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형이 쓰러졌는데 계속 복싱을 하고 싶어 하는 건 비겁하게 느껴졌다. 속은 복잡한데 말할 곳은 없었다. 최수호 외의 다른 사람에게 밑바닥을 털어놓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다.
이유진하고는 반이 바뀌면서 처음 만났다. 형의 팬이라던 이유진은 나를 알았다. 내 상황에 대해서도.
‘형 때문에 고민이 많겠네, 열이 너도.’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나를 이해해 주었다.
이유진의 옆에 있으면 편했다. 편해서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좋아한 게 안 좋아한 게 되는 건 아니잖아.”
어디서 어떤 식으로 시작했든, 좋아한 건 사실이다.
“착각 같은 거 아니야.”
‘네 착각에 나까지 휘말리게 하지 마.’
내가 최수호에게 했던 말이 겹쳤다. 그런 소릴 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최수호 생각을 떨치려고 강변까지 뛰쳐나와 놓고 기회가 생기자마자 그 애 생각을 한다. 나도 어지간하다.
“미안. 너한테 미안해서 넌 나 좋아한 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나 봐.”
이유진이 고개를 숙였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이유진의 볼을 가리며 흘러내린다.
“수호는 잘 지내?”
이유진이 문득 최수호의 이름을 꺼낸다.
“우리 상황에 너한테 수호 얘기 물어보는 게 좀 이상하다는 건 아는데, 수호랑 연락이 안 돼서. TV에서야 보지만. 나, 차인 거 맞지?”
입이 안 떨어진다. 이유진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로.
최수호가 무슨 생각으로 이유진을 만났는지 들은데다, 그 최수호가 이유진 운운해 가며 나한테 고백했던 것까지 합쳐지니 기분이 끔찍하다.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열이 너, 혹시 지금 수호 대신 사과하는 거야?”
“음, 너 괜히 휘말린 것 같아서…….”
“우리 대화 진짜 이상하다.”
이유진이 얼굴을 찡그려 가며 웃었다. 여전히 웃는 게 예쁘다.
“실은 수호가 너 때문에 나하고 자꾸 만나는 거 알고 있었어. 만나서도 네 얘기만 했으니까. 네 여자 친구라서 잘해 주는구나, 그런 생각은 계속했어.”
“…….”
“아는데 그냥 좋아졌어.”
좋아졌다. 이유진의 말은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진 사람처럼 아득하다.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재난에 덜컥 휩쓸린 사람같이.
정말 좋아했구나.
불현듯 실감이 들었다. 최수호 얘기를 하는 이유진의 표정은 사귀는 동안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다.
“난 좋아했어?”
묻고 싶어졌다. 이유진은 곤란한 듯 손을 매만졌다. 벌써 대답을 들은 기분이다.
“사귀다 보면 좋아질 것 같았어. 너 많이 힘드니까 나까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고.”
“…….”
“화 안 내네.”
“…….”
“울지도 않고.”
“……원래 잘 안 울어.”
“우리 헤어지던 날, 네가 수호 때리고 그대로 가 버렸을 때 수호는 울더라.”
“…….”
“이래서 널 못 좋아했던 것 같아.”
이유진은 이번에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다.
바람은 계속 불었고 물과 풀, 흙 내음이 섞인 복잡한 냄새가 났다. 어쩐지 쓸쓸해졌다.
“공부 잘해. 열이 넌 성실하니까 뭘 하든 잘할 거야.”
“너도.”
“응. 나도 열심히 해야지.”
이유진은 씩씩하게 대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울던 졸업식 날과 달리 이유진은 후련한 얼굴이다.
돌아서는 이유진의 뒷모습을 나는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그 애의 뒷모습이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좋아졌다고…….”
최수호는 좋아했고, 나는 아니었던 이유가 뭘까. 최수호는 나한테 왜 고백한 걸까.
아는데 그냥 좋아졌어, 말하던 이유진의 표정과 어제 본 최수호의 얼굴이 겹친다.
나도 이유진을 좋아했다.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이유진이나 최수호가 말하는 ‘좋아해’하고는 좀 다른 느낌이다.
나는 내가 감내할 수 있는 만큼만 이유진을 좋아했다. 편안하게. 이유진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게 맞는 거라는 생각도 했다. 내 감정을 휘두르다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서는 늘 어느 정도의 냉정이 필요하니까.
경기를 훌륭히 운용하려면 머리를 차갑게 유지해야 한다. 몸에 열이 나고 심장이 요동친다고 가는 대로 주먹을 내질렀다간 참패하기 십상이다. 순간의 흥분에 휩쓸렸다간 상대와 내게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필요 이상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잘 참아야 하고, 자기 한계를 알아야 한다.
이유진한테 내 ‘좋아해’는 잘 닿지 않았던 걸까.
나는 뭘 믿고 이유진도 나를 좋아할 거라고 착각했던 걸까.
‘좋아해’의 종류는 내 생각보다 다양해서,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나서도 내가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좋아져 버린다는 건 어떤 건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뭔지 점점 모르겠다.
* * *
달리다 보니 벌써 집이 코앞이다. 보통 배는 뛰지만, 오늘은 더 뛸 기분이 안 들어서 이유진하고 얘기하던 자리에서 집까지 뛰기만 하고 끝냈다. 뛰다 말아서 그런지 어중간하게 덥다.
“다녀왔습니다.”
“일찍 들어왔네? 너 핸드폰 놓고 다녀왔지?”
당장 씻을 생각으로 거실을 지나치는데 엄마가 안방에서 반쯤 몸을 내밀고 나를 반겼다.
“어, 원래 운동할 때 핸드폰 안 가져가잖아.”
“기영 씨한테 전화 엄청 왔어. 받을까 하다 말았는데, 빨리 확인해 봐.”
“수호 매니저 형?”
기영 씨라면 수호 매니저 형이다. 안 그래도 빡빡하던 스케줄이 점점 살인적으로 되어 가자 최수호의 히스테리는 고3 시절 절정에 달했는데, 온갖 이유로 매니저를 잘라 내던 끝에 살아남은 게 기영이 형이었다.
잠깐 로드 매니저 말고 다른 매니저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젠 기영이 형만 남았다. 단순히 말하자면 기영이 형 외에는 최수호의 지랄 같은 성깔과 엄준한 잣대를 버텨 낸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다.
기영이 형은 착하다. 엄청나게. 난 잘 모르겠는데 최수호 말에 따르면 나하고 닮은 면이 있다고 한다.
“기영이 형이 날 왜 찾아?”
“모르지. 수호 일이려나? 전화해서 물어봐. 전화 많이 한 걸 보면 급한가 보더라.”
하긴. 당연히 최수호 일이겠지. 기영이 형이 나한테 뭐 다른 용건 있을 리도 없고.
“아들, 엄마 우체국하고 은행 다녀올 거야. 밥하고 국 있으니까 알아서 차려 먹어.”
“다녀오세요.”
일단 핸드폰을 찾을 생각으로 방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엄마가 목청을 높였다. 나도 덩달아 큰 소리로 대답한 뒤 침대에 두고 간 핸드폰을 찾았다.
엄마 말대로 부재중 전화가 두 자릿수다. 죄다 기영이 형이다. 가장 최근 부재중 기록은 아직 10분도 안 지났다.
진짜 급한 일인가 본데. 벌써 골치가 아프려고 한다.
“여보세요. 부재중 찍혀 있길래 전화 드렸는데요.”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기영이 형은 다급하게 씩씩거렸다. “열아!”, 내 이름을 부르는 톤이 거의 절박하다.
- 너, 수호 지금 어딨는지 알아?
“네? 최수호요?”
- 오늘 회사에서 대표님 뵈어야 해서 데려왔는데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실종이야. 갑자기 없어져서는 연락이 안 돼. 집에도 없고.
“전화 꺼 놨어요?”
- 전화기는 켜져 있는데 안 받아. 대표님 뵙는 거야 일도 아니고 미루면 되긴 하는데, 걱정된다.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그런가, 수호 요즘 불안하기는 했거든. 다쳐 와서 그 얼굴로 생방 서겠다고 우기질 않나. 아무리 시간이 촉박했어도 그렇지. 바쁜 만큼 몸 관리 철저하게 하던 앤데 얼마 전에는 일 마치자마자 응급실도 다녀왔다니까.
기영이 형이 줄줄 말을 토하는 내내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끼어들 틈 없이 얘기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거니와, 기영이 형이 하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최수호가 아팠다고. 응급실에 드나들 정도로 심하게.
“일단 저도 수호한테 전화해 볼게요.”
- 열이 네가 하면 받을지도 몰라.
“연락 되면 다시 전화 드릴게요.”
- 꼭 좀 부탁한다.
목소리에서 애절함이 뚝뚝 묻어 나온다. 어지간히 시달리는 중인가 보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 일단 최수호 번호로 전화를 걸어 봤다. 안 받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 열아?
혹시 모르기는. 허탈할 정도로 쉽게 받았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너무 순식간에 받는 바람에 얼떨떨하다.
기영이 형이 나보다 최수호를 더 잘 아는 건 아닐까. 기분이 묘해졌다.
“너 어디야?”
- 집.
“기영이 형이 너 집에 없다는데.”
- 집 가는 길…….
“확실해? 그럼 이제 집이야? 찾아간다.”
- 우리 집 말고 너희 집 가는 길이야.
어물거리는 듯하더니 곧 말이 바뀐다.
“말장난할래? 너 오늘 회사 갈 일 있다며. 거기에 가야지, 우리 집에 왜 와.”
- 거의 다 왔어.
“야, 최수호. 야…….”
끊을 것 같은 분위기더라니, 전화가 뚝 끊겼다. 한숨이 나왔다.
응급실 갔다는 거 정말이냐고, 그렇게까지 상태가 안 좋았으면 얘기를 하지 그랬느냐고 말하려고 했는데.
새삼 부쩍 수척해 보이던 최수호가 떠올랐다. 지독하게 바빠 보인단 생각은 했어도 아플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기영이 형 말대로 몸 관리에 철저한 덕에 중학교 이후로는 아픈 적도 별로 없거니와, 감기라도 걸리면 나한테만은 아프다, 아프다 노래를 불러 대던 녀석이니까.
최수호는 어릴 때 자주 아팠고 그럴 땐 내가 꼭 옆에 붙어 있어 줘야 했다.
그랬던 최수호가 아팠는데 내가 몰랐다니. 속이 쓰라리다.
거의 다 왔다고 했으니 집 근처겠지. 최수호가 밖을 돌아다니다 곤란을 겪는 모습을 종종 본 적 있는데다, 요즘 몸 상태가 안 좋았다는 얘기까지 듣고 나니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는 게 신경 쓰인다.
괜찮은 건가, 최수호.
기다리고만 있기 힘들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헛소리 말라고 윽박질러 놓고 하루 만에 이 모양이다.
아파트 앞에 서 있으면 엇갈리지는 않겠지. 아무리 아프대도 몇 분 거리 오다가 무슨 일이 나겠냐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모처럼 마중할 결심을 했건만 나는 현관을 나서기 무섭게 멈춰야 했다.
열린 문 바로 코앞에 최수호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