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힐 ; 가시나무 성 1권
1. 나이트스톤
높은 산맥을 멀리 두고 푸른 들과 완만한 구릉을 끼고 있는 남부의 비옥한 지역. 제법 부유한 지주의 장원이 많았다. 전형적인 남부 장원인 나이트스톤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장원은 아니지만, 일대에서는 알아보는 사람이 제법 많은 유서 깊은 장원이었다. 3년 전 장원주가 자식 없이 죽은 이후 그것을 외조카 쌍둥이가 물려받았다.
이후 나이트스톤은 오랜 역사를 가진 비옥한 장원 뿐 아니라, 새로운 주인인 데일 쌍둥이의 눈부신 미모로 더욱 유명해졌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인형 같은 남녀 쌍둥이는 어디에서나 환영받았으며, 멀리서 그 미모의 소문을 듣고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던 중, 최근 나이트스톤은 기쁜 경사를 맞이했다. 기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사들인 물건과 함께 산더미 같은 죽하 선물을 배달하는 짐꾼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탕탕.
묵직한 노크가 요란하게 울렸다. 데일 가의 가정부 겸 집사인 폴리넷 부인은 옆에서 거들던 하녀 벳시에게 손짓했다.
“체셔 경께서 보낸 선물이 도착했나 보구나. 가서 가져오렴.”
“네. 폴리넷 부인.”
벳시가 빠른 걸음으로 온갖 꽃과 선물 상자로 북적이는 응접실을 나가 현관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벳시를 발견한 콥스가 벳시를 위해 문을 열 준비를 했다. 젊은데도 불구하고 경박한 다른 하인과 달리 조용하고 묵묵한 콥스는 항상 필요한 장소에 딱 적당한 시각에 나타나서 말없이 도움을 줄 뿐이었다. 그에게 수줍은 듯 새초롬한 미소를 지은 벳시는 예의 바른 미소와 함께 손님을 맞았다.
열린 문 사이로 잘 다려진 제복을 입은 하인이 근엄하게 쳐든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길퍼드라고 합니다.”
무릎을 살짝 굽힌 벳시가 똑같이 고개를 쳐들었다. 길퍼드가 타고 온 것으로 짐작되는 마차 지붕엔 어마어마한 선물 꾸러미가 실려 있었다. 벳시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일이시지요?”
“쏜힐(Thorn Hills)의 주인이신 글래스턴 씨를 대신하여 이 댁 아가씨에게 결혼 선물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길퍼드는 질 좋은 종이로 만든 봉투를 내밀었다. 모서리가 뾰족한 새하얀 봉투의 앞면에는 멋진 필체로 ‘친애하는 엘리엇 데일 씨에게’라고 적혀 있었고 뒷면에는 쏜힐을 대표하는 가시나무 문장이 새겨진 밀랍 봉인이 보였다. 흔히 쓰는 황금색이나 붉은색과 다른, 빛을 살라 먹은 것 같은 검은색 봉인을 보자 벳시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쏜힐.
가시나무 성.
마지막 주인이 사망한 이후로 물려받은 이도 없고 사겠다는 이도 없어 방치된 유령 저택 ‘쏜힐’에 느닷없이 나타난 새 주인은 인근 거주민들 사이에서 큰 화젯거리였다. 어디든 이사 온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인접한 저택과 인가를 돌며 인사를 나누는 일도 없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사람들의 초대도 번번이 거절했다. 그 덕에 쏜힐에 자리 잡고 1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글래스턴 이라는 이름과 로드니아에서 큰 성공을 거둔 거부라는 점 외에는 얼굴도, 나이도, 심지어 결혼 여부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쏜힐 특유의 음산함과 어우러진 비밀스러움이 뭇 사람의 호기심과 더불어 두려움을 자극했다.
“답을 지금 가져가야 하나요?”
“네, 그렇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벳시가 돌아서는 사이 콥스가 길퍼드에게 물을 건네고 휴식처를 안내할 터였다.
응접실로 돌아오자 폴리넷 부인이 가리개 뒤에서 막 걸어 나온 늘씬한 미인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 옆에서 긴 줄자를 목에 건 재봉사가 반달 모양 안경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치수가 맞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응접실에 세워 놓은 거대한 접이식 거울은 주인공을 사방에서 비췄다. 황금색 머리카락이 넘실거리며 사방에 빛을 뿌렸다. 우아한 몸에 꼭 맞게 재단된 새하얀 드레스 자락도 허리 아래로 파도처럼 굽실거렸다.
“여기 레이스가 모자라는군요.”
“비단 리본으로 장식하는 건 어떨까요?”
“레이스 꽃으로 하죠.”
웨딩드레스를 가봉하느라 정신없는 폴리넷 부인과 재봉사에게 완전히 붙들린 바람에 움직일 수 없는 작은 주인이 거울을 통해 벳시를 발견했다.
“윌리엄이 보낸 사람이니?”
“아니요. 아가씨. 쏜힐에서 온 사람입니다. 선물을 굉장히 많이 들고 왔어요.”
“쏜힐?”
폴리넷 부인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재봉사에게 드레스 자락을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벳시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음. 이상하구나. 쏜힐에서 선물을 보내다니.”
편지를 앞뒤로 돌려 본 폴리넷 부인은 받는 사람 이름을 확인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주인님에게 온 편지로군.”
“오빠에게?”
예비 신부가 고개를 돌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제대로 바느질하지 않은 연약한 드레스 자락을 씩씩하게 끌며 폴리벳 부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덕지덕지 붙은 레이스가 질질 끌렸다.
“릴리벳 아가씨!”
재봉사가 기절초풍하려 들었다. 그는 드레스가 망가질세라 자락을 번쩍 안아 들었다. 하지만 릴리벳이라 불린 엘리자베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 봐.”
편지를 받아 든 릴리벳 또한 눈을 찡그렸다. 이상한 표정을 짓는데도 그녀의 화사한 아름다움은 전혀 가시질 않았다.
“이해하기 어렵네. 전에 몇 차례 티 파티에 초대했을 때는 매번 거절했으면서 갑자기 선물과 함께 편지라니?”
그사이 창밖을 내다본 폴리넷 부인은 “선물이 어마어마해서 분명히 체셔 경께서 보내신 것으로 생각했는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비 신랑인 윌리엄 체셔가 상당히 부유하기 때문에 폴리벳 부인은 은근히 많은 선물을 기대했다. 가정부인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릴리벳을 선물 받은 드레스와 리본, 보석을 치장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교류가 전혀 없는 쏜힐의 주인이 보낸 선물이라니.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꿍꿍이일까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릴리벳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늘 대단히 긍정적인 릴리벳은 낯선 이의 선물을 호의적으로 해석했다.
“수줍음 많은 우리의 이웃이 드디어 용기를 낸 거겠지. 성대한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건 꽤 아쉬운 일이잖아.”
“맞아요. 아가씨.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이 될 텐데 누가 빠지고 싶겠어요? 가시나무 성주께서도 궁금증이 일었겠죠.”
아름다운 주인의 열렬한 추종자인 벳시가 맞장구쳤다.
“어쨌든 편지는 오빠 앞으로 온 거니 벳시 네가 가져다드리렴. 폴리넷 부인은 지금 가봉하느라 바쁘니까.”
“네, 아가씨.”
“주인님은 지금 온실에 계실 거야. 아까 그리로 차를 가져다드렸으니 말이야.”
벳시는 폴리넷 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응접실을 나섰다. 온실에 가기 위해 현관 앞을 지나는데 길퍼드와 콥스가 선물을 한창 운반하고 있었다. 예비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서 보내는 선물도 저만큼 많진 않을 터였다. 참으로 이상했다.
유명한 가시나무 성주께서 보낸 선물은 과연 어떤 걸까? 으스스한 검은 가시나무가 새겨진 드레스라든가. 아니면 피처럼 붉은 루비가 달린 귀걸이라든가.
고장에서 미인으로 손꼽히는 엘리자베스 ‘릴리벳’ 데일이라면 어느 것도 훌륭하게 잘 소화하겠지만. 그래도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낯선 사람이 선물을 잔뜩 보내는 일은 기이했다.
‘몰래 엘리자베스 아가씨를 사모한 걸까?’
미인으로 유명한 쌍둥이를 멀리서 우연히 바라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 사실 그런 사람은 꽤 많은 편이었다. 릴리벳의 약혼 소식이 일대에 알려졌을 때, 많은 청년의 안색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며칠 후 늘 넉넉한 재고를 자랑하던 술집의 술이 동났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쏜힐 성주가 그 남자들 하나일 수도 있었다. 뒤늦게 제 불타는 사랑을 깨닫고 릴리벳의 결혼을 막아 보고자 막대한 선물과 함께 편지를 보낸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벳시는 가슴이 뛰었다.
“로맨틱해.”
혼자서 배시시 웃은 그녀는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
온실은 동쪽 테라스에서 멀지 않았다. 나이트스톤의 주인은 하나뿐인 동생의 결혼식에 쓸 꽃을 마련하기 위해 겨우내 공들여 꽃을 가꾸었다. 그 노력이 헛되진 않아 현재 온실 안은 때 이른 초여름 꽃으로 가득했다. 특별히 향이 진한 장미는 수십 송이를 미리 따서 새 신부를 위한 향수도 제작 의뢰했다. 결혼 준비는 차질 없이 착착 진행 중이었다.
“주인님.”
온실 입구에 들어선 벳시가 부르자 안쪽에서 누군가 일어섰다. 더운 곳이라 얇은 하얀 셔츠 차림인 젊은 주인은 굵은 땀방울을 훔치며 막 심은 꽃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화단 밖으로 나왔다.
거친 정원사용 가죽 장갑을 끼고 흙 묻은 장화를 신었는데도 엘리엇 데일의 미모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동생과 똑같은 바탕에 남성적 매력을 더해진 나이트스톤의 젊은 주인 또한 대단한 미모를 자랑했다. 명화에서 튀어나온 강인한 대천사의 현신처럼 우아하고 균형 잡힌 몸을 감싼 편안한 차림이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벌써 가봉이 끝났나?”
“아직 한창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무슨 일이지?”
“여기.”
벳시는 편지를 내밀었다. 엘리엇은 더러운 장갑을 빼서 편지와 맞바꾸었다. 벳시는 귀부인이 기사에게 건넨 손수건처럼 장갑을 아주 소중히 들었다. 편지를 앞뒤로 휙휙 돌려본 엘리엇이 물었다.
“글래스턴이 누구지?”
“쏜힐에서 왔습니다. 어마어마한 선물과 함께요.”
“쏜힐?”
적당히 굵고 빽빽한 속눈썹 한 쌍이 동시에 펄럭였다. 눈썹 그늘 속에 자리 잡은 푸른 호수와 같은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멍하게 눈동자를 바라보던 벳시는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멍청한 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인을 빤히 쳐다보는 건 무례한 짓이었다.
“가시나무 성주께서 갑자기 내게 무슨 볼일이지?”
종이칼도 없이 엘리엇은 그 자리에서 봉인을 뜯고 봉투를 열었다. 봉투보다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낸 그는 빠르게 읽어 내렸다. 이십 년 전에 이딸리 여행 한번 한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삼는 마을 주민이 그를 볼 때마다 롬 대성당에서 본 걸작 조각 같다고 표현했던 얼굴에 옅은 웃음과 함께 호기심이 번졌다.
“내 동생의 결혼이 가시나무 성주의 흥미를 끌 줄은 몰랐는데. 결혼식에 참석 하고 싶다는군.”
“아가씨만큼 아름다운 분은 없으니까요. 누구라도 결혼식을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럴까?”
벳시의 말을 대충 넘긴 엘리엇은 그녀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었다. 얼굴 못지않은 아름다운 선을 자랑하는 신체가 움직일 때마다 온실에 감도는 은은한 꽃향기가 한층 짙어졌다. 꼿꼿하고 바른 자세를 지닌 주인의 시원한 걸음을 따라가기 위해 벳시는 종종 걸었다.
“편지를 가져온 사람은 아직 기다리고 있나?”
“네. 답을 가져가야 한다고 합니다.”
“이쪽의 초대를 매번 매몰차게 거절하던 분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궁금하군.”
그건 엘리엇뿐 아니라 쏜힐 소식을 들은 모두가 가진 궁금증이었다. 동쪽 계단을 통해 2층 서재로 간 엘리엇은 새 종이 위에 빠르게 답장을 썼다. 그 사이 유능한 하녀인 벳시가 알아서 봉인용 밀랍을 녹이기 위해 촛불을 붙이고 봉인도구함을 꺼냈다.
지난달 오십 장이 넘는 청첩장 겸 초대장을 일일이 손으로 썼기에 편지는 금방 완성되었다. 후후 불어 잉크를 말리고 봉투에 넣은 뒤 봉인용 도장을 붉은 밀랍 위에 찍었다.
“쏜힐에서 온 하인에게 전해 주렴.”
“네.”
편지를 받아든 벳시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한 뒤에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떠났다.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서재에선 현관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커다란 사륜마차는 불필요한 장식을 절제한 검은색이었고 그를 끄는 두 마리 말도 어둠처럼 검은 털을 가졌다. 심지어 벳시에게 편지를 전달받는 하인도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물론 하인에게 검은색 제복을 입히는 가문은 많지만, 밀랍 봉인까지 검은색을 쓰는 가문은 흔치 않았다.
“흡혈귀 노릇에 심취한 걸까.”
쏜힐의 주인, 글래스턴은 괴상한 작자였다. 그는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10년 이상 버려진 쏜힐을 수리하고 자리를 잡았다. 일하는 자들도 모조리 외지에서 데려왔다. 그렇기에 입이 가벼운 하인을 통해 소문이 번지는 일도 없었다.
답장을 받은 글래스턴의 하인은 곧장 마차를 몰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수차례 초대를 거절하며 교류를 거부한 상대가 난데없이 보낸 어마어마한 선물과 함께 결혼식 참여 의사를 밝히다니. 무척 기이했다.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일은 피하는 편이 좋았다. 그렇기에 이런 선물은 과하며 결혼식에 자리가 모자라 초대하기 힘들다는 답장을 쓸 수도 있었다. 일대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장원인 나이트스톤의 소유주로서 쏜힐의 주인과 척을 진다고 한들 특별히 해가 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중한 편지였고, 더불어 선물로 성의도 표시했다.
“결혼식엔 손님이 많을수록 좋지.”
엘리엇은 유일한 혈육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을 황실 결혼식처럼 성대하게 치르길 원했다. 그래서 장원을 물려받은 이후 계속 모아 왔던 저금을 몽땅 쏟아부었다. 당장 현금이 바닥났어도 크게 우려할 건 아니었다.
장원 경영은 틀에 박힌 듯해서 늘 비슷한 자금이 들었다. 그래서 딱 필요한 만큼만 따로 빼놓고 남은 저금은 아낌없이 썼다. 또 가을 추수가 시작되면 수입이 있을 테니 별로 문제 될 건 없었다. 돈보다는 두 번 다시 없을 동생의 결혼식을 얼마나 아름답게 꾸밀지가 더 큰 관심사였다.
손님 명단도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특히 동생의 남편이 될 윌리엄 체셔는 손꼽히는 명문가인 로우드 남작 가문과 가까운 친척인 데다 아주 훌륭한 청년이기에 결혼식에 기꺼이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여흥을 돋우기 위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을 한 명 정도 더해도 좋았다.
“두고두고 회자될, 굉장한 결혼식이 될 거야.”
엘리엇은 아주 멀리 보이는 검은 숲 사이로 솟아난 음침한 성채를 보며 미소 지었다.
결혼식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결혼식 당일.
이른 아침부터 동생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신부 화장을 위해 새벽부터 부산을 떨던 폴리넷 부인이 하다못해 엘리엇을 찾아왔다. 예비 신부 방에서 목욕물을 준비하던 벳시가 소식을 듣고 찾아온 엘리엇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리따운 여동생은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확하게는 베개에 코를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릴리벳. 왜 그러니?”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헤쳐 동생의 얼굴을 찾아낸 엘리엇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 나 결혼 못 하겠어.”
“갑자기 왜?”
제대로 옷도 갖춰 입지 않은 채 엉엉 우는 여동생을 달래느라 엘리엇은 진땀을 뺐다.
“결혼하면 이제 오빠랑 같이 못 살잖아.”
“대신에 윌리엄과 살 수 있잖아.”
“싫어. 오빠랑 살 거야.”
“너랑 같이 살면? 나는 결혼도 못 하게 하려고?”
“으엉.”
서럽다는 듯이 릴리벳이 엘리엇의 품에 매달렸다.
“언제든 집에 와도 돼.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아.”
“집에 와도 되는 것과 완전히 따로 사는 건 다른 문제란 말이야.”
“그래도 새 신부가 결혼식 아침부터 울면 어떻게 하니?”
“몰라.”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외숙부 집에서 더부살이할 때도 말썽 한 번 부리지 않고 잘 커 온 동생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떼를 쓰는 일은 흔치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엘리엇도 영혼의 단짝과도 같은 여동생을 누군가의 품에 보내기는 싫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그리고 오빠로서 여동생의 평안과 행복을 빌어 주는 것이 도리였다.
‘엘리엇, 동생을 부탁한다.’
불미스러운 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전언이었다. 엘리엇은 자신을 꼭 닮은 황금색 정수리에 코를 묻고 심호흡했다. 이젠 이런 모습도 더는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럼 파혼할래?”
짐짓 엄한 목소리로 묻자 릴리벳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턱을 부딪히기 전에 엘리엇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건….”
울음이 섞인 말끝이 흐려졌다.
“윌리엄은 벌써 1층 객실에서 준비 중이야. 네가 이렇게 결혼하기 싫다고 울고불고하는 걸 그가 알면 어떻겠어?”
“하지만… 오빠는 섭섭하지 않아?”
서러운 물음에 뜨거운 기운이 왈칵 올라올 뻔했다. 하지만 엘리엇은 내색하지 않았다.
“섭섭하지. 이런 말괄량이에 고집쟁이를 더는 못 보게 돼서 아주 아주 섭섭해.”
“나도. 바보 같고 제멋대로에 못된 심보를 가진 오빠와 헤어지게 돼서 섭섭해.”
“그럼 비겼네.”
드디어 릴리벳이 웃었다. 덩달아 엘리엇의 입매도 슬며시 풀렸다.
“다 큰 아가씨가 이렇게 엉엉 울기 있냐. 앞으로는 내가 아니라 윌리엄 품에서 울어. 그러라고 시키는 결혼이야.”
“내가 귀찮아?”
“당연하지. 얼른 일어나서 흉한 얼굴 씻고 얼른 결혼이나 해 버려. 엉덩이를 뻥 차 주기 전에.”
“심술쟁이.”
릴리벳이 베개를 들어 엘리엇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러더니 씩씩하게 일어나서 목욕물이 준비된 곳으로 갔다. 드디어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한숨을 쉰 폴리벳 부인이 두 팔을 둥둥 걷고 따라붙었다.
“벳시. 장미 에센스와 비누를 가져오렴.”
“네. 부인.”
손 빠르게 착착 준비하는 두 사람을 보며 엘리엇은 방문을 열었다.
“이따가 아주 후회하게 될 거야.”
목욕통을 가리는 파티션 뒤에서 동생이 소리쳤다.
“왜?”
“아주 아름다운 여동생을 빼앗겨서!”
“흥! 윌리엄 같은 멍청이나 너처럼 성질 더러운 말괄량이를 데려가지.”
휙!
우당탕!
물에 젖은 빗이 날아와 문에 부딪혔다. 덩달아 다른 것까지 날아오기 전에 엘리엇은 얼른 동생의 방을 나와 버렸다.
***
“엘리엇. 아무래도 내가 급성 심장병에 걸린 것 같네.”
새벽엔 신부가, 아침엔 신랑이 야단법석이었다. 예복을 차려입은 윌리엄이 가슴께를 부여잡느라 예식용 꽃 장식이 망가지려 했다.
“손.”
엘리엇은 아직 끼지 않은 장갑으로 그의 손을 툭 쳐 내면서 주의시켰다.
“자네도 결혼할 때 이렇게 떨렸나?”
“나는 아직 미혼이야. 정신 차려.”
“그렇지. 자네 동생이 먼저 결혼하지.”
“앞으로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잖아. 남자답게 가슴을 펴. 한심하게 굴면 네 방울 두 쪽에 각각 엽총을 쏴 준 다음에 릴리벳을 도로 데려오겠어.”
제대로 펴지 않은 타이와 옷깃 주름을 펴 주면서 엘리엇은 엄하게 경고했다. 윌리엄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풋 웃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전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잠시 후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윌리엄이 진지하게 나왔다.
“나의 릴리벳은 내가 목숨 걸고 지킬 테니 걱정 붙들어 매.”
“믿어 보지.”
기어이 험한 소리를 듣고서야 제대로 할 마음이 생기는 태도가 여동생이든, 매제든 똑같았다. 어쩌면 완벽한 한 쌍일지도. 혹은 완벽한 골칫덩이가 되든가.
당사자들의 호들갑과 달리 결혼식은 선선히 부는 순풍처럼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화창한 날이었고 공기는 선선했다. 식장은 장원 가운데 꾸몄다. 멋지고 아름답게 차려입은 하객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고 예식을 주관할 성공회 신부가 도착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엘리엇이 정성스럽게 키운 꽃으로 장식한 버진 로드를, 이제 부부가 되어 걷는 릴리벳과 윌리엄은 그림처럼 사랑스러웠다. 바라보기만 해도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동시에 저릿저릿한 아픔도 함께였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곁을 지켰던 분신이 이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평생을 약속하며 입을 맞추는 광경은 복잡한 심경을 불러일으켰다. 분명히 행복하고 즐거운데, 동시에 섭섭하고 어쩐지 혼자 남은 듯했다.
‘혈육은 모두 이런 멜랑꼴리를 느끼는 것일까.’.
피로연에서는 춤곡이 계속 이어졌다. 곳곳에서 농담이 터져 나오고 다음 결혼식 주인공을 노리는 선남선녀들이 집단으로 추는 춤에 푹 빠져들었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손님들은 대게 가장자리에 마련된 좌석을 차지하고 젊은이를 바라보며 응원의 손뼉을 쳤다. 그중에서도 몇몇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인사하고 근황을 나누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혼기가 찬 자식들 얘기도 나왔다. 자식에게 좋은 혼처를 마련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날카로운 눈으로 젊은 남녀를 관찰했는데, 그 대상에는 엘리엇도 포함되어 있었다.
‘매우 잘생겼어. 나이트스톤 주인이니 로드니아의 상류층까지는 못 되더라도 이 고장에서는 안정적으로 살 테지. 딸린 군식구도 없고 말이야.’
‘나이트스톤이 이만큼 넉넉한 줄 미처 몰랐는걸. 결혼식이 굉장히 화려해. 조카사위로 삼기 최고야. 혹은 대단한 거부나 콧대 높은 귀족 가문에 시집보내긴 그른 말썽꾸러기 딸의 남편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눈짓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속내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다분히 속물적이면서도 동시에 냉정하리만큼 객관적인 평이었다. 외모는 어디 가나 단연 돋보일 만큼 훌륭했다. 그러나 가문과 재산은 모자라지 않은 정도였지, 대단할 정도는 아니었다. 엘리엇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중매 시장에선 부모가 없이 미혼 동생만 있는 것도 걸림돌이었다. 그렇기에 구체적인 혼담이 오간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동생이 좋은 가문의 청년과 결혼했으니 이젠 본격적인 중매 시장에 나오겠군.’
‘이번 결혼식에 참석한 아가씨가 유달리 많으니, 그중에 하나 나올지도 모르겠어.’
딱 맞는 얘기였다. 릴리벳의 친구긴 했지만 그다지 교류가 많지 않던 또래 아가씨들이 우르르 예쁜 옷을 빼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가씨들의 눈에 들고 싶어서 젊은 남자들도 우르르 나타났다. 그들은 새 양복을 빼입고 공작새처럼 으스대면서 젊은 여자들 앞을 거닐었다.
엘리엇도 그 안에 섞였다. 그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초조함과 허전함이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릴리벳이 결혼한다고 해서 남매 사이가 멀어질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윌리엄이라는 가족이 하나 늘어났을뿐더러 집에는 여전히 많은 하인이 있었다.
‘폴리벳 부인과 다른 하인들은 내가 이끌 사람이지 의지할 사람은 아니야. 의지했던 릴리벳은 이제 윌리엄의 아내이자 그와 가장 가까운 이해자가 될 테고, 내 곁의 빈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만약 그럴 사람이 있다면 릴리벳이 윌리엄을 만난 방식으로 조우할 운명의 상대뿐이야.’
운명적인 상대가 바로 이 결혼식에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늘 자신의 적극성을 높게 평가하는 엘리엇은 그 미지의 상대를 찾기 위해 신난 미혼들의 춤판에 끼어들었다.
“휘익! 야호!”
누군가 휘파람을 불고 박수 쳤다.
짝! 짝! 쿵! 쿵!
군무를 추는 남녀들이 박수와 동시에 발을 굴렀다. 점점 무도곡의 박자가 빨라졌고 덩달아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춤을 추는 자나 지켜보는 자 모두 환한 얼굴로 웃어 댔다.
쿵쿵쿵.
짝짝짝.
휙휙 바뀌는 상대 중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용모는 확연히 달라도 생기 넘치게 웃는 모습이 꼭 릴리벳을 닮았다. 대단한 정력가로 보이는 그녀가 지쳐서 떨어져 나오면 말을 걸어 보리라 내심 마음먹고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긴 무도곡이 끝났다.
“와아아아.”
“한 번 더!”
“브라보!”
춤을 추었던 사람들이 인사했다. 엘리엇 또한 손을 올려 박수 치고 환호했다. 그러면서도 점찍어 두었던 아가씨의 자취를 쫓았다. 때맞춰 그 아가씨가 가장자리로 가기에 엘리엇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그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엘리엇을 불렀다.
“오빠.”
긴 웨딩드레스를 입은 릴리벳이 꽃같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곁에는 윌리엄이 왕녀를 지키는 기사처럼 따라붙었다. 엘리엇은 순간 제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까맣게 잊었다.
“안녕, 내 공주님.”
엘리엇은 릴리벳의 발그레한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릴리벳이 싱긋 웃자 보이지 않는 축포가 사방에서 어지럽게 터졌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고, 다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다 할 것이다. 그런 동생이 이젠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다니. 웃음 끝에 씁쓸함이 맺혔다. 하지만 행복에 젖은 릴리벳은 그런 엘리엇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발견했어?”
“어, 음.”
동생에게 정신이 팔렸던 엘리엇은 그제야 다시 아가씨를 떠올리고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그 짧은 틈에 어느 놈팡이가 벌써 그녀의 곁에 서서 말을 걸고 있었다.
“있었는데 선수를 빼앗겼군.”
혀를 찬 엘리엇은 상대에 대한 흥미를 바로 잃었다.
“타이밍이 나빴어?”
릴리벳이 엘리엇의 시선을 쫓았다.
“아니야. 그런데 무슨 일이야? 네 남편이 벌써 말썽이라도 피웠나?”
“설마.”
“이제 가족이니 내게도 신뢰를 좀 가져 줘, 엘리엇.”
“생각 좀 해 보고. 아직 결혼식이 끝나진 않았으니까 말이야.”
“성직자 앞에서 맹세했다고. 방금 서약서에 서명도 했어.”
“오 이런, 릴리벳. 이제 넌 이 멍청한 놈에게 평생 매이게 생겼구나.”
너스레를 떨며 위로를 전하자 릴리벳은 빙긋 웃으며 윌리엄에게 팔을 걸쳤다.
“그 멍청이의 곁이 내가 행복한 장소야.”
“내 동생도 똑같이 멍청해졌어.”
릴리벳이 호호 웃으면서 윌리엄이 마련한 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제는 동생의 옆자리는 윌리엄의 차지였다. 마치 손님처럼 마주 앉은 엘리엇은 괜히 씁쓸했다. 이젠 이런 서운함에도 익숙해져야 했건만.
“신혼여행을 어디로 갈지 정했어. 오빠.”
“벌써?”
“내주에 프랑크 왕국으로 출발해서 이후에는 알프 산맥을 넘어 이딸리로. 후에는 에스판으로 갔다가 위쪽으로 올라올 거야.”
윌리엄과 릴리벳이 저들만의 모험 계획을 신나게 늘어놓았다. 작은 해협 건너에 있는 넓은 대륙의 유명 왕국은 다 찍고 오겠다는 얘기였다.
“석 달은 넘게 걸리겠군.”
“너무 기대돼.”
“릴리벳은 외국으로는 가 본 적이 없는데 너무 멀고 너무 긴 여행 아닌가?”
신난 동생에게 자못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더니 신혼부부는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지금 안 가면 아주 나중에나 갈 수 있는걸.”
그러면서 릴리벳은 남편의 팔에 제 팔을 끼면서 “내년엔 아이가 생길지도 모르잖아.”라고 수줍게 말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얘기라 내심 깜짝 놀랐다. 부부가 아이를 가지는 건 너무 당연하건만. 엘리엇은 내심 커지는 당혹감을 꾹꾹 누르느라 애썼다. 제 영혼의 단짝인 줄 알았던 쌍둥이는 이제 정말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음이 현실로 확 다가왔다. 갑자기 큰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갈라진 기분이었다.
“걱정하지 마. 틈날 때마다 편지 쓸게.”
윌리엄이 릴리벳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약속했다. 엘리엇은 갑자기 목이 타서 테이블에 놓여 있던 샴페인 잔을 들어 반쯤 들이켰다.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윌리엄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사타구니에 총을 한 방 쏴주거나.
그때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오지 않았지?”
윌리엄과 베이비 키스를 주고받던 릴리벳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누구?”
“가시나무 성주 말이야.”
“아아, 쏜힐의 글래스턴. 그러고 보니 선물에 대한 답례로 초대장을 보냈어.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받긴 했는데.”
그와 다른 하객과의 관계를 전혀 알 수 없었으므로 마땅한 자리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너무 외지지도 그렇다고 중앙도 아닌 적당한 구석에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 자리는 결혼 내내 비어 있었다.
“어지간히 비밀스러운 자로군.”
“무례한 놈이겠지.”
윌리엄의 말에 엘리엇이 덧붙였다.
“불쑥 선물을 보내는 것도 어이없는데 정중한 초대를 이렇게 무시하다니. 예의범절을 가시나무의 거름으로 줬나 봐.”
자리에 없는 사람 흉을 보았다. 교류 없는 낯선 이에게 호의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적의를 표시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기분이 꼬였고, 그걸 적당한 작자를 상대로 풀었다. 동생 부부에게 가시나무 성주를 변호할 친분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결혼식을 기념하여 특별히 새로 맞춘 드레스를 입은 폴리넷 부인이 다소 딱딱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는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종일 만면에 웃음을 뿌리며 다니던 그녀의 굳은 눈빛에 셋 모두 의아함을 담은 시선을 교환했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피로연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만큼 한껏 고조되었다가 이제야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 시점에 누가 찾아온단 말인가? 지각이라고 칭하기도 힘든 시점이었다.
“그… 쏜힐의 글래스턴 씨입니다.”
궁금증을 정확하게 짚은 폴리넷 부인이 덧붙였다. 순간 동생 부부는 더욱 놀란 듯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고, 엘리엇은 눈살을 찌푸리며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작자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엇은 지각한 하객을 맞이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갔다. 신부의 혈육으로서, 계시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슴에 꽂은 하얀 장미는 벌써 시들시들했다. 복도를 걸으면서 엘리엇은 그것을 홱 빼서 폴리넷 부인에게 건넸다.
현관 앞 대리석으로 장식된 공간에 장신의 남성이 서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렁치렁 늘어지는 까만 정장용 망토를 걸친 모습이 마치 까마귀가 인간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다른 하객과 똑같이 검은 정장을 입었는데 왜 저것은 단순히 검은 염색이 아니라 어둠을 살라 지은 옷처럼 보일까.
“가시나무 성주.”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진짜로 사용하려던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순간의 실수였다. 그만큼 첫인상이 강렬했다.
실크해트를 천천히 벗는 남자의 머리칼은 밤 그림자가 가득했고 구릿빛 피부에는 소금기 어린 거친 파도의 흔적이 엿보였다. 산맥처럼 우뚝 솟은 콧날에 머리칼만큼이나 짙은 눈썹. 깊은 안와 덕분에 그늘져서 눈동자의 색이 제대로 가늠되지 않았다. 분명히 상냥한 색은 아니었다.
시원한 이마와 높은 광대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남성성을 한껏 고무시킨 턱과 꽉 다물린 입술에서는 강한 성정이 돋보였다. 하지만 엘리엇을 가장 놀라게 한 부분은, 그가 상당히 젊다는 점이었다. 엘리엇과 서너 살 차이 정도? 하나같이 강한 면모가 탁월한 조화를 이루어 상당한 미남이기도 했다.
“늦어서 미안하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바리톤에 가까운 목소리는 힘 있고 멋졌다. 하지만 엘리엇은 영문 모를 거리낌과 함께 목 뒤에 소름이 돋았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엇 데일이라고 합니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꺼림칙한 사람이라고 해서 쫄 것은 없었다. 예식 때문에 끼고 있는 하얀 장갑에 검은 가죽 장갑이 닿았다. 동시에 상대의 딱딱한 입매에 야릇한 웃음이 걸렸다.
“아서 글래스턴.”
순간 형체 없는 불길함이 불현듯 윤곽을 그리기 시작했다. 맞잡은 손을 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엘리엇은 상대의 두 눈동자를 응시했다. 보이지 않은 밀랍과 아교를 뒤집어쓴 듯,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자를 안다.
정확하게는 가시나무 성주가 아닌… 아서를. 그 불길한 이름을.
“어떻… 게 네… 가?”
떨리는 음성이 더듬더듬 이어졌다.
“나를 기억하는군.”
아서가 맹수와 같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케케묵은 기억이 묵은 먼지를 털고 일어섰다. 과히 불쾌하여 불안감이 일었다. 엘리엇은 충격을 채 떨치지 못한 채 놈을 노려봤다.
“여…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너 따위가 지금 와서. 당장 나가.”
“그거 섭섭하군.”
놈은 품에서 하얀 카드를 꺼냈다. 익숙한 문양이 그려진 그것은 엘리엇이 서명한 초대장이었다.
“나는 초대받은 손님인데 말이지.”
음침해서 소름 끼치는 밤의 그림자 같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그 순간 엘리엇은 깨달았다. 이자는 그날의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끔찍한 몰골로 내쫓겼던 그 날을 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되새기면서. 가장 증오하는 원흉인 엘리엇을 파멸시키기 위해.
“오빠?”
언제 왔는지 릴리벳이 하얀 드레스 자락을 끌면서 다가왔다.
“릴리벳?”
놈의 입에서 감히 사랑스러운 동생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엘리엇은 그때까지 잡고 있는 줄도 몰랐던 아서 렌튼의 손을 뿌리쳤다. 대신에 릴리벳의 가녀린 손목을 황급히 잡았다.
“폴리넷 부인, 당장 저자를 쫓아내! 콥스! 어디에 있나! 내 집에 허락 없이 들어온 자를 당장 내보내!”
고함친 엘리엇은 릴리벳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중한 동생을 더러운 시야에 둘 수 없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때 누군가 엘리엇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아서 렌튼인 줄 알고 몸을 확 돌리면서 팔을 휘둘렀다.
턱.
손등이 상대의 가슴을 후려쳤다. 깜짝 놀란 눈으로 엘리엇을 보는 사람은 윌리엄이었다.
“엘리엇, 자네 왜 그러나?”
동생의 곁에는 다부진 체격을 자랑하는 군관 출신 남편이 있건만, 엘리엇은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심히 안도했다. 윌리엄이 함께 있다면 릴리벳을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
“오빠? 왜 그래? 손님 앞에서.”
놀란 동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윌리엄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내 아내를 돌려주겠나?”
“둘 다 따라와.”
엘리엇은 릴리벳의 손을 윌리엄에게 전하는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상황 파악이 느린 두 사람을 한꺼번에 가까운 방으로 이끌었다. 마침 작은 응접실이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엘리엇은 릴리벳을 우선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그러면서 윌리엄에게 문을 가리켰다.
“문을 잠그게!”
윌리엄은 답답하게 이유를 캐묻는 대신에 일단 엘리엇의 지시를 따라 문을 잠갔다. 그리고 바로 돌아와 제 아내 곁을 지켰다.
엘리엇은 초조하게 방을 서성였다. 그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자 신혼부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거친 숨을 몰아쉰 엘리엇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사이에 식은땀이 흘러 손바닥을 적셨다.
“왜 그래? 오빠?”
“갑자기 왜 그러나? 저 작자가 뭐기에?”
차분하게 설명할 기분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욕설이었다.
“더러운 짓거리를 헀던 놈이야. 뻔뻔하게 얼굴을 내밀다니. 이름까지 바꾸고 말이야. 여전히 음흉해.”
“맥락을 전혀 따라갈 수가 없어.”
“맞고 쫓겨났다니?”
제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두 사람을 향해 엘리엇은 분노 어린 시선을 던졌다.
“어린 릴리벳에게 감히 주제넘은 욕망을 품고 저열한 천성을 드러내려다 들켜서 흠씬 두들겨 맞고 내쫓긴 놈. 그놈이야.”
“뭐라고?”
“저 아래 현관에 서 있던, 까마귀 같은 불길한 놈이 바로 그 아서 렌튼이라고.”
“헉.”
그제야 그게 누구인지 생각이 난 릴리벳이 창백한 한숨을 들이마셨다. 새로 맞은 신부의 안색이 굳는 걸 확인한 새신랑은 걱정스러운 듯이 흰 드레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걱정하지 마, 릴리벳. 내가 있잖아. 그가 누구든 너에겐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릴리벳의 안색이 몹시 나빠졌다. 단순한 불안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것이 과거 있었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짐작한 엘리엇은 펄펄 뛰었다.
“당연하지! 당장 엽총을 가져와야겠어! 진작 쏴 버려야 했어.”
엘리엇이 소리치자 윌리엄이 동의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결투라면 내가 하겠어. 릴리벳은 이제 내 아내니까 말이야.”
주먹을 꽉 쥐고 문 쪽을 쏘아보는 윌리엄의 태세는 최전선에서 돌격하는 기마병다운 기백이 엿보였다. 하지만 릴리벳은 그런 남편의 손목을 두 손으로 꽉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결투라니. 그런 끔찍한 일은 상상하기도 싫어.”
“하지만.”
“안 돼. 제발. 당신이 다치면 난 정말… 바로 죽어 버릴 거야.”
자신을 말리는 비겁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윌리엄은 눈살을 찌푸린 채 엘리엇을 봤다.
“지금 혼내 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또 추접스러운 짓을 할 거다. 제 정체를 밝히지 않고 선물을 보내고 내게 청첩장을 뜯어낸 걸 봐. 작정했어!”
“무엇을?”
“무엇이라니? 복수 말이야.”
엄하게 경고했지만, 동생은 듣지 않았다. 긴 한숨을 쉰 그녀는 릴리벳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분노로 달아오른 엘리엇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좀 진정해, 오빠.”
“진정하게 생겼어? 지금?”
“만약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면 뭔가 할 말이 있거나 혹은 정말로 축하하려고 온 것일지도 몰라. 나는 그의 선의를 믿어.”
“너, 정신 나갔니?”
제 뺨을 감싸는 동생의 양손을 잡은 엘리엇은 기가 막혔다.
“네가 긍정적인 성격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책 없을 줄은 몰랐다.”
“정말로 무슨 짓을 할 거였으면 벌써 했겠지. 작년 늦봄부터 쏜힐에 살면서 일체의 초대를 거절하고 칩거했잖아. 그냥 고향으로 돌아온 것뿐일지도 몰라.”
릴리벳은 이상하게도 아서 렌튼을 두둔했다. 엘리엇은 제 동생이 갑자기 미쳤나 심각하게 의심했다. 결혼이 릴리벳의 이지를 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왜 네 결혼식에 난데없는 선물을 보내고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거지? 환영받지 못할 걸 알면서 말이야. 결혼을 망치러 온 게 분명해. 아서 렌튼은 그럴 자식이야!”
“정말로 결혼식을 망칠 생각이었으면 신부님 앞에서 영혼의 맹세를 하기 전에 난동을 부렸을 거야. 그리고 너무 놀란 난 그 자리에 기절해 버렸겠지.”
그러자 윌리엄이 자신을 향해 아내를 돌려세웠다. 사랑과 확신이 넘치는 태도로 선언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게 두지 않아. 저 아서 렌튼이라는 놈이 당신을 괴롭히게 절대 두지 않아. 그러기로 나는 신 앞에서 신성한 맹세를 했어.”
윌리엄이 릴리벳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면서 불타는 연정을 고백했다.
“알아. 내 사랑.”
은은한 미소가 걸린 입술이 굳건한 남자의 입매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싸움이 싫어. 당신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당장 멈출 것 같아.”
그러면서 릴리벳은 엘리엇에게 애틋한 시선을 던졌다.
“오빠도 마찬가지야. 나를 위해서라면 싸우지 마. 그리고 아서는… 내 추측이겠지만 해를 끼치진 않을 거야.”
“저놈을 친근한 투로 부르지 마라. 어쨌든 불길하고 소름 끼치는 놈이야.”
“벌써 15년도 더 오래된 옛날 일이잖아. 지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일에는 아직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아니. 사람의 천성은 변하지 않아. 네 사랑스러운 영혼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석연치 않다니. 저놈은 밤에 몰래 침실에…!”
말을 잇던 엘리엇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윌리엄 앞에서 굳이 꺼낼 얘기는 아니었다. 대신 엘리엇은 동생의 손을 잡아 그 등에 키스했다. 그리고 혈육만이 느낄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이젠 제 곁을 떠나는 반쪽을 바라보았다.
“네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해. 저놈의 존재는 해악 그 자체야.”
“인사해 보면 다를 수도 있어.”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장 저놈을 죽여 버릴 거야. 그 때문에 감옥에서 삶을 마감해도 상관없어.”
“오빠는 너무 극단적이야.”
하얀 이마가 찡그려졌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저놈에게 널 보여 주지 않는 것. 할 수만 있다면 꼭꼭 숨기고 싶어.”
“평생 범죄자처럼 숨어서 살라는 얘기야? 나는 그럴 이유가 없어.”
타당한 지적에 엘리엇은 잠시 할 말을 찾다가 아내를 감싸는 윌리엄을 보고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윌리엄도 마음에 썩 들지 않지만, 아서 렌튼에 비하면 황태자급이었다.
“신혼여행을 가야 하지 않니. 두 달 정도? 아니 적어도 반년 정도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초조한 듯 이리저리 걸음을 옮긴 그는 신혼부부를 향해 싱긋 웃었다. 경직된 미소였다. 쌍둥이 여동생만큼이나 매력적인 용모 덕분에 신경질적인 태도가 오히려 매력을 더하는 것을 본인은 몰랐다.
“아까는 2개월도 길다고 했잖아.”
“생각이 바뀌었어. 적어도 2세는 만들어서 돌아오도록.”
“오빠.”
타박하면서도 릴리벳은 부끄러운 듯이 윌리엄을 의식했다. 뺨과 귀 끝이 제 아내만큼 붉어진 윌리엄은 그런 릴리벳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관자놀이에 키스했다.
“걱정하지 마.”
남자답게 자신하는 윌리엄을 보며 엘리엇은 안도하는 한편 동생을 영영 뺏기는 데 질투를 맛보았다. 그렇지만 그편이 아서 렌튼 같은 작자에게 릴리벳을 노출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당장 내 집에서 썩 나가. 빨리 프랑크 왕국이든 이딸리든 어디든 가 버려. 이제 나이트스톤은 독신자만 사는 곳이야.”
짐짓 성을 내면서 두 사람을 문 쪽으로 떠밀었다. 당장 나가라는 말에 살짝 놀라면서도 내일 가겠다는 말은 선뜻 하지 못하는 동생 부부를 보고 엘리엇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폴리벳 부인!”
2층 복도에서 가정부를 불렀다. 곧 모습을 드러낸 폴리벳 부인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 사람이 아직도 가지 않고 있습니다. 주인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하는데요.”
“추잡하고 뻔뻔한 놈 같으니.”
엘리엇은 보란 듯이 윌리엄과 릴리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내가 쫓아낼 동안 폴리벳 부인은 이 행복한 벌레 한 쌍이 교미 여행을 떠날 수 있게 좀 도와줘.”
“오빠!”
“흠흠. 윌리엄. 그건 좀.”
황당한 외침과 멋쩍음을 싹 무시한 엘리엇은 폴리벳 부인이 두 사람을 데리고 다른 쪽으로 가는 걸 지켜보았다. 그런 다음 자정의 결투에 나서는 기사처럼 단호한 태도로 두 사람과 반대편, 현관 쪽으로 갔다.
계단 위에 서자 놈이 보였다. 엘리엇을 발견한 놈은 고개를 든 채로 검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더럽고 음흉한 안광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남성을 보는 눈빛도 저럴진대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향해서 저 더러운 눈깔을 치켜뜨는 상상만으로도 불길한 저 눈을 파내고 싶었다.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기 직전 걸음을 멈춘 엘리엇은 금방이라도 놈에게 달려들고 싶은 난폭한 흥분을 감추느라 일부러 손으로 계단을 장식한 묵직한 나무 조각을 짚었다.
“여긴 네놈이 발을 들일 곳이 아니야. 아서 렌튼.”
성을 붙여 부르자 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미한 분노가 느껴졌다.
“아서 글래스턴이다. 돌아가신 친부의 성이지. 다시 찾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렸어.”
“내 알 바가 아니야. 내가 아는 건 네놈이 감히 순결한 영혼에 더러운 욕망을 품고 있다가 그 주제넘은 충동을 자제치 못하고 악마도 못 할 짓을 하려고 들었다는 점이지.”
“아직도 옛 기억에 사로잡혀 있군.”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이야.”
그를 향한 혐오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런데도 아서 렌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뻔뻔한 낯짝을 쳐들었다. 옛날 일을 꺼내는 엘리엇을 따분한 시선으로 봤다.
“그건 함정이었어.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 텐데?”
“함정? 네 추잡스러운 욕망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날카로운 반박에 아서 렌튼은 입매를 길게 늘어뜨렸다.
“맞아.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욕망을 품은 건 사실이지.”
“혓바닥 조심해. 당장에 뜯어내 버릴 수도 있으니.”
험악한 경고에 아서 렌튼은 입을 다물며 입매에 잔인한 미소를 그렸다. 엘리엇이 무슨 말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그는 계속 들고 있는 실크해트를 만지작댔다.
엘리엇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놈을 노려봤다. 언제든지 주먹을 내지를 수 있게 꾹 쥐었다.
‘다시 내려올 때 사냥용 엽총을 가지고 올 것을.’
내심 후회할 무렵 아서가 들고 있던 실크해트를 제 머리 위에 얹었다.
“좋은 날 소동을 피우고 싶진 않군. 이만 돌아가지. 대신 릴리벳에게 안부를 전해 줘. 결혼을 축하한다고 말이야.”
“네놈의 더러운 입에 그 이름 올리지 마! 그리고 네가 보낸 선물은 모조리 돌려보내겠다. 앞으론 내 장원에 발을 들이지 말았으면 좋겠어. 불길한 까마귀와 혼동한 내가 사냥용 엽총으로 네 심장을 꿰뚫어 버릴 테니.”
“선물의 주인은 따로 있을 텐데. 그녀라면 내 순수한 마음을 알아줄 거다.”
“더러운 놈. 릴리벳도 네 선물 따위는 바라지 않아.”
“설마. 네 거짓말이겠지.”
아서 렌튼은 사악한 마법을 부리는 악마처럼 릴리벳을 꿰뚫어 봤다. 방심할 수 없는 놈이었다. 엘리엇은 이를 갈았다.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릴리벳과의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겠다.”
“네놈에겐 그럴 기회가 없어.”
“그래?”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아서 렌튼이 엘리엇을 흘끔 봤다. 그가 돌아서면서 저벅저벅 구두 소리가 울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충실한 하인 콥스가 묵직한 현관문을 열었다.
휘우웅.
바람이 들이닥치면서 아서 렌튼의 검은 망토가 저주처럼 흔들렸다. 그것에서 묻어 나온 불길한 내음은 엘리엇에게 곧장 쏟아졌다. 그는 발끝까지 진저리 쳤다.
“다음엔 조금 더 따뜻한 환영을 기대하지.”
“닥쳐. 네놈과는 이것으로 영영 끝이야.”
음흉한 눈빛과 함께 놈은 바람에 실크해트가 날아가지 않도록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챙을 살짝 잡았다. 챙이 만들어 낸 그늘이 드리운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섬뜩한 감각이 엘리엇을 긴장시켰다.
“릴리벳에게 더러운 마음을 품었다면 포기하시지. 이제 그 애 옆에는 든든한 남편이 있어. 그리고 나도 여전히 있지.”
“그날, 상냥한 아가씨를 놀라게 한 일에 사과의 의미로 선물을 보냈을 뿐이야.”
“누가 그런 개소리를 믿겠어?”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다. 처음부터 난 네게 더럽고 간악무도한 놈이었으니까 말이야. 늘 미움을 받았으니 이젠 슬프지도 않군.”
“네놈은 슬픔과 같은 순수한 감정을 이해 못 하잖아!”
“나도 평범한 인간이다, 엘리엇 데일.”
그러면서 아서 렌튼은 “한때는.”이라고 작게 덧붙였다.
“인두겁을 쓴 악마겠지. 천애 고아를 거둬 살린 내 외숙부의 크나큰 은혜를 저버린 근본 모를 종자.”
그때 아서 렌튼의 눈빛이 설핏 날카로워졌다. 엘리엇은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얼음 칼날 같은 눈동자 안에 도사린 분노가 엘리엇이 혐오로 불태우는 분노만큼이나 선명했다.
“지금 내뱉은 말을 철회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다.”
“그럴 일은 없어.”
멍청한 악당처럼 진부하기 짝이 없는 대사를 읊은 아서 렌튼은 마치 귀족처럼 고아한 자세로 엘리엇을 노려봤다. 하지만 언쟁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서 렌튼은 곧장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걸음걸음마다 망토가 우아하게 흔들렸다. 넉넉한 망토를 두르고 있음에도 크고 단단한 체구가 돋보였다. 천한 출생과는 전혀 다른 우아한 면모가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다. 그건 어린 시절부터 변함없었다.
‘저 모습에 외숙부가 속으셨지. 사실은 구제 불능의 망나니인데.’
젠트리 계급인 데일 가문 출신인 엘리엇조차도 처음에는 저 남다른 우아함에 감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악마의 가식으로 보일 뿐이었다.
놈이 떠나 버린 후에야 뒤뜰에서 신혼부부의 마차가 출발 준비를 마쳤다. 혹시라도 놈과 마주치지 않도록 약간 기다렸다가 출발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작별 인사를 기다리고 있던 릴리벳이 마차 앞에서 엘리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놈은 쫓아냈어. 하지만 여기 나이트스톤 하우스는 놈과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신혼부부에게 그다지 좋진 않아. 빨리 떠나 버려.”
“오빠. 생각해 봤는데 아서 렌튼은 정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왔을지도 몰라.”
“상냥한 동생아. 그런 관대한 마음은 상대를 가려서 가져야 해. 아서 렌튼이 어떤 짓을 한 놈인지 잘 알잖아.”
“그건 미수에 그쳤어. 게다가 그 미수조차도 사실은….”
엘리엇은 윌리엄을 의식하며 릴리벳의 말을 막았다.
“그런 더러운 마음을 품었고 아직도 그걸 잊지 않은 것이 중요해. 그 작자는 네게 감히 사과와 함께 안부를 전하고 싶다는군. 어림도 없지.”
“그래도.”
“윌리엄. 내 여린 동생이 악마에게 동정을 낭비하는군. 얼른 신세계를 보여 주고 악마 따위는 잊어버리게 해.
“그러지.”
마차의 문을 연 윌리엄이 릴리벳의 손을 잡고 탑승을 도왔다. 그리고 자신도 훌쩍 올라탄 다음 릴리벳의 맞은편이 아닌 옆쪽으로 갔다. 남편의 자리였다.
문을 닫아 주기 위해 마차에 가까이 간 엘리엇은 마지막으로 동생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생기발랄한 장밋빛 뺨과 빛이 흐르는 금발, 그리고 새벽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를 보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날마다 편지를 써.”
“그럴게.”
마차 문을 닫자 릴리벳이 마차 창문을 통해 엘리엇을 내다봤다. 여행용 드레스로 갈아입은 그녀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들어 흔들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오빠, 아무래도 아서 렌튼은 정말로 선의로….”
이랴!
마부가 채찍으로 말 두 마리의 살찐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겼다. 동시에 신혼부부를 태우고 여행 가방을 잔뜩 실은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엘리엇은 릴리벳의 끝말을 듣지 못했다.
마부인 콥스가 두 사람과 가방을 기차역까지 실어 줄 터였다. 다른 짐은 여행 가방을 전문적으로 배달하는 사람들을 통해 처음으로 묵을 호텔까지 배달하기로 했다. 배달 준비를 위해 폴리벳 부인과 벳시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넓은 저택은 아직도 많은 손님과 하인으로 북적였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반쪽이 이젠 없기에, 엘리엇은 깊은 상실감을 느껴야 했다. 그 상실감을 반나절이나마 앞당긴 불한당을 향해 분노를 불태웠다.
두고 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놈은 대개 그렇듯이 말만 앞섰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쏜힐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이 나타나질 않았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인근 마을의 소문을 모아 온 벳시에 따르면 그놈이 엘리엇의 나이트스톤 하우스에 나타난 것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흥.”
엘리엇은 웃자란 장미 잎사귀를 전지가위로 삭둑 잘라 내면서 코웃음 쳤다. 아무리 생명력이 넘치는 싱싱한 가지일지라도 제 주제를 모르고 불쑥 튀어나오거나 아리따운 꽃망울을 이겨 먹으려고 들면 냉정하게 잘라 밑거름으로 뿌렸다. 가끔은 억센 줄기가 가윗날을 버티면서 반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엇이 두 손을 모아 힘을 꾹 주면 결국에는 제 자존심을 꺾고 흙바닥에 떨어질 뿐이었다.
아서 렌튼도 그와 비슷한 작업을 통해 이 저택 밖으로 내쫓겼다. 온몸에 시커먼 멍이 들고 핏물이 터지도록 두들겨 맞았어도 목숨은 부지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를 오랫동안 먹이고 재우고 길렀던 외숙부는 심지어 약간의 돈도 주었다.
“감히 그 뻔뻔한 낯짝을 내밀어?”
엘리엇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온실 속 꽃나무를 다듬었다. 전 같으면 약간의 동정심으로 물꽂이 했을지도 모르는 실한 가지들을 가차 없이 쳐 내고 그것들을 장화로 짓밟았다. 다시 살아나 들러붙지 않도록 자근자근 밟아 녹색 풀물이 스며 나왔다.
***
점점 날이 더워지기에 온실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그 틈으로 온실 앞 작은 화단 곁에 차와 다과를 준비한 폴리벳 부인이 엘리엇에게 신호를 보냈다.
“주인님.”
엘리엇은 장화를 신은 채로 온실을 나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윽한 향기가 일품인 홍차가 깨끗한 찻잔에 담겼다. 갓 구운 비스킷에 스콘 향기가 식욕을 자극했지만, 그보다 먼저 하얀 편지 봉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에 콥스가 우체국에 다녀왔습니다.”
“오.”
부드러운 필체는 틀림없이 릴리벳의 것이었다. 미리 준비한 종이칼을 든 엘리엇은 급하게 봉투를 갈랐다. 두 장 빽빽이 쓰인 편지를 읽으면서 차를 마셨다.
릴리벳의 편지를 읽는 일은 가장 즐거운 일과였다. 다음은 릴리벳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엘리엇의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은 여전히 영혼의 반쪽에게 할애하는 때였고 그것은 상실감을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대신 그리움과 그 아이의 안전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아가씨가 뭐라고 쓰셨어요?”
“호텔이 아주 이국적이고 멋지다는군. 황금과 대리석이 눈부셔서 밤에도 잠을 못 자겠대. 그리고 달콤한 과자와 과일 잼이 환상적이고. 가장 좋았던 건, 음… 오페라라는군. 가수의 노랫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고 해. 공연 후엔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강변의 야경이 특별했대. 윌리엄이 좋은 구경을 많이 시켜 주는 모양이야.”
“다행이에요. 무척 즐겁게 지내시는 것 같아요.”
“음. 같은 호텔에 묵은 투숙객 중에 신혼부부가 몇 쌍이 더 있어서 수다도 떨고 같이 쇼핑도 하고 서커스 구경도 갔다는군. 그중에 친구가 생긴 모양이야. 윌리엄도 그 남편과 죽이 잘 맞고 마침 다음 여행 목적지가 겹쳐서 같이 놀기로 했대.”
“다음엔 어디로 가신대요?”
“몬테로.”
그 말에 폴리벳 부인이 호기심 어린 눈을 번쩍 떴다.
“거긴 환상의 도시잖아요. 소설에 늘 나오곤 하는. 몬테로에 아가씨가 가시다니! 너무 멋져요.”
“범죄와 도박의 도시기도 하지. 구경할 것도 많지만 말이야. 나쁜 일도 많아.”
“하지만 윌리엄 님이 계시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분은 무려 로우드 남작 가문의 일원이시고 그만큼 대단한 부자이니까요. 게다가 늠름한 군인 출신이기도 하고요.”
폴리벳 부인은 자신이 몬테로에 간 것처럼 꿈같은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런 낭만적인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서 가다니요. 나중에 아가씨 오시면 꼭 자세한 얘기를 들어야겠어요.”
“현지에서 사귄 친구 부부와 함께 간다잖아.”
“그래도 호텔에서는 두 분만 오붓이 계실 거 아니에요? 저도 따라갈 걸 그랬어요! 아니, 그랬다가는 귀여운 아기님을 만나는 일이 늦어질지도 모르네요.”
호들갑을 떠는 폴리벳 부인 덕분에 엘리엇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결혼식 이후로 편안하게 웃은 건 처음이었다. 그 덕에 얼굴 근육이 약간 어색했다.
릴리벳의 편지는 몬테로에 도착하고도 이삼일 간격으로 이어졌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삼 일만 머무르기로 했다고 썼는데 이상하게 일주일이 지나서도 계속 몬테로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게다가 처음에는 맛난 음식, 화려한 공연장, 낯선 사람들과의 교류 등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내용이 가득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편지 내용이 빈약해지더니 나중에는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같은 부부와 외출했나 보군. 재미있는 곳이라 시간 가는 줄 몰랐대. 공연도 쇼핑도, 관광도 하지 않고 어딜 이렇게 가는 거지? 분명히 만나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뭘 하는지 모르겠어.”
“윌리엄 님은요?”
“윌리엄과 함께 말이야.”
“두 분이서 악당을 처치하거나 그러진 않으셨대요? 신분을 감추고 잠행하는 비운의 공주나 혹은 범죄 조직을 쫓는 왕실 수사대를 만나거나.”
“그런 일은 없어. 관광지에만 있으니까 말이야.”
낭만적인 사건을 기대하던 폴리벳 부인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자 엘리엇은 슬그머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몬테로는 낭만과 즐거움의 도시긴 하지만 한편으로 범죄와 불운의 도시기도 했다. 관광과 도박으로 살아가는 도시인만큼 외지에서 몰려드는 얼뜨기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고 때로는 범죄로 끌어들였다.
‘윌리엄이 그렇게 경망스럽지는 않을 텐데.’
우직하다 못해 약간 고지식한 남자였다. 보수적이어서 경박하고 별스러운 놀이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다. 오로지 릴리벳을 향한 사랑에만 목을 매는 남자였다. 거대한 영지를 소유한 집안답게 재산도 넉넉했고 군 생활을 한 만큼 충성스러운 성격이라 릴리벳을 배신할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숫총각이 아닐까 의심할 만큼 수줍음이 많았다.
릴리벳도 현명하고 똑똑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어 남매끼리만 의지해 온 덕에 어리광도 제대로 피워 보지 못하고 자랐다. 대신 그만큼 또래보다 어른스러웠다.
“별일 없겠지.”
폴리벳 부인처럼 몬테로의 야성적인 매력에 푹 빠진 나머지 편지 쓸 겨를도 없을 터였다. 이제 여행을 다닌 지도 한 달이나 지났으니 피곤하기도 할 터. 엘리엇은 두 사람을 믿고 그저 편지를 좀 쓰라는 안부 답장만 했다.
이후로 편지는 열흘이나 오지 않았다.
***
“콥스. 오늘 우체국에 갔다 와.”
벌써 답장 없는 편지를 세 번째 썼다. 왜 계속 몬테로에 있는지. 편지는 왜 쓰지 않는지. 혹시 다른 도시로 갔는지. 갔다면 빨리 알려 달라고 걱정을 못내 감추지 못한 내용의 편지를 받아 든 콥스는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그가 든 편지 안에는 이번에도 답장하지 않는다면 콥스를 몬테로의 호텔로 보낼 생각이라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우체국은 마을을 지나 기차역 근처에 있으므로 마차를 몰고서도 다녀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런데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돌아오는 콥스의 마차를 보고 엘리엇은 의아한 마음에 서재 창가를 떠나 현관으로 내려갔다.
“콥스가 돌아오는군.”
“그래요? 이상한 일이군요.”
청소하던 벳시와 그 아래 하녀들에게 여러 가지 지시하던 폴리벳 부인이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찡그렸다.
엘리엇은 직접 문을 열고 마차를 맞았다. 콥스가 탄 이륜마차 옆 좌석에는 가끔 저택을 방문하는 배달부가 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리.”
마차에서 내린 배달부는 우체국 마크가 선명한 모자를 살짝 들어서 인사했다. 그리곤 순록을 타고 다니며 선물을 뿌리는 성자의 주머니만큼이나 커다란 편지 가방을 열어 작은 봉투를 끄집어냈다.
“오다가 콥스를 만나 마차를 얻어 탔습니다. 특급 전보라서요.”
일반적인 편지 봉투보다 반쯤 작은 노란 봉투를 받아 든 순간 횡격막이 쑥 가라앉았다가 올라왔다. 휑한 바람이 한 주먹 크기의 위장 언저리를 휘감는 감각을 무시하고 얼른 특급 전보를 받아 뜯었다.
돈이 필요해. 호텔로 우편환을 보내 줘.
- 릴리
전혀 받으리라 상상하지 않았던 내용의 전보였다. 돈이 필요하다니? 왜? 하지만 릴리벳에게 일단 송금하는 것이 먼저였다.
콥스가 가지고 있는 편지를 도로 회수하고 다시 편지를 썼다. 그리고 함께 우체국으로 갔다. 우편환을 가장 빠른 수단으로 보내면서 전보도 쳤다.
무슨 일이야? 무사하니? 돈은 넉넉하게 보낸다. 답장해.
- 엘리엇
며칠 후 짧은 답장이 왔다. 하지만 엘리엇이 감내해야 했던 충격의 시간은 전혀 짧지 않았다.
몬테로에서 사귄 친구 부부가 알고 보니 못 말리는 도박 중독이었다. 그들은 릴리벳 부부에게 돈을 빌리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도박에서 손을 떼라고 말리는 윌리엄을 꼬드겨서 도박장에 데리고 갔다. 그들이 얼마나 허망하게 인생과 돈을 낭비하는지 증명하려고 했던 윌리엄은 부추김과 자극에 속아 도박에 빠져들었고 그건 릴리벳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제 막 도박을 시작한 둘은 전문 도박꾼의 먹이가 되었으며 금세 가진 돈을 다 잃었다. 윌리엄은 자기가 가진 저금을 급하게 다 빼서 썼고 그것도 모자라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문은 영지와 가문 소유의 성을 보수하느라 현금을 써 버려 다음 영지 수확이 돌아오기 전에는 자금을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둘은 엘리엇에게 도움을 요청한 터였다.
“이런 망할 녀석들.”
화를 내기도 전에 편지엔 또 돈을 보내라는 황당한 추신이 붙은 걸 보고 어이가 날아갔다. 엘리엇은 분노에 차서 동생 부부를 탓하는 편지를 쓰고 우편환을 보냈다.
동생의 결혼 때문에 현금을 소진한 건 엘리엇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당장 몬테로로 가서 두 사람을 데리고 오고 싶지만, 지금은 나이트스톤을 비울 수 없었다.
“젠장. 하필 이런 때에.”
한창 농번기였다. 대단한 장원은 토지관리인이 따로 있어서 지주는 그저 보고만 받으면 되지만, 나이트스톤은 아주 대단한 규모는 아니어서 지주인 엘리엇이 직접 토지를 관리하고 소작인을 상대했다. 덕분에 날마다 엘리엇은 장원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결혼식을 치르느라 저금이 바닥났기 때문에 이번 농번기에 장원에 소홀했다가 수확량이 줄어들기라도 하면 더욱 곤란해졌다.
하는 수 없이 콥스를 보내 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살펴보고 직접 전보를 치라고 지시했다.
“당장 현금부터 확보해야 해.”
혹시 납치라도 당해서 몸값을 요구한다면 엘리엇은 당장 보낼 돈이 없었다. 그렇기에 콥스가 나이트스톤을 떠나자마자 엘리엇은 곧바로 은행을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데일 씨.”
마차를 타고 가까운 도시에 있는 은행을 찾자 미리 약속을 잡았던 대로 은행장이 엘리엇을 맞았다. 지주들만 이용하는 좋은 접객실에 들어간 엘리엇은 안부 인사가 끝나자마자 용건을 꺼냈다.
“대출을 부탁하네.”
“담보 대출 말입니까?”
은행장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비서에게 장부를 가져오게 시켰다. 대출을 청했을 때 바로 흔쾌히 얼마가 필요하냐며 대출 서류를 꺼내던 평소와는 다른 태도였다. 비서는 곧 가죽 장정으로 된 대출 장부를 가져왔다. 동그란 안경을 코에 걸친 은행장은 엘리엇의 은행 거래 기록을 찾더니 다시 한번 시름 어린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왜 그러나?”
“얼마 전에 은행 대출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얘길 듣지 못했는데.”
“극히 최근이라 곧 거래처에 안내 편지를 발송할 예정이었습니다.”
가죽 의자에 마주 앉은 은행장을 못마땅한 눈길로 보자 은행장은 안경을 벗어 손수건을 닦았다. 뭔가 말을 고르는 기색이었다. 다시 안경을 코에 얹은 그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저희 은행의 본점은 수도 로드니아에 있습니다. 로드니아 본점은 누구 한 명의 소유가 아니라 많은 출자금을 댄 주주들의 소유입니다.”
최근에 생긴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엘리엇이 모른다고 억측한 은행장은 쓸데없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건 잘 안다고 말하는 대신 엘리엇은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뒤에 그저 가만히 들었다.
“주주 중에 어떤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대규모 투자를 하시면서 대출 조건 조정을 안건으로 상정했고 얼마 전에 통과되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담보 대출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졌습니다. 그 새로운 기준에 따르면 데일 씨는 추가 대출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내가 나이트스톤의 주인인데도 말인가?”
나이트스톤은 일대에서 대단히 정평이 난 흑자 장원이었다. 릴리벳의 결혼을 앞두고 급하게 온실을 수리하고 대규모 현금을 소비하지 않았다면 대출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것도 당장 돌아오는 수확 철만 지나면 금방 갚을 수 있었다. 대출한 이유는 집안에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자잘한 보석이며 소장품을 처분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전부 돌아가신 외숙부와 어머니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이었다. 현재는 소장품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가 가을에 갚기로 되어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신용이 좋기 때문에 추가 이자를 치르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대출은 불가능합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혹시 담보를 더 내놓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됐네.”
기분 나빠진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라리 콥스가 동생 내외를 빨리 데려오는 쪽이 나을지도 몰랐다. 엘리엇이 화를 내자 당황한 은행장은 일어서며 부탁하지도 않은 조언을 늘어놓았다.
“혹시 급하시면 은행이 아니라 다른 분에게 사적으로 대출을 하는 건 어떠십니까? 제가 소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 돈을 빌리란 말인가? 자네는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건가.”
더욱 화를 내자 은행장은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엘리엇은 그의 배웅을 마다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며칠 뒤 릴리벳이 아닌 콥스가 전보를 보냈다. 내용은 본 엘리엇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작은 아씨와 남편분이 거금을 탕진하셨고, 그걸 갚지 못해 호텔에 감금되셨습니다.
돈을 보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콥스가 말한 금액은 반년 치 장원 운영 자금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당장 보석과 그림을 처분하면 마련할 순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멍청이들!”
엘리엇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농번기고 뭐고 당장 몬테로로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은행이 먼저였다.
전에 갔던 주거래 은행이 아닌 다른 은행에 들렀다. 하지만 도시 내에 있는 은행은 전부 대출을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대출 기준이 엄격해졌다는 이유였다. 옆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로드니아까지 갈 순 없으므로 엘리엇은 이를 벅벅 갈며 결국 주거래 은행을 다시 찾았다.
“여전히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으신가요?”
은행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에 화를 내고 갔지만 그럴 줄 알았다거나 제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은행에 갔다가 거부당해서 우습다는 태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정중했기에 엘리엇은 약간 안도했다.
“그렇게 됐네. 요즘 은행들이 아주 수전노가 되었구먼.”
“어쩔 수 없습니다. 워낙 부실 채권이 많아져서요.”
그러면서 은행장은 인명부를 뒤져 쪽지에 뭔가를 썼다.
“전에 말씀드린 개인 대부업을 하는 분입니다. 은행보다 이자율이 높긴 하지만 악독스러운 정도는 아닙니다. 수년간 많은 분이 문제없이 도움을 받으셨기 때문에 데일 씨도 믿으실 수 있을 겁니다.”
쪽지를 받아 든 엘리엇은 그에 쓰인 이름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안에 적힌 이름은 쏜힐의 아서 글래스턴, 즉 아서 렌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