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88)

7.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승기는 다시 최수호 거다. 최수호 말마따나, 난 이런 다툼에서 최수호를 이겨 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좋아한다고? 네가 날? 그게 아니라 옆에 있던 게 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겠지. 내가 다른 사람하고 있는 게 싫은 거잖아. 네 착각에 나까지 휘말리게 하지 마.”

착각이어야 하고 생떼여야 한다. 최수호가, 그럴 리 없다. 사귀자니. 내가 아는 연애는 이런 게 아니다.

철이 들기 전부터 최수호와 항상 함께 있었다. 가족이자 형제이자 친구였다. 그런데 넌, 함께였던 그 시간들이 네게는 다른 무게였다고 말한다.

왜 지금 와서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걸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너하고 나, 지금도 누구보다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수호를 다 안다고 자신했다.

“생각 없이 망치지 말라고.”

훅이 제대로 꽂히는 순간은 몸으로 알 수 있다. 공격이 먹히면 주먹에서부터 타격감이 전해져 온다. 내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낸 상대가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모습을 나는 쉽사리 상상한다.

“왜 착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최수호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눈가가 붉다.

“네가 네 멋대로 하자고 별 해괴한 수작 부리는 거, 한두 번 보는 거 아니니까.”

“나는.”

노크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최수호의 입이 닫힌다. 나도, 최수호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곧 방문이 열렸다.

“과일이라도 먹으면서…… 어머.”

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엄마가 사과가 가지런히 놓인 접시를 든 채로 멈춰 섰다. 우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는 했는지 엄마까지 입을 다물고 나와 최수호를 힐끔거린다.

“최수호 집에 간대.”

내 말이 끝나고도 한참 정적이 흘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더 있다가 가라고 최수호를 붙잡았을 엄마마저 조용하다.

최수호는 엉망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일부러 문가를 쳐다보지 않고 등을 돌렸다.

* * *

동이 트도록 잠이 오지 않더니 잠깐 선잠이 들었을 때는 기분 나쁜 꿈을 꿨다. 최수호 꿈이었다.

‘좋아해, 열아.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

최수호가 한껏 열중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이는 꿈.

‘너무 귀여워.’

수십 번 입술이 맞닿고, 목덜미까지 입술이 내려온다. 집요한 입맞춤에 살갗이 민감하게 달아올랐다. 목울대를 문지르던 입술이 귓가로 올라오자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미칠 것 같아…….’

평소에 듣던 것과는 다른 음성이 귀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허리를 만지작대는 손길이 끈질기다. 살에 손자국이 날 것 같다. 적나라한 욕망에 나까지 덩달아 휩쓸린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 그만해. 그렇게 만지는 거.

옷 속으로 최수호의 손길이 느껴졌을 때, 나는 억지로 눈을 떴다.

일어나서 이불을 걷어 보니 욕이 저절로 나왔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이게 다 최수호 탓이다. 최수호 그 새끼가 그딴 말만 안 했어도. 막무가내로 키스하지만 않았어도.

최수호도 내가 나오는 꿈을 꾼 적 있을까.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서둘러 침대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는 둥 마는 둥 고양이 세수에 양치까지 하고 트레이닝복을 주워 입는 동안에도 최수호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만 좀 하자.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아직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후드를 눌러쓴다. 일어난 김에 좀 뛸까 싶다. 잡생각을 떨쳐 버리는 데는 로드워크만 한 게 없다.

“벌써 나가? 어디 가게?”

거실로 나가자 엄마가 말을 걸었다. 시간은 아직 7시도 되지 않았다.

“앞에 산책로에서 좀 뛰려고.”

내 대답에 엄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열이 너 수호하고 심하게 싸웠구나?”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수호하고 싸웠을 때만 그런 얼굴로 뛰러 가잖아. 그것도 새벽부터. 너 그러고 다니면 마주치는 애들 다 운다.”

“내 얼굴이 뭐. 엄마가 이렇게 낳아 준 걸 나더러 어쩌라고.”

“난 열심히 했어, 얘. 네 아빠 유전자가 너무 힘써서 그래. 근데 너 잠 설쳤니? 눈이 퀭해져서는.”

“잠 안 와서.”

“그러게 왜 싸워. 서로 그렇게 죽고 못 살면서.”

엄마가 혀를 찼다. 내가 잠을 설친 이유가 최수호라는 걸 대번에 알아본 모양이다.

“박 여사 또 이상한 소리 한다.”

꼭 최수호랑 싸워서가 아니라 그냥 잠 좀 안 올 수도 있지. 하지만 엄마 짐작이 사실이라 뭐라 크게 할 말이 없다.

“너는 수호 엄청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더라. 수호 없는 날엔 학교도 안 간다고 야단법석에 종일 수호 얘기만 하던 게.”

“언제 적 얘기야, 그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호한테 쩔쩔매는 거 별로 안 변했으면서, 뭘.”

박 여사, 말을 진짜 이상하게 하네. 내가 언제 최수호한테 쩔쩔맸다고. 부정하려다가 찔리는 게 좀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왜 싸운 건지 엄마한테 말이나 해 봐.”

은근한 권유에 오히려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엄마한테는 도저히 말 못 할 이유니까.

“그냥 그런 게 있어. 나 뛰고 온다.”

“열아, 주스라도 마시고 나가!”

못 들은 척, 나는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다리에 힘을 주자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한 계단씩 밟으며 내려가다 보면 어느덧 속도가 붙고, 자동문을 넘자 새벽 공기가 훅 불어닥친다.

몸을 움직이면 쓸데없는 생각이 나지 않아서 좋다. 서서히 근육이 달구어지고 숨이 벅차오른다. 다리는 땅기고 폐는 터질 듯하다.

내가 받을 고통의 양과 질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한계치에 가까운 고통을 견디다 보면 한계가 늘어난다. 더욱 오래, 보다 잘 참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 나가면 언젠가는 한때 나를 힘겹게 했던 것들을 훨씬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온다.

그래서 운동을 좋아한다. 그런 식으로 나아가는 게 좋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몸으로 느끼는 게.

내가 직접 땀 흘리고 부딪혀서 얻어 내는 발전은, 직관적이고 오해의 여지가 없다. 시합에서 기권하는 것도, 속행하는 것도 내 몫이다.

아파트를 돌아 길을 건너자 강을 곁에 낀 산책로가 눈앞으로 곧게 뻗어 나간다. 내 삶도 하나의 길이라서 멈추지 않고 뛰어갈 수만 있었더라면.

세상엔 복잡한 일이 너무 많다. 겨우 스물이 되었을 뿐인데 벌써 벅차다.

나도 모르게 땅을 박차고 힘껏 뛰었다. 시야가 잠시 흔들렸다.

“꺅.”

신음이 끼어들었다. 나는 급하게 발을 멈췄다. 앞에 오던 사람과 아슬아슬하게 부딪힐 뻔했다. 몇 발자국 비틀거리고 나서야 겨우 균형을 잡았다.

앞에 보이는 건 뜻밖의 인물이다.

“이유진.”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불렀다.

“안녕.”

이유진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같은 아파트 사니까 이런 데서 만나네. 연습 중이야?”

“그냥 달리고 싶어서. 넌 뭐 해?”

“산책이나 하려고.”

“이 시간에?”

“그러는 너도 이 시간에 나와서 뛰고 있잖아.”

“그것도 그러네.”

어색한 적막이 흐르다가, 이유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객쩍게 운동화로 땅만 긁었다.

“잘 지냈어?”

“그냥 운동하고, 뭐.”

“그러고 나서 못 봐서 걱정했어.”

“음.”

“잠깐 저기서 얘기하다 갈래? 너만 괜찮으면.”

“네가 나하고 얘기하기 싫을 수도 있으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이며 이유진이 강변의 벤치를 가리켰다.

* * *

수면에 빛이 부서진다. 듬성듬성 심어진 풀이 바람을 따라 허리를 구부렸다. 나와 이유진은 얼마간 말없이 강을 보고만 있었다.

“미안해. 여러 가지로.”

먼저 입을 뗀 건 이유진이다.

“사과는 전에도 했잖아.”

“알아. 그래도……. 너 진로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다 아는데, 나까지 속상하게 한 것 같아서 계속 마음에 걸렸어.”

발로 애꿎은 흙바닥만 헤집다가, 이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학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어디 들어가서 일할 데라도 찾든지, 영 아니면 재수하든지……. 부모님은 재수하라는데 공부 머리가 아니라서 모르겠다.”

“체대는 진짜 안 가?”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새삼 깨닫는다. 아직도 대학 얘기에 내가 얼마나 신경 쓰는지.

“어, 안 가.”

“복싱 말고 다른 거라도 하지.”

“이제 와서 무슨.”

“너희 형처럼 다른 사람 가르쳐도 되잖아. 체육 선생님이나…….”

“안 해.”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선수로 뛰어 보지도 못하고 누구 가르치려고 운동한 거 아니니까.”

차선책을 고를 바엔 차라리 포기하겠다. 복싱에 대해서만은 그러고 싶다. 나한테 중요한 거니까, 평생 내가 갖지 못한 걸 쳐다보면서 가장자리를 맴돌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살면 슬플 것 같다. 다시는 복싱을 안 하는 것보다도 훨씬.

너무 소중한 건 사람을 아프게 하나 보다.

그러니 아예 근처에도 안 가는 게 낫다. 평생 운동만 하면서 살다가 다른 길을 찾으려니 생각나는 게 없어서 탈이지만.

“진짜 모 아니면 도네, 정열.”

“그런가.”

이유진이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나한테도 그렇게 열중해 줬으면 했는데. 너도 좋아한다고 했던 영화 있잖아. <록키>. 거기서 여자 주인공, 응원석에 앉는 역할인 건 아쉽지만 남자 주인공하고 서로 희망이 되는 관계잖아. 나도 그런 연애에 환상 있었거든.”

풀 냄새가 나는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코끝이 알싸했다.

“열아, 나 좋아했던 거 아니지?”

이유진이 물었다.

“아니. 좋아했는데.”

“기댈 사람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

“우리 너 복싱이나 형 때문에 한창 힘들 때 만났으니까, 그냥 너한테 내가 편했던 건 아니었나 하고. 사귀면서 나한테 한 번도 좋아한다는 말 안 했잖아. 헤어질 때도 나한테 알았다고만 하고.”

틀린 말은 아니다. 이유진을 좋아하게 된 데는 분명 이유진이 말한 것 같은 이유도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형의 입원으로 시작해 대학을 포기하는 과정은 괴로웠다. 우리 집은 형 문제만으로도 어수선했고, 최수호는 어그 어머니의 주도로 회사를 이적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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