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최수호
37.
생의 비열함은 탄생 후에는 반드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 있다.
태어나는 건 선택할 수 없다. 어디서 어떻게 날지, 어떤 피가 흐를지, 누구에게서 날지.
그게 생의 부조리함이다. 처음부터 잘못됐다. 환경, 부모, 내가 짓지 않은 이름 등, 누구나 목줄을 차고 태어난다.
‘자꾸 엄마, 엄마 부르지 마. 왜 자꾸만 칭얼거리니?’
처음부터,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어머니는 나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까마득하게 멀었다.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은 어디서 태어나는 걸까.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차마 떨쳐 낼 수도 없는 감정의 무게에 지긋지긋함을 느낄 때면, 차가운 얼굴로 내 손을 뿌리치던 그 여자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원하지 않는 걸 떠맡는 건 고역이다. 간절히 버리고 싶은데 차마 버려지지 않는 참혹.
‘항상 바라는 게 많네. 내가 낳았지만 널 잘 모르겠어.’
유년기를 생각하면 심해가 떠오른다. 깊고 빛이 닿지 않는 자리. 온도는 느껴지지 않고 가끔 물살이 나를 스치고 간다.
나는 닿지도 않을 뒷모습을 향해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물결이 등을 타고 흘러가면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멍청한 위안에 이따금 흐느끼고 싶었고.
‘그만 울어. 뭘 잘못했다는 거니?’
잘못이 뭔지도 모르면서 용서를 빌었다.
‘할 수만 있었으면 나도 안 낳았을 거야.’
태어나는 건 고를 수 없다.
내 잘못은 처음부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스물일곱에 나를 낳았다. 그리고 그게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를 낳은 건 개월 수 탓에 어쩔 수 없던 선택이었으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를 가진 과정이 어머니의 후회일 것이다.
당시에 어머니는 성공한 자식에게 빌붙으려 혈안인 친부모에게 염증을 느끼던 차였다. 이 악물고 달려 이름을 떨친 지 몇 년, 어머니가 번 돈의 반 이상은 가계의 빚을 갚는 데 들어갔다.
어머니는 의지할 수 있는 진짜 가족을 가지고 싶어 했다. 내 친부는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 많은 남자였다. 그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아내의 존재를 숨기고 어머니에게 결혼과 안정된 가정을 약속했다. 어머니는 속아서 나를 가졌다.
이 모든 사실을 나는 평생 이해하려 애쓰며 살았다. 어머니에게는 나를 아끼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사랑받을 권리까지 가지는 건 아니라는 걸.
내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됐다.
‘앞으로 누가 괴롭히면 나한테 말해.’
누군가 처음으로 거리끼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주었던 날에 대해,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너 좋아서.’
처음으로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울지 마.’
그때 왜 그렇게까지 눈물이 났을까. 모든 게 낯설고 거짓말처럼 아득했다.
‘수호야.’
네가 부를 때만 부드럽게 빛나던 이름.
이를테면 수면에 비치는 햇살처럼.
물살은 찬란한 띠를 두른 채 너울거렸고, 나는 편안했다. 네가 어떤 식으로 내 세상을 바꿨는지 넌 모를 테지만.
할 수만 있다면 보여 주고 싶어. 빛이 엉겨 쏟아지던 네 뺨, 항상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눈동자나, 채광이 일곱 개의 색으로 갈라지던 순간.
만일 평생 한순간에만 머물러야 한다면 거기에 있고 싶다. 네가 나를 끌어올렸던 때.
‘나는 너 좋아해.’
열아.
누군가의 이름을 기도처럼 왼다는 게 어떤 건지 그날 밤 알았다. 이불 속에 웅크려 되풀이해 부르다 보면 울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나 여자 친구 생겼어. 좋은 애야.’
왜 나는 욕심이 많을까. 만족을 모른다. 네가 있는 걸로 충분해야 하는데, 잘 안 됐어.
하지만 나는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언젠가 그 여자애 손을 잡고 걸어가는 너를 본 적 있다. 너는 어디 있든 반짝반짝해. 어디에 있든 난 늘 쉽게 너를 찾을 수 있다.
빛나고, 뜨겁고, 내게는 잡히지 않는다.
나는 왜 꼭 이루어지지 않을 일에만 간절해질까.
열아.
* * *
“최수호, 왜 계속 히죽거리냐. 기분 나쁘게.”
기분 좋다. 양용배가 면전에서 이딴 소리를 해도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어제도 열이를 봤는데 오늘도 볼 수 있다. 매니저 형이 아까 열이가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연락했다는 소식을 전해 줬다. 덕택에 휴식 시간이 되자마자 열이한테 문자를 보내고 감미로운 시간을 누리는 중이었다.
옆에서 계속 얼쩡거리는 양용배만 아니었더라도 휴식이 한층 더 쾌적했을 것 같다.
“양용배, 넌 촬영도 없으면서 왜 왔어?”
“있거든?! 한 장면이지만 있다고.”
“한 신이니까 벌써 와서 대기 안 하고 있어도 되잖아.”
“그, 그거는. 물론 나도 바쁘신 몸이지만 오늘은 촬영장 분위기가 어떤가, 촬영은 잘돼 가나 볼 겸. 안 그래도 친구 없는 네가 혼자서 심심하지는 않을까, 이 내가 워낙 타고나기를 선한 탓에 걱정도 되고 하길래…….”
“안 심심한데.”
“어. 최수호, 너 잘났다. 이게 와 줘도 난리야.”
와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얘기하면 더 시끄러워질 테니 커피나 마저 마시기로 했다. 양용배가 열 받은 모습이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지금은 이미 충분히 기분 좋으니 구경거린 됐다.
“오늘 열이 놀러 온대.”
“……설마 그것 때문에 계속 기분 좋았던 거냐?”
왜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번에도 소리 내서 얘기하진 않았지만, 양용배는 이미 내 눈빛만 보고도 질린 얼굴이었다.
“와, 너네는 진짜…….”
“뭐가.”
“그래. 사귀어라, 사귀어. 정열 몸은 괜찮대?”
“크게 다치진 않았댔는데 물어봐야겠다.”
“그래라. 걔 운동하잖아. 이제 안 하던가?”
“해.”
“한대? 계속?”
“어, 할 거야.”
“잘됐네. 되게 열심히 하던데.”
“양용배, 열이 걱정하지 마. 나만 할 거야.”
“애냐?! 그리고 장혁준이라고 몇 번을 말해. 너 내 말 안 듣냐?”
“난 장혁준보다 양용배가 좋아.”
“……그, 그래? 그래, 흠. 정 그러면 네 모자란 감각에 내가 맞춰 주는 수밖에. 특별히 허락한다.”
딱히 허락 안 해도 계속 부르던 대로 부를 예정이었지만. 본인이 허락까지 하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다.
“야, 근데 최수호.”
노는 의자를 끌어와 내 옆에 앉은 양용배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직 휴식이 끝나지 않아서 촬영장 내부는 사람이 드문드문하다.
“너 그 영화 해?”
“영화가 한두 개야?”
“아씨, 척하면 알아들어야 할 거 아냐. 너네 어머니가 제작 참여하신다는 거, 그거. 할 거냐고.”
“…….”
커피를 다 마시는 바람에 빨대를 빨아도 기분 나쁜 소리만 난다. 얼음이 서로 부딪쳐 잘그락거렸다.
“팀장님이랑 부장님이 다 너한테 하자고 했다며. 마케팅 팀장님까지 다녀가셨다며? 매니지먼트 팀은 기영이 형만 보이면 달달 볶는다던데.”
“하고 싶어?”
“뭐?”
“네가 하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 아니야?”
양용배의 눈썹이 서서히 찌그러들었다.
“넌 내가 배역 노려서 너한테 정보라도 얻어 보자고 이러는 거 같냐.”
“아니야?”
“와…… 이 개싸가지, 어쩌면 좋냐. 됐다, 됐어. 넌 걱정을 해 줘도 보람이 없어. 정열 걘 어떻게 너랑 붙어 다니냐.”
“그러게.”
열이는 왜 나랑 계속 있어 주는 걸까. 왜 나를 좋아, 해 주는 걸까. 나도 궁금하다.
“그걸 또 그렇게 대답하면 내가 뭐가 되냐? 정열도 너 좋으니까 같이 다니는 거겠지.”
“그럴까?”
열이도 나를 좋아하려나. 내 반만큼이라도. 아니면 반의반만이라도.
열이 생각을 하면 입가가 느슨해졌다. 미온수에 몸을 담근 것처럼 긴장이 풀린다.
“최수호, 넌 정열이 그렇게 좋냐?”
“응.”
“왜?”
“열이는 다정하고, 착하고, 강하고, 멋있고, 또…….”
“아, 됐어! 그만해.”
자기가 물어봐 놓고. 옛날부터 뭘 원하는지 모를 애다. 나만 보면 소리 지르더니 겹치는 작품만 꾸준히 선택하는 것도 그렇고, 같이 촬영하면 쉬는 시간마다 계속 말 거는 것도 그렇고, 양용배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수호야, 용배하고 같이 있었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매니저 형이 생수병을 들고 돌아왔다. 생수병에 찍힌 립스틱 자국을 보니 본인 생수병은 아니다. 내 것도 아니고.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용, 혁준이, 안녕.”
“용배라고 불러도 된대.”
“내가 언제!”
“아까 허락하겠다며.”
“센스가 누추한 네가 정 그게 좋다면 허락해 주겠다고. 기영이 형은 장혁준이 더 낫다잖아.”
“형, 정말 장혁준이 더 나아?”
“어, 음. 용배는 귀여워서 좋고 혁준이는 멋있어서 좋지.”
용배의 어디가 귀엽고 혁준이의 어디가 멋있다는 거지. 매니저 형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둘이 노는 중이었어? 친구들끼리 촬영하니까 좋다.”
“제가 무슨 최수호랑 논다고.”
“친구?”
“둘이 친구잖아.”
“양용배는 나랑 친구 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던데.”
“야, 그건 10년 전에 한 말이잖아. 열 살 때!”
“그런가. 아무튼 얘랑 나, 친구 아니야.”
정정해 줬더니 매니저 형과 양용배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뚜껑도 없는 생수병만 만지는 매니저 형 옆에서 입술을 뻐끔대던 양용배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래도 나도, 그, 너랑 계에속 붙어 다녔는데 우리도 나름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내가 꼭 너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건 아니고. 옛날에 좀 괴롭혔다고 지금까지 원한을 갖고 있을 정도로 네가 속이 좁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얘긴데.”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뭔 생각?”
“너랑 친구라는 생각. 안 해 봤는데.”
침묵이 더욱더 무거워졌다. 조용히 있던 양용배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셔. 난 화장실이나 간다.”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양용배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화장실 그쪽 아닌데.
“수호야, 용배 울겠다.”
“왜?”
“그게…… 아니야. 그보다 밖에 잠깐 나올래?”
빈 커피 잔을 내려놓고 나는 매니저 형의 손에 들린 생수병을 바라보았다. 구겨진 플라스틱에 담긴 물이 물체를 왜곡한다. 수면이 잔잔하게 떨렸다.
“어디로 가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