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오메가버스 ver.) 18
임성은 마운드에 내려오고 나서도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숨을 쉬고 있는데도 호흡이 넘어갈 것처럼 가쁘고 심장이 쿵쿵 소리를 냈다. 원래 경기 전후 아드레날린이 나와 기분이 붕 뜨는 걸 감안해도 지나쳤다.
“이 자식, 이거 며칠 쉬고 오더만 어디서 폐관 수련이라도 했나?”
“새끼. 오늘 좀 던지네.”
팀원들이 어깨나 엉덩이를 두드리며 축하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꾸벅꾸벅 하면서 라커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텁텁한 향이 사방에서 공격하듯 쏟아졌다.
그렇다고 히트가 온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착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확실히 아니란 걸 알았다.
“선배. 괜찮아요?”
서늘한 손바닥이 후끈 달아오른 어깨에 닿았다. 흠칫 놀라며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공들여 그린 것처럼 화려한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었다. 임성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희도야.”
“지금 땀 엄청 나요. 의무실 갈래요?”
팀 닥터는 김희도에게 거의 들리다시피 부축된 채 걸어오는 임성을 보고 인상을 썼다.
“임성.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가냐? 너 설마…….”
“아니에요. 그냥 속이 좀 울렁거려서요. 음, 지금은 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던 조금 전과 달리 지금은 문장을 뱉어 낼 수 있을 정도로 괜찮아졌다. 그냥 단순한 흥분이었던 걸까? 경기 끝까지 마운드를 지킨 건 처음이었으니까.
“혹시 모르니까 검사해 보자. 소매 걷어.”
닥터가 간이 페로몬 수치기와 피를 뽑는 용도의 작은 침을 꺼냈다. 임성의 팔목을 잡으며 이너 셔츠를 어깨까지 걷어 올렸다.
“건들지 마세요.”
임성의 팔을 잡고 있던 닥터도, 그에게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던 임성도 고개를 돌렸다. 한쪽 눈썹 끝을 휙 치켜세운 김희도가 보였다. 한눈에 봐도 기분이 안 좋은 게 느껴졌다.
“쟤 왜 저러냐?”
“오늘 쓰리런 쳤잖아요. 정신없을 거예요.”
제정신이 아니니 이해해 달라는 말을 돌려 한 것이었다.
“쯧. 하여튼 알파 놈들은 늙으나 젊으나.”
닥터는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검사가 더 급하다고 생각했는지 뽑은 피를 페로몬 수치기에 두어 방울 떨어트렸다.
결과는 다행히 정상이었다. 예상대로 히트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근데 왜 이럴까요? 혹시 몰라서 억제제도 먹었는데.”
“후각이 예민해졌나 보네. 흥분하면 감각이 곤두서는 일이 종종 있거든. 잠시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다.”
닥터는 좀 쉬다 가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페로몬에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긴 한데 경기 끝날 때마다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그 후로도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드레날린이 솟을 때마다 후각이 예민해졌다. 문제는 공을 던지다 보면 머리든 육체든 흥분하는 게 당연해서 미칠 듯 코가 민감해지는 것이었다.
너무나 신경 쓰이고 불편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소음 방지용 주황색 귀마개를 콧구멍에 꽂아 넣고 싶을 정도였다.
“와, 미치겠네. 진짜 어떡하면 좋냐.”
그나마 경기 도중에는 영향을 안 받아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진짜 못 버텼을 거다.
“많이 힘들어요? 지금 엄청 창백해요.”
“너 냄새에 민감한 거,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는데. 여태 이걸 어떻게 견뎠어?”
“……아마 선배와 전 다를 거예요.”
“어떻게 달라? 해결 방법 있으면 나도 좀 알려 줘.”
양손으로 김희도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지금 임성은 앉은 상태고 김희도는 서 있어서 자연스럽게 올려다보게 됐다.
김희도과 눈이 마주쳤다. 생긴 건 꽃처럼 화사한 놈이 시선은 뱀처럼 서늘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데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방심했다가 물릴지도 몰라.
“궁금해요?”
한참 만에 김희도가 입을 열었다.
“안게 해 주면 알려 줄게요.”
“안게…… 야. 너, 너 인마, 어린 게 벌써부터 발랑 까져서.”
“무슨 생각 하는 거예요? 포옹 말한 건데.”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말하는 김희도를 보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쪽팔렸다. 권재영보다 김희도가 더 말 잘한다는 단장님의 말에 100%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잖아.
어색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 입을 꽉 다무는데 커다란 손이 뺨을 감쌌다. 엄지 손끝이 아랫입술을 살살 쓸며 야릇한 간지러움이 번졌다.
가벼운 농담이 오가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입술을 매만지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김희도는 본능적으로 물러서는 임성의 뒤통수를 강하게 움켜잡고 고정했다.
들숨과 날숨 속에 간질간질한 긴장이 스몄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제 것인지 김희도의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은 선배 말 맞아요. 저 발랑 까졌어요. 지금 당장 선배를 어떻게 하고 싶을 정도로.”
“희도야…….”
“싫으면 밀어 내도 괜찮아요.”
뒤통수를 잡았던 손이 떨어져 나갔지만, 임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아찔한 속눈썹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꼭 뭔가에 홀린 것처럼.
기어코 입술이 맞닿고 열린 입 안으로 더운 숨이 쏟아졌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찌릿 돋았다. 가볍게 시작됐던 키스는 금세 격렬하게 변했다.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뭉개지고, 입 안이 샅샅이 핥아졌다.
서서히 호흡이 달려 가슴이 들썩거렸다. 김희도는 점점 뒤로 넘어가는 그의 목을 받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따끔함을 느끼기도 전에 혀가 부드럽게 엉겼다.
“너한테서 지금 되게 좋은 냄새 나…….”
“응. 입 좀 더 벌려 봐요. 그럼 더 많이 맡을 수 있어.”
입을 조금 더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좋은 향이 스며들었다. 혀 아래 타액이 고였고, 김희도의 혀가 그것을 핥았다. 저도 모르게 발끝을 들썩이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맞붙은 입술이 얕게 흔들리며 커다란 손이 옆구리를 쓸었다.
* * *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지만, 마운드에서 내려올 때마다 온갖 냄새가 뒤섞여 들어와 속이 울렁거렸다. 특히 알파들 특유의 페로몬이 임성을 괴롭게 했다. 예민해진 코는 조금의 체취도 참지 못하고 무겁게 받아들였다. 마치 흔들리는 배에 서서 끊임없는 멀미를 하는 기분이었다.
훈련장에 덩그러니 앉아 심호흡을 들이켰다.
좋은 공을 던졌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어쩌지. 계속할 수 있을까? 산을 넘었더니 더 높은 산이 버티고 있는 기분이었다.
“물 마셔요.”
“여태 안 가고 뭐 했어?”
어느새 다가온 김희도에게 물을 건네받아 들이켰다.
“표정 안 좋네요. 오늘 실점 없이 잘 던졌잖아요.”
“실점은 없었지. 실점만.”
휴우. 무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선배는 뭘 제일 좋아해요? 꼭 집어서 말해 봐요.”
언젠가 한 번 들어 본 적 있는 질문이었다. 제 고민과 관계없는 질문이었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기엔 충분했다.
“가족.”
“두 번째는요?”
“야구.”
“그다음은?”
“건강일까? 건강해야 야구 할 수 있으니까.”
“……계속 말해 봐요.”
김희도는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섰다. 눈치 없는 남자는 신난 얼굴로 손가락까지 접어 가며 말했다.
“우리 팬분들, 팀원들. 감독님, 코치님, 매니저 형들. 돈도 없는 것보단 많은 게 낫지. 아, 곤약 잔뜩 넣은 떡볶이도…….”
“거기까지.”
어디까지 하나 하고 지켜보던 김희도가 한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도 페어리즈 일원이니 ‘우리 팀원들’ 안에 포함되겠지만, 임성에 한해선 욕심이 끝도 없는데 성에 찰 리가 없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까지 임성의 모든 것을 원했으므로. 스스로 탐욕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저는 건강하게 야구를 잘하는 데다 돈도 넘칠 정도로 많고 떡볶이까지 잘 만드는 페어리즈 팀원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를 못 하고 눈만 끔뻑끔뻑 뜨는 임성의 어깨를 짚은 김희도가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여름 복숭아 같은 뺨과 심연처럼 까만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임성의 등이 움찔 떨렸다.
“자, 여기서 하나만 더 충족하면 저는 선배가 좋아하는 것의 집합체가 돼요. 뭐일 것 같아요?”
단 하나 남은 조건,
“너 그거 꼭 프, 프…… 하하, 하.”
가족.
더듬더듬 말하다가 돌연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임성,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말이 되는 생각을 해야지. 희도가 알면 얼마나 어이없겠어.
홧홧하게 달아오른 이마에 땀이 흥건히 맺혔다. 김희도는 임성의 옆머리에 맺힌 땀방울이 뺨을 따라 턱 끝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모습을 핥듯이 응시했다.
“맞아요. 프러포……”
“와아악! 왁! 그만.”
임성이 소리를 내지르며 양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 위로 드러난 눈꼬리가 장난스럽게 휘었다.
“인마. 너 겨우 스무 살이야. 프…… 아무튼 그거 이르다고.”
젊은 혈기에 아무 말이나 내뱉을 게 아니야. 손바닥에 뜨겁고 물컹한 것이 닿았다.
헉. 깜짝 놀란 임성이 입을 막았던 손을 얼른 거뒀다. 김희도는 남은 맛을 음미하듯 아랫입술을 혀로 느리게 핥았다.
“네. 드디어 스무 살이 됐죠. 6년 기다린 것으론 부족해요? 시간은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6년? 같은 고등학교 출신은 맞지만 한 번도 마주친 적은 없었다. 아니, 중학 추계 리그 때 김희도에게 홈런을 두 방 얻어맞은 적은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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