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8)

2. 쏜힐

집으로 돌아와 화를 삼켰다. 은행장이 덧붙인 설명에 분이 배가 되었다.

‘글래스턴 씨가 바로 그 은행 대주주입니다. 원래 로드니아를 중심으로 활동하셨는데 최근 인근 쏜힐로 이주하셨지요. 대단한 거물인 만큼 옹졸한 성격은 아니니 가서 사정을 설명하면 무이자로 현금을 빌려주실지도 모릅니다.’

“옹졸하지 않아서 대출 조건을 빡빡하게 조인 건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심기가 매우 불편한 주인 덕분에 나이트스톤 장원은 전에 없이 고요했다. 뇌조 울음이 들렸고 바람이 불면서 멀리 나뭇가지가 서로를 두들기는 스산한 소리도 이어졌다.

“벳시. 치즈를 만들게 염소젖을 가져와.”

“네, 폴리넷 부인.”

폴리넷 부인에게 받은 지시를 벳시가 다른 하녀에게 전달했다. 헛간을 오고 가며 젖소나 염소의 젖을 짜는 헛간 전담 하녀였다. 젖을 담을 나무통을 들고 헛간으로 가는 사이 저쪽에선 마부가 마차를 수리 중이었다. 그 곁을 여름 동안 고용한 정원사가 차지했다. 그는 연장을 다듬고 있었다.

장원에는 많은 일꾼이 있었다. 그들에게 주급을 주어야 했다. 아직 금고에 당장 쓸 현금이 있었고 주급 지급에는 문제없었다. 큰 지출만 없으면 가을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급전 요청

이젠 글자도 몇 토막 안 되는 전보가 도착했다. 마침 전후 사정을 적은 콥스의 편지도 도착했다.

윌리엄과 릴리벳은 가산을 탕진한 일을 후회하고 당장 몬테로를 뜨고 싶지만, 그들을 속여 돈을 뜯은 사기꾼 일당이 당장 돈을 내놓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은 단순한 노름꾼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악독한 집단이었다.

알고 보니 윌리엄과 릴리벳에게 친근하게 굴었던 부부도 그들과 한패였다. 그들이 아무리 청렴하고 도박에 눈을 돌리지 않았대도 결국엔 어떤 일이든 당했을 거라고 콥스가 동생 부부를 두둔했다.

“릴리벳!”

동생을 향한 원망보다 걱정이 한층 앞섰다.

“차라리 유품을 팔 걸 그랬나.”

지금은 그걸 살 사람을 구하기도 빠듯했다. 혹시나 릴리벳에게 몹쓸 짓을 할까 두려워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로우드 가에 도움을 요청할까?’

엘리엇은 내내 고심했다. 윌리엄의 대고모인 로우드 남작 부인은 대단한 자산가였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윌리엄을 받아들여 양자로 여기고 기른 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엄격한 성정으로도 유명해서 조금이라도 체면을 구길 일을 한다면 용서치 않을 사람이었다.

“릴리벳이 그분에게 미움을 받게 할 순 없지.”

아마도 윌리엄도 그 때문에 거부인 로우드 남작 부인이 아닌 엘리엇에게 급전을 기대고 있을 터였다.

콥스가 보낸 소식에 따르면 마지막 잔금만 치르면 그 악당들이 순순히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우편환만 도착하면 바로 호텔을 나갈 수 있도록 짐도 다 꾸렸다. 문제는 엘리엇이 언제 우편환을 보내느냐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군.”

서재를 나선 엘리엇은 폴리벳 부인에게 말을 준비하라고 했다. 승마복을 겸하는 외출복을 입고 현관을 나섰을 때는 마부가 엘리엇의 애마에 안장과 고삐를 채운 후였다. 채찍을 넘겨받으며 동시에 말에 올라탔다.

“늦을지도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알아서 끼니를 챙기도록.”

“어디 가십니까?”

“가시나무 성.”

폴리벳 부인에게 툭 뱉은 다음에 엘리엇은 말의 배를 찼다. 살찐 말은 빠른 속도로 길을 내달렸다.

쏜힐로 가는 길은 나이트스톤 장원과 같은 들판과 같은 주변 산맥, 같은 하늘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한층 어둡고 거칠었다. 쏜힐 주변을 휘감고 있는 가시나무의 잔해 덕분이었다.

처음 쏜힐을 지은 주인은 누구인지 몰라도 어지간히 편집적이고 비밀스러운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병처럼 심어 댄 가시나무 덩굴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주변을 완전히 뒤덮었고, 하얗게 죽었다가 다시 잎사귀를 펴고 가시를 뻗고 다시 죽고를 반복하면서 얼기설기 엮인 가시 성채의 근간을 이루었다.

위로 휘감아 올라가는 가시나무를 피해서 언덕 끝 저택까지 올라가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엘리엇은 그 거친 돌길을 따라 말을 달렸다.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는 멀리 기차역의 어렴풋한 실루엣까지 내려다보였다. 밝은 빛이 비치는 엘리엇의 장원도 한눈에 들어왔다.

엘리엇의 장원 인근에는 검은 돌이 흔했고 그걸로 농지를 가르는 담벼락을 축조했기 때문에 나이트스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검은 토양에 싱그러운 풀이 잘 자랐고 가까운 개울과 실개천이 이어져 나이트스톤에서 자라는 농작물과 과실나무에 넉넉한 수분을 제공했다. 아주 좋은 땅이었다.

그에 비하면 돌무지로 이루어진 쏜힐은 위용만 대단할 뿐 퍼석퍼석한 땅이라 가시나무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자라는 작물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여기에 들어와도 곧 파산을 면치 못했는데, 이번 주인은 더럽게도 돈 놀음을 하는 작자라 오래갈 듯싶었다.

묵직한 황동 대문 앞에 서자 제 주인만큼이나 거친 낯짝을 한 문지기가 나타났다.

“약속하셨습니까?”

“아니. 하지만 내 이름을 주인에게 전해 주게. 나이트스톤에서 온 엘리엇 데일이라고 하네.”

“아, 미리 분부를 들었습지요.”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문지기는 안에 기별을 넣는 대신 흔쾌히 문을 열었다. 마치 엘리엇의 방문을 예상한 것 같았다.

불쾌감이 물씬 들어서 엘리엇은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먼 곳에서 추악한 손길에 벌벌 떨고 있을 릴리벳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대문을 지나고서 정원에 들어서도 길은 가팔랐다. 언덕보다는 좀 고른 흰 조약돌로 이루어진 길 주변엔 나름대로 꽃과 관목을 가져다 심었다. 하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멋대로 가져다 심은 꽃은 반쯤 죽었고 관목은 시들시들했다. 괜한 짓으로 음산함만 더했다.

“취향 한번 고약하군.”

채 교양을 쌓지 못한 채로 돈만 모은 신흥 부자들이 흔히 저지르곤 하는 짓이었다. 깊은 조예가 없이 겉모습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려다 더 우스꽝스러워지는 걸, 그들은 도통 몰랐다. 아서 렌튼도 마찬가지였다.

현관에 도착하자 제복을 입은 남자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엘리엇을 맞았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나타난 마부에게 말을 맡기면서 엘리엇은 하인에게 말했다.

“아서 렌튼에게 내가 왔다고 전하게.”

“아서 렌튼이라는 분은 안 계십니다만.”

토를 다는 태도가 거슬렸지만,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쪽은 엘리엇이었으므로 호칭을 정정했다.

“글래스턴, 아서 글래스턴. 네 주인에게 내 도착을 알려 주겠나?”

역겹지만 싱긋 웃음까지 더했다. 하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열린 문 옆으로 비켜섰다. 하인이 계단을 올라가 제 주인을 부르러 간 사이 엘리엇은 모자를 벗고 그 안에 장갑을 넣었다. 승마용 채찍을 겨드랑이에 낀 다음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가시나무 성은 조롱을 담은 별칭이었다. 그래도 쏜힐의 규모만큼은 실제로 성에 가까웠다. 화려한 레이스와 황금 장식이 가득한 왕궁이 아니라 씁쓸하고 매캐한 역사가 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요새용 성의 웅장함은 대단했다.

은행장이 쏜힐의 현 주인을 넉넉한 인심을 가진 괜찮은 사람이라 평했어도, 그의 본성을 아는 엘리엇은 집 안에서 한 치의 여유로움도 찾을 수가 없었다.

꽤 고급스러운 재질이지만 금방이라도 정신병에 걸릴 것 같은 묵직한 회색과 진녹색의 벽지. 광택은 살아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기운을 발하는 황동 장식물들. 하나같이 음울한 빛깔의 초상화들.

오래 묵은 돌바닥에는 구두를 보호하기 위한 카펫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걷지 않으면 밤마다 하인의 발걸음이 잠을 방해할 터였다. 그 전에 몹시도 삭막하고 딱딱한 성채의 분위기에 눌려 악몽을 꾸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겠지만.

“올라오시라고 합니다.”

하인이 다시 나타나 엘리엇을 안내했다. 직접 내려와서 맞는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아 내심 모욕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제 방문을 예상하였단 점에서 아서 렌튼은 엘리엇을 괴롭히는 문제를 익히 알고 있을 가능성도 컸다. 돌아갈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여기서 꽁무니를 빼고 도망갔다는 조롱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아서 렌튼과 대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충돌했다.

결론이 나기 전 목적한 방에 도착했다.

“주인님, 데일 씨를 모셨습니다.”

모셨다는 말을 할 만큼 정중한 대접을 받진 않았다. 심지어 하인은 엘리엇의 물건을 받아 현관 옆 외투용 벽장에 넣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엘리엇은 아직도 모자와 채찍을 스스로 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재가 나왔다. 바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심각하게 빈약한 실내 장식과 함께 깊은 빛깔을 간직한 장서와 책장, 그리고 깨끗한 의자 몇 개가 보였다.

책장을 등지고 앉는 책상 위에는 온갖 종이와 편지, 가죽 장정을 한 장부가 쌓여 있었고, 조금 전까지도 뭔가 일을 했는지 잉크 냄새가 가득했다. 그 자리에 주인은 없었다.

타닥. 타닥.

불타는 장작이 부러지면서 불티를 날렸다. 책상 반대편에 오래된 벽난로가 있었다. 황동으로 장식하고 먼지가 때처럼 달라붙은 붉은 벽돌 난로 옆에는 잘게 쪼갠 장작이 담긴 통이 있었다. 그 옆, 그러니까 벽난로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불쏘시개로 땔감을 뒤적이는 남자의 굽은 등이 보였다.

무릎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다리를 바짝 접었어도 커다란 체구가 작아 보이진 않았다. 도리어 떡 벌어진 어깨가 벽난로 전체를 가린 덕분에 더 커 보였다.

엘리엇이 도착했음을 분명히 알 텐데도 그는 일어나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계절도 아닌데 벽난로를 피우는 일도 상당히 수상했다. 몸짓으로 봐서 벽난로에 뭔가를 태우는 중이었고, 코끝에 걸리는 냄새로 봐서는 종이였다.

‘비겁한 거래에 사용된 문서인가 보군.’

대단한 범죄의 증거를 인멸하는 중은 아닐까? 품위를 생각하는 젠트리 출신 신사로서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옆으로 한 발짝 걸어 그가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 엿보았다.

“오래된 채권 문서다. 채권자가 다 갚았거나 더는 갚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아서 렌튼이 설명했다. 엘리엇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갚을 필요가 없다니?”

“죽었거든. 채권자가. 그래서 남은 재산을 몰수했다.”

어떻게 죽었는지 반사적으로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연사든 사고사든 혹은 살해되었든, 엘리엇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들어서 좋은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다 태운 다음에야 아서 렌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주에나 올 줄 알았는데.”

엘리엇은 눈에 힘을 주고 그 작자를 노려봤다.

“어떻게 내가 찾아올 것을 알았지? 혹시 내 뒷조사라도 했나?”

“아니. 매주 두 번씩 은행장을 만나거든.”

“은행장, 입이 무거운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훨씬 경박한 작자였군.”

그러니 아서 렌튼을 소개해 주었을 테지만. 못마땅한 속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아서 렌튼은 살짝 코웃음을 쳤다. 상의 없이 셔츠와 조끼를 걸친 놈이 어깨를 으쓱했다. 천민들처럼 천박한 태도였다.

“은행장은 그저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야. 내 이웃이 곤란한 지경에 있는 것 같으니 언젠가 찾아가더라도 잘 대해 주라고.”

“그런 말을 해 봤자 뒷말을 흘리고 다닌 건 변하지 않아.”

“그래서? 용건은?”

“그건 친절한 은행장에게 듣지 못했나?”

“사생활까지 재잘댈 이유가 없잖아.”

동생 부부의 도박 빚 때문에 대출을 원한다는 이유를 애초에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은행장이 모르니 아서 렌튼도 모를 수밖에. 다행이었다. 편리하게도 채권자가 죽어서 재산을 압류하고 채권을 태우는 악독한 대부업자에게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돈을 빌렸다가 도리어 더 곤란해질 가능성이 컸고 또 협박당할 수도 있었다. 하필 악덕대부업자가 바로 아서 렌튼이라면 더더욱.

“아니, 내가 잘못 찾아온 것 같군.”

엘리엇은 장갑을 끼고 모자를 썼다. 처음부터 유물과 그림 몇 점을 처분하면 되는 일이었다. 괜히 여기까지 와서 이럴 필요는 없었다.

“그래? 아는 사이라 저금리를 생각했건만. 돌아가신 내 양부께 뒤늦은 감사의 표시로 말이야. 나이트스톤이 제삼자의 손에 넘어가는 건 아쉽잖아.”

“네 더러운 입에 외숙부를 올리지 마. 그리고 나이트스톤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일은 없어.”

기분 나쁜 나머지 엘리엇은 신경질적으로 따졌다.

“그럼 왜 여러 은행을 찾아다니며 대출을 알아보는 거지?”

“네 알 바가 아니야.”

아서 렌튼도 과히 즐겁진 않은지 움찔거리는 손을 교차시켜 양 겨드랑이에 꼈다. 팔짱을 낀 것도 안 낀 것도 아닌 자세는 유달리 발달한 팔 근육을 강조했다.

“그냥 내가 싫은 거군.”

“오호. 드디어 알아챘군.”

빈정거리자 아서 렌튼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처음부터 너는 날 이유 없이 더러운 종자 취급했지. 아직도 여전하군.”

“있는 그대로 취급했을 뿐.”

“나도 괜찮은 가문 출신인데.”

“그래 봤자 사생아잖아.”

엘리엇이 핵심을 찌르자 아서 렌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글래스턴이라고 했나? 드디어 외숙부의 자식이 아님이 증명돼서 기쁘군.”

“처음부터 아니라고 했어.”

“아니라고? 건방진 태도로 작은 주인 행세를 하지 않았나. 나와 내 동생에게 말이야.”

“그건….”

“부모를 잃은 가여운 아이들에겐 동정과 자비를 베푸는 거야. 너처럼 주제넘은 텃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사과했을 텐데.”

“내가 흠씬 두들겨 팼으니 마지못해서 한 거지.”

그에 아서 렌튼은 콧방귀를 뀌었다.

“기억이 왜곡되었군. 넌 그저 내 정강이를 한 번 찼을 뿐이야.”

“그래? 그럼 외숙부에게 그날의 일을 들켜 몽둥이로 온몸을 두들겨 맞은 일도 내 기억의 왜곡인가?”

순간 셔츠로도 가리지 못한 남자의 굵은 근육이 꿈틀거렸다. 긴 다리가 금방이라도 움직일 태세였지만, 그는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에 엘리엇을 노려보는 시선에 험악함이 실렸다.

“그건 함정이었어.”

“그렇다고 한들 네가 품은 음흉하고 더러운 욕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넌 순결한 릴리벳을 더럽히려고 했어!”

못 참겠는지 아서 렌튼은 반 발짝 앞섰다. 동시에 엘리엇은 반보 물러났다. 그와의 주먹다짐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여긴 놈의 소굴이었고, 하인들은 저놈의 말만 들을 터였다. 사실상 일대일이 아니라 다대일이었고 그걸 강력하게 의식했다.

채찍을 검처럼 쥐고 놈에게 끝을 겨누었다.

“여기 찾아온 내가 어리석었어. 넌 여전히 개자식이고 역겨워.”

거침없는 욕설에 아서 렌튼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그는 흡사 흡혈귀 같은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비열하게 웃었다.

“마지막 인내를 발휘하지. 지금 용건을 얘기한다면 이자는 받지 않겠어. 하지만 다음에 찾아온다면 그때는 아주 혹독한 값을 치러야 할 거야.”

“네가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엘리엇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놈이 등을 습격할지도 몰라 긴장했지만, 문을 열고 현관으로 나오기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주인만큼이나 비열해 보이는 하인이 현관까지 나왔다.

“말을 준비하도록.”

모자를 쓰고 장갑을 도로 끼면서 엘리엇은 바로 집 밖으로 나갔다. 말에 무슨 짓을 하진 않았는지 애마는 기분 좋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올라타서 여기 올 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쏜힐을 내려가는 길이 구불구불한 덕분에 어떤 구간에서는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성채가 보였다.

2층.

서재로 추정되는 창문에 하얀 셔츠를 입은 놈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 떨어져서까지도 따갑게 따라붙는 시선에 새삼스러운 소름이 돋았다.

당장 내다팔 유물과 그림을 구분해 중개상에게 맡겼다. 다소 값을 덜 받아도 괜찮다는 조건을 덧붙이면서 속이 조금 쓰렸다. 더불어 되팔 때는 반드시 자신에게 구매 의사를 물어보라는 사항을 달았다. 급한 연락을 받고 나이트스톤을 찾은 중개상은 엘리엇이 내놓은 도자기와 그림, 유서 깊은 가구를 보더니 되물었다.

“구매자 신분은 어느 쪽이든 괜찮으십니까?”

“되도록 우리 가문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쪽이 좋겠군. 너무 지체 높은 가문은 상대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이제 막 돈을 끌어모은 천박한 자들은 이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대할 테니까 말이야.”

“가격이 저렴해도 다른 조건이 붙어서 판매처를 구하기는 쉽지 않겠군요.”

“이 고장 근처가 아니라도 좋네. 도시에서 알아보게. 운송비는 내가 어느 정도 부담하겠네.”

“그런 조건이라면 쉽지요. 알겠습니다. 로드니아 타운 하우스를 고풍스러운 컨트리풍으로 꾸미길 원하는 분들께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중개상은 좋은 건수를 잡아 기분이 좋은지 웃음이 확연한 얼굴로 인사하고 사라졌다.

삼 일이 지나서 중개상에게 특급 전보가 왔다. 로드니아를 거점으로 부를 쌓은 어느 신사가 엘리엇이 내놓은 물건을 모조리 사겠다고 했다. 물품의 가치를 알기에 좋은 가격을 제시했을뿐더러 배달도 본인이 직접 알아서 하겠다고 해서 엘리엣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당장 거래를 하겠다고 했다. 신사 쪽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이틀 뒤, 보낼 물건을 하얀 천으로 감고 상자에 넣어서 준비하는 사이 포장을 씌운 짐마차가 도착했다. 마부석에는 마부와 함께 중개상이 타고 있었다.

“중개상이 도착했군요.”

폴리벳 부인이 벳시를 시켜서 그를 맞이하게 했다. 그사이 다른 하인들이 물건을 현관까지 옮겼다. 혹시나 운반 도중에 소중한 물건이 상하거나 뭔가 빠졌을까 엘리엇도 내려와서 과정을 지켜보았다.

“데일 씨.”

“어서 오시오. 제시간에 딱 도착했군.”

중개상이 들어오며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엘리엇은 좋은 낯으로 그를 맞았다. 하지만 중개상을 따라 들어오는 인물을 보고 미소를 거뒀다.

“이쪽은 구매하신 신사분이 보낸 사람입니다. 이 물건을 신사분의 별장까지 옮길 겁니다. 마침 이 근처더군요.”

중개상의 소개에 고개를 꾸벅 숙이는 사람은 쏜힐에서 본 그 무례한 하인이었다.

“길퍼드.”

곁에 선 벳시가 멍하게 말했다. 그녀는 번뜩 정신을 차리더니 제 직속 상관인 폴리벳 부인에게 큰 소리로 속삭였다.

“쏜힐에서 일하는 길퍼드 씨에요. 전에 아가씨 선물도 저 사람이 가져왔어요.”

“나도 기억해.”

폴리벳 부인도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엘리엇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 그녀는 두 손을 맞잡으며 안절부절못했다. 막 물건을 옮기던 하인들이 말없이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엘리엇이 무언가 지시하기를 기다렸다.

“아시는 분입니까? 잘되었군요! 어쩐지 굉장히 후한 값을 쳐주시기에 의아했는데 이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정말로 사정을 모르는 중개인이 어색할 만큼 발랄한 말투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엘리엇의 반응을 보고 거래가 무산될 걸 걱정했다. 그건 정확한 예측이었다.

“이 거래는 없는 것으로 하지.”

“안 됩니다. 이미 중개료와 대금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중개상은 급하게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수표를 내보였다. 그중 두툼한 쪽을 급하게 엘리엇에게 건네면서 “이 정도 좋은 값은 받지 못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아니. 이 거래는 못 해.”

단호한 거절과 함께 수표를 외면했다. 중개상이 당황하는 사이 길퍼드라는 작자가 준비된 물건에 손을 댔다.

“어딜 손대는 거야.”

“거래서에 서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젠 이것들은 제 주인이신 글래스턴 씨의 소유입니다.”

“판매하지 않겠다고 했어.”

“공증을 받은 거래 문서가 있는 한 제 주인의 동의 없이 거래 중지는 불가능합니다. 그렇지요?”

그러면서 길퍼드는 중개상을 봤다. 창백해진 중개상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끝난 거랩니다. 여기서 물건을 내주지 않으면 불법이에요.”

“내 물건이네!”

엘리엇이 버럭 화를 내자 길퍼드라는 놈이 코웃음 쳤다.

“제 주인님의 소유입니다.”

“만약 거래 파기를 원하신다면 데일 씨가 직접 구매자분을 만나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구매자분, 구매자분. 혹시 그놈이 내게 이름을 알리지 않고 거래하기를 원했나?”

핵심을 찔렀는지 중개인이 찔끔 놀랐다. 그걸 본 엘리엇은 분노에 시야가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당장 놈을 만나겠어.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내 물건에 손대지 마.”

엘리엇은 상의를 입지 않은 채로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부에게 당장 말을 준비하라고 호통치면서 마구간으로 갔다. 말에 안장과 고삐를 간신히 걸자마자 바로 쏜힐로 향했다.

두 번째기에 똑똑한 말이 길을 기억했는지 곧바로 가시나무 성을 향해 내달렸다. 가파른 언덕을 다 올라왔을 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투레질했다. 재빠른 문지기가 얼른 문을 열었고 뒤이어 애마는 성채 바로 밑까지 질주했다.

“이 망할 자식! 당장 나와!”

하인이 채 현관문을 다 열기도 전에 엘리엇은 문을 밀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놀라서 말리는 하인을 뿌리치고 놈의 서재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숨이 턱까지 찼지만, 몸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극심한 분노 때문이었다.

쾅!

서재 문을 요란하게 박차자마자 놈이 보였다. 그는 전과 달리 책상에 앉아 뭔가 쓰는 중이었다.

“아서 렌튼!”

“아주 무례한 등장이시군.”

두꺼운 장부에 뭐라고 쓴 뒤에 턱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장부를 덮은 그는 덩달아 따라온 하인에게 턱짓했다. 하인이 문을 닫고 사라짐과 동시에 엘리엇은 책상 위로 두 손을 뻗어 놈의 멱살을 쥐었다.

“개자식,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내 집에 들이닥쳐서 무슨 짓이지?”

제 셔츠를 틀어잡은 손을 확 뿌리치며 아서 렌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이름은 아서 글래스턴이다. 이젠 렌튼이 아니야.”

“글래스턴이든 렌튼이든 혹은 악마의 자식이든 내 알 바 아니야. 그저 네가 내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야!”

“훼방이라니. 난 내 재력과 권리를 행사했을 뿐인데.”

“뻔뻔한 자식! 너는 그 물건에 권리가 없어. 권리는 돈으로 사들이는 게 아니야. 네놈같이 근본 없는 놈은 모르겠지만.”

“그건 내 양부의 물건이야. 추억이 깃든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 뭐가 잘못된 거지?”

“알량한 개소리 집어치워!”

흥분한 엘리엇은 주먹을 꾹 쥐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네놈 따위가 내 인생에 끼어드는 일 자체가 치욕이야. 주제넘은 짓 하지 말고 네 분수에 맞게 흉악하고 더러운 가시나무 성이나 끌어안고 박쥐처럼 살아!”

책상 뒤에 서 있던 아서 렌튼이 성큼성큼 돌아 나왔다.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을 할 것처럼 엘리엇에게 바짝 다가섰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엘리엇도 놈의 면상을 박살 낼 의지가 만만했다. 놈에게 뒤질세라 고개를 바짝 쳐들면서 사납게 노려봤다.

머리 반쯤은 더 큰 아서 렌튼이 어금니를 바짝바짝 가는 것이 엘리엇의 시야에 넉넉하게 들어왔다. 꿈틀거리는 턱관절은 마치 날고기를 뼈째 씹어 먹는 늑대 같았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엘리엇은 놈의 그런 거친 면모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도리어 인간의 존엄을 이해하지 못하는 천한 짐승에겐 호된 매질을 할 준비가 되었다.

“아서 렌튼. 네놈은 축축한 퇴비에서 기생하는 곰팡이 같은 놈이야. 우연히 기회를 만나 버섯이라도 피웠지만, 그래 봤자 온실 정원에 있기엔 썩은 종자지. 그러니 내 인생에서 꺼져.”

검지로 놈의 가슴을 꾹꾹 찌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손가락 끝에 닿은 거대하고 딱딱한 흉근이 불끈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 또한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육탄전에는 엘리엇도 자신 있었다. 정원 일을 허투루 한 건 아니었다. 늘씬한 몸은 실상 꽤 다부져서 아서 렌튼에게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래? 그렇다면 더러운 퇴비에서 자란 놈답게 더럽게 나가야겠군.”

“본색을 감춘 적도 없잖아.”

“네 동생 부부, 지금 몬테로에 있지?”

순간 머릿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용납할 수 없다. 의식하기도 전에 주먹이 놈의 면상으로 날아갔다.

퍽!

재차 팔을 휘두르려는 찰나,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한 아서 렌튼은 재빠르게 엘리엇의 손목을 낚아챘다. 사람에게는 주먹이 둘이었고 엘리엇은 그 점을 잊지 않았다.

턱!

다른 쪽도 놈의 손아귀에 잡혔다. 발길질을 하려는 찰나 놈이 무식한 힘으로 밀어붙였다. 균형을 잃고 딱딱한 마룻바닥으로 쓰러졌다.

쿠당!

제 몸 위로 상대의 육중한 몸까지 고스란히 겹쳤기에 상상 이상의 충격이 들이닥쳤다. 그 덕에 뒤통수를 바닥에 크게 찧었으며 가슴이 짓눌렸다. 고통이 가시기 전에 곧 숨이 막혔다. 엘리엇 위에 쓰러지면서 충격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놈은 몸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두 손으로 엘리엇의 손목을 찍어 눌렀다. 무릎으로 버둥거리는 엘리엇의 허벅지 안쪽 급소에 무거운 체중을 실어 다리 전체를 봉쇄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놔, 더러운 새끼야.”

“네 비비 꼬인 성격이 만들어 낸 부당한 혐오와 모욕을 어디까지 견뎌야 하는 거지?”

“네가 발을 들여선 안 되는 곳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으면 이럴 일은 없어.”

“거긴 내 고향이야. 난 나이트스톤에서 자랐어.”

“근본 없는 사생아 주제에. 여기가 고향이 맞긴 맞아? 로드니아의 매음굴이 아니고?”

놈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가 다시 시뻘게졌다. 짙은 색깔의 피부에도 충격과 분노의 그림자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엘리엇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사탄에게도 저주받을 네 빨간 혓바닥을 뽑아 버리기 전에 입 닥쳐.”

“내 동생 이름을 또다시 입에 올린다면 그때는 더한 말도 해 주지.”

“그래? 사랑스러운 엘리자베스 데일, 아니 이제는 체셔인가? 앞으로 로우드 남작 부인이라고 불리울 아리따운 부인이 몬테로의 어두운 골목에서 도박 빚에 쫓겨 다닌다지?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네 물건을 사들이지 않는다면 네 조카는 로드니아의 매음굴에서 태어날지도 모르겠군.”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릴리벳을 향한 엘리엇의 사랑은 무한한 힘을 자아냈고 제 위를 점한 남자를 밀쳐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넘어진 그의 허리를 깔고 앉아 주먹을 휘두를 수 있게 했다.

퍽!

하지만 놈도 만만찮았다. 그는 다시 뒹굴어 엘리엇을 쓰러트리고 이번에는 원치 않게 엎드린 엘리엇의 등을 아주 세게 눌렀다. 느낌이 아무래도 무릎 같았다. 등뼈가 눌려 호흡이 힘들었다.

“개자식! 당장 죽여 버릴 거야!”

“내가 먼저 너를 죽여 버리지 않는다면 말이지.”

놈의 쇠갈퀴 같은 손이 엘리엇의 목덜미를 내려찍었다. 코와 입술이 더러운 먼지 바닥에 닿았다. 먼지 섞인 서늘한 공기가 폐부로 흘러들어 왔다. 입이 짓눌려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잘 들어. 엘리엇 데일.”

짙은 그림자가 지면서 귓가에 놈의 입술이 닿았다.

“네 동생도 생각해야지? 내가 어떻게 몬테로의 소식을 들었다고 생각하나?”

눈알을 굴려 놈을 노려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대신 쉭쉭 거친 숨을 쉬며 사지를 버둥댔다. 거센 힘으로 몸을 트는데도 놈은 요령 좋게 우위를 유지했다.

“내게 돈을 빌려 간 놈은 한둘이 아니야. 몬테로에도 있지. 그중에는 끝에 몰려서 범죄에 손을 대는 놈도 있지. 그놈이 아주 멍청한 신혼부부를 등쳐서 돈을 마련할 테니 기다려 달라는군. 물론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말이야.”

“이… 이런 더러운 돼지 같은 자식! 네가 릴리벳을 위험에 빠트렸어! 죽여 버릴 거야!”

“아니, 내가 아니라 절박한 놈에게 걸려든 네 동생의 잘못이다. 나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라고 부추긴 적 없어. 그 부부가 엘리자베스 데일 부부인 사실을 알고 배려심에 상환 일자를 미뤄 줄 생각도 했지.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아서 렌튼! 네놈은 오물보다 더 썩어서 지옥의 왕도 너의 추악함에 놀라서 네가 지옥에 오기를 거부할 거다!”

“혓바닥을 조심하는 게 어때? 네 사랑스러운 릴리벳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렸으니까 말이야. 릴리벳이 돈을 보내라고 하지 않았나?”

특급 전보는 날마다 도착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우편환을 보내지 않으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내용만 반복되었다.

“이래도 거래를 무를까?”

엘리엇은 손끝으로 바닥을 긁었다. 어금니를 꽉 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우… 으윽!”

“쉬쉬. 엘리엇. 너는 나와 거래를 하게 될 거야. 아무리 지독한 혓바닥을 거침없이 놀려도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동생이 위험해지니까.”

그러면서 놈은 아주 낮게 속삭였다.

“동생을 사랑하지? 넌 빌어먹을 나르시스트에 저주받을 근친 성애자니까.”

세상의 어떤 모욕도 어떤 저주도 아서 렌튼이 방금 뱉은 말보다 끔찍하진 않았다. 부모님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도 느끼지 못한 처절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거짓말. 근거 없는 거짓말이다.’

릴리벳을 사랑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매로서의 애정이었다. 갑작스럽게 부모를 잃고 잘 모르는 외숙부에게 의탁하여 살아가면서 릴리벳을 향한 근심과 우려를 느꼈고 때로는 답답하다는 동생의 볼멘 투정을 들을 때도 있었지만, 그 애에게 한 치 더러운 마음을 품은 적은 없었다.

어째서 심장이 꼬챙이에 꿰뚫린 기분일까. 윌리엄과 릴리벳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볼 때마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상실감과 질투, 그리고 슬픔은 단순히 영혼의 반쪽을 떠나보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일까.

‘아니. 아니. 이건 전부 아서 렌튼의 간계야. 놈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 쌍둥이 남매가 사이좋게 노는 모습만 봐도 달려들어 훼방을 놓았어.’

그는 릴리벳이 좋아하며 따르는 엘리엇을 질투했고 늘 괴롭히려 들었다. 지금도 그런 유치하고 악한 행위의 연장선에 있었다. 자신은 릴리벳에게 추악한 음심을 품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아서 렌튼이나 하는 짓거리였다.

“다… 쳐… 개… 시….”

‘닥쳐라. 개자식.’

거칠게 몸부림을 쳐도 놈을 떨치긴 쉽지 않았다. 아서 렌튼은 비열하게도 그런 엘리엇의 몸부림을 즐기는 듯했다. 눈꼬리까지 돌린 안구에 미소가 걸린 놈의 입매가 보였다.

“엘리자베스를 협박하는 놈의 빚은 순식간에 몇 배로 불어날 수도 있어. 내가 편지를 쓰지 않으면 말이지. 놈은 더 돈을 요구할 거고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 네 사랑스러운 릴리벳은… 내 어머니가 살던 곳 언저리에서 살겠지.”

“우… 웁! …웁!”

“네가 무턱대고 내 순수한 친절을 짓밟지만 않았어도 착하고 순진한 릴리벳이 그런 지경에 처하진 않았을 텐데. 전부 네 탓이야. 엘리엇.”

턱! 턱!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아서 렌튼을 노려보고 싶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고개를 돌리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곁눈으로 놈의 흐릿한 형체를 가늠하며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이 더러운 종자야!’

“나쁜 짓을 하는 건 뒷맛이 써. 더군다나 좋은 기억을 가진 무구한 상대에게 그런 짓을 하면 더더욱 그렇지. 그러니 내가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내게 대가를 치러 줘.”

미친놈의 말이 심상치 않았다. 고작 동전 몇 개만 가진 채로 쫓겨난 소년이 은행도 좌지우지하는 거부가 되기까지, 무슨 일을 어떻게 했을지 몰라도 순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진 않았을 터다. 범죄 조직과 연이 닿은 일도 가능할 터, 아니 그러지 않고서야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긴 힘들었다.

“‘오늘 밤에 내 방으로 와.’ 그날의 쪽지 말이야. 과연 릴리벳이 쓴 걸까? 난 지금도 의문이야. 그 애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거든. 누군가의 악한 함정 덕택에 나는 10살도 안 된 어린애를 욕보이려는 더러운 놈이 되어 버렸지. 대가는 참혹했다. 사랑하는 양부와 고향, 모든 걸 잃었어.”

“우… 응… 크.”

“이제 와서 세월을 되돌릴 순 없지. 내가 겪은 모든 일은 어떤 짓을 해서도 없는 일로 만들 수 없어. 게다가 돌아가신 양부에게 나는 추악하고 더러운, 은혜를 모르는 나쁜 놈으로 남았어.”

그는 그 부분에서 깊은 울분을 삼켰다. 그때 놈의 손아귀에 힘이 풀렸고 엘리엇은 드디어 입술을 바닥에서 뗄 수 있었다.

“푸아… 그래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걸 어쩌라는 거지?”

“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벌을 받았어. 그 일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면….”

아서 렌튼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바닥에 붙은 엘리엇과 시선을 마주했다. 광기로 얼룩진 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억울한 그 일이 더는 억울하지 않으면 돼.”

“뭐?”

“나는 널 욕보일 것이다. 흠씬 두들겨 맞고 고향에서 쫓겨날 만큼 추잡스럽고 더러운 방식으로 말이야.”

히죽 웃는 놈의 낯이 마치 악마 같았다. 엘리엇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감각이 마비되었다. 들끓던 분노가 일시에 차갑게 가라앉고 대신 토악질이 날 만큼 큰 역겨움이 샘솟았다.

구역질 나는 사생아 새끼.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가시나무 성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불분명했다. 나이트스톤에 도착할 무렵, 제 주인의 물건을 다 실은 길퍼드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짐을 실은 마차를 몰아서 나갔다. 내내 기다리던 중개상이 판매대금을 내밀었다.

“여기 수표 받으십시오. 일단 거래는 성사되었습니다. 파기는 신사분, 아니, 글래스턴 씨가 동의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오후가 되자 당장 돈을 보내라는 비명과도 같은 특급 전보가 다시 도착했다. 전보를 받자마자 엘리엇은 공포에 떨었다.

‘네 조카는 매음굴에서 태어날지도 모르지.’

아서 렌튼의 지독한 저주가 엘리엇을 뒤흔들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당장 은행에 달려가 수표를 전환했고, 그것을 우편환으로 바꾸어 다시 몬테로의 호텔로 보냈다.

불안과 초조함에 휩싸인 채로 이틀이 지나고, 특급 전보가 다시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콥스였다.

아가씨와 부군을 모시고 몬테로를 떠남. 너무 많은 일을 겪어 아가씨가 신경 쇠약 전조를 보임. 가까운 휴양지에서 휴식할 예정

신경 쇠약. 엘리엇은 돈을 제때 보내지 않은 것을 몹시도 후회했다. 왜 미리 현금을 확보해 두지 않았을까. 동시에 윌리엄 체셔에게도 화가 났다. 가장 미운 상대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서둘러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몬테로! 빌어먹을 몬테로!”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아니, 적어도 로드니아를 중심으로 국내만 유람했어도 괜찮을 터였다.

로우드 남작가에 항의성 편지를 보내려다가 참았다. 당장 이혼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이혼한 사람에게 살갑지 못한 시대임이 너무나도 애석했다. 동생의 결혼을 불운 속으로 몰아넣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릴리벳이 쇠약해진 심신을 다시 찾을 때까지 휴양지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녀를 보살필 사람이 필요하므로 폴리벳 부인이 릴리벳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래서 요양지에 있는 동안 여러 사람의 생활비가 필요했다. 아서 렌튼이 지른 대금은 그렇게 사라졌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결국 아서 렌튼의 도움을 받고야 말았다. 창문을 연 온실 한가운데 서서 전지가위를 들고 한참 멍하게 서 있던 엘리엇은 벳시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젊은 하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누구?”

“아서 글래스턴 씨입니다.”

햇빛이 쏟아지는 온실이 갑자기 혹한의 벌판처럼 느껴졌다.

“왜?”

“약속한 것을 받으러 오셨다고.”

약속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 한참 생각한 후에야 엘리엇은 그 작자가 내뱉은 추잡스러운 조건을 떠올렸다. 무수한 벌레가 피부를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돌아가라고 해.”

“네?”

“약속한 건 내일 저녁에 가지고 가겠다고. 그러니 내 집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해.”

“예.”

벳시는 고개를 조아리고 총총걸음으로 온실을 빠져나갔다. 따뜻한 늦봄의 바람이 너무나도 스산했다. 엘리엇은 부들거리는 두 팔로 몸을 꽉 조였다. 분노와 좌절감, 그리고 역겨움에 휩싸인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

다음 날 저녁. 엘리엇은 외출복 차림으로 말에 올라탔다. 배웅하는 벳시를 향해 늦게 올 테니 기다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젠 쏜힐로 가는 길이 익숙했다. 고삐를 틀지 않아도 말은 알아서 가시나무 길을 따라 경쾌한 걸음을 옮겼다. 느긋하게 산책을 하는 듯한 모습이지만, 실상 엘리엇의 머릿속은 모욕감으로 들끓었다.

‘욕보이겠다고? 추잡하고 더럽게?’

그래 봤자 같은 남자였다. 신의 곁에서 추락한 타락 천사조차 비웃음 가득한 눈깔로 손가락질을 하는 게 바로 동성애였다. 마약에 전 놈이나 인간으로서 기본을 포기한 놈이나 하는 짓이었다. 물론 놈이 인간이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디 해 보라지. 제까짓 게.’

상의 안쪽 주머니에 잘 넣어 둔 작은 날붙이를 매만졌다. 아서 렌튼이 허튼짓을 하려고 드는 순간 놈의 더러운 가랑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생각이었다.

‘남자에게 달려들다가 성기와 고환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못 하겠지. 설사 고발을 한다고 하더라도 정당방위로 고작 구금이나 벌금형일 테니.’

혐오감에 떨며 엘리엇은 각오를 다졌다.

역시나 문지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었고 현관에 도착해서 말에서 내리자 익히 봤던 마부가 고삐를 대신 받았다. 문을 연 자는 하인, 길퍼드였다.

“주인님께서는 2층 방에 계십니다.”

모자와 장갑을 벗었다. 그러나 길퍼드가 드디어 내민 손에는 아무것도 쥐여 주지 않았다. 엘리엇은 채찍을 겨드랑이에 끼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무릎 밑까지 오는 긴 승마용 부츠가 미약한 조명을 따라 반짝거렸다.

2층의 수많은 방 중 어디가 놈의 방인지 엘리엇이 알 도리는 없었다. 길퍼드도 딱히 안내할 생각이 없는지 따라오지 않았기에, 계단 꼭대기에 오른 엘리엇은 양쪽에 번갈아 시선을 던졌다.

서재와 맞은편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저벅저벅.

카펫이 없는 복도를 걸어 그쪽으로 갔다. 채찍 끝으로 열린 문을 밀자 휑한 방이 드러났다. 얇은 천이 달린 커다란 사주 침대와 단출한 탁자 세트. 작은 서랍장과 함 몇 개가 다인 방이었다. 바닥에 두꺼운 카펫이 깔렸고 창문에도 묵직한 커튼이 늘어져 있지만, 온기의 흔적은 없었다.

그 방 가운데 그놈이 있었다. 그는 창틀에 엉덩이를 대고 엘리엇을 바라봤다.

“너무 소식이 없어서 도망간 줄 알았어. 막 기차역에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었다.”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우리 엘리엇 데일 씨의 고상하고 오만한 태도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겠군.”

그러면서 아서 렌튼은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과 팔을 펼쳐 보였다. 일단 무슨 얘기를 하든 다른 사람이 듣는 건 싫으므로 엘리엇은 순순히 들어갔다.

아서 렌튼과 자신을 가르고 있는 탁자 위에 모자와 장갑을 놓은 엘리엇은 채찍도 그 곁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손잡이를 약간 빼서 금방 움켜쥘 수 있도록 두는 걸 잊지 않았다.

“옷도 벗으시지.”

“뭐?”

“옷을 입고서 하는 쪽이 취향인가. 그쪽도 뭐 상관은 없지만. 흔적이 남을 텐데.”

“추잡하군.”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옷깃을 꼭 잡고 있어도 좋지. 그래야 옛날 생각이 잘 날 테니까.”

끔찍한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기에 경악했다. 엘리엇은 상의를 벗어 안주머니에 바로 손을 넣을 수 있게끔 접어 탁자 위에 놓았다.

“장화도 벗어. 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가.”

“뭐… 갑자기 무슨.”

너무 급작스러운 요구에 엘리엇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창틀에 엉덩이를 걸친 채로 아서 렌튼이 비열하게 웃었다.

“왜? 우리 사이에 사랑스러운 전희라도 필요한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 취할 뿐이야.”

그러면서 그는 침대 쪽으로 턱짓했다. 침대를 가리는 얇은 천은 다 걷혀 있었다. 침대 곁에는 작은 보조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 갈색 병이 하나 있었다.

“나는 너처럼 얼음 같은 성미는 되지 못해서 말이야. 고통을 덜어 줄 선물도 준비했지. 아편 팅크다. 몇 방울 혀 밑에 떨어뜨리면 도움이 될 거야.”

개 같은 소리를 늘어놓기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약 따윈 한심하고 나약한 자나 해.”

나약하고 한심한 놈은 저를 욕하는지도 모른 채로, 아니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편 팅크 옆에 있는 녹색 병은 특제 오일이다. 소독 작용이 있어. 이쪽 계통에선 상당히 고급이야.”

갑자기 허브 오일 얘기는 왜 하는지 몰랐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미간을 좁히자 놈이 낄낄댔다.

“고통을 줄이고 희락을 가져다줄 마법의 약이지. 물론 마시진 말고 밑구멍에 직접 바르도록.”

“입 안에 물고 있는 더러운 혀가 역겹지도 않나? 이참에 잘라 버리지 그래?”

“조심해, 엘리엇 데일. 여기서는 나를 존중하는 편이 좋을 거야. 네 동생이 어느 휴양지, 누구의 별장에서 쉬고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눈에 불꽃이 튀었다.

“더러운 새끼. 그 애에게 손을 댔다가는 천벌을 받을 거다!”

“그러니까 그러지 않도록 협조해. 나는 가여운 릴리벳보단 네게 대가를 받고 싶으니.”

“더러운 돼지 같은 항문 성애자.”

“욕을 해 봐야 네 입장만 더 나빠질 뿐이야.”

순간 엘리엇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아서 렌튼이 더 빨랐다.

탕!

화약이 터지는 어마어마한 소음이 고막을 때렸다.

“으악!”

엘리엇은 단검을 놓치며 손을 감싸 쥐었다. 아서 렌튼이 들고 있는 권총에서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총알은 엘리엇의 엄지와 검지 사이 살점을 스쳤다.

“마지막 친절을 발휘했어. 다음 총알은 네 손가락 하나를 정확하게 날려 버릴 거다. 그다음엔 다른 손가락 하나, 그다음엔 또 하나.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다. 그때는 네 다리를 쏴 버릴 생각이야.”

“미친놈!”

피가 흐르는 손을 쥔 채 엘리엇은 놈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려고 했다. 하지만 얼음장처럼 냉랭한 놈은 흔들림 없이 딱딱한 어투를 이어 갔다.

“난 여러 사람에게 인정받은 명사수야. 만약 실력이 의심이 간다면 더 도발해 봐도 좋아.”

총성이 울렸는데도 쏜힐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누구 하나 방으로 뛰어오지 않았다. 그 사실에 더욱 소름이 끼쳤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방에서 죽어 나갔을까.

천천히 창틀에서 몸을 뗀 아서 렌튼은 엘리엇이 떨어뜨린 검을 주웠다.

“이런 유치한 것으로는 날 어떻게 하지 못해.”

아서 렌튼이 홱 던진 검은 엘리엇의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 방문에 퍽 박혔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엘리엇은 손잡이 바로 밑까지 푹 박힌 검을 보고 잘게 떨었다.

“도련님 따위가. 범죄자만 득실거리는 식민지에서 벌레를 잡아먹으면서까지 뒹군 나를 이겨 보겠다는 마음 자체가 글러 먹었어. 이제는 네게 남은 자비심도 없으니. 여기서 허망하게 죽고 싶지 않으면 얼른 장화와 바지를 벗고 침대로 올라가.”

“차라리 죽여.”

“그래도 되고. 네 배에 총알 두 방을 먹이고 죽어 가는 네 창자가 너덜거릴 때까지 강간하는 것도 나름 속이 후련할 테니까 말이야.”

“미쳤군. 넌… 넌 미쳤어. 아서 렌튼.”

“아! 서! 글래스! 턴!”

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리엇은 기세에 눌려 자리에서 흠칫 떨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엘리엇의 심장을 꿰뚫을 기세로 번쩍였다.

“한 번만 더 나를 렌튼이라고 부르면 대가고 뭐고 당장 죽여 버리겠어. 그리고 네 혀를 잘라 네 뒷구멍에 쑤셔 넣은 다음에 사랑스러운 릴리벳에게 배달시킬 거야.”

“…진정해.”

끔찍한 소리에 혈관이 오그라들었다. 아서 렌튼은 정말로 저지를 태세였다.

“다시 나를 불러 봐라. 엘리엇 데일.”

“…아서….”

글래스턴이라는 성은 기어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부른다면 저 추악한 작자가 새로운 사람임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더럽고 저열한 놈이었으며 ‘아서 렌튼’이라는 호칭이 어울렸다.

끝끝내 성을 말하지 않자 아서 렌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아서. 아서라고만 불러. 그걸로 만족하지.”

그러면서 아서는 손에 든 권총을 허공에 휙휙 저어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엘리엇은 승마용 장화를 벗었다. 그리고 딱 달라붙는 승마용 바지를 벗은 다음 침대로 걸어갔다.

“조끼도 벗어. 속바지도.”

치욕스러운 명령에 떨리는 숨을 억지로 뱉으며 엘리엇은 시키는 대로 했다. 실크 조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얇은 면으로 만든 작은 바지 같은 속옷이 그 위에 포개졌다.

길게 늘어지는 셔츠 외에 엘리엇이 걸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묵직한 침대 위로 올라가자 아서 렌튼, 아니 아서가 만족스러운 듯 입술로 호를 그렸다.

“침대 머리에 기대고 앉아 다리를 벌려. 내가 과정을 잘 볼 수 있도록.”

아직도 화약 냄새가 남은 총구가 엘리엇을 향하고 있었다. 거역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벅지까지 오는 높은 침대에 천천히 올라갔다. 보기보다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거위 솜털로 채운 베개가 네 개 있었다. 그것을 포개 침대 머리에 대고 등을 기댔다.

“후우.”

쭉 뻗은 다리를 벌리는 데는 나름 각오가 필요했다. 허벅지 중간까지 늘어진 셔츠 자락이 말려 올라가지 않도록 신중하게 각도를 넓혔다. 릴리벳을 언급하며 협박하지만 않았어도 차라리 저 총에 맞아 죽는 쪽을 택했을 텐데. 엘리엇은 이를 꽉 깨물었다.

“무릎을 세워.”

얄팍한 술수를 용납하지 않는 작자의 냉정한 요구가 이어졌다. 치욕에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발을 끌어당겨 무릎을 세웠다. 아주 어린 시절 목욕을 시켜 주던 어머니와 유모 외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깊은 골짜기까지 마른 공기가 닿았다.

‘흐읍.’

아주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내달리는 심장과 폭발할 것 같은 머릿속을 진정시킬 방법이 별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손으로 베개와 같은 재질로 된 이불을 꾹 잡았다.

저벅저벅.

침대 머리와 마주 보는, 정확하게는 엘리엇이 다리를 벌린 방향에 서 있던 아서가 거리를 좁혔다. 그는 가까운 탁자에서 의자를 끌어당겨 등받이가 침대 쪽으로 오도록 놓고 걸터앉았다. 한 팔을 제 가슴 중반까지 올라오는 등받이 모서리에 얹은 후, 날렵한 권총을 쥔 손을 그 위에 다시 포갰다. 메마른 입매에 흉악한 미소가 걸렸다.

“셔츠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아.”

“왜 셔츠도 벗을까? 알몸이 좋겠어? 남자의 납작한 가슴이 좋다면 그쪽이 더 낫겠지.”

호흡이 뒤섞인 새된 음성으로 이죽거렸다. 사소한 도발에 아서는 쉬이 넘어오지 않았다. 맞받아치는 대신에 그는 권총으로 옆 보조 탁자에 있는 병을 가리켰다.

“아편 팅크. 정확하게 세 방울을 혀 밑에 떨어뜨려.”

“약은 하지 않겠어!”

“그래? 그렇게 생생한 정신으로 당하고 싶다면야. 말리진 않겠다.”

딱딱한 대답이 돌아왔다. 엘리엇은 그가 빨리 움직여 뭔가를 하길 바랐다. 놈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지독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신경이 바싹 타서 미쳐 버리거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막상 저지르려니 겁이 나나 보지? 계속 보고만 있군.”

“누가?”

이번에는 포갠 팔에 턱을 괸 아서는 쿡쿡 웃었다. 권총을 쥔 손은 어느새 의자 옆으로 삐져나온 그의 긴 허벅지 쪽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여전히 엘리엇을 향해 조준되어 있었다.

“나는 이젠 손질하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아. 진창을 구르면서 하도 먹어 대서 이젠 질렸거든.”

“뭐?”

“네 딱딱하고 거친 구멍이 여자의 것처럼 축축하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혼자서 만져.”

충격적인 요구에 입이 쩍 벌어졌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놈에게 욕설을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놈은 멀었고 총구는 가까웠다.

“허브 오일을 써. 그러라고 준비한 거야.”

“그까짓!”

“안 쓰면 앞으로 변기에 앉을 때마다 지옥을 보게 될걸? 내 말을 믿는 게 좋을 거야. 여자가 없는 곳에서 너처럼 곱상한 놈들이 거친 놈들에게 깔려서 다리 사이에 피가 엉겨 붙은 채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많이 봤어.”

“피가….”

“설마 네 하인들에게 여기서 있었던 일을 알리고 싶은 건 아니겠지? 바지에 빨간 핏물이 배면 의사를 불러들일 테고 말이야. 아니면 네가 직접 세탁을 해야 할 텐데. 그건 그거대로 별난 짓이지 않나.”

역겹지만 타당한 지적이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허리를 비틀면서 팔을 뻗었다. 하지만 보조 탁자까지 닿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자세를 바꾸어 아까 놈이 말한 녹색 병을 집어 들었다. 그사이에도 놈의 시선은 엘리엇의 둔부를 향했다.

탄탄하게 조인 근육 덕분에 은밀한 곳이 적나라하게 보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소름 끼쳤다. 재빨리 원래 자세로 돌아오자 침대가 출렁거렸다. 그러면서 셔츠 자락이 위로 올라갔다. 성기의 끝이 보였다.

“빌어먹을.”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려 가랑이를 가렸다.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꿈지럭댔다. 달라붙는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녹색 병과 셔츠 자락과 씨름하느라 진땀이 났다.

“후.”

드디어 제대로 앉은 엘리엇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이쪽을 지켜보던 놈이 “그걸 검지와 중지에 적셔서 구멍에 집어넣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명령했다.

순간 울컥했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입 안이 메말라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가 팽창했다가 난리였으며 등줄기에는 한기가 흐르는데 반대로 엉덩이에는 긴장으로 인해 습기가 모였다.

“후우.”

병뚜껑을 열고 오일을 손가락에 적셨다. 톡 쏘는 풀 냄새와 장미 향이 뒤섞여 꽤 이상한 향기가 났다. 끈적끈적한 기름의 감촉을 느끼면서 시선을 들어 놈을 다시 한번 봤다. 그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사람처럼 미동을 하지 않았다.

“빨리.”

석상이 말을 했다. 엘리엇은 그 손가락을 가랑이 안쪽으로 가져가려다 제 성기를 들쳐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엉덩이 바깥으로 팔을 둘렀다. 하지만 그러면 구멍까지 닿기 힘들었다.

간신히 입구를 만질 수는 있었지만, 용변을 보고 비데를 쓸 때 외에는 의식한 적이 없는 부분이었기에 스스로 만지는 촉감도 너무 낯설어 온몸이 섬뜩했다.

몇 번 멈칫거리다가 기름을 주변에 묻히고 말았다. 손가락이 낯선 주름을 매만지는데도 입구는 쉬이 벌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평생 배설 기관이었다. 성기로서 기능한 적이 없었다.

“제대로 못 해? 아니면 못 하는 척하는 건가? 손가락으로 풀기 싫으면 내가 도와줄까? 권총 총신이 네 손가락과 딱 비슷한 크기인데 말이야.”

“닥… 쳐.”

어떻게 매번 더욱 소름 끼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저놈의 영혼은 어디까지 타락했고 어디까지 저열한 걸까. 제대로 하지 않으면 권총을 항문에 처박겠다는 경고가 단순히 경고로 끝날 것 같진 않았으므로 엘리엇은 땀을 흘리면 애를 썼다.

“빌어먹을.”

기름에 손가락은 매번 미끄러졌고 입구는 아주 꽉 다물린 채로 침입을 거부했다. 꾹 넣으려고 해도 탄력적인 반발감에 쉽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그렇게 쉬워 보이면 직접 해 보시지.”

사나운 눈초리와 함께 으르렁댔다. 꼴이 말이 아니라 위협이 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짜증과 초조함은 전해졌으리라.

제 관대함을 강조하던 개새끼는 이번에는 권총을 내세우지 않는, 전혀 고맙지 않은 친절을 베풀었다. 대신 코웃음을 치면서 빈정거렸다.

“긴장하니까 그렇지.”

“그럼 권총을 쥔 미친놈이 항문을 뚫기를 원하는 상황에 느긋해야 하나?”

오로지 객관적 사실만을 적시했다. 아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뭐, 타당한 얘기긴 하군.”

“네가 얼마나 미쳤는지 이해한다고?”

“이렇게 몰아간 건 너야, 엘리엇 데일. 처음부터 성숙한 신사의 자세로 나왔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어.”

“네 뻔뻔한 낯짝 때문이겠지.”

“정말로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릴 텐가?”

아서는 권총을 다시 의자 등받이 위로 올렸다. 입을 꾹 다문 엘리엇을 향해 또다시 요구했다.

“아편 팅크를 혀 밑에 세 방울 떨어뜨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이젠 엘리엇조차 아편의 필요성을 느꼈다. 제정신으로 아서의 요구를 일일이 맞추는 건 힘들었다.

아편 병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 뚜껑에는 작은 유리관이 달려 있었다. 입을 열고 혀를 들어 올렸다. 혓바닥 아래 똑똑똑 정확하게 세 방울을 떨어뜨렸다. 맛이 영 불쾌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시자 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웃음과 코웃음이 아닌, 다른 형태의 미소였다.

“이런 고약한 걸 어떻게 먹는 거지?”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야. 그리고 앞을 먼저 달래는 편이 좋겠군. 그게 긴장 해소에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야.”

이번에는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아서를 바라보자 그는 명령을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으로 바꾸었다.

“허브 오일을 양 손바닥에 듬뿍 발라서 네 자지를 만져. 그리고 한 발 먼저 싸.”

눈앞에 앉은 사생아 놈은 매번 쌍욕이 나오게 하는 데에 정말 다분한 재능이 있었다. 뭐라 되받아쳐 봐야 권총의 서슬 퍼런 총구가 더 가까이 다가올 빌미가 될 뿐이었다.

미끈한 기름에 젖은 손을 천천히 가랑이 사이로 넣었다. 생전 해 보지 않던 짓보다야 훨씬 수월했다. 질척한 기름을 기둥에 바르고 천천히 뿌리에서부터 훑었다.

항문에 바를 때는 몰랐는데 감각이 훨씬 예민한 음경 표면에 닿으니 뭔가 찌릿찌릿했다. 소독 작용이 있다더니 아무래도 그 탓인 것 같았다.

“여자가 있었나? 아니면 그쪽도 무경험?”

“물론 있었지.”

“흠. 우스꽝스러울 만큼 귀여운 색깔이라 믿기 힘들군.”

새로운 도발에 엘리엇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미 치욕 속에서 뒹구는 남성성을 또 짓밟혔다.

“네놈처럼 매음굴에서 써먹지 않아서 그럴 테지.”

“내가 매음굴에 가 봤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그야 네놈이….”

“매음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은 놈이 꺼냈다. 놈의 눈알이 형형했다.

“내 어머니는 매음굴 출신이 아니야. 정확하게는 매음굴에서 나오는 빨래를 대신 해 주는 하층민이었지. 매음굴에서 살지도 않았고 그 근처에 가 본 적도 없어.”

천한 성장 배경인 건 매한가지라 그게 그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서는 그 차이를 강조했다.

“어머니와 살 때도 나는 교습을 받았어. 학비를 내지 못해 금방 그만뒀지만 두 달이나 다녔어. 그사이에 글자를 전부 배웠다고. 내 양부가 나를 거둔 건 내가 더러운 골목 출신임에도 글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똑똑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칭찬이라도 해야 하나?”

정말 순수한 의문이었다. 갑자기 어린 시절 얘기를 자랑스럽게 꺼내는데 뭐라고 응수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시끄러워. 네 분홍색 자지나 얼른 비벼.”

셔츠로 가리겠다는 생각은 이미 포기했다. 불쾌한 듯이 인상을 찡그리는 놈을 향해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정작 불쾌한 사람은 엘리엇이었다.

엄지와 검지, 중지를 모아 기둥을 훑었다. 아무래도 타인, 그것도 최악의 관계를 자랑하는 남자 앞에서 수음하는 일은 전혀 색정적이지도 달갑지도 않았다. 그래도 꽤 굵직한 해면체 다발은 물리적 자극에 조금씩 반응했다.

“고환도 만져야 하나?”

“원한다면?”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빙그레 웃음이 났다. 손끝이 나른해지고, 반대로 손에 잡힌 음경은 점점 찌릿찌릿했다. 말랑하던 심지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갔다.

추륵추륵.

위아래로 훑는 손의 속도가 빨라졌다. 열이 오르면서 귀가 뜨거워졌다. 가슴 안에서 은은한 열기가 퍼졌고 전신의 근육이 느른해졌다. 아무리 수음을 한다지만, 갑자기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나?

“아편 효과가 나는 모양이군.”

아서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렸다. 고막이 부푼 듯 숨소리가 뇌에 직접 울렸다.

“하아. 후우.”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내며 엘리엇은 수음을 위해 더 편안한 자세를 잡았다. 엉덩이를 조금 더 아래로 빼고 무릎을 좀 더 세웠으며 양 허벅다리를 더 벌렸다. 질질 끌리는 셔츠가 귀찮아 배까지 끌어 올린 다음 제 음경의 모습을 보면서 양손을 움직였다.

오른손으로 기둥을 꽉 잡고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왼손으로는 고환을 움켜잡고 주물렀다. 기분이 급격하게 들뜨면서 짜릿한 흥분이 척추를 따라 뇌까지 전달되었다.

“허윽, 후우… 으….”

빨리 가고 싶은데 무슨 이유에선지 쉽게 절정에 도달하기 어려웠다. 얼굴을 찌푸리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가 살짝 들뜨면서 음경이 머리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추륵추륵.

넉넉하게 바른 오일이 아래로 흘러 고환을 적혔다. 왼손이 고환을 강하게 뭉갤 때마다 오일은 더 아래로 흘러 회음까지 닿았다.

기름방울의 아주 미약한 존재감이 주는 기쁨이란. 정수리를 달구는 찌릿함은 행위로 인한 성적 쾌감만은 아니었다.

“기름… 기름이 이상한 것… 같은데.”

“저릿한가? 그렇다면 원래 그런 거니 걱정 마. 곧 익숙해질 거다.”

“아니… 이런 걸….”

숨이 가빠 왔다. 손목과 팔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흔들었고 음경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저릿저릿한 감각의 풍랑 속에서 엘리엇은 해방감을 찾으며 손을 움직였다.

기둥보다 선명한 색을 가진 딱딱한 음경의 갓에 기름을 바르는 순간 화끈한 통증이 찾아왔다. 긁힌 상처에 소독약을 바를 때와 같은 얼얼한 아픔은 단숨에 쾌감을 폭발시키는 촉매가 되었다.

“아…!”

주룩.

뜨거운 정액이 요도 속에서 밀려 나와 기둥을 잡은 오른 손등을 적혔다. 회음을 흐르는 기름처럼 끈끈한 점액은 빠른 움직임으로 인해 불거진 손등의 혈관을 섬세하게 매만졌다.

“후우우.”

깊은 한숨과 함께 엘리엇은 공중으로 띄웠던 엉덩이와 허리를 천천히 내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여운을 즐겼다.

“으음?”

한 발 뺐음에도 음경은 여전히 생생했다.

“왜… 이러… 지?”

느슨한 의문과 함께 혓바닥이 천천히 움직이는 바람에 말이 느려졌다. 시야도 느긋하게 돌아갔다. 기분이 좋았다.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아편이 너무 잘 듣는군.”

“그래? 그럼… 한… 번… 더….”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싱긋 웃으면서 엘리엇은 몸을 움직여 오일 병을 낚아채 침대 위에 턱 놓았다. 다시 넉넉하게 기름을 발라 제 건강한 음경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느려졌다. 마치 하늘을 나는 듯했다.

엘리엇은 아편에 저항력이 전혀 없었다. 아서는 믿지 않겠지만,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 기분 좋아… 으… 흐윽….”

낮은 신음은 곧 달뜬 신음으로 이어졌고 엘리엇은 엉덩이와 허리를 뒤틀면서 행위에 몰두했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가 흐트러진 채로 공중을 향해 엉덩이를 흔드는 동안, 아서는 그 광경을 홀린 듯이 똑똑히 봤다.

연거푸 세 번.

특별한 자극 효과가 있는 오일을 모조리 들이부어 음경과 고환, 그리고 회음과 항문에 이르기까지. 고생이라곤 모르는 하얗고 곧은 손이 못된 장난을 치는 동안 여린 살갗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거 때문에 밑이 가려워.”

고환을 쥐어뜯는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저러다가 성불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말리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아서는 깨달았다. 어느새 제 가랑이가 부풀어 팽팽했다.

당혹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아편 세 방울에 맛이 간 엘리엇이 제 고환을 스스로 뜯어내는 걸 말려야 했다.

철썩.

가랑이를 세게 누르는 손을 후려쳤다.

“아프잖아.”

항변과 달리 엘리엇은 실실 웃으면서 두 팔로 침대를 힘껏 누르고 발끝에 힘을 주며 엉덩이를 바싹 들어 올렸다. 기이한 자세로 발기한 기둥을 아서에게 자랑스럽게 내밀면서 히죽거렸다.

“한 번 더. 한 번 더 때려 줘. 기분 좋으니까 말이야.”

얼음으로 만들어진 냉혹한 외면 아래 피학적 성향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마 본인도 모르지 않을까.

안구가 튀어나올 만큼 눈을 부릅뜬 아서는 충격에 벌어진 입을 제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원하는 고통을 얻지 못하자 엘리엇이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실룩거리면서 손으로 제 성기와 고환에 충격을 가하려 들었다.

들어 올린 손바닥이 벌건 가랑이에 닿기 전에 아서는 놈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퍽!

단 한 방으로 엘리엇은 기절했다. 축 뻗은 사지가 살짝 경련하더니 이내 긴 한숨과 함께 늘어졌다.

식은땀이 흐르는 몸이 서서히 원래 빛깔로 돌아갔다. 남성치고 유달리 하얀 피부와 상대적으로 뻘겋게 변한 음경과 고환을 보자 아서는 제 가랑이가 아픈 듯했다.

아니,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아팠다. 아서가 목격한 수음 장면은 대단히 충격적이고, 대단히 음탕했다. 저릿저릿한 감각에 못 이겨 아서는 제 바지춤에 손을 대었다.

바지 단추를 풀자 발기한 성기가 튀어나왔다. 엘리엇의 물건보다 더 크고 더 짙고, 울퉁불퉁한 혈관이 불거진 성기는 이미 묽은 선액을 흘리고 있었다. 그걸 기둥에 바르고 빠르게 문질렀다.

낮은 신음이 목구멍 안에서 굴렀다. 한쪽 무릎을 침대에 올리고 한 손으로 기절한 엘리엇의 매끈한 발목 근처를 짚은 다음 다른 손으로 빠르게 기둥을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희와 함께 절정이 찾아왔다.

푸슉.

짙은 정액이 성기 끝이 향한 방향으로 튀었다. 끈끈한 점액질은 엘리엇의 붉게 벌어진 허벅지 안쪽을 향해 천천히 흘렀다. 입 안이 바싹 마를 만큼 음란하고 자극적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허벅지에 손을 댈 뻔했다.

마침 강한 효력이 있는 오일을 발라 거칠게 고문한 엘리엇의 가랑이 피부가 병에 걸린 것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두면 정말로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제 정액도 닦아야 했다.

아서는 바지를 추스른 다음 직접 깨끗한 물과 부드러운 수건을 준비했다.

“흐으… 으윽….”

기절한 중에도 고통스러운지 물수건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엘리엇이 신음했다. 낮게 울리는 소리가 아서의 팽팽한 신경을 긁어 댔다. 양부의 집에서 쫓겨난 뒤에 겪었던 무수한 역경을 통해 쌓은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다시 부푼 성기를 엘리엇의 성마른 구멍에 처박았을지도 몰랐다.

“이런.”

그저 엘리엇의 그 오만한 콧대를 무참하게 꺾어 버리고 싶었다. 엘리엇 데일이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적절한 호감을 표하게 하고 굴욕적인 교류를 이어 가고 싶었는데.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아서도 예상치 못했다.

“엘리엇. 넌 늘 날 놀라게 해.”

신체 반응이나 알량한 동정심에 쉽게 넘어갈 만큼 아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이상 엘리엇을 몰아가선 안 되었다. 충격에 혀를 깨물고 죽기라도 하면 기껏 여기까지 몰아 온 보람이 없어질지도 몰랐다. 여유롭게. 그간 꾹꾹 눌러 왔던 분노를 차근히 풀어내 엘리엇 데일에게 모조리 퍼부을 수 있도록. 느긋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나이트스톤에 살던 시절. 장원을 물려받으면 엘리엇만 내쫓아서 영원히 동생과 만나지 못하게 할 거라 욕했던 때와 흡사했다. 확연한 덩치 차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던 엘리엇 데일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말을 더듬던 그때 느꼈던 기분과 아주 흡사했다.

‘그건… 그건 안 돼.’

그때 느꼈던 약간의 난처함과 몇 배를 능가하는 희열이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아서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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