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7/18)

3.

서재로 간 아서는 비밀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서 손때가 묻은 가죽 장정과 가죽 수첩 여러 권을 꺼냈다.

“이건 일지야. 이건 장부. 장부는 네가 봐도 잘 모를 테니까 넌 일단 일지부터 봐.”

“네 일지를 내가 봐도 돼? 이건 무척 개인적인 내용일 텐데.”

“엄청나게 개인적이라 아무에게도 보여 준 적도, 혹은 존재를 암시한 적조차 없어. 솔직히 나도 처음에 쓴 일지는 특별한 경우 말고는 확인하지 않아. 그때는 어리숙한 잡부에 지나지 않아서 대단한 일도 없었거든. 하지만 네게 감출 이유는 없지. 너는 나를 믿지 못하니까. 그거라도 보고 믿어 줬으면 좋겠군.”

아서가 책상에 자리를 잡는 사이 엘리엇은 수첩을 모두 들고 소파 쪽으로 갔다. 아서의 과거가 제 손에 들려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막 수첩을 펼치려는데 아서가 묵직한 상자를 가져왔다.

“편지는 이 상자 안에 들어 있어. 이쪽부터 오래된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지. 수첩도 마찬가지야. 낡은 쪽이 오래된 거다. 순서대로 읽어 봐. 레베카 혹은 터너에 연관된 내용이 있는지도 알아보고.”

“어, 어. 좋아.”

책상으로 돌아가려던 아서가 도중에 멈췄다. 두근거리면서 첫 번째 일지에 손을 대던 엘리엇이 덩달아 굳었다.

“미리 경고하는데. 그때는 너에 대한 증오가 상당히 컸어. 그게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관심이라는 걸 깨달은 건 쫓겨나고도 한참 후거든. 각오해.”

“그럼 안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화를 내더라도 보는 편이 더 나아.”

이상한 태도였다. 엘리엇에 관한 각종 저주와 욕으로 점철되었을 초기 일지를 굳이 보라니. 혹시 여태껏 엘리엇이 한 말에 대한 복수인 걸까. 그럴 가능성이 제법 있다. 아니, 상당히 있다. 아서는 쉽게 용서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그에게 용서를 받으려면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할 수 없지.’

보이지 않는 송곳이 심장 언저리를 쿡쿡 찔렀다. 그간 내뱉었던 수많은 저주와 혐오들이 어떤 얼음 총탄이 되어 엘리엇의 심장을 관통할까. 제가 저지른 짓 때문에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낡은 일지의 맨 첫 장은 오염이 많아 우글거렸다. 곳곳에 잉크가 동그랗게 번진 걸 보니 빗물인 듯싶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부두에서 5시간 일한 품삯을 후려친 새끼를 쥐어팼다. 일은 내가 더 많이 했는데! 그놈 패거리들이 덤벼들었으나 놈만은 확실하게 조졌다. 품삯은 제대로 받았다. 눈에 띈 덕분에 다른 패거리가 알아보고 일감을 주었다. 멍이 들었지만 뼈는 괜찮다. 일해서 서부로 갈 경비를 벌어야 한다. 여기에 내가 모은 돈과 일상을 기록한다. 꼭 거부가 되어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서 그 빌어먹을 개새끼를 꼭 패 버릴 거다.

‘그 빌어먹을 새끼….’

누군지 일지에는 적혀 있지 않으나 단번에 알아챘다.

‘빌어먹을 개새끼 정도야 귀엽지.’

솔직히 아서와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 주먹질과 폭력적인 섹스로 이어지는 걸 감안하면 이 정도는 사랑의 속삭임이나 다름없다.

그보다는 험한 선원들에게 두들겨 맞은 일이 안타까웠다. 아직 열다섯? 열여섯밖에 되지 않았을 나이다. 남들보다 월등한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어도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더 많은 일을 시키고 억울하게 품삯을 깎다니.

예상대로 아서의 삶은 굴곡이 많고 힘겨웠다. 초반 일지에는 대단한 일 대신에 어디서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억울한 취급을 받았고 그래서 어떻게 보복했는지에 관한 기록이 계속 이어졌다. 특이한 점은 일지마다 ‘그 빌어먹을 녀석’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 빌어먹을 개새끼는 따뜻한 침대에서 편안하게 자겠지. 젠장

그 빌어먹을 놈은 부드러운 빵을 먹겠지. 이런 돌덩이 같은 놈이 아니라.

그 빌어먹을 개자식은 배를 타면 멀미를 참지 못하고 토할 거다. 계집애 같으니까.

그 빌어먹을 새끼는 신대륙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거야.

처음에는 치기 어린 험담뿐이었다. 그러나 품삯을 모아 역마차를 타고 서부로 이동하는 중에는 약간 바뀌었다. 여전히 고생하고 여전히 몸싸움을 벌이고 여전히 당하고 복수하는 일상이지만, 새로 만난 세상의 경이로운 자연에 관한 기록을 하면서 ‘그 빌어먹을 개새끼’ 라는 표현이 사라졌다.

대단한 평원. 눈이 시리다. 그 자식은 이런 걸 평생 못 보겠지.

붉은 노을. 꼭 누구 입술 같은 색이네.

거대한 호수. 그 자식은 분명히 바다로 착각할 거야.

어이가 달아났다. 엘리엇은 장부를 들여다보는 아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팍 새긴 채로 다소 신경질적으로 장부를 훑었다.

팔랑.

한 페이지를 전부 확인한 아서는 여전히 심각한 시선으로 다음 페이지를 확인했다. 장부는 대단히 두꺼워서 법률서 같았는데, 실제로 대단히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기입했기에 손가락으로 줄을 일일이 짚어 가며 확인해야 했다. 책장은 느릿느릿하게 넘어갔다.

그는 어린 나이에 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신대륙에 정착해서는 부두 잡부로 갖은 고생을 다 했다. 고작 10년 남짓한 사이에 부유한 광산주가 되기까지 엄청난 일을 겪었을 것이다. 잘생겼지만 험상궂은 외모와 거친 성정이 그것을 증명했다.

살찐 말을 타고 황무지를 내달리면서 총질을 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남자가 책상 앞에서 앉아서 종잇장을 넘기는 모습이라니. 이질적인 면모가 묘한 매력을 더했다.

“뭘 그렇게 봐? 내 얼굴이 뚫리겠어.”

시선을 들지 않은 채로 아서가 물었다. 내심 뜨끔한 엘리엇이 괜히 일지를 뒤적였다.

“장부가 궁금하면 이쪽으로 와서 봐. 난 숨길 게 없어.”

“괜찮아. 복잡한 숫자 따위 봐도 몰라. 거기다가 고리대금업의 내막을 일일이 알아 봤자 오히려 기분만 이상해져.”

“모두에게 비싼 이자를 받은 건 아니야. 그럴만한 놈들에게만 받았지. 웬만해선 은행과 비슷하게 받아.”

“그렇군.”

굳이 따져 들고 싶지 않았기에 엘리엇은 건성으로 답했다. 장부 얘기는 하면 할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의 이름도 저 안에 있을 거다. 이자율은 뭐라고 적었을까.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괜히 신경이 저쪽으로 쏠렸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일지 낱장을 팔랑거리면서 최대한 무심함을 가장했다.

“나와의 거래를 어떻게 기록했지? 숫자가 아닐 텐데.”

“섹스 단계를 적어 놓고 줄을 그어 차감했지.”

“뭐? 이런 미친!”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장 아서 곁으로 가서 그를 밀치고 장부를 끌어당겼다.

“어디 봐.”

“농담이야.”

그제야 아서는 피식 웃었다. 농담이라는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엘리엇이 직접 확인하겠다고 우기자 아서는 순순히 장부를 내주었다. 복잡한 장부에서 기록을 직접 찾아 주기도 했다.

“여기 날짜. 네 이름.”

다른 거래 내역과 달리 엘리엇 이름 옆에는 숫자가 없었다. 대신에 굉장히 거친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엘리엇 데일, 이 빌어먹을 개자식! 두고 보자!

“설마 그런 일을 장부에 적었겠어?”

“욕은 썼네.”

“욕 정도는 써도 되잖아. 네가 한 짓을 떠올려 봐.”

바로 수긍했다. 엘리엇은 도로 자리에 돌아가 일지를 뒤졌다.

앞부분은 아서가 부두를 떠나 서부로 가서 고생한 나날의 기록이었다. 중반에 이르러서는 우연히 광산을 헐값에 사들인 일이 신나게 적혀 있었고, 이후에는 사기를 당했다며 분노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곡괭이가 얼마나 무거운지, 밤낮으로 나타나는 늑대와 들짐승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혹은 타는 태양이 얼마나 증오스러운지. 서늘한 밤과 함께 찾아오는 고독이 얼마나 두려운지. 혈기 왕성한 묘사와 함께 이어지던 기록은 점차 간략하고 건조해졌다.

중반부를 넘어서자 간단한 메모식으로 바뀌었다. 때때로 적혀 있던 숫자는 아예 사라졌다. 사기 맞은 줄 알았던 광산에서 금맥을 캤을 때부터였다. 아마 장부 기록을 시작했으리라. 대단히 기뻤을 날에 아서는 모은 금덩이를 팔아 새로운 연장과 몸을 보호할 총을 샀다. 그리고 싸구려 위스키 한 병도 구매했다.

이제 시작이다. 나이트스톤으로 반드시 돌아가겠어. 기다려, 엘리엇 데일.

술에 취한 듯 휘갈긴 글씨에는 다부진 결심이 가득했다.

이럴 때 떠올린 상대가 돌아가신 모친도, 혹은 양부도 아닌 자신이라니. 미움이 계속 이어지다가 일상이 되었나. 도중에 수십 번은 더 포기할 법한 역경 속에서 오로지 자신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다가 결국엔 그 복수심에 먹혀 버린 걸까.

“읽어 보니 감상이 어때?”

문득 아서가 물었다.

“나에 대한 집착이 좀… 무서운 수준인데.”

“훗. 당시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었거든.”

“정신병자.”

“엘리엇 데일 한정이라면 부정하지는 않겠어.”

아무렇지 않게 맞받아치는 태도에 헛웃음이 났다.

“내 어디가 그렇게 거슬리는 거지?”

“어디가 좋은 건지 물어보는 거야?”

“같은 의미야?”

“아마도.”

“하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서는 제법 진지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괜히 목덜미가 홧홧해졌다. 엘리엇은 일지를 들고 얼굴을 반쯤 가렸다. 묵은 잉크와 종이 냄새 속에 아서의 숨결이 섞여 있었다. 뺨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구체적으로 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

“굳이 따지자면 고약한 성격?”

웃음이 싹 달아났다. 대신에 진지한 의문이 떠올랐다.

“변태인가.”

“아프게 당하는 걸 좋아하는 네 연인으로서는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시끄러워.”

괜히 핀잔을 주었다.

아서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그의 열정과 절망, 그리고 분노와 좌절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동시에 지속적으로 거론되는 제 존재를 확인하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눈 밑이 떨리고 명치가 욱신댔다. 차마 더 볼 수가 없어서 얼른 최근 기록으로 넘어갔다.

최근으로 갈수록 간결한 메모와 감정이 절제된 문장이 이어졌다. 치기 어린 소년이 어른이 되었다. 단단해지고 무게감 있는 문체에서 묘한 애수를 느꼈다.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내용은 전문적이고 무심했다. 대부분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어디서 어떤 모임에 참석했는지에 기록이었다. 낯선 장소와 이름이 이어졌다. 뒤늦게 일지와 장부를 뒤지는 목적을 떠올린 엘리엇은 아서가 그러듯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이름을 확인했다.

‘레베카, 터너, 레베카, 터너.’

비슷한 철자에 특히 집중하며 살펴보았다.

드디어 돌아왔다. 이곳에.

쏜힐을 헐값에 손에 넣었다.

중개인은 좀 더 집다운 집을 권했으나,

돌아온 탕아에게는 이런 곳이 어울리지 않는가.

날짜를 보니 쏜힐에 새로운 가시나무 성주가 생겼다던 시기였다.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수소문한 결과 나이트스톤의 주인은 데일 씨라고 한다.

그 ‘데일’ 씨겠지.

이번엔 위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딸꾹질이 터지려고 해서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따랐다.

“왜 그래?”

“별… 별거 아니야.”

아서의 물음에 싱긋 웃으며 답했다. 자리에 도로 가서는 펼쳤던 일지를 도로 닫았다.

이후 아서의 행보는 엘리엇도 얼추 안다. 고작 한 해 남짓 동안 만난 여자가 10살짜리 아이를 낳았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이 이후를 살펴보지 않아도 된다.

“일지에선 아무런 힌트를 찾지 못했어.”

“그래? 아직 장부를 다 보지 못했으니 네가 편지를 살펴봐.”

“그러지.”

일지를 한쪽으로 밀어 두고 편지 상자를 끌어당겼다. 아주 낡은 편지에서부터 하나하나 펼쳐 봤다. 이번에도 내용보다는 이름 위주로 빠르게 훑었다. 초기에는 편지가 거의 없었다. 쓰다가 만, 아서 본인이 보내려고 했던 편지는 있었다.

수신인은 양부였다. 심장이 날뛰었다. 손이 떨려서 차마 그것을 펼쳐 보진 못했다. 대신에 그것을 덜 읽은 일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펼쳐 볼 요량이었다.

다른 편지를 빠르게 훑다가 구석에 처박힌 아주 작은 봉투를 발견했다. 심지어 뜯지도 않은 거였다. 받는 사람은 ‘아서 렌튼’ 이었다. 발신인은 D. J. 라고 적혀 있었다.

“뜯지 않은 편지를 발견했어. 수신인이 ‘렌튼’으로 되어 있군.”

“뭐?”

그 말에 아서가 인상을 팍 썼다.

“대단히 오래된 편지겠군.”

“그렇게 보여.”

뜯은 거면 몰라도 안 뜯은 걸 엘리엇이 먼저 볼 수는 없었다. 이미 짜증이 난 아서에게 편지를 전했다.

“D. J. 누구지?”

이니셜을 보고도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지, 아서가 종이칼로 시원스레 봉투를 뜯었다. 안에서는 꼬깃꼬깃 접힌 편지 봉투 두 장이 나왔다. 그는 심각하게 편지를 읽어 내렸다. 편지를 읽는 도중에 아서가 헛웃음을 쳤다.

“아아, 이제 기억나는군. 데니스! 그 자식의 성이 존스였나?”

“누군데?”

“내게 광산을 판 사람.”

읽던 편지를 내린 아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곤 장부 맨 앞부분을 뒤져서 아주 낡은 증서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보이지? 이건 내가 산 첫 광산 증서야.”

증서의 소유주 자리는 열 명도 넘는 서명이 적혔다가 줄이 그이고 다시 적히는 방식으로 쓰여 있어 어지러웠다.

가장 마지막에 적힌 이름은 ‘아서 렌튼’이었다. 공식 문서긴 한데 소유주가 변경될 때마다 공증을 받은 흔적도 없었다. 멋대로 오간 문서였다. 일종의 무기명 채권이라고나 할까.

“여기엔 데니스 존스의 이름이 없는데?”

“그렇겠지. 내가 샀을 때는 술 한 잔 값으로 여기저기 팔린 지 오래되었거든. 난 내기 값으로 땄지만 말이야.”

“그자와 계속 교류했나?”

“솔직히 증서를 손에 넣은 이후로 한 번도 놈을 보지 못했어. 편지를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야. 내가 어디서 사는지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어. 이건 아무래도 신대륙에 있을 때 받은 것 같군.”

아서가 봉투를 면밀하게 살폈다. 우체국 소인이 이 나라 방식이 아니었다.

“본명을 찾은 이후로 렌튼이라는 이름은 철저하게 버렸는데. 교류하던 자 중에 본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굳이 렌튼을 고집하던 자들은 다 피떡으로 만들거나 절연했어. 렌튼 이름으로 오는 편지도 모조리 파기했지. 아마도 이 편지는 우연히 살아남은 모양이야.”

편지를 계속 읽던 아서는 두 번째 장에 이르러서 갑자기 크게 코웃음 쳤다.

“하, 이 자식이야.”

“뭐?”

“아래층에 나타난 깜찍한 사기꾼들의 아버지 말이야.”

“뭐라고?”

엘리엇은 아서의 손에서 편지를 빠르게 낚아챘다.

제 비참한 삶에 관한 내용 그리고 제 광산을 도둑질이나 다름없는 짓으로 빼앗아 간 원흉 ‘아서 렌튼’을 규탄하는 내용이 줄줄 이어지는 중반에 아이 얘기가 나왔다. 사귀던 여자가 애를 낳았다는 것이다. 데니스 존스는 편지에서 아서에게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드니 광산 지분 중 일부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정말 열 살짜리였어, 그 여자애.”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애들 아버지인 건 어떻게 알아?”

“더 밑을 읽어 봐.”

뒤이어 제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시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는 협박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만나서 협상하고 싶으면 다음 주소로 찾아와 레베카를 찾으라고 했다.

“레베카.”

“아마도 성이 터너겠지? 이 주소부터 털어 봐야겠군.”

아서가 바로 종이를 꺼내 쪽지를 썼다. 뒤이어 아래층으로 이어진 종 줄을 당겼다. 곧 길퍼드가 나타났다. 신대륙에 있는 아서 소유의 회사에 전보를 쳐서 레베카와 데니스 존스의 행방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뒤이어 아서는 엘리엇을 보면서 득의만만하게 웃었다.

“봤지? 이젠 믿을 건가.”

“믿어.”

“그럼 저 깜찍한 거짓말쟁이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내보내야겠군.”

신난 아서가 서재를 나서려 들었다. 엘리엇은 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몰라도 레베카는 죽었어. 그렇다면 저 애들은 고아잖아.”

“그래서?”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에 아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애들을 동정하는 건가?”

“당연하지.”

엘리엇은 아서의 질문이 도리어 이상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동정심이 들지.”

“아, 나는 사람이 아니라서.”

“아서.”

목소리가 커졌다. 아서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애들이잖아. 조금은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는 편이….”

“너는 너무 물러, 엘리엇. 저 애들 뒤에 누가 있을 줄 어떻게 아나? 혹은 데니스 존스가 저 아이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거라면? 아까 그 우체부가 데니스 존스일 수도 있지.”

생각지도 못한 의혹에 엘리엇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게는 적이 많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거지 꼬마가 부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질투의 표적이 되거든. 이런 짓을 수도 없이 당했지. 믿었던 하인이 날카로운 칼로 내 목을 겨누는 일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 방금 악수하고 인사했던 동업자가 갑자기 미간을 향해 총을 드는 경험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소년 구두닦이가 갑자기 내게 독극물을 던지고 달아난 적도 있어. 그러라고 돈을 받았다더군. 모르는 여자가 애를 데리고 나타나서 그 애들이 내 자식이라고 우긴 적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있었지.”

“일지에 적혀 있지 않던데.”

“지루한 일상이라서 적을 가치도 없거든.”

냉소하는 아서를 향해 엘리엇은 더는 뭐라 말하지 못했다.

아서는 즉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이들을 찾았다. 하인이 애들을 깨워서 응접실로 데려왔다.

“너희 말이야.”

“잠깐. 내가 말할게.”

화부터 내려는 아서를 엘리엇이 말렸다. 그러곤 되도록 부드러운 표현으로 방금 찾아낸 사실을 전했다. 데니스 존스라는 사람이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했다.

“그럴 수가….”

나탈리는 눈에 띄게 절망했다. 나탈리가 그럴 리 없다며 부정하기도 전에 아서가 냉랭한 투로 물었다.

“내 명함을 어떻게 손에 넣었지?”

“엄마가 소중히 간직하셨어요.”

대답하는 나탈리에게 엘리엇이 물었다.

“아버지가 누군지는 듣지 못했니?”

“네, 하지만! 하지만 아버지가 준 명함이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흠. 내 명함을 어떤 경로로 손에 넣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데니스 존스가 네 엄마에게 전달했군. 네 아버지가 엄마에게 준 건 맞겠지. 다만 명함의 주인이 아버지라고는 하지 않았잖아.”

아서가 단칼에 정리했다.

나탈리의 얼굴에 떠오른 절망의 기색이 한층 진해졌다. 어리둥절한 니콜라스는 누이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아빠 찾았대?”

“응. 데니스 존스래.”

“어디에 사는데?”

나탈리는 조심스럽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냉혈 쓰레기 아서는 코웃음 쳤고, 엘리엇은 저 인간 말종을 대신해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쪽도 모른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은 나탈리는 즉시 침울해졌다.

“몰라.”

우울한 남매에게서 엘리엇은 부모를 잃고 절연한 외숙부를 찾아가야 했던 자신과 릴리벳을 보았다. 낯선 시골 마을의 낯선 저택 안에서 낯선 외숙부를 향해 어떻게든 여기서 살게 해 달라고 빌었다. 어머니와 닮았으나 항상 상냥하던 그분과는 달리 매섭고 냉랭하던 외숙부의 표정 때문에 도리어 무한한 거리감을 느꼈었다.

한 시간쯤이었나?

말없이 쌍둥이를 노려만 보던 외숙부가 이윽고 하녀를 불러 데려가서 먹이고 재우라고 시켰다. 그때까지 엘리엇은 흐느끼는 릴리벳의 손을 잡고 외숙부 앞에서 버텼다.

기절할 것 같았지만, 릴리벳이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쌍둥이라도 자신이 남자고 오빠니까. 아이가 맛보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형벌이었다. 다행히 외숙부가 내치지 않아 고문과도 같은 시간을 버틴 보람이 있었다.

외숙부는 무서워도 나이트스톤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지내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 무뚝뚝하지만 대체로 상냥한 사람들. 사계절을 따라 피는 꽃과 맑은 시냇물. 사랑스러운 자연에 휩싸여 자라면서 엘리엇과 릴리벳은 어두운 상실감을 조금씩 떨쳤다. 하지만 나탈리와 니콜라스에게는 그런 기적도 없다.

니콜라스가 눈물이 덕지덕지 붙은 눈으로 나탈리에게 물었다.

“우리, 고아원으로 가는 거야?”

“으응. 그래야 할 것 같아.”

눈물을 간신히 참은 나탈리가 동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대륙에서 여기까지, 엄마를 잃고 다시 아주 먼 도시에서 복잡한 로드니아까지. 희망을 품고 명함 속의 남자를 찾아온 남매에게 작은 기적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때 엘리엇은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불현듯 깨달았다.

“아니, 고아원에 가지 않아도 돼. 나랑 같이 가자.”

“네?”

놀란 나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정신이야?”

“제정신이야.”

“엘리엇.”

엘리엇은 아서를 똑바로 봤다.

“우리 외삼촌은 대단히 인색하고 냉랭한 사람이었지. 절연한 여동생이 낳은 우리 쌍둥이 남매를 그다지 내켜 하지는 않으셨어. 그래도 내치진 않았지.”

“저 애들은 네 조카가 아니야.”

“하지만 희망을 품은 아이들이지. 가난하게 살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누구처럼.”

“…….”

상대의 굳은 입꼬리가 위험하게 씰룩댔다. 엘리엇을 빤히 쏘아보던 아서는 결국 설득을 포기했다.

“멋대로 해.”

“내 결정을 이해해 주니 고맙군.”

엘리엇은 다시 나탈리를 보았다.

“우리 집에 방이 많아. 시끄러운 여동생이 결혼해서 떠나 버렸거든.”

“왜 저희를?”

나탈리는 신중했다.

“나도 고아였어. 그래서 동생과 같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삼촌을 찾아가야 했어. 괜찮다면 네게 머물 방과 음식, 그리고 옷을 주고 싶은데.”

“니콜라스랑 같이 있어야 해요.”

“물론 니콜라스에게도.”

아버지를 찾겠다는 꿈이 무산되었다. 오갈 데 없는 고아 남매에겐 엘리엇의 제안이 한 줄기 빛과 같을 텐데. 나탈리는 마냥 기뻐하기보다는 걱정하는 눈치였다.

“왜 그러니? 니콜라스와 떨어질 필요가 없어. 시골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게….”

“너 같으면 이름도 모르는 작자가 갑자기 조건도 없이 키워 주겠다면 무턱대고 좋다고 하겠어? 먼 시골 농장으로 데려가서 꿀꿀이 죽 같은 걸 주고 죽도록 일만 시키려는 작자이거나 혹은 어린 여자애를 어떻게 하려고 접근하는 변태면 어쩌려고.”

아서가 늘어놓는 놀라운 의문을 실제로 떠올렸던 건지 나탈리는 그저 묵묵히 엘리엇을 봤다.

“이 순진한 남자는 엘리엇 데일, 내 가장 가까운… 어쨌든 가족 같은 사람이야. 이자가 사는 곳은 나이트스톤이라고 여기서 마차로 이틀 정도 가야 하는 먼 곳에 있어. 아주 비옥한 농장이야. 쌍둥이 여동생은 얼마 전 로드니아의 부유한 상속자와 결혼했고. 참고로 이자는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어. 무슨 의미인지 알아? 혹시나 네게 이상한 짓을 할까 봐서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만에 하나 그럴 낌새가 보이면 내게 알려. 처리해 주지. 명함을 가지고 나를 찾아온 성의를 봐서 말이야.”

“어… 네.”

압도된 나탈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힌 엘리엇은 미친 자식을 구석으로 끌고 갔다.

“미쳤어? 그걸 소개라고 해?”

“틀린 점이 있나?”

“아니, 그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 저 애들이 나를 뭐로 보겠어.”

“어린 여자애를 노리는 변태라고 보지는 않겠지.”

“대신 새로운 차원의 변태로 보겠지.”

“그것까지 생각하진 못했어. 미안.”

아서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엘리엇은 아서를 노려본 후 다시 나탈리에게 다가갔다.

“다시 소개할게. 나는 엘리엇 데일. 나이트스톤의 농장주란다. 나이트스톤은 평화로운 시골 농장이야. 저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의 집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따뜻하고 포근해. 그곳에는 너희들을 잘 돌봐 줄 중년 가정부도 있어. 여기보단 나을 거다. 그리고 나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렴.”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인가요?”

아이는 순수하다. 그래서 거침이 없었다. 입을 쩍 벌린 엘리엇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하음… 개인 사정이라… 나중에 얘기하자.”

엘리엇이 황당한 표정을 억지로 펴면서 얼버무리는 동안 저쪽에 서 있던 아서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엘리엇은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다가 다시 나탈리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윽고 나탈리가 결심한 듯 물었다.

“일을 할 수 있나요? 저는 일을 배우고 싶어요.”

“일? 네가 하겠다면 말리진 않아. 하지만 당장은 공부를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공부? 공부도 시켜 주나요?”

“네가 원한다면.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 주겠다.”

“좋아요. 하고 싶어요.”

“나랑 같이 갈래?”

“네.”

나탈리는 일과 공부에 열렬하게 반응했다. 그 열정이 꼭 고리대금업자의 어린 시절 같았다. 니콜라스는 나탈리가 좋다면 좋은 듯했다.

팔짱을 낀 아서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엘리엇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비난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농장에는 아이들이 있어야 해.”

“시커먼 남자 대신에 말이야.”

“뭐, 농장은 넓으니까. 성격 나쁜 고리대금업자가 있어도 괜찮지.”

씩 웃는 엘리엇을 상대로 아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대책 없이 긍정적이군.”

“아무래도 외숙부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것 같아.”

“그분이 그랬다고?”

엄격하고 냉랭한 성정을 자랑하던 분이라 아서가 반문했다.

“어쨌든 너와 우리 쌍둥이를 키우셨잖아. 괴팍하고 성질 더럽고 전혀 너그럽지 않지만 적어도 오갈 데 없는 애들을 손수 거두셨지.”

“……나는 쫓겨났다만.”

아서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내 잘못이야. 그분은 잘못 없어.”

엘리엇은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키스했다.

“너에게 속죄하고 싶으니 얼른 나이트스톤으로 돌아가자.”

“약은 놈.”

아서의 광대가 못마땅한 듯 씰룩댔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입매에 입술을 겹친 엘리엇은 웃으며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

로드니아의 사교계 시즌은 거의 끝물이었다. 어차피 곧 요양을 위해 나이트스톤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엘리엇은 로우드 남작 부인을 찾아뵙고 그간의 호의에 대해 깊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얼굴이 좋아졌군.”

“덕분에요.”

“로드니아에서 보물이라도 찾은 얼굴이야.”

“남작 부인을 속일 재주가 없군요.”

로우드 남작 부인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종류의 것이겠지.”

“네.”

“행복한가?”

“물론입니다.”

로우드 남작 부인이 웃었다.

“어리숙한 윌리엄에게 좋은 아내와 좋은 친구를 선사해 줘서 고마워. 글래스턴 씨에 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겠지만.”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이지. 글래스턴 씨는 만만하지 않은 남자야. 위험하고 그래서 매력적이야. 그런 남자가 자네에게 관심이 아주 많은 모양이던데. 혹시라도 곤란한 일이 있으면 내게 도움을 요청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작 부인의 무한한 호의에 깊이 감사합니다.”

“넓은 집에 아름다운 젊은이가 있어서 생기 넘쳐 기분이 좋다네. 다음 사교계 시즌에도 초대장을 보낼 테니 즐거운 얘기를 들려줘. 자네 여동생은 잘 지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부인.”

부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엘리엇은 남작 저택을 나섰다.

릴리벳에게 편지를 남겼다. 난 나이트스톤으로 돌아갈 테니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고 싶다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썼다. 쌍둥이 얘기는 쓰려다가 말았다. 아이들을 지켜본 다음에 연락해도 늦지 않았다.

다사다난했던 로드니안 시즌을 뒤로하고 엘리엇은 마차에 올랐다. 그의 옆에는 나탈리와 니콜라스가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당연한 듯이 아서 글래스턴이 자리를 차지했다.

따뜻한 여름을 함께 보낼 사람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