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오메가버스 ver.) 15
“아직 안 자고 뭐 해?”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늦은 시각, 임성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휴대폰으로 뭔갈 열심히 보고 있던 김희도가 “깼어요?” 하고 조용히 속삭였다.
“불 켜 놔서 깬 건가? 지금 끌게요.”
“그것 때문 아니야. 요즘 새벽마다 깨.”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가 봐. 눈만 감았다 하면 바로 잠들었는데 요샌 몇 번씩 깼다. 어째서, 갑자기 왜 페로몬이 활성화됐을까?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가끔은 이유 없는 떨림이 오한처럼 찾아오곤 했다. 무의식중에 납작한 아랫배를 매만지곤 흠칫 놀라며 손을 떼기도 했다.
“배고파서 그런 건 아니고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금방 사 올게요.”
“희도야.”
“네!”
머뭇머뭇 입을 뗐다가 우렁찬 대답에 살짝 놀랐다. 저러다 의자에서 떨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김희도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덕분에 그동안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 과한 감이 없지 않지만, 몸보신 제대로 한 것 같아. 고마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선배한테 다 줄 수 있어요.”
“뭘 그렇게까지…….”
당황스러운 대답이었다. 어쩌면 말투가 진지해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김희도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단 걸 깨달았는지 금세 표정을 관리하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표정은 관리했어도 새빨갛게 발갛게 달아오른 귀까지는 차마 수습하지 못했지만.
* * *
근 열흘째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자니 심심하고 좀이 쑤셨다. 가볍게 뒷산이라도 다녀올 요량으로 물과 에너지 바, 바나나 등을 챙기고 가방을 둘러멨다. 등산화 앞코를 바닥에 툭툭 차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익숙한,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했다.
바둑알처럼 검은 눈동자가 임성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더니 그의 어깨에 둘러멘 가방에 멈췄다. 싸늘한 시선은 임성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어디 가는데?”
“어?”
“전화도 안 받고 지금 어디 가냐고 묻잖아.”
김희도의 반말은 묘하게 박력 있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와 그보다 무표정한 얼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선배가 이 집을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는데요.”
목이 뻑뻑하고 조금 숨이 막히는 느낌. 한 번 히트를 겪은 육체는 알파 페로몬을 쉽게 잡아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김희도는 지금 화내고 있다고.
임성은 딱 달라붙은 입술을 애써 움직였다.
“전화했었어? 가방 챙긴다고 몰랐나 봐.”
“가방까지 가지고 뭐 하게요? 꼭 어디 가는 사람처럼.”
“등산 가려고 준비 중이었어. 집에만 있으니까 심심하더라고.”
휴대폰을 확인했던 임성은 30통에 가까운 부재중 전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거의 마지막 수신 목록은 몇 초 단위로 찍혀 있었다.
“뭔 전화를 30통이나 했냐?”
“무슨 일 난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아, 진짜. 불안해서 안 되겠네. 심심하면 등산 말고 우리 집에 가요.”
굳었던 표정을 겨우 푼 김희도가 임성의 가방끈을 살짝 당기며 애교를 부렸다.
“연락 안 돼서 찾아온 거야? 너 훈련 계속 빠지면 코치님 눈 밖에 난다.”
“그러게 누가 잠수 타래. 그리고 코치 눈 밖에 나든지 아닌지는 관심 없고요.”
고작 1시간 연락 안 받은 걸로 잠수면, 인구의 절반이 잠수 중이겠다. 임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고쳐 멨다.
“우리 집에서도 할 일 없는데 너희 집이라고 다르겠냐? 등산 갔다 올 테니까 넌 얼른 복귀해. 다음 원정 가야지.”
“그러니까요. 내가 돌아가길 바라면 선배도 내 말 들어줘야죠. 기브 앤 테이크 몰라요?”
“야. 그게 어떻게 기브 앤 테이크야?”
“내 마음대로요. 그리고 우리 집에서 할 게 없는지는 가 보면 알겠죠?”
도무지 대화가 끝날 기미도, 김희도가 물러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코치님 쫓아오시겠는데. 결국 등산복을 입은 채 김희도의 집으로 향했다.
“헉. 이게 다 뭐야. 이걸 다 어떻게 구했어? 박물관이 따로 없잖아.”
김희도가 턱을 살짝 들고 자신만만해하던 이유가 있었다고 할까. 임성은 책장에 빽빽하게 꽂힌 야구 서적과 예전 경기 DVD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와, 미쳤네. 이 경기도 있어? 아니, 이것도? 인터넷에도 없는 자료잖아. 허겁지겁 DVD를 고르는 임성을 보며 김희도는 “먹을 건 냉장고에 있어요. 이 집에서 뭘 해도 되지만 나가진 마세요.” 하고 말했다. 이미 DVD에 정신이 팔렸던 임성은 대충 어, 하고 대답했다.
“경기 끝나고 전화할게요. 또 진동 해 놓지 말고 벨 소리로 켜 놔요.”
“알았어. 잠깐만 신세 질게.”
현관에서 미적대던 김희도가 신발을 벗고 임성에게 다시 걸어왔다.
“잠깐이 아니라 계속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동시에 우유를 보글보글 끓이는 것 같은 고소한 향이 풍겼다. 아, 긴장을 풀어 주고 기분 좋아지는 냄새. 향기의 진원지를 찾던 임성은 고개를 살짝 숙인 김희도의 정수리에 닿았다.
그때 김희도가 눈을 치켜떴다. 눈동자는 번들대는데 속눈썹은 길고 눈가는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괜히 야릇해 보였다. 목구멍에 걸린 타액을 꿀꺽 삼켰다.
“팀원들 기다리겠다. 얼른 돌아가.”
몇 번이나 뒤돌아보던 김희도가 떠나고 혼자 남은 임성이 숨을 가볍게 내뱉었다.
주인 없는 집에 홀로 있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괜히 가슴이 시큰댔다.
하지만 그 묘한 감정은 오래된 경기의 DVD 발견하고 금세 사라졌다. 커다란 화면으로 경기 장면을 보고 있으니 야구를 향한 간절함이 더욱 강해졌다.
마운드에 서고 싶었다. 실밥이 손가락을 긁고, 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 감각을 또 느끼고 싶었다. 헐떡이는 숨을 내뱉었으면 좋겠다.
약 3시간 남짓한 경기를 다 보고 다른 것도 둘러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10개 구단 DVD가 빽빽하게 꽂힌 책장을 눈으로 훑다가 선유 고등학교 앨범을 발견했다.
이상한 점은, 보통 앨범은 하나만 사는 게 보통인데, 책장에 꽂힌 건 두 개였다.
“하나는 보관용, 하나는 감상용인가?”
섬세하네. 피식 웃으며 두 개 중 하나를 빼냈다. 김희도의 졸업 사진, 정확히는 어린 김희도가 궁금했다. 야구부니까 당연히 까까머리겠지?
“어? 이거 우리 건데?”
막상 꺼낸 건 김희도의 졸업 앨범이 아닌 두 학번 위, 그러니까 임성의 졸업 앨범이었다.
김희도가 이걸 왜 가지고 있어? 그것도 두 개나. 임성은 내심 기대했던 까까머리 김희도 대신 3-2반에서 제 얼굴을, 맨 뒷장에 야구부 사진을 보고 헛웃음을 쳤다.
와, 진짜 미치겠네. 얘 대체 뭐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앨범을 다시 꽂아 넣는데, 책장 틈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익숙한 별 모양의 로고. 페어리즈 굿즈 수첩이었다.
그 언젠가 ‘메모하는 습관 좋아.’ 하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말 잘 들었구나. 이 기특한 자식. 흐뭇하게 웃으며 수첩을 펼쳤다. 날짜와 간단한 메모가 짧게 적혀 있었다. 글씨를 잘 쓸 것 같은데 의외로 악필이었다.
“…….”
「오랜만의 콜업이라며 긴장된다고 말했다. 입을 꾹 다문 채 숨을 고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선발 데뷔를 잘 마친 것 같다며 숨을 들썩였다.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활짝 웃었다.」
「떡볶이는 곤약을 가장 처음 먹는다. 어묵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다음엔 곤약 떡볶이 먹으러 가자고 말해야지.」
「첫인사는 늘 컨디션 체크. 그다음 곧바로 훈련. 스트레칭-러닝-웨이트-캐치볼-피칭 훈련-웨이트. 캐치볼을 특히 좋아하는 듯하다. 내일도 같이 하자고 말해야지.」
「가끔 웃으면서 공을 던질 때가 있다. 오늘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을 때도 웃었다. 발갛게 물든 뺨 위에 맺힌 땀을 핥고 싶었다. 분명 달겠지.」
「선배 주변엔 여전히 사람이 많다. 가끔은 속이 뒤틀린다. 아직은 아니야.」
「나만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이 페이지는 쓰다 만 것 같다.
「하루에 몇 번이고 좋아하는 마음이 흘러넘친다. 선배는 장난으로 생각하지만 상관없다. 몇 번이고 보여 주면 되니까.」
「그 사람은 내, 나의.」
메모지를 한 장 더 넘겼다.
「임성」
제 이름을 발견한 순간 임성은 당황과 기묘한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9회 말, 투아웃, 풀카운트 상황에서 타자와 맞대결할 때처럼.
* * *
‘그날’로부터 약 2주. 피 말리는 14일을 보내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휴우.”
결연한 표정으로 막 화장실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초인종 소리가 긴장감을 깨트렸다. 문밖에는 예상했던 남자가 서 있었다.
임성은 김희도의 집에서 3일을 보내고 어젯밤에 돌아왔다. 아무래도 큰일을 치르기엔 익숙한 장소가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긴장은 숨길 수 없었다. 이러다 심장 터지는 거 아닌가.
“잘 잤어요?”
“어때 보여?”
임성이 거뭇거뭇한 눈 아래를 문지르며 허허 웃었다. 1시간 남짓 잤나? 그마저도 선잠이라 밤샌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컨디션이었다.
“입술 세게 깨물지 마요. 상처 나면 어떡해요.”
그는 임성이 손에 꽉 쥔 것을 힐끔 곁눈질하더니 긴장되냐고 물었다.
응. 긴장돼. 드래프트 결과 기다릴 때만큼이나 심장이 빨리 뛰는 중이야. 속으로 대답하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저도 같이 들어갈까요?”
“나 소변 보는 거 구경하게?”
“선배는 오줌도 귀엽게 쌀 것 같긴 해요. 생각하니까 보고 싶네.”
“…….”
농담이지? 제발 농담이길 빈다.
“남펴…… 음, 아무튼 옆에서 손잡아 주면 힘 많이 난대요.”
“누가 그래?”
“여기저기서?”
김희도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그런가? 이런 경험은 저도 처음이라 어느 부분까지가 평범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같이 화장실에 들어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지금도 충분히 힘 나니까 혼자 확인하고 올게. 넌 여기서 기다려.”
정말 같이 안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김희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 문을 닫았다. 팔에 핏줄이 설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손을 폈다.
임신 테스트기.
“하아. 진짜 돌겠네. 아직도 현실감이 없어.”
살면서 이걸 쓰게 될 줄이야. 아무리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건 예상을 벗어난 일이지 않나. 헛웃음을 뱉으며 테스트기를 내려다봤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