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88)

45.

“왜. 수호 씨 생각은 달라요? 하긴.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지. 이제 스물이던가?”

“감독님은 그만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시는 거겠죠. 운이 좋아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요.”

복싱을 그만둘 거라고 말하던 날의 열이가 떠올랐다. 열이는 울지 않았지만 간절히 그러고 싶은 것 같았다. 그간 받았던 상장을 하나씩 떼어 상자에 넣으면서 열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약한 게 아니에요.”

누구든 그때의 열이를 비난하게 놔둘 수 없다.

“수호 씨, 꼭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대놓고 비아냥이다. 심기가 꼬였다는 걸 감출 의지도 없어 보인다.

“황춘식이 왜 영화판 떴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뭐 듣고 와서 이래?”

“들은 거 없는데요.”

“저기, 수호야. 감독님. 일단 진정들 하시고 식사부터 하시죠.”

“잘 들어, 최수호 씨. 황춘식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도망친 건 그쪽이야. 나는……!”

언성을 높이던 홍 감독님이 아차 싶었는지 어머니 눈치를 살폈다. 안절부절못하는 매니저 형과 다르게 어머니는 초연히 찻잔만 비우고 있다. 꼭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 같다.

“하시던 대화 마저 하세요. 오늘은 아무래도 일 얘기 나누기에 좋은 날이 아닌 것 같네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어머니가 클러치 백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

급히 만류하려는 홍 감독님에게 정중히 인사한 어머니가 방을 나섰다.

“어, 어?”

엉겁결에 남겨진 매니저 형만 방금 어머니가 나간 문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느라 정신없다.

“형이 모셔 왔잖아. 가 봐요.”

“어, 알았어. 감독님, 수호야…… 잘, 잘 들어가세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다른 얘기였던 것 같지만, 어머니를 놓칠까 걱정됐는지 매니저 형은 한꺼번에 말을 쏟아 내고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남은 건 홍 감독님과 나뿐이다.

“하……. 씨발.”

쿵.

식탁에 이마를 찧어 가며 홍 감독님이 욕설을 뇌까렸다.

“하여간 황춘식 그 인간은 끝까지 도움이 안 돼.”

“저도 가 보겠습니다.”

묵례하고 일어섰다. 둘이 남아 영화 얘기를 할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자리를 떴는데 내가 여기 있을 이유는 없다.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홍 감독님을 뒤로하고 미닫이문을 열려는 차, 먼저 바깥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식사 나왔습니다.”

인사와 함께 문지방을 넘은 종업원이 나와 마주 선 채 멈췄다. 들고 있는 나무 소반에는 색색의 반찬과 요리가 올라가 있다.

“계산할 테니까 치워 주세요.”

자리에 앉아 있던 홍 감독님이 손을 내저었다.

“계산은 이미 나가신 분이 하셨는데요.”

어머니는 이미 나가면서 이 자리의 마무리를 본인 손으로 마친 모양이었다. 홍 감독님이 자그맣게 신음했다. 어머니 방식의 조용한 면박이나 다름없다.

“식사 필요 없으신 건가요?”

“아뇨. 먹겠습니다, 그냥. 이제는 하다하다 배가 고프네.”

홍 감독님의 말을 들으니 갓 나온 식사가 버려질 일은 없을 듯했다. 사 주고 갔다는데 내다 버리기도 어려운 노릇이겠지. 상을 차려 주고 나가는 종업원 뒤를 따라가려는데 홍 감독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수호 씨, 어디 가요.”

“전 배 안 고파서요. 감독님 드세요.”

“이봐요, 최수호 씨. 소문만큼 싹수가 없네.”

“네. 안녕히 계세요.”

“앉읍시다.”

싫은데요.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내 생각이 들린 것처럼 홍 감독님이 인상을 구겼다.

“황춘식 얘기를 꺼냈으면 마무리는 지어야 할 거 아닙니까.”

“딱히 마무리 지으려고 꺼낸 얘기 아닌데요. 아시냐고 물어보기만 했는데 감독님이 계속 얘기하신 거고요.”

노골적으로 어이가 없다는 눈총을 보내면서 홍 감독님이 수저를 들었다. 곧잘 봤던 표정이다. 해석하자면 이 자식은 뭐지, 정도.

“그 인간, 진짜 영화 다시 찍는대요?”

이번에도 문을 나서기 직전에 홍 감독님의 질문이 나를 잡아 세웠다. 말 많은 게 황 감독님하고 닮았다.

“네.”

“사람 속을 뒤집어 놓더니 이제 와서……. 황춘식이 내 욕해요?”

“아니라고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그럼?”

밥술을 뜨면서도 대화를 멈출 생각은 없어 보이는 걸 보니 저쪽도 내가 가려고 하거나 말거나 본인 목적에만 충실하기로 했나 보다. 이쯤 얘기했으면 나도 뭐라고 하든 무시하고 두고 가도 되나?

“뭐라고 해요? 내 얘기를 하긴 합디까?”

이번엔 무슨 말을 하든 나가려고 했는데.

묻는 말투에 서린 머뭇거림이 기어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중요한 얘기를 할 때만 저토록 뜸을 들인다는 걸 알았다. 답을 듣는 게 걱정될 정도로 중요한 문제에서나 망설이게 되는 거다.

“홍 감독님이 구해 주셨다고요.”

게다가, 황 감독님의 얘기가 마음에 걸렸다.

나도 열이가 구해 줬었으니까, 누가 자길 구해 줬다고 말하는 사람의 심정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홍 감독님이 밥을 뜨던 숟가락을 놓았다.

“개새끼……. 미련 곰탱이 같은 게.”

주먹 쥔 손을 이마에 비비며 홍 감독님이 혼잣말했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역시 조금쯤은 궁금하다.

“홍 감독님이 카메라 주워 주셨어요?”

“뭐?”

고개를 번쩍 든 홍 감독님이 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황 감독님 카메라 주워 주신 적 있나 싶어서요.”

“내 얘기 안 했다며?”

“안 했어요.”

“근데 그걸 최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

“…….”

“왜 말을 안 해요.”

“말하기 귀찮아서요.”

“허.”

홍 감독님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세게 헛숨을 터뜨렸다. 남의 시나리오 얘기 구구절절하게 해도 되는지도 모르겠고, 귀찮기도 귀찮다.

“저 이제 가 봐도 될까요?”

“최수호 씨, 나랑 이 영화 찍고 싶은 건 맞아요? 아무리 성격이 원래 그래도 그렇지, 감독을 막 그냥.”

“감독님은 저하고 찍고 싶으세요?”

“찍고 싶으니까 여기 나와서 앉아 있는 거 아닙니까. 나 여기 최수호 씨 보러 온 건데요.”

지금 홍 감독님의 표정은 어디까지 개기고 뻗댈 거냐는 물음 같다.

갓 스물 된 배우가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는 감독한테 이러는 게 감독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법도 하다.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출연 여부가 불확실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시나리오 읽어 봤어요. 저 말고 다른 배우 생각하셨을 것 같던데요.”

딱히 나하고 잘 들어맞을 역은 아니었다. 조정하기 나름이고 이미지 변신이란 수식으로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첫 청사진에 내가 들어 있진 않았을 것 같다는 거다.

“감독님도 어머니 때문에 저랑 작업하시는 거잖아요.”

“어쨌든 내가 이견 없이 수호 씨로 낙점한 건 맞잖아요.”

“알아요. 저도 어머니 때문에 하는 거니까 저나 감독님이나 입장은 비슷하다고요.”

“탐탁잖은데 선생님이 추천하셔서 하는 거다?”

“탐탁잖은데 어머니가 제 이름 밀어붙이셔서 수긍하신 거 맞죠?”

홍 감독님이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안 지네? 촬영장에서도 이래요?”

“아뇨. 촬영은 그냥 열심히 하는데요.”

“고생길 펼쳐진 게 벌써 눈에 보이네.”

고생을 누가 한다는 건지. 애초에 이게 지고, 이기는 싸움인지.

물어보려다 말하기도 다 귀찮아져서 말았다. 홍 감독님은 나를 유심하게 쳐다보면서 손짓했다.

“앉죠? 어차피 본 요리 또 들어올 건데.”

“이제 가려고 했는데요.”

마치 홍 감독님의 말이 예고편이었던 것처럼 종업원이 펄펄 끓는 냄비를 들고 들어왔다. 또 나가려다 말고 어정쩡하게 벽에 붙어서야 했다.

“와서 앉아요. 차선책으로 서로 선택한 사람끼리라도 첫 만남인데, 밥 정도는 같이 먹읍시다.”

“배가 안 고파서.”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감독인데 혼자 먹고 가게 두면 윤서화 선생님도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을까?”

슬슬 물고 늘어지는 걸 보니 알겠다.

이 사람, 성격 나쁘구나.

그간 만나 온 업계인들을 떠올렸을 때, 뒤끝이 끝도 없이 길 것 같은 타입이다. 실제로 엇비슷한 소문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홍희백 감독이 쪼잔하다는 얘기.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자 가운데 놓인 탕에서 매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제 나왔는지 병에 든 청주가 탕 옆에 놓여 있었다.

“술 할 줄 알아요?”

홍 감독님이 조그만 사기잔을 들어 올렸다.

* * *

“솔직히 인정해. 그 작품에서 그런 연기는 미스였어요.”

“디렉팅이었는데요.”

“말이 돼? 고난에도 꿋꿋한 소년이 아니라 사이코패스 같았다니까.”

“카메라 감독님은 맨날 눈빛 좋다고 하셨는데요. 그리고 디렉팅 따라가야죠. 영화는 특히 큰 그림 맞추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카감이야, 수호 씨 얼굴 잡히면 무조건 그림 나와서 좋나 보지. 가까이서 보니까 잘생기긴 잘생겼다. 우리 시상식 때 옆 테이블에서 보고 따로는 본 적 없잖아요. 맞나?”

“기억 안 나요. 원래 감독님 작품 별로 안 좋아해서.”

“뭐? 왜.”

“캐릭터를 소비해서 별로예요.”

“왜 소비라고 생각하지? 아니, 왜. 많이 죽어서?”

“아뇨. 소모적으로 쓰는 게 싫다고요. 도구적으로만 써서.”

“당연하지? 영화의 모든 요소는 영화를 위한 도구예요. 영상으로 만든 이야기를 위한 도구.”

뜻밖에, 홍 감독님과 나는 끊이지 않고 얘기 중이었다. 내 옛날 연기부터 영화 얘기까지. 홍 감독님은 거침없이 얘기했지만 내가 얘기할 때는 말을 멈추고 들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인물이 만들어 나가는 거니까요. 절제가 홍 감독님 영화 최대 미학인 건 알겠는데 저하고는 안 맞아요.”

“흐음.”

술은 야금야금 줄어들었다. 마시는 건 다 홍 감독님이다. 주량이 많지는 않은지 안면에 벌써 불콰한 술기운이 돌았다. 반면 마시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취하면 난 집에 갈까. 두고 갔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나는 이 사람 집도 모르고 데려가라고 부를 만한 주변 사람도 모르는데.

꼴깍꼴깍 청주를 삼키느라 바쁜 목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와중에 잔을 도로 내려놓은 홍 감독님이 술 냄새 어린 숨을 토했다.

“그래도 다행이네.”

“갑자기 뭐가요.”

0