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오메가버스 ver.) 9
걱정과 불안이 공존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렀고, 또다시 임성의 선발일이 돌아왔다.
이치연과의 시즌 첫 번째 맞대결이었다. 언론은 고교 시절, 최대 라이벌로 꼽히던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맞붙는다며 바람을 불어넣었다.
“37.2도……. 으음. 애매하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미묘하게 들뜬 기분이 지속됐다. 정말 감기가 오려는 건가. 그렇다면 엄청 지독한 감기겠네. 오늘 잘 던질 수 있을까, 1회부터 탈탈 털리는 건 아니겠지? 가뜩이나 요새 기록도 별론데. 걱정하면서 구장으로 출근했다.
마운드에 오르기 직전, 김희도가 행운을 빈다며 어깨를 슬쩍 끌어안았다. 잘생긴 애는 체취마저 좋은지 상큼한 향기가 콧속 가득 스몄다. 순간이지만 숨통이 트였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던져요.”
“응.”
비 온 뒤 질척이는 흙바닥처럼 몸이 무거운 것에 비해 투구 내용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았지만.
만루 위기를 수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벗어나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쿵쿵쿵. 만루를 무사히 넘겨서인가,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빨리 뛰어 댔다. 투구 중엔 땀이 많이 나는 편인 걸 감안해도 이너 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였다.
후. 벤치 구석에 앉아 깊고 느리게 호흡을 내뱉었다.
그라운드에선 이치연이 한창 공을 던지는 중이었다.
조금 전 임성이 맞이했던 만루의 위기는 그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치연은 어떠려나.
「오! 페어리즈의 김희도. 안타 안타 김희도. 오, 오오오오♬♪ 페어리즈 김희도♬ 날려 버려!」
원 아웃 만루의 상황에서 김희도가 들어섰다. 그는 두 손으로 배트를 꽉 잡으며 이치연을 노려봤다. 굳게 다문 입매와 유난히 도드라진 턱 근육이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드러냈다.
왠지 험악하네.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여전히 수상할 정도로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때리거나 돌려세우거나. 여기서 한 건 하는 놈이 오늘의 주인공이겠네.”
옆에서 송우림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팽팽한 대치의 승리자는 김희도였다.
“홈, 홈! 뛰어! 세이프!”
당겨 친 타구가 수비수 사이를 정확히 빠져나가며 두 명의 주자가 홈플레이트를 밟은 것이었다. 역전 적시타였다.
아, 쟤는 진짜…… 뭐냐. 말이 안 나오네.
그 후 등판한 박태영과 권재영이 한 점 리드를 지키며 페어리즈는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일요일 승리라 더욱 값졌다. 월요일엔 야구를 하지 않으니, 일요일 승패에 따라 팬들의 월요일 기분까지 좌지우지되곤 했으므로. 승리는 항상 중요하지만, 일요일엔 아주, 아주 조금 더 신경 쓰이는 편이었다.
감독을 비롯한 더그아웃에 앉아 있던 팀원들 모두가 그라운드로 나가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김희도. 스윙 진짜 좋……”
짝, 김희도의 손바닥과 맞대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주저앉을 뻔한 것을 겨우 버티며 돌아섰다.
“선배?”
등 뒤에서 김희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돌아볼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어지러운, 아니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아.
“어, 임성 선수? 어디 가세요. 곧 인터뷰 있어요.”
“죄송합니다.”
구단 관계자가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며 불렀지만,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흔들리는 배 안에 서 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어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허억.”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구장을 빠져나왔다. 자신을 알아본 팬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모자챙을 아래로 깊게 당겼다.
어쩐지 택시를 타면 안 될 것 같았다. 생각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흙과 로진으로 엉망이 된 유니폼 차림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헉, 허억.”
다행히 자취방은 구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평소 훈련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 가며 일부러 가까운 곳에 집을 마련한 보람이 있었다.
띠, 띠. 도어 록 버튼을 누르는 손이 덜덜 떨렸다.
비밀번호가 몇 번이었더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한참을 헤맸다.
겨우겨우 문을 열고 현관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리고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허억. 헉. 허억. 허…… 으.”
추워. 아니, 더운가.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오한이 들었다. 한겨울, 차가운 물에 빠진 것처럼 몸서리가 쳐지기도 했다. 동시에 배 속이 지글지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신발장을 벽 삼아 등을 기대고 최대한 어깨를 안으로 굽혀 몸을 웅크렸다. 가물가물한 시야 너머로 후들후들 떨고 있는 손이 보였다.
이게 내 손이 맞나? 왜 저렇게 떨고 있지.
딩동.
얼마나 지났을까. 오래 지났나, 혹은 찰나일지도. 평소보다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축 늘어져 있던 임성의 몸이 움찔 떨렸다.
“선배. 집에 있어요?”
김희도 목소리였다. 임성은 움직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숨을 들이마시고 뱉어 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반응할 정신이 없었다.
딩동, 딩동, 딩동. 한참을 울려 대던 벨 소리가 멈추고 똑똑, 노트 소리가 들렸다.
“선배 가방 가져왔어요. 문 좀 열어 봐요.”
가방? 그 말을 듣는 순간, 가방 안쪽에 넣어 놨던 억제제가 떠올랐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드는 걸 보면 확실히 몸이 안 좋나 보다.
“선배?”
“…….”
“문 열어요. 부수기 전에.”
마치 임성이 집에 있다는 걸 확신하는 투였다. 아무에게도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 도망치듯 떠났음에도.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기에 임성은 지금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그, 냥…… 문 앞에 놔둬.”
“알았어요. 여기 놓아둘게요. 누가 가져가기 전에 찾아가요.”
중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를 용케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무언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발소리가 울렸다. 저벅저벅, 다른 사람들보다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김희도 특유의 발걸음.
“…….”
숨을 죽인 채 인기척을 살폈다.
돌아갔나, 갔을까? 김희도는 제 말을 잘 듣는 편이니 얌전히 가방을 내려놓고 갔겠지.
임성은 현관문에 뺨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차가운 쇠문도 몸속을 가득 메운 기이한 열기를 식혀 주진 못했다.
정말 히트가 온 건가? 그럴 리 없다. 히트가 아니라 몸살일 거야.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지. 우선 잠부터 자자. 그렇게 생각하니 좀 안정이 됐다.
“으으.”
겨우 몸을 일으켜 방으로 비척비척 걸어가다가 문득 밖에 덩그러니 있을 가방이 떠올랐다.
갖고 와야겠지. 휴대폰도 가방에 있을 거고……. 발걸음을 돌려 도어 록 해제 버튼을 눌렀다.
삐리릭.
점점 벌어지는 문틈 사이로 더운 여름 바람이 훅 쏟아졌다. 아니, 여름 바람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뜨겁고, 달큼하고, 아찔한 것. 그것이 순식간에 임성의 입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헉.”
숨이 턱 막히고 배가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나왔네요.”
어?
“임성, 선배.”
“……!”
매끄러운 목소리가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당장 문을 닫아야 해. 생각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콰앙! 필사적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게 무색하게 한 번에 열렸다. 번쩍, 복도 불빛이 켜지며 김희도의 얼굴을 그려 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 임성을 가만히 응시했다.
식은땀이 맺힌 얼굴, 발갛게 달아오른 뺨, 매끈한 턱 끝에서 떨어진 땀이 이너 셔츠 안으로 흐르는 것까지. 뱀이 풀밭을 기어가듯 진득하게 미끄러진 시선이 파르르 떨리는 손끝에 닿았다.
임성은 턱을 아래로 당기며 양손을 등 뒤로 감췄다. 뒤늦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돌아간 거 아니었어?”
“가방 문 앞에 놔두라고 했지, 가라는 말은 안 했잖아요.”
임성은 곧바로 현관문을 열지 않았었다. 그 말인즉슨 김희도는 자신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는 뜻이다. 돌아가는 척 일부러 발소리까지 내면서.
왜 그렇게까지 한 걸까. 굳이 날 속여야 할 이유가 있었나?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김희도가 가방을 들고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자요. 선배 거요.”
임성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머뭇 가방을 건네받았다.
그래. 선의로 한 일을 너무 과하게 받아들인 거겠지. 김희도가 언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한 적이 있던가?
“어디 아파요? 땀이 너무 많이 나잖아요.”
“아무것도 아니야. 가방 고맙다. 그만 가 봐.”
임성은 제게 닿는 시선을 외면하며 가방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쪽 주머니에 억제제를 넣어 놨었지. 히트든 아니든 그걸 손에 쥐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지지지직. 지퍼를 여는 소리가 울렸다.
“집에 방향제라도 뿌렸어요? 엄청 좋은 냄새 나네요.”
아, 여기 있다. 손바닥에 닿는 물건을 다급히 꺼냈다.
“그게 뭐예요? 약?”
“…….”
머리맡에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왠지 고개를 들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말없이 억제제 뚜껑을 돌렸다. 손이 축축해서인지 떨려서인지 잘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낑낑대다가 겨우 통을 열었을 때, 옆에서 빠져나온 손이 그것을 가져갔다.
“약 맞네. 그러다 도핑에 걸리면 어쩌려고요.”
몸 관리에 예민한 선수들은 시즌 중엔 아무리 아파도 약을 안 먹는 경우가 있었다. 임성 역시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팀 닥터의 허락하에 도핑에 안 걸리는 성분의 약을 겨우 먹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얼른, 줘.”
“흐음. 오메가용 억제제. 선배 베타랑 다를 바 없는 열성이라면서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한 김희도가 약통을 이리저리 돌렸다. 절그럭. 절그럭. 작은 알약이 부딪히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히트 온 적 한 번도 없다며. 근데, 이게 왜 필요하지?”
그는 무심하게 말하며 손에 쥔 것을 휙 던졌다. 허공을 날아 툭 떨어진 억제제는 데굴데굴 굴러 신발장 구석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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