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88)

14.

얌전히 듣던 최수호가 물음을 던졌다.

“아니거든. 엄마가 너 못 먹여서 안달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보약 정도로 기분 상하겠냐.”

“그거 말고. 무슨 일 있었어?”

최수호가 내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시선이 집요하다. 살갗에 자국이라도 낼 기세다.

“아무 일 없었는데.”

“근데 왜 힘이 없어.”

“내가 뭐가.”

“아까 전화할 때부터 그랬는데. 기분 안 좋아 보였어.”

티 냈다고 생각 안 했는데. 하긴 최수호도 내 기분 알아맞히는 데는 어려서부터 특출했다. 가만히 있어도 화났느냐는 소리를 듣는 인상이라 오해받기 십상인데, 최수호는 내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귀신같이 안다. 우리 엄마도 종종 틀리는 걸.

“너 설마 그래서 오겠다고 한 거였냐?”

그리고 내가 기분이 나빠 보이면 자기가 더 안절부절못했다.

“너 보고 싶어서.”

최수호가 해맑게 웃었다. 요즘 저 미소를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나는 불시의 공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움찔대다 보약 상자로 눈길을 돌린다.

“오늘 천 관장님 만났어.”

“천수관 관장님?”

최수호는 나하고 관련된 사람은 대부분 안다. 그중 천 관장님하고도 당연히 안면이 있다.

그저 안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한때는 사제의 연을 맺기도 했었다. 최수호 쪽에서 데면데면해서 그렇지.

뭣 모르던 초등학교 시절, 자기도 나하고 같이 복싱하겠다고 아득바득 우겨 따라왔다가 천 관장님을 보자마자 울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성품과 다르게 체구가 좀 위협적이시긴 하지. 야생 곰하고 붙어 볼 만하지 않을까.

“너 복귀하라고 하셨겠네.”

“그렇지, 뭐.”

“그래서 뭐라고 했어?”

“뭘 뭐라고 해. 관뒀는데.”

그만뒀다는 말을 할 때면 몸속 어딘가가 자꾸 따끔거린다. 단순히 사실을 말하는 건데 왜 이러는지. 언제 말끔해질까 싶다.

“그래서 기분 안 좋았구나.”

“기분 안 좋은 거 아니라니까…….”

내가 듣기에도 신빙성 없는 말투다. 최수호는 반박하는 대신 턱을 괴며 웃었다.

“너 복싱하는 거 다시 보고 싶다.”

“지금도 해.”

“시합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며.”

“중학생 때 한 얘길 아직도 기억하냐.”

아마추어 경기 막 출전하면서 신나서 떠들었던 말이다. 지금도 시합이 재미있긴 하다. 보면 최수호, 은근히 기억력이 좋단 말이야. 하긴 그러니까 몇 번 본 대본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읊겠지.

“형이 형을 위해서라도 다시 복싱하는 건 꿈도 꾸지 말래.”

가볍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넌 다시 하고 싶잖아.”

최수호가 나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말투다.

“잘 모르겠어.”

복싱은 하고 싶다. 다만 내가 복싱을 계속할 때 따라올 것들을 이겨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운동을 계속할 거라 확신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만두지 않겠다고.

아직 암초에 부딪혀 본 적 없으니 가질 수 있던 패기였다. 겪어 보지 않은 미지의 고난에 투지를 불태우는 건 쉽다. 섀도복싱 같은 거다. 가상의 적을 쓰러뜨리는 거야 일도 아니다. 그러나 진짜 경기는 상상과는 모든 게 다르다.

형이 쓰러진 건 형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형도 한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복싱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너 경기하는 거 볼 때마다 새삼 반했는데. 처음으로 경기하는 거 봤을 때 진짜 떨렸어.”

달콤한 목소리가 생각 속을 헤엄쳐 들어온다.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이마만 감싸 쥐었다.

내 첫 경기면 중학생 땐데. 아역 배우 일로 바쁘면서도 내 경기마다 부득불 관중석에 앉아 있던 최수호가 떠오른다. 우리 엄마보다 쟤가 내 경기를 자주 봤을 거다. 그런데 경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장장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최수호 속을 까맣게 몰랐다니. 이제 최수호에 대해 잘 안단 장담 같은 건 하면 안 되겠다.

“……그런 얘기 안 하면 안 되냐?”

“너한테 반했단 얘기?”

“…….”

“좋아하는 걸 어떡해.”

내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최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귓바퀴에 손가락이 감겼다.

“귀 빨개졌다.”

“야, 좀.”

“귀여워.”

우리 엄마, 아빠도 이제 나더러 귀엽단 소리 잘 안 하는데 뭘 보고 자꾸 귀엽대.

사실 최수호가 나한테 좋아한다, 귀엽다 소릴 달고 살았던 건 예전에도 똑같았지만, 요즘에는 전하고 달리 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 힘들다는 게 문제다.

귀를 만지작대는 손을 떨쳐 내자 최수호가 내 고개를 돌리게끔 했다. 최수호 눈이 반짝거린다. 나 괴롭힐 땐 꼭 이렇다.

“열아, 키스해도 돼?”

“되겠냐?”

“왜 안 돼?”

“이유를 왜 네가 물어봐. 당연히 안 되는 거지.”

“이미 했잖아. 근데 왜 안 돼?”

“그때 한 게 이상한 거고 원래는 당연히 안 돼.”

사귀지도 않는데 친구 사이에 키스하는 게 정신 나간 짓이지. 이미 몇 번쯤 해 버렸지만, 그땐 정신이 나갔었다고 치고.

“불쌍하게 쳐다봐도 소용없어. 또 힘으로 덤비면 네가 보고 싶다던 그 시합, 이 자리에서 너랑 하게 될 줄 알아.”

최수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반짝 고개를 들더니 나를 응시했다.

“그럼 껴안고만 있는 건 괜찮아?”

예의 그 처연하고 잘생긴 눈빛으로.

“뭐…….”

“제발.”

미친다. 애원하는 솜씨가 하루 이틀 사이에 갈고닦인 게 아니다.

“……네 맘대로 하세요.”

끝내 흘러나온 허락에, 최수호가 반색하며 일어서서 내 허리춤에 팔을 감았다. 끌려가 최수호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으며 한숨을 삼켰다. 나도 엄마가 시키는 대로 우유나 열심히 먹었어야 하는 건데. 어쩌다 키 차이가 이렇게까지 벌어졌는지.

내 등을 꼭 끌어안던 최수호가 내 목덜미에 머리를 비빈다. 커다란 개가 애정 표현하는 것 같다.

급기야 목덜미에 입술이 닿는다. 실수로 스치는가 싶더니 턱 아래에 입술이 분명하게 눌렸다. 입술이 목선을 타고 미끄러진다. 어깨가 반사적으로 곤두섰다.

“껴안아도 된다고 했지, 입술 대라고 한 적은 없다.”

개는 차라리 이런 짓은 안 하지. 떼어 내고자 이마를 떠밀었더니 최수호가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조금만.”

속삭이면서 더 깊이 입술을 묻는다. 빗장뼈 언저리에 입술이 비벼졌다.

“윽…….”

“너한테서 좋은 냄새나.”

좋은 냄새는 무슨. 핀잔을 주려다 숨이 거칠어지는 바람에 급하게 이를 악물었다. 목덜미를 맴도는 입술의 감촉이 야릇하다. 이게 키스보다 더 이상하다. 열 배는 더.

힘으로 머리를 밀어내도 최수호는 굴하지 않고 엉겨 붙는다. 티셔츠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맨살을 만지는 손길에 몸이 저절로 굳었다. 등에 손이 닿은 것뿐인데, 시답잖은 접촉에도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손, 손 빼라.”

“왜?”

“왜? 왜? 너 지금 왜라고 했냐?”

“껴안아도 된댔잖아.”

“옷 속에 손 넣어도 된다고 한 적은 없거든. 야, 빨리 손 안 빼냐.”

“옛날엔 같이 샤워도 했는데 왜 만지면 안 돼?”

“미친 새끼가 자꾸 징그러운 소리 할래? 그거랑 이거랑 같냐?”

내가 뭐라고 지껄이건 최수호는 손을 빼지 않았다. 가슴팍을 밀어내자 무게로 버틴다. 아주 이가 갈린다. 체급만 같았어도.

상대가 끌어안고 클린치를 걸어 공격을 막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천 관장님 말에 따르면 ‘자꾸 근접전으로 가려고 하는 전형적인 인파이터’인 나한테 클린치 대응은 늘 숙제였는데…….

“손 빼라고.”

어차피 이건 경기가 아니니까 아무 데나 치면 그만이다. 최수호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철썩, 치자 최수호가 얻어맞은 강아지처럼 끙끙댔다.

“아야, 열아. 나 거기 아파.”

“뻥치지 마라. 안 속는다.”

“진짜야. 지난번에 네가 때려서 멍들었어.”

실컷 우는소리를 하며 최수호가 옷자락을 들쳤다.

정말이다. 옆구리 쪽이 시커멓다. 살결이 희어서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렇게 세게 때린 줄 몰랐다. 아니, 진심으로 때리긴 했는데 그래도 이 지경으로 멍이 들 줄은 몰랐지. 할 말이 없다.

“……많이 아프냐?”

“엄청 아파.”

“…….”

“이따 약 발라 줘.”

“……어.”

“그럼 만져도 되지?”

약은 새끼. 그게 왜 자연스럽게 그 얘기로 넘어가냐.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 안 드냐?”

“응. 안 들어.”

“…….”

“잠깐만 안고 있을게. 그러면 안 아플 거 같아.”

내가 건드리기 전까지는 아픈 시늉도 안 하더니. 내가 저지른 짓이라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요즘 최수호 많이 때리긴 했지.

“입은 대지 마라.”

“응.”

대답은 늘 순순하다. 최수호가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조심조심 등을 쓸다가 정수리에 입술을 묻는다.

쪽.

머리카락 사이로 떨어지는 키스에 움찔했다.

“입 대지 말랬다.”

“여기도 안 돼?”

“안 돼.”

“그럼 어디어디 되는데?”

“아무 데도 안 돼.”

“아무 데도?”

최수호가 턱을 내리더니 이마를 맞대 왔다. 바로 앞에서 보이는 얼굴을 보고 놀라 고개를 빼려 하자 이번에는 뒤통수를 감싼다.

“너무해.”

너무한 건 너겠지.

키스 몇 번 하고 떨어지는 것보다 지금 상황이 월등히 이상하다. 당장 입술이 스칠 듯 가까운 거리며, 허리를 감은 팔 따위가 분위기를 끈적끈적하게 적셨다. 기묘한 열기가 느껴지는 최수호의 눈길은 덤이다.

“뺨 정도는 괜찮지 않아?”

“안 돼.”

“그럼 이마는?”

“안 돼. 최수호 너, 사귀지도 않는 사람하고 이런 짓 하는 건 좀 아니란 생각 안 드냐?”

“난 너한테만 이러고 싶고, 너하고만 사귈 거니까 괜찮아.”

“퍽이나 괜찮겠다. 좀 놔, 더워.”

“꼭 놔야 해?”

“그럼 평생 이러고 있냐?”

최수호가 고개를 끄덕일까 봐 좀 무서워졌다.

“네가 해 주면 오늘 더 안 괴롭힐게.”

“뭘 해 줘.”

“키스.”

이게 진짜 키스가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나. 자꾸 부르네.

“안 한다고 했다.”

“볼에만 해 줘도 괜찮은데.”

“떨어지라고도 했어.”

“어릴 때는 해 줬는데 지금은 왜 안 돼?”

“네가 일곱 살이면 진작 해 줬다, 징그러운 새끼야.”

“한 번만 해 줘. 잠깐이면 돼.”

지치지도 않고 졸라대는 게 대단하다.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자 최수호가 내 허리를 더 바싹 당긴다. 몸이 빈틈없이 밀착했다. 옷 너머로 전해지는 최수호의 심장 박동을 세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이건 내 심장 박동인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