잖아요.”
* * *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베이스볼 러브 이아영입니다. 프로 야구 신인 1차 지명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서울 지역 유력 후보 중 한 명인 김희도 선수와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김희도 선수, 베이스볼 러브 시청자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김희도입니다.』
『원래도 잘하는 선수였습니다만, 요즘은 그야말로 미친 타격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배트만 갖다 댔다 하면 치는 수준인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비결이 뭡니까?』
『페어리즈 지명을 목표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하, 여전히 페어리즈인가요? 김희도 선수의 페어리즈 사랑은 예전부터 유명했죠. 페어리즈에 가고 싶은 이유가 있나요? 혹시 있다면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낮에 진행된 김희도의 인터뷰였다.
김희도는 아나운서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페어리즈의 팬이라고 여겼지만, 임성의 생각은 달랐다.
-나: 인터뷰 그게 뭐냐.
톡을 보내자마자 숫자 1이 사라지고 노란 말풍선이 떴다.
-김희도: 그럼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김희도: 선배 때문에 야구 한다고.
-김희도: 말하면 난 더 좋지.
-김희도: 만약 선배가 유니콘즈 갔으면 유니콘즈라고 대답했을 거예요.
임성은 연달아 뜬 문자를 보며 고민에 휩싸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권재영이 하품을 하며 트레이닝 룸에 들어왔고, 임성은 휴대폰을 쥔 채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거참.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선배는 딱딱하잖아. 아, 그리고 방금 김세현 코치님 만났는데, 너 전략실로 오래. 표정 보니까 혼내시려는 건 아닌 것 같더라.”
결국 김희도에게 답장을 보내지 못한 채 전략실로 향했다.
구내식당을 비롯한 사무실 곳곳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환한 복도를 걷던 임성은 마케팅 팀장을 발견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던 팀장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임성 선수.”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송우림 선수 1500안타 기념 유니폼 마감이 오늘까지거든요. 하, 퇴근이란 걸 언제 했는지 모르겠네요.”
“우림 선배님 기념 유니폼 나옵니까?”
“그럼요. 우리 팀 프차잖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의 눈 밑에 짙게 내려온 그늘을 보니 힘들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머리 터지기 직전이에요. 디자인이 조금이라도 구리면 구단 SNS에 바로 댓글 달리거든요. 월급 받고 뭐하냐고. 음, 댓글 하니까 생각났는데, 임성 선수 열혈 팬 있는 거 알아요?”
“열혈 팬이요?”
저한테요? 임성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팀장이 손사래를 쳤다.
“어휴, 말도 마세요. 임성 선수 입단 때부터 유니폼 내 달라고 난리가, 난리가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많게는 일주일에 일곱 번, 적어도 서너 번은 올라올걸요.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 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니까. 닉네임이 뭐였더라…… 영어였는데. 앗, 저 가 봐야겠어요. 다음에 봐요.”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웃대던 팀장은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보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팬이 없는 야구는 생산성 없는 공놀이일 뿐이라는 말이 있듯 야구에서 팬은 절대적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인기 선수 위주로 굿즈가 제작됐다. 유니폼 판매 순위가 곧 인기의 척도라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임성은 지난 1년 반 동안 퓨처스 리그에 있다가 이제 막 1군에 올라온 참이었다. 구장 근처에서 아주, 아주 가끔 알아보는 정도의 인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열혈 팬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는데. 힘내라는 의미에서 팀장님이 과장한 거겠지.
“코치님. 임성입니다.”
결론을 내린 뒤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 * *
[주장. 1군 공기는 어때요? 막 상쾌하고 달콤한가?]
“아직 잘 모르겠다. 더 있어 보고 말해 줄게. 예준이 너도 얼른 와야지.”
[안 그래도 열심히 하는 중입니다. 아, 김희도 그 새끼 또 입 턴 거 봤어요? ‘페어리즈 임성 원해.’ 미친 새낀가 싶었다니까요?]
“어…… 음.”
[저렇게 나대다가 안 뽑히면 어쩌려고.]
“그러게 말이야.”
임성은 웨이트 하러 갈 거냐고 묻는 권재영에게 “이따가요.” 하고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 고개를 끄덕인 권재영이 여분 옷을 목에 걸고 나가는 것을 보고 조예준과 통화에 집중했다.
[주장도 그 새끼 뽑힐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하하.”
틀린 말은 아니라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김희도도 그걸 아니까 인터뷰 때마다 페어리즈, 페어리즈 노래를 부르는 거지. 하필 지명권도 우리가 갖고 있냐?]
“희도까지 오면 또 셋이 뭉치는 건가? 나 지금 엄청 기대 중이야.”
그때 선배 무리가 휴게실에 들어왔고, 임성은 벌떡 일어나서 인사했다.
신경 쓰지 말고 통화하라는 듯 손을 내저은 선배들은 냉장고에서 이온 음료를 꺼내 금방 휴게실을 나갔다.
[기대요? 주장 졸업하고 그 새끼 어땠는지 알면 그런 말 못 할걸요? 야구부 애들 중에 걔랑 말 한마디 못 한 사람이 절반일 거예요. 그 새끼는 선배 앞에서만 착한 척하잖아요. 가증스러운 놈.]
“너희는 2년을 같이 뛰고도 똑같냐.”
[아마 평생 변하지 않을 겁니다. 가능하면 상종 안 하고 싶어요.]
그 후로도 한참이나 김희도의 욕을 듣고 나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임성은 조예준이 말했던 인터뷰를 검색했다.
「지명 1순위 예측 선유고 3학년 타자 김희도(18) “페어리즈 임성 원해.”」
상당히 묘하게 느껴지는 제목이었다.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으로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프러포즈를 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페어리즈가 아닌 다른 구단은 생각도 안 하고 있습니다.”
그간 꾸준히 페어리즈 팬임을 밝힌 김희도(선유고)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했다. 2년 선배 임성(페어리즈· 20)의 이름을 거론할 땐 살짝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임성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거라며 꼭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1차 지명이 눈앞에 다가온 지금, 그는 원하는 요정의 날개를 달 수 있을까.
-베이스볼 러브 강지현 기자([email protected])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프로 야구 순위 싸움이 한창인 6월 세 번째 주. 구단의 미래를 책임질 1차 신인 지명이 있는 날이었다.
임성은 이른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하며 정신없는 모습을 보였다. 과장을 살짝 보태서 자신의 드래프트 때보다 더 긴장됐다. 좀처럼 운동에 집중되지 않아 운동장 스무 바퀴를 돌고 웨이트실로 갔다.
이미 운동 기구를 점령하고 있던 선수들 역시 지명 얘기가 한창이었다.
“선유고 김희도? 걔가 제일 유력하지 않나? 1학년 때부터 MVP 휩쓸었다며.”
“걔 메이저 간다고 안 했나?”
아니요. 메이저 생각 전혀 없답니다. 임성은 구석에서 튜빙밴드를 잡았다. 죽 늘어나는 밴드를 잡고 양쪽 견갑골을 최대한 붙인 채 어깨와 팔을 움직였다. 동작이 단순해 언뜻 쉬운 것 같아도 쉬지 않고 하다 보면 땀이 줄줄 흘렀다.
“괜찮은 투수 있으면 걜 데려올 수도 있지. 김희도는 수비가 허접하다는 말 있더니만.”
“수비야 배우면 되지, 타격이 미친 수준이라며.”
“뭔 소리야. 타격이야말로 배우면 되지만 수비는 힘들지. 타고난 센스가 있어야 가능해.”
이내 두 선배는 공격과 수비 둘 중 뭐가 더 중요한지 열띤 토론을 펼쳤다. 그 옆에서 임성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심호흡을 했다. 뭘 해도 집중이 되지 않아 밴드를 내려놨다.
“김희도가 우리 구단 오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애 아냐? 다른 구단이 자존심 상해서 뽑겠어?”
“자존심이 밥 먹여 줘? 팬들도 잘하는 애 데려오는 걸 좋아한다는 데 초코바 하나 건다.”
공격과 수비 얘기가 끝났는지 다시 김희도 얘기로 돌아갔다.
지난 2년 동안 그렇게 페어리즈를 외치더니 선배들까지 아는구나.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코치님은 별말 없으셨어? 보통 발표 전에 연락하잖아.”
“별말 없으시던데? 물어보지도 않았다.”
보통 1차 지명은 학교나 선수에게 먼저 연락이 가기 마련이었다. 김희도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알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페어리즈의 연락을 받았다면 바로 티를 냈을 텐데, 설마 못 받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날 경기 시작 전까지도 김희도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결국 임성은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채 불펜으로 마운드에 올라갔다.
상대팀은 최근 타격이 물오른 MK 엠퍼러즈로, 예상대로 강했다.
임성이 던진 변화구는 엠퍼러즈 타자의 배트에 맞으며 3유간으로 굴러갔다. 그에 유격수가 다이빙을 하듯 몸을 날리며 글러브를 내밀었지만, 닿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내야 안타로 기록됐다.
만약 잡았다면 슈퍼 플레이였겠지만, 지금은 타자가 잘 친 게 컸다. 그러니까 괜찮아. 임성은 숨을 들썩이며 목에 흥건히 맺힌 땀을 닦았다.
지금 몇 시지, 드래프트 결과 나왔으려나? 그러고 보니, 엠퍼러즈가 작년 9위였지. 우리 다음으로 1차 지명권을 가진 구단. 무의식중에 타자를 쏘아보다가 공을 던졌다.
동시에 1루에 있던 엠퍼러즈 타자가 도루를 시도했고, 비껴 맞은 공을 2루수가 잡아엠퍼러즈 타자를 태그하고 곧장 1루로 던지며 순식간에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올렸다.
깔끔한 병살 플레이에 관중들이 환호로 보답했다.
0.2이닝을 끝내고 다음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그 후 9회에 마무리로 등장한 권재영은 엠퍼러즈 4번 타자에게 투런을 허용하며 팀은 역전패를 당했다.
경기가 끝난 후 라커룸으로 돌아간 임성이 스포츠 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톡을 확인하는 손길이 제법 조급했다.
-김희도: 경기 끝났어요?
-김희도: 지금 구장 앞이에요.
-김희도: 잠깐 만나요.
이미 김희도에게서 연락이 여러 개 와 있었다. 젖은 유니폼을 급하게 갈아입은 임성이 구장을 뛰쳐나왔다.
허리께까지 오는 낮은 담장에 몸을 걸치고 남자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무심하던 표정은 임성을 발견하고 환하게 피어났다. 임성은 빠르게 걸어 김희도의 앞에 섰다.
“어떻게 됐어? 지명.”
가장 궁금하던 것부터 물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장난치지 말고.”
김희도는 팔을 뻗어 임성의 허리를 꽉 끌어안더니 담장 위에 내려놨다. 작은 키가 아니라 발끝이 바닥에 넉넉하게 닿았다. 임성은 그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대답을 종용했다.
“얼른 말 안 하냐? 네 연락 받고 바로 뛰어와서 확인 못 했단 말이야.”
“어느 구단이 날 거르겠어요? 선배님.”
김희도가 씩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 *
1차 지명에 이어 신인 드래프트까지 마무리 짓고 새로운 얼굴들이 확정됐다.
한때 가을 야구 문턱까지 갔던 페어리즈는 후반기 기세가 꺾이며 최종 7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나마 수확이라면 신인들의 활약이라고 할까.
6월 초 처음으로 1군 마운드를 밟은 임성은 불펜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며 막판엔 자책점이 치솟았다.
“제가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는 시즌이었습니다. 내년에는 더 좋은 모습 보이겠습니다.”
감독과 코치는 처음 1군에 올라온 것치고 잘했다며 위로했지만, 당사자는 조금도 만족하지 않았다.
정규 시즌은 끝이 나고 가을 야구에 진출하지 못한 팀들은 비시즌에 돌입했다. 고향이 지방인 선수들은 본가로 내려갔으며, 임성은 마무리 캠프에 참여해 열심히 훈련했다.
일찌감치 프로행이 결정된 김희도는 구단 인터뷰다 뭐다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니 없는 시간을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임성을 찾아오곤 했다.
두 사람은 찬 공기가 내려앉은 놀이터에서 한참 동안 대화하곤 했다.
12월, 눈이 원 없이 쏟아지고, 정신없는 크리스마스까지 지나가며 한 해의 끝이 다가왔다는 게 느껴졌다.
-권재영: 한국 날씨는 어떠냐?
-나: 어제도 눈 내렸습니다. 사이판은 어떻습니까?
-권재영: 완전 좋지.
-권재영: (사진)
-권재영: 하늘 엄청 파란 거 보이냐? 그러게 같이 오자니까.
권재영이 보낸 사진 속 하늘은 그의 말처럼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다. 사시사철 햇볕이 내리쬐는 곳이라 운동하기엔 저만한 곳이 없었다.
임성은 ‘내년에 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고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닫았다.
올 시즌이 끝난 후, 권재영은 비행깃값을 비롯한 모든 비용을 지원해 줄 테니 사이판으로 같이 훈련을 가자고 제의했다.
문제는 하필이면 김희도와 밖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연락이 왔다는 점이었다. 테이블에 액정이 보이게 휴대폰을 올려놓은 채라 메시지가 바로 보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는 ‘따뜻한 나라에서 훈련하는 거 좋죠. 선배에게 가지 말라고 할 입장도 아니고. 전 괜찮으니까 다녀오세요.’ 하고 말했다.
‘그 표정으로 괜찮다는 말이 나오냐?’
‘제 표정이 어때서요?’
그는 고저 없이 말하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떤 표정이긴, 진짜 갔다간 가만 안 둘 것 같은 표정이야.
‘그래서 어느 나라로 가는데요? 어느 나라, 어느 도시, 묵을 호텔 이름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요.’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김희도가 물었다.
결론만 말하면 권재영의 제의는 거절했다. 꼭 김희도 때문은 아니었고, 올해는 한국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이판 대신 이천 구장에 매일 출퇴근 도장을 찍었다. 구장엔 여러 이유로 해외로 훈련을 가지 못한 선수들로 가득했다. 임성은 그 틈에서 몸을 만들며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 그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 김희도가 함께했다.
마침내 12월 31일. 어제 낮부터 펑펑 내리기 시작한 눈은 늦은 밤까지 그치지 않아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이 새하얬다. 뉴스에서는 근 10년 만의 최대 폭설이라고 말했다.
임성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여동생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까지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눈 뭉치를 던질 땐 무의식중에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식겁했다.
뺨이 얼얼할 때까지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 휴대폰 확인을 했다. 김희도와는 내년이 되는 내일, 즉 1월 1일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쌍둥이 1, 2는 성인이 된 기념으로 PC방에서 밤을 새우겠다며 일찌감치 나갔다. 매일 밤 10시에 쫓겨난 게 못내 서러웠던 모양이었다.
몇 시간만 있으면 새해구나. 내년엔 드디어 김희도랑 같은 구단에서 뛴다. 중간에 방출이나 트레이드 등이 없으면 아주 오랫동안 같이 야구 할 수 있었다. 김희도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임성이 감회에 젖어 있을 때쯤, 김희도는 즐겨찾기 해 놓은 사이트에 오늘도 접속했다. 페이지를 열고 익숙하게 글을 쓰는 모습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솔 페어리즈 자유 게시판◆
[새글] 임성 선수 유니폼 언제 입고됩니까. (작성자: KHD)
내용: 69번 임성 선수의 유니폼은 대체 언제 나옵니까. 굿즈도 빨리 부탁드립니다. 지금도 늦었습니다. 빨리 출시해 주세요. 지금 당장.』
김희도는 임성이 페어리즈에 들어간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유니폼을 내놓으라는 글을 썼다. 2년 동안 매일 남겼더니 이제는 ‘고객님의 소중한 의견 잘 받았습니다.’라는 매크로 답변도 달리지 않았다.
하지만 김희도는 굴하지 않고 오늘도 등록 버튼을 눌렀다. 안 해 주면 해 줄 때까지 하면 될 일이었다.
손에서 마우스를 떼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기다리는 연락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이것도 먼저 하면 되는 거고. 김희도는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최근 그의 통화 목록은 한 사람밖에 없어 따로 번호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뭐 해요?”
[집에서 쉬고 있지. 밖에 눈 엄청 내리더라. 넌 뭐 하냐?]
살짝 무뚝뚝한 말투와 다르게 다정함이 배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선배는 뭘 하고 있을지 생각 중이었어요.”
[……어, 응. 그래.]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현저히 느려졌다. 보이진 않지만, 한껏 당황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2년이 넘었는데, 슬슬 익숙해질 때도 안 됐나. 뭐, 귀여우니까 상관 없지만.
“우리 언제 봐요?”
[새해에 보기로 했잖아. ……아, 희도야. 동생들 잠투정한다. 이만 끊을게. 푹 쉬고 내일 보자.]
급하기 끊는 수화기 너머로 ‘오빠, 큰오빠아아.’ 하고 웅얼대는 들렸다. 아, 그놈의 동생들.
김희도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창 너머를 응시했다.
밖에는 아직도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저녁에 잠깐 그치나 싶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내려 발을 내디디면 푹 빠질 것 같았다. 창문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걸 보면 바람도 꽤 많이 부는 듯했다.
한동안 창밖을 보던 김희도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밤 11시 25분. 시선이 다시금 창 너머로 향했다.
“…….”
밤 11시 26분.
체감상 30분은 더 지난 것 같건만 고작 1분밖에 안 지났다니.
미동도 없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창밖과 시계를 본 게 약 서른 번이었다. 1분에 한 번꼴로 확인했단 뜻이었다.
지독하게 느리긴 했지만, 어느새 11시 55분이 됐다.
띠롱. 그때 톡 소리가 울렸고, 김희도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머니: 집에 한번 들러라. 할아버지께 인사드려야지.
아무 대답 없이 대화방을 나왔다.
“…….”
김희도는 여전히 임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그 남자밖에 없다는 듯.
선배는 뭘 하고 있을까. 여동생들을 재우다 같이 잠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아, 어린애들까지 질투하고 싶진 않은데, 애정이라는 건 왜 이렇게 사람을 졸렬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띠롱, 띠롱. 일부러 소리로 해 놓은 메신저는 벌써부터 난리였다. 김희도는 빨간색으로 점철된 연락을 모조리 무시하고 임성의 프로필을 눌렀다.
-임성♥: 내일 봐.
오늘 저녁 8시에 한 연락이 마지막이었다. 같이 새해를 맞고 싶어서 매운 떡볶이로 꼬셔봤지만, 넘어오지 않았다.
뭐로 꾀어내야 넘어올까. 박재이 개인 훈련 영상 보여 준다고 하면 되려나. 하지만 선배가 박재이 영상 보고 좋아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내적 갈등을 하는 사이 3분이 흐르며 드디어 새로운 해가 밝았다.
AM. 12시 00분. 1월 1일.
-임성♥: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이미 그와의 대화창을 열어 놨기에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꼼꼼한 성격을 드러내듯 띄어쓰기와 마침표까지 완벽한 문자를 보다가 급격히 몸을 틀어 겉옷을 낚아챘다.
쾅.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자정 지났으니까 날짜 바뀐 거잖아. 1월 1일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지금 가도 맞는 거지. 빠르게 자기 합리화를 끝내고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계단 서너 개를 한꺼번에 밟고 1층까지 내려갔다. 훈련 때도 이보다 더 열심히 뛰진 않았으리라.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과 눈이 강하게 불어 닥쳤다. 한 팔로 눈앞을 막으며 뛰던 김희도는 아파트 벤치에 앉은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하아, 입김을 뱉어내던 남자는 김희도를 보고 씩 웃으며 일어났다.
“이럴 것 같아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지. 올해도 잘 부탁한다.”
목도리 위로 드러난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숨을 들이켜며 한달음에 달려간 김희도는 그를 꽉 껴안고 목에 얼굴을 묻었다. 차고 건조한 공기 속에 달큼하게 밴 체취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냄새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이 남자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을 뿐.
어떻게 이 감정이 착각일 수 있어.
“좋아해요. 선배.”
김희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나, 나도.”
임성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유 있게 대답하자는 다짐은 어딜 갔는지 목소리가 엉망으로 갈라졌다.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나도.
나도 좋아해.
이 한마디를 되돌려 주려고 얼마나 오래 기다렸었나. 김희도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늘이 오길 바랐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만날 때마다 제 마음은 멋대로 춤췄다.
한국시리즈 7차전, 9회 말 투 아웃,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남겨 둔 투수의 심정이 이럴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이 덜덜 떨리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기분.
“……?”
지금쯤 들렸어야 할 대답이 없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못 들었나? 어쩌면 그사이 마음이 바뀌었다든가. 아니야. 조금 전에도 좋아한다고 했잖아. 하지만 애정이 아니라 동경으로 변한 거라면?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김희도. 희도야?”
결국 참지 못한 임성이 그의 이름을 작게 부르며 상체를 살짝 물렸다. 밀착됐던 육체가 떨어지기 무섭게 억센 힘으로 팔이 붙잡혔다. 평소 체온이 낮은 편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손이었다. 차갑게 얼었던 살갗에 온기가 닿는 순간, 소름이 등줄기를 쫙 타고 올라왔다.
“어, 야. 잠깐.”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김희도에게 손을 붙들린 임성 역시 덩달아 따라갈 수 없었다. 마침 1층에 서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도…… 헉!”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과 동시에 현관문이 열렸고, 임성은 그 안으로 빨려가듯이 끌려갔다.
탕!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자근자근 달라붙었다. 평소에도 가끔 거칠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크흣!”
목과 어깨 사이의 여린 살점이 깨물리고 따끔한 고통이 번졌다. 그 고통을 채 느끼기도 전에 보드라운 혀가 상처를 샅샅이 핥았다.
저절로 오므라드는 다리 사이로 단단한 무릎이 비집고 들어왔다.
쿵, 쿵. 임성의 뒤통수가 자꾸만 현관문에 부딪히는 것을 본 김희도가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쌌다. 목을 헤집던 입술은 옆얼굴을 타고 내려와 바로 눈앞에서 멈췄다. 둘 중 누군가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숨이 조여왔다.
“선배가 너무 좋아요. 가끔은 내가 미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실은 뭐든 상관없어요.”
수줍은 내용과 달리 퍽 사나운 목소리였다. 턱을 살짝 숙이며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는 기묘한 흥분으로 번들댔다.
“…….”
임성은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손끝이 축축했다. 질끈 감았던 눈을 가느다랗게 뜨자 자신의 손가락을 빨고 있는 김희도가 보였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뽀뽀가 아니라 손가락 한 마디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먹어 치우는 것에 가까웠다. 불이 훤히 켜진 조용한 방 안에 젖은 살갗을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광경이 못내 아찔해, 잇새로 앓는 듯한 숨이 흘렀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사실은 나도 네가 좋다고,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말하면 활짝 웃을 거라 생각했다. 봉긋하게 솟은 흰 뺨에 보조개가 들어가고 눈꼬리가 수줍게 뭉개질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김희도는 누가 봐도 욕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임성, 선배.”
그가 말할 때마다 혀와 치아가 손가락을 자극했다. 저릿저릿하고 오싹한 감각이 뒷 목을 찌르르 울렸다.
“난 동정이든 뭐든 상관 안 하니까.”
“……누, 가 동정으로 그런 말을 해.”
“잘 생각하고 대답해요. 절대 못 무르니까.”
“절대 무를 생각 없어. 너야말로 생각과 달랐다느니 하지 마.”
“내가요?”
진짜 날 모르네. 그는 숨을 짧게 내뱉으며 어깨를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다리 사이를 파고든 무릎은 허벅지 안쪽을 좀 더 노골적으로 문질러댔다. 운동화 안의 발가락이 한껏 곱아들었고 발뒤꿈치가 바짝 서는 걸 느꼈다.
“흣.”
그는 임성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 키스해도 돼요? ……조금만. 입술만 붙였다가 뗄게요. 네?”
단언컨대 김희도를 알고 나서 지금처럼 다정한 말투는 처음이었다. 그는 거친 숨소리를 감추고 최대한 달큼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를 꾀어내듯 살살.
“대답하기 힘들면 고개만 끄덕여도 돼요.”
고개를 끄덕였나? 아마 그랬겠지.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입술이 닿으니까.
쪽. 긴장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구나. 되게 귀여운 뽀뽀네.”
“…….”
“저녁 먹, 당연히 먹었을 시간이…… 헉!”
아무 생각 없이 말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임성의 어깨가 붙잡히더니, 몸 전체가 뒤로 끌려갔다.
콰앙! 다시 등이 현관문에 부딪히고,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김희도가 거리를 좁혀 왔다.
깜짝 놀란 임성이 그의 어깨를 밀어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 몸을 붙여왔을 뿐. 뒤는 문이라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맞붙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굳은 혀뿌리를 감기고 그 안을 헤집는, 숨 막히는 키스였다. 목구멍 사이로 겨우 흩어진 숨은 뱉어 내기도 전에 김희도가 삼켰다. 점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헉, 허억. 후들대던 무릎이 꺾이며 몸이 주르륵 내려앉았다. 김희도는 여전히 입술을 떼지 않고, 점점 무너지는 임성을 따라오며 키스를 퍼부었다.
“잠, 희…….”
입술이 더욱 깊게 맞닿고, 서로의 타액이 섞여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김희도의 혀가 입천장을 쓰다듬을 땐, 임성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꼬리뼈에서부터 시작된 저릿한 감각이 이내 온몸으로 번졌다.
이게 뭐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헉헉대자 커다란 손이 등을 타고 올라와 임성의 목을 천천히 감쌌다. 단단한 손끝이 목울대를 둥글게 덧그렸고, 숨은 조금 더 조여왔다.
이제 완전히 주저앉아 김희도를 올려다보았다. 불이 훤히 켜져 있는데도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별것 같아요?”
겨우 입을 뗀 김희도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임성이 입을 달싹이는 찰나, 간신히 떨어진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맞물렸다. 아랫입술을 완전히 삼키고 진득하게 혀를 엮었다. 연약한 살점이 빨리는 감각이 아득했다. 임성의 고개가 점점 꺾이자 김희도는 그의 뒷 목을 받쳐 고정하고선 입술을 빨았다.
입 안쪽이 모두 헤집어지는 묘한 느낌에 김희도의 옷깃을 꽉 잡았다.
숨 막혀. 키스가 원래 이런 건가? 이건 키스라기보다 숨이 뺏기는 것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봐요. 귀엽다고.”
묘하게 강압적인 말과 함께 젖은 혀가 입 안으로 끈적끈적하게 흘러 들어왔다.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비틀어도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만, 좀, 후으…… 으음.”
목을 받치던 손은 어느새 귓바퀴를 은근히 더듬다가 등을 타고 내려왔다. 근육이 꽉 짜인 옆구리를 스쳐 아랫배를 더듬었다. 노골적인 욕망이 담긴 손길이었다.
임성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김희도의 손을 막으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잠깐. 기다려 봐…… 헉!”
임성은 가슴을 격하게 들썩이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제 것만큼이나 더운 숨이 귓가로 내려앉았다.
“기다리라고? 2년 참은 것만 해도 대단하지 않나. 난 내가 이렇게 인내심 있는 사람인 줄 처음 알았어요.”
“적어도 여기선…… 어어?”
진정하라는 의미였는데, 김희도에겐 다르게 들렸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시야가 훌쩍 높아지나 싶더니 그대로 그에게 안겨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임성을 내려놓은 김희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짧게 시선이 마주치고, 다시금 입술이 겹쳐졌다.
쪼옥. 보드랍고 간지러운 감각은 이내 진득하게 바뀌었다.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키스를 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소파에 등을 대고 누운 채였다.
임성은 숨을 목구멍에 가둔 채 김희도를 올려다보았다. 쿵쿵. 귓가서 울리는 이건 누구의 심장 소리일까.
한동안 서로를 빤히 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움직인 건 김희도였다.
늘 감탄이 나오게 하는 단정한 손이 임성의 턱을 살짝 매만지더니 얼굴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아 젖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졌다.
이번에는 입술이 아닌 눈두덩에 입맞춤이 쏟아졌다. 축축한 혀가 속눈썹을 느리게 핥고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뺨, 귀,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쇄골보다 조금 윗부분.
그는 3년 전 양호실에서 자신이 깨물었던 흔적을 다시 새기듯 살갗을 씹었다. 잇자국 위로 잇자국이 다시 새겨지고, 울혈이 번졌다. 한동안 살을 짓씹던 입술이 또다시 움직였다.
임성이 손끝을 바짝 세우고 소파 위를 긁었다.
“희, 김희도. 야…….”
아, 이거 위험한데. 멍한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렸다.
임성은 핏줄이 파랗게 불거진 손을 겨우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자신의 손 때문인지, 김희도의 얼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불에 델 듯 뜨거웠다.
그는 고개를 모두 들지 않고 눈만 치켜떴다. 노골적인 욕망과 마주한 임성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왜.”
왜요, 평소의 시큰둥한 목소리와 현저히 다른, 거칠게 갈라진 쇳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잡은 임성의 손을 천천히 떼어 내고 깍지를 끼더니 소파 위로 눌렀다.
“그, 어…… 내, 흐, 근데, 내가…….”
“선배가 할래요?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김희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의 입술은 평소보다 반들거렸다.
“내, 어? 어, 어떻, 후.”
내가 네게 어떻게 그래.
“아니면 싫어요? 전 선배가 싫어하는 건 안 해요.”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상황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을 뿐.
“대답해요. 빨리.”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김희도가 턱 끝에 입맞춤을 퍼부으며 재촉했다. 곧 입술이 떨어지고 손가락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임성의 약한 곳을 찾듯이 입 안 곳곳을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혀 한가운데를 지그시 눌렀다. 그 아래 고였던 타액이 넘치며 그의 손을 축축하게 적셨다. 대답을 듣겠다는 사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지그시 눌린 혀 때문에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허, 흐으. 달뜬 신음이 애처롭게 흘렀다.
“응? 어서요.”
“아…….”
이의 없는 걸로 할게요. 속삭이듯 말한 김희도가 손가락을 빼내고 그 자리에 입술을 내렸다. 뜨거운 입술과 더 뜨거운 것에 임성이 몸을 파드득 떨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으흐.”
곧 압박감이 밀려왔다. 믿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아, 아! 이게…… 이런 건 전혀 예상 못 했는데. 이물감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말아 쥐자 김희도가 자신의 목을 휘감게 했다. 두 사람의 상·하체가 빈틈없이 맞붙고, 멈칫했던 것도 잠시 김희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에 힘주지 마요.”
그즈음엔 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인지하지 못했다는 게 맞겠다.
“어흑! 흐, 으. 읏 아프…….”
“선배.”
“하, 하아. 숨 막, 혀. 흣. 아.”
“나 좀 봐요. 선배.”
난생처음 겪는 고통에 임성은 눈을 감고 허리를 비틀었다. 본능적으로 닫은 허벅지는 김희도에 의해 다시 활짝 벌어졌다. 이번에는 허리를 뒤로 물리며 피하자 옆구리를 잡고 내렸다. 그 탓에 더 깊게 파고들었다. 임성은 눈을 부릅뜬 채 소리 없는 신음을 내뱉었다.
“아, 자, 잠깐만. 좀, 갑자기, 너무…… 흐으…….”
문장이 되지 못한 말이 혀끝에서 엉망으로 뭉개졌다. 임성은 눈을 꾹 감았다.
“울지 마요. 지금 울면 안 되지.”
혀가 눈가를 핥았다. 임성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닫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치. 이 정도는 참아야지. 앞으로 더 울어야 하는데.”
웃음기가 희미하게 밴 목소리가 들렸다.
김희도가 움직일 때마다 임성의 허리가 잘게 경련하며 비틀렸다. 발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이다가 이내 쫙 벌어지고 허우적댔다.
“흐, 으으.”
김희도의 손이 퉁퉁 부은 눈가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꽤 다정한 손길과 달리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그만할까요? 선배가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키스를 퍼부었다. 하지만 도무지 그만하라고 말할 틈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도 기어코 쫓아와 입술을 깨물고 그 안으로 혀를 넣어 입 안을 무자비하게 점령했다. 땀에 젖은 살갗들이 격렬하게 맞부딪혔다. 고통이 간지러움으로, 이내 강렬한 쾌감이 되어 내리꽂혔다.
“으. 읏!”
한껏 예민해진 몸뚱이가 튀어 오르며 경련을 하듯 덜덜 떨렸다. 임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김희도를 껴안으며 호흡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그만, 도저히 안 되겠어. 임성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흐린 시야 너머로 자신을 보고 있는 김희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임성의 표정 하나라도 놓칠세라 아주 샅샅이, 집요하게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너……, 아! 흣!”
“좋아해요. 선배.”
무척 집요하고 무거운 고백이었다.
* * *
“어, 으. 물…….”
평소처럼 휴대폰을 집으려 손을 뻗었지만, 팔을 강타하는 뻐근함에 앓는 소리가 났다. 평소 쓰지 않는 근육을 과도하게 사용했을 때 느끼는 극심한 근육통이 팔 뿐만 아니라 어깻죽지까지 번졌다.
왜 이렇게 아프냐. 어제 어떤 훈련을 했더라. 멍하니 생각하던 임성은 곧 뭔가 자신의 몸을 옭아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불이라기엔 상당히 무겁고 뜨거웠다.
이게 뭐야.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어, 김희도가 왜, ……어, 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잠든 지 1시간도 안 됐어. 더 자요.”
허리를 껴안고 있던 손이 올라와 눈을 덮었다. 눈 위로 뜨거운 온기가 닿으며 시야가 순식간에 어둠에 뒤덮였다.
지금 자면 안 될 것 같은데. 중요한 상황인 것 같다고.
하지만 임성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식이 훅 꺼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까맣게 물든 하늘과 펑펑 쏟아지는 눈이 보였다. 동화책에 나올 법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깼어요? 물 마셔요.”
웃통을 깐 김희도가 한쪽 무릎으로 침대를 디디며 생수를 내밀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꼈다. 임성이 손을 뻗어 물통을 받았다. 툭.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손을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팔에 힘줘서 그래요. 이따 마사지해 줄게요.”
그는 바닥에 뒹구는 물통을 집고 임성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뚜껑을 따더니 임성의 뒷 목을 부드럽게 받치고 아랫입술에 가져다 댔다. 눌린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며 그 안으로 미지근한 물이 흘러들어왔다.
“천천히. 천천히 마셔요. 그렇지.”
철 가루를 집어삼킨 듯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김희도는 임성이 눈을 찌푸리는 걸 봤음에도 물을 반 넘게 먹이고선 일어났다. 마른 장작처럼 쪼그라든 입 안에 수분이 감돌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죽 만들었어요. 떡볶이 사 오려다가 아무래도 빈속에 매운 거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죽 줄 테니까 쉬고 있어요.”
“잠깐, 나도 갈…… 크흑!”
그를 따라 일어섰던 임성은 온몸을 강타하는 통증에 헛숨을 내뱉으며 엎어졌다.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특히 다리 사이가 말도 못 하게 욱신거렸다.
“그러게 쉬라니까. 괜찮아요?”
한걸음에 달려온 김희도가 엎어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임성을 반듯하게 눕혔다. 그리곤 헝클어진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임성은 고통을 줄이기 위해 최소한으로 숨을 뱉어 내며 상황을 파악했다. 평소보다 김희도의 태도가 뭐랄까, 좀 간지럽다고 해야 하나. 꼭 애인을 대하는 것…… 잠깐만.
임성의 눈 깜빡임이 점점 빨라지더니 불현듯 입을 틀어막았다.
툭 불거진 옷 실을 잡아당기면 줄줄이 풀리는 것처럼 어젯밤 기억이 연속으로 떠올랐다. 새해가 되자마자 김희도를 찾아왔던 것이나 그에게 고백한 것, 입술이 닿고 빨리다가 끝내는 그에게 매달리며 애원하던 것까지. 모조리 다.
와, 미쳤다, 미쳤어. 앞으로 김희도 얼굴을 어떻게 보냐. 이대로 땅이 꺼지지 않으려나.
임성의 심정을 알 리 없는 김희도는 죽과 간이 세지 않은 장조림을 가져왔다.
“우선 이걸로 속 좀 달래요. 배 채우는 건 그다음이고.”
“기, 김희도…… 저기, 어제 일은…….”
“난 분명.”
그는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게 중심이 그쪽으로 쏠리며 매트리스가 기울었다.
“못 무른다고 말했어요. 분위기를 탔든, 홧김에 했든.”
“어제부터 왜 자꾸 그 소리야. 너야말로 무르고 싶냐?”
“선배가 계속 눈치 보잖아요.”
“야, 그건…… 쪼, 쪽팔려서 그렇지. 어제 내가, 그, 소리를…….”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말을 내뱉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짜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김희도는 완전히 침대에 올라와 임성의 양팔을 약하게 붙들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팔을 쉽게 내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임성은 그를 피해 고개를 돌렸지만, 결국 이긴 건 김희도였다. 임성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와 눈을 맞췄다.
“왜.”
“귀여워서요. 원래도 귀여웠지만, 지금은 진짜 귀엽다.”
“웃기지 마. 네가 더 귀여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네가 더 귀엽다며 실랑이를 벌였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