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혹시라도 흘러나오지 말라고 가방끈을 꽉 여몄다. 요즘은 이런 것만 한다. 짐을 치우고, 눌러 담고, 혹시 새지 않게 꽁꽁 막아 놓는 짓.
“재수가 아니라 관장님 때문에 그만두는 거지?”
질문이 너무 직구로 꽂혀서 가방을 메다 말고 지원 누나를 쳐다봤다. 이 누나는 스파링할 때도 그러더니 빠꾸가 없다.
“돌리지도 않고 물어보시네요.”
“너하고 나 사이에.”
하긴 이래서 지원 누나하고 얘기하는 게 편하다. 입 다물고 사람 환장하게 하는 우리 형보다 훨씬 낫다.
“누나는 너무 좋아하는데도 못 한 적 있어요?”
“너무 좋아하는데 못 해서 화난 적은 있어. 나 원래는 연예인 하고 싶어 했다?”
지원 누나는 가방을 메고 느리게 걷는 나와 발 맞춰 걸었다.
“어릴 땐 오디션도 무진장 보러 다녔어. 춤, 노래, 연기. 다 꽝. 오히려 스트레스 풀려고 다닌 운동이 적성에 맞는 바람에 이것만 10년째다.”
하긴 누나 잘하니까. 처음부터 운동으로 진로를 잡았으면 대성했을지도. 그렇지만 하고 싶은 게 달랐다니 할 말이 없다. 잘해도 마음이 안 가면 별수 있나.
“그래도 미련을 끝내 못 버리겠다 싶어서 고른 게 스턴트 연기. 운동은 취미로 계속했으니까 딱 좋겠다 싶었어.”
차선책. 나는 차선으로 가느니 차라리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생각했었다. 복싱이 내게 중요한 나머지 타협조차 할 수 없다고 여겼지만, 지원 누나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건 내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소중하니까 도저히 전부 포기할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도 끝끝내 완전히 저버릴 수는 없는 심경이 뭔지 나도 알지 않나. 지금까지 복싱 연습을 그만두지도 못했으면서.
“오만떼만 사람이 뜯어말려도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은 별수가 없더라.”
문득 슬퍼졌다.
세상엔 왜 이리 속수무책인 일이 많은가.
땅을 뒤집거나 바다를 갈라 버리겠다는 것도 아닌데, 마음 하나 어쩔 도리가 없다니.
“상처 주기 싫어요.”
으음, 지원 누나가 신음했다.
“그렇지, 형제니까. 이해는 가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 아무도 상처 주지 않겠다고 노력하면서 산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잖아, 인생이란 게.”
늘 유들유들한 지원 누나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내가 모르는 모습들. 지원 누나도 이런 말을 할 때까지 많은 일이 있었겠지.
수호도, 그랬을 거다.
오래도록 나를 좋아하면서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이 고민하고, 외로웠을 거다.
“남의 마음은…… 어쩔 수 없어.”
아는데 잘 안 된다.
아는데도, 내가 그들을 상처 주도록 그대로 둘 수가 없다.
“운동 안 하더라도 놀러 와. 심심하면 누나한테 연락해, 알았지?”
“누나도요. 안녕히 계세요.”
체육관에서 내려오자 건물 입구에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익숙한 뒷모습이다.
“웬일이세요. 사업장 안 돌보시고.”
인사를 건네자 아빠가 멋쩍은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보였다. 자영업자라고 아주 출퇴근이 제멋대로다. 사장님이라 이거지.
“체육관 짐 뺀다길래 도와주러 왔지.”
“집까지 10분인데 뭘 도와줘.”
옮길 것도 세안 도구랑 운동 기구 몇 개가 단데 무슨. 그래도 성의를 봐서 세안 도구가 든 통을 들려 드렸다.
분명 10분 거리인데 집까지 가는 거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원래 말 없는 부자라 조용히 걷는 게 새삼스럽지 않았는데도.
“열아, 복싱 아직 하고 싶니?”
이럴 줄 알았다. 어쩐지 아침부터 체육관 앞에서 폼 잡고 있더라.
안 그래도 병원 다녀와서부터 엄마, 아빠가 안 어울리게 내 눈치 봐서 어색했다. 감기도 안 걸리던 애가 형하고 대판 하더니 앓아누운 걸 보고 복싱 하고 싶어 병이라도 났나, 추측하신 건 아닐까.
그게 아니고 최수호 때문인데요, 아빠. 뭐, 복싱 문제도 없진 않지만.
“하면 형이 내 호적 판대.”
“걔가 호적을 어떻게 파냐. 지 것도 아닌데.”
“나 복싱 다시 하면 내 형 안 해 준대.”
“진이가 그래?”
“아빠 아들이 그러더라. 아빠도 내가 복싱 안 했으면 좋겠으면서, 뭘.”
“그런가. 아빠가 너 복싱 시키기 싫어하나.”
“말을 이상하게 해. 사람 약 올려요?”
분류하자면 우리 엄마, 아빠는 자식 못 이기는 부모에 속한다. 금실 좋고 근면 성실하고 봉사도 틈틈이 하는, 좋은 사람들이다. 부모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그렇다.
초등학생 때 존경하는 사람을 적어 내라고 하면 형은 부모님을 적었다. 형이 으름장을 놔 가며 반대하는 건, 굳이 부모님이 나한테 싫은 소리 안 해도 되도록 본인이 악역을 자처하는 것도 있다. 형 치료받을 때나 재활할 때 부모님이 고생하신 걸 아니까 더 그러는 거다.
나도 알고는 있다. 이런 가족을 둬서 운이 좋다고도 생각한다.
형이 진심으로 날 위해서 반대한다는 걸, 알고는 있는데……. 늘어진 줄 아래서 스포츠백이 힘없이 흔들렸다.
“재수 학원이나 등록하러 가려고. 의외로 공부에도 재능 있을지 누가 알아.”
“그래?”
“아빠, 나 지금까지 이만하면 효자였잖아. 속도 안 썩히고 말도 잘 듣고 이제는 재수도 하고.”
“용돈 필요해?”
“아니. 들어 봐. 뭐 하나만 약속해 주라.”
금방 아파트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최수호네 집이 나온다. 잘은 몰라도 이제는 훨씬 좋은 데로 이사해도 될 형편일 텐데 최수호는 아직 저 집을 고집하고 있다.
“수호 미워하지 마.”
“너 수호랑 싸웠냐?”
“안 싸웠거든. 우리가 애냐. 엄마나 아빠나 뭘 툭하면 싸웠냐고 물어봐.”
“부부는 닮는 거라 그래.”
저 음흉한 미소 재수 없다. 한 쌍의 꾀꼬리들이다.
엄마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고, 아빠는 절연했다. 엄마랑 아빠는 힘든 시기에 만나서 서로 의지하면서 이겨 냈다고 했다.
아빠는 엄마가 있어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사는 게 훨씬 나을 거다.
“수호는 가족이 우리 가족밖에 없잖아. 어머니도 미국에 계셔서 잘 보지도 못하고, 걔는 낯도 가려서 친한 사람도 별로 없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수호는 미워하지 마.”
“…….”
“나랑 수호랑 싸워도 수호 편들어 줘.”
“언제는 수호가 진짜 아들이고 자긴 다리 밑에서 주워 왔냐고 그러더니.”
“그거야 그냥 하는 말이고. 수호 좋아해 줘. 최수호 슬프면 나도 슬퍼.”
“우리가 수호 편들 일이 있나. 너는 맨날 수호 편이면서.”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인마, 수호는 네가 편들어 주는 게 진이랑 우리가 편들어 주는 것보다 백배는 힘날걸. 너랑 싸웠는데 우리가 편들어 준다고 힘이 나겠어?”
그렇게 말하니까 또 할 말이 없네. 그런가? 안 싸우는 게 최곤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아빠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수호랑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재수 기념으로.”
“그게 뭔 기념이야. 최수호 시간 있나 물어볼게.”
촬영은 다 끝났나. 안 그래도 물어봐야지 싶었다.
“열아, 호적은 엄마랑 내 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아빠가 근엄하게 선언했다. 뭔가 싶어 쳐다봐도 아빠는 문만 똑바로 보는 중이다.
“너 효자 맞아. 너는 옛날부터 엄마, 아빠 생각 참 많이 했어. 고맙다. 그래도 평생에 후회가 될 것 같은 일은 하지 마.”
오래 연습한 말을 하는 것처럼 아빠는 여전히 앞만 보며 말했다. 듣는 내가 더 쑥스럽게.
“너랑 진이랑 싸우면 아빠는 네 편이다.”
웃음이 나왔다. 아빠하고 나하고 편먹어도 형은 못 이길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럼 엄마는 형 편이야?”
“그건…… 엄마가 네 편 하고 싶다고 하면 아빠가 진이 편 해야지.”
“뭐냐. 완전 탄력 운영이네.”
“아빠 업장 원래 탄력 운영제야.”
“예, 사장님. 엄마, 아빠 다 진이 형 편 해. 나는 최수호가 내 편 해 줄 거니까 됐어.”
원래는 천 관장님이 주로 형 편이었는데 이제는 못 그러게 됐으니 엄마, 아빠 정도는 넘기기로 했다. 나로는 형한테 잽도 안 되지만 최수호까지 있으면, 뭐, 해 볼 만할 것 같다.
“아빠는 네 곁에 수호가 있어서 참 다행인 것 같아. 안심이 돼. 왜, 너 어릴 때 하도 형만 따라다니고 운동에 빠져서는 친구가 별로 없었잖냐.”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최수호 짝꿍 뺏기고 앓아누운 데 이어 나도 잊고 있던 어린 시절 추억들이 자꾸 튀어나오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나 친구 없었나?
“나 도장에 친구 많았는데?”
“네가 하도 애들 이기고만 다녀서 관장님이 너하고 진이는 윗반으로 올려 보내야겠다고 상담도 하시고, 어린애들 돈 뺏었다고 네 살이나 많은 형들 쥐어박아 놔서 파출소에서 그 집 학부모랑 만나고……. 아파트 단지에 너네 둘 악명이 아주 자자했어.”
그랬나? 듣고 보니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집 부모님들이 우리 집에 와서 따지는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하긴 묘하게 어릴 때 최수호 외의 애들하고 같이 다닌 기억이…… 없나?
“수호하고 같이 다니면서 너도 훨씬 부드러워졌어. 죽어라 이기려고도 안 하고.”
“나 원래 죽어라 이기려고 했었구나.”
“도장에서 지면 잠을 안 잤어요.”
왜 기억이 안 나냐. 생각해 보면 선명히 남아 있는 어릴 적 기억은 모두 최수호, 최수호다. 이기고 진 싸움들보다 수호와 함께 있었던 기억이 훨씬 많다.
“너한테 수호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아빠 얘기가 맞다. 나한테 수호는 지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어깨에 멘 가방이 좀 더 가뿐하게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 * *
최수호 개자식.
“최수호, 너 나 피하냐?”
- 아니야. 아닌데.
“피하는 게 아니면. 촬영 있어서 못 온다고 했다가, 엄마가 이미 네 몫까지 한 잡채라도 가져다준다고 하니까 갑자기 또 있던 촬영이 없어져서 저녁 먹을 거라 괜찮다고 하는 게 무슨 의미야. 오기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