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88)

27.

“죽는다. 비켜.”

“긴장 풀려서 못 움직이겠어.”

“아까는 움직인 게 아니라 흘러 다닌 거였냐? 침대 가서 자. 거실 추워.”

“키스하고 싶어.”

해석하자면, 안 해 주면 안 움직이겠다는 뜻이겠다. 최수호는 지금 내가 한껏 물러졌다는 걸 알고 있다. 곧 죽을 것처럼 약한 척하더니만 기회가 보이자 바로 갖고 싶은 걸 손에 쥐려 든다.

“열아, 한 번만.”

“그 말 몇 번째인지 알긴 아냐? 너하고 벌써 세 번은 했거든?”

“키스는 한 번이었어.”

“자랑이다, 미친 새끼.”

“나 잘할 자신 있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다. 누구는 바닥에 멍든 데가 깔려서 배겨 죽을 노릇인데.

아픈 어깨를 핑계 삼아 벗어나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침묵했다. 최수호의 어깨 너머로 우리 집보다 훨씬 높은 최수호의 집 천장이 보였다.

친구끼리 질투하는 거 정상인가요?

아무나 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천장에 ‘예’, ‘아니오’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친구끼리 키스하는 건 정상인가요.

만약에 친구가 키스하자고 달려드는데 전에 했던 키스인지, 뽀뽀인지가 기분 좋았다는 생각이 들면요. 그건 정상인가요.

“열아아…….”

위에서 내려다보는 친구 얼굴이 미치게 잘생겨 보이는 건요? 잘생긴 건 온 국민이 인정한 객관적 사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예쁘게 접히는 눈웃음만 보면 마음이 한도 없이 약해지는 건요.

사실 정답이 뭔지는 알고 있다. 비정상입니다.

“하자, 응?”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끈질기게 속삭인다. 흥분을 주체 못 했는지 최수호가 귓불 뒤로 입술을 비볐다. 몸살 기운처럼 찌릿찌릿한 감각이 뒷덜미를 감쌌다.

“제발.”

이제는 아예 애원이다. 이것부터가 비정상이라고. 밀어내려 가슴팍에 손을 얹자 최수호가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붙잡힌 손바닥에 연달아 입맞춤이 퍼부어졌다.

“키스만 하고 자러 갈게.”

“…….”

“너 다시 체육관 가야 하잖아.”

이젠 회유까지. 잊었던 체육관 생각에 눈이 찡그려졌다. 지금 열이 나는 게 도대체 누구인지도 구별이 안 된다. 어지러웠다.

“……해.”

이게 정말 내가 한 말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최수호는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웃을 리가 없다.

곧장 입술이 겹쳤다. 말랑말랑한 입술의 감촉에 나는 애꿎은 주먹만 고쳐 쥐었다. 맞댄 곳으로 열기가 옮겨 온다. 으깰 듯 비벼지던 입술에 촉촉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혀가 입술 사이로 파고든다. 눈앞이 핑 돌았다. 최수호가 눈을 가늘게 접은 채로 나를 응시했다. 꾹 다문 입술을 끈질기게 빨다가 마침내 미끄러지듯 앞니를 핥는다. 고집스럽게 입 다무는 내게 최수호가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해.”

숨이 불규칙하게 터진다. 목이 말랐다. 턱 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온 최수호의 입술이 다시 내 입가로 기어올랐다. 당연하다는 듯 혀가 입술 틈으로 들어온다.

뺨을 받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키만큼이나 커다란 손이다. 장난스럽게 얽힌 혀에서 달콤한 맛이 났다. 과일이 들어간 사탕이나 잼에서 나는 맛. 잔뜩 졸아든 단맛이다.

잔뜩 빨린 혀가 금세 얼얼해졌다. 침이 서로 섞이는 소리가 난다. 끈적거리는 물소리가 녹은 설탕처럼 끈끈하게 귀에 스몄다.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울리는 소리였다.

혀뿌리까지 감전당한 것처럼 저렸다. 잘할 자신 있다더니 최수호는 정말로, 기가 막히게 키스를 잘했다. 단순히 혀를 비비고 입 안을 핥는 것뿐인데 입천장에서부터 목구멍까지 간질거린다.

입 안이 온통 끈적대는 느낌이 들 무렵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너무 좋아.”

최수호가 나른하게 소곤거렸다. 나는 터질 것 같은 얼굴을 돌리고 잘 삼켜지지 않는 침을 삼키고 있었다. 감각이 다른 데로 쏠려 어깨의 통증은 이제 잘 느껴지지도 않는다.

“기분 좋았어?”

고개를 피한 나를 기어이 따라붙은 최수호가 내 입가를 핥았다. 깨물리고 빨린 입술이 혀에 쓸린다. 더운 숨이 서로 엉켰다.

“나 잘했어?”

나는 엉거주춤하게 최수호를 떠밀고 얼굴을 가렸다.

“응? 잘했어?”

최수호가 내 팔을 치웠다. 버티고 싶은데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다. 미치겠다.

정수리까지 터질 듯 벌게진 내 모습이 쉽게 상상됐다.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는 것조차 버겁다. 몸의 어디 하나 힘이 제대로 들어가는 곳이 없었다.

“이제 비켜.”

최수호가 비켜 주지 않아 상체만 겨우 일으킬 수 있었다. 그나마도 최수호의 몸에 막혔다. 코끝이 스칠 듯 가까웠다.

나를 응시하는 최수호의 얼굴에는 들뜬 미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무표정 위로 열을 응축해 놓은 듯한 눈만이 타오른다.

욕망이 너무도 적나라해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옷을 벗고 있나, 착각이 든다.

“……빨리 비켜.”

비켜 주는 대신 최수호는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붙잡아서 단숨에 품으로 끌어들인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회피도, 방어도 쉽지 않다.

“수호야, 나 어깨 아프다.”

“아.”

최수호가 놀라며 손을 놓았다. 그 틈을 타 억지로 최수호를 떨치고 일어섰다. 발바닥으로 바닥을 디디는 게 이상하다. 공중에서 놀이 기구를 타다 내린 느낌이었다.

“미안해. 아팠어?”

“됐어. 잠이나 자. 깨면 연락하고. 간다.”

나는 쏜살같이 최수호의 집을 벗어났다. 최수호가 잡았던 게 사실 멀쩡한 쪽 어깨라는 건 알려 주지 않았다.

“신발 바꿔 신었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나서야 신발 좌우가 바뀐 걸 알았다. 한쪽씩 바꿔서 신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엘리베이터가 열릴 때까지 나는 일어서지 못했다.

귓가에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10, 9, 8…….

어쩔 건데, 정열. 이대로는 녹다운이다.

4, 3, 2.

숫자가 다 줄어들기 전 아슬아슬하게 문이 열린다. 억지로 무릎을 폈다. 뒤축이 구겨진 신발이 질질 끌렸다.

* * *

“오래 걸렸네?”

체육관에 들어서자 지원 누나와 황 감독님이 나를 반겨 주었다. 예, 오래 걸렸죠. 친구랑 키스하느라요. 나만 웃을 수 있는 농담을 속으로 뇌까렸다. 죽겠다.

“너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냐? 그냥 갈래? 관장님 올 때까지 체육관 내가 볼게.”

지원 누나가 걱정스럽게 나를 살폈다. 체육관에 도착할 무렵엔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최수호한테 당한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나 보다.

“피곤한 거 아니에요. 근데 무슨 얘기하고 계셨어요. 계단까지 소리 다 들리던데요.”

“아! 그거. 황 감독님 옛날 얘기 듣는 중이었지.”

내가 다녀오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원 누나는 황 감독님과 완전히 의기투합해 있었다. 죽이 잘 맞나. 하긴 둘 다 사교적인 게 비슷한 것 같기도.

“열아, 감독님 천수관 관장님하고 동기였대!”

“동기까지는 아니고 그냥 잠깐 같은 체육관에 있었던 사이. 천수관 선수야 그때도 완전 동경의 대상이었지. 천수관 선수 본다고 그 체육관까지 가서 등록했다니까.”

좋아하는 선수 따라 등록한 경력이 이번이 최초가 아니신 모양이다. 과연, 기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 법.

“원래 선수셨어요?”

“아니. 그냥 영화 보고 어린 마음에 멋있어 보여서 시작한 거야. 생각해 보니 그 영화 보고 복싱도 배우고 감독도 됐네.”

“무슨 영환데요?”

“<록키>.”

황 감독님이 장난스레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저도 그 영화 좋아해요.”

좀 놀랐다. 나도 복싱하기 전에 봤던 영화가 <록키>였는데. 그거 보고 복싱하는 사람들 많나. 하긴 <록키>의 히트가 당시 복싱계에 파장을 미쳤다는 얘긴 형한테 들었다.

“그거 재밌어? 난 제목만 들어 봤어.”

“나온 지 꽤 된 영환데 아직도 시리즈가 나오고 있다니까. 지원 씨도 한번 봐라.”

“그럴까 봐요. 아, 잠시만요.”

검색할 요량인지 지원 누나가 핸드폰을 쥐자 타이밍 좋게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관장님?”

관장님? 누구 전화인지 알자 덩달아 핸드폰에 눈이 갔다.

“형 전화예요?”

지원 누나가 핸드폰을 귀에 대고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하던 것도 멈추고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병원에서 늦으시는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저 오후까지는 괜찮아요. 제가 있을게요, 네. 열이 바꿔 드릴까요?”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지원 누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바꿔 주겠냐고 묻기까지 했는데 형은 그냥 전화를 끊은 거였다.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지원 누나가 가족인 줄 알겠다.

“폰 좀 빌려주세요. 형한테 전화 걸게.”

“어? 내 폰으로 하게?”

“지금 제 번호 뜨면 안 받을걸요.”

이제는 행동이 예상 간다. 정진은 계속 그런 식이니까.

지원 누나는 난감해하면서도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형은 신호가 세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형, 어디야. 왜 늦어.”

- 정열? 왜 네 전화로 안 하고 남의 걸로 전화를 걸어.

나라는 걸 알고 나니 말투에 놀라움과 짜증이 섞인다.

“그러는 형은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없이 지원 누나한테만 전화하는데?”

- 어차피 둘이 같이 있잖아.

“병원에서 왜 늦냐니까. 무슨 일 있어?”

- 알아서 뭐 하려고. 너 체육관 있지 말고 집에 가라. 지원 씨한테 부탁하게.

“왜 안 알려 줘? 뭔데 병원에서 늦어지냐고. 아파?”

- 술 마셨냐? 무슨 상관이야.

하여간 말 예쁘게 한다. 뭐라고 설명 한마디 해 주는 게 어려운 일인가. 진료 때문에 늦어진다는 얘기를 나한테도 해 주기만 했더라도 이렇게 짜증 나진 않았을 거다.

“동생인데 왜 상관이 없냐.”

- 미쳤나. 꼬장 부리지 말고 들어가. 끊는다.

“형은 내 인생에 마음대로 상관하면서 왜 난 상관하면 안 되는데.”

갑자기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져서 끊은 줄 알았다. 액정을 확인하자 통화 시간만 쌓이고 있었다.

- 정열, 너 내 체육관에서 나가.

핸드폰 스피커에서 불시에 축객령이 튀어나왔다.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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