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41)

#13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습도 가득한 계절, 원정 9연정의 첫 경기였다. 들이마시는 공기도 내뱉는 숨도 후텁지근했다.

페어리즈는 여전히 6위였다. 하지만 그사이 차근차근 승차를 좁혀 5위와 약 0.5게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이대로 분위기를 타면 가을 야구 티켓뿐 아니라, 좀 더 높은 순위를 기록할 수도 있었다. 현재 파죽의 4연승을 달리는 중이라 분위기가 더욱 달아올랐다.

“오늘 이기면 5위다. 다들 정신 차려. 여기서 치고 올라가야지.”

“네.”

최희탁의 말에 다들 큰 소리로 화답했다.

화요일인 오늘은 관중석에 약 2/3밖에 들어차지 않았다. 게다가 원정 경기라 페어리즈 팬도 평소보다 적었다. 내일 등판 예정인 임성은 더그아웃 1열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다행히 경기 초부터 상대 용병의 제구가 흔들리며 페어리즈 선수들이 연신 출루를 했다. 그리고 선취점을 획득하며 앞서 나갔다.

그리고 시즌 초엔 하위타선으로 시작해 어느새 3번까지 치고 올라온 김희도가 대기 타석에서 일어섰다.

“치고 올게요.”

“응. 잘하고 와.”

“네.”

김희도는 버릇처럼 임성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말하고선 타석에 들어섰다. 김희도가 자세를 취하자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좌석 사이사이 드물게 자리한 원정 팬들이 깃발을 크게 흔들었다.

임성은 흥겨운 곡조의 응원가를 따라 흥얼거리며 그의 입술이 닿았던 목 부근을 더듬었다. 기분 탓일까, 유독 그 부분만 뜨거웠다.

파울, 파울, 파울, 파울. 김희도의 배트가 끈질기게 공을 따라붙었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이던 카운트를 풀카운트까지 끌고 가며 투수를 압박했다.

“와, 또 커트네. 내가 저 투수였으면 울었다.”

공 진짜 잘 본단 말이야. 선구안이 뭐 저래. 박태영이 또다시 파울 지역에 떨어지는 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꼭 출루하지 않더라도 초반에 저렇게 여러 개의 공을 던지게 해서 투수의 힘을 빼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오늘은 안타 못 쳐도 언더 티 주자. 그걸로 대체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희도가 좋아한다면야.

그때, 상대팀 투수가 공을 던졌다. 투수 중에서도 구속이 빠른 선수답게 빠르게 뻗어 나가던 공은 포수의 미트가 아닌 김희도의 헬멧을 때리고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윽!”

쿵. 큰 소리와 함께 김희도가 옆으로 쓰러졌다. 그는 머리를 감싼 채 몸을 한껏 웅크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관중석에서 웅성거림이 터졌고, 감독과 코치가 곧장 그라운드로 뛰어나갔다.

어이, 바로 의료반 콜 하고 앰뷸런스 불러. 누군가의 외침이 아득하게 울렸다.

“쟤 지금 헤드샷 맞은 거야?”

씨발. 어느 미친 새끼가 머리로 던져. 일찌감치 불펜에서 대기하고 있던 권재영이 욕설을 퍼부으며 튀어나왔다. 상대팀 더그아웃에서도 선수들이 나왔다. 돌발 상황에 잠시 멈칫했던 페어리즈 팀원들 역시 권재영을 따라 그라운드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임성은 팀원들에게 휩쓸려 김희도에게 다가갔다. 목과 어깨를 구부린 채 눈을 찡그리고 있었고,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 코와 입 주변이 피범벅이었다.

“김희도, 김희도! 정신 차려. 이름, 오늘 며칠이고 여기 어디야?”

급하게 뛰어온 의료반이 김희도의 얼굴, 목 등을 살폈다.

“……김희도. 현재 수원 폭스파크입니다. 8월 16일, SS 폭스와 경기 중입니다.”

코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리자 안에 고여 있던 피가 후두두 쏟아졌다. 흰색 유니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유니폼뿐 아니라 그의 팔과 손바닥 역시 피로 흥건했고, 마른 흙에도 피가 뚝뚝 흘렀다.

어떡해, 피 좀 봐. 충격적인 광경에 관중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괜찮, 괜찮습니다.”

김희도가 코를 틀어막은 채 대답했다. 붉어진 손바닥 사이로 피와 함께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 야, 일어나지 말라니까.”

코치는 비틀대면서도 몸을 일으키려는 김희도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다시 한번 들것을 외쳤다. 곧 들것이 왔고, 의료팀이 김희도를 그 위로 옮기더니 서둘러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그사이 양 팀 선수들은 더욱 엉겨 붙은 채 “계속 커트하니까 열 받아서 일부러 노리고 던진 게 아니냐. 공 던진 새끼 이리 와.”, “고의성 없다. 실수일 뿐인데 왜 범죄자 취급하냐?” 등등 고성을 주고받았다. 권재영이 어깨로 상대팀 선수의 가슴을 밀치자 그 선수가 뭐라고 하며 팔을 뻗었다.

“지금 쳤냐? 하, 씨발.”

“뭐? 이 새끼가 선배한테 욕을 처하네. 그래, 인마. 쳤다! 어쩔래?”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임성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 자리에 정승처럼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애가 왜 실려 갔지?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야. 임성. 임성?”

“허, 허억!”

누군가 어깨를 짚었다.

임성이 움찔하며 그제야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꽉 메운 숨을 쏟아 냈다. 허억.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참았는지,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너 괜찮냐? 지금 엄청 창백하다.”

박태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말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거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박태영의 얼굴 역시 뿌옇게만 보였다.

말 없이 박태영을 지나친 임성은 손바닥을 바지에 비벼 닦는 상대팀 투수를 쳐다봤다.

몸에 공을 맞는 것 역시 경기의 일부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컨트롤하지 못해 벌어진 실수. 실행하진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 감독에게 지시를 받기도 했고, 프로에 와서도 실수로 타자를 맞힌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김희도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임성이 상대팀 투수를 향해 걸어갔다.

얼마나 세게 주먹을 말아 쥐었는지 손등뼈가 새하얗게 올라오고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입술 안쪽 살점이 헤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막 상대팀 투수에게 막 다다랐을 즈음, 누군가 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임성의 고개가 기계적으로 돌아갔다.

“더그아웃으로 안 돌아가고 뭐 해? 어서 가.”

주장 최희탁이었다. 프로 생활을 오래 하며 여러 가지 일을 겪었던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할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희도 머리 맞았어요.”

“그래. 그래서 병원 갔잖아. 지금 다들 돌아간 거 안 보이냐? 정신 차려.”

“희탁 선배.”

끓는 듯한 목소리가 꽉 다문 잇새로 흘렀다.

하아. 최희탁은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임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희도가 걱정되고 속상한 건 알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하지만…….”

걔가 다쳤다고요.

임성은 최희탁에게 끌려가듯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헤드샷을 던진 폭스 투수는 곧장 퇴장 처리됐으며, 경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곧바로 재개됐다.

안타가 터지자 관중들은 크게 환호했으며 박수를 치고 또 응원가를 목 터져라 불렀다. 둥둥, 앰프에서 흥겨운 곡조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

마치 딴 세상 같네.

임성은 벤치 구석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릎을 짚은 주먹이 눈에 띄게 떨렸다. 머릿속에선 피범벅이 된 김희도와 어젯밤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선배 만나고 처음으로 야구가 좋아졌어요. 요즘엔 좀 재밌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지금 숨은 제대로 쉬고 있나? 잘 모르겠다. 모르겠어.

임성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경기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모두가 떠나고 텅 빈 그라운드에 혼자 앉아 있었다.

“성이, 안 들어가고 뭐 하냐?”

“……네.”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임성이 최희탁에게 꾸벅 인사했다. 기계적으로 글러브만 챙기고 돌아서는 등 뒤로 최희탁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아까 뭐 하려고 했었냐?”

임성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최희탁이 다가왔다.

“나라고 좋아서 말렸겠냐? 똑같이 만들어 주고 싶었지. 근데, 사고잖아. 우리도 할 수 있는 사고. 네가 거기서 그 투수 때리기라도 했어 봐. 어떻게 됐겠어?”

최희탁은 답답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야구 선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심정은 그렇지 못했다.

임성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한 임성은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으로 터벅터벅 들어갔다.

머리를 맞은 김희도는 짐을 챙길 새도 없이 곧장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 후 몇 시간이나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임성은 유니폼도 벗지 않은 채 깜깜한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 연락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벨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날카롭게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하고 다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희……!”

[주장. 김희도는 뭐래요? 괜찮대요?]

“……아, 예준아. 미안한데, 지금은 통화하기 좀 어려울 것 같다. 이따가 연락할게.”

따끔거리는 목구멍을 열어 겨우 말을 토해 내고 전화를 끊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자리에 일어섰다. 어두운 방 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니며 김희도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휴대폰은 끝내 울리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매니저에게 연락해 봤으나 신호음만 길게 울릴 뿐 받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는 건가, 뭘 하느라 연락도 안 받아.

또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사이트 메인에는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김희도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하이라이트에도 헬멧에 공을 맞는 사진이 썸네일로 돼 있는 걸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미친 새끼들.”

조회 수에 얼마나 미쳤으면 이런 자극적인 장면을 걸지? 역겹다.

익숙하지 않은 욕설을 내뱉으며 제목을 훑었다. 당시 상황과 병원에 이송된 내용만 뜰 뿐 이렇다 할 소식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SNS에 김희도 이름을 쳤다. 수많은 팬들이 해시태그를 걸어 가며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강원@2riverone ·3분

이솔 페어리즈 김희도. 정확한 검사를 위해 서울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이강원@2riverone ·1시간

이솔 페어리즈 김희도, SS 폭스와의 시합 도중 머리에 공 맞고 현재 병원으로 이송 중.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음.」

예전에 몇 번 인터뷰한 적 있는 페어리즈 전담 기자였다. 두 줄 남짓한 문장을 읽고 또 읽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임성은 야구 인생을 통틀어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다. 볼넷을 줄 바에 차라리 안타를 맞겠다는 말처럼 경기당 한두 개 있을까 말까 했던 볼넷이 무려 7개나 나왔다. 주자 1, 2루 상황에서 두 개의 볼넷을 연달아 내주며 밀어내기 실점까지 했다.

“너 어디 아프냐? 무슨 일 있어?”

고작 2.1이닝, 투수 교체.

3이닝을 다 채우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와 벤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 그에게 여러 조언을 해 주는 코치가 몸 상태를 물어 왔다. 임성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허망하게 무너진 선발 투수를 뒤로한 채, 페어리즈 타선은 나름 힘을 냈다. 하지만 초반에 크게 벌어진 점수 차를 극복하지 못하며 패배했다. 첫날에 이어 둘째 날도 패하며 루징 시리즈를 확정 지은 것이었다.

하지만 경기를 망쳤다는 미안함보다 다른 생각, 김희도에 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스스로가 낯설 정도로 김희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코치님. 희도는 좀 어떻습니까? 연락 왔습니까?”

경기가 끝나자마자 코치를 찾아가 따지듯 물었다. 막 전화를 끊은 코치가 임성을 보며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매니저랑 통화했어. 코뼈가 미세하게 금갔다는데, 그 외엔 별 이상 없다는데 혹시 몰라서 정밀 검사 요청해 놨다. 괜찮을 거다.”

“저 먼저 서울로 돌아가도 됩니까?”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임성이 제 입술을 매만졌고, 코치는 곤란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손을 뻗어 어깨를 다독였다.

“인마, 한 번 못했다고 너 안 쫓아내. 잘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거지.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훈련이나 열심히 해. 아까 보니까 어깨가 아예 경직됐더니만. 아픈 데 없는 것 맞지?”

오늘 경기를 망치고 홧김에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오히려 임성을 위로했다. 여러 감정으로 복잡하게 얽힌 시선이 바닥을 정처 없이 헤맸다.

차라리 아프다고 할까? 이천으로 가면 김희도가 있는 병원과도 가까울 텐데.

무심코 생각하다가 입술 안쪽 살점을 깨물었다. 요 며칠 새 몇 번이나 이로 짓이겼던 살점은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언제부터 야구보다 김희도를 먼저 생각하게 됐을까?

며칠 전만 해도 그렇게 재밌던 야구조차 지금은 얼른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이틀 내내 밤을 새우다시피 했음에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임성은 침대 프레임에 등을 기댄 채 아무 반응 없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얼굴에 직접 맞은 게 아니라 헬멧이 돌아가며 콧등을 쳐 생긴 미세 골절 및 출혈. 수술할 정도는 아님. 그 외의 이상 소견은 없음.

코치와 매니저, 구단 담당 기자를 통해 알아낸 김희도의 검진 결과였다. 당시 꽤 심각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천만다행이었다.

머리에 직접적인 타격이 없어서 다행이지만, 알 수 없는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연락해 볼까. 아니야, 지금 병원일 텐데 먼저 올 때까지 기다리자. 1분 사이에도 몇 번이나 마음이 바뀌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앉아 있었을까. 벨 소리가 침묵을 깨트리며 액정 위에 낯선 번호가 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벌써부터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누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선배.]

김희도였다.

[휴대폰 챙길 정신도 없어서 빌렸어요. 안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희도야. 김희도.”

임성은 그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놓칠까 봐 휴대폰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귓가에 바짝 붙였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다 못해 쓰리고 따끔거렸다.

[아, 목소리 들으니까 살 것 같다. 뭐 하고 있었어요? 나 안 보고 싶어요? 난 선배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살짝 갈라진, 그러나 설렘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몸은 좀 어때, 아픈 덴 없고? 괜찮아?”

코치에게 이미 결과를 들어서 알고 있지만, 직접 그에게 확답받고 싶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혹시 오늘 경기 때문이면 신경 쓰지 마세요. 다음에 더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공 맞고 실려 간 사람이 누굴 걱정하는지.

“넌 괜찮으냐고.”

[저요? 선배 보고 싶은 것만 빼면 멀쩡해요.]

하아. 임성은 휴대폰을 든 채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좋아해요. 선배가 좋아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열일곱 살의 김희도가 덤덤하게 말했고, 열여덟, 열아홉 살의 김희도가 끊임없이 좋아한다고 속삭였다. 차곡차곡 쌓이다 못해 흘러넘치는 애정을 받아들인 것은 그가 스무 살이 되고 나서였다.

김희도가 좋았다. 졸졸 쫓아다니는 게 기특했고, 다른 사람에겐 퉁명한 주제에 제게만 살갑게 구는 모습이 귀엽고 예뻤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그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한다는 미안함이 늘 존재했다.

김희도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정말 그걸로 만족할까. 일방적인 관계는 허무함을 동반하고 결국 어긋나기 마련인데.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김희도를 보는 순간 피가 차갑게 식는 게 어떤 느낌인지 깨달았다. 디디고 있는 발밑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느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과 가늠할 수 없는 공포가 온몸을 뒤덮었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들까. 가볍게 좋아하는 거면 이렇게까지 힘들 수 있나? 나는…….

[뭐 해요?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큰일 아니어서 다행이다. 피곤할 텐데 그만 쉬어.”

시간은 어느덧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밀 검사다 뭐다 가뜩이나 피곤했을 남자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벌써요? 좀 더 통화하면 안 돼요? 나 선배 보고 싶다니까.]

“……나도, 나도 보고 싶어. 끊을게. 잘 자라.”

빠르게 말을 내뱉고 전화를 끊은 임성이 고개를 젖혔다. 목 끝까지 차오른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며 눈에 띄게 떨리는 손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원정 9연전 중 이제 두 게임이 끝났다. 심지어 오늘은 거하게 망치기까지 했고.

내일 폭스와 경기를 끝내면 대전으로 이동 후 3연전, 또 대구에서 경기를 치른 후에야 홈으로 복귀할 수 있다. 월요일엔 경기가 없지만, 오늘이 수요일이니 아직 3일이나 남았다.

예전에 김희도에게 말도 없이 이천에 갔을 때,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니지, 그때 자신은 3일 동안 잠수 탄 거나 다름없으니 더 힘들었겠다.

나 되게 이기적이었구나.

임성이 무릎을 감싸고 그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딩동. 딩동.

“……?”

얼마나 지났을까, 집 안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었던 탓인지 목과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반사적으로 확인한 시간은 새벽 3시에 가까웠다. 잠을 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던 것도 아니라 눈알이 뻑뻑하고 눈두덩은 무거웠다.

딩동.

잘못 들은 줄 알았던 초인종 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야. 지끈지끈 울리는 이마를 짚으며 현관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누구십니까?”

원정 호텔이라 구단 관계자일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지금은 썩 달갑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게 인상을 팍 쓰고 문을 열었던 임성이 문고리를 쥔 자세 그대로 굳었다.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렸다.

“……어?”

“내가 더 보고 싶었어요.”

선배. 모자를 푹 눌러쓰고서, 매끈했던 콧등이 부어오른 김희도가 씩 웃었다. 서울, 그것도 병원에 있어야 할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김희도가 양팔을 가득 벌려 임성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맞붙은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는 게 느껴졌다. 겹쳐진 온기에도 믿기지 않아 멍하니 입을 열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병원은 어쩌고?”

“몰래 빠져나왔어요. 선배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거기 있어요. 요새 택시 빠르잖아요. 따따블 외치니까 엄청 빨리 달리던데요?”

들어가도 되죠? 뒤이어 말한 김희도가 몸을 떼어 내고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선배?”

“아, 미안. 들어와.”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옷깃을 무심코 잡았던 임성이 뒤늦게 손을 떼어 냈다. 김희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가 이내 조용히 웃으며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마주 닿고 손가락 사이에 하얀 손가락이 얽혔다. 그대로 손끝을 구부리자 두 사람의 손이 완전히 겹쳐졌다. 마치 옭매듯이 깍지를 끼는 것은 경기 직전 김희도가 늘 하던 행동이었다.

“늦은 시간에 깨워서 미안해요. 저도 정말 참으려고 했거든요. 근데, 진짜…… 어쩔 수 없었어요.”

불가항력 같은 거 있잖아요. 횡설수설 말하던 김희도는 임성과 눈이 마주치자 한숨을 내쉬며 찡그리듯 웃었다. 모자 아래 살짝 드러난 광대에 시커멓게 올라온 멍이 보였다.

웬 멍이 저렇게…… 진짜 괜찮은 거 맞나?

부스럭.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피던 임성이 봉지 소리에 멈칫했다.

“그건 뭐야?”

“또또 떡볶이요. 문 닫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했습니다. 5단계는 선배 졸업하고 안 만든대서 4단계로 사 왔는데. 지금 먹기엔…… 좀 많이 늦었죠? 냉장고에 넣어 놓게요.”

임성은 까만 봉지를 흔들며 머쓱하게 말하는 그를 꽉 껴안고 목에 입술을 묻었다. 각진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게 눌린 입술을 통해 느껴졌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경기 때문이면 신경 쓰지 말라니까.”

“좋아해.”

등을 두드리던 손이 멈칫했다. 좋아해. 임성은 눈을 꾹 감은 채 다시 한번 고백을 토해 냈다.

“좋아해, 좋아…… 좋아해. 김희도.”

좋아한다는 말이 원래 이렇게 목이 메는 건가? 코끝이 찡해지고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자꾸 차오르는 느낌.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네가 내게 말할 때도 이런 기분이었어? 넌 어떻게 이런 걸 매일 토해 냈지?

좋아한다는 건 이런 거였다. 난 김희도를 좋아하는 거였어. 바보같이 그걸 지금 깨닫고.

김희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임성을 꽉 끌어안았다. 잠시 멈췄던 손이 다시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선배. 동정이든 뭐든 상관없다던 말 기억해요?”

“동정 같은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가 한 번 더 속삭였다.

등을 쓰다듬던 손이 목을 타고 올라와 임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가 부스럭대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임성은 무의식중에 그의 허리를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제게 당겼다.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었다.

“나 2이닝 6실점 했어. 코치님이 어디 아프냐고 묻더라.”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네가 손 안 잡아 줘서 그렇잖아. 그게 내 루틴인데, 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불안해서 못 던지겠더라.”

“하하. 그동안 열심히 손잡은 보람 있네요.”

짧은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장난하는 거 아니야. 스트는 제대로 꽂지도 못하지, 계속 볼질만 하다가 조기 강판 당했다. 내 인생 최악의 경기라고 할 만큼 엉망이었어.”

“누가 장난이래요.”

“이제 너 없으면 안 되겠다.”

“와아, 선배가 그런 말 할 줄은 몰랐어요. 아, 뭔가, 되게…….”

맞닿은 몸이 작게 들썩이는 걸 보니 김희도가 계속 웃고 있는 모양이다.

불안함이 조금씩 옅어지며 민망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웃지 마. 한마디 해 주려 고개를 들던 임성은,

“……희도야.”

눈물을 뚝뚝 흘리는 김희도의 이름을 멍하니 불렀다.

“어, 이상하다. 내가 왜 이러지.”

나 왜 이래요? 그는 울지 않으려는 듯 입을 꽉 다물었지만, 덕분에 뺨과 턱이 떨리는 게 더 잘 보였다.

“설사 선배가 날 좋아하지 않더라도 괜찮았어요. 후배로 보든, 동료로 여기든 상관없다고. 그냥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만족했거든요. 선배가 날 좋아하지 않는 만큼 내가 좋아하면 되니까. 근데, 선배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니까…….”

그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며 코끝이 조금 더 새빨개졌다. 꿀꺽, 서러움을 삼키는 듯 울대뼈가 연신 일렁였다.

되게 서럽게 우네. 어린 애 같아. 임성이 숨을 낮게 내뱉으며 손끝으로 그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눈물을 닦는 손 역시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늦게 말해서 미안. 이제 알아서 미안해.”

“저 지금 엄청 못생겼을 텐데. 보지 마세요.”

“아니야. 지금 엄청 멋있어. 여태까지 본 것 중에 제일 잘생겼다.”

임성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김희도가 살짝 어이없다는 듯 픽 웃더니 이내 임성의 목을 휘감듯이 껴안고 몸을 붙여 왔다.

“좋아해요, 선배.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요.”

“나도 좋아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사랑스럽고 간절한 고백이었다.

* * *

“다 울었냐?”

“안 울었거든요. 새벽이니까 졸려서…… 음, 살짝 졸려서 하품했던 것뿐이에요.”

그래, 그래. 임성은 마치 어린 애를 달래듯 김희도의 머리를 쓰다듬고선 불을 켰다.

자비 없이 쏟아지는 불빛에 두 사람 다 동시에 눈을 찡그렸다. 빛에 익숙해졌다 싶을 즈음 눈앞을 가렸던 손을 내린 임성은 김희도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완전 엉망인데?”

밝은 곳에서 본 얼굴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별로 안 아파요.”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얼굴을 한 김희도가 덤덤하게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보이던 멍은 불을 켜고 보니 생각보다 더 존재감이 컸다. 하얗고 매끈하던 콧등 역시 확연히 부어올라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보기 싫다는 게 아니라 아플 것 같아서.

“애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어쩌냐.”

붉은 기가 가시고 파랗게 변하기 시작하는 멍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잘생겼잖아요.”

그는 얼룩덜룩한 얼굴로 씩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냐?”

“이 와중이니까 나오죠. 선배가 나 때문에 속상해하는 게 좋지만, 그래도 역시 선배가 속상한 건 싫다고 할까. 그러니까 안 아파요.”

“너 피 쏟는 거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쌍코피 터져서 그래요. 그땐 나도 좀 놀랐는데, 아무렇지 않아요.”

“코는 수술 안 해도 된대? 골절이라며.”

“실금이라 자연 치유해도 된대요. 정확한 건 부기가 가라앉아 봐야 알겠지만요.”

“얼음주머니 만들어 올게. 멍든 데 찜질 좀 하자.”

자리에서 일어선 임성이 냉장고로 걸어가자 김희도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그리고 냉장고를 여는 임성의 등에 딱 달라붙어서 그대로 체중을 실었다. 80kg이 훌쩍 넘는 무게를 받아 내기란 쉽지 않았다. 겨우 얼음을 찾고 꺼내는 팔을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붙잡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힘줄이 올라온 손등 위에 나란히 겹쳐졌다.

“인마, 무거워.”

“찜질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뭔데?”

지금 네 얼굴 보면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말이 안 나올 텐데. 그 말은 임성의 턱을 쥐고 뒤로 돌리는 손 때문에 이어지지 못했다.

쪽,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이 다시금 깊게 겹쳐졌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온 혀가 입 안쪽 살을 거침없이 헤집었다.

“흐, ……으음.”

냉장고 안에서 점점 차가워지는 손과 달리 입 안은 달고 뜨거웠다. 젖은 살덩이가 엮였다가 혀 안쪽 살점을 살살 자극했다.

과도하게 꺾인 고개가 퍽 불편한지 임성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김희도는 겹쳐진 팔을 움직여 아직 냉장고에서 있는 임성의 손을 꺼냈다. 그리고 그의 턱을 잡았던 손을 내려 허리를 감고서 벽으로 밀어붙였다. 쿵. 등이 벽에 닿는 소리가 울렸다.

“하, 으.”

후두둑. 임성이 들고 있던 얼음 틀이 떨어지며 얼음 알갱이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김희도는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을 제 광대 위에 얹었다. 차가운 손이 부드럽고 뜨거운 살갗을 만졌다. 임성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파랗게 변한 멍을 더듬던 손가락이 미끄러져 내려와 벌어진 입 안으로 들어갔다. 김희도의 혀끝이 차가운 손끝을 살짝 깨물고 손톱을 빨았다.

혀뿐만 아니라 잇새로 흐른 숨 역시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그는 자꾸만 안으로 곱아드는 손가락을 삼키고 마디 부분 끝까지 입 안에 넣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흣.”

손가락을 빠는 혀만큼이나 선명한 시선이었다. 평소보다 더 붉어진 눈가와 눈꼬리에 선명한 욕망이 일었다.

임성은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등에 닿은 허리가 긴장으로 바짝 섰다. 파들거리는 사리 사이로 파고든 무릎이 허벅지를 뭉근하게 쓸었다.

위험해.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야…… 김희도. 지금, 이거…….”

“네. 선배. 지금 이거요.”

손가락을 뱉어 낸 김희도가 임성의 말을 따라 하며 입술을 맞춰 왔다. 말을 하려고 하면 혀를 얽어 와 정신이 혼미해졌다. 눈앞이 빨갛기도 하고 하얗게 변하기도 했다.

“너 지금 환자야.”

“그러니까 마음의 안정을 취해야죠.”

임성이 고개를 살짝 들며 김희도의 어깨를 꽉 쥐었다. 힘껏 쥐었으니 꽤 아플 텐데도 눈앞의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끈질기게 따라붙어 입술 사이에 그나마 남아 있던 조금의 틈조차 모두 없앴다.

한참이나 뭉개지고 비벼지던 입술이 떨어졌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져 임성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을 쫓아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멈칫했다.

“잠깐, 이건…… 아!”

“아, 진짜 사람 안달 나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잠긴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은 김희도가 다시금 달려들었다. 혹여 다친 곳을 건드릴까 봐 섣불리 밀어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김희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턱과 뺨을 꽉 부여잡은 채 혀를 깊게 얽었다. 평소에도 꽤 격렬한 키스를 했으나 지금은 아예 숨도 못 쉴 정도로 몰아붙였다. 입술이 뭉개지다 못해 삼켜지는 느낌이었다.

하, 하악. 임성이 호흡을 제대로 못 하고 껄떡대자 뺨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목 중간에 불거진 울대뼈를 덧그렸다. 천천히 원을 그리는 손길은 느긋하고 야릇했다. 왠지 모를 창피함에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코끝이 새빨개진 채 펑펑 울던 애 맞냐?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후, 우우. 김희도가 뱉어 낸 숨이 아랫입술을 간지럽히고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럴 리 없는데도 달게 느껴져 그의 아랫입술을 빨며 혀끝을 노골적으로 건드렸다.

한껏 젖혔던 어깨가 늘어지며 다리에 힘이 빠졌다. 흐느적거리며 무너지는 허리를 단단한 손이 휘감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키스를 퍼부었다. 틈 없이 맞물렸다가 떨어질 때마다 앓는 듯한 신음이 흘렀다. 그게 못내 당황스러워 필사적으로 소리를 참았더니 더욱 집요하게 키스가 이어졌다. 머리가 핑 돌았다.

“참지 말고 소리 내요. 듣고 싶으니까.”

얽힌 혀는 떨어졌지만, 입술은 여전히 붙은 채라 그가 말할 때마다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즈음엔 그의 말이 정확히 들리지 않고 웅웅 울렸다.

“엄청 부었다. 입술 안 아파요?”

쪼옥. 마지막으로 가벼운 입맞춤과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김희도는 발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왠지 야릇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입성은 무의식중에 아랫입술을 핥았다가 따끔함을 느끼고 눈을 찌푸렸다. 키스 때문에 다리가 풀리는 게 말이 되냐. 그래도…….

“기분 좋았죠?”

웃음기가 다분한 목소리에 임성이 움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쟤는 독심술을 하는 게 틀림없다니까.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비스듬하게 내린 채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떨어진 얼음은 어느새 다 녹아 물바다가 됐다.

반사적으로 확인한 시계의 짧은 초침은 4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새벽 4시 20분.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병원 탈출한 거 매니저 형은 아시냐?”

“징계 내리면 달게 받겠습니다.”

태평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겨우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도졌다.

“징계 받으면 시합 못 뛸지도 몰라. 다른 사람이 내 뒤에서 나 공 던지는 거 보고만 있을 거면 상관없지만.”

“징계 안 받도록 잘 말하겠습니다.”

심드렁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눈동자가 빛났다.

“그래. 얼른 돌아가라. 매니저 형에겐 무조건 죄송하다고 싹싹 빌어.”

연락 없는 걸 보면 아직 안 들킨 것 같지만 어차피 들통나게 돼 있었다. 매니저 형, 엄청 황당해하겠네.

임성은 바닥에 떨어진 떡볶이 봉지를 주워 살짝 열었다. 배고픈 줄도 몰랐는데, 코를 탁 쏘는 매운 냄새를 맡자마자 허기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 시간에 먹었다간 배탈 날 것 같아서 봉지를 다시 싸맸다. 내일 꼭 먹어야지 결심하며.

“그럴게요. 이것도 마셔요.”

대충 고개를 끄덕인 김희도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 그의 손엔 항아리 모양의 바나나 우유가 들려 있었다.

“갑자기 웬 우유야?”

엉겁결에 우유를 받아 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고등학교 때 저 이걸로 꼬셨잖아요. 나도 한번 해 볼까 하고.”

“벌써 넘어간 지 오래거든. 여기서 더 넘어가면 큰일 나.”

“더 큰일 났으면 좋겠다.”

사뭇 진지하게 말한 김희도가 임성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잡아당겼다. 평소처럼 온몸으로 껴안는다는 느낌이 아닌 가벼운 포옹에 가까웠다.

“야…….”

“조금만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요. 우리 이틀 만에 본 거잖아요.”

지금 가면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르고. 그를 돌려보내려던 임성은 머리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몸에 힘을 풀었다. 아쉬운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좀 더 진심을 말하자면,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김희도는 늘어져 있는 임성의 팔을 움켜쥐고 제 허리에 두르게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꽉 껴안았다. 거실에서 이게 뭔 짓인가 싶으면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니, 잠깐만. 이건 좀 심할 정도로 뛰지 않나. 갑자기 왜 이러지.

임성은 심장 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 후 어차피 혼날 거, 아침까지 선배와 같이 있겠다는 것을 겨우 어르고 달래서 서울로 돌려보냈다.

* * *

눈을 떴을 땐, 창 너머로 햇볕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폰을 쥐고 실눈을 뜬 채 액정을 확인했다.

PM. 13:07

“헉. 한 시?”

몸을 벌떡 일으킨 임성이 눈두덩을 꾹 눌러 비비고선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었는데, 역시 오후 1시가 맞았다. 이 시간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쭉 잔 건 처음이라 상황 파악이 안 되고 얼떨떨했다.

하지만 요 며칠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두통이 사라진 몸은 한결 가뿐했다. 임성은 까치집이 된 뒷머리를 긁적이며 톡을 열어 가장 상단에 뜬 대화창을 눌렀다.

-김희도: 잘 잤어요?

-김희도: 아직 자고 있나? 일어나면 연락 주세요.

-김희도: 보고 싶어요.

연달아 온 문자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

[선배! 지금 일어났어요?]

신호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희도가 받았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크고 조금 들뜬 목소리에 희미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좀 더 가까이 붙였다.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봤는데도 벌써 보고 싶었다.

마음을 자각한 게 이렇게 다르구나. 원래도 좋았지만, 뭔가…… 간질거리네.

왠지 어색하고 머쓱한 기분이 들어 괜히 볼을 긁적였다.

“잘 잤냐? 난 이제 일어났어. 이렇게 푹 잔 거 오랜만이야.”

[그러니까 어제 일찍 자지.]

어제 임성은 김희도가 병원, 병실 안까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겨우 전화를 끊었다.

김희도라면 병원에 가는 척하면서 숙소에 다시 돌아올 것 같아서. 그 말을 했더니 “헐, 어떻게 알았어요?” 하고 오히려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안 들켰어?”

[바로 알아차리시던데요? 학창 시절에도 안 썼던 반성문 썼습니다.]

예상대로 김희도는 매니저에게 들켜 한 시간 넘게 잔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다분히 묻어 있어 임성 역시 미소를 지은 채 대화를 이어 갔다.

* * *

김희도는 검사 결과 다행히 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소견이 없다 해도 구단 은 그에게 절대 안정을 권유했다. 머리 쪽으로 공이 날아온 경험은 사람에 따라서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으니까.

김희도 역시 예외는 아니라 바로 엔트리에서 말소가 됐다. 코치 말로는 서울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코뼈가 잘 붙고 이상이 없으면 2군에서 적응 후 복귀 예정이라고 했다. 그게 최소 한 달 걸린다니, 이번 원정은 당연히 참여하지 못했고, 두 사람은 의도치 않게 떨어지게 됐다.

자신은 아무렇지 않으니 바로 복귀하겠다는 김희도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1, 2군 매니저는 물론이고 코치와 한국말도 잘 하지 못하는 감독까지 나서서 설득해야 했다.

코가 팅팅 부어선 멀쩡하단 말이 나오나. 진짜 이건 무슨 고집인지 도통 이해가 안 되네.

김희도는 임성과 매일 통화를 약속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끄덕였고, 그날부터 오늘까지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밥 먹었어요? 누구랑 뭐 먹었어요? 친한 척하는 사람은 없었죠?]

“재영이 형이 삼겹살 쐈어. 둘이서 15인분 해치우고 냉면에 공깃밥까지 먹었다.”

임성이 프로에 진출하고 김희도가 고등학생일 때도 종종 통화했지만, 그때와는 상황도 감정도 현저히 달랐다. 사소한 일상조차도 묘하게 간질간질한 것이었다.

[둘이서?]

기분 탓인지 목소리 끝이 무척 삐딱하게 올라갔다.

[난 투쁠 소고기 사 줄게요. 물냉 비냉 다 주문할 테니까 권재영한테 얻어먹지 마요.]

“인마. 선배 이름만 덜렁 부르지 말랬지? 그리고 넌 내가 사 줘야지.”

[선배. 빵집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 안 나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김희도와 아기자기하다 못해 간지러운 디저트 가게에 갔던 적이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하는 애가 먼저 들어가는 모습이 의아했는데, 단 거 먹고 기운 차리라는 의도였었지.

‘좋아하니까 사는 거예요.’

무심한 표정과 터질 듯 새빨개진 귀로 말하던 김희도가 떠올랐다.

“그럼 더더욱 내가 사야겠네.”

[아니요. 제가.]

두 사람은 한참을 더 내가 맛있는 걸 사겠다고 다툼 아닌 다툼을 벌이고 난 다음에야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내일 등판이죠? 내가 가서 손잡아 줘야 하는데, 아쉽다.]

“잘할게. 걱정하지 마.”

[그럼요. 선배는 잘할 거예요. 아무도 선배 공 못 칠걸요. 한국 최고 투수. 초특급 좌완.]

“네가 생각해도 좀 오버 같지?”

[뭐가요? 난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래도 나 없이 너무 잘하진 말고요.]

크흠. 흠. 임성은 손을 말아 쥐고 입가에 댄 채 헛기침을 가장한 웃음을 연신 뱉어 냈다.

원래도 귀엽던 자신의 애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귀여워졌다. 이게 콩깍지인가 싶기도 한데, 나쁘기는커녕 좋았다. 이래서 다들 연애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알았어. 적당히 잘할게. 아, 그리고 예준이랑 종열이도 잘 있지? 둘 다 본 지 오래됐네.”

[몰라요. 관심 없어서.]

이번에야말로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임성은 일요일 엘리펀츠와의 경기에 선발로 등장했다. 지난 등판 때 워낙 안 좋은 모습을 보인 탓인지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5.2이닝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주변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 냈다.

하지만 뒤이어 올라온 불펜진이 연속으로 실점하며 임성의 승리가 날아갔다. 바로 눈앞에서 승리를 날린 것에 관한 아쉬움은 조금도 없었다. 팀이 이기면 자신의 승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다만,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반겨 주던 남자의 부재에 쓸쓸함을 느꼈을 뿐.

* * *

“임성 선수. 이번 시즌 좋은 활약을 보이며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인기를 실감하시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 가끔 69번 유니폼을 입은 분을 보긴 해요. 여전히 신기합니다.”

“팬서비스 좋은 선수로 유명하죠. 팬분들이 뿌듯해할 것 같습니다.”

사진이나 사인 요청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잘 적응을 못하고 어색하게 굴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고 좋아해 줄 거란 생각 자체를 못 했으니까. 별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임성은 1군에서 악착같이 버텼다. 체력이 조금 떨어진다 싶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져서 확실히 휴식을 취하고, 그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운동장을 달렸다.

가끔 최희탁이나 권재영 등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다. 대신 만취한 사람처럼 흥을 돋웠기 때문에 다들 흡족해했다.

코치는 물론이고 베테랑들에게 계속 묻고, 또 배웠다. 그들은 생글생글 웃으며 서슴없이 다가오는 젊은 후배를 무척 예뻐했다.

팀에서 고참 중의 고참에 속하는 데다 투수 조장이라 후배들이 어려워하는 박태영도 틈만 나면 임성에게 밥을 샀다.

용병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장 근처 맛집을 알려 주고, 어린아이가 있는 용병에겐 키즈 카페나 애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을 추천해 주며 친밀감을 쌓았다. 어릴 때부터 여동생들을 돌본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손가락을 이쪽에?”

“OK.”

메이저에서 선발로 뛰다가 올해 KBO에 온 투수는 제 주특기인 변화구를 전수해 줬다. 그립 쥐는 법을 직접 알려 주며 어떻게 하면 좋은 궤적이 나오는지 설명했다.

올해 당장 쓰는 건 힘들더라도 구종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었다. 선발은 최대한 이닝을 길게 끌고 가야 하는 보직이라 구종이 많을수록 타자를 상대하기 쉬웠다.

원래도 성실한 편이긴 했지만, 임성이 이렇게 노력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김희도가 1군에 있으니까.

젊은 나이답게 무시무시한 회복력으로 약 37일 만에 1군에 복귀한 김희도는 부상 전의 플레이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잘한다는 뜻이었다.

가끔 머리 방향으로 날아오는 실투가 신경 쓰일 만도 한데 전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 배트를 휘둘렀다.

“진짜 난놈은 난놈이라니까.”

베테랑들도 인정하는 배짱이었다.

그러나 그 좋은 타격감이 귀신같이 내려갈 때가 있는데, 바로 임성이 1군에 없을 때였다.

컨디션 난조로, 혹은 가벼운 부상 등으로 임성이 2군에 내려가면 김희도의 타격감 역시 급격히 꼬라박았다.

바로 전 주만 해도 타율 4할을 치던 선수가 이번 주엔 1할을 겨우 때리는 모습은 모두의 걱정을 사기에 충분했다.

‘나 따라 2군에 오려는 건 아니지?’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못 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고양이가 솜방망이로 배트를 휘둘러도 너보단 잘 칠 거야. 넌지시 물은 말에 김희도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진짜 안 쳐지는 걸 어떻게 해요. 방향을 잃은 기분이라고요.’

그 과정을 몇 번 겪고 나자 절대로 2군에 가면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 * *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큰 가을. 총 열 개 구단은 오늘로써 약 144경기라는 대장정을 끝냈다.

이솔 페어리즈는 마지막 경기에 승리하며 정규리그 최종 3위를 확정 지었다. 8월 중순부터 각성한 선수들이 미친 활약을 보이며 연승의 연승을 거듭한 기적의 결과였다.

작년 이맘때, ‘가을 야구 냄새라도 맡고 싶다.’, ‘바로 떨어져도 되니까 제발 와카라도 나가자.’, ‘10년 전에 산 가을 잠바 좀 입자.’ 하고 부르짖던 페어리즈 팬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구단 채널인 요정TV는 물론이고, 구단 홈페이지, 각종 SNS에 #페어리즈 3위 #야구 빠따를 든_깜찍한 요정들 같은 응원이 쏟아졌다.

‘차라리 해체해라. 더는 열 받아서 못 해 먹겠다.’, ‘이 구단은 존재 자체가 죄악이다.’ 등등 욕먹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김희도와 임성 역시 팀의 승리에 일부분 기여했다.

데뷔 첫해 온갖 기록을 갈아 치우는 중인 김희도는 물론, 지난 시즌엔 미미한 활약을 보였던 임성은 부상 없이 이닝을 꾸준히 먹으며 발전 가능성을 보였다.

8년! 무려 8년 만의 가을 야구에 신난 팬들만큼 구단 또한 분주해졌다.

가끔 사무실을 오가며 마주치는 마케팅 팀장과 그 팀원들은 매일 밤 흡사 좀비처럼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괜찮으세요? 엄청 힘들어 보이시는데.’

‘힘들지만 차라리 이게 나아요. 몇 년 전에 연속으로 꼴찌 했을 땐, 장난 아니게 살벌했거든요. 지금은 다들 좋아하니까…… 비록 저와 우리 팀원들 몸은 갈리는 중이지만요.’

괜찮으냐고 묻는 임성에게 팀장은 퀭한 얼굴로 힘없이 웃더니 다시 사무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왠지 고맙기도 하고 짠한 마음에 커피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보내자 폭발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혹시 카페인 못 먹는 사람이 있을까 봐 디카페인 커피와 주스를 넣었더니 크으, 우리 선수님 센스 좀 보라며 칭찬을 퍼부었다. 새 유니폼 출시할 때 69번 마킹은 특히 더 신경 쓰겠다나?

김희도는 임성이 사람들을 신경 쓰는 걸 매우, 매우 못마땅해하다가 69번 유니폼에 신경 쓰겠다는 말을 듣고 급격히 차분해졌다. 갑자기 돌변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리 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 * *

“안녕하세요, 베이스볼 러브입니다. 임성 선수. 정규리그 3위 축하합니다. 페어리즈는 후반 페이스가 가장 좋은 팀 중 하나로 가을 야구까지 진출했습니다. 가을 야구는 어떻게 임할 생각입니까? 각오 한마디 부탁드려요.”

“특별히 생각하는 건 없습니다. 늘 하던 대로 열심히 던지겠습니다. 많이 찾아와 주시고 응원도 부탁드립니다.”

“하던 대로 던지겠다, 가장 쉬우면서도 어렵죠. 신인다운 열정적인 답변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오늘만 벌써 두 개째 인터뷰를 끝낸 임성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터뷰 후 복도를 가로질러 샤워실로 향하던 임성은 제 팔을 잡아당기는 손에 이끌려 갔다.

쾅, 문이 닫히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입술이 부딪혔다. 임성은 본능적으로 밀어내려던 손을 움직여 목을 끌어안았다. 아직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따끈하게 달아오른 몸이 맞붙고, 두 사람의 다리가 난잡하게 엉겼다. 김희도는 한 손으로 임성의 목을 받치고 다른 손으론 허리를 훑다가 엉덩이를 가득 움켜쥐었다.

“흣.”

혀가 조급하게 얽히는 키스는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숨이 살짝 가빠질 때쯤 끝났다. 김희도는 젖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다시금 깨물었다.

“인터뷰는 잘했어요?”

“네 것까지 한다고 정신없었어. 갑자기 도망가면 어떡해.”

“저 인터뷰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너한테만 질문할 것 같아서? 혹시 나 찬밥 될까 봐 걱정했냐?”

“…….”

김희도는 대답하지 않음으로서 대답을 했다.

시즌 초, 아니 고등학교부터 유명했던 김희도 팬들과 언론의 관심을 몰고 다녔다. 성적은 논외로 치고, 외모와 패션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기사까지 나와서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저런 건 연예인이나 하는 줄 알아서.

죽기 살기로 언론을 피해 다니는 모습을 보면, 한호찬 감독 비리 의혹을 먼저 폭로한 게 신기했다.

“근데, 너 씻었냐? 나도 씻고 올…….”

“괜찮아요. 안 씻어도 예뻐요.”

저 혼자 뽀송뽀송한 얼굴로 칭찬해 봤자 전혀 설득력 없었다.

임성은 끝까지 씻지 말라는 남자를 뒤로한 채 말끔하게 씻고 나왔다. 말 걸지 말라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낸 채 벽에 기대고 있던 김희도는 임성을 발견하고 빠르게 걸어와 찰싹 붙어 팔짱을 꼈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숙여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댔다. 실금이 갔던 콧등은 잘 아물어 여전히 날렵하고 매끈한 모습을 자랑했다.

“이것도 좋네요. 선배 살냄새가 더 나는 것 같아.”

쏟아진 앞머리가 목덜미를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손을 뻗어 보들보들한 머리를 쓰다듬고 뒤이어 뺨을 쓸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렸다.

“거기 두 분, 잠깐만요! 가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복도 끝, 입구 근처에서 카메라를 든 요정TV가 보였다.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라고 지방까지 원정 촬영을 온 모양이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PD는 카메라를 들고 후다닥 뛰어왔다. 임성이 구단 채널에도 잘 참여하는 걸 알면서도 급했나 보다. 그 옆에 남자가 워낙 비협조적이니까 기회를 놓칠 수 없었겠지.

여전히 김희도와 팔짱을 낀 채였지만, 떼어 내려는 시도는 딱히 하지 않았다. 어차피 떨어져 나가지 않을 걸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정규리그 마지막 퇴근길…… 헉!”

“괜찮아요?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이거 엄청 비싼 카메라거든요. 저는 넘어져도 상관없지만 카메라는 절대 떨어트리면 안 돼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PD를 잡아 준 임성이 카메라 위치를 조정해 줬다.

“친절하시네요.”

후우, 가슴을 쓸어내린 PD가 웃으며 가을 야구 진출 축하와 질문을 동시에 했다.

「♥페어리즈 정규리그 ‘3위’ 축하합니다.♥ 여동생이 있다면 소개해 주고 싶은 선수는?」

“어…… 음. 으음.”

어떤 질문이든 늘 명쾌하게 대답했던 임성답지 않게 머뭇거림이 길어졌다.

음, 으음. 미간까지 좁혀 가며 고민의 고민을 거듭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제 여동생들이 초등학생이라서…….”

“아, 아아. 인정. 대답 안 해도 완전히 인정합니다.”

실제 여동생, 그것도 아직 초등학생이라는 말에 PD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임성 선수는 없는 걸로 하고. 카메라는 이제 김희도를 잡았다.

진짜 잘생겼네. 무심코 내뱉은 편집자의 중얼거림을 다들 모른 척했다.

“김희도 선수 대답은 어차피 정해져 있죠? 임성 선수로?”

“아니요.”

아니야? PD를 비롯한 촬영 팀 두 명과 임성의 고개가 그에게로 돌아갔다. 네 명의 시선을 받은 남자는 개중 임성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다른 사람은 관심 없고, 임성 선배는 절대 안 됩니다.” 하고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이건 썸네일 각이다. 왠지 재밌는 대답이 나올 것 같단 말이지. 지난 3년간 요정TV를 관리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PD의 촉이 이건 대박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PD는 김희도 쪽으로 카메라를 좀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선배로서는 존경하지만, 소개는 해 주기 싫다는 건가요?”

평소 둘 사이가 워낙 돈독하다는 걸 알고 하는 농담이었다. 이젠 대놓고 팔짱을 끼고 나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다 따로 나오면 둘이 싸웠냐는 댓글이 주르륵 달릴 정도였으니까.

“소개를 왜 해 줍니까. 이 남자는…….”

“제, 제가 많이 부족해서요. 하하하. 저희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들 시즌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에 봐요.”

하하하, 다소 경직된 웃음을 내뱉은 임성이 김희도를 데리고 구장을 후다닥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가을 야구 축하한다는 PD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어? 저 말 다 못 했는데요? 제일 중요한 걸 빼먹었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안 듣는 게 나을 것 같다.”

임성은 고개를 저으며 한 쪽엔 김희도와 팔짱을, 어깨엔 가방을 메고 숙소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팬들에게 붙잡힌 두 사람은 2시간 동안 사인을 해야 했다.

* * *

10개의 구단 중 다섯 팀이 내년을 기약하며 물러나고, 나머지 다섯 팀이 가을 축제에 진출했다. 김이설이 간판 타자로 있는 유니콘즈는 시즌 막판에 성적이 곤두박질치며 최종 8위에 머물렀다.

한국 시리즈는 하위팀이 상위팀을 상대하며 올라오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5위 팀이 4위와 맞붙는 와일드카드전, 거기서 이긴 팀이 3위와 붙는 준플레이오프, 또 거기서 승리한 팀과 2위 팀의 대결인 플레이오프, 마지막으로 정규리그 1위 팀과 최종적으로 겨루는 한국 시리즈가 있었다.

정규리그 3위인 페어리즈는 와일드카드전에서 올라올 팀을 기다리며 훈련에 매진했다.

와일드카드 승리 팀은 지난해 골든 글러브 투수 수상자인 남지민이 있는 BS 샤크스였다.

임성은 언제라도 등판할 수 있게 준비했지만, 페어리즈는 샤크스에게 내리 3승을 거두며 곧바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리고 2위 팀인 닉스 엘리펀츠와 맞붙으러 가는 길에 임성은 네 번째 경기 선발로 낙점됐다.

리베르트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경기 일정을 생각하면 임성이 해 줘야 한다. 그 역시 페어리즈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선수다. 임성은 매우 성실하며 모두에게 상냥하다. 그의 성실함은 팀에 자극을 줄 것이며, 팀은 다정한 그에게 승리를 주고 싶어 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 립서비스가 살짝 가미됐겠지만, 아예 마음에 없는 소리도 아닐 것이다.

선발로 등판한단 소식을 들은 후부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온갖 잡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훈련장과 웨이트실에서 살았던 것 같다. 당연한 듯 김희도와 함께.

두 사람은 매일 밤늦게까지 훈련장을 떠나지 않았다. 가벼운 캐치볼을 할 때도 있었고, 실전처럼 힘껏 공을 던지고 칠 때도 있었다.

오버 워크 하려는 임성을 말린 건 김희도였다. 그는 임성이 무리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모른 척 맛집에 데려가거나 조용한 거리를 함께 걷곤 했다.

그렇게 임성이 걱정과 설렘으로 가득한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플레이오프가 시작됐고, 다행히 두 경기 연속 페어리즈가 승리하며 앞서 나갔다. 엘리펀츠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아, 세 번째 경기에서 무려 10점을 몰아치며 페어리즈에게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 임성이 선발로 나서는 날이었다.

-김이설: 너 내일 선발이라며? 내년에는 무조건 우리 팀이 이긴다.

-나: 같이 잘해서 결승에서 만나요. 선배님.

-김이설: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머쓱해지잖아;;ㅋㅋㅋㅋㅋㅋ

-김이설: 잘해라. 이겨!!!!!

김이설뿐 아니라 리틀 야구단 친구들, 중고등학교 야구부 등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쏟아졌다. 조예준은 진심으로 축하하며, 내년에는 꼭 자신이 공을 받겠다고 다시 한번 선전포고를 했다.

그 말을 들은 김희도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지만.

경기 전날 밤, 임성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이불 끝을 꽉 쥐었다. 내일을 위해선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벌써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지 머릿속이 살짝 붕 뜬 느낌이었다.

“잠이 안 와요?”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김희도가 조용히 물었다.

“조금. 넌?”

“선배 자는 거 보고요. 그대로 두면 아무래도 밤 꼴딱 샐 것 같단 말이지.”

역시 자신을 잘 아는구나. 임성은 손을 가슴에 얹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심장 터질 것 같아. 내일 잘할 수 있겠지?”

“그럼요. 다 좆밥이라고 생각하고 던지면 돼요.”

“상대팀한테 좆밥은 좀 그렇지 않아?”

“그러네요.”

전혀 그렇지 않은 말투로 김희도가 대답했다.

“너는 타석에서 무슨 생각 해?”

“저요? 선배 핥고 싶다. 또…….”

“농담하지 말고.”

농담 아니고 진짠데. 중얼거림과 함께 이불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김희도가 누운 자세를 바꾼 모양이었다.

“으음. 중고등학생 땐 아무 생각 안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잘 쳤다고?”

임성은 열네 살의 김희도에게 홈런을 얻어맞았던 기억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도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맸었지. 나중에는 왠지 모를 억울함에 김희도가 나오는 경기를 찾아다녔었고. 지금 생각하면 참…… 어렸다.

“깊게 생각하면 오히려 어려워요. ‘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친다.’, ‘공이 배트 근처에 오니까 휘두른다.’ 그게 다예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언뜻 쉬워 보이지만, 마운드에서 온갖 상황을 가정을 떠올리는 임성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다음 타석을 노리면 되고. 쉽잖아요.”

“그래. 잘 될진 모르겠지만, 네 말처럼 최대한 쉽게 생각해야겠다. ……벌써 1시가 넘었네. 이제 진짜 자자.”

내일 경기는 오후 2시에 시작했다. 경기 시작 전에 이것저것 준비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지금 자도 빠듯했다.

“잘 자라.”

“선배도요.”

이불을 가슴께로 끌어 올리며 눈을 감는데,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대신 김희도가 이불 속을 슬그머니 파고들었다. 끼익. 무게를 이기지 못한 매트리스가 기울어졌다.

숙소 침대는 슈퍼 싱글로 평범한 크기였지만, 운동선수에겐 살짝 작은 감이 없지 않았다. 가뜩이나 비좁은데, 체격 좋은 남자 둘이 누우니 꽉 차다 못해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좁아.”

“이러면 괜찮아요.”

그는 임성의 목 밑에 팔을 집어넣어 팔베개를 하고 나머지 손으로 어깨를 감싸 제게로 당겼다. 임성의 고개가 살짝 숙어지며 옆얼굴이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야.”

“안 해요. 아무것도.”

“……네 아래는 아닌 것 같은데?”

“걘 선배만 보면 시도 때도 없이 반응하니까요. 그냥 무시해요.”

그냥 무시하기엔 허벅지 안쪽을 찌르는 것의 존재감이 너무 선명하잖아. 크고 묵직한 것이 다리에 닿는 느낌에 임성이 움찔하자 그는 다시 한번 “리그 끝날 때까지 안 해요. 선배한테 미움받기 싫으니까요.” 하고 말했다.

귓가에 사근사근 속삭이는 목소리와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퍽 다정해 가슴이 간질거렸다.

“뭐라도 안으면 안정될 거예요. 그 ‘뭐’는 당연히 나밖에 없고.”

“그래도 팔베개는 하지 말자. 혹시라도 팔에 무리 가서 내일 경기에 지장 가면 어떡해.”

임성은 제 목을 받친 팔을 슬그머니 밀어내 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팔에 힘을 줬는지 핏줄이 울퉁불퉁 불거지고 딱딱해진 게 느껴졌다.

“문제요? 내가?”

나 김희도예요. 문제가 있을 리 없잖아요. 하지 않은 말이 들릴 정도로 자신감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선배 등판 때 내 타율 얼만지 얘기해 줘요?”

모를 리가 있나. 웬만해선 슬라이딩을 안 하는 애가 자신이 등판하는 날엔 온몸을 던져 가며 어떻게든 출루하고 필사적으로 수비를 하는 걸. 중고등학교 땐 땀나는 게 싫다며 장타를 치고도 1루에 멈췄던 그 김희도가.

임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김희도가 팔베개를 한 손을 움직여 귓불을 만지작댔다. 느긋한 손길에 뺨과 목덜미가 살짝 떨렸다.

“그렇게 내 팔이 걱정되면 이쪽으로 좀 더 와요. 그게 훨씬 도움 돼.”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해도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깔끔하게 포기하고 김희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팔 안쪽에 닿는 단단한 육체의 감촉이 좋았다. 원하는 만큼 세게 껴안아도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으니까.

“선배. 이번 시즌은 선배에게 다 줬잖아요.”

귓불을 괴롭히던 손가락이 옆얼굴을 타고 내려와 뺨을 간지럽혔다. 완전히 자는 것도, 깬 것도 아닌 아주 얕은 선잠이 들었을 즈음,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고요한 방을 울렸다.

“응.”

스프링 캠프, 아니 지명을 받고 난 후 김희도는 온전히 임성의 일정을 따랐다.

보통의 연인들이 한껏 설레하며 데이트할 때 두 사람은 실내외 훈련장에서 운동과 레슨을 무한 반복했다. 철저한 운동선수의 삶이었다.

와, 지금 생각해 보니 나 진짜 너무 했구나. 새삼 안 차인 게 다행이네.

“아,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에요. 땀 흘리는 선배 보는 것도, 만지는 것도 좋아하니까.”

“알아.”

“그래도 시즌 끝나면 그땐 내가 하고 싶은 거 해요. 선배 비시즌 통째로 나한테 줘요.”

“그래. 가져가.”

지금으로선 아무 탈 없이 시즌을 무사히 끝내는 게 우선이었다. 팀이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김희도가 숨을 길게 내쉬는 게 느껴졌다. 거절이라도 할까 봐 긴장한 것 같았다. 귀엽긴.

“하고 싶은 거 있어? 진작 말했으면 했을 텐데…….”

“시즌 중에 하긴 좀 그렇고. 뭐, 오프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중에 말해 줄게요.”

대체 뭔데 말을 안 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무거워진 눈꺼풀이 의식을 끌어내렸다.

“이제 그만 자요. 좋은 꿈…… 다른 거 말고 내 꿈만 꾸세요.”

정수리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 * *

캄캄한 방 안의 불을 켜는 것처럼, 한순간에 눈이 뜨였다. 늦은 새벽과 이른 아침의 그 어디 즈음, 꽉 닫힌 커튼 사이로 햇볕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새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으음. 벌써 아침인가. 몸을 일으키려던 임성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걸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보나 마나 김희도겠지.

다행히 팔베개는 도중에 그만둔 것 같지만, 마주 보고 있는 상태라 한쪽 어깨가 살짝 눌려 있었다.

이렇게 자면 팔 저릴 텐데. 그를 바로 눕히고 최대한 조용히 몸을 빼내는데, 조심한 보람도 없이 김희도가 눈을 번쩍 떴다.

“선배.”

아직 잠에서 덜 깨 도톰하게 부은 눈으로 배시시 웃는다. 의도한 게 아닌 무의식적인 미소였다.

임성은 제 이름을 부르면서 다시 안으려는 김희도의 손을 제지하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귀엽다고 넘어갔다간 아침 내내 껴안고 있을 게 분명했다.

“벌써 8시야. 얼른 씻고 준비해야지.”

김희도는 텅 빈 제 손을 잠시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잘 잤어요?”

“그런 것 같아.”

늦게 잔 것치고는 머릿속도 몸도 가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으로 날씨를 확인했다. 오늘 낮 최고 기온 22도 예상, 강수 확률 약 7%의 맑고 화창한 날씨.

간단히 씻고 조식을 먹은 뒤 유니폼을 챙겨 구장으로 출근을 했다. 아직 집합 시간 한참 전인데도 벌써 선수들이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그라운드 한쪽에선 주장 최희탁이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다. 오늘의 각오, 코시, 우승 등의 단어가 어렴풋이 들렸다.

“성이 잘 잤냐? 컨디션은 좀 어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괜찮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임성의 어깨를 두드리던 박태영은 김희도와 눈이 마주치자 그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김희도는 무뚝뚝한 얼굴로 목만 살짝 까딱였다. 입단 초나 1년 가까이 지난 지금이나 무뚝뚝한 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페어리즈 선수들은 야수와 불펜 조로 나뉘어 최종 훈련을 진행했다. 선발 투수는 훈련에서 예외라서 임성은 홀로 벤치에 앉아 공을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네. 사실은 지금 이건 꿈이고, 눈을 뜨면 페어리즈가 아닌 고등학교 유니폼을 입고 있는 건 아닐까.

“다들 무리하지 말고 알아서들 조절해라.”

훈련을 마친 선수들은 또다시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그즈음엔 엘리펀츠 선수들도 그라운드에 넓게 퍼져 몸을 풀고 있었다. 각 팀에서 친분 있는 선수들끼리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평소와 다른 묘한 긴장감은 숨길 수 없었다.

빠르게, 그러나 무척 느린 것 같기도 한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경기 시작 전이었다.

구장은 이미 관중으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매진이라고 했었나. 예약 페이지에 접속도 잘 안 되다가 겨우 들어가니 자리가 남아 있질 않았다고, 표 좀 어떻게 못 구하냐는 연락도 여럿 받았다. 아버지 것도 구단 찬스로 겨우겨우 구했는데, 다른 사람들 티켓을 구할 수 있을 리가.

한국 시리즈도 아닌데, 암표 가격이 원래 티켓의 몇 배나 뻥튀기됐다는 말이 돌았다. 그만큼 팬이나 언론의 주목도가 높다는 뜻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페어리즈는 무려 8년 만의 가을 야구 진출, 그것도 무려 플레이오프였고, 엘리펀츠도 만만치 않은 인기 팀이었으므로.

페어리즈 팬들이 얼마나 좋아했냐면, 외출복으로 가을 야구 점퍼를 걸치고 SNS나 야구 팬 사이트에 인증샷을 올렸다.

포털 사이트 스포츠란 메인은 야구로 꽉 찬 지 오래였다. 그리고 임성은 그런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는 것이고.

“뒤는 우리에게 맡기고 넌 부담 없이 해. 우리가 누구냐, 리그 최강 불펜 아니냐? 나는 마무리 왕이고.”

일부러 가볍게 말하는 권재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글러브를 챙기는 것으로 마지막 준비를 했다.

“우아아아아!”

관중의 함성 소리와 함께 플레이오프 4차전이 시작됐다.

임성은 숨을 깊게 내쉬며 마운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아직 공을 던지지도 않았음에도 페어리즈와 엘리펀츠를 연호하는 양 팀의 응원 소리로 귀가 먹먹했다.

1번 선수 박조영, 2번 선수 안철호, 3번 선수 오재훈…… 엘리펀츠 선수들의 이름을 들으며 손바닥을 바지에 비벼 닦았다.

“오늘따라 손이 좀 미끄럽네.”

현재 플레이오프 성적 2승 1패. 만약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한국 시리즈 확정이었다. 결승 진출을 하느냐 마느냐가 이 경기로 결정이 된다.

단두대 매치가 아닌 게 어디냐 싶으면서도 막상 마운드에 오르자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믿어 준 감독님과 코치님, 팬들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

잘할 수 있겠지? 임성은 무의식중에 김희도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수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남자를 보고 나서야 미친 듯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이 됐다.

후우, 심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첫 공을 던졌다.

“볼.”

손끝에서 빠져나갈 때부터 예상했지만, 역시 볼이었다. 볼, 볼. 뒤이어 던진 두 번째, 세 번째 공도 존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행히 타자가 배트를 휘둘러 스트라이크가 하나 올라갔지만, 여전히 이쪽이 불리했다.

왜 스트라이크가 안 꽂히지. 괜찮은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나? 어깨 각도를 조금 내리면 나으려나? 지금 저 선수는 어떤 공에 약했지. 임성은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다시금 공을 뿌렸다.

“볼.”

하지만 이번에도 볼로 판정됐고, 엘리펀츠 타자가 보호구를 풀며 1루로 걸어 나갔다. 첫 타자부터 볼넷. 시작이 좋지 않았다.

벌써 땀이 흥건한 이마를 닦으며 포수 미트 한가운데를 노려봤다.

임성. 저기, 저기에 넣으라고! 눈앞에 미트가 뻔히 보이는데 왜 못 넣어.

그사이 빈 타석을 채운 엘리펀츠 타자가 양손으로 배트를 쥐고 다리를 살짝 들었다.

임성은 이를 악물고 뒤로 젖혔던 팔을 앞으로 쏟아 냈다. 아, 잠깐만. 이건…….

깡!

『끌어당긴 타구가 우측 담장을 향해 날아갑니다! 엘리펀츠 안철호의 번개 같은 투런포! 1회 초 엘리펀츠가 2점 앞서갑니다. 방금 공은 명백한 실투였죠. 너무 높았습니다.』

아치형을 그리며 길게 날아가던 공이 기어코 담장을 넘어갔다. 우아아아! 관중석이 들썩이고 코끼리가 그려진 새파란 깃발이 여기저기서 나부꼈다.

볼넷 출루에 이은 투런. 심지어 아직 스트라이크는 제대로 꽂지도 못했다. 투수 코치 두 명과 송우림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죄송합니다.”

임성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임성. 이제 1회다. 아직 사과할 때 아니야. 사과할 일도 만들지 말고. 인마, 너 여기 어디냐?”

“잠실구장입니다. 엘리펀츠와 경기 중…….”

갑자기 장소를 묻는 코치의 말에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코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 이천이다. 너 퓨처스 성적 어땠냐? 엄청 좋지? 삼구 삼진으로 아주 타자들을 후려잡잖아.”

삼구 삼진으로 후려잡는다는 건 코치의 오버였지만, 나름 괜찮은 성적이었다.

“급할 거 전혀 없으니까, 힘 풀고 한 명씩 천천히 잡아. 알았냐?”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한 코치가 먼저 내려가고 송우림이 글러브 낀 손으로 임성의 엉덩이를 툭 쳤다.

“구위는 괜찮으니까 제구만 잡으면 될 것 같다. 제구 잡는 거 네 특기잖아. 우선 변화구 위주로 가고, 나머지는 상황 보면서 하자.”

“네. 선배님께 맡기겠습니다.”

이천, 여기는 퓨처스 구장이다. 이건 플레이오프가 아니라 2군 경기야.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손으로 공을 굴렸다. 프로 첫 데뷔 경기나, 첫 선발과는 다른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떡볶이!”

그때, 뒤에서 김희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저 떡볶이 엄청 잘 만들어요.”

만원 관중의 응원과 시끄럽게 울려 대는 앰프 소리를 뚫는 외침이었다.

모자를 고쳐 쓰던 자세 그대로 뒤를 돌았더니, 김희도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휘젓고 있었다.

뜬금없이 웬 떡볶이냐. 의아해하던 임성은 그 언젠가 은퇴하면 떡볶이 가게를 열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던 걸 떠올렸다.

그때 김희도는 자신이 떡볶이를 만들겠다고, 주방장 시켜 달라고 졸랐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김희도를 보면서 우선 메이저부터 함께 다녀오자 했었고.

그래, 그랬어. 무려 메이저를 목표로 하면서 겨우 여기서 무너지면 되겠냐. 정신 차리고 하자.

임성은 글러브를 끼지 않은 손으로 제 뺨을 강하게 때렸다.

짜악! 인정사정없이 때렸더니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다. 아주 높은 확률로 멍이 들겠지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뺨이 얼얼해서인가, 과도하게 들떴던 정신이 조금 차분해지며 송우림의 미트가 보였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저기에 넣는다.

임성은 알고 있었다.

이걸 이겨 내야 다음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스트라이-크!”

빠르게 회전하던 공은 허공을 쭉 가르며 날아가다가 미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파앙! 마치 총을 쏘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불안함이 사라지는 소리였다.

“잘 던지네. 것 봐, 하면 되잖아.”

“편히 생각하자. 파이팅, 임성. 파이팅! 페어리즈 가자. 가자고!”

팀원들의 응원을 들으며 그 뒤로 3개의 아웃 카운트를 올렸다. 무사히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임성이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헤매서 죄송합니다. 홈런도…….”

“죄송할 거 없다 했지? 그리고 정신 차린 것 같으니 됐다. 다음 이닝까지 좀 쉬어라.”

코치에 이어 감독이 “마운드에선 네가 최고다. 자신감을 가져라.” 하고 격려했다. 통역을 거치지 않아 살짝 서툰 말투가 진심으로 다가왔다.

“이겨 냈네요. 부담감.”

“아주 조금.”

“다음에는 이러지 마세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그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벌써 발갛게 부어오른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하나도 안 아파.”

“그래도 싫어요.”

그렇게 말하는 김희도의 표정은 정말 심각해 보여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경기 초반에 흔들린 게 언제였냐는 듯 임성은 빠르게 템포를 찾았다.

물론 던지는 도중 여러 번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떡볶이와 메이저리그를 떠올리며 이겨 냈다. 떡볶이와 메이저, 이 얼마나 웃기고 이상한 조합이야.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속으로 웃고 나면 긴장이 풀려서 던지기가 한결 편해졌다.

“아, 아깝다. 저걸 잡네.”

선발 투수의 호투에 타자들은 안타로 보답했지만, 좀처럼 득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페어리즈는 2이닝 연속 잔루를 남기며 안타까움을 더했다.

스코어는 여전히 투런을 친 엘리펀츠가 2점 차이로 앞서 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김희도의 타석이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 저녁에 맛있는 거 먹어요. 선배 가을 야구 첫 승 축하 기념으로.”

“아직 경기 끝나지도 않았다. 벌써 첫 승 기념이야?”

“어차피 이길 건데요, 뭐.”

경기 초반부터 승리 운운하는 게 어이없으면서도 확신에 찬 말이 듣기 좋았다.

임성은 수건을 손에 꽉 쥐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봤다.

붕, 첫 공에 김희도의 배트가 헛돌았다.

『초구 높은 변화구, 김희도의 배트가 나왔습니다. 좌중간을 가른 공, 허우경 잡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집니다. 김희도 깔끔한 안타.』

“음?”

초조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응시하던 임성이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 탓인지 김희도와 눈이 마주친 것 같…… 에이, 기분 탓이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코시행이 걸린 경기 중에 여길 보겠어? 저러다 주루사라도 당하면 뒷감당은 어쩌려고.

“김희도 저놈. 지금 이쪽 보는 거 아니야?”

더그아웃 펜스에 팔을 얹은 채 주변을 둘러보던 한호현이 의아한 투로 말했다. 지레 찔린 임성이 흠칫하며 눈을 굴렸다.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역시 여길 보는 게 맞았어.

김희도는 당황한 얼굴의 임성을 향해 웃으며 제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사인 보내나 본데? 런 앤 히트라든가?”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만약 조예준이 저 모습을 봤다면 ‘미친 새끼’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빙글빙글 돌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번에야말로 맞장구를 칠 것이고.

그때, 엘리펀츠 투수가 견제구를 던졌다. 장난스럽게 입술을 두드리던 김희도가 빠르게 베이스에 복귀했다.

와, 진짜 심장에 해롭네. 뭔지 몰라도 무조건 알겠으니까 제발 경기에 집중해 주라.

고개를 끄덕인 게 정답이었는지 김희도가 손을 내리며 언제든 뛸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김희도 뜁니다. 이성연 던지지 못합니다. 그대로 2루 베이스에 안착. 김희도 시즌 다섯 번째 도루를 성공합니다.』

그리고 뜬금없는 타이밍에 별안간 도루를 시도했다. 엘리펀츠 포수가 상체를 반쯤 일으키며 공을 던지려 했지만, 이미 2루에 도착한 뒤였다. 슬라이딩까지 했던 김희도가 흙으로 엉망이 된 유니폼을 툭툭 털어 내면서 일어섰다.

그 후 페어리즈 주장 최희탁이 장타를 때리며, 김희도가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드디어 터진 득점에 페어리즈 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아! 배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처럼 깊고 우렁찬 함성이었다.

“저 안타 쳤어요. 1점 따라붙었어요.”

“주루사 당할 뻔도 했잖아.”

“주루사 대신 도루 하고 타점도 올리고. 해피 엔딩이잖아요.”

하나도 안 진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이내 웃으며 달아오른 뺨을 톡톡 두드렸다.

“잘했다.”

김희도가 무려 도루까지 해 가며 점수를 냈으니, 이번엔 자신이 보여 줄 차례였다.

‘눈앞의 타자를 잡는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힘껏 공을 뿌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이 옅어지고 집중력이 한곳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아웃!”

거칠게 들썩이는 숨을 내뱉으며 팔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얼굴과 어깨, 팔꿈치까지 뜨거웠다. 제법 쌀쌀한 바람도 온몸을 잠식한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헉, 허억. 압박과 긴장, 그리고 흥분을 동반한 묘한 감각. 아드레날린이 펑펑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지금 몇 회지? 앞으로 얼마나 더 던질 수 있을까? 아니, 이제는 그것조차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앞에 서 있는 타자를 돌려세울 뿐.

『아, 페어리즈 투수 교체입니다. 임성의 뒤를 이어 이석경이 마운드를 이어받습니다. 초반 투런을 맞을 때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해냅니다. 페어리즈 임성. 지옥에서 시작해 천국에 도착했습니다. 젊은 투수가 불굴의 투지를 보였으니 이제 베테랑이 보여 줄 차례입니다. 한국 시리즈까지 이제 한 걸음. 단 한 걸음입니다.』

『엘리펀츠, 아직 늦지 않았어요. 오늘 경기를 잡으면 2 대 2입니다. 충분히 할만해요.』

6.1이닝 2실점.

임성은 흔들렸던 1회를 제외하곤 한 점도 내주지 않고, 심지어 6이닝 이상 던지며 불펜의 부담을 줄여 줬다.

팀원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내려온 선발 투수를 격하게 환영했다. 그사이 이석경은 땅볼로 타자 두 명을 깔끔하게 돌려세우며 이닝을 끝냈다.

“임성. 이 자식. 진짜 잘 던졌다. 기특한 놈.”

“홈런 맞을 때 가슴이 철렁했잖아. 사람 간 떨어지게 하냐.”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최희탁이 가장 먼저 임성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고, 나머지 팀원들도 임성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엉덩이를 두드리며 친근함을 드러냈다. 박태영과 권재영은 불펜에서 대기 중이라 여기 없었는데, 두 사람, 특히 권재영이 있었다면 제일 흥분해서 날뛰었을 것이다.

김희도는 팀원들에게 둘러싸인 임성을 못마땅하게 응시하면서도 대놓고 제지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단순한 팀원이고 자신은 저 남자의 애인이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팀원 중 한 사람이 그의 목을 껴안는 걸 보는 순간, 얕은 인내심은 바닥나다 못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해는 무슨, 선배의 모든 건 제 것인데.

“음?”

김희도는 임성의 오른쪽 팔을 다급히 잡고, 제게로 당겼다. 힘든 상황에서 잘 던진 투수를 칭찬하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희도를 쳐다봤다.

“벌써 좋아하긴 이른 것 같습니다. 경기 중이잖아요.”

“아, 그래. 아직 경기 중이었지. 자자, 다들 집중해서 점수 내자. 오늘 무조건 이기고 코시 진출한다. 알았냐?”

짝! 최희탁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전환하자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팀원들의 관심을 옮기는 데 성공한 김희도가 팔을 뻗었다. 힘줄이 돋아난 팔이 너른 등을 지나 모자에 닿았다. 순식간에 임성의 모자를 벗기고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뺨 한번 핥아 봐도 돼요?”

저녁 뭐 먹을까요, 하고 묻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지금은 안 돼.”

경기에 정신 팔린 팀원들은 그렇다 쳐도 방송사 카메라와 구단 카메라가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지금도 집에서, 휴대폰으로, 음식점의 대형 TV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중계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목소리까진 안 나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 지금까지 안타, 2루타 쳤지?”

“네.”

추가점까지 합해 현재 스코어는 2 대 2로 동점이었다. 페어리즈가 기록한 2점 중 1점은 김희도의 다리가 만들어 낸 것이고.

“이번에는 3루타 칠 차롄가? 곧 타석 돌아오네. 너 송지훈 선수 상대로 꽤 강했지?”

임성이 엘리펀츠 투수 송지훈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전 누구에게든 강하죠. 선배만 빼고.”

김희도는 임성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이제는 익숙한 루틴을 자연스럽게 한 뒤 대기 타석으로 걸어갔다.

“희도야. 이리 와 봐.”

헬멧과 배트를 쥐고 나가는 남자를 부르며 코치에게 빌린 마커 뚜껑을 돌렸다. 하지만 몇 번이고 배트를 휘둘렀던 팔엔 뚜껑을 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김희도는 헛손질하는 그에게서 마커를 가져가 뚜껑을 열며 “뭐 하려고요. 내가 해 줄게요.” 하고 물었다.

“아니야. 나 줘. 뚜껑 열어 줘서 고맙다.”

임성은 힘껏 배트를 휘두르고 있는 페어리즈 타자를 곁눈질하고 김희도에게 손짓했다. 시간이 없었다.

“여기 앉아 봐.”

그는 이번에도 군소리 없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서 다리를 접어 앉았음에도 벤치에 앉은 임성과 시선이 엇비슷했다.

임성은 역시 코치에게서 받은 아이 패치를 그의 두 눈 아래에 차례대로 붙이고 마커를 들었다.

슥, 슥.

“다 됐다. 얼른 가.”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빙그레 웃고선 대기 타석으로 뛰어갔다. 마침, 페어리즈 타자가 내야 안타를 치며 1루 베이스를 향해 질주했다.

아이 패치를 붙인 김희도가 배트를 꽉 쥐었다.

『바깥쪽, 김희도 스윙. 닿지 않습니다. 스트라이크. 두 번째, 낮게 떨어지는 볼, 그대로 지켜봅니다. 원 앤 원. 김희도 선수, 지난 3차전에서는 안타가 없었죠? 오늘은 날아다니네요.』

카메라가 점점 줌인하며 김희도의 얼굴을 크게 잡았다.

『아이 패치 밑에 뭘 썼습니다. 숫자인가요? 오른쪽 9, 왼쪽 6입니다. 69…… 아, 96인가요? 김희도 선수가 각오를 다지기 위해 자신의 등 번호를 쓴 것 같습니다.』

애써 추리한 캐스터에겐 미안하지만, 96번이 아니라 69번이 맞았다.

임성은 김희도에게 제 등 번호를 당당하게 써 놓고서 그의 플레이를 지켜봤다.

아이 패치에 적힌 숫자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그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도 됐다.

잘해라. 김희도. 다치지 말고 쳐.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김희도의 배트가 다시 한번 힘차게 돌아갔다.

어, 어어? 벤치에 있던 팀원들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내밀고 공의 궤적을 따라갔다.

쭉 뻗어 간 공이 중견수 키를 훌쩍 넘기며 떨어졌다. 1루에 있던 페어리즈 타자가 2루 베이스를 밟고 3루를 돌아 홈을 향해 슬라이딩했다.

『높게 날아간 공이 중견수 뒤로, 더 뒤로, 뒤에 떨어집니다. 3루타! 차성연 2루를 돌아 3루, 3루에서 멈추지 않고 홈까지 돌아옵니다. 김희도의 적시타. 페어리즈, 경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리드합니다.』

역전으로 해당 이닝을 마무리하고 헬멧을 벗으며 오던 김희도가 제 눈 밑을 톡톡 두드렸다. 표정을 보니 적시타를 친 것보다 아이 패치가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놀리던데, 뭐 썼어요? ‘내’ ‘거’ 이런 거 썼나?”

“대충 비슷해.”

“진짜요?”

대답을 들은 김희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임성을 덥석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어깨를 감싼 얼음들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김희도에게선 땀 냄새가 짙게 났는데, 불쾌하기는커녕 묘하게 흥분됐다. 시간 날 때마다 제 목에 코를 박는 게 살짝 이해됐다. 어째 좀 위험한 것 같지만…….

“너 이제 홈런만 치면 사이클링 히트인 거 알아? 만약 달성하면 온갖 최초라는 수식어가 다 붙을걸.”

안타, 2루타, 3루타. 마치 짜 맞춘 듯 순서도 차례대로였다.

경기 중인 두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중계 화면 상단에 ‘김희도 첫 사이클링 히트 도전!’이라는 자막이 작게 떴다. 40년이 넘는 프로 야구 역사 중 속에서도 워낙 희귀한 기록이라 방송사에서도 설레발을 치는 것이었다.

“흠……. 사이클링 히트.”

“부담 주려는 건 절대 아니야. 지금도 엄청 대단하거든. 오늘 완전 불 빠따네.”

덤덤하게 중얼거리는 김희도에게 살짝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그리고.

『과감한 초구 스윙. 타구는 빠르게 왼쪽으로, 왼쪽으로 뻗어 갑니다. 어, 담장, 담장 쪽으로! 좌측 담장을 넘어- 넘어갔습니다! 김희도 솔로 홈런!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으로 마무리합니다! 역대 31번째 사이클링 히트 달성.』

김희도는 다음 타석에서 보란 듯이 홈런을 때려 냈다. 저게 가능하다고?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야. 신인 선수가 데뷔 시즌에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건 최초네요. 천재라는 말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만 19세 선수가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대기록을 달성합니다. 8회 말, 현재 점수는 5 대 3. 페어리즈가 한 점을 추가합니다. 김희도…….』

『제가 시즌 초에 임성과 김희도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적 있죠? 워낙 하드웨어가 좋은 선수들이라 잘할 것 같거든요.』

잔뜩 흥분한 해설이 캐스터의 멘트를 치고 들어왔다. 아무도 임성에게 관심 없을 때 키 플레이어로 꼽은 게 퍽 자랑스러운 듯했다.

『팀의 미래라고 했던가요? 하지만 여러분, 보십시오. 저 선수들은 지금, 여기 이곳에 있습니다. 페어리즈의 미래이자 현재가 팀을 승리로 이끌고 있습니다!』

더그아웃의 팀원들도, 이미 상체가 펜스 밖으로 반쯤 빠져나온 임성도, 구장을 꽉 메운 팬들까지 모두 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허공을 휘리릭 날아가는 화려한 빠던이 아닌 배트를 가볍게 툭 내려놓은 김희도가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들어왔다.

“대단하다는 말도 안 나오네.”

이건 그냥 잘하는 수준을 넘어선 거 아닌가? 야구 드라마 주인공도 저렇게 쓰면 현실성 없다는 이유로 욕먹겠다. 더는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 애는 늘 자신의 상상을 초월했다.

몸을 이리저리 피하며 팀원들의 축하를 노련하게 거부한 김희도가 임성 앞에 섰다.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자, 눈 아래 붙은 아이 패치도 둥실둥실 움직였다.

“봤어요?”

“넌 진짜…….”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서로의 손바닥을 맞부딪혀 하이파이브를 했다.

9회 초, 2사 만루. 마운드에 선 권재영을 보며 임성은 펜스를 꽉 쥐었다. 심장이 시큰대고 발밑이 붕 뜬 느낌이었다.

감독과 코치진들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구장의 모든 시선이 페어리즈 마무리 투수의 손끝으로 향했다.

휭,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에 엘리펀츠 타자의 배트가 헛돌았다.

『권재영, 높은 변화구. 오정혁의 배트가, 돌아갑니다! 스윙! 스윙 아웃. 페어리즈의 수문장은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시즌 8위의 페어리즈가 그동안의 설움을 벗어납니다. 잠에서 깬 요정들은 지금, 레전드스가 기다리는 광주로 향합니다―!!』

경기 내내 열띤 중계를 하느라 목소리가 쉰 해설과 캐스터가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짜냈다. 향합니‘다’ 부분이 유난히 우렁차고 길었다.

권재영이 타자를 아웃시키는 것과 동시에 더그아웃에 있던 팀원들이 환호를 내지르며 그라운드로 뛰쳐나갔다. 일찌감치 대기하고 있던 임성 역시 양손에 물을 들고 무리에 합류했다.

미친 듯이 응원가를 부르며 파도타기를 하던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F가 새겨진 모자와 민트색 유니폼, 뺨에 마스코트 스티커를 붙인 어린 팬은 엉엉 울면서 아빠에게 안겼다.

“페어리즈! 페어리즈! 페어리즈!”

흡사 광란의 축제를 연상케 하는 현장이었다.

누군가는 이깟 공놀이가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이깟 공놀이가 주는 감동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사 만루의 위기를 기적의 무실점으로 마무리한 권재영이 의기양양하게 글러브를 치켜들자 팀원들이 그를 둘러싼 채 물을 쏟아부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간 최희탁이 무릎으로 권재영의 엉덩이를 퍽 찼고, 영 좋지 못한 부위를 가격당한 권재영은 화를 내다가 이내 최희탁과 부둥켜안았다. 둘 다 타 팀 유니폼을 입은 적 없는 사람들이라 더욱 감격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팀원 몇 명은 소리를 지르며 김희도 쪽으로 달려가다가 표정을 보고 급선회를 했다.

땀에 전 채로, 아니 그냥 나한테 오지 마. 당장 꺼져. 눈빛이 통했나 보다.

“김희도, 잘했다. 오늘, 아니 오늘뿐만이 아니라…… 진짜 잘했어.”

노골적으로 팀원들을 거부한 김희도는 임성이 뿌리는 물은 얌전히 맞았다. 오히려 더 하라는 듯 잘생긴 얼굴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물 두 통이 동나고 두 사람은 흠뻑 젖었다.

“저는 선배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역대 최연소, 최초. 그가 가진 기록만 해도 한 손에 꼽기 어려울 것이다. KBO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 계속 회자되겠지. 그런 남자가 저를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게 못내 민망하면서도 더없이 기뻤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임성이 이번에는 제가 김희도를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네가 더 자랑스러워. 중학교 때 너한테 홈런 맞길 잘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 번, 네 번 맞을걸.”

가슴이 벅차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흥분과 감격이 뒤섞여 두서없이 뱉어 내는 말에 김희도가 활짝 웃었다.

“이놈의 자식들. 오늘 둘 다 잘했다. 대 선유고등학교 야구부 만세다! 만세!”

권재영이 양팔로 두 사람의 목을 휘감고 방방 뛰었다. 순간 제 목을 두른 팔을 쳐 내려던 김희도는 환하게 웃는 임성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힘을 풀었다.

이솔 페어리즈.

12년 만의 한국 시리즈 진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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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리즈 확정 후, 여기저기서 축하 연락이 쏟아졌다. 그중엔 김이설이나 백도경을 비롯한 타 팀 선수들도 많았다. 이치연에게선 ‘아직 너를 완전히 인정한 거 아니다. 조만간 보자.’ 하는 의미심장한 연락이 왔다.

완전히 인정한 게 아니면, 반쯤은 했다는 건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네.

“오래 기다렸어요? 코치가 얘기를 안 끝내더라고요.”

“나도 방금 왔어.”

임성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김희도와 함께 숙소로 향했다.

“1회 땐 어떻게 되나 싶더라니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저는 크게 걱정 안 했어요. 선배는 강하니까 늘 그렇듯이 극복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동생 네 명을 둔 장남, 중고등학교 야구부 주장. 항상 무리를 대표했던 임성은 스스로에게 꽤 엄격한 편이었다. 더, 더 잘해야 해. 무너지면 안 돼. 아직 부족해. 불안은 늘 임성의 곁을 따라다녔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러다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아 일부러 대화 주제를 돌렸다.

“대기록 달성한 기분은 어떠냐? 기사 엄청 크게 났더라. 앞으로 계속 네 이름 나올걸?”

“지금 어떤 기분이냐고요? 선배는 입술이 잘 붓는 편이니까, 퉁퉁 부을 때까지 키스해야지. 뺨도 핥고 목도 핥아야겠다.”

“…….”

“이만하면 대답이 됐나요?”

숙소로 향하던 임성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이건 여우를 피하려 했더니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도무지 피할 틈을 안 주고 훅 들어오는 건 여전하네.

고양이처럼 눈꼬리를 접어 샐쭉하게 웃은 김희도가 “선배는 무슨 생각 하는데요?”하고 은근슬쩍 물었다. 딱히 원하는 대답이 있는 것 같진 않고, 그냥 임성의 생각이 궁금한 것 같았다.

나? 나는……. 임성이 목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꼭 재채기가 나오기 직전처럼 입 안이 마르고 코가 간질거렸다. 아직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찬 바람이 쏟아지는 가을인데 왜 이렇게 더운 것 같냐.

“나도 같은 생각 했어. 너랑 키, 키스하고 싶다고…….”

사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임성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나마도 목소리가 살짝 뒤집어져 더욱 창피했다.

지금 삑사리 난 거 맞지? 처음 연애하는 풋내기도 나보단 나을 거다. 이 창피한 말을 김희도는 어떻게 매일 할까. 은근히 대단한 자식이란 말이야.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을 걷던 임성은 아무 반응이 없자 슬쩍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어야 할 남자가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거기서 뭐 해, 으헉!”

떨어져 있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 김희도가 임성의 어깨를 감싸고 빠르게 걸었다.

쾅! 숙소 현관문이 흔들릴 정도로 거칠게 열리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장 입술이 맞부딪혔다. 사나운 숨소리와는 다르게 아랫입술을 핥는 혀는 부드러웠다. 임성이 천천히 입을 벌리자 혀를 미끄러트려 입천장을 샅샅이 더듬었다. 잘 닿지 않는 부위가 쓸리는 느낌은 묘하고, 자극적이었다.

임성이 팔을 뻗어 김희도의 목을 껴안으며 몸을 붙였다. 그는 임성을 마주 안는 대신 상체를 살짝 숙이며 팔을 아래로 내렸다. 허벅지를 따라 내려가던 손이 무릎에 닿았다. 한쪽 팔로는 임성의 허리를 지탱하고 나머지 팔은 무릎 안쪽에 넣고 굽혔던 상체를 일으켰다.

몸이 쏟아질 듯 흔들리더니 시선이 순식간에 높아졌다. 평균보다 훌쩍 큰 키에 김희도의 키까지 더해지자 시야가 너무 높았다.

아, 정수리 진짜 동그라네. 되게 귀엽다. 이 와중에 별생각을 다 한다 싶어서 웃었더니 김희도가 엉덩이를 추어올렸다. 가뜩이나 높던 시선이 불안정하게 들썩였다.

“헉!”

깜짝 놀란 임성은 반사적으로 종아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이거 좋네요.”

선배가 안아주는 거. 슬쩍 미소 지은 김희도가 턱을 들고 임성의 눈가에 쪽쪽 뽀뽀를 퍼부었다.

쪽, 쪼옥. 밑에서부터 쏟아지는 입술에 고개가 자꾸 뒤로 넘어갔다.

고등학생 때부터 느꼈지만, 얜 힘이 세도 너무 세단 말이야. 투수를 했으면 강속구를 던졌을 거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 하길래 웃었어요? 나랑 키스하면서 딴생각할 여유가 있나 보네요.”

언뜻 웃는 것 같은 목소리와 다르게 눈동자엔 이채가 번들거렸다. 보통 김희도가 저런 식으로 물었을 때 좋게 끝나는 일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

“네. 제가 노력할게요.”

끝까지 웃으며 대답한 김희도는 임성을 소파에 눕히고 허리에 올라탔다. 곧 얼굴 양옆 소파 부위가 확 꺼지며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쪽, 겨우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닿았다. 살짝 깨물었다가 살살 핥고, 혀뿌리를 강하게 휘감았다. 잇새로 나오지 못한 숨이 자꾸 목구멍에서 껄떡거렸다.

“선배는 키스할 때마다 숨을 잘 안 쉬네. 버릇이에요, 그거?”

그는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하더니 발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너야말로 숨 제대로 쉬고 있는 거 맞냐?”

“아니요. 선배 살냄새 맡으면 정신을 못 차리니까 최대한 참고 있어요.”

“그거 되게…….”

“변태 같아요? 네. 맞아요.”

앞으로 변태라고 불러도 돼요. 너무 쉽게 긍정한 김희도가 반듯한 턱 날을 핥고 내려와 목 한가운데 불거진 울대뼈를 한 번에 삼켰다. 목구멍에 고여 있던 흥분이 터지듯이 번졌다. 소파 위를 긁는 손등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목울대 뼈를 빨던 입술은 어느새 목과 어깨를 깨물고 있었다. 살랑대는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힐 때마다 등허리가 긴장감으로 빳빳해졌다. 한동안 얽혔던 입술이 떨어져 나간 후에야 임성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김희도가 전등을 뒤로한 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시선이었다.

“임성.”

한참 만에 내뱉은 목소리는 쇳가루처럼 낮고 거칠었다.

잠깐이라도 그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될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흘렀다.

“흣.”

아직 물이 마르지 않아 축축한 유니폼 상의 안으로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손끝을 바짝 세운 손가락이 옆구리를 스쳐 복근을 긁었다. 김희도의 손톱은 짧은 편이라 찍히진 않았지만, 느낌이 이상했다. 맨살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임성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두덩의 열기가 눈 안까지 번졌는지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아요?”

“…….”

모를 수가 있겠냐. 하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 이후로 다시 두 사람은 또다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다만, 땀에 젖은 살결이 스치는 소리만 고요히 울릴 뿐. 임성에게 올라탄 김희도가 하체를 바짝 밀착시켰다.

옷 위로도 여실히 드러나는 존재감에 임성이 몸을 흠칫 떨었다. 임성의 반응을 확인한 김희도는 그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허리를 슬쩍 움직였다. 임성의 등이 살짝 튀어 올랐다.

“희도야, 곧 코시야. 우선 그것부터 잘 끝내고.”

“끝내고?”

“그다음엔 네 마음대로 해도 괜찮으니까…….”

홀린 듯이 대답하던 임성이 흠칫했다. 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뒤늦게 고개를 저어 봤지만, 이미 김희도는 듣고 있지 않았다.

“일어나요.”

어느새 몸을 일으킨 김희도는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는 임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

“당장 훈련하러 가요. 이겨야죠, 코시.”

그렇게 말하는 김희도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 * *

한국 시리즈 1차전이 열리는 광주로 가기 전날, 두 사람은 오랜만에 외출했다.

둘 다 아직 자동차가 없다 보니 택시로 이동을 했다. 백미러 너머로 운전기사와 자꾸만 눈이 마주치는 걸 보니 자신들이 누군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저기요, 야구 선수 맞죠?”

예상대로 기사가 먼저 입을 뗐다.

“네. 이솔 페어리즈 투수 임성입니다.”

“그래. 맞네! 이솔 페어리즈 임성. 하도 훤칠하게 생겨서 연예인인가 했네요.”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기사님은 야구에 관해서 얘기했다. 서울에 산 지 30년이 넘었지만, 고향이 광주라 연고지 팀인 레전드스를 응원한다고. 올해 꼭 우승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임성이 택시 기사와 대화하는 동안 김희도는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다. 마스크라도 좀 벗었으면 하는 눈빛도 모른 척했다.

“도착했습니다. 선유고등학교 앞 또또 분식 맞죠?”

“감사합니다.”

“어, 저기. 잠깐만…….”

목적지에 도착 후 계산을 하고 내리는데, 택시 기사가 택시 안으로 상체를 넣더니 수첩과 볼펜을 주섬주섬 꺼냈다.

“사인해 드릴까요?”

“그래 주면 좋고.”

타 팀 팬이라고 말해 놓고 사인을 요청하는 게 퍽 민망했는지 머뭇대는 기사를 대신해 임성이 먼저 제의했다.

슥슥. 이름과 날짜를 쓰고 수첩을 건네자 기사가 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 평생 레전드스만 응원했는데 이렇게 사인까지 받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느 팀이 이기든 좋아해 주세요.”

멀어지는 택시를 잠시 보다가 김희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어? 문 닫혀 있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은 분식집은 하필 닫혀 있었다. 당연히 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연락 없이 찾아온 결과였다. 오랜만에 또또 분식을 먹을 생각에 들떴는데.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아 분식집 앞에서 한참을 기웃대다가 돌아섰다.

“아쉬운가 봐요. 표정에 다 쓰여 있어.”

“여기 오면 고등학교 때 생각 많이 나거든. 그때 생각하면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수 있어.”

“날 만나기도 했고요?”

“그래. 널 만나기도 했고.”

크흠. 주먹을 동그랗게 말아 입가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을 피해 다시 입을 열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학교에 가 볼래? 수업 중이라 외부인 출입 금지이려나.”

다음 목적지는 선유고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오랜만에 야구부를 방문할 생각에 살짝 들떴다. 하지만 학교로 향하는 동안 두 사람을 알아보는 인파가 꽤 많았다. 개중엔 무턱대고 껴안으려거나 악수를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팬의 행동도 곤란했지만, 그것보다 김희도가 난동을 부릴까 봐 더 걱정됐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이 점점 싸늘해질수록 걱정은 현실로 다가왔다. 김희도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다혈질이니까.

“여기서 문제 일으키면 큰일 나. 알지?”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그러니까 이거라도 써요.”

누가 봐도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한 김희도가 제 모자를 벗더니 임성에게 씌웠다. 모자 위를 한 번 더 누르자 얼굴의 반이 가려졌다. 그래도 만족이 안 되는지 마스크를 건넸다.

“마스크까지? 연예인도 아니고…… 알았어. 쓸게. 쓸 테니까 표정 풀어라.”

결국 모자와 마스크까지 중무장을 했다.

그렇다 해도 체격 자체가 다르다 보니 눈에 띌 수밖에 없었지만. 야구 선수인 걸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도 연신 곁눈질하다가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연예인인가, 어디서 촬영 중인가 봐. 일부러 들으라는 의도인지 꽤 커다란 목소리는 두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김희도가 잘생기긴 했지. 누구 애인인지 몰라도 참 멋있단 말이야.

“왜 웃어요? 눈꼬리가 휘어졌는데. 뭐 재밌는 거 있어요?”

“어? 그냥.”

김희도를 칭찬하는데 내가 더 좋은 걸 보니 나도 갈 데까지 갔구나. 뭐, 상관없으려나.

의아해하는 그를 뒤로하고 임성이 고개를 저었다.

고등학교에 가려던 시도는 예상치 못한 인파로 중단됐다. 사람들이 한 번 몰리기 시작하자 몰린 사람을 보고 또 사람들이 모였던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일정을 바꿔 숙소로 향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는데, 아무것도 못 해서 살짝 아쉬웠다.

“차를 사야겠어요. 지금까진 숙소와 훈련장을 반복했으니까 딱히 필요 없었는데, 더는 안 되겠어요.”

그렇지. 차의 필요성을 느낀 건 임성도 사실이라 긍정의 고개를 끄덕였다.

코시 잘 마무리하고 시즌 오프 되면 중고차부터 사야지. 김희도를 옆자리에 태우고 저 멀리 해안가 드라이브를 해도 좋을 것이다. 자동차 극장도 꼭 가 보고.

막연히 계획만 세운 임성과 다르게 행동력이 남다른 애인은 다음 날 새 차를 끌고 등장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다가 김희도가 내미는 계약서를 얼떨결에 받았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천만…… 끝없이 이어지는 동그라미를 보다가 최종 가격을 확인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때요?”

차 외관이 화려한 게 김희도와 어울리긴 하다만, 웬만한 전셋집 보증금이잖아.

“첫 차치고 너무 비싸지 않아?”

“비싼 차는 덜 끼어든다고 들었거든요. 가급적 안 건드렸으면 해서. 그리고 아직 계약금 많이 남아서 괜찮아요.”

계약금이 아직 남았다니 역시 1차는 1차네. 충분히 갓차라고 불릴 만했다.

김희도는 역대 야수 계약금을 갱신했을 뿐 아니라 투수를 포함해도 상위권에 속했다. 계약금이 공개된 당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선순지 의문’이라는 칼럼이 넘쳐났었다.

그 기자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5라운드에 뽑힌 임성은 약 4천만 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아버지의 차를 바꿔 드리고 동생들 대학 등록금까지 해결했으니 불만은 없었다.

앞으로 제가 하는 만큼 연봉이 따라올 테고, 돈보다 김희도와 함께 야구 하는 자체가 중요했으니까.

“타세요.”

어느새 조수석 문을 연 김희도가 고개를 까딱했다.

첫 시승자는 말할 것도 없이 임성이었다. 또 이 차에 타는 유일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컸다.

살짝 어색한 몸짓으로 보조석에 앉은 임성이 비닐 하나 없이 깔끔한 내부를 둘러봤다.

“비닐 다 뜯었어?”

“거슬리잖아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김희도가 뒤이어 운전석에 올라탔다. 커다란 손이 둥근 운전대를 잡고, 가뿐히 시동을 걸었다. 드릉. 출발 준비를 마친 차가 움직이자 임성이 허겁지겁 안전띠를 맸다.

“괜찮겠지? 왜 내가 떨리냐?”

“저 못 믿어요?”

이걸 참. 솔직히 말해야 할지…….

가끔 운전대를 잡은 걸 보긴 했어도 본격적으로 운전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살짝 걱정됐다.

김희도를 못 믿는다기보다 당장 내일모레가 한국 시리즈다 보니 저절로 몸이 사려진다고 할까. 본능적으로 몸을 의지하고 잡을 것을 찾게 됐다.

걱정과 달리 능숙하게 운전을 하던 김희도는 옆 좌석 창문에 찰싹 달라붙은 채 손잡이를 붙든 임성을 보고 픽 웃었다.

“선배, 진짜 귀엽다. 앞으로 드라이브 자주 해야겠어요. 뭐, 드라이브 말고도 할 게 많겠지만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며.

* * *

광주로 떠나기 전날 밤,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이제는 이렇게 같이 자는 것도, 떨어질까 봐 꼭 껴안는 것도 퍽 익숙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푹 꺼진 침대 옆에는 원정에 필요한 물건을 넣은 캐리어가 있었는데, 꽉꽉 채운 임성과 달리 김희도 것은 거의 텅 비다시피 했다. 기본적인 야구 용품을 제외하면 임성이 입던 언더 티, 수건, 장갑 같은 게 전부였다.

“드디어 내일 코시 시작하네. 뭔가 안 믿기지 않아? 중고등학교 내내 코시에 진출하면 어떨까 상상만 했거든. 이렇게 빨리 이뤄질지 몰랐어.”

1차전에 나갈 페어리즈의 선발은 팀 내에서 자책점이 가장 낮고 압도적인 구위를 자랑하는 용병 오웬 엘리오스였다. 앞으로 등판할 투수 라인업이 대략 추려졌지만, 전날 경기의 승패 및 상황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임성은 코치에게 “레던드스 상대로 피안타율이 낮은 편이니까 잘 준비해라. 상황에 따라 등판할 가능성도 있다.” 하는 말을 들었다.

반년 남짓 치러지는 정규리그와 달리 가을 야구는 단기전이었다. 특히, 한국 시리즈는 7차전이 끝이라 가진 걸 모두 쏟아 내야 했다. 선발 투수가 불펜이나 마무리로 나서는 일도 있었다.

박재이처럼 완봉하는 상상도 은근슬쩍 해 봤지만, 그건 아직 한참 일렀고 마운드에 설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긴장돼요?”

“등판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그래도 ‘혹시나 만약에’라는 생각은 하고 있어.”

“부담되나 봐요.”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플옵에서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는데, 코시에선 더하지 않을까? 제대로 서 있을까 싶다.”

“떡볶이 가게 미리 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또 그놈의 떡볶이 가게야? 코시 우승하고, 메이저 갔다 오면 생각해 본다니까.”

다소 성의 없는 대답을 들은 김희도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다가 임성의 목에 뽀뽀했다.

“선배는 지금도 야구가 재밌어요?”

“엄청.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너랑 같이 야구 할 거야. 그때도 투수 하려고.”

“그럼 난 포수 해야지. 선배 뒤에 서 봤으니까 이번엔 마주 보고 싶어요.”

한 번도 야구를 시작한 걸 후회한 적 없었다. 야구가 아니었다면, 김희도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어쩌면 김희도보다 자신이 먼저 그에게 반했을지도 모른다. 무심한 얼굴로 홈런을 때리던 모습을 잊지 못해서 열심히 쫓아다녔으니까.

“지금 무슨 생각 해요?”

“너 처음 만났을 때. 그땐 뭐 저런 자식이 다 있나 했거든. 온통 흥분해서 날뛰는 애들 중에서 너만 달랐어.”

천장을 보고 누웠던 몸을 모로 돌렸다. 김희도는 진작 이쪽을 보고 있어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보다가 양쪽 입꼬리를 올리자, 김희도가 따라 웃었다.

“넌 왜 웃냐?”

“선배가 웃으니까요. 웃는 선배가 좋아서요.”

속삭이듯 말한 김희도가 다시 한번 배시시 웃었다.

가로로 기다란 눈매나 도톰한 입술은 어렸을 때 느낌이 많이 남아 있었다.

14살의 김희도. 그때는 제게서 두 번이나 홈런을 뽑아내고도 아무 반응 없는 게 못내 자존심 상했었다. 다음번에 만나면 꼭 삼진으로 잡아서 갚아 주겠다고 다짐했었지. 설마 같은 고등학교에 올 줄 몰랐지만, 이제는 이 남자가 옆에 없으면 안 됐다.

“한국 시리즈…… 어떻게 될까? 우리가 이기겠지?”

“그럼요. 우승할 거예요. 전 선배랑 하고 싶은 게 많거든요.”

김희도는 정말 페어리즈가 우승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확신에 찬 대답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니까, 정말 그런 것 같아서.

“나랑 하고 싶은 거?”

“기억 안 나요? 코시 끝나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면서요. 인제 와서 모른 척하는 건 절대 용납 못 합니다. 도망가는 것도 안 돼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뭘 예상했는지 내뱉는 말투가 꽤 딱딱했다.

“누가 모른 척한대. 먼저 앞서가지 마.”

대답을 듣고 나서야 딱딱하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대체 뭘 하려고 선전 포고까지 하는 걸까.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이 남자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도 없거니와 설사 그렇다고 해도 괜찮았다.

김희도니까.

“희도야.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그럼요. 하나가 뭡니까, 궁금한 거 다 물어봐도 됩니다.”

“페어리즈 말고 다른 구단이 널 뽑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선배는 어땠을 것 같아요? 만약 내가 다른 구단에 갔으면요.”

“그건 그것 나름대로 재밌을 것 같아. 내 공이 너한테 통할지 궁금하거든.”

김희도와 공식적으로 맞대결을 한 건, 몇 년 전 그때 그 중학 추계리그가 유일했다. 공식 전적은 2타수 2홈런으로 김희도가 월등히 앞섰다. 그러니까 한 번쯤은 청백전이 아니라 진심으로 맞붙고 싶었다. 애인 타이틀 다 떼고 선수 대 선수로 전력을 다하여.

대답을 들은 김희도가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와, 저 지금 진짜 섭섭해요.”

“너 인정한다는 뜻인데? 어떤 면에선 김이설 선배보다 네가 더 까다로워.”

그래도. 중얼거린 김희도가 팔을 뻗어 임성의 등을 감쌌다.

“선배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자면…… 지명 거부했을 겁니다.”

“1차 지명을 거부해? 그게 가능하냐?”

선수가 구단의 지명을 거부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더러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해외 진출 의지가 확고하거나 하위 라운드 선수들이 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낸 다음 지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마저도 요샌 하위 라운드에 뽑혀도 입단하는 추세였고.

아예 메이저행을 결정짓지 않은 이상 지명을 포기하는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문득, 고등학교 3학년, 6월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명 순위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데, 그땐 뭐가 그렇게 심란했는지. 하지만 그 시절엔 순위가 제 가치와 다름없다고 느꼈으니까. 그토록 간절했던 걸 김희도는 내팽개치겠단다.

“너 그거…… 으음…….”

“건방지다고요? 아니면 재수 없어요? 뭐든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요.”

말투에서 머뭇거림을 느꼈는지 김희도가 먼저 속 시원하게 말했다. 재수 없는 것까진 아니라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사실이라 침묵을 택했다.

“그때도 지금도 내 우선순위는 선배니까요. 야구에 대한 미련보다 선배 옆에 있는 게 더 중요했어요. 그게 어떤 형태든지.”

“만약 진짜 지명 거부했으면, 그다음엔?”

“페어리즈 구단과 관련된 일을 했겠죠. 최대한 선수와 접촉할 수 있는 일로…… 2학년 땐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 이것저것 진지하게 알아봤거든요.”

이내 김희도는 프로 3년 차인 임성조차 잘 모르는 구단 일에 관해 줄줄 읊기 시작했다. 전문 용어가 나오는 걸로 봐선 실제로 꽤 자세히 알아본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내가 좋냐?”

“미칠 정도로.”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한 김희도가 조금 더 몸을 붙여 왔다.

“내 냄새 때문에?”

“선배. 설마 아직도……!”

임성이 슬쩍 웃으며 그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가 놨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꽤 좋아 한 번 더 매만졌다.

“농담이야.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는 거 알아. 당시 고통받은 팬 분들이나 선배님들껜 죄송하지만, 꼴찌 해서 다행이다.”

김희도가 페어리즈로 와서 다행이었다. 진심으로.

진심을 담아 말하며 눈가를 쓸었다. 땡볕 아래에서 구르는 운동선수답지 않게 희고 고운 피부가 손바닥에 감겼다.

옆얼굴을 매만지며 내려온 손이 아랫입술을 훑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손가락을 조금 더 밀어 넣자 김희도가 입술을 오므렸다. 쪼옥, 쪽. 일부러 소리 내서 빠는 게 분명한데, 싫지 않았다. 손가락을 조금 구부려 입천장을 살살 긁었다. 김희도가 웃는 게 느껴졌다.

“내일도 이렇게 나란히 누워서 야구 얘기했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이겨서.”

“내일뿐만이 아니라,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먼 훗날 선배가 야구를 하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언제나 선배 옆에 있을 거예요. 선배와 일상을 나누면서, 그렇게.”

아주 머나먼 계획까지 밝힌 김희도가 임성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줬다. 잠시 말없이 있던 임성이 그의 허리를 감싸고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쿵쿵 뛰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의 말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 설사 야구를 그만둬도 김희도와 함께할 수 있기를.

아, 참. 가게 이름은 뭐로 짓지? 아마 그때까지 데뷔 최초, 최연소의 나이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김희도의 기록이 깨지지 않았을 테니까, 사이클링 히트 떡볶이 가게로 할까?

이제 하다 하다 이런 생각까지 하는구나. 김희도에게 말하면 아마 엄청 웃겠지.

어쨌든, 페어리즈의 우승을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내일 경기가 치러질 구장의 모습이 선연히 펼쳐지는 듯했다.

어쩐지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사이클링 히트>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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