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15/18)

쏜힐 ; 가시나무 성 외전

1.

말에서 거창하게 떨어진 이튿날.

엘리엇은 내내 침대에 머물렀다.

낙마할 때 가장 세게 부딪힌 부위가 등이었다. 봄의 습기를 머금어 푹신한 흙바닥에 넘어진 덕분에 다리나 팔이 부러지는 참상은 피하여 다행인 것도 잠시, 등이 너무 쑤셔서 죽을 맛이었다.

“끄응.”

등이 점점 부풀어 오르면서 똑바로 눕지도 못했다. 오만상을 쓰면서 몸을 억지로 들어 엎드렸다. 100살 먹은 노인네처럼 움직임이 느려 터졌다. 그것도 힘들어서 엎드린 직후에는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정작 엘리엇을 힘들게 하는 건 낙상 통증이 아니었다.

상의를 벗고 엎드리자마자 연고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다.

“내가 바르지.”

“무슨. 내가 바를 거야.”

애인과 혈육이 옥신각신 난리였다.

원래 걱정이 많은 혈육은 그렇다 쳤다. 그러나 낙마를 계기로 배배 꼬인 오해를 풀어 원수에서 애인으로 극적인 탈바꿈을 한 남자가 저렇게 나오는 건 예상 외였다.

“나는 그의 쌍둥이 누이야. 세상 누구보다 동질하고 가까운 존재라고.”

“무슨 소리. 가까운 것으로 따지면 엘리엇의 겉과 속을 샅샅이 훑은 나지. 너는 엘리엇의 알몸을 본 적이 없잖아.”

“숙녀 앞에서 무슨 소릴! 이 저질스러운 작자야!”

“저질스러운 얘기를 듣기 싫으면 연인 사이에 끼지 말고 꺼지지 그래?”

빨리 연고를 바르고 조용히 쉬고 싶은 엘리엇으로서는 둘 다 망할 놈들이었다. 이를 악물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엘리엇은 망할 놈들을 향해 일갈했다.

“둘 다 시끄러워.”

직후 엘리엇은 둘 사이를 오가는 연고 통을 낚아챘다.

“연고 이리 내. 찰리에게 부탁하지.”

“엘리엇.”

“오빠.”

엘리엇이 침대에서 벗어나 셔츠를 걸치며 단추를 잠그는 사이 아서가 호위 기사처럼 옆에 들러붙었다. 반대편은 릴리벳 차지였다. 엘리엇을 부축하는 사이 허리에 누가 팔을 두르느냐를 두고 또 날 선 공방이 이어졌다. 한 치의 양보 없는 팔 싸움에 치인 등이 욱신댔다.

“둘 다 귀찮으니까 떨어져!”

버럭 고함을 지른 후 엘리엇은 온전치 않은 차림새로 방을 나갔다. 걸을 때마다 상체가 울려서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오빠.”

릴리벳이 금방 따라붙었다. 그런 릴리벳을 견제하면서 아서가 먼저 곁에 섰다.

“내가 부축하겠어.”

“놔.”

엘리엇은 아서에게서 몸을 떨어뜨린 후 지나가던 하인을 불러 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찰리라면 다른 두 숙녀분과 함께 정원 산책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래 걸릴 거야.”

“내가 발라 줄게.”

귀찮은 녀석들이 지치지도 않고 서로 연고 통을 받아 내려 애썼다. 그때였다.

“엘리엇? 이제 움직여도 괜찮은가?”

마침 윌리엄이 모습을 드러냈다. 윌리엄은 엘리엇의 안부를 물으면서 정작 시선은 릴리벳을 향했다. 아내를 찾던 모양이었다.

“마침 잘 왔네. 자네 아내를 데리고 정원을 산책하는 게 어떻겠나? 찰리랑 다른 숙녀분들도 나갔다고 하던데.”

엘리엇의 권유에 윌리엄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지 않아도 날이 좋아서 아내를 찾던 중이었는데.”

“체셔 부인. 부군이 부르는군요.”

“오빠!”

일단 릴리벳부터 윌리엄에게 떠넘겨 제거했다.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도 릴리벳은 남편의 팔을 뿌리치지 못했다.

“약은?”

“알아서 바를 테니 걱정하지 말아.”

“하지만 아서와 둘이…….”

뭔가 꿍얼거리려던 누이를 막은 건 엘리엇이었다. 혹시나 윌리엄에게 쓸데없는 말을 꺼낼까 봐서 엘리엇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릴리벳을 곁눈으로 봤다. 눈치가 빠른 릴리벳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릴리벳. 윌리엄이 기다리잖아.”

“부부끼리 개인적이고 다정한 시간을 보내게.”

아서가 괜한 덕담을 덧붙였다. 아무리 엘리엇의 쌍둥이 동생이라도 기혼인 몸이니 빠지라는 뜻임을 윌리엄만 몰랐다. 릴리벳의 낯빛이 한층 싸늘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아서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은 표정이었다.

부부를 내쫒은 아서는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잘생겼으나 여전히 흉흉한 낯짝을 향해 엘리엇은 거침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자네도 그만 돌아가.”

“뭐?”

“자네 도움은 필요 없단 얘기야.”

“아니 그게 무슨.”

엘리엇은 연고 통을 꽉 쥔 채로 성큼성큼 방으로 돌아와 뒤따라오는 아서가 방 안으로 따라 들어오기 전에 홱 뒤돌아섰다.

“약은 발라야지. 가운데는 손이 안 닿잖아.”

“됐어. 물수건으로 냉찜질을 하면 돼.”

“그게 무슨.”

고집을 피우다 못해 집착하는 듯한 남자가 얼굴을 문 안으로 들이밀기 전에 엘리엇은 황급히 문을 쾅 닫았다.

“윽!”

마지막에 뭔가 부딪힌 느낌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엘리엇은 얼른 잠금부터 걸었다.

“이봐, 엘리엇. 내 코를 부러뜨릴 셈이야?”

아픈 코를 쥐고 있는지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셈이라는 건 안 부러졌다는 얘기군.”

“부러지진 않았어도 연골에 멍이 들 정도는 돼.”

“그럼 자네도 가서 물수건을 콧등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겠나?”

엘리엇은 콧방귀를 뀌면서 그를 무시했다.

잠시 문 앞에서 서성이던 기척이 이내 사라졌다. 잠시 후 엘리엇은 잠금을 풀고 문을 살짝 열어 복도를 살폈다. 드디어 포기했는지 아무도 없었다.

“하여간.”

엘리엇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입었던 셔츠를 다시 벗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등이 쑤셔서 미간이 구겨졌다.

“둘 다 똑같아.”

작년부터 내내 엘리엇과 치졸한 싸움을 거듭했던 아서는 그렇다 치고 릴리벳마저 유치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두 사람 간의 싸움은 누구보다도 감정적이었다. 누가 엘리엇의 멍 든 등에 약을 발라 주느냐를 두고 다투면서 정작 아픈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내심 서운할 지경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젊은 선남선녀 간의 은근한 관심이 어린 밀고 당기기인 줄 오해하겠지만. 릴리벳이 기혼임을 차치하고서도 둘이 서로를 향해 던지는 눈빛과 어조를 보면 그런 상상을 한 자체가 숙연해졌다.

“저런 둘을 두고 소설을 쓰다니.”

툭 까놓고 말하자면 얼마나 한심한 발상인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엘리엇은 욕실 수도꼭지를 열었다.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로드니아에 있는 타운 하우스는 대부분 온수 파이프를 갖추었으나 이 저택은 아직 그런 최신식 시설까지 갖추진 못했다. 대신에 높은 신분과 막대한 부로 이룩한 수동 온수 기능이 있었다. 지하에서 항상 물을 끓이고 있다가 욕실에 딸린 붉은 손잡이를 당겨 신호를 보내면 하인이 즉시 뜨거운 물을 양껏 가지고 왔다.

일단 온욕부터 하고 싶었다. 놀란 근육을 푼 다음에 냉찜질하려고 마음먹었다. 줄을 세 번 당겨 목욕물을 주문했다.

이후 엘리엇은 침실 한쪽에 쳐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벗었다. 목욕 가운을 입기 전에 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려고 거울에 등을 이리저리 비추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곧 문이 열렸다. 하인은 펄펄 끓는 열탕 두 양동이를 욕조에 부은 다음 찬물을 받아 온도를 맞추었다. 목욕 가운을 걸친 후 물 온도는 알아서 맞출 테니 그만 가 보라고 하려는 순간, 엘리엇은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혔다.

“자네가 왜 여기 있지?”

물 온도를 맞추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아서였다.

“목욕물 시켰잖아.”

“시켰지. 그런데 왜 자네가 들고 오냐고.”

“이렇게 큰 저택을 관리하는 하인에게는 고된 일이 많지 않나. 그들을 위해 가끔 친절을 베풀어도 좋지.”

친절입네 하지만 결국은 저 핑계로 방에 들어오고 싶었던 거다. 고심할 것도 없는, 투명한 꿍꿍이였다.

이미 옷도 벗은 상황이라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목욕 시중도 들 건가?”

“물론.”

두 팔을 둥둥 걷고 씩 웃는 남자를 향해 다가간 엘리엇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단 말이지.”

허리띠를 풀고 가운을 훌렁 벗었다. 엘리엇이 완벽한 나신이 되자 아서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뒤이어 입매가 사악하게 늘어졌다. 황급하게 이쪽으로 다가와 몸을 붙이려는 상대를 엘리엇이 막아섰다.

“시중을 드는 주제에 어딜.”

손으로 아서의 가슴을 쿡 밀친 다음 엘리엇은 욕조에 발끝만 담가 물 온도를 체크했다. 평소에 즐기는 적당한 온도였다. 욕조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등을 기대자 아서가 무릎을 굽혀 욕조 곁에 앉았다.

딱 좋은 온도긴 한데 등을 풀기에는 약간 미지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엘리엇은 음흉한 눈으로 젖은 제 나신을 훑었다.

“너무 미지근해. 뜨거운 물 한 양동이 더 가져와.”

“…….”

“얼른.”

내쫓듯 손끝으로 수면을 살짝 쳤다. 얼굴에 목욕물을 맞은 아서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분.부.대.로.”

어금니를 꽉 씹은 대답에서 앙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수작 없이 곧 밖으로 나갔다.

눈을 감고 따뜻한 온수에 몸을 푹 담갔다. 등이 여전히 아팠으나 아까보단 훨씬 나았다. 하지만 여유는 금방 끝났다. 어느새 나타난 아서가 뜨거운 물을 발치에 부었기 때문이었다.

“반만 부어.”

“…….”

눈으로 욕을 하면서도 아서는 시키는 대로 곧잘 했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진심을 드러내면 상대를 대할 때의 마음이 갑자기 너그러워지기라도 하나?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엘리엇도 똑같이 사랑을 고백했는데 특별히 아서에게 너그러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조금 편안해졌달까.

온수가 한층 따뜻해지자 굳은 몸이 빠르게 풀렸다. 등의 고통도 한결 나아졌다. 매끈한 욕조에 조심스럽게 기댄 채로 엘리엇은 게으른 한숨을 쉬었다.

첨벙.

아서가 양 소매를 둥둥 걷고 물 온도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선 얇은 거즈를 목욕물에 담가 적셨다.

“이제 됐으니까 그만 나가 봐도 좋아.”

“목욕 시중을 들어야지.”

“거기까진 안 해도 돼.”

“사양은 사양하지.”

고집스러운 작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젖은 거즈로 엘리엇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발끝이었다. 매끄러운 천이 발등과 발목을 스쳤다. 아서는 엘리엇의 곧게 뻗은 정강이뼈를 슬금슬금 닦더니 이내 굴곡진 종아리를 느긋이 문질렀다. 목욕 시중보다는 다리 매만지기에 심취한 손길이라 개운하기보다는 간지러웠다.

“뻔뻔한 수작 그만하고 몸이나 잘 닦지 그래?”

짐짓 굳은 음성으로 꾸짖자 아서가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미안.”

종아리를 놓은 그는 비누를 양손에 바르더니 엘리엇의 발에 손을 댔다. 손끝으로 발바닥을 간지럽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발가락 사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간지러워.”

“참아.”

아서의 두 손이 제 발목을 단단히 잡고 느긋하게 발가락을 매만지는데 단순한 간지러움을 떠나서 느낌이 야릇했다. 발톱을 꾹 눌렀다가 발끝을 쏙 빼면서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골을 슬슬 문질렀다. 그럴 때마다 기이하게도 저릿저릿한 감각과 함께 다리 사이가 찌르르 떨렸다.

“변태 같으니.”

이를 사리물고 이죽거리자 아서가 마치 엄한 부모처럼 엘리엇을 꾸짖었다.

“발가락 사이를 잘 닦아야지.”

그러면서 그는 일부러 손톱을 세워 발가락 틈의 여린 살을 꾹꾹 눌렀다. 비누 덕분에 아프진 않았는데 허리 언저리에서 옅은 전율이 일었다.

아서는 엘리엇의 발가락을 희롱하고 발바닥 볼록한 살을 엄지로 문지르다가 이내 발 아치 부근을 건드렸다. 언뜻 부모가 아기 발을 씻기는 모습처럼 보였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시커멓게 큰 사내와 그의 전직 정부(精夫) 관계여서야… 아가페가 아니라 에로스일 뿐이다.

찰방찰방.

엘리엇의 발을 실컷 가지고 놀다가 아서는 드디어 손으로 물을 떠서 비누 거품을 헹궜다. 더 해 보라고 다른 발을 척 내밀자 아서가 목을 울리며 쿡쿡 웃었다.

이번에는 비누칠하는 대신에 갑자기 몸을 숙여 습기를 잔뜩 머금어 부드러워진 발가락을 꼼꼼히 살폈다. 아서가 손가락으로 발가락 사이사이를 곱게 문지르는 모습이 조금 민망해서 엘리엇은 제 엄지를 꼼지락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서가 이를 세워 엄지를 살짝 깨물었다.

“무슨.”

놀란 엘리엇이 발을 뺐으나 아서가 붙잡는 힘이 더 셌다. 등이 아프니 몸짓을 크게 할 수 없었다. 아서는 의기양양하게 혀를 내어 엄지를 핥고 그도 모자라 엄지와 두 번째 발가락 사이를 더듬었다.

“추잡스럽고… 야해.”

비난을 던지는 음성에 한숨이 깃들었다. 이 정도 욕설은 분위기를 달구기 위한 향신료 정도로 여기는 아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하던 행위를 이어 갔다.

뜨겁고 매끄러운 살덩이가 발가락 사이를 희롱하고 이내 촉촉한 정강이뼈를 연주하듯 더듬었다. 느슨하게 풀어진 종아리 근육에 갈고리 같은 손가락 열 개가 꾸욱 박혔다. 근육 사이사이를 누르는 힘센 마사지에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옅은 신음을 터트렸다.

“흣.”

“다리가 뭉쳤어.”

“뭉친 게 아니라 근육이야.”

“그래?”

“뭉친 건 다른 쪽이라고.”

엉뚱한 부위에 정성을 들이는 멍청이라고 콕 찍자 상대가 엘리엇의 다리를 욕조 안에 다시 담갔다.

욕조 발치에 걸터앉아 있던 아서는 허리께까지 자리를 옮겼다. 욕조에서 물이 슬금슬금 넘친 덕분에 아서의 고급 바지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그러잖아도 짙은 색 옷감이 더 짙어지면서 경주마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훌륭한 허벅지를 강조했다. 엘리엇은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렇다면 어디를 만져 드려야 만족을 하실까.”

“알아서 찾아 봐.”

엘리엇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도발했다. 그러자 상대의 흉흉한 송곳니가 또 드러났다. 물에 젖은 커다란 손은 윤기가 감돌아 꼭 구리로 만든 동상의 거대한 손처럼 보였다.

물속으로 다시 들어온 긴 손가락은 아까부터 기이한 감각에 떨고 있는 허벅지를 스치듯 지나더니 수초처럼 흔들리는 샅으로 기어들었다. 반쯤 발기한 기둥의 뿌리를 무심하게 툭 건드리는 장난에 엘리엇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여기?”

“글… 쎄.”

“아니면 여긴가?”

아슬아슬하게 기둥을 스친 손이 딱딱하게 굳은 하복부에 닿았다. 엄지가 배꼽을 슬쩍 건드리더니 이내 위로 올라왔다.

아직 물이 식으려면 한참 걸릴 텐데 이상하게도 물보다 아서의 손이 더 뜨거웠다. 인두로 살갗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괜히 소름이 돋았다.

“뜨거워.”

“냉수를 더 부을까?”

“아니.”

아랫입술을 살짝 깨우는 동안 못된 손은 어느새 가슴팍까지 다가왔다. 아서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엘리엇의 유두 한쪽을 끼우더니 느릿느릿 문질렀다. 야릇한 감각에 물 밖으로 드러난 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여긴 멀쩡한 것 같은데.”

“거기가 아니라… 흐읏.”

“그럼?”

“너무 위로 올라왔잖아.”

노곤한 허리에 힘을 넣으면서 타박했다. 반쯤 일어선 성기 끝이 수면 위로 삐죽하게 나왔다. 가증스럽게도 아서는 그쪽을 전혀 모른 척했다. 평소에는 어떻게든 만지려고 난리를 쳤으면서.

이런 장난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엘리엇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서가 조르는 무언의 요구를 들어줄 용의도 살짝 있었다. 문제는 요구에 응했을 때 그것이 과연 적정한 수준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엘리엇은 상대를 향해 눈을 흘겼다.

“등이 아파.”

“그래서 목욕 시중을 들고 있지 않나.”

“그 덕분에 괜히 다른 것까지 필요해졌어.”

“뭐가 필요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책임지길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해.”

“의뭉스럽고 괘씸한 자식.”

“나도 네가 좋아.”

씩 웃는 낯짝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가득 채운 물의 부력에 힘입어 엘리엇은 제법 수월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쏴아.

물이 넘치면서 아서의 바지를 흠뻑 적셨다. 남자의 진득한 욕망이 떨어지는 시선은 내내 엘리엇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엘리엇은 홀린 듯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춥.

입술보다 혀가 먼저 닿았다. 혓바닥을 비비고 얽었다. 아서 글래스턴을 이루는 갖가지 기관 중에 유일하게 여린 부위의 매끄러움과 뜨거움을 실컷 즐겼다. 고개 각도를 틀어 가며 숨이 차도록 아서의 입술과 혀를 핥고 더듬었다.

“옷이 다 젖었어.”

“욕실에서 벗지 않는 사람의 잘못이야.”

그러면서 엘리엇은 아서의 손을 잡아 제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었다.

“여기… 여기를 제대로 씻겨 줘야지.”

“음탕한 녀석.”

뻔뻔한 작자가 느릿느릿 엘리엇의 약점을 만지기 시작했다. 미적지근한 움직임은 강렬한 자극을 바라는 처지에선 성질만 건드릴 뿐이었다.

“그걸 지금 시중이라고 하는 거야?”

“뭐가 마음에 안 드실까?”

엘리엇은 아서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물이 철렁였고 덕분에 아서의 조끼와 셔츠까지 반쯤 젖었다.

“목욕 시중은 보통 다른 막중한 임무도 겸할 텐데.”

“어떤 임무?”

알면서 말장난을 걸어온다. 이쪽에서 먼저 부끄러운 말을 내뱉어야 할 타이밍이건만. 순순히 아서의 의도에 따르기엔 엘리엇, 제 성격이 녹록지 않았다.

“됐어. 이만 나가 봐도 좋아.”

“목욕은?”

“근육이 너무 풀어져도 상처에 안 좋아.”

엘리엇은 냉정한 태도로 일어나 욕조 밖으로 나갔다. 수건을 찾는데 딴에는 목욕 시중을 든다는 작자가 눈치 빠르게 도톰한 목욕 가운을 걸쳐 주었다. 머리를 적시진 않아서 대충 몸만 닦고 나왔다.

온욕 덕분에 등이 덜 쑤셔서 이대로 오후 티타임 전까지 한숨 자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전에 어중간한 자극으로 짜증 난 성기부터 달랜 후에 말이었다.

“이만 나가 봐.”

“아직 안 돼.”

“왜?”

휙 돌아보는 엘리엇을 향해 아서가 연고 통을 들어 보였다.

이제 와서? 여러모로 짜증이 급격히 치솟았다. 잘생긴 낯짝을 보며 인상을 팍 썼다가 금방 마음을 바꿨다. 어쨌거나 등에 연고는 발라야 하니까.

엘리엇은 다시 목욕 가운을 벗고 나신이 된 채로 침대에 올라갔다. 온수 찜질을 해도 여전히 등은 아팠고 엎드리는 동안 저절로 신음이 났다. 베개를 끌어와 가슴 언저리에 받치고 두 손을 포개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안 아프게 발라.”

“노력해 보지.”

연한 철제 갑으로 된 연고 통이 열리고 약 냄새가 났다. 미끄덩한 연고를 듬뿍 뜬 아서는 제 양 손바닥을 비빈 후에 엘리엇의 허리 언저리를 슬쩍 문질렀다.

“흐음.”

찰 줄 알았는데. 돌팔이 시중의 뜨거운 손 때문인지 연고가 미지근했다. 허리와 등골을 천천히 문지르던 손은 이내 위쪽으로 올라왔다. 날개뼈 사이가 제일 문제였다. 덕분에 팔을 움직일 때마다 욱신대곤 했다.

“여기. 색깔이 엄청나군.”

“어떤데?”

날개뼈 한가운데는 아까 거울로도 제대로 비추어 보지 못했다. 팔을 높게 들기도, 고개와 상체를 틀기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보라색이야. 거기다가 이거 느껴지나? 굴곡이 있어.”

“젠장. 아파. 더 살살 해.”

“최대한 살살 하고 있어.”

거짓은 아닌지, 아서의 손길이 더욱 섬세해졌다. 연고를 다시 듬뿍 떠서 손바닥 전체에 바른 후에 엘리엇의 어깨뼈와 날개뼈를 꼼꼼하게 문질렀다. 약효가 돌면서 곧 등이 후끈거렸다. 약통을 거의 비운 아서는 욕실에서 차갑게 적신 물수건을 가져왔다.

“흣… 차가워.”

“부기부터 빼야 해. 조금만 참아.”

“후우.”

엘리엇은 한껏 긴장한 몸에서 힘을 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엉덩이에도 멍이 있어.”

“그래? 어쩐지 앉을 때마다 아프더라니.”

“약을 발라야겠는걸.”

남은 약을 싹싹 모은 아서는 엘리엇의 엉덩이 윗부분을 문질렀다. 한 손으로 한쪽 엉덩이를 붙잡고는 반죽을 하듯 꾹꾹 눌렀다.

“…약 바르는 거 맞아? 왜 이렇게 거칠… 읏.”

아서는 갑자기 엄지 두 개로 엘리엇의 엉덩이를 쓱 벌리면서 개소리를 해 댔다.

“엉덩이 골에도 멍이 있군. 약을 발라야겠어.”

“뭐라고?”

미끄덩한 손가락이 은밀한 부위를 스스럼없이 건드렸다. 순간 엘리엇은 옅은 비명을 질렀다.

“가… 갑자기.”

“목욕 때문인가.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워.”

“거기가 거칠고 딱딱한 게 이상한 거지. 미친 자식.”

엘리엇은 베개를 틀어잡으면서 항변했다.

“흐음. 여긴 네 가시 돋친 혓바닥에 비하면 아주 귀엽고 솔직한 곳이라 마음에 쏙 들거든. 혹시나 다쳤을까 봐서 걱정했단 말이야.”

“형편없는 변태 새끼.”

뻔뻔할 정도로 무심한 태도로 아서는 발정한 암소의 상태를 살피는 수의사처럼 무심하게 구멍 내부를 더듬었다.

치욕스러운 점은 수십 번은 더 했던 구멍 점검을 한다는 게 아니었다. 저런 무뚝뚝한 손길에 더욱 불타오른 성기가 대번에 딱딱하게 굳어 버린 것이다. 덩달아 얼굴이 후끈거렸다.

‘빌어먹을. 아프다고 세우다니.’

성적 자극에 약한 줄은 알았는데. 거칠고 아플수록 좋긴 한데. 등의 아픔과 구멍의 열기가 합쳐져서 발기할 줄이야. 이건 뭐 때리고 쑤시면 벌떡 세우는 미친놈과 뭐가 다른가.

연고가 녹아 질척였다. 구멍이 녹진하게 풀어지면서 저릿한 감각이 엘리엇의 하체 전반을 감쌌다. 그 짓에 환장한 변태처럼 굴고 싶지 않지만. 내부를 드나드는 손가락에 어쩔 수 없이 반응하고 말았다.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수치심에 엘리엇은 이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입술이 비틀어질 만큼 꽉 다문 중에도 콧소리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흐음.”

고통인 듯, 혹은 쾌감인 듯 미묘한 비음이 흘렀다. 그러자 구멍을 드나들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더 교묘해졌다.

“…그만하면 충분히 바른 것 같은데.”

“아직.”

“아예 연고를 다 쓸 셈이야?”

“필요하다면.”

말려 보아도 아서는 듣지 않았다. 구멍 안팎을 미끈하게 적신 것도 모자라 회음을 지나 고환까지 미끈거리는 손이 닿았다.

“흣.”

꾹 달라붙은 엉덩이와 허벅지를 가르면서 굵은 손목이 들어왔다. 이젠 약을 바른다는 핑계도 내던져 버린 파렴치한 작자에게 저항하느라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가랑이를 꽉 조이는 만큼 압박감이 심해져서 괜한 자극만 커졌다. 그러는 중에도 놈은 지치지도 않고 손목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엘리엇의 고환과 회음을 자극했다. 때때로 발기한 성기 뿌리를 건드리기도 했다.

“하아.”

숨을 몰아쉴 때마다 흐릿한 통증과 은은한 쾌감이 뒤섞였다.

엉덩이 골을 한참 뒤적거리던 놈은 별안간 손을 빼 버렸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심술궂은 개자식이 자상하게 물었다. 뻔한 속셈을 가지고 벌이는 뻔한 수작질이 꽤 못마땅하지만.

“…아니.”

엘리엇은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래?”

고개를 돌리자 꽤 놀란 듯 눈을 껌뻑이는 놈의 면상이 한가득 들어왔다. 엘리엇이 변태라고 매도하며 역정을 내길 기대했을 터.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나.

심한 타박상을 입었고 긴 온욕으로 몸이 풀어졌고 변태스럽고 짜증 나는 방식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상대의 극진한 돌봄까지 받았다. 거기다가 둘은 예전과는 다른 관계가 아니었던가.

“뭐가 더 필요하십니까?”

“아서 글래스턴.”

“…….”

엘리엇은 아서의 짙은 눈동자를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거친 남성적 마스크에 어렸던 장난기가 사라졌다. 대신에 활활 불타는 욕정과 함께 탐욕스러운 소유욕이 떠올랐다.

거대한 그림자가 갑자기 엘리엇의 위로 드리워졌다. 그는 우월한 체구를 한껏 활용해 네발 달린 짐승과 같은 자세로 엘리엇 위에 자리를 잡았다. 어두운 그림자에 푹 잠긴 엘리엇은 가까이에서 빛나는 날카로운 눈동자에 사로잡혔다.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 것 같은 폭력성이 내재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꾹꾹 참는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매력적이었다.

한때 엘리엇의 자존심을 완전히 박살 내기에만 몰두하여 잔인한 단어와 차가운 문장을 내뱉었던 사악한 입술엔 비틀린 조롱 없이 순수한 욕정이 감돌았다.

냉혹한 비난에 상처받았던 심장이 새로운 감각에 술렁거렸다. 조여 오는 긴장감을 참지 못했다.

“…아서.”

헐떡이는 숨결이 어느 틈에 가까워진 상대의 입술에 부딪혀 다시 돌아왔다. 엘리엇이 다시 나른한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아서는 입술을 겹쳤다.

둘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붙었다가 떨어지고 각도를 비틀어 다시 포근하게 겹쳐졌다.

엘리엇은 엎드린 자세로 그의 입술을 환영하느라 등을 비틀어 젖혔다. 상당한 통증이 몰려왔으나 달콤한 입맞춤이 통증의 상당 부분을 상쇄했다.

“흐음.”

엘리엇이 낮은 콧소리를 내면서 미간을 찡그리자 아서의 입술이 떨어졌다. 너무 짧은 키스였다.

“왜?”

엘리엇은 눈을 뜨며 반문했다.

“등, 아프잖아.”

걱정 어린 아서의 대답에 엘리엇은 작게 코웃음 쳤다.

“진심이야?”

“너를 더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면 키스를 멈출 게 아니라 좀 더 편안한 자세로 할 수 있도록 도와야지.”

타박에 아서가 웃었다.

아래를 난잡하게 만지던 손이 엘리엇의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왔다. 마치 게으름 피우는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자세 같았다.

“윽, 무슨 짓이야.”

엘리엇은 타박했다. 그다지 화난 투는 아니었다.

“등만 닿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아서는 씩 웃으며 엘리엇이 제 무릎 위에 앉아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도왔다. 엘리엇은 여전히 알몸이었다. 덕분에 불쑥 솟은 성기가 아서의 딱딱한 배에 닿았다.

“여기는 아주 기운찬데.”

“누구누구 덕분에.”

“책임져야 하나?”

“물론.”

엘리엇은 아서의 미적대는 손을 잡아 제 성기에 감았다. 아직 연고가 남아서 그런지 커다란 손은 꼿꼿하게 일어선 기둥 표면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꽉 쥐지도, 그렇다고 전혀 압박이 없는 것도 아닌, 가볍게 훑어 내리는 동작이었다.

“후우.”

평소에 하던 짓거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렸기에 직접적으로 와 닿은 손길은 충분한 희열을 선사했다.

아서가 짓궂은 장난을 치기 전에 엘리엇은 제 손으로 그의 손을 꾹 눌렀다.

“여긴 전혀 다치지 않았어.”

“그래?”

속뜻을 알아들은 상대는 곧장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헉.”

꾹 누르는 힘에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젖힐 뻔했다. 만약 등이 아프지 않았다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두 팔로는 아서의 목을 감은 채.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활활 타오르는 등 때문에 뒤로 쓰러지는 대신에 앞으로 숙이기를 택했다. 아서의 어깨를 앞니로 갉으면서 엘리엇은 통증을 참았다.

“그만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실컷 가지고 논 주제에.”

통증과 쾌락을 동시에 감당하느라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엘리엇은 정욕에 물든 상대의 낯짝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가지고 놀다니. 어디까지나 간병이었어.”

“거짓말만 늘어놓는 남자는 형편없어.”

엘리엇은 상대의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피가 비칠 만큼은 아니었으나 아서의 짙은 눈썹이 아픔에 움찔거렸다.

“엘리….”

“시끄러워. 정말로 나를 생각한다면 닥치고 네 흉악한 물건이나 꺼내.”

엘리엇은 다소 성급하게 손으로 아서의 샅을 파헤쳤다.

“하여간 침대에선 천박하기 짝이 없어.”

“치료 핑계로 남의 구멍이나 들쑤신 분께서 할 말인가?”

“피차일반이긴 하군.”

아서는 씩 웃으면서 엘리엇의 입매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딱히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아도 도합 네 개나 되는 손이 아서 글래스턴의 바지춤을 끌렀다.

퉁, 하고 올라오는 거대한 물건은 엘리엇의 성기만큼이나 딱딱했다. 줄곧 이런 상태였을 텐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옅은 웃음만 머금으며 얼마나 참았을까. 엘리엇은 뜨끈뜨끈한 기둥의 선단을 손바닥 한가운데로 슬그머니 문질렀다. 아서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이런 꼴을 하고서 그만하자고 했어?”

“참을 수 있거든.”

“하. 아서 글래스턴. 넌 쓸데없이 참을성이 많아.”

“엘리엇 너는 참을성이 너무 없어.”

“둘이 합쳐 나누면 딱 좋겠군.”

엘리엇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곧장 엉덩이를 세워 기둥 위로 내렸다.

“흐읏.”

굵직한 귀두 덕분에 처음에는 저항이 있었지만 노곤하게 풀린 구멍은 이내 느슨해졌다. 오므라진 부분이 끈적한 마찰음과 함께 벌어지더니 딱딱한 기둥의 끝을 맛있게 삼켰다. 곧은 기둥의 반이 엘리엇의 내부로 사라졌다.

“흐음.”

내내 웃음기만 비치던 아서가 신음했다. 굵고 단단한 기둥이 하복부를 벅차게 채우는 만큼 엘리엇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두 팔로 그의 목과 어깨를 구속하고 살짝 벌어진 입술을 즉시 머금었다.

혀과 혀가 부딪혔다. 숨이 섞이고 동시에 가장 뜨거운 부위가 들러붙었다. 아서는 엘리엇의 남성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손을 놀렸다. 그에 호응하면서 엘리엇은 아서의 중심을 꽉 조였다.

짙은 비음이 흘렀다. 엘리엇과 아서 누구랄 것도 없었다. 키스를 이어 가는 내내 미간은 동시에 일그러졌으며 흘러내린 땀방울이 타아 구별 없이 섞였다. 엘리엇의 성기는 뜨거운 손안에서, 아서의 성기는 습한 내부에서 쾌락을 추구했다.

난폭한 움직임은 없었다. 대신에 천천히, 노골적이고 추잡스러운 리듬으로 두 사람의 몸은 흔들렸다. 느리고 부드러운 행위는 아서의 묵직한 성기가 엘리엇의 내면을 충분히 탐색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었다.

“흐으… 읏.”

“후.”

부드럽게 무두질한 가죽을 씌운 쇠막대 같은 성기가 내벽을 짓이겼다. 드러나지 않은 남성의 약점인 전립선을 꾹꾹 누를 때마다 엘리엇은 아찔해서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은은하면서도 그 무엇보다 뜨겁게 타오르는 숯덩이가 내장을 들쑤시는 느낌이었다.

하복부에서 시작된 불길은 이미 통증으로 씨름하는 등을 타고 올라가 귀에 이르렀다. 평형 기관이 있는 내이(內耳)가 녹아 곤죽이 되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시야에는 오색 찬연한 섬광이 터졌다.

“하… 아서.”

힘이 빠지는 팔로 아서를 꽉 붙들었다.

“엘리엇.”

저를 부르는 아서의 음성은 젖었음에도 거칠었다. 꼭 폭주하는 계곡 물살처럼. 그는 엘리엇의 내부에 제 것의 모양 그대로 흔적을 남기려 했다.

“천… 천히… 시간은 많아.”

“하면 할수록 목이 타서 못 참겠어.”

참을성을 칭찬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제 성기로 내장을 푹푹 쑤시면서도 엘리엇을 졸랐다. 뭐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내게는 아편을 끊으라고 해 놓고 정작 넌 즐겼나 보군.”

“아편이 아니야. 마취도 없이 총알을 빼낼 때 말고는 아편을 먹진 않아.”

마취도 없이 총알을 빼내? 아서의 온몸 군데군데 남아 있는 흉터는 그가 대단히 험악한 생활을 해 왔음을 짐작하게 했으나 총에 맞은 줄은 몰랐다. 그러나 당장 궁금한 건 그쪽이 아니었다.

“그럼?”

“너.”

“뭐?”

처음에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움직임을 멈추고 빤히 바라보는 그를 응시하는 동안 엘리엇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어떻게 나는 네게 중독되었다는, 지극히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표현이 아서 글래스턴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설마 아니겠지 하는데. 망할 아서 놈이 확인 사살했다.

“엘리엇, 네게 중독되었어.”

에로스적인 분위기가 순식간에 희극으로 변했다. 엘리엇의 얼굴이 잘 익은 딸기 색깔이 되어 버렸다.

“미, 미쳤어? 그, 그런 부끄러운 말을!”

“사실이야.”

“사실이든 아니든. 입 밖으로 내뱉을 말이….”

엘리엇은 상대의 목에 둘렀던 손을 떼고 즉시 얼굴을 가렸다. 활활 타오르는 면상을 벅벅 문지르는데 아서가 물었다.

“뭐가 그렇게 수치스러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내심 경악하여 반문하자, 아서는 코웃음을 쳤다.

“네 구멍에 내 성기를 쑤셔 넣었거든? 부끄러워할 게 따로 있지.”

“육체적 쾌락과 감정적 고백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

원하지도 않는 수치스러운 말을 늘어놓으면 이 짓도 곧 못 하게 될 거라고 엘리엇은 아서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아서가 갑자기 허리를 튕겼다. 내벽에 충격이 닿았다. 눈앞이 아찔했다.

“읏!”

명백한 항의였다. 전율을 간신히 견뎌낸 엘리엇은 풀어 헤쳐진 놈의 셔츠 옷깃을 확 틀어잡았다.

“하. 성질머리 하곤.”

멱살이 잡힌 아서는 재차 코웃음을 치며 엘리엇의 비틀린 입매에 키스했다.

“천천히 익숙해지도록 노력하지.”

“평생 안 익숙해져.”

“사랑해.”

“…….”

“이것도 안 되나?”

뻔뻔하게도 아서는 무구한 낯짝을 만들어 보였다. 낭만과는 절대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거친 미남자의 담백한 고백은 엘리엇의 심장을 아프도록 흔들었다. 가슴이 뻐근해져서 저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비겁한 자식.”

멱살을 잡았던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스르륵 내려온 엘리엇의 이마가 상대의 이마에 닿았다. 동시에 코끝도 만났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사랑해.”

“다시.”

“사랑해.”

초점을 맞추기 어려운 거리에 짙은 안구가 있었다. 순수한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표면에 벌거벗은 남자의 상이 비쳤다. 땀에 젖은 금발을 가진 그의 뺨은 여름 햇살을 받은 복숭아색이었다. 사실은 너무 좋지만 내심 좋은 걸 들키면 지는 것 같아서 일부러 얼굴을 잔뜩 굳힌 10살짜리 꼬마 남자애 같은 얼굴.

제 얼굴이 더 부끄러워 엘리엇은 그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몸을 떼진 않고 오히려 두 팔로 아서의 목을 꼭 감아 붙들었다.

“엘리엇?”

“움직여.”

오만한 명령조가 튀어 나갔다.

“…하.”

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잘 들었는지. 아서는 군말 없이 몸을 움직였다. 결합 부위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 뜨거운 게 아니라 가슴에 지펴진 불씨가 너무 거세서 모든 정신이 그에 쏠렸기 때문이다.

석탄을 퍼부은 화로처럼 심장이 폭주했다. 누군가가 엘리엇, 제 귓불을 잡아당기면 양 귓구멍으로 빼액, 하고 거센 증기가 나올지도 몰랐다. 이대로 영원히 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느긋한 움직임은 폭주하는 맥박과 호흡을 전혀 늦추지 못했다. 엘리엇은 아서의 품에 안긴 채로 곧 절정을 맞았다.

“하윽!”

바짝 선 성기가 잔뜩 고인 희열을 토했다.

황홀한 해방감이 드는 동시에 시야가 꺼졌다. 갑작스러운 밤이 찾아왔다. 순간적으로 차오른 전율이 전신의 혈관을 꽉 조이고 시신경을 마비시킨 탓이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 엉덩이 골이 움푹 파였다. 게걸스럽게 남성을 빨아먹던 구멍이 강하게 수축했다.

“큭.”

내면을 두드리던 거대한 성기가 뜨거운 액을 토해 이미 습한 내면을 더 축축하게 적셨다.

“하아.”

전율이 가신 직후 엘리엇은 낮은 한숨과 함께 늘어졌다. 부상과 더불어 긴 온욕이 체력을 깎아 먹은 중에 아찔한 정사까지. 졸도하지 않은 게 용했다.

“괜찮아?”

딴에는 자상한 연인이 되고 싶은지 아서는 엘리엇이 몸을 천천히 누일 수 있도록 거들었다. 정수리까지 뚫을 기세인 거대한 성기를 배려 없이 쑥 빼면서 말이었다.

“흑.”

뒤이은 저릿함에 엘리엇은 숨을 멈추고 말았다. 발이 가지를 붙잡은 새발같이 한껏 오므려졌다. 추위에 떠는 애벌레처럼 웅크려서 바들바들 떠는 몸에 뜨거운 손이 닿았다.

“숨을 쉬어.”

부어오른 등을 깃털처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아서가 속삭였다.

“흐으응.”

날숨이 떨렸다. 어느새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던 아서가 금방 침대를 벗어났다. 어디를 가나 싶더니 욕실에서 물수건을 만들어 왔다. 온수가 남았는지, 더러워진 가랑이 사이에 닿은 물수건은 제법 따뜻했다.

정액과 땀을 닦은 후에 그는 다시 연고 통을 가져와 등에 발랐다. 심지어 엉덩이도 지분거렸다.

이런 미친 작자가 있나.

“또 하게?”

“무슨 개망나니 같은 소리야.”

연고를 바르던 아서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엘리엇을 봤다.

“그런데 거길 왜 또 건드려.”

“정말로 멍이 들었어.”

“…….”

진짜 멍이 들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등 때문에 멍이 번진 건가.

“또 벌떡 세우지는 마. 오늘은 한 번으로 만족해.”

약을 바르던 상대가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듯이 잔소리를 했다.

“하여간. 시도 때도 없이 밝히긴. 멍이 다 가라앉으면 다리가 풀릴 때까지 마구 박아 줄 텐데. 그걸 못 참고 세우다니.”

순간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마치 엘리엇이 조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했다는 투였다.

“누가 세웠다고. 네가 먼저 이상하게 만지니까 그렇지!”

“난 약을 발랐을 뿐이야.”

“약을 누가 그렇게 저질스럽게 바르나?”

“하. 생사람을 잡는군.”

뻔뻔하게도 아서는 결백을 가장했다.

“연고 그만 발라!”

씩씩대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크게 호통을 쳤는지 폐가 들썩였다. 덕분에 등이 아파서 끙끙 앓았다.

“진정해.”

“내가 그렇게 하도록 비겁하게 함정을 팠으면서. 결국엔 나를 비난하지. 이 망할 협잡꾼 같으니.”

억울함이 치밀어 날 선 비난을 마구 던졌다. 더한 욕설로 놈의 자존심을 득득 긁으려다가 참았다. 화가 나도 이젠 아서를 상처 입히고 싶진 않았다. 대신에 엘리엇은 죄 없는 베개를 쿡쿡 내리눌렀다.

“욕이 짧은데?”

약통과 젖은 목욕 가운을 정리하던 아서가 엘리엇을 곁눈질하며 씩 웃었다.

“내가 알던 엘리엇은 더 저열하고 사악한 욕설을 구사했는데 말이지.”

“너 따위를 좋아하게 되는 바람에….”

도를 넘어서는 끔찍한 말은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아무리 짜증 나게 굴고 때때로 한 대 패 주고 싶을 만큼 울컥해도… 결국은 그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최선 어린 저주를 퍼붓는 유치한 짓은 그만둘 때가 되었다.

“그거 안됐군. 엘리엇.”

돌아온 빈정거림 속엔 만족감이 가득했다.

“흥. 그래 봤자 내 발가락이나 핥는 주제에.”

엘리엇이 쏘아붙이자 아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 발가락은 혓바닥이 달려 있지 않아서 말이지. 간지럽힐 때마다 움찔하는 모습이 네 구멍만큼 귀엽거든.”

능글맞게 받아친 아서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 엘리엇의 곁에 몸을 뉘었다. 등 때문에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린 엘리엇과 다르게 그는 모로 누워서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는 경계하는 엘리엇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왜 내 침대에 눕는 거야? 그것도 귀엽지 않은 얼굴이 있는 쪽에 가깝게.”

“귀엽진 않아도 말이지. 네 화난 얼굴은 세상 어떤 것보다 매력적이니까.”

“뭐? 미움받는 게 좋은 거야? 변태 자식.”

“아프게 당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딱히 받아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니까. 물론 아서 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해서 상대의 과도한 만족감을 부추길 필요까진 없었다.

“피곤해.”

“쉬어.”

혼자 쉬고 싶다는 얘긴데 아서는 알면서도 딴청을 피웠다. 실랑이를 벌일 기력도 남지 않아 그저 눈을 감자 아서가 친절하게도 면 시트와 담요로 알몸을 덮어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총질을 하거나 남의 구멍이나 뒤적거리던 큰 손으로 엘리엇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아기인 줄 아는 건가?’

어이가 없었다. 눈을 뜨고 지척에 있는 놈의 낯짝을 빤히 봤다.

“왜? 굿나이트 키스라도 해 줘?”

“아니.”

부정하면서 엘리엇은 면 시트를 끌어당겨 얼굴을 반쯤 가렸다. 직후 아서가 한 질문에 내재한 오류를 지적했다.

“아직 대낮이야.”

“그럼 밤에 해 줄게.”

“됐어. 아기가 아니야.”

“하지만 연인이잖아.”

듣고 보니 그건 맞다. 눈을 살짝 치켜떴다가 도로 감았다. 이따가 밤에 굿나이트 키스를 핑계로 또 이런저런 야한 짓거리를 할 심산이겠지. 노곤해서 그런지 별로 반발심이 들진 않았다. 어쩌면 기대가 되기도 하고.

노곤하고 평화로웠다.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이럴 때 차를 한잔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들겠지만. 굳이 그럴 이유는 없다. 긴 휴식은 부상자의 권리였다. 그러나 잠을 자기엔 조금 아까웠다.

아서 글래스턴과 함께 누워서 누리는 작은 평화라니.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앞으로 더 오래, 더 자주 즐길 수 있겠으나 지금 신비로운 평정을 충분히 맛보고 싶었다.

숨을 쉴 때마다 아서의 향기가 느껴졌다. 춤을 출 때 자주 맡았던 여인들의 부드럽고 향기로운 냄새와는 달랐다. 그렇게 강하지 않은 남성용 향수 냄새에 궐련으로 추정되는 스모크 향이 어우러졌다.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이 찾아온 지금이 딱 적당한 때였다. 엘리엇은 전부터 하려고 벼른 얘기를 꺼냈다.

“릴리벳과 너무 다투지 마.”

“내가 원해서 다투는 게 아니야. 그 애가 우리 둘 사이를 훼방 놓지만 않는다면 다툴 일도 없어.”

돌아오는 아서의 어조는 평이했다.

“훼방 좀 놓으면 어떤가.”

엘리엇이 대답하자 등을 문지르던 손길이 뚝 멎었다. 엘리엇은 안고 있는 베개에 묻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서는 놀란 눈치였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내 여동생이야. 왜 그렇게 못마땅해하지?”

“릴리벳은 너와 나를 갈라놓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

아서가 억울해했다.

“내가 남자와, 그것도 과거에 악연이었던 너와 사귀는 걸 단번에 이해할 순 없겠지. 하지만 진심으로 그러는 건 아닐 거야. 분명.”

“아니긴. 넌 그 애를 너무 얕잡아 보고 있어.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내게 총을 쏴 버렸을걸.”

아서가 너무 심각하게 말한 덕분에 엘리엇은 쿡쿡 웃고 말았다.

“엘리엇,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릴리벳 결혼식에 나타났을 때 엽총으로 내 가랑이를 쏠 기세였는데 말이지.”

“그건 그래.”

“이 빌어먹을 쌍둥이 자식들. 하나는 결혼했고 하나는 연인이 있잖아. 그만 서로를 놓아주라고. 윌리엄에게도 내게도 할 짓이 아니잖아.”

“천천히 나아질 거야.”

“그 전에 내가 질투로 미쳐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내 연인의 상처를 돌보는 일도 일일이 방해받아야 하니까.”

“약은 누가 발라도 상관없잖아. 키스도, 섹스도 자네랑만 하는데.”

“육체는 물론이거니와 정신까지 내 것이 되어 줘.”

엘리엇은 그에게 입술을 겹쳤다.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며 옅은 물소리가 났다. 동시에 입술이 다시 가까워지면서 혀가 얽혔다. 간지럽히듯 아서의 혀를 살짝 빨았다가 떨어진 엘리엇은 아직 키스의 여운이 남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미 그러고 있어.”

“하. 믿을 말을 해야지.”

“나를 못 믿는 건가?”

엘리엇은 믿는다는 말을 차마 뱉지 못하는 아서의 입가에 입술을 살짝 대었다가 뗐다.

“릴리벳과의 싸움에만 몰두해서 정작 내게 관심이 없었던 주제에.”

“무슨?”

“릴리벳과 싸울 만큼 기운이 남아돈다면 내게 좀 써 주는 게 어떻겠나?”

그리고 두 팔을 뻗어 멍하게 굳은 아서의 어깨를 감쌌다.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야. 그게 설령 내가 목숨만큼 사랑하는 쌍둥이 누이라도 말이야.”

고개를 다시 기울여 아서와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고 달콤한 키스가 이어졌다. 아서의 두 손이 엘리엇의 부은 등을 섬세하게 더듬었다. 그 연약한 아픔마저 황홀했다.

“나도 너를 독점하고 싶어. 찰리도 릴리벳도 그 외 다른 누구도 없는 곳에서.”

“레이디 클레어도 없는 곳에서?”

엘리엇이 짐짓 장난스럽게 되묻자 아서가 깊은 키스를 해 왔다. 혀와 혀가 얽혔다.

“물론. 너와 단둘이서만 있고 싶어. 둘만 있을 수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자.”

“어디?”

“고향으로.”

***

오후.

차를 마시기 위해 서던데일 필즈에 머무르는 주인과 손님이 모두 모였다. 엘리엇도 함께였다.

그 자리에서 아서가 먼저 쏜힐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엘리엇의 핑계까지 만들어 두었다.

“갑자기 왜?”

“엘리엇의 상처를 돌봐야지. 여긴 의사가 오려면 오래 걸리니까.”

격렬한 행위로 멍이 한층 진해진 등을 핑계로 삼았다. 다들 엘리엇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심지어 레이디 클레어마저도 사고를 직접 목격한 만큼 우려가 컸다. 덕분에 엘리엇은 모두가 보는 곳에서 셔츠를 벗어 등을 보여야 했다.

“세상에.”

“피부가 완전히.”

“연고가 소용이 없었던 거야?”

사실은 아서와 그 짓을 하는 바람에 더욱 심해진 건데 그걸 있는 그대로 발설할 순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짐작은 능히 할 릴리벳이 충격으로 손을 떨었다. 손에 들린 찻잔이 달그락대자 윌리엄이 릴리벳을 감싸며 찻잔을 대신 들어 탁자에 놓았다.

“여보. 괜찮아?”

“릴리벳,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냥 멍이 좀 심하게 든 것뿐이니까.”

셔츠 단추를 채우면서 엘리엇이 동생을 위로했다. 하지만 릴리벳의 시선은 엘리엇이 아닌 아서를 향했다. 적개심이 불타다 못해 아서를 죽일 기세였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해요. 제가 아는 의사 중에 낙상을 잘 돌보는 사람이 있으니 소개장을 써 드리죠.”

“고맙습니다. 레이디 클레어.”

레이디 클레어가 하인을 불러 펜과 종이를 청했다. 즉석에서 소개장을 쓰는 동안 아서는 엘리엇이 로드니아에서 의사를 만나 진찰을 받은 후에 고향에서 느긋하게 휴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이디 클레어가 소개해 준 의사가 실력이 좋다고 하니 진찰을 받고 약을 바르면 금방 나을 거야.”

지나친 걱정으로 얼굴이 파리하게 굳은 누이를 우려해 엘리엇이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엘리엇에게서 어떻게든 쌍둥이 누이를 떨쳐 놓을 속셈으로 아서는 괜히 부상 정도를 과장했다.

“저렇게 큰 멍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두면 나중에 뼈까지 상할 가능성이 있어.”

“그건 맞아요. 낙상은 겉보기와 달라요. 처음에는 잘 움직여도 한 달, 혹은 두 달이 지나서 갑자기 뼈가 썩는 경우가 있답니다. 먼 친척 중에 말에서 떨어진 직후엔 이상이 없다가 나중에 꼽추가 되신 분이 있어요. 알고 보니 뼈에 아주 가는 금이 간 걸 모르고 근육통이라고만 여기며 계속 움직이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더군요.”

소개장을 쓰던 레이디 클레어가 끼어들었다.

“꼽추?”

“세상에!”

꼽추라는 말에 릴리벳과 찰리가 기겁했다. 당장 치료하러 가자고 릴리벳이 난리를 피웠다.

“엘리엇, 지금부터 꼼짝도 하지 말게! 당장 로드니아에 사람을 보내!”

찰리는 하인을 불러 의사를 데려오라고 성화였다. 그러자 아서가 또 나섰다.

“의사를 내내 독점할 순 없잖나. 로드니아에 가면 수시로 볼 수 있으니 그게 더 나아.”

“여보, 우리도 짐을 싸야겠어요.”

릴리벳이 걱정을 금치 못하고 윌리엄에게 말했다. 윌리엄은 아내를 깊이 사랑했으므로 릴리벳의 말에 어떤 반대도 없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걱정하지 마. 오빠가 꼽추가 되더라도 영원히 사랑할 테니까. 내가 함께 있을 거야.”

“아니, 누가 꼽추가 된다고.”

이번엔 엘리엇이 기겁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돌아가야겠군요.”

레이디 클레어가 막 다 쓴 소개장을 봉투에 넣으면서 일어섰다. 그녀는 소개장을 엘리엇이 아닌 아서에게 건넸다.

“뭐라고? 도착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당황한 찰리가 좌중을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제인 플레커 양의 앞이었다. 그녀는 레이디 클레어의 일행이니 당연히 함께 움직일 터였다.

“그럼 저도 함께.”

“플레커 양.”

찰리가 레이디 클레어와 제인 플레커 양을 초대한 진짜 목적이 무산되려 하는 순간이었다. 플레커 양과 어떻게든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찰리의 간절한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엘리엇은 오랜 친우의 요청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모처럼 다 같이 놀러 온 게 아닌가. 로드니아의 나쁜 공기는 건강에 좋지 않아. 릴리벳은 휴식이 필요해.”

“하지만 꼽추라잖아.”

“사랑하는 누이야. 너는 내가 꼽추가 되길 바라니? 왜 그런 흉악한 말을 계속하는지 모르겠군.”

패닉에 빠진 릴리벳을 엘리엇이 달랬다. 결국 그 애는 윌리엄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그러자 사태가 심각한 걸 감지한 레이디 클레어가 나서서 본인이 꺼낸 얘기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제 친척의 경우는 아주 드문, 최악의 경우였어요. 게다가 그분은 노인이셨거든요. 노인은 뼈가 잘 붙지 않죠. 데일 씨는 젊으시잖아요. 게다가 제가 소개해 드린 의사는 이 방면으로 아주 탁월하니 그의 진찰을 받으면 금방 나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의사가 휴양을 추천하겠죠?”

“물론입니다.”

아서의 물음에 레이디 클레어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작당한 냄새가 났다.

‘레이디 클레어와 무슨 얘기를… 아니 설마 저분도 아는 건가?’

아서와 엘리엇을 번갈아 보는 레이디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건 릴리벳에게 들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릴리벳은 엘리엇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목숨도 걸 수 있다. 아서를 죽도록 미워할지언정 엘리엇의 사회적 평판을 완전히 짓밟을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해 발설하는 일은 없을 거란 얘기였다.

하지만 레이디 클레어는 달랐다.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는 성정은 아닌 것 같지만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우려가 앞섰다.

“걱정하지 마. 내가 계속 곁에 있을 거야.”

안색이 흐려진 엘리엇을 본 릴리벳이 두 손으로 오라비의 뺨을 감쌌다.

“얼른 짐을 싸야겠어. 엘리엇이 꼽추가 되는 걸 두고 볼 순 없으니까.”

윌리엄까지 난리였다.

“망할 꼽추 얘긴 그만두라니까.”

참다못한 엘리엇이 얼굴을 찡그렸다. 릴리벳도 덩달아 안색이 흐려졌다.

“릴리벳. 내가 꼽추가 되는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모처럼 찰리가 이 좋은 곳으로 초대했는데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떠나는 건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치료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나만 가면 돼.”

단호하게 선을 그은 엘리엇은 다른 사람을 쭉 둘러봤다. 찰리의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간절했다. 친우를 위해서 이 정도 도움도 못 줄 건 아니었다.

“혼자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릴리벳을 달래는 사이 아서는 레이디 클레어와 대화하고 있었다. 소개장을 보는 중이니 아마도 의사에 관련한 얘기겠지만. 사실 찰리보다 이쪽이 더 신경 쓰였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적 교류는 없다고 아서가 설명했다. 하지만 대놓고 다정하게 굴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대외적으로 선남선녀 커플로 알려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부분이 질투가 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서가 도울 테니까.”

엘리엇이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레이디 클레어와 제인 플레커 양은 남기로 했다. 아서가 플레커 양과도 무슨 거래를 한 모양이었다.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건 릴리벳뿐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지 않겠냐고 설득하자 계속 우기진 못했다. 아무래도 윌리엄도 릴리벳이 엘리엇에게 지나치게 의지하는 건 이상하다는 아서의 속삭임에 넘어간 모양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이긴 해도 아서 글래스턴이 온갖 수작을 능수능란하게 부리는 협잡꾼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당장 출발하지.”

“지금 바로?”

“조금이라도 빨리 진찰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꼽추가 되기 싫으면.”

“꼽추 얘기는 제발 좀 그만해.”

당장 출발하자는 얘기에 찰리가 하인을 불러 바로 마차를 준비하도록 했다. 남은 짐은 나중에 찰리가 하인을 시켜 따로 보내 주기로 했기에 당장 쓸 간단한 짐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아서가 본인의 가방을 싸는 사이 엘리엇의 가방을 싸는 일은 릴리벳이 거들었다.

“아서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래서 싫은 거야.”

단둘만 남았을 때 릴리벳은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네가 먼저 아서를 두둔했던 것 같은데. 이젠 완전히 변했잖아.”

“그건 아서가 오빠에게 몹쓸 짓을 할 줄 몰랐을 때 얘기야.”

“괜찮아. 어떤 몹쓸 짓도 내가 원한 거니.”

“오빠.”

릴리벳은 절망적으로 엘리엇을 바라봤다. 눈물이 찬 푸른 눈을 보자마자 엘리엇은 사랑스러운 쌍둥이 누이를 다정하게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등을 쓸어 주며 기혼답게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입을 맞췄다.

“아서가 그렇게 싫어?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사실 아서 자체는 싫지 않아. 그냥 오빠랑 그런 게 싫은 거지.”

“남자라서?”

울먹이는 릴리벳의 귓가에 엘리엇은 낮게 속삭였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야. 하지만 내가 놀란 진짜 이유는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서일지도 모른다고 은연중에 예상했기 때문이야.”

고운 손이 엘리엇의 등에 닿았다. 서늘한 얼음덩어리가 엘리엇의 식도를 타고 명치까지 흘러들었다.

“쌍둥이의 직감이야?”

“응, 오빠가 윌리엄을 단번에 알아본 것과 같은 이유.”

“미안해. 너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데.”

엘리엇이 사과하자 릴리벳이 고개를 들었다. 릴리벳은 눈물이 흥건한 채로 엘리엇을 응시했다.

“사랑을 이유로 사과하지 마. 오빠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비록 신의 축복은 받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내 오빠잖아. 하나뿐인 쌍둥이.”

충격을 감내하면서도 릴리벳은 엘리엇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자주 그랬듯이 이마를 맞대고 뺨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그럼?”

“오빠가… 오빠가 나를 떠나는 게 싫어.”

울음에 젖은 고백에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언젠가 엘리엇도 크게 느꼈던 허전함과 서운함이 떠올랐다. 쌍둥이는 쌍둥이였다.

“웃다니!”

화가 난 릴리벳이 정색했다. 엘리엇은 구둣발로 정강이를 응징할 기세인 여동생을 다급히 말렸다.

“너무 나와 같아서… 그래서 웃었어.”

“오빠와 같다는 게 무슨 말이야?”

“네가 결혼할 때 나도 깊은 상실감을 느꼈거든.”

순순한 고백에 릴리벳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빠도?”

“그래. 네가 영영 떠나가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슬펐지. 그런데 말이야. 슬픔을 극복하기도 전에 화가 나더라고? 너와 윌리엄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말이지. 골치가 너무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뒤이은 설명에 릴리벳이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끝내는 엘리엇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말하다니 못됐어.”

“이제야 반성하는 거야?”

“늘 반성했어. 미안해.”

엘리엇은 순순히 사과하는 릴리벳의 등을 도닥였다.

“그러니까 아서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줘. 여러모로 나를 도와주었어.”

“역시 사고나 치는 나보단 부유하고 잘생긴 작자가 더… 잠깐.”

뭔가 비꼬려고 하다가 릴리벳이 갑자기 고개를 휙 들었다.

“…혹시 그 받았다는 도움이 금전적 문제야?”

“어… 음.”

“설마 나 때문에?”

“꼭 너 때문은 아니야. 사실은….”

“세상에! 나 때문에 오빠가 그 음흉한 협잡꾼과 얽힌 거야? 나 때문에?”

정확한 사정을 듣지 않고서도 릴리벳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두 손으로 입을 감싸더니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때였다.

“음흉한 협잡꾼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아서가 끼어들었다. 릴리벳이 몸을 홱 돌렸다.

“아서! 이 쥐 같은 작자야. 어떻게 들어온 거야?”

“문을 열고 들어왔지. 보시다시피 잠기지 않았거든.”

제 등 뒤의 문을 가리키면서 아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참고로 난 노크했어. 브라더 콤플렉스와 시스터 콤플렉스인 두 분께서 열정적으로 지옥을 향해 달려가느라 못 알아차렸을 뿐이야.”

“지옥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너나 지옥으로 가 버려, 아서 빌어먹을 렌튼!”

엘리엇의 항의에 이어 릴리벳이 저주를 퍼부었다. 다른 말에는 시큰둥한 아서가 ‘렌튼’이라는 호칭에만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른 사람, 다른 상황이었으면 벌컥 화를 내고도 남았을 텐데. 아서는 애써 참았다. 양손을 각각 겨드랑이 밑에 끼어 스스로 구속까지 했다. 사촌이나 다름없는 릴리벳이기에, 더불어 엘리엇이 사랑하는 누이이기에 화를 억누르는 것이리라.

심사가 뒤틀린 연인을 대신해 엘리엇이 먼저 도를 넘은 누이를 꾸짖었다.

“글래스턴. 빌어먹을 놈인 건 맞지만 이름은 정확하게 불러야지.”

“하지만 오빠!”

“엘리자베스 데일 체셔.”

단호한 부름에 릴리벳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네 이름은 이제 체셔지.”

“…….”

“하지만 여전히 데일이기도 해.”

엘리엇은 시무룩한 누이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사랑해.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너를 사랑해.”

아래로 늘어졌던 릴리벳의 두 팔이 엘리엇의 허리에 감겼다.

“그리고 네가 윌리엄을 사랑하는 만큼 나도 저 빌어먹을 자식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

울적한 음성이 엘리엇의 말을 끊었다. 릴리벳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가 곧 풀렸다. 그러고 나서 릴리벳은 엘리엇의 품에서 벗어났다. 엘리엇도 순순히 놓아주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결혼하지 않는 건데.”

릴리벳이 후회를 늘어놓았다. 깜짝 놀란 엘리엇은 누이를 바로 꾸짖었다.

“진심은 아니겠지? 윌리엄이 들으면 상처받아.”

“오빠를 잃어버릴 줄은 몰랐단 말이야.”

“잃어버린 게 아니야. 더 많은 가족이 생긴 거지.”

성숙한 오빠다운 말이 제 입에서 나갈 줄은 엘리엇도 몰랐다. 마주친 아서 또한 대단히 놀랍다는 듯이 양 입꼬리를 아래로 쭉 내렸다가 올렸다.

로드니아에 도착하고 진찰을 받고 난 후에 편지를 쓰라며 신신당부한 릴리벳은 방을 떠나기 전에 아서에게 경고했다.

“오빠를 상처 입히면… 후회하게 될 거야, 반드시.”

“…그럴 일은 없어.”

“믿어 보죠. 아.서.글.래.스.턴.씨.”

“의심이 많네요. 체.셔.부.인.”

둘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슨 휴전 협정도 아니고 저게 뭐람.

짐은 금방 다 꾸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더 꾸릴 수도 있었는데 아서가 곧 마차가 도착한다며 덜 채운 트렁크를 막무가내로 닫아 버렸다.

“아서.”

“릴리벳이 알아서 잘 챙길 거야. 무엇보다 소중한 오빠의 물건이잖아.”

“아니 그래도 필요한 물건은 챙겨야지. 욕실용품도 안 챙겼고.”

“필요한 건 새로 사면 돼.”

그렇지 않아도 슬슬 생활비가 떨어지던 참이었다. 숙소와 식사는 로우드 남작가에서 해결한다고 해도 외출 시에 마시는 차를 마시는 데도 비용이 들고, 도시가 워낙 넓어 걸어서 오가기에 한계가 있어서 때때로 마차 삯도 든다. 더불어 각종 소모품 등은 직접 사서 써야 한다.

엘리엇은 로드니아 사교계에선 로우드 남작 부인의 손님으로 알려져 있다. 또 동생 부부의 체면도 있기 때문에 시골에서 쓰는 물건을 그대로 사용할 순 없었다. 최신 유행 향수나 고급 손수건, 타이 등을 구매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지출이 꽤 상당했다.

“난 낭비할 돈 없어.”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또 돈을 빌리란 얘긴가?”

순식간에 언짢아졌다. 명확하게 하자면 엘리엇과 아서 사이에 발생한 금전 문제는 아직 유효했다. 육체관계로 변제하기로 했으나, 얼마나 정산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의논한 바가 없었다.

“설마 연인이 되어서도 한 번 할 때마다 돈 얘기를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남창 취급은 지긋지긋해.”

엘리엇은 트렁크를 잠그는 아서의 손목을 잡으며 향해 따졌다. 노기가 가득한 음성에 아서가 엘리엇을 응시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왜 내게 불필요한 지출을 강요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아직 네 돈을 다 갚지 못했는데.”

“다 갚았어.”

“언제?”

굵은 팔이 엘리엇의 허리에 감겼다. 엘리엇을 부드럽게 끌어당긴 아서는 곧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얹었다가 떨어지는 달콤한 키스였다.

“네가 사랑을 고백했을 때.”

아서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연인 관계엔 채무 같은 거 없어. 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내 것이야.”

“그렇게 말하면 꼭….”

“결혼한 부부 사이 같다고?”

느닷없이 날아든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혼이라니. 부부라니! 그저 고약한 빈대 같다고 하려던 엘리엇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아서를 멍하게 응시했다. 그러자 충격을 감지한 아서가 엷게 웃음 지었다.

“네가 가족이라고 했잖아. 우리 둘이 가족이 될 방법이 그것 외에 뭐가 있겠어?”

“신의 축복을 받지도 못하는데?”

아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알아? 이국에는 동성 관계도 축복하는 신이 있다는 거.”

“…….”

“네가 원한다면 축복은 그 신에게 청하면 돼. 잘됐군. 조만간 한번 신대륙에 가야 하는데 같이 가지.”

뒤이어 아서는 엘리엇의 손을 들어 입을 맞췄다. 정확하게 왼손 약지에.

“반지는 여기서 준비하는 게 좋겠지? 어떤 보석이 좋을까? 가장 고귀한 다이아몬드? 아니면 네 눈 색깔 같은 사파이어?”

“됐어.”

갑자기 온 얼굴에 열이 올랐다.

엘리엇은 거대한 덩치로 길목을 막는 아서를 밀쳤다. 그러곤 주변에 늘어진 소품과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허둥대면서 꺼내 놨던 남성용 화장품을 하나씩 끌어모아 침대에 얹었다.

“양말과 구두도 챙겨야 하는데.”

“트렁크 잠갔어. 나머지는 전부 로드니아에서 새로 사.”

“그럼 당장 오늘 저녁엔 뭘 쓰라고?”

“내 것을 같이 쓰면 돼.”

엘리엇은 침대 위에 널려 있는 옷가지를 다시 서랍장에 넣었다. 침대 아래 있는 구두도 두 켤레 꺼냈다가 도로 밀어 넣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뒤엉켜 버렸다. 짐을 싸는 건지. 어지르는 건지. 침대 주변을 계속 빙글빙글 돌다가 이윽고 트렁크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금 장치에 손을 대는데 아서가 말렸다.

“뭐 하게?”

“화장품을 넣게. 로우드 남작 댁에 남겨 둔 게 없거든.”

“남작 댁에는 왜 가려고? 내 집에서 머물 생각 아니야?”

“…….”

말문이 막힌 엘리엇은 그저 입만 벙긋댔다.

유서 깊은 로우드 남작 저택만큼은 아니어도 신흥 부자답게 아서의 집은 무척이나 컸다. 이미 여러 차례 거기서 묵어서 익숙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연인이 되었으니 그 집에서 머무는 게 자연스럽다.

지인으로 알려졌기에 대외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기도 했다. 집세가 비싼 로드니아에선 젊은이들이 한집에 어울려 사는 거야 흔한 일이니.

“왜,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조금 갑작스러워서.”

“갑작스럽지 않아. 난 15년이나 기다렸어.”

묵묵히 바라보는 상대의 눈빛에 엘리엇은 숨이 막혔다. 괴롭기보다는 아찔했다. 몸이 허공으로 둥실둥실 뜨려고 했다. 마침 아서가 손가락을 가닥가닥 얽어서 붙잡지 않았다면 엘리엇은 천장에 정수리를 부딪쳤을 것이다.

“앞으론 너와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고 싶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서는 눈빛으로 엘리엇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좋아. 네가 원한다면.”

“너는 그러길 원하지 않아?”

항상 위풍당당하고 오만한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갑자기 겁을 먹은 태도라니.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아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니. 나도 원해. 너와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

“엘리엇.”

“대신 반지는 보석이 없는 단순한 것으로 하자. 평생 끼고 있어야 하는데 너무 요란하면 불편하니까.”

엘리엇이 속삭이자 아서가 기쁜 듯이 웃었다. 기쁨의 미소가 번진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

벅찬 키스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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