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88)

29.

피로에 찌들어 잠든 얼굴인데도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 같네.

왜 난 맨날 보면서 맨날 감탄하는 거 같냐. 이만큼 봤으면 지겨울 때도 됐는데. 만약 최수호가 내 친구가 아니라 TV에서나 보는 연예인이었다면, 지원 누나처럼 나도 최수호를 엄청 좋아하지 않았을까.

TV에 나오는 최수호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라니. 상상해 보고 닭살 돋았다. 최수호를 연예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실제로 보면 후광 때문에 이목구비가 안 보인다는 최수호의 얼굴이 바로 눈앞이다. 이끌리듯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입술까지는 금방이었다.

이 입술과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아뜩한 것들을 생각한다. 심장이 발바닥으로 끌려 내려가다 다시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는 것만 같은 느낌.

거리가 점점 좁혀 들자 입술에 체온이 느껴진다. 섬약한 정전기 같은 게 입 안까지 퍼져 나갔다. 윗입술의 뾰족한 산이 서로 스치듯이 닿으려 들었다.

아, 도저히 못 하겠다.

입술이 닿기 직전에 급하게 고개를 뒤로 뺐다. 너무 급하게 일어서느라 목에서 소리가 다 난다.

마른세수로 얼굴로 뻗친 열기를 열심히 쓸어내렸다. 미쳤지. 나까지 뭐 하는 짓이냐. 휩쓸리지 말고 정신 차려라, 정열.

혹시라도 최수호가 왜 안 하냐고 물어볼 것 같아 조마조마하게 최수호의 안색을 살폈다. 사실 깨어 있는 건 아니겠지? 다 알면서 모른 척 눈 감고 있던 거 아니야?

걱정한 게 민망해질 정도로 최수호는 얌전히 자고 있었다.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바쁘다.

최수호, 진짜 자나. 피곤했나. 하긴 밤새워서 촬영하고 들어온 거니까. 언제까지 자려나. 소리를 냈다간 깰 것 같아 입 속으로만 속삭였다. 수호야, 언제까지 잘 거야.

수호야, 속으로 부른 걸 듣기라도 한 듯 가지런한 눈썹이 움찔한다.

최수호의 눈꺼풀이 마법처럼 열렸다. 커튼이 걷히고 빛이 쏟아지는 순간 같았다.

“안녕.”

아직 졸음에 겨워 잠긴 목소리마저 근사하다, 최수호는.

“안녕, 최수호.”

일어나라고 흔든 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깨운 기분이다. 최수호는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손부터 뻗어 내 어깨를 더듬더니 웃었다. 정말로 거기 있나 확인이라도 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더 자. 너 더 자야 돼.”

“응……. 조금만 있다가.”

당장 싫다고 벌떡 일어나 껴안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잠에 취해 있다. 항상 이렇게 말 잘 들으면 얼마나 좋아.

“꿈꿨어.”

“무슨 꿈.”

“열이 네가 나오는 꿈. 너하고 처음 만났을 때 꿈꿨어.”

“그게 기억나? 10년도 더 됐는데.”

“당연히 다 기억나지.”

눈을 감은 채 최수호가 한껏 풀어진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나는 열이 네가 하나님인 줄 알았어.”

유도복 입고 인상 쓰고 다니던 밤톨만 한 남자애가 어딜 봐서 하나님이랑 비슷해 보였다는 건지. 참 최수호 보는 눈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너는 나랑 다른 성경 읽었나 보다.”

“나 그때 매일 기도했거든. 너무 힘드니까…… 내가 믿을 수 있는 걸 달라고.”

감겨 있는 최수호의 눈꺼풀 위로 가느다란 빛이 지나간다. 커튼의 틈에서 하얗고 깨끗한 햇볕이 새어 들어왔다.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걸 달라고, 매일 기도했어.”

“그게 나냐.”

“응.”

간지러워 미칠 지경인 소리를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하는 최수호의 대단함이란. 최수호가 눈을 감고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홍시처럼 푹 익은 얼굴을 팔뚝 아래로 감췄다.

“열아.”

“뭐.”

“왜 다시 우리 집 왔어?”

어느새 최수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침대 아래로 떨어져 있던 최수호의 손이 올라와 내 뺨을 만졌다.

“안 좋은 일 있어?”

피로에 약간 쉬어 있는 음성에 지극한 염려가 담긴다. 불시에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은 왜 언제 겪어도 속수무책일까.

“나, 최수호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유치해. 철도 덜 들었고, 아직도 형이랑 싸우고, 아빠한테 불효자식 같은 소리나 하고.”

볼멘 투정이 막을 것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최수호는 가만히 내 뺨을 쓸었다.

“진이 형이랑 싸웠어?”

“정진, 진짜 개새끼야.”

“형이 너 속상하게 했어?”

“몰라…… 짜증 나. 병원에서 뭐 일 있나 본데 아픈 건지 제대로 말해 주지도 않고, 내가 초등학생이냐? 뭐 하나 제대로 믿고 맡기지도 못하고 옛날에 같이 운동할 때보다 더 안절부절못하잖아. 혹시라도 나 잘못되면 다 형 책임인 것처럼…….”

정진은 내가 복싱을 한 것부터가 다 형 책임이고 형 잘못인 것처럼 군다. 만일 내가 복싱을 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형은 자기가 다치게 한 것처럼 괴로워할 거다. 사실 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인데도.

“형이 그러니까 내가, 싸워 보지도 못하는 거잖아.”

옷 안에 넣어 놓고 있었던 대본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아귀에서 종이 뭉치가 우그러졌다. 판정패도 아니고, 싸워 보지도 않고 내 발로 나가는 건 안 멋있다고 했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남의 손에 끌려 나가는 것만큼 참담한 경기는 없을 거라고.

몸을 일으킨 최수호가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버티지 않고 끌려가 최수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최수호한테서는 언제나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

전력으로 마음을 맡기고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언제든 나를 위해 준비된 안전망이 있는 기분이다.

어디서 떨어지더라도 덜 다칠 수 있다. 추락하는 나를 받아 주는 존재가 있다.

나한테 수호가 그렇다.

내가 수호한테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너한테 뭘 해 줄 수 있을까. 난 옛날부터 열이 널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때 막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촉촉해지던 감성이 한순간에 팍삭 깨졌다.

“미쳤냐.”

“응? 왜?”

어리둥절한 최수호한테 딱밤이라도 먹여 주고 싶은 기분이다. 왜는 무슨 왜.

“죽긴 왜 죽어. 도대체 너는 죽는다는 소리를 왜 그렇게 함부로 해. <햄릿> 같은 거 하더니 입에 붙었냐. 죽고 사는 게 우스워, 어?”

“어차피 사람은 다 죽는 거고 너 없으면 다 의미 없어.”

이게 진짜. 어디서 중학교 2학년처럼 염세적인 대사를 읊고 있어. 차라리 겉멋 들어 아무렇게나 하는 얘기면 좋겠다.

“왜 의미가 없어. 하여간 너는 다른 친구 좀 사귀어야 해.”

“필요 없어. 난 너만 좋아.”

“세상 살면서 어떻게 나만 좋아하냐. 그거 비정상이야.”

“비정상이어도 너만 좋아.”

최수호가 이럴 때면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지 막막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너는 좋은 사람들하고 좀 더 많이 어울려야지. 내가 세상 전부인 것처럼 굴면 안 되지, 최수호.

“야, 네가 다른 사람이랑 친해진다고 우리 둘이 멀어지는 게 아니잖아.”

“…….”

“이왕이면 친구는 많은 게 좋지 않냐?”

옛날에 이런 소릴 해 줬어야 하는 건데. 소풍 때 다 같이 도시락 좀 먹을걸 그랬다. 다른 사람하고 짝꿍 했다고 애 잡지 말고.

“만약에, 열아. 내가 죽어서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하면 그렇게 할 거야. 왜냐면 그 세상엔 네가 있을 테니까.”

“…….”

“하지만 너 말고 온 세상 사람을 다 구할 수 있다고 하면 난 안 그럴 거야. 그건 나한테 아무 의미가 없어.”

최수호는 진지하게 나를 응시했다. 그냥 하는 말이라거나 농담 같은 기미는 조금도 없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최수호를 좋아하느냐, 아니냐를 떠나 그보다 걱정되는 게 있다.

만약 나 때문에 최수호가 고립되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릴 때처럼 고의가 아니라도 그냥 내가 최수호하고 너무 가깝다는 사실 자체가 최수호를 다른 사람한테서 동떨어뜨리고 있는 거라면.

친구, 가족, 애인. 내가 최수호의 모든 게 되면 최수호는 어떻게 되는 거지.

최수호는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게 최수호한테 좋을지 잘 모르겠다.

“최수호. 만약에 내가 내일 죽는다고 하면 어떡할래.”

중학생도 아니고 이런 걸 진지하게 묻고 있다. 대답하는 최수호는 더 진지하다.

“그럼 나도 죽을 거야.”

“그러지 말라고 해도?”

“응.”

대답도 잘한다. 막막해져서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 그러지 좀 마라.”

내가 왜 혹시라도 나 세상 떠나면 얘를 누가 돌봐 주나, 애완동물 기르는 독거노인 같은 고민이나 하고 있어야 하냐고. 미치겠다.

“안 죽으면 되잖아.”

“인생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면 난 벌써 세계 챔피언이다.”

“내가 안 다치게 해 줄게.”

“시끄러워. 너랑 안 사귈란다. 그냥 너 좋다는 다른 좋은 사람 만나라.”

“그러지 마. 나 죽을지도 몰라.”

이래도 죽는다, 저래도 죽는다. 어쩌라는 건데? 짜증을 담아 노려보자 최수호가 웃었다.

“웃냐?”

“열이는 걱정이 너무 많아.”

“누구 덕분인지 잘 생각해 봐라.”

“내가 너만 좋아해서 걱정돼?”

알긴 아네. 즐거워하는 얼굴이라 살짝 열 받는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옛날에 네가 다른 애들하고 도시락 먹고 다니면 나 드러누웠다며.”

“내가 다른 애랑 짝꿍 했을 때 너 운 것도 얘기해 주셨어?”

“날조하지 마라.”

“진짠데.”

“아씨. 아무튼, 내가 옛날에 그러던 거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된 거면 좀…….”

“열아.”

“뭔데.”

“너무 귀여워.”

최수호가 얼굴을 감싸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진지한 사람을 앞에 두고.

“사람이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똑바로 안 듣냐.”

“열이 넌 옛날부터 그랬어.”

“또 뭐가.”

“짝꿍 양보한 것도 너였고, 다른 애들하고 같이 먹으라고 한 것도 너였는데. 하나도 기억 안 나?”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럼 내가 시켜 놓고 내가 울고불고했다는 건가.

“……안 나.”

정말로 기억 안 난다. 엄마가 말해 주기 전까지 내가 최수호 때문에 울면서 난리를 쳤다는 것도 잊었던 걸로 보아 나 편한 것만 기억하는 재주가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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