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눈이라도 깜빡이면 없어져 버릴까 무서워서 무작정 최수호의 팔을 붙잡았다.
“좋아해, 최수호.”
최수호는 이상하게 당황스러워 보였다. 뭐라고 입술이 움직이는 것 같은데 안 들렸다.
“나도, 너 좋아한다고…….”
온몸이 다 뜨겁다. 목구멍부터 혀까지 모조리 다 활활 타오른다.
나는 최수호가 좋았다. 아마 세상 누구보다 더. 최수호가 정말, 좋았다.
“그러니까, 나는 너하고는 못 사귀어.”
시야가 한 번 더 꺼졌다. 등이 시트 아래로 푹 가라앉는다.
이번에는 꿈도 없는 잠을 잤다.
일어났을 땐 아주 잠깐이 지난 것 같기도 했고 깨어나기까지 까마득히 오래 걸린 것 같기도 했다.
주변 풍경이 낯설다. 그래도 어딘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병원이다.
나 혹시 쓰러졌나. 대충 집까지 갔던 기억은 나는데.
기억을 더듬느라 멍하니 천장만 쳐다봤다. 식은땀으로 젖은 살이 끈적거려서 기분 나쁘다.
침대 옆에는 형의 가방이 놓여 있었다. 형이 옆을 지키고 있었나 싶어 갑자기 기분이 무거워졌다. 가족 중에 병원 가는 사람 느는 거 싫다고 했는데 어째 요즘 형한테 못된 짓만 한다.
형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기다릴 겸 세수라도 하고 올 요량으로 아래 마련된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병실의 다른 침대는 거반 비어 있었고 커튼이 쳐진 곳은 잠잠했다.
병실을 나선 지 얼마 안 돼 형이 눈에 들어왔다.
“관장님이 여긴 왜 오셨어요?”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 끄트머리에는 형과 천 관장님이 서 있었다.
“열이 아픈 게 이제 와서 관장님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말씀드렸잖아요. 열이 찾아오지 마세요.”
형의 말투는 드물게 공격적이다. 형은 늘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연장자한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 듣는다.
놀라서 심장이 쿵쿵, 세차게 울린다. 나는 두 사람에게 보일세라 벽에 등을 대고 몸을 숨겼다. 벽에 닿은 등은 서늘한데 뒷덜미는 무섭게 화끈댔다.
“걱정되니까 왔지. 진아, 너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하냐.”
“평생 안 아프던 애가 갑자기 쓰러질 일이 뭐가 있는데요. 감기도 안 걸리던 애가 갑자기 왜 열이 펄펄 끓냐고요. 펀치드렁크 아니라고 누가 장담해요?”
“의사가 그래? 뇌 문제인 것 같다고?”
“아뇨. 그냥 원인 불명 고열이래요. 근데 모르는 거잖습니까, 관장님. 저도 몰랐잖아요. 언제, 어디서 쌓인 후유증 튀어나올 지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무서운 거잖아요.”
“진이 네 마음 이해는 한다만…….”
“내 동생 나처럼 병신 되면 나 쟤한테 미안해서 못 살아요. 부모님한테 죄송해서 못 살아요, 저. 더 안 삽니다.”
“정진!”
훈련할 때도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는 관장님이 큰 소리를 냈다. 심정을 이해한다. 나도 어느새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 자식, 무슨 그런 말을 해?”
“관장님이 저희 위해서 애써 주신 거 저라고 모르는 거 아닙니다.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죠. 하지만요. 이거 결국 관장님 일 아니잖아요. 관장님은 멀쩡하시잖아요. 관장님도 열이 인생보다 복싱계가 중요하시단 거 아닙니까. 그래서 열이 자꾸 설득하시는 거 아니에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진이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내가 내 이기심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천 관장님의 음성만으로 당혹과 회한을 느낄 수 있다. 형이 크게 심호흡했다. 연거푸 숨을 몰아쉬는 게 힘겹게 들렸다.
“관장님, 저는요. 아직 그런 생각 합니다. 차라리 복싱 시작을 안 했으면 어땠을까. 모르고 살았으면.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시작을 하지 말걸. 그럼 어땠을까…….”
비명을 참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형이 한 차례 숨을 골랐다.
“그럼 적어도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을 텐데…….”
추락할 줄 알았으면 올라가지 말걸.
어차피 지독하게 끝날 거였다면.
좋아하지 말걸.
관장님의 대답은 한참 들리지 않았다.
형도, 더는 말이 없었다.
관장님이 발길을 돌리는 소리가 나고, 형이 애꿎은 벽을 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내내 천장만을 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형이 들어올까 봐 발소리를 죽여 가며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다행히 형은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병실에 들어왔다.
“언제 깼냐.”
침대 옆에 앉으며 형이 물었다. 형도 관장님과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거다.
“아까. 혹시 최수호 병원 왔었어?”
“아니.”
형이 잠시 뜸을 들이며 나를 봤다.
“그건 왜.”
“그냥. 꿈꿨나 봐.”
최수호한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꿈이었나 보다. 잘된 건가.
“나 얼마나 잤어?”
“열여섯 시간 정도.”
“진짜로? 뻥치지 마.”
“의심스러우면 시계 확인해 보든가.”
형이 손목에 찬 시계를 내밀었다. 정말 아침이다. 왜 부모님이 아니라 형이 와 있나 했더니. 열여섯 시간? 무슨 겨울잠이냐.
형이 놀란 게 이해가 간다. 나하고 대판 싸워 놓고 지금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있는 것도 나 아파서 선심 쓰는 중인 게 분명하다. 아니었으면 나한테 진심 어린 사과랑 아버지를 향한 사죄의 편지까지 받아 냈을 건데.
“그래도 열은 다 내려서 다행이네. 간호사 선생님한테 집 가도 되는지 물어볼게.”
“형, 나 복싱 다시 하고 싶어.”
다시 일어서는 형의 등에 대고 말해 버렸다. 형의 등이 고스란히 굳어졌다. 미동도 없던 형의 뒷모습은 곧 딱딱하게 힘이 들어간 목과 시뻘게진 귓불로 격분을 드러냈다. 정면이었으면 표정 볼만했겠다.
“호적 파서 집 나갈 각오 돼 있으면 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다시 하면 난, 너 동생으로 안 칠 거다.”
못까지 거하게 박은 형은 내 퇴원을 챙기러 병실 바깥으로 사라졌다. 약 냄새나는 침대에 나만 남았다.
“최수호 보고 싶네.”
내가 복싱하는 거 반가워해 줄 사람은 이제 최수호밖에 안 남은 것 같은데. 약해지니 어김없이 최수호가 보고 싶다.
바로 떠오르는 건 최수호의 우는 얼굴이었다. 매달리는 최수호를 내가 뿌리쳤다.
수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혹시 이상한 생각 중인 건 아니겠지. 일은 잘하고 있나. 또 잠적이라도 하면 어쩌지. 밥 안 먹고 있는 거 아니야? 열 나는 건? 혹시 내가 잠든 열여섯 시간 동안 최수호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진 않았겠지?
갑자기 불안해서 정신이 깬다. 핸드폰이 어디 있지. 혹시 형이 챙겼나 싶어 형 가방부터 뒤집었다.
가방에서 잡동사니가 굴러 나오면서 내 핸드폰이 이불에 착지했다. 역시 정진. 나이 터울 있는 동생이 물건 잃어버릴까 자기 주머니에 넣던 버릇이 그대로다.
나머지 물건을 다시 가방에 넣다 멈칫했다. 두 번 접힌 사진이 밴드와 관절 테이프, 약통과 물병 사이에 놓여 있었다.
펼쳐 보지 않아도, 뒷면에 형 글씨로 적힌 날짜만으로도 나는 그 사진이 뭔지 알 수 있었다.
형이 처음으로 경기에서 우승했던 날이다. 예 사범님은 필름 카메라로 형을 찍어 주었다. 사진에는 형과 천 관장님이 함께 찍혀 있다.
사진 속의 형을 볼 자신이 없어 빠르게 가방 안으로 물건을 쓸어 넣었다. 최수호한테 전화를 거는 동안에도 괜스레 콧잔등이 시큰했다.
- 여보세요. 열아?
전화에서 최수호 목소리가 나오자 고개가 반듯하게 앞으로 들렸다.
“최수호.”
막상 이름을 부르고 나니 할 말이 없다. 어디냐고 물어볼까? 물으나 마나 집, 일터, 회사, 셋 중 하나다. 그렇다고 나한테 차인 건 괜찮냐고 할 수도 없다.
“부재중 남아 있어서 전화했어.”
변명거리가 없으니 이제는 부재중 핑계까지 댄다.
- 응, 그거. 너희 집에 갔는데 너 없는 것 같길래.
“아, 왜 그랬냐면…….”
- 열아, 생각해 봤는데 네 말대로 할게.
“어?”
- 다른 사람 좋아해 볼게.
내 걱정하고는 전혀 다르게, 최수호는 아주 평온했다.
내 마음 같은 건 신경 안 쓰겠다더니 갑자기 내 말이 다 맞는 것 같다고?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상황에 왜 기분이 이런 걸까. 카운터를 먹은 기분이다.
“그……래. 잘됐네. 잘 생각했어.”
- 응. 걱정하지 마.
“그래……. 나 형 와서 끊어야겠다.”
- 열아, 그럼 우리 계속 친구인 거지?
“……어. 당연하지.”
잘된 거다. 이게 최수호한테 나은 방향이었다.
나 혼자서는 무리다. 최수호가 나한테만 갇혀 있게 하면 안 된다. 최수호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서, 분명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다. 나 말고도 수호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많다.
굳이 오랜 친구에, 같은 남자인 내가 아니어도.
“수호야, 나는 사실은.”
나도 모르게 입을 뗐을 때 핸드폰 너머에서는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끊긴 전화를 다시 연결하려 핸드폰을 봤지만 배터리가 다 돼 전원이 꺼지는 중이다.
“잘됐어.”
까맣게 죽은 액정에 내 얼굴이 비쳤다. 하나도 잘된 것 같지 않은 얼굴이다.
“이걸로 됐어.”
고개를 푹 떨구고 중얼거리자 내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게 들렸다.
“정열, 가자.”
형이 문가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부름에 순응했다.
형을 배신할 수는 없다.
최수호를 지켜 주고 싶다.
그러니 이걸로 됐다.
* * *
아침에 간 체육관에는 지원 누나가 있었다. 아르바이트 삼아 오픈 시간에 도와주기로 했다는 얘기를 형한테 얼핏 들었다.
“열이 너 아팠다며.”
개인 로커를 정리하는 내 옆을 맴돌며 지원 누나는 계속 말을 붙였다. 이럴 때 보면 우리 형보다 지원 누나가 더 형제 같다.
“그냥 갑자기 열나서요. 지금은 괜찮아요.”
“정말? 어디 더 아픈 건 아니지? 괜찮으면 체육관은 왜 그만두는 거야?”
물건을 다 꺼낸 로커를 묵묵히 닦았다. 오늘은 운동이 아니라 짐을 빼려고 왔다.
“이제 재수도 해야 되고, 운동할 시간 없을 것 같아서요.”
“그래도 수능 끝나면 또 할 거지?”
샴푸며 칫솔을 빼내고 핸드 랩에 개인 글러브까지 다 챙기고 나니 가방이 한가득 찼다. 야금야금 가져다 놓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꽤 짐이 많다.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