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됐어. 이게 더 짜증 나.”
“열이한테 짜증 난다고 하지 마.”
“내가 열이한테 짜증 난다 그랬냐? 최수호 너한테 그랬지?”
“열이한테 열이라고 부르지 마.”
“아오, 또라이 새끼. 너흰 나 용배라고 부르지 마.”
“둘 다 싸우지 좀 마.”
10년을 한결같은 것도 참 신기하다. 생긴 거랑 달리 정 많고 단순한 양용배 성격상 웬만하면 친구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최수호가 철벽을 넘어선 만리장성급 벽을 지닌데다 기억력이 무섭도록 좋은 바람에 둘 관계는 여전히 평행선이다.
최수호를 라이벌로 선언하고 괴롭힌 건 어린 양용배의 호기였겠으나 최수호는 한 번 눈 밖에 난 인간은 다시는 안 돌아보는 쇠고집이다.
리트리버와 도베르만이라고 했지만 저 둘 중 투견은 단연 최수호다.
“너 먼저 찍잖아. 가서 빨리 준비 안 해?”
“너 들어가 있는 사이에 찍었거든? 그냥 가라고 하든가. 더러워서 간다, 더러워서.”
“빨리 가.”
“간다고!”
양용배가 주먹을 흔들면서 멀어졌다. 촬영 재개를 앞두고 가다듬고 있는지 세워 놓은 세트에 스태프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최수호, 와 봐.”
재개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아무래도 걱정스러워 최수호를 향해 손짓하자 최수호가 바로 내 앞에 서서 몸을 굽혔다.
역시 프로는 프로인가 보다.
메이크업 수정을 마친 최수호를 보니 절로 그 말이 떠올랐다. 퀭하던 애를 아픈 기색 하나 없어 보이게 만든 것도 대단하고, 촬영장에 돌아오자마자 빠릿빠릿 움직이는 최수호도 어지간하다.
“열은 아직 있네.”
최수호의 이마에 손을 얹자 뜨뜻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겉모습은 말짱한데 아직 미열이 남아 있다.
“너 정말 괜찮겠어?”
“응. 처방받았잖아.”
능청스레 말하며 최수호가 입술을 가리켰다. 이, 미친.
“바깥에서 그런 말 꺼내지 마.”
“여기 바깥이야?”
“아무튼. 둘이 있는 데 아니면 하지 마.”
“뭐, 어때.”
뭐, 어떻긴. 넌 민망함이라는 게 없냐. 핀잔을 담아 지그시 노려보자 최수호가 싱글거리며 주둥이를 새 부리처럼 내밀었다. 때리기 좋아 보이길래 기꺼이 때려 줬다.
“가서 일이나 해라.”
앞에서 최수호를 부르는 게 보인다. 저 앞에 최수호의 링이 준비되어 있다.
“잘하고 와.”
“잘할게.”
“다녀와.”
바쁘고 위험하고 복잡한 곳으로 최수호가 뛰어간다.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간다.
최수호는 나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어 보며 멀어진 나의 링을 떠올렸다. 세트를 비추는 조명이 아득해 보였다.
* * *
최수호가 멈춘다. 양용배는 최수호의 리치가 닿는 거리로 들어선다. 펀칭 거리가 확보되자마자 최수호가 주먹을 날린다.
양용배는 어깨를 움직여 숄더롤로 공격을 흘리려 한다. 최수호가 키가 더 큰데 왜 어깨로 피하지. 어차피 헤드샷이면 슬립처럼 허리하고 머리를 같이 움직여서 피하는 게 낫지 않나? 급하게 움직이다 어깨 근육 나가면 위험한데.
둘이 세트 위에서 펼치는 공방전을 보고 있으니 복싱 선수 시점으로 감상하게 된다. 드라마니 움직임이 많아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비효율적이라 의아했다. 저러다 다치겠다.
첩보 액션이라더니 두 적수가 실내에서 맞붙었다가 탈출하는 신인 듯했다.
연달아 합을 맞추던 최수호와 양용배가 표시된 선에 섰다. 카메라가 돌아가자 최수호와 양용배가 아까 맞췄던 액션을 다시 선보였다.
“합이 잘 맞진 않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대꾸가 돌아왔다.
“그러게. 안 그래도 쓰기 힘든 부분인데 어깨 맞으면 아프겠다. 저 동작은 어깨가 아니라 그냥 상체로 피하는 게 보기도 더 좋지 않아?”
“네. 아니면 주먹이 좌측으로 꽂히니까 왼팔로 커버링을 하든가. 숄더롤 쓰기엔 거리도 안 맞고 양용배 반응 속도도 느린데.”
“스턴트 없이 소화하는 장면 많다더니 수호 씨는 액션도 제법 하네.”
“일단 피지컬이 되고 아무래도 배운 가락이 있으니까…… 깜짝이야.”
누가 옆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는 바람에 나도 자연스레 대꾸하다 소스라쳤다. 자재를 넣어 두는 박스를 뒤집어 옆에 자리를 만들어 앉아 있는 건, 밤송이 같은 수염을 단 황춘식 감독이다.
갑자기 모르는 사람 옆에 와서 말 거는 게 취미신가. 등장마다 사람 놀라게 한다.
“수호 씨, 운동해?”
“바빠지기 전에, 어릴 때요.”
밥도 제시간에 못 챙기는 애가 운동할 시간을 뺄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래도 중학생까지는 유도에 복싱에, 내가 배우는 건 다 같이 배웠다.
최수호는 타고난 운동 신경이 좋고 지구력도 뛰어나다. 시합에서 쉽게 흥분하는 것만 제외하면 선수감이라고 천 관장님이 아쉬워했을 정도다.
“정열 씨, 수호 씨 친구라며?”
황 감독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벼운 악수가 오갔다.
“네. 감독님이시라면서요.”
업계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바람에 무시할 수도 없게 됐다. 저쪽에서 내가 최수호 친구라는 걸 아는 이상, 최수호하고 일할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윤서화 선생님도 잘 알겠네?”
“아뇨. 그쪽은 잘. 한국에 잘 안 계시잖아요.”
갑자기 수호네 어머니 이름이 나와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멈칫했다. 최수호랑은 거의 매일 봤지만 최수호네 어머니와 제대로 인사한 건 손에 꼽는다.
“이번에 들어오셨잖아.”
“……예, 들어오셨죠.”
수호네 어머니를 생각하면 복잡하다. 수호네 어머니라 싫어할 수 없는데, 최수호 때문에 도저히 좋아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스태프가 컷을 외치자 최수호가 고개를 늘어뜨리고 숨을 고르는 게 보였다. 열도 안 내렸는데 불편한 차림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지칠 수밖에.
한창 복싱 훈련할 때 쉬는 게 훈련만큼 중요하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는데, 최수호는 어머니만 얽히면 마른걸레를 쥐어짜는 것처럼 필사적이 된다. 긴장하고, 아프고, 쉬지도 않는다.
차라리 최수호 앞에 안 나타나 줬으면 싶다.
갔으면 돌아오지 말지.
여권을 손에 쥐고 엉엉 울던 중학생 최수호가 생각나 어금니가 악물렸다. 애를 그 꼴로 만들어 놓고 가셨으면 오지나 마시지.
“요번에 대작 진행하시더라고. 수호 씨도 그 영화 나가지, 아마?”
떠보는 게 확실한 말투였다. 사람들은 최수호한테 궁금한 게 참 많다.
“저도 몰라요. 제가 매니저도 아니고요.”
“에이, 지금까지 수호 씨 친구라고 나타난 사람이 업계인과 비업계인 통틀어 딱 한 사람 있는데 그게 정열 씨거든.”
“최수호한테 관심 많으신가 봐요.”
오늘 최수호 인기 폭발이네. 하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가.
최수호의 비좁다 못해 콩알만 한 인간관계가 업계 사람들한테도 유명하긴 한가 보다. 최수호 친구라고 관심받는 일은 익숙하다.
“내가 수호 씨 같은 한류 스타 유치에 적극 힘써야 할 가난한 영화인이다 보니.”
“아, 예.”
“그리고 윤서화 선생님 팬이라서.”
“…….”
“수호 씨는 배경 스토리도 극적이잖아. 윤서화 아들로 데뷔도 화려하게 했었고. 심지어 데뷔 전부터 유명했으니까.”
전부터 유명했다는 말에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맞는 말이다. 본격적으로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치기 전부터 최수호는 전 국민에게 알음알음 유명했다.
미혼모가 된 유명 배우의 아들이었으니,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아는 이들이 많았다. 중장년 중에는 거리에서 수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다.
수호네 어머니는 재기를 위해 어린 수호를 카메라 앞에 세우기도 서슴지 않았다. 수호와 나오는 다큐멘터리도 하나 있다.
최수호는 그 다큐멘터리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직도 제일 싫어한다.
“팬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정열 씨, 운동했지?”
“그건 왜요.”
“실은 팬이거든.”
대뜸 던져진 말에 머리 위에 물음표가 세 개쯤 떴다. 팬? 갑자기?
“최수호가 아니라 저요?”
“응. 복싱했잖아. 맞지? 올림픽 때는 따라가서 구경도 했었는데 말이야.”
진짠가. 안 믿겨서 한동안 쳐다봤다. 선수 생활 그만둔 지가 한참이다. 이런 데서 갑자기 팬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아까 피할 때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더라고. 그래서 얼굴을 딱 봤는데 익숙한 거야. 이름을 들었더니 또 정열 씨라잖아? 이야, 운명적이지?”
“예, 그런 걸로 치죠. 그래서 따라다니신 거예요?”
“따라다녔다고 하기엔 그렇고…… 응.”
어쩐지 처음 본 사람이 묘하게 친한 척을 한다 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상한 사람 맞는 것 같긴 하지만.
“복싱은 왜 안 해?”
“사정이 생겨서요. 사연은 대충 아실 것 같은데.”
“진짜 그 이유야? 다시는 안 해?”
팬이라고 해서 잠깐 놀랐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저 뺀질거림은 여전히 성가시다. 아픈 최수호가 촬영은 무사히 하는 중인지 지켜보기도 바쁜데 계속 대답해 줘야 하는 것도 번거롭다.
“감독님은 영화는 안 찍고 왜 이런 데 계세요.”
“나는 쉬는 중.”
“저 감독님 영화 봤어요. <악과>.”
“오, 봤구나. 그거 내 출세작이야.”
“5년도 더 된 영화잖아요.”
“세월이 벌써 그렇게 됐나?”
흠, 흐음. 황 감독님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운동하다 보면 많이 봐요. 조금만 쉬어야지, 하다가 안 돌아오는 회원들이요. 사흘 쉬면 전엔 잘되던 게 힘들고, 일주일 쉬면 하기 싫고, 2주 쉬면 감을 잃거든요. 꾸준히 하는 사람 드물어요. 학생 때도 반짝 잘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대회 안 나오는 애들 보면 연습량 달리는 애들이고요.”
“불시에 돌려 까네. 역시 복싱 선수야. 정열 씨, 타격감하고 속도가 장난이 아니야.”
“수호는 10년을 쉬지도 않고 달렸어요. 쉬운 일 아니에요.”
“…….”
“수호 어머니가 유명해서 덩달아 주워 먹은 자리가 아니라고요. 한류 스타 그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