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88)

3.

여자랑은 다른 느낌이지만, 아무튼 최수호는 잘생겼다. 여자가 아니라 외계인을 옆에 둬도 최수호만 보일 거다. 절댓값이 좀 다르다고 할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입으로 예쁘다니. 뻔뻔한 새끼. 징그러워 죽겠다.

“너랑 이유진이랑 같냐.”

“뭐가 다른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야, 반찬 줬으니까 나 간다.”

“나 유진이랑 사귈까?”

아무렇지 않은 척 툭 뱉으면서 눈은 나를 관찰한다. 링에서 스피드 잽을 날리며 떠보는 상대편 같다. 그 말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추측하고 관찰하고, 허점을 보이면 언제든 훅을 날리려고 준비하고 있다.

최수호는 기본적으로 아웃복서다. 절대 먼저 치고 들어오지 않고 스텝을 밟으면서 카운터를 노린다. 거기 넘어가면 끝장이다. 몇 마디 말에 홀랑 넘어가서 KO패 당하기 싫으면 가드를 단단히 올리고 있어야 한다.

“마음대로 해.”

너희가 사귀고 싶으면 사귀는 거지, 그걸 나한테 왜 물어보냐. 어이없는 새끼.

“진심 아니면 사귀지 마. 사람한테 괜히 상처 주지 말라고. 걔는 너 진짜 좋아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귈 거면 잘해 줘.”

이유진은 좋은 애니까,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수호가 정말로 이유진을 좋아하는 거라면 차라리 둘이 잘됐으면 싶다.

나도 성인군자는 아니니 가끔 배알이 뒤틀리긴 하겠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 사귈 거야.”

“그러든가.”

“나 걔 안 좋아해.”

“…….”

“그냥 너하고 사귀는 애라길래 연락했어.”

자랑이다. 최수호가 이유진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쯤 알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내가 다 배신감이 든다. 연고 뚜껑을 닫고 약통을 넣는 동안 나는 일부러 최수호를 보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사람 이용하면 좋냐.”

최수호는 대놓고 내 눈치를 살폈다. 시선이 따갑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나 몰래 이유진하고 연락하고 만나면서 사람 우습게 만든 거? 그래 놓고서는 나 아니었으면 쳐다도 안 봤을 거라고 내 앞에서 울린 거? 아니면 지금 나한테 진상 떠는 거?

생각나는 게 너무 많아서 다 꼽을 수가 없다.

“나 간다.”

탓해 봤자 뭐 하겠나. 최수호는 원래 저런 놈이다.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십수 년을 이 자식 옆에 붙어 있는 내가 죄인이지.

“가지 마. 미안해.”

“씻으러 집 가는 거거든? 밥이나 챙겨 먹어라.”

어차피 오래 있을 생각도 아니었다. 아직 최수호하고 얼굴 마주 보고 있을 정도로 괜찮지 않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최수호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안 가면 안 돼?”

“바빠. 운동해야 돼.”

“내가 잘못했어. 가지 마.”

항상 말만 저렇지. 또 넘어갈 거 같냐.

굳게 마음먹으며 일어섰건만 최수호는 포기를 모른다. “열아, 열아” 병아리처럼 사람을 불러 댄다. 병아리면 삐약삐약 소리가 귀엽기라도 하지.

차라리 말 못 하는 동물이었다면 최수호가 어떻게 날 방해하고 일을 망쳐 놓든 다 귀여운 얼굴에 홀린 내 업이려니, 하고 포기할 수라도 있을걸. 쟤는 왜 인간이어서 날 더 짜증 나게 하는 걸까.

“잘못인 줄 알면 처음부터 하지 말든가.”

계속 오냐오냐해 주다간 언제까지고 저 모양일 게 뻔하다. 지금까지 그를 상대로 길러 온 내 판단이니 확실하다. 나는 매몰차게 최수호에게서 등 돌렸다.

“나 어제 엄마하고 전화했어. 곧 한국 오신다더라.”

돌아섰으니 이젠 현관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그만인데. 최수호가 무슨 소리를 하든 내 알 바 아닌데. 기껏 현관문까지 고작 몇 걸음을 남겨 놓고 나는 끝내 더 나아가지 못한다.

“너한테 전화하고 싶었는데 참았어. 나한테 화났을 거 같아서.”

“잘했네.”

“네 생각하면서 참았어.”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가 물 먹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현관에 놓인 운동화를 구겨 신으면서 나는 돌아보지 않으려 애쓴다. 등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잘했지…….”

또 불쌍한 척이다. 항상 이런 식이지. 하도 겪은 패턴이라 지긋지긋하다. 저 짓에 넘어간 것만 해도 몇 번인지 셀 수가 없다. 학습 능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넘어가 봤자 늘 겪던 것과 같은 수순이 돌아오리라는 걸 알 거다.

내가 3초면 까먹는 금붕어가 아닌 이상에야 또 저 수법에 넘어가 줄 리가 없다.

“열아.”

등을 감싸는 커다란 몸이 느껴진다. 허리를 단단히 껴안는 팔도.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채 최수호가 내 어깨에 뺨을 비볐다. 허리에 감긴 팔에 손을 올리고 잠시 갈등했다. 뿌리치고 가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내가 끝내 뿌리치지 못할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최수호는 힘껏 나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부드러운 숨결이 닿는다.

“열아, 보고 싶었어.”

도대체 왜 나는 최수호한테 약해 빠진 걸까. 맞붙어선 안 되는 상대다.

* * *

“이거 맛있다.”

“엄마한테 전해 주마.”

식탁에 늘어놓은 반찬과 내가 대충 지어 내놓은 밥을 최수호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먹어 치웠다. 우리 엄마가 요리를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쟤가 평소에 먹고 다니는 걸 생각하면 감동할 수준은 아닐 텐데.

최수호는 입맛이 더럽게 까다롭다. 유독 우리 엄마 요리에 관대한 것뿐이다.

하긴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얻어먹었으니까. 입맛이 길들 만도 하다.

열심히 젓가락으로 반찬을 입에 옮기는 최수호를 보고 있자니 심란하다. 입 짧아서 많이 먹지도 않는 게 오늘따라 왜 저렇게 열심히 먹어.

“너 또 밥 제대로 안 먹었냐?”

“응.”

“자랑이다. 애냐? 바쁘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잘 안 넘어가더라고.”

“멀쩡한 밥이 왜 안 넘어가.”

“네가 나한테 화나서.”

“어이가 없다.”

친구하고 싸워서 밥을 거르다니. 애도 웬만하면 안 할 짓이지만 최수호는 한다. 자주 겪은 꼴이라 더 뭐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이것도 먹어. 엄마가 과일 깎은 거 넣어 놨던데 밥 다 먹으면 그것도 먹고.”

장조림을 앞으로 밀어 주자 최수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럴 때만 말 잘 듣지. 자기 듣고 싶을 때만.

최수호는 내가 집어 준 반찬만 보란 듯 바쁘게 먹어 치운다. 괜히 흐뭇해졌다. 매일 이렇게 말 좀 잘 들으면 얼마나 좋냐.

“아주머니 한국 언제 오신대.”

분주하던 최수호의 젓가락질이 잠시 느려졌다.

“……다음 주에.”

“뭐 하러 오시는데?”

“촬영하러.”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몰라.”

촬영이면 너하고 같이하는 걸 텐데 왜 몰라. 일에는 끔찍하게 깐깐하게 구는 주제에.

나는 굳이 묻지 않는다. 최수호는 본래 자기 어머니가 얽힌 일에는 저런 식이다. 실실 웃어 가며 사람 가지고 놀던 놈이 당최 누구였냐는 듯 어수룩하고 무방비해진다.

“등신.”

최수호가 환하게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는데.

“나 걱정해?”

“예뻐서 걱정하는 줄 아냐? 하도 허접스러운 새끼라서 눈 떼면 또 거품 물고 쓰러져 있을까 봐 걱정하는 거지.”

진짜 딱 거죽만 멀쩡하다, 최수호는. 소꿉친구로 곁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렇다. 식사든 잠이든 인간관계든, 뭐 하나 똑바로 굴러가는 게 없다. 배우 일은 제대로 해내는 게 기적이다. 내가 손을 떼면 어디서 말라 죽는 건 아닐까, 종종 겁난다.

“열이는 역시 날 좋아해.”

이걸 부정할 수 없다는 게 내 문제다. 자기 팔자 자기가 꼰다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릴 때부터 난 이 자식한테 약하다.

최수호도 안다. 그래서 이런 어리광을 부리는 거다. 밥투정에 잠투정에 남의 여자 친구까지 건드리면서. 이런 놈이 성격이 좋다니, 다들 단단히 속고 있다.

“너는, 굳이 이딴 식으로 확인 안 해도 내가 너 걱정한다는 거 어련히 알고 서로 할 일 하는 게 건강한 우정이라는 생각은…… 아, 됐다. 말을 말자.”

말로 한다고 먹힐 거였으면 지금까지 고생하지도 않았지. 서로 격려하는 건강한 우정? 까마득한 소리다. 내가 버릇을 잘못 들였지.

“그러고 보니까 나 너한테 하려던 말 있었어.”

내 얘기를 듣던 최수호가 불쑥 말했다.

“뭐. 시답잖은 소리 하면 숟가락으로 맞아.”

“너 이제 이유진이랑 안 사귀잖아.”

“…….”

“그럼 이제 너랑 사귀는 사람 아무도 없는 거지.”

“사람 놀리냐?”

이제 관두나 했더니 또 이유진 얘기다. 숟가락으로 이마를 딱 한 대만 때리는 건 어떨까. 강아지들도 코 때리면서 훈육하던데. 숟가락을 쥐고 고민하는 내게, 최수호가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열아, 나하고 사귀자.”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당연하다. 할 말이 없으니까.

“다 먹었으면 설거지하게 그릇 담가.”

고갯짓으로 밥그릇을 가리키자 최수호가 눈썹을 오므렸다.

“나 지금 너한테 연애하자고 한 건데.”

“어, 알아.”

“아는데 왜 대답 안 해 줘?”

왜겠냐. 순 쓸데없는 얘기니까 그렇지. 대답은 속으로만 한다.

보나 마나 나한테 관심받으려고 하는 헛소리다. 이유진 얘기하다 안 먹히니 이젠 나한테 사귀잖다.

“너, 남자 좋아하냐?”

최수호라면 놀랍지 않다. 숨겨 둔 애가 있다는 소리쯤 돼야 놀라울 거다.

“네가 좋은 거지 다른 사람은 관심 없어.”

무슨 쌍팔년도 청춘 드라마도 아니고, 성별은 상관없고 그냥 너라서 좋은 거라니.

하긴 최수호가 누구 좋다고 하는 걸 들어 본 적은 드물다. 같이 작업한다는 아이돌이며, 여배우 얘기를 은근히 물어봐도 성격이 별로라느니, 시끄러워서 짜증 난다느니 하는 대답이나 겨우 돌아왔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최수호는 시종일관 짜증스럽다.

티 내지 않고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어도 줄곧 봐 온 입장에서는 얼추 보인다. 귀찮아하는구나, 짜증 났구나…… 뭐, 그런 거.

그러니까 최수호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별로 놀랍지 않다. 최수호는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한다. 내가 아는 선에서 최수호가 좋아하는 사람을 꼽아 보라면 고작해야 우리 엄마, 아빠랑 형, 나 정도나 될까.

그런데 이 자식이 성격이 좋다니. 다들 속고 있는 거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