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오메가버스 ver.) 6
“팬 사인회 나가라고요? 전 선배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후각이 예민해요. 오히려 팬을 위한다는 취지와 어긋날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 그럴걸요.”
김희도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좋아해서 찾아왔다가 오히려 상처만 받고 갈 수도 있었다.
“마스크 쓰면 되잖아. 밖에서 할 거고, 음, 선풍기도 준비했어.”
“마케팅 팀에서 그렇게 말하래요? 선풍기 준비했다고?”
예리한 지적이었다. 김희도를 구슬리기 위한 대책 중 하나가 선풍기를 트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냄새가 옅어지라는 배려 아닌 배려였다.
마케팅 팀이 시켰다는 것까지 알아챘구나. 눈치를 전혀 안 볼 것 같은데, 묘하게 눈치가 빨랐다. 아니, 오히려 눈치를 안 봐서 빠른 건가?
“손 왼쪽으로 살짝 들어봐.”
임성은 두 번 겹친 테이프를 물집이 많이 잡히는 부위에 감고 검지에 밀착시켰다. 이어 중지와 배트와 맞닿는 손바닥을 중점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열심히 테이핑을 하는 둥근 정수리를 빤히 쳐다보던 김희도가 입을 열었다.
“오히려 냄새가 퍼질 거라는 생각 안 해 봤어요? 5월 5일 12시면 한창 더울 땐데 선풍기 틀었다가 다른 냄새까지 날아오면 어쩌려고요. 그러다 내 컨디션이 바닥 치면 마케팅 팀이 책임진답니까?”
아, 물 건너갔구나. 실패라는 단어가 머릿속은 스치고 지나갔다.
나름 하는 데까지 해 봤지만, 극복하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복도에서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을 홍윤현에게 미안함을 전하며 테이핑을 마무리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한번 움직여 봐.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손을 움직여 보라니까 김희도는 손바닥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얇은 티에 드러난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깊게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왠지 봐선 안 될 걸 본 느낌이랄까, 입안이 살짝 말랐다.
“알파라서 후각이 예민한 거야? 그쪽 냄새가 날지 모르니까?”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사인받으러 오는 팬 중에 알파나 오메가가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형질과 상관없어요. 그냥 다른 사람 체취 자체가 역겨워요.”
마냥 그렇다기엔 운동이고 훈련이고, 심지어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러닝 때까지 따라오지 않았나. 옷 갈아입을 때도 항상 옆에 있었고.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아니라는 것도 웃겼다.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지. 깔끔하게 포기는 임성을 가만히 보던 김희도가 입을 열었다.
“할게요.”
“어? 한다고? 사인회 할 거야, 진짜?”
“대신 조건이 하나, 아니 두 개 있어요.”
얼떨떨함도 잠시, 조건이라는 말에 “어떤 거?”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행사비를 받겠다든가, 원정 숙소 업그레이드라든가. 김희도가 그런 걸 조건으로 내걸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선배도 같이 사인회 하는 거요.”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말이었다. 임성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나? 하고 물었고, 김희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내가 무슨 자격으로 거기 끼냐? 혹시 좀 전에 내가 한 말 때문이면 신경 쓸 필요 없어.”
“선배 말이랑 상관없이 내가 거는 조건인데요. 내가 필요하다고요.”
“어째 어감이 좀 묘하네. 그게 너한테 중요해?”
“네. 그 어떤 것보다도.”
왜? 여전히 왜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강요는 아니에요. 전 선배가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거든요.”
강요가 아니라는 말에는 ‘네가 하지 않으면 나도 절대 안 하겠다’ 하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였다.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닌 것 같아 문 쪽을 힐끔 보자 홍윤현이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크게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수락하란 뜻이었다.
“두 번째는 뭔데?”
“두 번째는…….”
* * *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해림이요. 아침 해, 할 때 그 해.”
이해림. 69번 등 번호 밑에 매직으로 이름을 슥슥 썼다. 팬은 “이번 시즌 다치지 마시고 끝까지 힘내세요. 응원할게요.” 하고 주먹을 질끈 쥐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가을 야구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기계적인 멘트 같지만 진심이었다.
급하게 변경된 어린이날 팬 미팅, 임성은 속된 말로 ‘꼽사리’를 꼈다. 권재영, 최희탁 이름과 사진이 크게 찍힌 현수막 옆에 김희도, 임성이 추가됐다. 현수막을 새로 찍을 시간도 없어 화이트 보드에 매직으로 「김희도&임성」로 급조했다.
아무도 제 앞에 줄을 서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도 잠시, 시작 시각인 12시가 되기도 전에 줄이 길게 늘어섰다. 이렇게까지 많이 올 줄은 몰랐는데.
넉살과 입담. 둘 다 좋은 권재영은 처음 만난 팬도 십년지기 친구처럼 대했고, 임성은 권재영만큼은 아니라도 팬들과 편하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나름의 팬서비스를 보이는 세 사람과 전혀 다른 반응을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김희도 선수. 너무 잘생겼어요.”
“네.”
무슨 질문을 해도 단답형만 내뱉는 김희도였다.
TV나 관중석에서 볼 때보다 훨씬 체격이 큰 데다 표정이 없으면 차가워 보이는 김희도에게 팬들은 쉽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무뚝뚝한 주제에 사인은 정성 들여 하는 모순을 보였다. 역시 쟨 표현이 서툴 뿐이라니까.
그건 그렇고.
“……우리 너무 가깝지 않냐?”
“그게 조건이었잖아요.”
“조건은 그냥 옆에 앉는 거 아니었어? 지금 팔꿈치가 닿고 있잖아.”
김희도가 사인회에 참여하면서 내건 조건 중 나머지가 바로 본인의 옆에 앉는 것이었다. 뭐, 옆에 앉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가볍게 수락했던 게 화근이었을까. 옆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붙어 앉은 것에 가깝지 않은가. 어깨가 맞닿는 걸 넘어 김희도의 움직임이 그대로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요. 옆 맞잖아요.”
무슨 문제 있어요?
뻔뻔하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약 1시간에 달하는 사인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매니저 형이 “너희 지금 SNS 실트에 올렸어. 이것 좀 봐.” 하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페어리즈_김희도_ 임성 #잠실 팬사인회 #야구_존잘 #야구계에 뺏긴 아이돌
SNS라곤 전혀 하지 않는 임성으로선 이렇게 실시간으로 피드백이 올라오는 게 신기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아서 다행이야. 웃으며 휴대폰을 돌려주고 구장으로 돌아갈 때였다.
“선배.”
갑자기 구단 점퍼를 벗은 김희도가 뒤를 돌더니 상체를 살짝 숙였다. 탄탄한 근육으로 꽉 짜인 너른 등이 눈앞에 드러났다. 언제봐도 놀라운 몸이었다.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야. 너 이거…….”
자신의 유니폼이었다.
96번 김희도는 69번 유니폼을 입은 것도 모자라 ‘임성’이라고 마킹까지 야무지게 새겼다.
“내 돈 주고 내가 산 거예요. 사인해 주세요.”
당당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임성이 사인하지 않으면 비키지 않을 태세로 버티고 섰다. 무슨 일이 있나 싶은지 팬들이 이쪽을 힐끔대는 게 느껴졌다. 뭐야, 무슨 일인데.
“여긴 너무 눈에 띄니까 들어가서 얘기하자.”
김희도의 팔을 붙잡고 구장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다른 사람과는 스치기만 해도 정색하던 남자는 임성에게 순순히 끌려왔다.
빈 사무실에 김희도를 밀어 넣고 땀에 젖은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후우, 덥다.”
시즌 시작 전, 마음을 다잡기 위해 빡빡 밀었던 머리는 어느새 손끝에 충분히 감길 정도로 길게 자랐다.
“사인이요.”
계속된 사인 요구에 결국 짧은 한숨과 함께 매직 뚜껑을 열었다. 대부분 말을 잘 듣는 편인데 지금처럼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렸다.
“내 이름 쓰고, 옆에 하트 그려 주세요. 그다음 선배 이름 쓰고요.”
“뭐? 무슨 하트까지…….”
“다른 사람에겐 잘도 해 주면서. 지금 차별합니까? 이게 선배가 말하는 ‘팬을 대하는 진정성’인가요? 그냥 입에 발린 소리였군요.”
“알았어. 해 줄게. 하면 되잖아.”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네.
김희도♥임성
쓰읍. 이게 맞나. 막상 쓰고 보니 엄청 이상한데. 이거 보고 뭐라는 건 아니겠지.
“다, 다 됐어.”
등을 가볍게 치며 말하자 김희도가 유니폼을 훌렁 벗어 사인을 확인했다. 몽실몽실한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다만.
“갑자기 사인은 왜 해 달라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 부탁받았어?”
“내 건데요.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인받는 날이라면서요.”
“그렇지.”
매직 뚜껑을 닫으며 대수롭지 않게 긍정했다. 제가 한 말을 고대로 읊는 김희도가 귀여워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더운 날에 고생 많았다. 덕분에 팬들도 즐거웠을 거야. 이따 이기면 더 좋아하시겠지.”
그는 얌전히 머리를 맡기고 있다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한번 안아 봐도 돼요? 그냥 껴안기만 할게요.”
단체 생활을 오래, 많이 한 덕인지 선수들은 의외로 스킨십에 거리낌 없었다. 좋은 플레이가 나왔을 때 껴안는 건 예사고 장난으로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는 일도 많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희도 또한 긴장을 푼다며 저와 손깍지를 끼지 않나.
그래서 껴안기만 한다는 말을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팔을 크게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포시 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가슴이 맞닿고 살갗이 스쳤다. 보드라운 머릿결이 뺨을 간지럽혔다. 남들보다 확연히 더운 체온과 코끝을 간질이는 좋은 향기가 훅 끼쳐 왔다.
이게 무슨 향이지. 어디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 거야? 목구멍이 간지럽고 뺨이 달아오르게 하는 묘한 향이었다. 살면서 처음 맡아 본 것이기도 했다.
“선배. 되게 좋은 냄새 나네요.”
그러는 너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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